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승의 행방
중토관 시험이 끝난 지도 벌써 삼 일이 흘렀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침은 밝았고, 비도 언제나처럼 눈을 떴다.
하지만 대공자 비의 눈에는 오늘 뜨는 태양이 어제와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내일이면 더 새롭게 보이리라. 왜냐하면 오늘은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구시대의 마지막을 위해 뜨는 태양과 새 시대의 시작을 알리기 위해 뜨는 태양이 같을 수는 없었다.
대공자는 거울처럼 자신의 무정한 눈을 비추고 있는 구리 대야에 파문을 일으켜 흐트러뜨렸다.
그는 거울을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거울은 언제나 현재의 모습만을 비춘다. 특별한 무력(巫力)이 없는 이상 그것을 통해 미래를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 고 현재의 상은 항상 과거를 반추하게 만든다.
현재와 과거, 그는 이 두 가지를 비교하고 싶지 않았다. 때때로 과거와 현재의 현격한 차이를 인식한다는 것은 그다지 썩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거울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이 물의 머무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형성된 것이라고 해도.
찰팍찰팍.
손을 씻었다. 세 발짝 떨어진 곳에서 추명이 한쪽 팔뚝에 수건을 늘어뜨린 채 공손하게 부복해 있었다.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다, 주군. 오늘 용이 날아오를 것입니다.”
추명이 감개무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좋아! 그들은?”
추명은 되묻지 않아도 그들이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고 있었다. 잠재적 위험으로 지명받은 자, 예측할 수 없는 변수. 하지만 그 변수는 이미 침묵하고 있었다.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특별한 움직임은 없는 듯합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아무런 방해도 할 수 없겠군. 삼성은?”
“그쪽 역시 특별한 움직임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행사를 막을 자는 아무도 없겠군. 강호의 사가(史家)들은 오늘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강호의 역사가 새로이 쓰여지는 오늘을! 재생을 위한 파 괴! 오늘을 기해 무력이 끝나고 ‘신무림기(新武林記)’가 시작된다!”
얼음으로 만든 조각처럼 무정하던 그의 목소리에도 이번만큼은 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새로운 시대를 연다는 사명감이 그에게 열기를 불어넣어주고 있었다. “추명, 오늘 피는 매화는 한층 더 아름답겠지?”
“물론입니다.”
화산지회 오행관 시험이 공식적으로 모두 끝났다. 참가자들은 모두 대연무장에 모여 있었다. 이제 곧 천율십령의 장인 혁중으로부터 우승 발표가 있을 예정이었 다.
우승은 1조로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른 조는 모두 중토관에서 정체불명의 은가면들에게 습격을 당해 천율패를 빼앗겼던 것이다. 단 하나의 천율패도 빼앗 기지 않은 조는 1조뿐이었다. 그들도 나뭇가지를 든 은가면에게 습격을 당해 된통 당하긴 했지만, 패를 빼앗기지는 않았다. 지극히 모순적이게도 그 모두가 그들이 주체가 되어 쫓아낸 비류연 덕분이었다.
“비 공자와 나 소저가 안 보이네요? 효공자랑 장 공자도 안 보이고…….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염도 노사님?”
은설란이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염도는 딱딱한 식장에 있는 게 지루하다는 핑계로 단상과 좀 떨어진 곳에서 은설란과 함께 서 있었다. 그녀는 결과가 궁금하다는 이유로 그와 동행하고 있었다. 그 런데 있어야 할 익숙한 얼굴들이 보이지 않아 의아하게 여기고 물은 것이다.
“글쎄… 언뜻 듣기로는 시험 도중 무슨 사건에 휘말렸다고 하던데…….”
“사건이라니요?”
“으음, 누군가가 살해당한 사건이라는 것밖에는 몰라.”
은설란의 안색이 크게 나빠졌다. 그녀의 기분이 침울해진 것을 깨달은 염도가 당황하며 말했다.
“아, 그렇게 걱정스런 얼굴 하지 마라. 다친 사람은 없다더구나. 죽은 사람은 참가자가 아니었던 모양이야.”
“그런데 왜…….?”
“더 이상 깊이 알려 하지 마라!”
염도는 은설란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는지 더 이상 자세한 내막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그럼 화산규약지회 최우수 조를 발표하겠습니다. 백주년 기념 화산규약지회 오행지관 최우수 조…….”
