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도(壓倒)
-삼초지적
여성에게 우선권을 양보하는 미덕 때문일까? 아니면 그녀가 그보다 훨씬 더 적극적이었기 때문일까? 먼저 공격해 들어온 것은 유란이었다. 유운비의 도움을 바라 지 않고 단신으로 남궁상과 검을 겨루고자 달려든 것은 아마도 자존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실력에 자신을 가지고 있었다. 같은 또래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이삼 년 먼저 태어났다는 사실이 더 강하다는 증거는 되지 못했다. 그녀는 스스로를 증명하고 싶었고, 남궁상은 그러기 위한 최고의 소재 였다. 망설임없이 휘두르는 검끝에서 차가운 검광이 번뜩였다.
“빠르다!”
유운비가 유란의 쾌속한 일검에 감탄성을 터뜨렸다.
과연 명문의 제자답게 안정되고 숙달된 움직임이었다. 군더더기없는 매끄러운 일검에서 수련의 깊이가 느껴졌다. 게다가 검을 지독히 좋아하는 광적인 검 애호가 답게 푸르스름한 검날은 머리카락만큼이나 얇게 세워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운비 자신의 눈높이에 맞추어진 해석이자 평가였다. 남궁상의 눈에는 그것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그에게는 유운비의 감탄을 자아냈던 유란의 쾌검이 그리는 궤적이 손금 보듯 훤히 보였다. 그 검이 어디서 출발해서 어디를 지나 어느 곳에서 변화할지를 모두 꿰뚫어 볼 수 있었다. 그녀의 검은 좋게 말하면 너무나 정직했고 나쁘게 말하면 틀에 갇혀 굳어져 있었다. 예전에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 는 놀랄 만한 변화를 음미할 새도 없이, 그는 뒷짐을 진 채 발을 반보 뒤로 물렸다.
쉐에에에엥!
날카로운 검의 궤적은 그의 몸에서 정확히 일 촌 떨어진 곳을 훑고 지나갔다. 헛칼질이었다.
“아차!”
유란은 당황했다. 그리고 자책했다. 공격이 크면 클수록 실패했을 때 드러나는 허점이 크다는 간단한 진리를 잠시 외면한 자신에 대한 책망이었다. 그녀는 당연히 남궁상이 자신의 큼지막한 큰 허점을 향해 공격해 들어오리라 생각했다. 무인이라면 당연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남궁상은 그러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뒤로 물러 선 채 뭔가에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조금 전에는 너무나 창졸지간에 일어난 일이라 인식하지 못했다가 잠시 여유가 생기자 자신이 취한 행동에서 위화감을 느 꼈기 때문이다.
‘어라? 방금 그게 뭐였지? 그리고 저 아이는 또 왜 저렇게 어설프지? 아미파의 제자라면 이렇게 어설플 리가 없을 텐데? 아미의 검이 이렇게 느렸나??
상대의 공격이 마치 손금을 내려다보듯 명확하게 보였다. 그리고 그 공격의 예상 진로에서 본능적으로 몸을 아주 살짝 빼내는 자신이 거기에 있었다. 의식이 주도 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인 것이다. 상황을 채 완전히 인식하기도 전에 가장 작은 동작으로 가장 효과적인 회피를 선보인 것이다.
“이것이 일촌간파(一寸看破)……. 이게 지옥 훈련의 성과라는 건가?”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며칠간의 악몽 같던 일들이 그의 뇌리를 광포하게 휩쓸고 지나가자 그는 몸이 으슬으슬 추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도 태양은 이처럼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 위에서 밝고 따뜻하게 빛나고 있었다.
***
덜컹! 덜컹!
“그러니깐 말이야…….”
비류연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싸움은 경제적으로 해야 돼.”
“경제적이요?”
덜컹!
“그래, 경제적. 간단하지? 사실 알고 보면 아주 간단하고 당연한 이친데 말야 다들 망각하고 있단 말이지. 그런 면에서 넌 탈락이야.” 덜컹덜컹!
“하지만… 무공은 장사가 아니지 않습니까?”
근데 웬 경제란 말인가?
“경제적이란 게 뭔데?”
철컹철컹!
비류연이 반문했다.
“돈 많이 버는 거 아닌가요?”
뻑!
“아욱!”
절로 비명이 터져 나온다.
“경제적이란 건 낭비가 없다는 이야기야. 그런 면에서 넌 너무 낭비가 많아. 너뿐만 아니라 다른 녀석들도 다 그렇지만 말이야.”
철컹철컹!
비류연이 남궁상의 주변을 원을 그리듯 돌며 말했다.
