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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19권 7화 – 순찰

순찰

-교대식

“대사형, 순찰 나갈 시간입니다.”

기숙사 문을 열고 들어온 남궁상의 한마디에 비류연의 표정이 삐딱하게 변했다. 현재 나머지 세 다리는 제쳐 둔 채 한 다리로만 비스듬히 삐딱하게 그의 몸을 받친 채 아슬아슬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의자와 잘 어울리는 그런 표정이었다. 팔걸이에 올려진 그의 오른팔은 삐딱해진 그의 고개가 더 기울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최 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순찰은 개뿔!”

삐딱하게 그어진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 기울어진 각도만큼이나 그리 곱지 않았다.

‘꼬였다!’

남궁상은 순간 긴장했다.

이 인간의 심사가 지금 이 순간 상당히 여러 가닥으로 비비 꼬여 있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사실 순찰의 의무가 주어진 자 중에서 이 순찰을 좋아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아무래도 저 의자에 단단하게 붙어 있는 엉덩이를 떼는 일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잖습니까? 지침이 그렇게 내려왔으니 따라야지요.”

이틀 전 갑자기 나붙은 공문에는 다음과 같은 지침이 하달되어 있었다. 그 공고를 본 ‘황금 완장들은 모두들 눈을 부릅뜨지 않을 수 없었다.

입관시험관들은 하루 한 번 이인 일조로 조를 짜서 시내를 순찰해야 한다.

명목은 입관 시험 예비생들이 사고 치지 않도록 감시하는 감독 역이라고 하지만 숨겨진 목적은 너무나 명명백백해서 악의(惡意)마저 느껴졌다.

며칠 계속되는 습격ᅳ입관 시험관들은 대결 신청보다 이 표현을 더 선호했다—으로 인해 피곤해진 입관 시험관들은 점점 더 외출을 삼가하고 학관 안에 편히 처 박혀 있으려고 했다. 사서 고생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그러나 어르신들 입장에선 그래선 곤란했다. 이번 순찰 조치는 이런 일련의 행위를 저지하기 위 한 고육지책(苦肉之策)임이 분명했다.

친절하게도 조까지 미리 짜여 있었다. 아무래도 시작 전에 이미 이런 일이 발생할 줄 예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상당히 용의주도한 준비가 아닐 수 없었다. 시험 관들 사이에서는 순찰 나간다는 것을 가리켜 냉소를 담아 제물 행진’이라고 부르는 이도 있었다. 그리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쨌든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황금 완장들도 함부로 경거망동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신중해져야만 했다. 선배로서의 체면이라는 게 있고 위계라는 게 있는 이 마당에 후배 예비생들과의 비무 따위에 진다는 것은 곧 선배들의 위상이 땅에 곤두박질친다는 것을 의미했다. 한 번 꺾인 위엄은 어지간해서는 회복되지 않는다. 선배로서 후배에게 순순히 패배를 진상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여기까지는 내키지 않지만 남궁상도 수용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자신과 한 조가 된 사람이 누군지 알았을 때 그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이건 거짓말이야!”

왜 하필이면 하고많은 사람 중에 그 꿈에 보기도 두려운 악질 대사형과 한 조가 되지 않으면 안 되냔 말이다. 자신의 머리 위에 빛나고 있는 별은 분명 불행의 별임 이 분명했다.

순찰조는 상급생과 하급생으로 구성되며 동급생끼리는 조를 짤 수 없게 되어 있는 이유는 알고 있었다. 상급생이 하급생을 챙겨주라는 친절한 배려겠지.

·친절은 얼어죽을 놈의 친절!’

어떤 생각없는 조 편성 담당 한 명 때문에 그의 부담과 정신적 피해와 육체적 피해는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었다. 누가 누굴 챙긴단 말인가? 오직 몽땅 떠맡을 뿐이 었다. 몸은 하난데 해야 할 몫은 이 인분이었다.

“저, 대사형… 물론 대사형께서 이런 귀찮고 비생산적이고 돈 안 되는 일에 힘을 낭비하려 들 리가 만무하다는 사실,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습 니까? 지침이 그렇게 내려온 걸 어쩌겠습니까? 조금만 수고해 주세요.”

비류연은 들은 척 만 척 여전히 의자 다리 하나에 몸을 위탁한 채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었다.

“대사형…….”

남궁상이 더 풀죽은 목소리로 비류연을 불렀다. 이번에는 반응이 있었다.

