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9권 2화 – 주점, 얼어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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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19권 2화 – 주점, 얼어붙다!

주점, 얼어붙다!

ᅳ사과해라!

나예린이 머무르고 있는 거처는 항상 조용한 편이었다. 그녀는 소란스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그녀의 성향을 아는 이들은 언제나 그런 그녀의 취향을 존중해 주었었다.

쾅!

방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활짝 열렸다.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던 일에 나예린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은 소저?”

경첩이 떨어지지 않았나 의심되는 문짝 옆에 서 있는 사람은 분명 은설란이었다.

‘과연 이 사람이 내가 알던 그 은설란인가??

나예린은 확신할 수 없었다.

“은 소저, 마천각으로 돌아갔던 게…….”

그러고 보니 최근 들어 본 기억이 없었다.

“돌아가긴 누가 돌아가요? 지난겨울 내내 쭉 여기에 계속 있었다구요! 나 소저, 잠깐 나 좀 봐요!”

갑작스레 자신의 손목을 홱 낚아채는 은설란의 박력에 나예린은 잠시 어떻게 대응해야 좋을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이건 확실히 은설란답지 않았다.

“우리, 어디로 가는 거죠?”

당황한 목소리로 묻는다.

“음주(飮酒)!”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은설란이 짧게 대답했다.

금란주루는 오늘밤도 어젯밤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붐비고 있었다.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짝을 지어 차가운 불을 들이켜며 이런저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자네… 혹시 ‘신풍협(神風俠)’에 대해 들어봤나?”

“에이, 이 사람 취했구먼. 그건 뜬소문 아닌가? 아무도 그 존재를 확인하지 못했다던데? 자넨 그런 헛소문을 믿고 있었나?”

“신풍협이라면 화산의 대화에서 화산지회를 구했다는 정체불명의 젊은 영웅 말인가?”

“그러니까 헛소문이지. 화산을 구한 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신풍협이 아니라 천무삼성, 바로 그분들일세. 그분들 덕분에 화산지회의 참가자들은 그 무시무시 한 화겁에서도 무사할 수 있었던 걸세!”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이야기가 있던데……. 그때 불길이 너무 거세서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지 않나?”

“시뻘건 불길과 시커먼 연기가 자욱한데 자기 발 앞이나 제대로 보였겠나? 그러니 그런 헛소문이 생기는 걸세. 두 눈 똑똑히 뜨고 보고 있었으면 그런 헛소문이 생 길 여지도 없겠지. 신풍협이라니… 그런 건 환상이야. 아직 약관의 청년이 어떻게 그런 신위를 발휘한단 말인가? 이보게, 혁이. 자넨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음… 그건 그렇지만..”

“난 그 있는지 없는지 모를 신풍협보다 그자의 행방이 더 궁금해!”

“누구 말인가?”

“누구긴 누군가! 바로 화산 천무봉에 불을 지른 장본인이지!”

“아, 그 천겁의 후예라는 멸화공자(滅公) 비 말인가?”

“요즘은 그렇게도 불린다고 하더군.”

“하지만 정천맹과 흑천맹이 정보력을 총동원해 그 행방을 추적했지만 아직까지 머리카락 하나 발견 못했다더군. 오리무중이라 이 말이지.”

“아직 서른도 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에 그런 일을 저지르다니, 정말 무서운 자일세.”

“그러게 말이야… 내가… 컥!”

“아니, 이보게, 혁이! 무슨 일인가? 사레라도 들렸나?”

주르륵.

몇몇 사람이 들고 있던 술잔을 자신의 옷에 들이부었다. 그건 가장 양호한 반응이었다. 문가 근처에 있던 네댓 명의 사내는 고개를 돌리다 젓가락으로 자신의 콧구

멍을 들쑤셨다. 눈깔이 튀어나오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눈을 크게 뜬 사람은 너무 많아 셀 수조차 없었다.

두 명의 미녀가 주점의 문을 열고 등장하는 순간, 주루 안은 고요 속에 얼어붙었다. 감히 소리를 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숨 쉬는 소리조차도.

“여긴…….?

얼떨결에 끌려온 나예린이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어디긴 어디예요, 술집이죠! 술을 먹으려면 술 파는 데를 가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그렇긴 하지만…….”

오늘 저녁 오랜만에 만난 은설란은 묘한 박력을 내뿜고 있었다. 아무리 나예린이라도 쉽게 상대하기 곤란했다.

“자, 여기 앉아요!”

“여기에요?”

은설란이 가리킨 것은 주루 한가운데 위치한 탁상이었다. 나예린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곳이라면 이층과 삼층에서도 그녀들을 볼 수 있었 다. 그것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우리 별실로 가는 게 어떨까요, 은 소저?”

“별실은 무슨 별실이에요! 죄진 것도 없는데! 빨리 앉아욧!”

또다시 뿜어져 나오는 알 수 없는 박력에 억눌려 나예린은 그만 자리에 앉고 말았다. 평소라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저기, 무엇을 주문하시겠습니까, 소저님들?”

눈이 반쯤 게슴츠레 풀린 채 입을 헤벌린 점소이가 다가와 물었다.

“술!”

뭣 하러 그런 쓸데없는 것을 묻느냐고 힐난하고 있는 듯한 짧은 대답이었다.

“어떤..”

술에도 여러 종류가 있었다.