“왜 낭비가 많은 줄 아냐?”
“왜죠?”
“생각이 없기 때문이지! 특히 너보다 약한 애들이랑 싸울 때 너 별생각없이 싸우지?”
비류연이 얼굴을 바싹 들이대며 고압적인 어조로 물었다.
“뭐, 그렇죠.”
철그렁!
고개만을 돌려 비류연의 압박을 피하며 남궁상은 작은 목소리로 순순히 인정했다.
비류연은 다시 몸을 세웠다.
“하지만 그래서 실력이 제대로 늘겠냐? 자기보다 약한 녀석이랑 싸울 때 별생각없이 싸우면 안 돼. 물론 고수랑 싸워보면 실력이 느는 속도가 다르겠지. 하지만 그 런 ‘적당한’ 고수랑 싸울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아. 그런 면에서 궁상이 넌 행운아라 할 수 있지. 그래도 ‘빨간 아저씨’가 꽤 한가락 하는 고수니까 말이야.” “저기 토다는 건 아니지만… 적당히는 아닌 것 같은데요?”
매번 정기훈련 때마다 자신들 주작단을 통구이로 만들기 위해 기염을 토하는 염도를 떠올리며 남궁상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개진했다. 그러나 그 의견은 비류연에 의해 단숨에 묵살당했고, 그는 그냥 무시하고 등을 보인 채 자기 할 말만을 계속했다.
“너보다 약한 녀석을 이기는 건 당연한 거야. 못 이기는 게 이상한 거지. 경험도 실력도 너보다 못한 애한테 지면 네가 지독히 무능하다는 증거밖에 안 돼. 이겨도 손해, 지면 쪽박이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남궁상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 목의 피부가 빳빳해지는 게 느껴졌다.
“스스로 제약을 만들어야지.”
비류연이 빙글 반 바퀴 돌아서며 말했다.
“제약이요?”
왠지 불길한 울림을 지닌 단어였다.
“약한 애들이랑 경쟁할 수 없으면 최강의 상대랑 대결하면 되지.”
“최강의 상대? 그게 누구죠? 어디 있나요?”
“가까이에 있어. 바로 지척에 눈만 감으면 언제든지 쉽게 만날 수 있거든. 한번 눈 감아봐. 보이냐?”
“안 보이는데요.”
“잘 보라니깐. 거기 자세히 보면 궁상맞고 우유부단하고 심약한 녀석 하나가 보일 거야. 보이냐?”
“그… 그게 누군지는 몰라도 왠지 친밀하게 들리는데요?”
“당연하지. 언제나 봐왔을 테니깐. 아침마다, 혹은 잠자기 전에 봐왔을 거야. 거울 속에서 말야. 왜 그런 시도 한 수 있잖아? 외롭거나 슬플 때 나는 거울 속의 나하 고 대화를 나눈다는 뭐 그런 내용의 시 말이야. 너는 아마 경험이 있을 거다.”
그 말에 남궁상은 흠칫 몸을 떨었다.
“그… 그걸 어떻게…….”
“응? 너 정말 그랬었냐? 난 그냥 농담이었는데? 호오~ 진짜 그랬단 말이지? 으흠~”
남궁상은 이야기 주제를 돌려야 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다.
“아아! 이제 기억납니다. 음… 하지만 제 기억으로는 별로 우유부단하고 심약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요? 좀 잘생겼던 것도 같구요. 의외로 믿음직했던 것 같기도 하고요.”
“그건 착각이야. 네 기억이 잘못된 거지. 쯧쯧, 이제 치매냐?”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그러니깐 대사형이 말씀하시는 최강의 적이란 건…….”
“그래, 그건 바로 너 자신이야. 자기 자신이야말로 가장 쓰러뜨리기 힘든 최강의 적이지!”
비류연이 남궁상의 가슴을 쿡쿡 찌르며 말했다.
“이 녀석은 상당한 고수거든. 그래서 싸우지도 않고 이겨 버리거든. 왜냐면 싸우기도 전에 포기시켜 버리니깐. 이 녀석을 이기지 못하면 싸울 기회조차 얻을 수 없 지. 그러니 얼마나 강하냐? 안 그러냐?”
남궁상은 뭐라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러니 시작하기 전부터 포기하진 말라고. 재미없으니깐. 가르쳐 주는 재미가 없잖아? 나는 경제적인 무사가 될 수 있다고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확인시켜.” “그럼 그렇게 확인만 시켜주면 반드시 경제적인 고수가 될 수 있나요?”
