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계약
-편지-
덜컹! 쾅!
방문 손잡이를 비틀어 짜기라도 할 듯 거칠게 문을 열고 숙소로 돌아왔을 때까지도
그의 심신을 뱀처럼 휘감고 있는 분노와 울분은 가시지 않고 있었다.
위지천의 눈은 귀신처럼 핏발이 서 있었고, 분을 이기지 못한 심장은 미친 듯이 격렬하게 날뛰고 있었으며, 관자놀이에 돋은 푸른 핏줄은 당장에라도 이마를 뚫고 뛰쳐 나올 듯 거세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한때 삼절검 청흔, 지룡 백무영과 함께 천무학관 최고의 기재 중 한 명으로 손꼽혔던 모습은 지금 온데간데없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와장창창창!
요란한 소리와 함께 책상이 뒤집혔다. 난폭하게 자행되는 폭력 앞에 책상 위의 기물들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속수무책으로 부서져 나갔다.
“으아아아아아아아!”
하지만 그것도 성에 차지 않은지 그는 방안을 장식하고 있던 유일한 자기 화병마저 바닥에 내팽개쳤다. 이곳에서 일부러 신경써서 장식해준 기물이었지만 그딴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다시 한 번 요란한 파괴음이 방 안에 울려 퍼지며 도자기 파편과 물방울, 꽃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그는 흩어진 꽃이 눈에 띄자 앞뒤 재지 않고 마구 짓밟아 으깨버 렸다.
“허억허억허억!”
수분 동안 그렇게 날뛰었건만 흥분은 가라앉기는커녕 점점 더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만 갔다. 광인이 두들기는 북소리처럼 심장이 격렬하게 날뛰고 있었다. 귀신처럼 눈에 핏발이 서고 정신은 아득해졌다.
피를 보지 않고서는 그 흥분을 가라앉힐 다른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지쳐버린 심신의 저 깊은 곳으로부터 한 충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충동은 순식간에 그의 심령을 장악하고 지배하는 데 성공했다. 저항은 없었다. 그는 그 충동이 어떤 성질의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 충동을 느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그것은 그 에게 친구처럼 매우 친근한 것이었다. 예전 것들과 비교해볼 때 이번 충동은 그 질과 농도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이제 어떻게 되 든 상관없었다.
혼돈 속으로 떨어진 그의 정신은 분노로 인해 이성이 마비되어 있었다.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제어해야 할 어떤 당위성도 그는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혼 란스러웠다. 오직 피를 보고 싶다는 충동적 욕구뿐이었다. 때문에 그것을 발견할 때까지는 조금 시간이 흘러야만 했다. 경첩이 떨어져 나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 로 거칠게 방문을 닫은 이후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는 자신의 방에 발생한 이변을 눈치챌 수 있었다. 이변을 조장하고 있는 것은 탁자 위에 놓여 있는 한 장 의 쪽지였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늘고 긴 침에 고정되어 있는 그 쪽지를 발견했을 때 그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자시말서쪽 숲 범바위
그 외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러나 위지천이 놀란 것은 이 지나치게 간단한 전언의 내용 때문이 아니었다. 그를 놀라게 한 것은 그것을 고정하고 있는 가늘고 긴 침 때문이었다. 그것이 매우 희귀하고 위험한 모종의 물건임에도 그는 그것이 어떤 물건인지 잘 알고 있었다.
현 강호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물건… 하지만 그렇다고 위지천이 그 희귀성에 놀란 것은 아니었다. 이 침만으로는 부족했다. 이것은 어떤 작은 은색 빛깔의 원통형 기구 안에 들어가는 순간 최상의 힘을 발휘한다. 그 위력의 무시무시함과 지나친 위험성 때문에 ‘강호칠대금용암기’로 분류되어 있는 사천당가의 ‘벽력신통 (霹靂神筒)’과도 맞먹을 정도의 위력을 가진 위험천만한 물건. 이런 것은 사용은커녕 소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강호의 공적(公賊)으로 몰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희소성과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행(幸)인지 불행인지 그는 그것을 써본 적이 있었다. 또 다른 금지 품목인 염마뢰(炎魔)와 함께 그 은빛 침은 바로 ‘비황신침(飛凰神針)’ 안에 들어 있던 수천 개의 침 중 하나였다. 그는 태어나서 딱 한 번 그것을 써본 적이 있었다.
‘설마 그자가?”
위지천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이 들고 있는 쪽지를 보고 또 보았다.
목이 타는 듯이 뜨거웠다.
자시 말 서쪽 숲 범바위.
그 바위는 마치 포효하는 호랑이처럼 생겼다 해서 맹호석(猛虎石)이라고도 불리고 있었다.
“좋은 밤입니다, 위지 공자. 오랜만에 뵙는군요.”