“이 집에서 제일 독한 걸로!”

은설란이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거기에 나예린이 제지할 틈 따위는 없었다.

“그리고 안주 넉넉히!”

주문은 짧고 간결하고 명확했다.

주루라면 나예린이 절대 나타나지 않는 곳이었고, 평소라면 근처에도 가지 않는 곳이었지만 오늘은 은설란의 손에 이끌려 얼떨결에 끌려오고 말았다. 그러니 그녀 의 마음이 편할 리 만무했다.

“저기… 은 소저, 이제 그만 마시는 게 어떨까요?”

거나한 술상이 차려진 지 얼마나 지났을까 걱정스런 얼굴로 나예린이 물었다. 주루에는 사람들이 사라지기는커녕 미어터질 듯이 몰려들어 발 디딜 틈조차 없어 보였다. 그런데도 자신들의 주위는 마치 공간이 도려져 나가기라도 한 듯 텅 비어 있었다.

“괜찮아요, 괜찮아! 이깟 것! 암것도 아니에요! 암것도!”

탁자 한켠을 힐긋 쳐다본다.

‘벌써 여섯 병째…….?’

혀가 꼬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걱정이 안 되지 않을 리 없다. 평소에 저 현숙한 여인이 주당이라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차를 마시는 것을 본 것이 전부 였다. 그런데 오늘 그녀는 술을 물 마시듯 마시고 있었다.

“낫 소저~ 그거 알아요?”

흐트러진 모습으로 몸을 기우뚱한 채 은설란이 물었다. 흘끔 들여다본 그 눈은 풀려 있었다. 그러나 은설란의 얼굴이 너무 가까이 다가오자 나예린은 그만 당황하 고 말았다.

“뭐, 뭐가요?”

“남자들은 바보예요! 몽땅 다 바보!”

쾅!

탁자가 한번 들썩거렸다.

“쓸데없고 가치없는 신념에 목숨 거는 바보!”

쾅! 탁자가 두 번 들썩거렸다.

“때문에 항상 여자와 아이와 세계는 상처를 받죠……. 아이를 키워보지 않았으니깐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 세상이 어떻게 되든 자기 집이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는 거죠.”

차오르는 화를 식히기 위해선지 은설란은 다시 한 번 술잔을 붉은 입술 너머로 털어 넣는다.

“진정해요, 은 소저! 이제 그만 마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취한 것 같네요.”

나예린이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렸다.

“전 아직 안 취했어요! 그리고 제가 지금 진정하게 됐어요? 진정했으면 여기서 이렇게 술이나 퍼마시고 있겠냐구요! 이 바보 같은 모용휘란 공자님은 말이죠… 지 난겨울 내내 내가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르고 말이죠… 딴 사람들도 신경도 안 써주고 말이죠…….”

갑자기 은설란의 입에서 지난겨울 내내 쌓여 있던 불만이 줄지어 튀어나왔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평소라면 절대 쓰지 않을 말들이 그녀의 정숙한 입에서 마구잡이로 튀어나왔다. 그녀는 정말로 분노하고 있었다.

“정말 사내들이란 자기밖에 볼 줄 모르는 근시안들이에요! 몽땅 다!”

쾅!

또다시 탁자가 들썩거렸다. 나예린도 이제는 이 들썩거림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여자가 무조건 기다려 주고 받쳐 주기만 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라구요, 큰 오산! 그런 건 이제 옛 시대의 유물이에요! 이제는 새로운 시대라구요!” “하지만 여전히 별로 안 변하는 것 같은데요?”

“내 말 믿어요! 세상은 변하고 있으니깐!”

음주예언인 모양이었다. 음주예언의 나쁜 점에 대해서는 그다지 들은 적은 없지만, 저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어쩔 수 없이 드는 나예린이었다.

“그 사람도 그랬어요. 자기 이상만 좇다가 그냥 죽어버렸죠……. 나한테 말 한마디 남기지 않은 채 말이죠…….”

그 순간 나예린의 눈에 띈 것은 은설란의 묻혀져 있던 아린 상처였다.

“은 소저, 그 사람이라면……?”

그러나 나예린은 대답을 듣지 못했다.

쿵!

마침내 은설란이 이마를 탁자에 박았던 것이다. 과음이었다.

“은 소저! 은 소저!”

흔들어보고, 두드려 보고, 뺨도 때려보고, 꼬집어도 보았지만 은설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걸 어쩌지?”

잠시 막막해지는 나예린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늑대들로부터 지킬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었다.

“할 수 없지.”

오른손을 검집 가까이에 옮겨놓은 다음 술잔을 들며 나예린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찰랑이는 불을 단숨에 쭉 들이켰다.

하지만 그녀의 곤란함은 거기가 끝이 아니었다.

빙봉영화수호대 부대주 십자검 도남포는 요즘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빙백봉 나예린을 자발적으로 추종하는 이 모임을 이끌어가던 정신적 지주인 수호대주 위지천이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한 이후 수호대의 모든 의사 결정 대부분을 그 혼자서 내려야 했던 것이다. 대원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위지천의 자리가 공석이 된 지금 대원들을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기가 여의치 않았다. 그들의 숙원인 ‘타도 척살 비류연!’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가고 있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요즘이 었다.

“뭔가 뾰족한 수가 없을까……. 반전의 기회만 온다면 여론을 움직일 수도 있을 텐데…….”