“그렇진 않아. 그랬다간 개나 소나 다 고수 되게? 행동이 뒤따르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지. 이 세상이란 건 말야 그 중간중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깐 말야. 다만 그렇게 될 확률을 비약적으로 높이는 것이지. 항상 잊지 마! 언제나 기억해! 그리고 행동해! 얼마나 적은 수의 움직임으로 상대를 제압할 수 있을지 끊임없이 계산해. 적은 움직임은 체력과 내공의 소모를 엄청난 효율로 줄여줄 뿐만 아니라 또 하나 최고의 장점을 지니고 있지.”
“그게 뭔데요?”
덜컹!
“속도(速度)!”
비류연이 짧고 명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작은 움직임으로 피하며 보다 더 짧은 거리를 이동해 적을 나의 사정권 안에 넣을 수 있지. 만일 검을 휘두르는 속도가 같다면 더 짧은 거리를 이동한 사람이 이기 는 거야. 어차피 누가 먼저 검을 상대의 몸에 대는가가 관건이니까 말이야.”
비류연은 꼼짝도 안 하고 있는 남궁상의 주위를 계속해서 빙글빙글 돌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니깐 낭비를 줄여야 돼. 몸의 낭비를 줄여서 최소한의 동작으로 최대한의 효율을 올릴 수 있도록 해야 돼. 그렇지 않으면 진짜 고수가 될 수 없을걸? 원래 고 수란 최저의 수고로 최대한의 효과를 이끌어낼 수 있는 자만이 받을 수 있는 칭호야. 요즘은 개나 소나 다 고수 간판을 걸고 다니지만 말야.”
신랄하기 짝이 없는 말을 수천 마디 내뱉어도 그의 혀는 지칠 줄 모르는 모양이다.
“상대의 초식을 간파하는 눈, 자신이 파악한 그 판단에 쫓아가 줄 수 있는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내는 육체의 힘, 이 두 가지를 겸비하지 않으면 결코 그 경지에 들 어갈 수 없지. 그리고 네가 뛰어넘어야 되는 인간은 그런 인간인 거야.”
쩔그렁!
“그런 면에서 염도 아저씨는 너무 낭비가 심하다고 할 수 있지. 무조건 다 쓸어버리려고 하니까 말이야.”
덜컹덜컹!
“그런데 저… 궁금한 게 한 가지 있습니다.”
“뭔데?”
“그것과 제 이 모습과는 무슨 상관이 있는지 엄청 궁금하거든요?”
남궁상은 이맛살을 찡그리며 자신이 처한 지금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정이 안 가는 모습이었다.
전신을 훑어보고 싶어도 사지가 속박당한 상태니 그것도 쉽지 않았다. 그의 두 팔과 양다리는 커다란 십자가에 단단히 구속된 상태였다. 철 수갑과 족쇄를 사용했 기 때문에 남궁상이 몸부림을 칠 때마다 덜컹덜컹 소리가 났다. 그는 거의 일 다경 전부터 이곳에 묶인 채 비류연의 기나긴 설교를 들어야만 했던 것이다.
“상관이야 아주 많지. 경제적인 고수가 되기 위한 첫걸음이니까 말이야.”
그때 비류연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남궁상의 눈에는 악마의 웃음으로 비춰졌다.
“설마 이것도 수련과 관련있는 겁니까?”
“당연하지. 수련과 연관도 없는 걸 내가 왜 시켜? 내가 심심해서 너나 괴롭히려고 그런 몰골로 만들어놓은 줄 아냐?”
“네.”
망설임이 없는 대답이었다.
“호오, 그래? 그렇게 생각했단 말이지? 참고해 두겠다.”
남궁상의 얼굴이 핏기가 싹 빠져나간 듯 창백해졌다.
“먼저 일촌간파를 터득하기 위해서는 안력을 기르는 게 중요하지. 다만 예전에 아미산에 있을 때 비법 구슬 목걸이 꿰기로 일단 기본기는 다졌으니 이건 그 상위 단계의 수련이라고 생각하면 돼. 간단하지?”
비류연의 설명을 듣던 도중 남궁상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어? 잠깐만요. 그때 합숙 훈련 때는 안 계셨잖아요?”
앗, 그랬었지. 잠시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만 비류연이었다.
“아니, 노사부님이 그렇게 가르쳤었다는 이야기야.”
“…. .?”
남궁상이 여전히 의문이 남는 듯 의아한 얼굴을 하자 비류연이 주위를 환기시키는 의미에서 박수를 짧게 두 번 쳤다.
짝짝!
“자자, 그런 사소한 일에 정신을 흐트러뜨리지 마. 지금은 집중해야 할 때이니까.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지.”