위지천의 도착과 동시에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남자는 얼굴에 복면을 쓰고 있었지만 위지천은 한눈에 그자가 전에 자신에게 ‘그것들’을 주었던 바로 그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다. 바뀐 것은 이상할 정도로 나긋나긋해진 목소리뿐이었다. 목소리만 들었더라면 과거의 그 인물과 동일 인물인지 알아볼 수 없 었을 것이다. 일부러 만날 때마다 다른 상(象)을 심어주어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복면인이 웃으며 쾌활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절 알아보시다니 무척 기쁩니다, 위지 공자! 잊지 않으셨군요……. 아, 감격입니다. 저 같은 무명의 복면인을 기억해주시다니..
그는 정말 말이 많아져 있었다. 예전의 근엄한 모습과 지금의 가벼운 모습 중 어느 쪽이 진짜 모습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어떻게 여기에? 이곳은 아무나 함부로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닐 텐데?”
“소원을 이루어주는 요정(妖精)이 가지 못할 곳은 어디에도 없지요. 전 타인의 꿈을 이루어주는 일이라면 어디든 간답니다. 남들의 소원 성취야말로 저의 참된 기 쁨이지요.”
자신이 천명이라도 받들어 수행하는 듯한 과장된 동작과 목소리였다.
“소원? 나한테 하는 말인가?”
“물론이지요. 흥미로울 만한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이야기?”
“예, 그것은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관심 없네!”
그는 어떤 한 여자에게는 아주 관심이 많았지만, 남자에 대한 관심은 그다지 없었다. 그쪽 취향이 아니었다. 그가 관심을 가지고 심취해 있는 것은 ‘나예린’이란 이 름을 지닌 여신뿐이었다.
“오우, 아닙니다. 이번 이야기에는 꼭 관심이 동하실 겁니다. 제가 보증하지요.”
복면인은 호들갑을 떨며 위지천을 설득했다. 마지못해 그가 물었다.
“그래, 누구에 관한 이야기인가?”
처음에는 그냥 듣고 무시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복면인의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주술(呪術)에 걸린 사람처럼 자신의 결심을 실행에 옮길 수가 없었다. “들어보셨겠죠? 비류연이라는 남자의 이름을?”
복면인이 요사스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 이름이 귀에 꽂히는 순간, 위지천은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부르르 떨었다. 잠시 억눌러놓았던 질투의 불꽃이 심장 속에서 또다시 활활 타올랐다. 그런 그의 심리 상태는 금세 얼굴 위로 드러났다. 복면인은 내심 미소를 지었다. 그것이야말로 자신이 의도적으로 유도하려던 그 상태였던 것이다.
“힘을 원하십니까?”
조용하게 가라앉은 심원한 목소리로 복면인이 물었다.
위지천은 한 번 악마와 계약을 맺은 적이 있었다. 이 계약의 치명적인 단점은 한 번 계약을 하게 되면 계속해서 끌려가게 된다는 것이다. 한순간의 회피를 위해 사 채업자에게 돈을 빌리는 채무자처럼.. 한 번 발목을 잡은 마수는 절대로 그 손을 놓아주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 또다시 그 악마의 손이 자신을 향해 내밀어 지고 있었다. 그는 솔직히 이 유혹에 황홀할 정도로 매력을 느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힘… 방법이 있다는 건가?”
“물론이지요. 좀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타인의 소원을 이루어주는 것이야말로 저의 사명이지요! 질투에 불타는 복수심… 아아, 정말 멋집니다. 뽕갈 정도로 멋져
요!”
몸을 비비 꼬며 복면인이 외쳤다.
“질투라고? 내가 지금 그런 하찮은 감정에 휩싸여 있다는 건가?”
위지천의 관자놀이에서 푸른 핏줄이 꿈틀거렸다. 그는 자신이 그런 하찮은 감정에 휩싸여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는 정의여야 했다. 비류연은 자 신의 여신을 해치려는 악이었고, 자신은 그 악을, 벌레를, 오물을 퇴치하는 정의의 사자였다. 정의는 자신의 손아귀에 있어야 했다. 결코 사사로운 질투심에 의해서 이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렇게 무의식중에 자기 정당화를 시키는 것은 정의와 신을 팔아먹는 많은 위정자와도 비슷한 유형의 행동 양식이라 할 수 있었다.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게 중요하죠. 전 그런 열정을 아주 좋아해요. 뜨겁고 격렬하죠. 모든 것을 태워버릴 정도로. 자기 자신까지 말입니다.”
왠지 비야냥거리는 투라서 신경에 몹시 거슬렸다. 하지만 위지천은 더 이상 말싸움을 해봤자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어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는 이미 남의 정 확한 판단을 무시하는 법도 배우고 있었다. 그의 추종자들 – 특히 빙봉영화수호대의 대원들이 지껄이는 미사여구만을 선별적으로 받아들이는 방법을 그는 이미 체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방법은?”
위지천이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에… 그러니깐…….”
복면인은 얼른 품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어? 어디갔지? 이상하네?”
한참을 뒤져도 그게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설마 잃어버린 건 아니겠지?”
“아, 아닙니다. 설마 그럴 리가요……. 분명히 여기 어딘가에 넣어두었는데… 진짜 어디에다 떨어뜨렸나……. 아! 여기 있군요! 여기 있어요!”