쾅! 우당탕!

집무실 문이 급작스럽게 벌컥 열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무슨 일인가? 소란스럽게!”

“부… 부대주님, 큰일났습니다!”

“뭐가 큰일인가?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일세?”

“방금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의하면?”

“미, 믿기지 않는 정보지만… 나, 나예린 소저, 그분께서 지인 분과 함께 금란주루 안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쾅!

“뭐, 뭐라고?”

지난 삼 년간 이 집무실 한쪽을 당당히 차지하고 있던 대주 전용 책상이 반 토막이 났다. 그러나 아무도 그 일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다. 그보다 더 급한 일이 있었 다.

“비상 총동원령을 내리게! 늑대들로부터 ‘우리의 그분’을 보호해야만 하네!”

“옙! 알겠습니다, 부대주님!”

“이봐! 밀지 마! 안 보여!”

“너야말로! 거기서 비켜!”

“으악! 누구야, 내 발 밟은 게?”

“야! 내 머리에서 발 안 치워!”

금란주루 안은 미녀의 자태를 조금이라도 훔쳐보기 위해 혈안이 된 사내들로 인해 아비규환의 혼란 그 자체였다. 서로 견제하느라 일정 거리 이상 목표물에 접근 하지는 못했지만, 그 아슬아슬한 균형도 이제는 슬슬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모두들 비켜주시오! 지금부터 이곳은 우리가 맡겠소!”

새하얀 옷에 백건을 두른 무사들이 열을 맞추어 차례대로 들어왔다. 특이한 점은 그들 모두 반투명한 띠로 눈을 가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절제된 동작으로 걸어 들어와 나예린이 앉아 있는 탁자를 중심으로부터 약 일 장 반 정도의 거리를 둔 채 좌우로 반원을 그리며 둥글게 퍼지며 인(人)의 경계선을 만들어냈다. 그리 고 그들은 나예린을 향해 등을 돌리고 나서야 비로소 눈 위로 띠를 들어올렸다.

“자자, 이 선 안으로 들어오지 마십시오.”

“물러나세요.”

“더 이상 접근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당연히 여기저기서 항의가 잇달았다.

“당신들 누구요? 누군데 우리의 앞을 그렇게 가로막는 거요? 당신들 때문에 잘 보이지가 않잖소!”

“옳소! 옳소!”

“눈보신 방해 말고 물러나라! 물러나라!”

그러나 그들은 이런 항의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당신들이 더 이상 나 소저께 접근하는 것을 우리들은 용납할 수 없소.”

“당신들은 대체 누구요?”

“난 천무학관 빙봉영화수호대의 부대주 십자검 도남포요. 그리고 이쪽은 빙봉영화수호대의 팔호위요! 나 소저의 신변 안전을 위해서도 더 이상 사람들이 접근하 는 것을 결단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오.”

“우린 안 되고 당신들은 된다 그 말이오?”

어떤 사내 하나가 불만 섞인 말투로 외쳤다.

“우리 중 누구도 감히 언감생심 그런 꿈을 꾸지는 않소. 만일 다른 사람을 제쳐 두고 혼자 접근하려 한다면 그 대원에겐 더 강력한 제재가 가해질 것이오.”

“저 사람처럼 말이오?”

한 사람이 그의 왼쪽 세 번째에 위치한 사람을 가리켰다. 팔호위들의 시선도 모두 그곳으로 향했다.

“육호!!”

도남포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안 돼에에에에에!”

그를 제외한 일곱의 입에서 이구동성의 절규가 터져 나왔다. 어느새 육호는 뒤돌아서서 넋이 나간 듯한 멍한 눈으로 나예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이 근질근질한 지 연신 꾸물럭꾸물럭거리며 앞으로 나가기 위해 몸을 움찔거리고 있었다.

“큰일이다! 금단증상이다!”

왜 그들이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불편을 감수하며 눈에 반투명한 띠를 둘렀던가! 그들 빙봉영화수호대의 대원에게 나예린을 직접 바라보는 것은 금기 중의 금기 였다. 태양을 직접 바라보면 눈이 멀 듯, 금단증상을 이겨낼 재간이 없었다.

솟구치는 욕정이 ‘육호’를 사로잡고 있었다. 꼴을 보아하니 이성은 이미 저만치 날아가 버린 지 오래였다. 깡그리 불타 버린 이성은 재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순간 도남포의 얼굴에 비통한 기운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그는 단호해야 했다. 그는 검지를 위로 쭉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외쳤다.

“자넨 절교야!”

“절교다!”

여덟에서 하나 빠진 칠호위가 다 같이 손등이 보이게 검지를 들어올리며 복창했다. 그리고는 한때 친구였던 이를 징벌하기 위해 개 떼처럼 달려들었다. 우지끈!쿵쾅! 퍽퍽억억컥퍽억!

제재에는 조금의 인정사정도 없었다.

중인들은 침묵한 채 멍하니 그 참혹한 제재의 과정을 지켜보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잠시 후……..

“또 접근할 사람 있소?”

도남포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훔치며 물었다.

“……”

돌아오는 것은 침묵뿐,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이제 더 접근할 사람은 없는 거요?”

쐐기를 박기 위해 도남포가 한 번 더 물었다.

“만일 당신들의 권고를 따르지 않겠다면 어떻게 하겠소?”

