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8권 7화 – 련(鍊)! 련(鍊)! 련(鍊)! 수련(修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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련(鍊)! 련(鍊)! 련(鍊)! 수련(修鍊)!

-일련일천타鍊一千打)

“헉헉헉!”

남궁상은 달렸다. 그가 평생을 쌓아놓았던 내공은 지금 전적으로 오직 두 발을 움직이는 데 사용되고 있었다. 들쭉날쭉 뻗은 무성한 나뭇가지들이 뺨을 스치고 지 나갔지만 그는 얼굴에 하나둘 그어지는 붉은 생채기에는 상관도 하지 않고 마치 달리기밖에 모르는 사람처럼 달렸다. 보다 빨리, 보다 낮게, 보다 멀리 떨어져야 했 다. 오직 그 길만이 사는 길이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남궁상은 믿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울고 싶었다. 누구보다 믿고 의지하던 동료들이 어떻게 자신을 배신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누구보다 자신을 도와줘야 할 친구들이 자신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수 있단 말인가?

순간 사지에 두고 온 한 여인의 얼굴이 뇌리 속을 스쳤다. 그러나 그는 이내 고개를 흔들어 그 씁쓸한 상념을 털어버렸다. 그녀에게는 미안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 다. 일단 살고 봐야 했다.

무성한 산림에 가려졌던 시야가 한순간에 확하고 밝아졌다. 산길이 끝나고 개울이 나온 것이다. 물의 흐름이 잔잔하고 경사가 완만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하류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앞으로 조금만 더 가면…….

이 지옥 같은 산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탈출 가능성에 대한 희망이 보였다. 그 어느 때보다 밝은 빛이었다. 그러나 그 희망의 빛은 그 어느 때보다 빨리 사라 졌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남궁상은 계곡 왼쪽에 위치한 풀숲을 바라봤다.

“그만 나오게!”

잠시 후, 남궁상이 바라보던 풀숲에서 부스럭 소리가 나더니 한 사람이 걸어나왔다. 청의 무복을 입은 부드러운 인상을 지닌 청년이었는데 그의 허리에 매달린 장 검에는 오직 무당파의 제자만이 소지할 수 있는 독문표식이 새겨져 있었고 산바람에 펄럭이는 그의 푸른 소매에는 용의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청년은 구룡의 한 사람이자 그의 절친한 친우이며 주작단의 부단주이기도 한 유유검 현운이었다.

의형제나 마찬가지인 친우의 얼굴을 본 남궁상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현운, 자네였나?”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꼭 나를 가로막아야 하겠나?”

현운이 대답하지 않자 남궁상이 애잔한 목소리로 다시 한 번 사정했다.

“이보게, 현운. 자네가 아직도 내 친구라면 날 그냥 보내주게.”

간절한 목소리로 남궁상이 부탁했다. 그러나 현운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안하네, 남궁.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나, 이대로 자네를 보낼 수 없다는 것을. 그 사실은 나보다 자네가 더 잘 알지 않나.”

“…….”

“포기하게. 그리고 그만 돌아가세. 모두들 기다리고 있네.”

그러자 남궁상은 몸을 세차게 흔들며 그 제안을 거부했다.

“절대로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겠네! 그곳은 지옥이야!”

남궁상이 발작적인 목소리로 외쳤다. 가슴속에 쌓여 있던 진심이 뭉쳐져 튀어나온 말이기에 그 안에는 진실함과 절박함이 고스란히 맺혀 있었다. 그러나 그런 절 박함도 현운의 수양을 깨뜨리고 변심을 획책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미안하네, 남궁. 그래도 난 자네를 데려가야겠네. 아마 자네를 데려가지 못하면 지옥을 보는 것은… 우리가 되겠지.”

“친구를… 친구를 배신하겠다는 건가?”

남궁상의 말이 아픈 곳을 찔렀다. 양심이 있다면 어느 정도 가책을 받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도 좋아서 이러는 줄 아는가? 나도 괴롭다네.”

“아니! 자넨 모르네! 자넨… 자넨… 그걸 겪어보지 못해서 그래! 그걸 겪어봤다면 자네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을 거야! 그리고 지금처럼 내 앞을 가로막지도 못했 을 거네! 그것이 인간으로서 할 짓이 아니란 걸 알았을 테니까 말이야!”