“능구렁이 같은 영감탱이들 같으니!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추가 노동은 하지 않는다고 계약서에 확실히 명시해 두는 건데 말야. 실수했어!”

빙글!

다리 하나로 균형을 지탱하고 있던 의자가 팽이처럼 한 바퀴 빙글 돌았다. 그런데도 그 위에 앉아 있는 비류연의 몸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손으로 턱을 괸 채 삐딱하게 앉아 있었다.

“귀찮게스리…….?”

귀찮다는 것, 그게 제일 문제였다. 그러나 그것만이 문제의 모든 것은 아니었다.

“주제를 파악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가?”

아니면 분수만이라도. 둘 중 하나만이라도 알면 귀찮음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었을 텐데.

사람을 가려가면서 상대해야 될 것 아닌가? 그렇게 보는 눈이 없어서야…….

“확실히 귀찮긴 하죠. 번거롭기도 하고 피곤도 하고.”

남궁상도 동의했다. 그는 요즘 남보다 서너 배 이상 힘들고 피곤했다.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사실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내 말이 그 말이다. 웬일이냐? 오랜만에 올바른 소리를 하는구나.”

비류연이 턱을 괸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현재까지 몇 명 성공했지?”

“아직 한 명도 없습니다. 한 명이라도 당했으면 큰 난리가 났겠죠.”

“그렇겠지? 체면치레 빼면 남는 것도 없는 녀석들이니깐 말이야? 선배의 위신 어쩌고저쩌고하면서 한바탕 소동을 일으켰겠지. 엄마~ 엄마~ 하면서 말이야.” 비류연이 우는 시늉을 해 보였다.

“아직까지 그런 일 없이 조용한 걸 보면 성공 사례는 없다고 보는 게 타당한 것 같습니다. 아마 황금 완장들이 외출을 삼간 것이 주효했겠지요.”

“하지만 한 명도 없다니 좀 실망인걸? 다들 그렇게나 무능했다니… 올해 신입생 녀석들도 별 볼일 없을지도 모르겠다.”

“다른 시험관들이 유능하다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남궁상이 좀 더 긍정적인 해석 방향을 제시했다.

“그건 안 돼! 거짓말은 나쁜 거라구!”

비류연의 입에서 저런 상식적인 대사가 나오다니 남궁상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능한 건 무능한 거지. 무능한 걸 유능하다고 할 수는 없는 거잖아?”

“하지만 거기엔 대사형도 포함된다구요.”

남궁상이 비류연의 오른팔에 차여 있는 황금 완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 나야 물론 예외지.”

그 뻔뻔스러울 정도의 당당함에 남궁상은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그럼… 그 무능한 이들한테 진 녀석들은 뭐라 불러야 되죠?”

“뭐, 첩첩 무능한 놈들이겠지.”

그 어이없는 대답에 멍해진 남궁상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첩첩 무능? 그런 표현도 있나요?”

“물론 없지. 방금 만들어낸 거야.”

급조품이라는 이야기였다.

“그… 그런…….?”“아니, 유능하다면 모르겠는데, 왜 굳이 무능함 따위를 묘사하는 데 머리를 굴릴 필요가 있는 거지? 낭비잖아?”

“냉혹한 평가군요.”

“그럼 착한 놈하고 나쁜 놈하고 똑같이 대우해 주는 게 평등이겠냐?”

“그건 아니지만…….”

“똑같은 거야.”

“그, 그런 거군요…….”

그만 납득해 버리고 만 남궁상이었다.

“음, 첩첩 무능한 놈들 때문에 귀찮아졌다고 생각하니 좀 열이 받는다. 좀 편해지는 방법이 없을까?”

직면한 현실을 타개할 대안에 대해 묻자 남궁상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 방법이 과연 있긴 있을까요?”

천무학관에 들어오는 것만을 인생의 목표로 여기고 살아온 슬픈 군상들이다. 비록 불쌍하긴 하지만 그 무시무시한 집념은 무시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음… 하나 있긴 하지.”

“그건 뭡니까? 그런 게 진짜 있기는 한 겁니까?”

“恐怖!”

“예? 공포라니요?”

너무 압축되어 있는 짧은 대답에 남궁상은 이해하지 못했다.

“공포의 확산!”

조금 길어진 대답과 함께 비류연의 입가로 미소가 번져 나간다.

“두 번 다시 덤벼들 맘이 생기지 않도록 심장과 영혼에 공포를 새겨 넣어주는 거지. 친절하고 상냥하게, 있는 힘껏! 흐흐흐흐!”