한 사내가 물었다.

“문답무용! 그땐 유감스럽지만 실력행사를 할 수밖에 없소.”

도남포는 자신의 검을 눈앞에 들어 보이며 말했다. 바로 그때였다.

“흥, 약한 것들이 강한 척하기는!”

사람들이 우글우글 모여 있는 곳으로부터 조금 안쪽으로 떨어진 곳에서 냉소적인 비웃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순간 장내는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팔짱을 낀 채 위압적으로 서 있던 도남포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사람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자신이 한 짓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좌우로 물러났다.

한 청년이 탁자에 앉아 있었다. 지독히 화려한 청년이었다. 귀에는 다섯 개의 귀걸이가, 목에는 옥으로 된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검이나 칼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 았다. 바로 마천각의 이공자 이시건이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부잣집 애송이인가?”

찌푸린 인상을 그대로 유지한 채 도남포가 물었다.

“그댄 누구요?”

“나?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보물의 주인이라 할 수 있지.”

화려한 청년이시건이 마시던 술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보물의 주인?”

“모든 보물에는 임자가 따로 있는 법 아니겠나?”

그러면서 그의 시선은 그들을 지나 한곳으로 향했다. 물론 그 시선의 끝에는 나예린이 있었다. 어떤 보석과 황금으로도 그녀의 가치를 측정하기는 불가능할 테니, 그녀야말로 보물 중의 보물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만큼 탐내는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과연 그런 능력이 되겠소?”

도남포가 성질을 죽인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 늦지 않았으니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보라는 의미였다. 물론 그런 말이 이 콧대 높은 청년의 귀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흥, 건방진 놈들!”

이시건이 냉소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한 것들은 까부는 게 아냐!”

이시건은 조소가 가득한 표정으로 뒷짐을 진 채 부대주 도남포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물론 도남포는 자신의 위치를 벗어나지 않았다.

“난 말야, 누가 내 앞길을 가로막는 걸 가장 싫어해. 그러니깐 좋게 말할 때 그곳에서 비켜.”

그가 명령조로 말했다.

“만일 싫다면 어쩌겠소?”

“싫다?”

그의 입가에 어려 있던 비릿한 조소가 더욱 짙어졌다.

“죽는 것이 소원인 모양이군!” 

“이 자식이!”

부대주 도남포의 곁에 있던 이호가 분기를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섰다. 그는 저 건방진 녀석의 멱살을 움켜잡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럴 수 없었다. “무례한 놈!”

이시건의 손가락이 가볍게 움직였다.

푸확!

갑자기 아무런 예고도 낌새도 없이 이호의 손목이 잘려지며 피분수가 솟아올랐던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비명이 울려 퍼졌다.

“검진을 펼쳐라!”

돌발 유혈사태에 비해 도남포의 대응은 신속했다.

“흐음? 해보겠다는 건가?”

여섯 개의 검이 자신을 빙 둘러싸고 있는데도 청년의 표정은 태연자약했다.

“아직도 뒷짐을 풀지 않다니, 우릴 무시하는 건가?”

“잘 아는군!”

도남포의 물음에 청년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듯 대답했다.

“후회하게 될 거요!”

“누가 후회할지는 두고 볼 일이지!”

“어디 두고 봅시다!”

그것이 공격의 신호였다.

빙봉영화수호대의 팔호위는 수천 명의 회원을 자랑하는 나예린 친위대(자칭)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여덟 명의 기재들을 뽑아 만든 자리였다. 모두 자신의 실력을 자신하는 이들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의 자존심은 무참히 짓밟히고 있었다.

“에잇! 에잇! 에잇!”

휙휙휙!

검이 허공을 가른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그들이 아무리 검을 휘둘러도 그 화려하고 건방진 청년은 뒷짐을 진 상태 그대로 그들의 검이 날아오는 족족 모두 피해 버렸다. 그의 다리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 다. 상체의 유연한 움직임만으로도 검초를 피해내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검진이 발동된 지 일 다경이 흘렀지만 그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여유를 빼앗긴 채 점점 초조해진 것은 수호대 쪽이었다.

“벌써 지친 거냐? 정말 형편없군! 천무학관의 실력이 이 정도밖에 안 되다니 말이야!”

깔보는 기가 역력한 말투였다.

“헉헉! 헉헉!”

“이제 내 차례인가?”

나예린은 부대주 도남포와 팔호위가 바닥에 쓰러져 가는 모습을 냉정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마치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한 그런 태도였다. 그녀는 한번도 빙봉영화수호대의 존재를 인정한 적도 없었고, 스스로 팔호위라 자칭하는 이들에게 호위를 부탁한 적도 허락해 준 적도 없었다. 모두 그녀의 의견을 무시한 곳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마침내 방해꾼을 모두 정리한 이시건이 무인지경이 된 나예린의 곁으로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그의 내부에서 들끓는 욕망은 더욱더 강해졌다. ‘갖고 싶어…….’

이 여인을 갖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저지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냥 아름답다는 말로는 부족한 뭔가 마력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는 그런 여인을 이시건은 태 어나서 처음 보았다.

이 여인을 만난 것만으로도 이곳에 온 보람이 있군.’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이시건은 생각했다.

“처음 뵙겠소이다, 소저. 소생은 이시건이라고 합니다. 잠시 괜찮다면 합석을 해도 될까요?”

“거절합니다.”

