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낚시
금요관 시험 당일.
노학은 졸린 눈을 억지로 잡아뜯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곧
세수를 한 뒤 옷을 갈아입고 – 놀랍게도 – 아침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향했다.
화산규약지회는 절차에 따라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덕분에 아침밥을 굶고 시험을 치르거나 하는 야만적인 사태는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좋은 아침이오. 잠은 잘 잤소?”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식당으로 걸어가던 노학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그는 서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의외의 인물이 서 있었다. 자 신과 같은 1조인 마천칠걸의 우두머리 마검익 추명이 허리를 곧추세운 채 당당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그보다 키가 약간 더 큰 사내가 건들건들한 태도로 서 있었다. 오걸인쇄풍겸 오추였다.
‘저 두 사람이 이른 아침부터 웬일이지??
하룻밤 사이에 자취도 없던 친밀감이 느닷없이 태어나 안부를 물으러 온 것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물론 귀신이 와서 두들겨 깨워도 모를 정도로 푹 잤소. 황제가 주최한 연회에서만 나온다는 ‘만한전석’을 먹는 꿈을 꾸고 있었는데, 다 먹기도 전에 깨고 말았지 만. 눈을 뜨고 한참 후에야 그 사실을 알고 눈물로 베게를 적셔야만 했소.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묻소? 불면증 상담이라도 하시려고 그러는 거요?”
“물론 아니오. 다만 몸 상태가 나쁘다느니, 수면이 부족하다느니 하는 핑계로 우리의 발목을 잡는 일이 없었으면 하기 때문이오.”
“내 몸 상태는 최고조요! 댁들이나 나중에 그런 핑계 대지 마시오.”
노학이 화가 나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건 그렇고, 옷이 좀 바뀐 것 같소? 본인이 잘못 본 거요?”
노학이 잠시 몸을 흠칫 떨었지만, 금세 평정을 되찾고는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하하하하! 아, 이 옷 말이오? 별거 아니오. 그냥 심기일전하는 마음으로 목욕재개를 하고 큰 맘 먹고 옷까지 새 걸로 갈아입었소.”
노학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최대한 가볍게 대답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옷깃 아래쪽 근육은 긴장으로 굳어져 있었고, 겨드랑이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나오고 있었 다.
“쳇, 거지 주제에 새 옷이라니… 건방지게시리!”
건들거리며 가시 있는 말을 내뱉은 이는 오문추였다. 추명이 말리지 않았다면 노학은 그의 아구창이 얼마나 튼튼한지 시험해보고 싶은 충동을 이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추, 경망스럽게 행동하지 마라!”
말은 그렇게 하지만 노학은 추명이 자신을 전혀 존중하지 않고 있다는 데 전 재산을 걸 수도 있었다. 그의 존중은 말뿐이었고, 그는 지금 거지를 경멸하는 마음을 그나마 감추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미리 경고해두겠소. 만일 당신이 당신 자신의 실수나 모종의 불행으로 행여 사고를 당했을 때 누군가가 당신을 구해줄 것이라 믿고 있다면, 그런 맹신은 별로 추천할 바가 못 된다는 것이오. 그리고 만의 하나라도, 어리석다는 소리를 듣는 것도 무릅쓰고 그런 상황을 시험해보려 한다면, 그것은 결코 현명 한 행동이 못 될 거라는 것이오. 명심해두기 바라오.”
“명심하겠소. 걱정하지 마시오. 시랑(豺狼)한테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할 만큼 우둔하지는 않으니 말이오. 고의로 사고나 내지 않으면 다행이라는 사실 도 충분히 숙지하고 있소. 개방의 거지를 너무 무시하지 말았으면 좋겠소.”
다시 한 번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중에 부딪쳤고 불꽃을 내며 연소되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말해두겠소.”
“귓구멍 파고 잘 듣겠소.”