그렇게 말하는 비류연의 오른손에는 어느새 햇빛에 반사되어 날카로운 빛을 발하는 비도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씨익!
미소 짓는 비류연의 입은 마치 칼날을 물고 있는 것같이 섬뜩했다.
“그, 그걸 어쩌시려구요?”
“글쎄?”
사람은 항상 긍정적으로 살아야 한다. 긍정적인 사고방식은 언제나 엄청난 힘을 낳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궁상은 너무나 부정적이고도 불길한 상상을 하고 말았 다.
“대사형, 서, 설마 그걸 제게 던지거나 그러진 않으시겠죠? 전 보시다시피 무방비 상태라구요.”
“아니. 그럴 건데?”
전혀 망설임없이 비류연은 선고를 내렸다.
“진짜로요?”
“당연하지.”
설마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저걸 사람이 있는 곳에―특히 사람이 묶여 있는 곳에는―던져서는 안 된다는 것쯤은 기본으로 알고 있을 터이다. 터엉!
남궁상의 오른쪽 귀밑에서 천둥이 울렸다. 십자가의 떨림이 부르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어느새??
던지는 것을 보지도 못했는데 비도는 어느새 자신의 오른쪽 귀밑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박혀 있었다. 물론 날아오는 것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사라라락!
비도에 잘린 머리카락 몇 가닥이 하늘거리며 바람에 날렸다.
“봐, 봤냐?”
“아니.”
“언제 던졌죠?”
“난 잡고 있는 것까지만 봤어.”
“팔이 움직이긴 움직였나?”
“아뇨. 팔은커녕 근육이 움직인다는 것도 못 느꼈어요.”
주위에서 숨을 죽이며 지켜보고 있던 주작단원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누구보다 가장 놀란 이는 진령이었으리라. 하지만 남궁상이 자신의 입으로 수 련을 택했으니 그녀로서도 가슴을 졸이며 지켜보는 것 이외에 다른 방도는 없었다.
“이건 그냥 맛보기야. 이 정도에 놀라면 곤란하다고. 뭐, 처음이니까 지금보다는 조금 살살 던져 줄게.”
덜컹덜컹!
“그걸 또 던진다구요?”
비류연의 손엔 어느새 또 한 자루의 비도가 들려 있었다.
“걱정마! 아직 첫 단계니까 느닷없이 미간으로 던지진 않을 테니까. 뭐, 개인적으로는 지루한 단계 다 뛰어넘고 그렇게 하고 싶지만 죽어버리면 곤란하지 않겠어? 시체 유기하기도 힘들고 말이야. 그건 참 곤란하지.”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말투였다. 아니, 언제라도 진담으로 바뀔 수 있다는 점이 더 무서웠다.
“그럼 어디로?”
“우선 양쪽 귀 정도로 할까? 연습 훈련이라고 생각해.”
그 순간 남궁상의 양쪽 귀가 파르르 떨었다.
“우선 이 ‘귀염둥이’를 오른쪽 귀 아니면 왼쪽 귀 쪽으로 던질게. 그럼 넌 그걸 보고 오른쪽 귀일 때는 왼쪽으로 피하고 왼쪽 귀일 땐 오른쪽으로 피하면 되는 거야. 쉽지?”
“쉽다니요?”
자신의 대사형은 생명경시사상에 경도된 것이 분명하다고 남궁상은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상태로는 많이 움직여 봤자 일 촌(寸) 정도밖에 못 움직인다구요. 그것도 머리만요.”
나머지는 다 묶여 있는 데다가 누가 쇠를 만졌는지 몰라도 족쇄의 품질은 쓸데없이 우수했다. 움직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힘으로 구속을 깨고 나오기에는 역부족 이었다.
“아까 이야기했잖아. 절약하고 살자고. 낭비를 줄이자고. 그러니 일 촌 안에서 피해. 지금은 일단 가볍게 하나만 던지지만 숙달될수록 개수를 늘려갈 테니까.” “거짓말.”
남궁상은 정신이 멍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심리 상태는 너무나 큰 시련에 좌절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집중해 정신을 흐트러뜨리지 마. 공포에 잡아먹히지도 마. 내 밑으로 다 좌절 금지야.”
“그렇게 말해도…….”
“어차피 이 상황에서 그렇게 생각 안 할 사람이 어딨어!’라고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겠지.”
정답, 정곡, 정통, 적중이었다.
“하지만 있어. 분명히 있어. 그러니까 너도 할 수 있어. 그러니깐 해.”
요구는 간단했다.