“하지만 나는 겪어보지 못했지 않나? 그러니 자네의 감정은 피상적으로밖에 체감하지 못하네. 게다가 나의 임무는 자네를 데리고 돌아가는 것이라네.”

현운의 의지는 확고했다. 남궁상도 더 이상 대화로는 이 친구를 설득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돌아가세. 진 소저도 기다리고 있네. 자넨 그녀에게 미안하지도 않은가?”

그 말은 효과가 있었다. 남궁상은 고민했다. 번뇌했다. 갈등했다. 그리고 궁상떨었다. 꾹 다물어져 있던 남궁상의 입이 열렸다.

“그녀라면… 그녀라면 날 이해해 줄 거라 믿네.”

번뇌의 끝트머리에 나온 그 대답에 현운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 같으면 그렇게 자신있게 확신하지 않겠네. 꼭 지나가야겠나? 그렇다면 난 자네를 막는 장애물이 될 수밖에 없네.”

안타까운 듯한 목소리로 현운이 말했다.

“현운, 자네가 과연 나를 막을 수 있을까?”

남궁상이 현운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의 전신에서 진한 살기가 자욱한 물안개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에 대응하기 위해 현운도 전신의 기운을 끌어 모았다. “필요하다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한 현운은 서슴없이 검을 빼 들었다.

“날 욕해도 좋네. 그러나 난 자네를 데리고 돌아갈 걸세.”

그는 이미 마음속에 일렁거리던 번뇌를 정리한 듯했다. 망설이지 않는 자는 언제나 강하다.

“현운, 무당에서는 친구에게 겨누라고 검을 주는가?”

남궁상이 비통한 목소리로 외쳤다.

“남궁, 나도 좋아서 이러는 것은 아니네! 자네만 돌아가면 될 일 아닌가? 나도 자네와 검을 겨루고 싶지는 않아!”

“아까도 말했지 않나. 날 입 아프게 하지 말게. 그 지옥에는 절대 돌아가지 않을 걸세.”

“쯧쯧, 굳이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들이키려 하는가? 자네가 그 벌주를 감당할 수 있겠나?”

“아직 검에 있어서 자네에게 밀린다고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네, 현운. 주작단의 단주는 아직 나 남궁상일세.”

남궁상도 검을 마주 뽑았다. 같은 구룡의 일인이지만 아직 한 번도 현운에게 꿀린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가 아무리 대무당파의 제자이고 무당의 현검(玄劍) 을 극한까지 수련한 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벌주가 한 잔이라고 누가 그랬나?”

현운이 손을 들자 풀숲에서 한 인영이 걸어나왔다. 여인이었다.

“궁상아, 그만 돌아가는 게 어떻니?”

“누이…….”

그녀는 다름 아닌 칠봉의 한 명이자 남궁상의 쌍둥이 누나인 남궁산산이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녀의 등장은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노학, 금영호, 당삼, 당문혜,

모두 한솥밥을 먹고 함께 고생한 동료들이다. 한 식구나 다름없는 주작단의 동료들이 그의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그만 돌아갑시다, 대장!”

노학이 말했다. 그는 가끔 그를 단장이 아니라 대장이라 불렀다.

“이런 짓은 그만두게. 내 계산대로라면 이 일은 손해만 막심할 뿐 아무런 이득도 없다네.”

금영호가 충고했다. “내 계산대로라면’이라는 말을 꼭 붙이는 것은 언제나 그의 입에서 떨어지지 않는 입버릇이었다.

“아직 늦지 않았어. 자넨 약한 마음에 중독된 거야. 여기서라면 아직은 해독할 수 있을 걸세. 하지만 여기서 더 늦으면 돌이킬 수 없을 거야. 그 지옥을 꼭 경험하고 싶나?”

당삼이 진심 어린 마음으로 충고했다.

“나도 당삼의 말에 동감이에요. 그 독이 더 퍼질수록 더 괴로워질 뿐이에요.”

당문혜가 오랜만에 당삼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자네들 말고도 또 있나?”

“물론.”

대답과 동시에 풀숲에서 익숙한 얼굴들이 나타났다.