괴이쩍은 웃음소리를 내는 비류연의 전신에서 어둡고 칙칙한 기운이 일렁거렸다.

진짜 할 셈인가?

“저 사람이라면 진짜 저지를지도…….?

남궁상의 뇌리 속으로 그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영상들이 스쳐 지나갔다.

찢어발겨지는 사지, 후두둑 떨어지는 육편, 그리고 낭자한 피…….

갑자기 오싹한 마음이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역시 살인은 안 좋습니다.”

남궁상이 떨리는 가슴을 달래며 진심을 담아 조언했다.

“엥? 누가 죽인다고 했냐? 나같이 심약한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끔찍한 일을 저지르겠냐?”

‘충분히!’라고 생각했지만 감히 입 밖으로 내서 대답하지는 않을 만한 분별력은 아직 남아 있었다. 입 밖에 내면 목청이 찢어질지도 모를 위험을 굳이 감수할 필요 는 없는 것이다.

“아, 아닌가요?”

다시 얼빵한 표정으로 남궁상이 반문했다. 그런 그를 비류연은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또 어디다 정신을 팔아먹었냐? 그 정도 썩은 정신이면 얼마 받지도 못할 테니 빨랑 반품해라!”

그 뒤에 ‘좋게 말할 때’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지만 남궁상의 귀는 이미 그 사라진 구절까지 자동 반사적으로 찾아 듣고 있었다. 놀라운 학습 효과가 아닐 수 없었 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번 입관 시험이 엉망이 될 텐데요?”

분명 혼돈의 도가니탕 속에서 팔팔 끓는 사태가 발생할 것이다. 학관 측으로서도 원하는 바는 아닐 것이다.

“그렇게 될 가능성도 분명 크지.”

비류연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겠죠?”

“하지만 지금의 이 지루하고 귀찮은 전개보다는 더 재미있어지지 않을까?”

평범한 걸 좋아하는 미덕 따위는 이 인간과 거리가 먼 게 분명했다.

“진짜 하시려고요?”

남궁상이 목소리를 가라앉히며 조심스럽게 묻는다.

“글쎄? 넌 내가 어쩔 것 같아?”

“글쎄요……..”

비류연의 입가에 번져 가는 불길한 미소를 바라보며 남궁상은 몸을 움츠렸다.

“궁상아, 너 어째 눈동자가 흔들린다?”

지금 흔들리는 게 신뢰냐, 아니면 눈동자냐 하고 묻는 듯한 지적에 남궁상은 흠칫했다. 마치 자신의 속마음이 엿보인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그… 그럴 리가요? 저의 대사형에 대한 신뢰는 절대부동입니다!”

“정말이냐?”

“그, 그럼요. 그렇고말굽쇼.”

다행히 더 이상 가타부타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휴우~’

더 이상 추궁당하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었기에 남궁상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럼 가볼까?”

“가시죠!”

“오늘은 또 몇 놈이나 개길까? 기대되는군.”

‘제발 기대하지 마!’

남궁상은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그의 평온한 인생이 계속 유지될 수 있도록 하늘에 기도했다.

‘귀찮다면서 기대는 무슨 기대!!’

남궁상은 그런 놈들 수가 제발 줄어들었기를 바랐다. 그도 그럴 것이, 그 파리 떼를 처리하는 것은 언제나 옆에 붙어 있는 자신의 몫이었던 것이다. 비류연은 손가 락도 하나 까딱하지 않을 때가 더 많았다.

‘약속한 비무도 얼마 안 남았잖아? 설마 진령이랑 헤어지고 싶은 건 아니겠지??

그렇게 말하는데 어떻게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겠는가? 자신이 감히 어떻게!

안 그래도 며칠 앞으로 다가온 대결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 있는 탓에 더 이상 육체와 정신이 혹사당하는 것만은 사양하고 싶었지만 비류연의 수련이라 쓰고 떠 넘기기라 읽는―은 혹독하기만 했다.

넌 아직 한계를 경험하지 못했어!

그가 애송이들을 쓰러뜨릴 때마다, 그가 빙검과의 대련에서 쓰러졌다 다시 일어날 때마다 비류연이 내뱉던 말이 귓가에 이명처럼 맴돌았다. 언제쯤 되어야 이 귓 병을 고칠 수 있을까? 과연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또 한 번의 의심으로 그날의 접근을 가로막은 남궁상은 힘없이 발걸음을 옮겨 비류연의 뒤를 쫓아갔다. 그의 그 림자를 밟지 않도록 신경 쓰면서.