“그러니까 궁상맞단 소리나 듣는 거야, 이 궁상아!”
비류연이 질책했다.
“자기 자신을 잃지 마.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집중해. 자기를 잃는 순간 너의 존재는 없어지는 거야. 그러니 집중해. 모든 감각을 끌어올려. 그리고 망설임을 버려. 부정적인 마음을 버려. 할 수 있다. 반드시 해낸다. 아니, 난 이미 해냈다고 생각해. 생각의 파편을 모아 하나의 결정을 만들어. 그리고 그동안 감겨 있었던 진실한 눈 을 떠[開眼]. 그리고 똑바로 앞을 직시해.”
슈욱!
다시 한 번 비류연의 손에서 비도가 날았다.
***
‘그 짓을 당하고도 아직 살아 있는 게 기적이지.’
다행히 그의 두 귀는 멀쩡했다. 미간에 새로운 장식을 추가할 필요도 없어졌다. 하지만 그 수련은 시작일 뿐이었다. 비류연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장아장 걸음마 단계’였다. 나중에는 십자가의 구속에서 풀어주기는 했지만 칼날이 주변에 잔뜩 박힌 좁은 공간 안에 들어간 다음 최소한의 동작으로 공격을 피하는 훈련을 계속해 야 했다. 일 촌 이상 움직이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아니,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 촌 이상 움직이면 사방에 박힌 칼날이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었기 때문 이다. 전신을 최소한으로 움직여 자신을 노리는 공격을 피해내는 것이 그 훈련의 목적이었다. 문자 그대로 종이 한 장 차이로 생사의 경계가 갈렸다. 단 한순간의 방 심도 용납되지 않았다. 오감은 물론 육감까지 총동원해서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모든 공격을 피해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마지막 수련의 완성 여부를 확인하는 시험은 더욱 어렵고 무시무시했다. 전신을 일 촌밖에 움직일 수 없는 공간에서 그는 일곱 번 연속으로 날아오는 비도를 피해 내야 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오른쪽 귀를 향해 날아오는 비도를 피해 살짝 몸을 움직이면 적절한 시간 차로 그곳에 이미 두 번째 비도가 날아든다. 이걸 피한다 해도 목의 왼쪽 경동맥을 노리고 세 번째 비도가 날아든다. 그 다음, 또 그 다음. 그런 식으로 일곱 번의 공격이 연속적으로 계속되는 걸 가장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동작으로 피해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런 모든 과정을 거치고도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에 남궁상은 인간의 끈질긴 생명력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존재 의 몸부림은 실로 처절하고 또한 경이로웠다. 그 지옥 훈련에 비하면 유란의 검법은 애들 장난이나 마찬가지였다.
“에잇!”
다시 한 번 유란의 검이 남궁상의 중심 요혈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명문정파의 제자다운 정석적인 공격이었다.
그녀가 지금 펼치고 있는 것은 아미파의 유명한 검법 중 하나인 연화검법이었다. 화산파의 매화검법보다 비록 인지도가 떨어지기는 하나 질적으로 그리 떨어지는 검법은 아니었다. 오히려 수련의 정도와 깊이에 따라 매화검법을 능가할 수도 있는 그런 검법이었다. 그러나 남궁상의 입장에서는 진령을 상대로 이미 신물날 정도 로 겪어본 검법이었다. 아미신녀와의 비무를 대비하기 위해 아미파 검법의 흐름을 몸에 새겨 넣을 필요가 있었고, 그 일에 진령보다 더 적임인 사람은 없었다. 유란 의 수행의 성과가 진령보다 더 뛰어나다면 모르겠지만 그건 또 아니었기 때문에 남궁상이 이 검법을 수월하게 피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아직 두 번째 동작과 세 번째 동작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매끄럽지 않은 것 같군. 거기서는 좀 더 매끄럽게 움직여야 속도가 붙을 걸세.”
점입가경이라더니 이제는 충고까지 던진다.
“깔보지 마세요!”
“깔보는 게 아니라 충고해 주는 걸세.”
남궁상은 억울한 듯 항의했다. 다시 몇 번의 공격이 반복되었지만 남궁상은 여전히 요리조리 잘 피해냈다. 그의 검은 아직도 검집에서 채 뽑혀 나오지 않고 있었다.
“이제 그만 포기하는 게 어떻겠나?” 남궁상이 물었다.
“아, 아직입니다!”
유란이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음이 다급해지자 소녀의 검이 점점 더 빨라졌다. 그러나 그만큼 정교함은 떨어졌다.
“마음을 다스리게. 검끝이 흐트러졌어.”