“만일 이번 관문에서 당신의 우행(愚行)이 우리 조와 나의 주인을 위험에 빠트릴 경우 당신은 나의 손이 얼마나 무정한지 깨달아야 할 것이오. 그때까지 당신이 죽 지 않고 살아 있다면 말이오.”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였지만, 노학은 쫄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그동안 당해왔던 단련 쪽이 훨씬 지독했던 것이다. 자신들 주작단원이 쫄고 겁먹고 오그라들어 도 되는 경우는 대사형 비류연과 염도 노사 앞에서뿐이었다. 그 이외의 어떤 상황에서도 누구 앞에서도 자신감 상실은 절대로 허용되지 않았다.
“그건 충고요 아니면 협박이요? 그도 아니면 범행 예고요? 셋 중 어느 쪽이오?”
“마음대로 상상하시오. 하지만 잊지는 마시오!”
이런 불길한 대화를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늑대와 승냥이는 그 길로 등을 돌렸고, 자신의 주인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작은 승냥이 쪽은 돌아가면서도 맹수답게 그르렁거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시건방진 거지 새끼! 혹시나 절벽에서 손을 미끄러뜨리는 바보 짓을 한다 해도 너 따위 거지 놈을 구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다!”
노학은 무척이나 친숙한 두 개의 등을 바라보며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추명의 말이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는 추명의 말에 본심 내지 그에 준하는 마음의 단편이 담겨 있음이 틀림없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의 판단은 적중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통찰력을 기뻐할 틈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
왜냐하면… 추명의 호언대로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자신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으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빌어먹게도 그들의 말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이 감각은 뭘까?
방금 건 뭐였지? 그리고 지금은 뭘까?
모든 것이 느리게 느껴졌다.
이게 생사의 경계에서만 체험할 수 있다는 주마등이라는 건가? 일상의 순간이 지금 이 시간 그에게는 영원(永遠)이 되어 있었다. 그의 심리적 시간이 평상시와 전 혀 다르게 흘러간다는 것만은 명백했다.
개방의 비전 보법인 ‘취팔선보’도 육체의 지지점을 확보할 수 없고 중심도 지탱할 수 없는 허공에서는 무용지물에 불과했다.
고의일까? 역시 고의겠지? 그래, 고의가 틀림없어.
고의가 아니라고 주장하기에는 모든 상황이 기분 나쁠 정도로 잘 맞아떨어졌다. 다만 놀라운 것은 저들이 1조를 실격으로까지 몰고 갈 이 사태를 기꺼이 감내하기 로 했다는 사실이었다. 우승으로 다가가는 계단에서 두세 계단 아래로 미끄러지는 희생을 감내하면서까지 그들은 자신의 입을 봉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면 자기 조에서 자신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희생을 감내할 사람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혹시나 살아날까봐 작대기로 밀어내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들었던 이야기에 그런 희생을 감당하면서까지 살인멸구하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정보가 들어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제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그 정보가 중요하면 어떻고 중요하지 않으면 어떤가? 자신의 손에 쥐어진 생명줄은 끊어졌고, 자신은 허공중에 둥둥 떠 있다. 발아래에서는 죽음이 열렬한 환영 행사를 펼치고 있었다.
역시… 죽는 건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갑자기 무지무지하게 열이 뻗치기 시작했다. 가슴속에서 열불이 타올랐다. 그 분노와 원한은 일을 여기까지 오게 한 최초의 원인을 향해 집중되었다. 그렇다! 잊어서는 안 되었다. 자신을 이 꼴로 만든 모든 원흉을! 이 모든 게 다 망할 놈의 대사형 비류연 때문이었다.
이제 곧 죽을 건데 막 나간들 어떠하리! 거리낄 게 없었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했다. 일체의 모든 사물은 고정불변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법, 죽으면 모 두 다 먼지처럼 무상하게 흩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이런 막가파식 행동도… 죽으면…….
‘그래! 이제 죽을 건데 거리낄 게 뭐가 있는가!’