순찰 교대는 언제나 정문 초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관례였다. 전 순찰조는 이미 정문 초소에 도착해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 예린!”

정문 초소에서 순찰을 교대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두 명의 여자 중 한 명을 보자 비류연이 반색하며 손을 흔들었다. 연인과 만난다는 것은 언제 어느 때나 즐거 운 일이었기에 짜증나던 그의 기분을 조금 풀어주었다.

낮과 밤, 태양과 달의 반복되는 순환 주기에 관계없이 나예린은 아름답고 우아했다. 하지만 밤의 한가운데 서 있는 그녀는 달빛을 받으며 이 세계에 속하지 않은 선녀처럼 독특하면서도 환상적인 분위기를 전신에 두르고 있었다. 밤이 그 안에서 영원처럼 빛나고 있는 것 같은 심원한 눈빛은 별빛보다도 아름답고 달빛보다도 신비로웠다.

나예린은 엉겁결에 손을 올리려다 다시 내린 후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우아하게 인사했다.

“좋은 밤이에요, 류연!”

밤을 비추는 달처럼 그녀는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옆에 같이 동행하고 있던 여인이 따라 인사했다.

“어? 아!”

방금 알아채고 말았다는 듯한 노골적인 연속 반응에 여인의 볼이 뾰로통 부풀어 올랐다. 알고 보니 진령이었다.

“령!”

그녀를 알아본 남궁상이 인상을 활짝 펴며 외쳤다.

우울할 때 연인의 얼굴을 보면 힘이 나는 법이다. 비록 그때 본 얼굴이 뾰로통한 얼굴이라 해도 말이다. 그녀 역시 궁상의 얼굴을 보니 기분이 풀리는 모양인지 부 풀어 오른 볼의 공기를 조금 뺐다.

“상!”

무척 짧은 인사였지만 두 사람에겐 충분한 모양이었다. 비류연은 두 사람만의 세계에 빠진 그 둘을 무시한 채 나예린에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예린, 요즘은 밤에도 파리 떼가 날아다녀서 많이 힘들죠?”

요즘 이 날파리떼의 이상 증식 때문에 황금 완장들은 다들 이만저만 고민이 아니었다. 나예린은 자신의 지위와 특수한 상황 때문에 특혜를 받을 수도 있었지만 그 러지 않았다.

‘피하기만 해서는 전진할 수 없잖아요?”

나예린만 특별히 빼주겠다고 했을 때 그녀가 마진가에게 했던 말이다.

“아니에요. 별일없었어요. 밤인데 그 사람들도 자야죠.”

나예린의 다소곳하면서도 평온한 대답에 진령의 고개가 갸우뚱 움직였다. 이 작은 몸짓과는 달리 그녀의 마음은 기가 막힌 나머지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벼, 별일없었다고……??

어떻게 저 여자는 저렇게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할 수 있는지 진령으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예린은 거짓말을 했다. 요즘 파리들은 낮밤은 물론 암수도 가리지 않는다. 밤잠도 설친 채 벌게진 눈으로 사냥감을 찾아 헤맨다.

빙봉영화수호대라는 녀석들이 그녀를 호위하겠다며 서른 명이나 달라붙으려 했던 일, 그것을 극구 사양하며 모두 되돌려보낸 일, 겨우겨우 편하게 순찰을 도나 했 더니 두 사람—분명 두 사람이다ᅳ의 미모에 혹해 얼굴 도장이나 한 번 찍으려고 비무를 신청한 남정네 셋과 자기가 이기면 연인이 되어달라는 ‘뻔뻔이, 셋과 침을 질질 흘리며 눈에 핏발을 세운 두 놈을 우아하게 ‘아작낸 일련의 사태들을 가리켜 ‘별일없었다’라고 표현할 수만 있다면 그때서야 비로소…

‘그래, 그때서야 비로소 오늘 순찰은 ‘별일없었다’라고 말할 수 있겠지!’

그러나 그 이전에는 차마 양심의 가책 때문에라도 그런 표현을 쓸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녀는 그때 당시 무엇이라 말했는가!

“괜찮아요. 익숙한 일인걸요!”

그때 처음으로 질투심을 유발할 정도로 아름다운 이 절세의 미인이 상상 이상으로 험난한 인생을 살아온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또한 처음으로 대단한 여 자임과 동시에 무서운 여자일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역시 보통 사람이 아닌지도…….”

그렇게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진령은 비류연의 옆모습을 힐끔 바라보았다.