진행을 맡은 율령자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외쳤다.
“1조! 최우수 조는 1조입니다. 1조 대표는 단상으로 올라와주시기 바랍니다.”
1조 쪽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대표로 단상으로 올라간 이는 대공자 비였다. 그는 당당한 걸음걸이로 좌중을 압도하는 기백을 흘리며 단상으로 올라갔다. 그 런데 바로 그때였다. 대공자를 향해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씩 위로 쭈욱 올라갔다. 단상 바로 뒤에 위치한 건물인 ‘천무전’의 지붕 위에 겁도 없이 누군가가 올라가 있었다.
“잠깐!”
그자가 외쳤다. 그의 외침은 대연무장을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심후한 내공이 깃들여 있었다.
“이의 있음!”
그자가 다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저, 저자식이 왜 저런 곳에?”
맨 앞줄에 서 있던 마하령의 눈이 부릅떠졌다. 지붕 위에 나타난 자의 정체를 알아본 것이다. 그는 놀랍게도 중토관 시험 도중 안명후 살해 혐의를 받고 사라진 비 류연이었다.
근데 뭘 들고 있는 거지? 그녀의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비류연은 오른손에 들고 있던 것을 단상 앞, 대공자 비의 코앞으로 던졌다.
그 물건은 매우 부피가 크고 무거워 보였는데, 생각 이상으로 느릿느릿하게 날아왔다. 보이지 않는 손이 그 물건을 받치고 있기라도 하듯. 하지만 대공자의 코앞에 이르자 보이지 않는 손이 사라졌는지 물건은 뚝 떨어졌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단상을 부순 후 몇 바퀴 더 구르더니 비의 발아래로 널브러졌다.
놀랍게도 그것은 실로 건방지게 사지가 달려 있었다. 그것도 보통 사람의 두세 배는 족히 될 듯한. 하지만 그 거구의 사내의 얼굴은 여기저기가 부르팅팅하게 부어 있었고, 입에는 게거품을 문 엉망진창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본 대공자의 검미가 하늘로 치솟았고, 그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가 누군지 그 숨겨진 두 번째 신분까지 알고 있던 대공자로서는 경악을 금치 못 했다.
“그 덩치, 누군지 알고 있겠지?”
지붕 위에서 비류연이 외쳤다. 중인은 처음 보는 남자였다. 그들이 아는 율령자 중에 저런 덩치는 없었다.
“우 대숙수!”
그의 신분을 알아본 사람은 진행을 맡고 있던 율령자였다. 홍매곡에 상존하는 요리사들의 수는 무려 서른여섯. 그 모두의 정점에 서 있는 숙수 중의 숙수, 대숙수 도살도 우둔우. 그것이 바로 그의 정체였다.
“자, 변명은 준비되셨나요?”
비류연이 씨익 웃으며 물었다.
“나보다 먼저 변명을 늘어놓아야 하는 것은 자네 아닌가?”
“내가 왜?”
“아직 안명후 살해 사건에 대한 혐의를 벗지 못했을 텐데? 자네야말로 그 사건의 범인이 아니었던가? 죄인의 말 따위에 누가 귀를 기울여주겠나?”
비류연이 피식 웃었다.
“아아, 난 또! 그거라며 걱정 푸셔요. 나에게는 든든한 보증인이 있으니깐! 그분들이 내 말과 행동을 보증해줄 겁니다요.”
“보증인?”
“바로 우리들이다!”
사람들은 이번 같은 충격을 받도록 길들여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몇몇 사람은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 표정을 지었고, 몇몇 사람은 눈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 표 정을 지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은 놀랍게도 천무삼성 세 사람이었다.
“이건 정말… 놀랍군…….”
대공자 비 역시 경악을 숨길 수는 없었다. 설마 이들이 끼여 있을 줄이야……. 아무런 움직임도 포착하지 못했었는데. 아마 그것은 부하의 무능 탓이 아니었을 것 이다. 모든 것을 비류연과 일행에게 맡겨놓고 본인들은 태연을 가장했던 것이리라. 자신을, 아니 보이지 않는 적을 방심시키기 위해서.
“자, 이제 자백할 마음이 들었나요?”
비류연이 다시 한 번 웃으며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