그동안 쌓였던 심화나 풀어버리고 가는 게 미련도 덜 남을 것 같았다. 추락하는 거지에도 입은 달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힘차게 외쳤다.
“야, 비류연! 이 씨발놈아! 이 빌어먹을 대사형아! 잘 먹고 잘 살아라! 니똥 굵다!”
곧 죽을 사람답지 않게 씩씩하기 그지없는 고함이었다. 생애 마지막이 될지 모를 최후의 불평불만이었다. 대답 따위는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냥 화풀이에 불과했 고, 이런 무의미한 행동으로 마음의 응어리가 눈곱만큼이라도 풀리면 남는 장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늘에서 응답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노학에게는 크나큰 불행이었다.
“나 불렀냐?”
하늘에서 들려온 무심하면서도 너무나 자연스런 목소리. 생사의 경계에서 들으면 환청으로 치부하기 딱 좋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멀리서가 아니라 바로 귓가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환청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도 생생한 목소리. 어리둥절해진 노학이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 ‘그것’이 있었다.
“히에에에엑! 대, 대사형!!!”
유령이라도 본 것 같은 반응이었다.
그는 절벽을 마치 평지처럼 달려 내려오고 있었다. 절벽과 그의 몸은 거의 직각을 이루고 있었다.
여긴 절벽이란 말이다. 인간은 절벽을 밟고 달려서는 안 된다. 그것은 절벽에 대한 모독인 것이다. 인간은 다만 떨어질 뿐. 그러나 지금 비류연은 그런 일반 상식에 는 관심 없다는 듯 만장단애의 자존심을 마구마구 짓밟으며 달려 내려오고 있었다.
“이제 이 사태를 어찌 해결하지??
추락으로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노학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대로 죽는 게 대사형 손에 살아남는 것보다 훨씬 행복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유혹은 차마 떨쳐버릴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잡아!”
다시 비류연이 손을 내뻗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자유낙하 중이었고 다른 한쪽은 변칙적인 달리기로 거리를 좁히고 있는 중이라 그 일도 쉽지 않았다.
‘저 손을 잡아야 되나 말아야 되나…….?’
지금 추락해 이대로 피떡이 되어 죽느냐, 아니면 구출된 다음 대사형 손에 맞아 죽느냐… 제삼의 선택은 없었다.
실로 고민되는 순간이었다.
‘에잇! 나도 모르겠다.”
노학은 눈을 질끈 감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비류연은 노학이 뻗은 손을 잡지 않고 재빨리 뒤로 뺐다. 노학의 눈이 크게 부릅떠졌다.
그것은 순전히 본능적으로 행한 행동이었다. 방금 그게 뭐였지? 비류연은 어리둥절한 생각이 들었다. 바람이 세차게 그의 몸을 때리고 있었고, 자신의 사제는 좀 전보다 훨씬 멀리 떨어져 있었다. 거의 다 잡은 상황에서 놓쳐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노학의 죽음을 방조할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일촌도 채 남겨놓지 않았던 상황에서 손을 빼야 했던 것이 다.
무언가가 그와 노학 사이를 지나갔다. 그것은 형체는 없었지만 칼날과도 같은 날카로운 기를 품고 있었고, 만일 정면으로 부딪쳤다면 매우 치명적일 게 분명했다. 그는 자신의 감을 신뢰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행동했다. 만일 그럴 시간이 있었더라면 비류연은 힐끗 고개를 들어 저 위에 매달려 있는 1조의 조원들은 하나씩 훑 어봤을 것이다. 누군가가 노학이 살아나는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어쩌면 자신이 그에게 명한 잠행 감시에 어떤 성과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직 보고받기 전이었지만 그런 느낌이 들었다.
이런저런 상념이 교차하는 와중에도 비류연의 눈은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노학에게서 떨어지지 않았고, 그의 발 또한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비류연은 아직 노학 에게서 들어야 할 게 있었고, 그 때문에라도 그는 반드시 살아야 했다.