그런 검은 전혀 치명적이지 못하다. 비류연에게 맨날 한 소리 듣던 것을 지금은 남에게 사용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남궁상은 놀랐다.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이런 검으론 나는 물론 입관 시험관 그 누구도 이기지 못하네.”
유란이 고전을 면치 못하자 유운비도 덩달아 다급해졌다. 유란이 자존심이 상하긴 하겠지만 더 이상 방관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입관 시험에서 남보다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는 자격을 두 눈 뜨고 놓칠 수는 없었다.
유운비는 초조한 마음을 달래며 기회를 기다렸다. 그리고 남궁상의 등이 자신을 향해 환히 드러나는 순간 검을 뽑았다. 쏘아진 화살처럼 빠른 찌르기였다.
유운비의 찌르기는 점창의 제자답게 빠르고 정확했다. 때문에 그의 검은 그대로 남궁상의 머리통을 관통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스르르륵!
유운비의 검이 지척에 이르렀을 때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린 듯 남궁상의 신형이 스르륵 왼쪽으로 움직였다.
“어어어……!”
유운비의 입이 당황한 심정을 그대로 토해냈다. 남궁상이 일촌 간격으로 정확히 유운비의 빠른 찌르기를 피해낸 것이다.
점창의 검은 찌르기로 시작해서 찌르기로 끝난다고 전해진다. 해[日]를 쏘아[射] 떨어뜨린다는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일검법(射日劍法)은 찌르기에 모든 것이 집중되어 있는 검법이다. 쓰는 검들이 다른 문파의 검보다 얇고 끝이 뾰족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베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단지 찌르기로 가기 위 한 징검다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점창의 검객은 찌르기에 자신의 생명을 건다. 단 찌르기는 빠르고 위력적인 만큼 실패했을 때 자세를 되돌리기 힘들다. 다시 되 돌아오는 것을 상정한 찌르기는 그만큼 돌진력에서 손해를 보기 마련인 탓이다. 때문에 자신하던 찌르기가 너무나 쉽게 파훼당하자 유운비의 정신적 충격은 이만 저만 큰 것이 아니었다. 거기다 그의 수난은 그곳에서 끝난 게 아니었다. 실패한 찌르기가 향하는 그곳에 유란의 모습이 있었다. 유운비도 당황했고 유란도 당황했 다.
비록 빗나간 찌르기였지만 여전히 위력적이었다. 조금 위력이 감소했다 해서 살상력이 떨어진 것은 아니었기에 유란은 궁상을 공격하는 것을 포기하고 자신의 목 젖을 향해 날아오는 유운비의 검부터 막아야 했다.
찌르기를 막는 방법은 두 가지다. 흘리거나 쳐내거나. 베기와 다르게 가만히 있으면 당하기 십상인 게 찌르기였다. 그러나 흘리기에는 자세가 너무 불안정했다. 남 궁상을 몰아붙이는 데 전념한 나머지 자세가 많이 흐트러져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대처법은 하나뿐이었다. 유란은 급히 허리를 돌려 유운비의 찌르기를 쳐 냈다.
따앙!
그러나 회심의 일격으로 준비된 만큼 이 공격에 실린 내공은 매우 위력적이었다. 게다가 오히려 찌르기를 쳐낸 자신의 손이 튕겨져 나올 줄은 그녀로서도 미처 예 상치 못한 사실이었다. 점창의 찌르기가 무식하다더니 오늘 이런 방식으로 체험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왜 점창파 사람들을 욕할 때 “멈추지 않는 수레’, ‘돌아 가는 법을 잊어버린 돌진 바보’라고 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아주 약간의 위력 반감과 아주 약간의 방향 전환으로 인해 유운비의 검은 유란의 어깻죽지를 향해 날아갔다. 여기서 문제는 유운비조차 자신의 찌르기를 제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평생 검을 들 수 없게 될지도 모를 다급한 상황에서 남궁상의 검이 검집에서 뽑혀 나왔다. 뇌전검룡이란 별호에 부끄럽지 않은 쾌속한 발검과 동시 에 그는 소녀의 어깨를 향해 날아가는 청년의 찌르기를 쳐냈다.
땅!
맑은 검명과 함께 찌르기는 유란은 어깨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두 사람 모두 자세가 무너진 상황. 남궁상은 재빨리 유운비의 뒤로 돌아 그의 등을 살짝 밀었다.
“어어어어……!”
“꺄아악!”
당황한 목소리, 짧은 비명과 함께 유란과 유운비의 몸이 한데 얽혀들었다. 자세를 잡아보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몇 번의 깽깽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마침내 열렬한 포옹과 함께 쓰러지고 말았다.