소림의 일공, 화산의 조천우와 화설옥, 모용세가의 모용취, 단목세가의 단목수수, 그리고 항상 있는지 없는지 헷갈린다는 평을 듣고 있는 색깔이 엷을 대로 엷은 곤륜의 이자룡과 청성의 청문, 그리고 황보세가의 장녀 황보옥연이었다.

그와 진령을 제외한 주작단 전원이 그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현운이 주위를 한 번 둘러본 후 다시 말했다.

“내가 말했지 않나. 벌주는 한 잔이 아니라고. 자네가 우리 모두의 벌주를 감당할 수 있겠나?”

“그 벌주를 몽땅 마시고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난 절대, 절대로 그 지옥으로 돌아가지 않을 걸세!”

남궁상은 검을 힘껏 움켜쥐고는 말했다.

“거기로 돌아갔다가는 분명 살해당하고 말 걸세.”

“하지만 자네를 잡아가지 않으면 우리가 살해당할 걸세. 게다가…….”

“게다가?”

“어차피 달아나도 언젠가는 살해당하고 말 걸세. 갈굼을 가장 많이 당한 게 자네면서도 그 사람을 아직도 그렇게 모르나?”

“그, 그건….”

확실히 현운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그러니 차라리 돌아가서 운명에 저항해 보는 게 어떻겠나?”

남궁상이 고개를 푹 숙였다. 마음속의 갈등이 그의 얼굴 위로 역력히 드러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나… 난 절대 돌아가지 않아.”

크오오오오오!

갑자기 괴성을 지르며 남궁상이 다짜고짜 주작단 동료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윽! 맛이 갔다! 궁상이가 눈깔 뒤집어졌다!”

“모두 막아!”

그러나 이번에 활약하여 자신들의 투명도를 좀 낮춰보려는 이자룡과 청문, 황보옥연, 이 세 사람으로 구성된 투명 삼인방에 의해 펼쳐진 첫 번째 저지선은 간단히 돌파당하고 말았다. 남궁상의 검에 실린 검력은 장난이 아닌 위력이었다.

“쳇, 무식하게 강해져서는……..

현운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정말 이대로는 따라잡을 수 없는 격차가 벌어질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 격차를 줄이기 위해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과정을 생각하니 소름이 오싹 돋았다. 역시 그 길만은 사양하고 싶었다.

“막아! 반드시 막아! 안 막으면 우리가 죽어!”

“앗, 저쪽으로 간다. 그쪽에서 막아!”

“와아아아아!”

친구들이 개 떼처럼 달려들었다.

“다들 마구잡이로 달려들지 마. 합격술을 펼쳐! 단번에 제압하세.”

사실 그들의 합격술은 이미 완숙한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언제나 수준 차가 월등한 고수들과 붙다 보니 자연히 익히게 된 기술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모이지 않은 이상 허점은 드러나기 마련이었다. 남궁상은 자신이 담당했던 부분을 향해 돌진했다.

“이런!”

원래라면 남궁상이 맡아서 처리해야 할 부분이었지만 지금은 공격하느라 바쁜 관계로 수비를 할 수는 없었다. 주작단의 합동 공격은 어이없게 깨지고 말았다. 확 실히 남궁상은 얼마 전과는 전혀 다른 기동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신속함과 정확성, 그리고 힘, 모든 면에서 그들을 상회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지옥의 성과라는 건가?”

현운은 친구의 변모에 부러워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남궁상은 한 명, 그들은 열여섯에서 둘을 뺀 나머지였다. 놓친다면 체면 문제였다. 이제 친구고 뭐고 없었다. 잡느냐 도망치느냐만 있을 뿐이었다. 그때 한 여인이 풀숲에서 나와 그의 진로를 가로막았다.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남궁상은 절망을 맛보아야만 했다.

“어… 어떻게… 당신이…….”

마지막으로 그를 가로막은 사람, 그 사람은 다름 아닌 하나뿐인 정인(人) 진령이었다. 쥐고 있던 검이 힘을 잃고 스르륵 땅 아래로 떨어졌다.

“미안해요, 상. …저도 어쩔 수 없군요.”

시선 마주치길 피하며 진령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령… 당신마저…….?”