복면인은 마침내 바지춤에서 뭔가를 하나 꺼내더니 그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승리의 열쇠는 바로 이것!”
저잣거리의 약장수처럼 호들갑스럽게 그가 외쳤다.
“고순도 농축 특제 기폭환(氣爆丸)! 이름하여 혈폭환(血爆丸)!”
그것은 붉은 한지에 쌓인 피처럼 붉은 한 개의 환약이었다.
“이게 뭐냐?”
“말 그대로 특수하게 제작된 기폭환이죠. 체내의 기를 일순간에 일시적으로 증폭시켜주는 비약 중의 비약입니다.”
복면인이 상세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보통 일반 시중, 아니 무림맹에서도 이와 비슷한 걸 사용하는데, 이녀석에 비하면 그런 건 어린애 장난이죠. 효과가 정말 끄~읕~내줍니다. 무려 통상 약효의 다섯 배! 그 효과는 제가 보증하죠. 효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반품하셔도 됩니다.”
위지천이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반품? 어디다 무엇을 반품하란 말인가? 배를 가르고 위 속의 것을 끄집어내기라도 하란 말인가?”
질 나쁜 장난에 대해 농담처럼 대꾸한 것이었지만, 상대의 반응이 그때까지와는 달랐다. 까불거리던 기운이 사라지고 스산한 한기가 퍼져 나왔다.
“물론이죠. 배를 가를 각오! 물 건너 섬나라 지방에서는 할복이라고 한다던가요? 그쪽 할복은 정식으로 하면 열 십자(十)를 긋는 거랍니다. 횡(橫)으로 한 번, 종 (縱)으로 한 번. 제대로 가르면 새빨간 내장이 주르륵 흘러나와 장관이라던가요? 그 정도 각오도 없이 어찌 꿈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위지 공자?” 위지천은 순간 섬뜩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순간적으로 드러났다 사라졌지만 조금 전 기세는 그가 예전에 봤던 그 위압적인 모습 그대로였다. 상대는 목숨을 걸라 고 요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눈이 뒤집힌 위지천에게는 그런 위험을 감수할 용의가 있었다.
“다만 각오는 하셔야 할 겁니다. 그걸 다 먹으면 그 후유증이 만만치 않을 겁니다. 무척 고통스러울 거라는 것을 미리 알려드립죠. 나중에 설명이 부족했다고 원망 을 듣고 싶지는 않으니깐요. 저는 선량한 요정이거든요.”
‘악마겠지!’라고 위지천은 생각했다.
“이제 와서 물러서지는 않으시겠죠?”
“물론!”
그는 이제 악마에게 영혼을 팔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처음이 어렵지 진흙탕도 한 발 내딛기만 하면 두 번째는 무척이나 수월하다는 사실을 그는 이미 깨닫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이건 어떻게 써야 하는가?”
“아, 성급도 하셔라. 내일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겁니다.”
복면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이게 내일 치러야 할 관문의 성격과 관계가 있다는 이야기인가?”
“물론이죠.”
“그렇다는 것은 내일 치러질 관문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도 알고 있다는 뜻이겠군?”
자신들도 아직 모르고 있는 사실은 저자가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저자의 정체가 도대체 무엇이길래?
“좀 주워들은 게 있어서요.”
그런 빈말을 믿을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그렇게 보안이 허술하다고는 생각지 않는데?”
“너무 깊은 호기심은 가지지 않는 게 좋습니다, 위지 공자. 그저 뜻이 맞고, 공자의 뜻을 저희가 높이 사기 때문에 그저 도움을 드리고 싶은 것이니깐요. 전 당신의 편입니다.”
“일단 그렇다고 해두지.”
방심하면 당장 잡아먹을 녀석들이 말은 잘하는군! 위지천은 냉소했지만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아직 그들은 같은 목적에 의해 손을 잡고 있는 것이었다. 목적을 이루기 전에 손을 놓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럼 무운을 빌겠습니다, 위지 공자! 비원을 성취하시길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이 정도 준비를 갖추고도 두 번씩이나 실패하는 무능력자일 거라고는 생각하고 싶 지 않으니깐요. 그럼!”
혀에 바늘이 돋쳐 있는 것 같은 말을 내뱉으며 그는 어둠 속에 녹아들 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
혼자 남겨진 위지천은 자신의 손바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조금 전 있었던 일은 역시 꿈이 아니었다. 손바닥 위의 붉은 환약이 그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좋아! 이렇게까지 멍석을 깔아준다면 그 위에서 춤을 춰주지! 그렇게해서 목적만 달성할 수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어! 그녀석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녀에게 평 화는 오지 않아. 그녀석은 악이야! 제거해야 마땅해. 난 그녀를 위해 지금 그 일을 하고자 하는 거야! 이 세상에서 나보다 더 그녀를 위하는 사람이 존재할 리 없으니 깐. 나의 고귀한 희생으로 그녀는 구원받을 거야!”
위지천은 초점이 흐트러진 눈을 한 채 미친놈처럼 중얼거리며 주먹을 꼭 쥐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