나예린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대답했다.

“하하…….”

너무나 단호한 거절의 말에 이시건은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날 생각은 절대로 없었다.

‘뭐, 이 정도 앙탈이야 애교로 받아줄 수 있지. 아름다운 꽃은 가시도 많다는 옛말도 있잖아. 암 그렇고말고!’

아직 그가 원해서 손에 넣지 못한 여인은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보아하니 동행 분께서 과음으로 쓰러지신 것 같군요. 괜찮다면 제가 도움이 되어드리고 싶습니다만…….”

“필요없습니다.”

역시 나예린의 대답은 단호했다.

“너무하시는군요. 전 어떻게든 소저께 도움을 드리고 싶은데 말입니다. 전 남을 돕는 것을 삶의 보람으로 여기고 있는 그런 사람입니다.”

조금 전 한 사람의 손목을 절단 내고 일곱을 바닥에 뒹굴게 한 사람의 말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물론 그런 말에 신빙성이 깃들 리 만무했다. “전 분명 필요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시건은 여전히 끈질겼다.

“그러지 말고 제가 도울 일을 말씀해 주십시오, 소저!”

“그런 것이 딱 한 가지 있습니다.”

나예린이 감정이 전혀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작업이 성과가 있었다는 생각에 이시건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제 눈앞에서 사라져 주는 것입니다.”

희색이 감돌던 그의 얼굴이 단번에 잿빛으로 변했다.

“이 여자가 감히…….?

그러나 내부의 분노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채 여전히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아니, 그러지 말고 도울 일을..”

그러면서 이시건의 손이 나예린의 가녀린 어깨를 향해 나아갔다. 다분히 의도적인 손길이었다.

“잠깐! 그 버르장머리없는 손,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게 좋을걸요?”

뭔가가 휙! 하고 날아온 것은 말의 시작과 동시였다.

“헉!”

갑작스럽게 청각을 자극하는 파공성에 이시건은 기함하며 급히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와 동시에 바닥에 두 개의 암기가 날아와 꽂혔다. 그것은 누구나 밥 먹을 때 쓰는 두 개의 젓가락이었다. 손을 재빨리 빼지 않았으면 날아오는 ‘암기’에 직격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다음번에 맞출 겁니다.”

일부러 빗맞혔다는 이야기였다.

“누구냐?”

이시건이 위를 바라보며 외쳤다. 삼층 난간에 누군가 서 있었다.

“용기가 있으면 내려와라!”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그림자는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어딘지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볍게 난간에서 뛰어내렸다.

“저, 저 녀석은!”

그림자의 정체를 알아본 수호대 대원 하나가 외쳤다. 다른 사람도 그를 알아보았다. 호의와 증오 여부를 떠나 천무학관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은 이제 없었다.

“우리 수호대의 천적!”

“정원의 해충!”

“인류의 적!”

수호대를 비롯해 그를 아는 사람들이 일제히 그 이름을 외쳤다.

“비류연!”

비류연은 열렬한 환영에 감사한다는 뜻으로 손을 흔들어주었다.

“여, 여긴 어떻게?”

너무나 의외의 등장에 눈이 휘둥그레진 나예린이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 최근 알게 된 사람들에게 식사 대접 좀 받았어요.”

“식사 대접이요?”

“뭐, 목숨을 구해준 대가니 밥값 정도면 싼 거죠.”

비류연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이보게, 검성. 어떻게 생각하나? 저 청년의 무공 말이야. 내력을 파악했나?”

“아쉽지만 실패했다네, 도성. 밥 먹는 내내 자세히 살펴봤지만 당최 그 출신 내력을 알아낼 수 없더군.”

“자네의 눈썰미로도 안 되나? 이러다 밥값만 날리게 생겼군.”

“그래도 검후가 함께 오지 않아서 밥값이 좀 줄지 않았나?”

“그야 그렇지만… 우리끼리만 저 녀석을 데려온 걸 안다면 우릴 가만 안 둘지도 몰라. 잔뜩 벼르고 있었으니까 말일세.”

도성은 상상만으로도 두려운지 몸을 잠시 부르르 떨었다.

“저기 저 화려한 청년은 어떤가? 아직 젊은데도 실력이 상당하더군.”

그들은 그 화려한 청년이 등장했을 때부터 계속해서 일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마 백도 측 인물은 아닐 거야. 아직 제대로 된 초식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몇몇 움직임으로 미루어보아 흑도 측의 인물인 것 같네. 저 정도 실력이면 그쪽 젊은 층 중에서도 거의 최상위 수준이겠군.”

“그럼 저 청년과 저 친구가 싸우면 누가 이길 것 같나?”

“그건…….”

“넌 또 누구냐?”

이시건이 갑작스런 방해꾼에게 삿대질을 하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나? 남의 이름을 묻기 전에 자기 이름부터 대야죠. 안 그래요?”

“흥, 네놈에게 그럴 자격이 있을까?”

“일단 충분하고도 남을 것 같은데요. 왜, 그쪽 생각은 다른가요?”

비류연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물론 다르지. 그 말로 인해 넌 오늘 편히 죽지 못할 것이다!”

그 순간 이시건의 손가락이 재빨리 움직였다. 동시에 그의 손가락 끝에 걸려 있던 바람이 세차게 소용돌이쳤다.

“죽어라!”

자운암풍(紫雲暗風).