이미 ‘직지질주(直地疾走)’의 수법으로는 더 이상 거리를 좁히는 게 힘들어 보였다. 떨어지는 속도가 너무 빨랐고, 좀 전의 암습으로 인해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은 게 큰 타격이었다.
“누가 죽게 둘 줄 알아!”
자기 물건은 자기가 잘 간수해야 하는 법이다.
휘릭!
비류연이 오른손을 뻗자 그 끝에서 투명하게 반짝이는 은빛 실이 노학을 향해 뻗어나갔다. 진기의 조작에 의해 ‘절(切)’이 아닌 ‘박)’의 속성(屬性)을 지닌 뇌령 사가 추락하는 거지의 몸을 그물처럼 휘감았다.
‘걸렸다!’
손끝으로 ‘어신’이 왔다.
비류연은 내심 쾌재를 부르며 다시 왼손에서 뇌령사를 뽑아내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나무를 향해 날려 보냈다. 눈부신 속도로 날아간 뇌령사가 나무에 단단하게 묶인 것을 확인한 다음 그는 속도를 떨어뜨리기 위해 두 발의 용천혈에 진기를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 모두가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비류연의 몸이 멈추자 오른쪽 어깨에 엄청난 부하가 걸렸다. 그 끝에 노학이 달려 있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잘못 버티면 어깨가 상할 수도 있었다. 비류연은 허리 의 힘을 이용해 몸을 회전시키며 우수(右)를 풍차처럼 있는 힘껏 크게 휘둘렀다.
자신의 몸을 축으로 떨어지는 힘을 역이용해 노학을 강제로 회전시킨 것이다. 그리고 이 일견 무모해 보이는 방법을 통해 비류연은 다시 노학을 위로 던져 올릴 수 있었다. 무식하게 버티는 것보다 훨씬 현명하고 경제적인 방법이었다.
낙하하는 힘과 속도와 방향을 모두 꿰뚫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재주였다. 조금이라도 호흡이 늦으면, 그대로 떨어지는 힘에 휘말려 그 자신도 함께 저승길 동무가 될 수도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위로 다시 던져진 노학의 몸이 어느 순간 정지했다. 위로 던져진 힘과 아래로 당겨진 힘이 평형을 이룰 때 일어나는 한순간의 현상이었다. 비류연은 이 적시의 기 회를 놓치지 않고 가볍게 노학의 몸을 받아들었다. 그제야 다시 중력의 영향을 받은 노학의 몸이 비류연의 몸에 하중을 가중시켰다. 하지만 그에 대해 이미 방비하 고 있던 비류연은 무사히 그의 몸을 지탱할 수 있었다.
그래서 노학은 다행스럽게도 당장 죽지 않고 조금 후에 죽을 수 있는 기회를 손에 넣게 되었다.
“대… 대사형!”
노학이 감격해서 외쳤다. 언젠가 비류연의 손에 살해당하고 말 거라는 강박증을 앓고 있던 노학으로서는 설마 그 예비 살인자가 목숨을 걸고 자신을 구해줄 줄은 상상도 못했다. 비류연은 감격의 도가니에 빠져 있는 노학을 보며 싱긋 웃어준 다음 그의 귓가에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어주었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그런데… 빌어먹을 누구라고? 너 좀 있다 나하고 면담 좀 하자!”
노학은 웃어야 될지 울어야 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장 편한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기절해버린 것이다.
“야, 임마! 정신 차려! 저 위까지 내가 너 떠메고 올라가야겠냐, 엉?”
그러나 노학은 끝내 눈을 뜨지 않았다.
“너 올라가서 두고 보자!”
비류연은 으드득 이빨을 간 다음 절벽 위를 향해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승과 저승을 순식간에 왔다 갔다 한 것 때문인지 아니면 긴장이 일순간 풀려서인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노학을 들쳐메고 걸어오는 비류연을 보며 효룡은
감탄사를 터트렸다. 비류연은 최악의 상황에서(어느 누구도 노학이 살아날 거라 생각지 않았다) 놀라운 기술로 노학을 구해냈을 뿐 아니라 기절한 그를 떠메고 그 절벽을 기어 올라온 것이다.