청천벽력(靑天霹靂)이었다.

툭!

남궁상이 넋을 놓고 방심 상태에 빠진 틈을 타 어느새 뒤로 다가온 현운이 그의 목뒤를 쳐서 기절시켰다. 그는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휘유~ 너무 친구들을 힘들게 하지 말게, 남궁.”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현운이 말했다.

“끌고 가세!”

질질질, 촉촉이 젖은 산길에 일정한 간격으로 벌어진 두 가닥 줄이 생겨났다. 남궁상의 두 발이 땅에 끌리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현운과 당삼은 그를 각각 좌우 에 한쪽 팔씩 낀 채 산 위로 운반해 갔다.

남궁상은 당삼과 현운의 사이에 빨래처럼 널린 채 끌려오고 있었다. 두 사람이 구속하고 있던 팔을 풀자 좌절 중인 남궁상은 두 다리로 설 힘도 없는지 풀썩 땅바 닥에 주저앉듯 무릎을 꿇었다. 현운과 당삼은 고개를 한껏 꺾어 시선이 위를 향하게 한 후 말했다.

“데려왔습니다, 대사형!”

그들이 고개를 들어 위쪽을 바라본 이유는 그들의 대사형 비류연이 공중에 누운 채 둥둥 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인간에게 무슨 특별한 공중 부양 능력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의 몸 안에 가득 차 있던 기가 갈 곳을 찾지 못하고 밖으로 배출되면서 이런 현상이 일어난 것도 아니었다. 그냥 나무랑 나무 사이에 실이 하나 연결되어 있었고 그는 거기에 몸을 기댄 채 누워 있는 것뿐이었다. 감고 있던 비류연의 눈이 살짝 떠졌다.

“왔냐?”

고개만 살짝 돌린 채 비류연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어디서 잡았냐?”

“개울 하류에서 잡았습니다.”

“흐흠, 전보다는 멀리 갔군.”

“그렇습니다. 저번에는 중류쯤에서 잡혔으니까요.”

현운이 대답했다.

“이번이 몇 번째지?”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비류연이 물었다.

“세 번째입니다.”

현운이 손가락을 세 번 꼽아보더니 대답했다.

“의지 약한 친구가 있다면 그 부족한 의지가 되어줘야 하는 게 친구 된 도리 아니냐? 저 의지박약아를 감시하는 것은 너희들 몫 아니었냐? 저번에 다시 한 번 놓치 면 어떻게 된다고 했더라?”

“그… 그건…….?”

현운은 우물쭈물하기만 하고 대답하지 못했다. 아마도 매우 끔찍한 사태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에 일부러 그의 뇌가 거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왜, 기억이 안 나냐?”

“아, 안 나다니요. 확실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대답해 봐.”

“트… 특별 수련 과정을 밟게 될 거라고…….”

그 과정을 생각하자 벌써부터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안 좋은 것은 비단 그 혼자뿐만이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예전에 받아왔던 수련을 반복한 것뿐이다.

“약속은 지켜야겠지? 너희들은 특별히 곽 노사에게 부탁하도록 하지. 다른 한 사람은 앞으로 바빠질 테니까 말이야.”

곽 노사는 바로 염도를 가리켰다.

“불만있냐?”

“어, 없습니다.”

왜 없겠는가. 한 달을 풀어도 동이 나지 않을 불만이 쌓여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책임을 회피하고 약속을 어기려 한다면 그들의 머리 위로 재앙이 떨어질 게 분명 했다. 그 재앙은 줄 위에서 훌쩍 뛰어내려 부복하고 있는 남궁상의 앞에 섰다.

“자, 그럼 이제 너를 어떻게 처분할지가 남았구나.”

비류연이 남궁상의 주위를 천천히 돌며 말했다.

“…처분에 맡기겠습니다.”

남궁상은 자포자기하고 눈을 감았다. 자유를 찾는 탈출이 실패로 돌아간 이상 더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했다. 아니, 오히려 해로웠다.

당삼도 눈을 질끈 감았다.

‘삼복구타권법…….’

남궁상의 앞날은 십중팔구 이걸로 정해진 듯했다. 그러나, 

“훌륭하구나.”

