금요관
– 추락(墜落)
사내는 거지였다.
명색이 걸식자인 관계로 꼬락서니는 추레했지만 이래뵈도 구파일방의 하나인 개방의 용두방주 ‘걸협 우겸’의 직전 제자였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아주 성질 사나운 대사형을 한 명 모시고 있었다. 다른 건 다 좋은데 그것만큼은 마음에 들지 않는 그였다.
그 거지, 노학은 거친 지면 위를 기어가고 있었다. 지금 그가 기어가고 있는 지면은 특이하게도 흙이라고는 먼지 부스러기밖에 찾아볼 수 없는 거대한 암괴의 들판 이었다. 여기저기에 돌부리가 튀어나와 있거나 금이 가 있는 등 무척이나 울퉁불퉁해, 평탄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노학은 있는 힘껏 암반 위를 기어갔다. 지면을 기어가는 그의 얼굴에는 방심을 용납지 않는 신중함이 넘쳤고, 진중함이 깃든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있었다.
땅바닥 하나 기어가는 데 이렇게까지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어리둥절할 정도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주의 깊었고 평소의 가벼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퍼석!
“응?”
노학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신중하게 짚었던 돌부리가 파삭’ 하는 단말마를 지르며 그의 오른손 아귀 안에서 먼지가 되어 바스러졌던 것이다.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있을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분명 앞사람이 이 돌부리를 짚는 것을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이냐고 앞에 가던 사람을 붙잡고 물어볼 여가는 그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퍼석!
이번에는 왼발로 힘 있게 딛고 있던 돌부리가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어어어?”
‘어라, 이게 뭔 놈의 잡일이여!’
찰나의 순간 동안 반짝였던 사고의 단편 속에서도 그는 지금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인식하지 못했다. 그것은 거짓말 같은 일이라 현실성이 없었다. “어이, 이… 이봐, 지(地)가(家)야!”
지면이 점점 더 자신하고 멀어지고 있었다. 아니, 멀어지고 있는 쪽은 자신이었다. 땅이 인력을 잃어버리기라도 한 듯 그의 몸이 바닥으로부터 붕 뜨고 있었다. 분 명 자신은 능공허도나 허공답보, 공중부양 같은 오묘한 재주를 배운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자력(自力)에 의해 자발(發)적으로 체험하고 있는 현상이 아닌 게 명백했다. 타력에 의해 자의(自意)를 거슬러 체험되고 있는 것이었다. 이것은 불가항력적인 일이었다.
그가 고개를 들어 힐끔 앞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거기에 시리도록 푸른 하늘이 있었다. 이번에는 힐끔 시선을 아래로 깔았다. 까마득한 저 뒤편으로 지면이 보였 다.
그제야 노학은 자신이 지금 있는 장소가 어떤 곳인지 기억을 되살려냈다.
‘아, 그렇지!’
기억이 났다. 자신은 기어가는 중이 아니라 올라가는 도중이었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이것은 바닥이 아니라 벽이었다. 그것도 기러기도 한 번에 넘지 못할 만큼 높은 깎아지른 듯한 단애(斷崖). 그것이 지금까지 그가 기어가고 있던 곳의 정체였다.
그렇다면 그곳에서 떨어진 자신의 현재 상황은? 그리고 앞으로 그가 겪어야만 하는 일은?
아마도 그것은 그가 태어나서 처음 겪는 일일 것이며, 또한 마지막으로 겪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예상하건대 그의 수명을 50년 정도는 가뿐하게 앞 당길 정도로 매우 충격적이고 자극적인 일이 분명할 터였다.
이 절망의 끝자락에서도 노학은 포기하지 않았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 이럴 때를 대비해 모두들 허리에 생명줄을 묶어놨던 터였다.
그의 눈앞에 줄 하나가 어른거렸다. 아홉 명의 생명을 하나로 묶어놓은 바로 그 줄이었다. 이 절벽을 9인이 함께 오르는 것이 바로 ‘금요관(金曜關)’의 내용이었 다.
“명심하십시오. 이 줄을 절대 자르면 안 됩니다. 이 줄이 여러분들의 생명을 지켜주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이 생명선이 끊어지는 즉시 그 조 는 자동으로 탈락 처리됩니다. 그러니 부디 명심하시길!”
‘그래, 이 줄만 있으면…….’
그러나 그 마지막 희망의 끝은 어찌된 일인지 보란 듯이 매끄럽게 잘라져 있었다.
‘빌어먹을!’