살비기(秘技).

광풍난주(狂風亂走).

비류연의 입에서 좀처럼 터지지 않던 놀람이 터져 나왔다.

“어? 이건!”

보이지 않는 바람이 사방에서 그를 덮쳤다.

주루 전체가 돌연히 불어닥친 미친 바람에 사정없이 유린당했다.

“오잉? 저 기술은 뭐지?”

펄럭이는 백발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도성이 눈을 부릅뜬 채 물었다.

“나도 모르겠네. 처음 보는 기술이군.”

“쳇, 자넨 왜 그렇게 모르는 게 많나?”

“시대가 많이 바뀐 모양일세. 우리가 많이 늙은 거지.”

검성이 자조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그 녀석, 무사하겠나? 좀 전에 보니 정통으로 맞은 것 같았는데?”

그러자 검성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말은 틀렸네. 맞을 뻔한 거겠지.”

미친 바람이 사납게 헤집고 간 주루 안은 말 그대로 난장판이었다. 주변의 탁자들은 마치 날카로운 보검에 베인 듯 모서리가 떨어져 나가 있었고, 그 중심은 자욱 한 먼지로 가득 차 있었다. 모두들 비류연의 죽음을 확신했다. 개중에 몇몇은 그들의 천적이 알지 못하는 이의 손에 죽은 것을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고민하 고 있었다. 그 때문에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나예린의 머리 위에서 뭔가 검은 낙엽 같은 것들이 팔랑거리며 떨어져 내린 것은 그 침묵의 와중이었다. 그녀는 하얀 손을 내밀어 그 검은 것들을 받아냈다. 익숙한 색깔, 익숙한 촉감.

“류연.”

그것은 바로 비류연의 옷자락이었다. 그것들은 마치 칼에 난자당하기라도 한 듯 예리하게 조각나 있었다.

“이 몸 앞에서 까분 대가다!”

그것을 바라보는 이시건의 입가에 잔인한 웃음이 매달렸다. 그러나 그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콜록! 콜록! 아니, 왜 먼지를 날리고 그래요? 기침나게?”

그의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청년의 입가에 어려 있던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어…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이시건의 외침에 중인들 역시 ‘맞아! 맞아!’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유감스럽다는 식의 말투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생명은 소중하잖아요. 그러니 살아야죠.”

비류연은 무척이나 태연한 얼굴로 대꾸했다. 게다가 홀연히 나타나 탁자 위에 앉아 있는 자세도 무척이나 편해 보였다.

“하지만 이건 좀 너무했네.”

비류연이 매우 시원해진 소매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팔꿈치까지 모두 잘려 나가 있었다.

“너덜너덜해졌네. 아끼던 건데. 설마 그런 게 올 줄은 몰랐거든요.”

너무나 눈에 익은 기술에 놀라 잠시 방심한 탓에 적절히 피할 순간을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하마터면 소맷자락이 아니라 팔뚝 전체를 내줄 뻔했던 것이다. “류연, 놀래키지 말아요! 깜짝 놀랐잖아요!”

뭔가 큰일이 난 줄 알고 안색이 파리해졌던 나예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외쳤다.

“아, 미안해요, 예린. 역시 아무리 강해도 방심은 금물인가 봐요.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실천이 잘 안 되네요. 너무 강한 것도 문제인가 봐요.”

비류연은 탁자에서 몸을 살짝 띄워 사뿐히 바닥에 내려섰다.

“하지만 이번에 입은 정신적 피해만큼은 반드시 보상받아야겠죠?”

그를 바라보며 비류연이 씨익 웃어 보였다. 이시건은 웃지 않았다.

“네놈에게 과연 그런 능력이 있을까? 이번에는 운이 좋아 소맷자락만으로 끝났지만 다음에는 그렇지 않을 게다.”

“그 반대죠. 운이 좋았으니 내가 아끼는 옷을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어놓을 수 있었던 거죠. 그걸 착각하면 매우 곤란하죠.”

“흥, 허풍 떨기는!”

“과연 허풍일까나?”

비류연은 주먹을 쥐고 있던 오른손을 눈높이까지 들어올린 다음 활짝 폈다.

그러자 금으로 만든 패 하나가 나타나 눈앞에서 달랑거렸다. 그것을 본 이시건의 눈이 부릅떠졌다. 어디서 많이 보던 물건이었다. “서… 설마.. ..?”

이시건이 서둘러 자신의 품속을 뒤졌다. 없었다. 혹시나 해서 허리춤을 뒤졌다. 없었다. 바지까지 털어보았다. 그러나 역시 없었다.

“그것참 이상한 사람이네. 물건을 눈앞에 두고도 왜 품 안에서 찾으려 하는지 원.”

안됐다는 어조로 비류연이 혀를 찼다.

“어서 패를 내놔라!”

“싫다면요? 보아하니 금으로 만든 것 같은데 녹여서 옷값이라도 해야겠어요.”

비류연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놈이었다.

“이놈! 그 패가 무슨 패인 줄 아느냐!!”

이시건이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그야 모르죠. 별로 알고 싶지도 않고.”

물론 비류연은 이 패의 순금 함유량이 얼마인지 이외에는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류연, 그걸 돌려주게!”

비류연의 고개가 한곳으로 돌아갔다.

“어, 장씨 아저씨! 언제 왔어?”