비류연의 얼굴은 그동안 치른 노고에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류연, 자넨 정말… 그런 무모한 짓을 잘도 하는군.”
“무모?”
비류연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로 반문했다. 그런 비류연의 얼굴에는 의아함이 깃들여 있었다. 무슨 황당한 소릴 지껄이냐는 그런 표정이었다. 무모라니! 그딴 건 평소 그가 품고 있던 신념과 가장 어긋나는 행동이었기에, 자신이 그런 행동을 했다는 효룡의 주장을 그대로 인정해줄 수가 없었다.
“이봐, 룡룡! ‘무모’란 자신의 능력에 걸맞지 않은 일을 비이성적이고 무뇌충적인 감정으로 행하는 일련의 행동 양식을 뜻하는 거야. 나랑은 관계없다고. 게다가…….”
“게다가?”
“사부가 하는 일은 제자를 착복하는 것만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엥? 사부라니?”
“아, 그런 게 있어!”
비류연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이 친구는 가끔 가다 알아먹지 못할 소리를 지껄인다. 그 점이 효룡으로서는 항상 불만이었다. 상대가 알아먹지 못하는 소리는 말하기 혹은 지껄이기일 뿐 대화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 벌인 자네의 행동은 뭔가? 자네는 지금 그건 무모함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건가?”
“당연하잖아! 당연한 걸 그렇게 반복해서 물으면 입 안 아파? 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그냥 한 것뿐이야.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 것이지. 무모하곤 상관 없다고. 그 증거로 상처 하나 없이 말짱하잖아. 게다가 이 애물단지 녀석도 무사하고 말야! 내가 미쳤다고 이 망할 거지 녀석이랑 동반 자살할 위인으로 보이냐?” 노학은 아직도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있었다. 대사형은 제 녀석을 떠메고 땀을 바가지로 흘리며 저 까마득한 절벽을 기어 올라왔는데, 쫄따구 녀석은 팔자 좋게 기절해 있다니… 차마 더 이상은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어이, 아직도 정신 못 차렸냐?”
찰싹찰싹!
비류연이 한심하다는 얼굴로 제자 겸 사제인 거지의 뺨을 두드렸다. 살과 살이 쫙쫙 달라붙는 소리가 범상치 않았다. 확실히 제대로 때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 이봐… 그분은 자네 선배라고…….”
어둠이 드리운 뒷세계에서 일어난 제반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효룡이 기겁질색하며 비류연의 행동을 말렸다.
찰싹찰싹!
그러나 비류연은 거리낄 게 없었으므로 자신의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으… 음…….”
그래도 노학은 신음 소리만 간헐적으로 내뱉을 뿐 정신이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한심한 녀석. 겨우 그 정도로 인사불성이라니… 그동안 너무 안이하게 단 련시켰나? 자신의 솜방망이 같은 부드러움을 잠시 책망하고 반성하는 비류연이었다.
“확 던져버릴까?”
이제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이제부터라도 좀 더 강하게 단련시키지 않으면…….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주작단의 앞날에 애로 사항이 꽃필 듯했다. 단지 이 잔혹한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다는 게 주작단으로서는 행복하다면 행 복한 일이었다.
비류연이 열심히 특별 특수 강화 특훈에 대해 계획을 짜고 있을 때 어느새 다가온 나예린이 등 뒤에서 그를 불렀다.
“류연.”
“어, 예린! 무슨 일 있어요? 안색이 안 좋은데?”
묵묵부답. 나예린은 수심 어린 얼굴을 한 채 서 있었다. 차갑다기보다 무거운 기운이 그녀의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그녀는 비류연과 눈을 마주치는 것을 피하고 있었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모릅니다!”