비류연이 말했다. 분명 남궁상을 향한 말이었다.

“예?”

뜻밖의 말을 들은 남궁상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반문했다. 그의 낯빛은 이미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알고 있는 듯 파리한 잿빛으로 물들어 있는 중이었다. 거기에 당 황의 색채가 가미되었다. 모두의 예상을 벗어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비류연은 남궁상을 응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칭찬을 한 것이다. 남궁상은 잠시 푸 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곧 무너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봐두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 때문이었다. 이렇게 빨리 우주 종말의 날이 올 줄은 미처 예상치 못한 사태였다. 그러나 올려다본 하늘은 한참이 지나도록 무너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두 번이나 실패하고도 포기하지 않은 그 정신만은 높이 사주마. 아주 훌륭해. 사람이 한두 번 실패했다고 쩨쩨하게 풀 죽어서 포기하면 안 되지. 안 그러냐, 궁상 아?”

“무, 물론입니다.”

남궁상이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두컴컴했던 그의 앞길에 희미한 한줄기 서광이 비추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빛은 아직 무지(無知)의 몽매(蒙昧)함처 럼 흐리기만 했다.

비류연이 매우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걸 알고 있다니 장하구나. 실패는 병가지상사라고 하지 않았냐. 병가에선 늘상 있는 일이라고. 사람은 때로는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포기하지 않아야 되 는 일들이 있는 법이지. 궁상이는 그걸 잘 알고 실천한 것 같다.”

비류연이 장하다는 듯 남궁상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주었다. 다들 그 손길에 내가중수법이 가미된 게 아닌가 의심했다. 겉보기에는 멀쩡해도 이미 뼈가 바스러 져 있고 내장이 상해 있을지도 몰라.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과, 과찬이십니다, 대사형.”

어쩐지 갑자기 몇 번 칭찬을 한다 싶더니 분위기가 묘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니 몇 번 실패했다고 해서 수련을 그만두어서는 안 되지 않겠냐? 그런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는 것은 무인의 수치지. 그런 꼴불견인 녀석을 사위로 받아들일 가문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이 험난한 시대에 그런 겁쟁이를 사위로 들여서 어디다 쓰겠냐. 안 그러냐, 진령아?”

갑자기 자신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진령은 화들짝 놀랐다. 그러나 물었으면 대답을 해야 했기에 마냥 놀라고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비류연의 보이지 않는 시선이 그녀를 압박하고 있었다. 이런 대화의 흐름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한 가지뿐이었다.

“그, 그렇습니다! 대사형의 말씀이 백번 옳아요.”

진령이 마지못해 동의했다.

“너도 그런 겁쟁이랑 혼인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겠지?”

“그, 그건…….”

진령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비류연은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응? 설마 그런 겁쟁이랑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거냐? 아무런 의지도 안 되는, 자신의 기대를 매번 저버리기만 하는 그런 겁쟁이를? 무슨 일이든 한 번 실패에 좌절하고 포기하고 절망하고 재도전하기를 겁내는, 용기라고는 개미 눈곱만큼도 없는 그런 찌질이랑? 진짜진짜진짜 평생을 함께하고 싶으냐?”

“무, 물론 아니에요. 그런 겁쟁이랑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 여자가 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요? 혼인이란 게 애들 장난도 아니고 말이죠.”

혼인이란 영혼을 함께 나누는 행위인 것이다. 연애와 혼인은 또 한 차원 다른 문제인 것이다. 신뢰할 수 없는 사람과 평생을 함께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이었다.

“그럼그럼! 그렇고말고. 한 남자의 아내가 되고 싶어서 혼인하는 거지, 한 찌질이의 보모가 되고 싶어 혼인하는 여자가 세상천지에 어디 있겠느냐?”

“맞습니다. 안 그래도 남자들은 정신 연령이 낮아서 여자들이 고생인데 개념없이 찌질거리면 곤란하죠. 곤란하구말구요. 평생 고생 바가지로 할 일 있나요?” 진령의 말에 맞장구를 쳐준 비류연은 다시 남궁상을 바라보았다.

“것 봐라. 진령이도 동의하지 않느냐? 궁상아, 설마 너도 자신을 믿고 있는 여자를 실망시키는 그런 겁쟁이가 되고 싶지는 않겠지?”