약간 의외라는 표정으로 비류연이 물었다.

“조금 전에 왔네. 그걸 돌려 드리게.”

장홍이 다시 한 번 말했다.

“이게 뭔데?”

“그건… 마천각의 사신임을 증명하는 패일세.”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자 이시건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어렸다.

“잘 들었냐? 이제 알겠어, 이 몸이 네놈이랑 다른 신분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썩 사신패를 내놓아라!”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이시건이 외쳤다.

“싫어! 내가 왜? 난 아직 옷값도 못 받았다구.”

혀를 삐죽 내밀며 비류연이 대답했다. 정중히 부탁해도 줄까 말깐데 저렇게 거만하게 나오면 주고 싶던 마음도 쏙 들어가기 마련인 게 인지상정이다.

“이… 이놈이 보자 보자 하니깐!”

이렇게 무시당해 보기는 생전 처음이었다.

“네놈은 혹시 면책특권이라고 아느냐?”

“몰라! 그건 왜?”

비류연이 알면서도 모른 척하며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것은 특사가 지닌 특권 중 하나이지. 어떤 죄를 지어도 난 이곳에서 처벌받지 않아. 그건 즉, 내가 네놈을 죽여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가 아무리 천무학관의 앞마당이라 해도 날 어쩔 수 없다는 것이지. 알겠느냐?”

“몰라!”

“뭐! 모른다고?”

이시건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뭘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벌써 치매야? 아까도 죽이려고 했잖아? 실력이 모자라 실패한 것뿐이지. 게다가 당신, 뭔가 잘못 생각한 거 아냐?”

“뭐가 말이냐?”

“우선 당신, 정말 특사 맞아? 그거 거짓말 아냐?”

“거… 거짓말이라고?”

“그래. 특사면 외교관이잖아? 마천각의 이익을 책임지고 있는. 그럼 외교적 사명이 있어서 왔을 거 아냐? 아무 일도 없는데 보냈을 리는 없고. 그런데 한 단체를 책 임지는 사신 자격의 사람이 그렇게 비도덕적이고 무례할 리가 있나. 여기서 문제 일으켜 봤자 협상에서 불리할 뿐일 텐데 말야. 누가 좋아하겠어? 시건방지고 오만 하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데다가 여자나 밝히는 변태인 사신 녀석을 말이야.”

“벼… 변태라고…….”

살다살다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그래. 일부러 사단을 일으키려 하다니, 특사라기보단 내가 보기에… 음… 그래 맞다! 간세야, 간세!”

잠시 이시건의 숨이 탁 막혔다. 그것은 의외의 정신적 기습이었다.

“뭐, 간세가 아니면 다행이겠지만 말이야. 하지만 역시 아직은 의심스럽거든. 그러니깐 만일 간세가 아니라면 특사의 면모에 걸맞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게 어 CCH?”

“그게 뭐냐?”

“사과해야지!”

“뭐, 사과?”

비류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요, 사과! 자신이 잘못했으면 그 잘못을 순순히 인정하고 특사답게 여기 나 소저께 사과하라구요. 그럼 여기 모인 모든 분들도 그 생각에 동의할 걸요? 안 그 렇습니까, 여러분?”

비류연이 주위를 둘러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옳소! 옳소!”

여기저기서 찬성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여론은 비류연의 편이었다. 비록 그것이 매우 예외적인 경우이긴 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여론도 그의 편이었다.

“자, 뭐 해요? 그렇게 똥 마려운 표정으로 엉거주춤 서 있지만 말고 만일 진짜 특사라면 정중히 나 소저에게 사과하고 자신이 진짜 특사임을 증명해 보이시죠?” 비류연의 말투가 다시 바뀌었다.

“사과해! 사과해!”

중인들이 주먹 쥔 손을 뻗어 올리며 합창하듯 외쳤다.

“분위기가 좋지 않습니다, 공자님!”

암중으로 그를 호위하고 있던 십삼혈 중 셋째가 은밀히 전음을 보내왔다.

“알고 있다.”

이시건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날카롭게 대답했다.

“밖의 상황은 어떠냐?”

“아까 공자님께서 쓰러뜨린 놈들과 같은 복장을 한 녀석들이 개 떼처럼 바글바글 모여서 이 주루를 포위하고 있습니다.”

“어떠냐? 너희들 십삼혈이 힘을 합치면 이길 수 있겠느냐?”

“밖에는 그들 이외에도 많은 무사들이 몰려 있습니다. 여기는 천무학관의 앞마당이니 저들이 모두 들고일어나면 저희들로서도 장담하기는 힘듭니다. 지금은 일단 자리를 피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저 계집을 손에 넣을 기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속하들에게 맡겨주십시오.”

“믿어도 되겠느냐?”

“물론입니다.”

“좋다! 믿어보지!”

“자, 이제 사과할 마음이 들었나요? 그럼 어서 사과하시죠!”

“사과해! 사과해!”

이시건은 마침내 체념하고는 태어나서 거의 해본 적 없는 말을 입 밖으로 내보냈다.

“소… 소저, 미… 미안하오.”

평소 쓰지 않던 말로 하지 않던 행동을 하려고 하니 온몸에 경련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나예린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가타부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거이거, 댁의 사과가 좀 부족한 모양인데요?”

비류연이 옆에서 한 수 훈수를 두었다. 물론 이시건의 심기는 더욱더 불쾌해졌다.