찬바람이 날릴 정도로 차가운 대꾸. 옆에서 듣고 있던 당사자 아닌 효룡마저 으슬으슬해지는 그런 목소리였다. 평소의 그들이 알고 있던 그녀와는 다른 사람이 그 곳에 서 있었다.
“화…났어요?”
아무래도 그녀는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왜 화가 나 있는 걸까? 비류연이 분위기 파악에 소질이 없다는 것은 금방 밝혀졌다. “와아, 화났다! 그렇죠?”
비류연이 불난 집에 부채질을 했다.
“모, 몰라요! 화 안 났어요!”
나예린이 소리쳤다.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봐요! 화났잖아요!”
비류연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빙그레 미소까지 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절대로!”
나예린이 약간 토라진 얼굴로 고개를 홱 돌렸다. 진짜 화난 모양이었다. 헌데 차가운 한옥 같은 그녀의 얼굴이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나예린 자신도 자신의 이런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상처가 없어 다행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는데……. 그에 앞서 그런 무모한 – 본인은 절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 행동을 저질러 자신을 놀래킨 그에 대한 화가 더 큰 듯했다.
마침내 그녀는 새침한 얼굴로 고개를 홱 돌렸다.
“몰라요! 이제 당신이 죽든 말든 상관 안 하겠어요! 그럼 안녕히!”
그녀는 그렇게 선언한 다음 총총 걸음으로 가버렸다. 말릴 새도 없었다.
“이크, 진짜로 화났네!”
비류연은 찔끔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흐음, 왜 저리지? 이상하네? 룡룡, 넌 알겠냐?”
“아니, 모르겠군.”
효룡이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비류연은 자신이 질문의 대상을 잘못 골랐다는 사실도 몰랐다. 애초에 숙맥인 효룡에게 물은 것조차 실수인 것이다.
“거참, 이상하군……..”
평상시답지 않은 그녀에 행동에 비류연은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그의 눈은 여전히 멀어져 가는 그녀의 우아한 자태에 맞추어져 있었다. 그런 그의 입가에 가느 다란 미소가 맺히는 것을 그는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그때 왼쪽으로 오 장쯤 떨어진 곳이 웅성웅성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시비가 붙은 것이다. 1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주역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은 믿기지 않게도 평소 순하기로 정평이 난 남궁상이었다.
“이 살인자! 왜 줄을 끊었지? 말해봐!”
남궁상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노학의 생명줄을 끊은 장본인인 오문추 역시 순순히 잡혀줄 마음이 없었다. 그는 보법을 밟으며 신형을 뒤로 뺐다. 하지만 남궁상의 손은 집요했다. 그는 오문추의 열두 변화를 모두 읽어냈고, 현란한 금나수법을 동원해 그의 멱살을 움켜쥐는 데 성공했다
“이, 이놈이!”
오문추의 시뻘게진 얼굴에서 욕이 튀어나오려 했다. 설마 이런 놈에게 멱살을 잡힐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자, 이제 그 이유를 말해보실까? 나를 납득시키지 못한다면 당신은 아마 각오를 해야 할 거야.”
멱살을 잡고 있는 남궁상의 눈이 분노로 인해 칼날처럼 시퍼렇게 빛나고 있었다. 거친 기질의 사내 오문추조차도 지금 그의 서늘한 눈빛을 정면으로 쐬자 기세가 한풀 꺾이고 말았다.
“자, 이제 대답을 들어볼까!”
남궁상이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대답을 한 사람은 멱살을 잡힌 오문추가 아니라 그의 대형인 마천일걸 마검익 추명이었다.
“뭐라고? 한 사람의 생명이 달린 구명줄을 함부로 끊은 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단 말인가?”
“그렇다. 이번 경우 시시비비는 명백하다. 실수를 한 것도 그고, 조 전체를 위험에 빠트린 것도 그다. 그의 부주의가 조 전체를 위험에 빠트린 것이다. 오히려 우린 그 때문에 모두 죽을 뻔했다.”