한순간에 벌어진 일임에도 그에게는 시간이 제 속도를 어기고 늦장을 부리기라도 하는지 모든 일이 느릿느릿하게 느껴졌다.
그는 천천히(순전히 자신의 감각에서만) 시선을 들어 바로 앞 사람, 아니 윗사람을 바라보았다.
“저 녀석은 분명…….’
네 번째였든가 다섯 번째였든가……. 분명히 낫을 쓰는 놈이었다. 사슬 달린.
얼굴도 무척 재수없게 생긴 놈이었다. 입도 시궁창처럼 험할 게 분명했다. 그리고 지금 그 자의 손에는 그 얼굴만큼이나, 아니 조금 더 많이 재수없는 단도 하나가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마천칠걸……!’
욕과 저주를 한데 묶어 냅다 퍼부어주려 했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저놈이 일곱 중 몇 번째인지 파악할 시간조차 부족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것은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젠장,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 낯짝이었어!’
그리고 노학은 보았다.
그자의 위에서 겨울의 눈보라처럼 차가운 눈동자가 무심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잃어버린 시간의 속도가 점점 더 본래의 빠르기로 돌아오고 있었다.
훗날 ‘중력’이라 불리게 될 사신의 힘이 그의 몸을 잡고 힘껏 아래로 잡아당겼다. 물귀신도 울고갈 만한 악력이었다.
“으아아아아아악!”
그리고 엄청난 상실감을 느끼며 그의 몸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빈대떡이 되는 순간을 맨 정신으로 경험하고 싶지는 않은지 정신이 아득해졌다. 바닥과의 뜨거운 입맞춤으로 피떡이 되기 전에 정신을 잃을 수 있으면 운 이 좋다고 말할 수 있었다.
“어? 저건?”
비류연은 지금 저 위에서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떨어지고 있는 물건이 무엇인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종종 보던 것이다. 저걸 이용해 여러가지 잔일들을 처리한 적도 있었다. 때때로 반항적이기도 했지만 나름의 쓸모라는 것도 있었다. 현재도 뭔가 맡겨놓은 일이 있었다. ‘노학!’
“저 녀석… 왜 저기서 떨어져?”라고 투덜거릴 틈도 없었다.
비류연의 행동은 재빨랐다. 없는 것보다는 확실히 편했기 때문에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선택의 기로에서 방황하다가 결국 후회만 하는 그런 유형의 인간이 아니 었다.
생명줄, 이 관문의 규칙상 줄이 끊어지면 실격이다. 아무리 이런 쪽에 무신경해 보이는 그였지만 필요한 건 모두 숙지하고 있었다. 실격하면 최하의 점수밖에는 받 지 못한다. 그것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비류연은 망설임 없이 줄을 끊었다.
“류연!”
나예린이 그 모습을 보고 경악하며 외쳤다. 그러나 이미 생명줄은 잘려나간 이후였다. 그리고 그녀는 더욱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다.
비뢰문(飛雷門) 독문운신보법(獨門運身步法)
봉황무(鳳凰舞) 오의(奧義)
직지질주(直地疾走)
비류연은 절벽을 타고 우측 하단 방향으로 마치 평지처럼 달려가기 시작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과감하게. 그 모습이 마치 쏘아진 화살처럼 빨라 보는 이의 감 탄을 자아냈다. 엄청난 규모로 펼쳐진 비담주벽’의 수법이었다(직지(地) 란 직각으로 곧게 서 있는 땅’을 의미했다).
그의 쾌속한 전진 아래에서 절벽은 확실히 그 의미를 철저히 무시당하고 있었다.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날카롭게 빛나는 그의 눈은 추락하는 노학의 몸에서 결코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9장… 8장… 7장… 6장… 5장… 4장… 3장…
3장… 3장… 3장…….
대지의 손이 끌어당기는 속도가 너무 빨라 더 이상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이것이 그가 발휘할 수 있는 속도는 아니었지만 이 이상 속도를 내면 안정상에 문제가 있었다. 여기는 맨땅이 아니라 깎아지른 절벽이었다. 하지만 이대로는 그냥 두 눈 멀뚱히 뜬 채 노학이 지면과 격렬하게 입맞춤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고작 제자 가 피떡이 되는 걸 보려고 이런 미친 짓을 벌인 것은 아니었다.
“류연!”
저 위에서 나예린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와 비슷한 일이 전에도 있었던 듯해 아련한 그리움마저 느껴졌다. 이런 절박한 순간에 잘도 그런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하지만 왠지 그녀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멀게만 느껴졌다.
<『비뢰도』 16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