“미안하다고 내 사과하지 않소? 뭐가 불만인 거요?”

이시건이 참지 못하고 불평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였다.

“마음에도 없는 입에 발린 사과 따윈 듣고 싶지 않습니다. 보기 싫으니 제 눈앞에서 사라져 주세요. 불쾌하니까요.”

“그렇데요.”

비류연이 또 한마디 거들었다. 이시건의 얼굴이 불에 달궈진 석탄처럼 빨갛게 변했다. 이렇게 자존심이 짓밟힌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뭐 해요? 나 소저 말이 안 들려요? 빨리 사라지세요. 거 되게 굼뜨네.”

“이… 이놈이……!”

이대로 확 요절을 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현재 주변의 상황은 자신에게 결코 유리하지 않았다. 아무리 강해도 이들이 일제히 들고일어난다면 감당 할 자신이 없었다.

“네놈, 이름이 뭐냐?”

씹어 내뱉듯 묻는다.

“비류연!”

비류연이 짧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흥, 네놈이 바로 그 비류연이었나?!”

“어, 알고 있었어요? 하긴 뭐, 이 몸이 워낙 유명해야죠. 인기인의 비애라고나 할까요.”

이시건은 그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흘려듣고는 나예린을 향해 포권하며 말했다.

“소저, 오늘은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이만 물러나겠소. 다음에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리다.”

‘그때도 네년이 그렇게 고고할 수 있나 두고 보자!’

그때는 결코 지금과 같지 않으리라!

나예린의 눈살이 자연스레 찌푸려졌다. 그녀의 용안은 감는다고 감아지는 눈이 아니었다.

“그런 일은 절대 없었으면 좋겠군요. 오늘 일만으로도 충분히 불쾌하니까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나예린은 차갑게 대꾸했다.

이시건이 몸을 돌리며 말했다.

“두고 보자! 곧 후회하게 될 것이다!”

너무나도 진부한 대사에 비류연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 말, 꼭 이천육백칠십두 번째 듣는 말이군요. 성공 확률은 전무(全無)했지만 말이에요. 그러니 잘 가요.”

친절하게 손까지 흔들어주는 비류연이었다. 나예린은 그를 꼴도 보기 싫다는 듯 외면하고 있었다. 그 무관심이 증오보다 더욱 그를 분노케 했다.

‘두고 보자! 반드시 네년을 내 품에 안고야 말겠다! 그때도 그렇게 도도할 수 있나 두고 보자!’

주루 밖을 나서던 이시건은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험악한 표정으로 다짐했다. 주루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다시 닫혔다.

“와아아아아아아아!”

이시건의 모습이 사라지자 주루 내에서 일제히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응?”

갑자기 탁자에 머리를 박고 쓰러져 있던 은설란이 상체를 벌떡 일으키더니 아직 술기운이 가시지 않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것이었다. “왜 그러시죠, 은 소저?”

은설란의 돌발 행동에 깜짝 놀란 나예린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으음… 방금 어디서 많이 듣던 재수없는 녀석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내 착각이었나?”

“많이 듣던 목소리?”

“낫소저, 뭔 일 있었어요?”

혀 꼬인 은설란의 질문에 나예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뇨,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래요……. 그럼 다행이고…….”

은설란의 게슴츠레하던 눈이 다시 감겼다. 눈을 감은 그녀의 고개가 서너 번 앞뒤로 위태롭게 왔다 갔다 하기 시작했다.

쿵!

나예린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우와~ 아프겠다!”

옆에서 비류연의 감탄성이 들려왔다. 물론 그녀도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이었다.

“류연, 이제 어쩌죠? 역시 제가 안고 가야 할까요?”

왠지 비류연에게 맡기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아뇨, 힘들게 예린이 왜 그런 일을 해요?”

천부당만부당하다는 투로 비류연이 대답했다.

“그럼 어떻게……?”

“나한테 더 좋은 생각이 있어요!”

“뭐, 내, 내가?”

소식을 듣고 헐레벌떡 달려온 모용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 여기 너밖에 더 있어? 안 그럼 예린의 저 가녀린 팔을 혹사시켜야 마음이 놓이겠어?”

“마, 말도 안 되네. 어떻게 내가 감히 그런. 절대로 안 되네. 안 되고말고.”

모용휘가 기겁하며 손사래를 쳤다.

“그래? 내키지 않으면 그냥 이대로 놔두고 가고. 그래도 난 전혀 상관없어.”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어떻게 술 취한 여인을 이런 위험한 곳에 두고 간단 말인가! 그건 천부당만부당한 일일세!”

비류연의 냉혹 무비한 말에 모용휘가 기겁하며 외쳤다.

“그럼 결정된 거군? 안 그래?”

“…아, 알았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모용휘가 대답했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눈에 확연했다.

“쯧쯧, 긴장하지 말고. 업고 가다 떨어뜨릴라.”

“아, 알았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여전히 잘 익은 홍시처럼 새빨갰다.

“잘 모셔. 새색시 모시듯.”

“무, 물론일세.”

더욱더 빨개진 얼굴로 모용휘가 대답했다. 비류연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쯧쯧, 이렇게 순진해서야……..”

은설란을 업은 모용휘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콕콕 찌르며 비류연이 말했다.

“잊지 마! 자넨 또 나한테 빚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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