남궁상은 속으로 식은땀을 왕창 흘렸다.

이야기가 여기까지 진행되었는데 전 차라리 겁쟁이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것은 곧 전 진령과 혼인하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 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무, 물론입니다. 절 믿어주는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제가 배신할 수가 있겠습니까?”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뜨금했다. 엄밀하게 따지고 보면 그 신뢰라는 것을 힘들다는 이유로, 죽을 것 같다는 이유로, 벌써 세 번이나 배신하지 않았던가! 갑자기 자신이 천하에 몹쓸 놈이 된 듯한 죄책감이 물밀듯 밀려들어 왔다.

“그렇다면 네가 선택해라.”

“무, 무엇을 말입니까?”

“지금껏 네가 해왔던 수련(修鍊)을 계속할 것인지, 아니면 여기서 그만둘 것인지 말이다. 난 너의 선택에 일절 관여하지 않겠다.”

너무나 의외의 제안에 남궁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것이 꿈이라 해도, 현실이라고 하는 편보다는 더 쉽게 납득이 갈 것 같았다.

“저, 정말이십니까, 대사형?”

“너, 내가 거짓말하는 것 봤냐?”

“모, 못 봤죠.”

오히려 말로 내뱉은 게 너무나 황당해도 현실로 만들려고 해서 더 문제였다. 비류연은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었기에 지금껏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럼 정말로 관여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물론.”

“진짜로요?”

“어허, 또 궁상떤다. 진.짜.로!”

비류연이 또박또박 대답했다.

“그, 그럼…….”

남궁상은 대답하기 전에 주위의 동료들을 하나씩 하나씩 훑어보았다. 모두들 자신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마지 막으로 멈춘 곳은 진령이 서 있는 곳이었다. 심려가 가득 담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다시 밀려들어 오는 죄책감에 가슴이 뜨끔했다. 남궁상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울렁이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자신이 지금까지 해온 수련을 상기하니 갑자기 속이 울렁거렸던 것이다.

‘생각하지 말자. 생각하지 말자…….?

자신이 이 산에 와서 무엇을 하고 무엇을 겪었었는지 기억해 내면 겨우 굳혔던 결심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그래, 한 번 죽지 두 번 죽나.’

남궁상이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는 그의 마음이 다시 변심하는 게 두렵기라도 한지 재빨리 외쳤다. “하겠습니다! 어떤 수련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절 단련시켜 주십시오, 대사형!”

이런 결정을 내렸다는 것만으로도 이 당시 남궁상의 정신이 얼마나 혼미했는지 어림짐작할 수 있다.

“음, 네 결심이 가상하구나! 오냐! 맡겨둬라. 나만 믿으면 돼, 나만!”

비류연은 흡족스러운 듯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수련이란 게 뭐냐? 수련의 련(鍊)은 정련(精鍊)할 때의 련(鍊)이다. 그럼 정련이란 뭐냐? 쇠를 두드려 강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좋은 검은 수많은 정련 과정을 거 치면서 완성된다.”

모두들 그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일련일천타(鍊ᅳ打)라는 말이 있다. 불꽃 속에서 천 번의 망치질을 해야 비로소 일련이 된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백련정강으로 만든 검이라 하면 십만 번의 담금질을 거쳐 만들어진 쇠다. 앞으로 너를 백련정강검보다 더 단단한 한 자루의 검으로 만들어주마. 그러니…….”

비류연은 한 호흡 쉰 후 힘주어 말했다.

“각오하도록!”

씨익 웃으며 비류연이 말했다.

남궁상은 어쩐지 비류연의 수법에 얼렁뚱땅 넘어간 것 같아 마음이 찜찜했다. 그러나 이미 사태는 돌이킬 수 없는 길을 지나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이후였 다. 이미 자신의 말은 무를 수 있는 단계를 지나가 버렸다. 이렇게 하여 남궁상은 자발적으로 비류연의 마수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그는 지금까지 겪었던 그 괴로웠던 수련들이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는 것을 이때까지만 해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자신의 손으로 스스로 지옥 문을 열게 하는 것, 그곳에 바로 비류연의 무서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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