쿵!
먼지가 걷혔을 때 좌절 자세가 된 유운비는 자신의 오른쪽 목덜미에서 서늘함을, 하늘을 보며 넘어진 유란은 자신의 목젖에서 서늘함을 느꼈다. 남궁상의 검날은 유운비의 목에 닿아 있었고 그 끝은 유란 자신의 목젖을 겨누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 모두 볼썽사납고 꼴사납고 수치심까지 드는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그 검끝에 서 느껴지는 무형의 압력 때문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짝짝!
“거기까지!”
비류연의 신호가 울리자 그제야 남궁상은 검을 거두었다.
“거봐! 삼 초로도 충분하잖아!”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비류연이 핀잔을 주었다.
“그, 그렇네요.”
남궁상이 얼빵하게 대답했다. 조금 전 보여주었던 위풍당당했던 풍모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근데 새로운 손님이 오셨군.”
“손님이요?”
“손님들이라 해야 하나?”
무슨 말인지 몰라 남궁상이 의아해하고 있을 때 그의 등 뒤에서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흐음, 멋지게 져버렸구나!”
남궁상의 몸이 홱 돌아갔다.
그곳에는 한 백의여인이 어린 남매 두 사람을 데리고 서 있었다.
“누, 누구지?”
남궁상은 무의식적으로 숨을 삼켰다. 엄청난 위압감이었다. 당금 무림에서 이 정도의 기도를 뿜어내는 자는 많지 않았다. 남궁상도 주위에 이 정도 기도를 뿜어내 는 괴물들이 여럿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압도당하고 말았으리라. 남궁상이 그녀의 기세를 의연하게 받아넘기자 백의여인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호오, 어린 나이에 제법 대단한 성취구나.”
“과찬이십니다, 선배님!”
남궁상이 공손한 태도로 대답했다.
“흠, 내 제자 아이를 저렇게 만든 게 자넨가?”
“그렇습니다.”
남궁상은 순순히 인정했다.
‘제자?”
제자라는 소리에 유란의 눈이 번쩍 떠졌다. 패배의 충격 때문에 혼미하던 정신에 번쩍 불이 들어왔다. 자신의 꼴을 인지한 유란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아직 도 유운비는 자신의 몸 위에 있었던 것이다.
“아, 아니, 유 소저… 이건……..
유란과 눈이 마주친 유운비는 어떻게든 변명을 해보려 했으나 차마 허리가 삐끗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고 말할 용기는 없었다.
“이 변태!”
짜악!
엄청난 타격음과 함께 유운비의 눈에서 별이 번쩍였다. 그 소리와 동시에 떠오른 그의 몸뚱이는 공중에서 한 바퀴 회전한 다음 저만치 날아갔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크고 서슬이 퍼런지 남궁상은 하마터면 눈을 질끈 감을 뻔했다.
서둘러 몸을 일으킨 유란은 급히 몸에 묻은 먼지를 털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다음 여인의 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었다.
“제자 유란이 사부님을 뵙습니다!”
백의여인은 바로 유란의 사부인 아미신녀 진소령이었다. 그녀는 두 남매를 데리고 중양표국으로 가는 도중 익숙한 투기를 느끼고 이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던 것이 다.
“일어나거라.”
흙바닥을 한번 뒹군 덕분에 유란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제자의 모습을 한 번 훑어본 여인이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 그러게 너무 자신을 과신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더냐? 언젠가 한 번 큰코다칠 줄 알았다.”
유란은 부끄러워 감히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제자 아이가 결례를 범하진 않았나 모르겠네.”
이렇게 물으니 오히려 황송한 쪽은 남궁상이었다.
“아닙니다. 이번에 규정이 바뀌었다니 따라야지요. 정당한 비무였습니다.”
“그리고 패했지.”
진소령의 직설적인 말에 다시 유란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부끄러워할 것 없다. 먼저 들어가서 사 년이나 있었는데 너보다 약했다면 그런 곳에 뭣 하러 널 넣으려 하겠느냐? 그리고 왜 많은 명문정파들이 자신의 제자들을 하나라도 더 많이 그곳에 넣으려 하겠느냐? 이제 좀 우물 밖이 보이느냐?”
아미산은 폐쇄적이다 보니 같은 동문들밖에는 무공을 겨룰 수가 없었다. 타 문파와의 교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문파의 특성상 그것도 그리 많지 않았다. 천무학 관에 넣으려는 것도 세상을 좀 더 경험시켜 주고 타 문파와 더욱 많은 교류를 할 수 있게 해 시야를 넓혀주고자 했기 때문이다.