추명의 목소리는 매우 단호했다. 그의 신념에는 추호의 흔들림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실수란 말인가?”
“그렇다. 그는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지 못했다. 이쪽으로서는 가장 현명하고 타당한 판단을 한 것이다. 아니면 당신은 우리가 그를 고의적으로 살
해하려 했다고 주장하고 싶은 건가?”
그럼 아니라는 거냐, 이 살인자 놈들아! 남궁상은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무턱대고 그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 증거가 없는 주 장은 그냥 가설일 뿐인 것이다. 그것이 입증되기 전까지는 지금 그것을 까발려봤자 흥미로운 음모론 이상의 것은 되지 못한다. 조원 간의 단결을 해치려는 악적으 로나 몰리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럼 아니라는 건가?”
하지만 지고 싶지 않은 마음에 남궁상은 조금 무리하고 말았다.
“어린애처럼 상상력이 풍부한 건 좋지만 이번 경우는 좀 지나친 것 같군.”
추명이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넌 아직 몽상에 빠져 있는 어린애라는 우회적인 욕이었다. 남궁상은 어금니를 깨물어야만 했다.
“이쪽이 그런 짓을 했다는 무슨 명확한 증거라도 있나? 이 경우, 사건에 휘말려 이성보단 감정이 앞서 있는 당사자의 말은 신빙성이 적으니 제쳐두고, 다른 증인이 라도 있나?”
“그, 그건…….?”
그런 게 있을 리 없었다. 그리고 저쪽은 일부러 노학의 말에 대한 신빙성까지 떨어뜨리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나중에 노학이 무슨 말을 하든 정신적 충격에 의한 헛소리 정도로밖에 치부되지 않을 것이다.
“그럼 자네는 그 한 사람의 실수에 휘말려 우리 여덟 명이 모두 죽어야 했다는 말인가?”
“그, 그건…….?
남궁상은 갑자기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추명의 추궁에 반박할 말이 궁했던 것이다.
“그 정도 말발에 기세를 꺾다니……. 왜 좀 더 체계적으로 반박하지 못하는 건지… 쯧쯧쯧!”
비류연은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그가 보기에 자신의 사제는 감정이 너무 앞서 있었고, 이성은 너무 뒤처져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내뱉는 말은 아무리 옳은 말 일지라도 사람들에게 신뢰를 줄 수가 없다. 우민들을 제외하고는.
“우리도 그 생명줄을 끊는 순간 이번 관문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을 위해 조원 전체를 위험에 빠 트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자네 말대로라면, 그 하나를 위해 우리 모두가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는 건가? 그런 개죽음을 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네는 우리를 비난 하는 건가?”
“그… 그건…….”
서슬 퍼렇던 남궁상의 기세는 매우 한시적이었던 모양이다. 이제는 기세에서도 밀리고 있었다.
사실이 그러했다. 1조와 7조 모두 이번 관문에서 최하 점수를 받았다. 그렇게까지 말하자 남궁상은 더 이상 항의할 수가 없었다.
“그럼 이야기는 끝난 듯하군! 그럼 이만. 가자!”
추명이 휙 돌아서더니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칠걸 중 세 명이 그 뒤를 따랐다. 남궁상은 멀어지는 그들의 등을 노려보면서 어금니를 으드득 깨물기 만 할 뿐 저지하거나 가로막지 못했다.
최종적으로 남궁상의 패배였다.
“아무런 준비 없이 홧김에 덤비니깐 이기지 못하는 거야!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하는 자가 남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지. 어리석은 놈!”
비류연은 멀리서 조용히 그 광경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아무런 의견도 제시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녀석들은 총체적인 정신 재무장이 필요할 듯했다.
“그래도 일단 받은 건 돌려줘야겠지?”
빚을 지고는 못 사는 성미였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낱낱이 파헤쳐주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