“자네의 이름은?”
“천무학관 사 학년 남궁상이라 합니다.”
남궁상이 검을 쥔 채 읍하며 말했다.
“아!”
“아!”
유란과 유운비의 입에서 동시에 경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는 동시에 외쳤다.
“뇌전검룡!”
“주작단주!”
주작단이 유명해지기는 꽤 유명해진 모양이었다. 사실 유란 또래에서 주작단은 이미 우상에 가까운 대접을 받고 있었다. 그만큼 그들의 행보는 독보적이었던 것이 다. 다만 비류연에게 너무 휘둘림을 당하다 보니 그런 사실을 자각할 겨를이 거의 없었을 뿐이다. 유란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이럴 수가! 저 사람이 그 유명한 뇌전검룡 남궁상이라고? 하지만 저 초라하고 비실비실한 몰골은 뭔가? 위풍당당하고 늠름하고 비범하다는 강호의 소문이 잘못 된 거란 말인가? 아니면 그동안 말 못할 고초를 겪은 걸까?”
너무나 충격적인 사실에 놀라 잠시 얼이 빠진 유란은 사부 진소령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렇군. 자네가 바로 령아가 말하던 그 아이군.”
그 말에 남궁상은 화들짝 놀랐다.
“선배님께서는…….”
“소개가 늦었군. 난 아미(峨嵋)에서 온 진소령이라 하네.”
“아, 아미신녀!”
뜻하지 않은 뜻밖의 만남이었다. 그가 예상했던 것은 잔뜩 긴장한 상태에서 진령을 통해 정식으로 소개받는 것이었지, 이렇게 그녀의 제자를 흙바닥에 한번 굴린 그 자리에서의 돌연한 만남은 아니었다. 그동안 꿈에서도 자신을 괴롭히고 현실에서도 간접적으로 그를 괴롭히던 장본인의 이름 석 자를 듣는 순간 남궁상은 심장 이 튀어나올 만큼 놀랐다. 명성도 명성이었지만 지금 문제가 되는 건 그 드높은 명성이 아니었다. 그녀가 바로 진령의 고모라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느닷없이 그 는 심판대 위에 올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때 누군가가 그의 엉덩이를 툭 걷어찼다.
“뭐 해, 빨리 인사 않고?”
얼어붙어 있던 남궁상의 엉덩이를 보이지 않는 빠른 솜씨로 걷어찬 사람은 바로 비류연이었다. 그러고 보니 마음의 준비 없이 받은 이름 석 자를 감당할 수 없어 잠시 넋이 나가 있었던 것이다.
“아! 처… 처음 뵙겠습니다. 정식으로 인사 올리겠습니다. 남궁세가의 삼남 남궁상이라고 합니다.”
“선배님의 조카인 진령, 진 소저와의 혼인을 적극적으로 희망하고 있으며 그것을 위해서라면 어떤 시련에도 굴하지 않겠으며, 물불 안 가리고 분골쇄신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뒷부분은 남궁상이 한 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비류연이 그의 목소리를 흉내 내서 한 말이었다.
“그게 정말인가?”
진소령이 반문했다.
“아니… 그게…….”
자신의 마음을 가장 어려운 사람 앞에서 적나라하게 폭로(?)당하자 남궁상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아닌가?”
진소령이 되물었다.
“아니요. 그럴 리가요. 사실입니다. 어떤 시험도 이겨낼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렇군. 어떤 시험도 이겨내겠단 말이지?”
진소령은 감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 그렇다면 아무래도 자네와 검을 섞어봐야 할 것 같군.”
진소령은 그 한마디를 끝으로 망설임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아니… 저……”
설마 보자마자, 아니, 자신임을 확인하자마자 다짜고짜 기다렸다는 듯이 검을 뽑을 줄은 몰랐던 남궁상은 당황하고 말았다. 그가 그동안 고심하고 심사숙고하여 짜놓았던 계획에서 현재 상황이 한참이나 빗나가 버리자 어떻게 변화한 상황에 대처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진소령은 아미산을 나올 때 작정하고 온 것이 분명했다.
‘어떡하지?’
상황이 이렇게까지 꼬이다니. 이게 다 대사형의 쓸데없는 참견 때문이었다. 틀림없이 고의였다. 남궁상은 속으로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진소령이 이 타이밍에서 나타날 줄은 비류연도 미처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극적인 변화에 당황해 우물쭈물하는 남궁상에 비해 비류연의 대응은 달라도 한참 달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