‘하긴 저런 남자랑 사귀려면 맨 정신으로는 불가능하겠지.

그런 면에서는 진짜 경의를 표할 만했다.

“아, 그러고 보니 저희 사부님께서 또 한 번 자리를 같이하자고 하시네요.”

“또요?”

식사를 같이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던 터였다.

“예. 이번에는 식사뿐만 아니라 가볍게 ‘운동’도 한번 하자고 하시네요.”

“가볍게 운동이라…….”

결코 가볍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 말뿐이 아니었을 텐데요?”

“맞아요. 사실 또 다른 말씀이 있으셨죠.”

“뭐라 그러시던가요?”

“천 마리로 안 된다면 이천 마리를 베면 되니까 며칠만 기다려 달라고요.”

화산천무봉에서 오랜 시간 동안 궁리(窮理)해서 만들어낸 ‘해상비조천참절(海上飛鳥千斬切)’이 파훼당한 일을 아직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모양이었다.

설욕전이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지만 아무래도 그 비슷한 것을 위해 초식을 강화 중인 모양이다. 아니, 개량이라 불러야 할까? 어쨌든 이미 완성되어 있는 그런 무서운 초식에 추가로 위력을 덧붙일 수 있다는 사실은 실로 가공스럽기 짝이 없다. 초식이란 복잡하고 체계적인 동선의 연결이기 때문에 그 복잡무쌍한 흐름을 끊 지 않게 위력을 강화한다는 것은 단단한 바위틈 사이에 꽃을 심는 것만큼이나 지난한 일이었다. 아무리 일류고수라 해도 보통은 꿈도 못 꾸는 일이었다. 게다가 며 칠만이라니…….

“아무래도 목적은 명확한 것 같군요.”

자신을 무릎 꿇리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분은 원래 지고는 못사는 성격이시죠. 아마 검성, 도성 두 분이 그 사실을 가장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많이 당했던 모양이군요.”

“상당히요.”

그러면서 나예린의 입가에 보기 드문 미소가 떠올랐다.

“그나저나 안타깝군요.”

“뭐가요?”

나예린의 반문에 비류연은 자신의 솔직한 감상을 피력했다.

“천도 많은데 이천이라니……. 곧 남해에 바닷새의 씨가 마를 것 같아서요.”

검후라면 진짜 그렇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어제의 당연한 풍경을 오늘의 존재하지 않는 풍경으로 만들 만한 힘을 그 괴물 할머니는 지니고 있었다. “새가 날지 않는 바다는 쓸쓸하죠.”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인다.

“특히 그 희생이 헛될 때는 말이죠.”

모든 바닷새를 한꺼번에 벨 수 있는 검법이 나온다 해도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 나를 쓰러뜨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절대 지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 말을 들으면 사부님께서 기뻐하시겠군요.”

일반인하고는 다른 의미로 사용되겠지만 틀림없이 기뻐할 터다.

“오랜만에 진짜 쓰러뜨릴 만한 녀석을 만났다구요.”

“그거 영광이군요.”

검후의 검끝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

정상적이고 일반적이며 상식적인 무림인이라면 얼굴에 핏기가 가시고 공포로 몸을 벌벌 떨 만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비류연은 미소 지었다.

연령을 초월하여 미인의 관심을 받는 건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었다.

순찰 교대 의식은 간단했다.

전 순찰 조가 지닌 신분 증명용 순찰패를 넘겨받고 순찰 장부에다 서명만 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추가로 확인할 건 오른팔에 황금 완장이 제대로 차여져 있는지 여 부 정도뿐이었지만, 그것이 정말로 속 보이는 악의적인 절차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교대가 끝나고 이별의 아쉬움을 뒤로한 채 비류연과 둘만 남게 되자 남궁상이 물었다.

“대사형?”

“왜?”

“왜 나예린 소저를 호위하러 가지 않으셨습니까? 호위라는 거창한 명목이 싫다면 적어도 동행으로라도 말입니다. 너나 나나 다 한자리 끼어보려고 대소동이었는 데 말입니다.”

달빛 아래에서 별빛도 무색케 하는 천하제일미인과의 밤나들이(그것이 비록 순찰이라는 명목이 붙어 있다 해도, 그 행위의 본질이 전혀 다르다 해도 그 유사성만 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남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이 불타오르는 상황을 그 편린만큼이라도 체험하고자 하는 남정네들 때문에 한동안 소동이 벌어졌 던 것이다. 너도나도 나예린의 순찰에 동행하겠다고 날뛰자 대소동이 일었다. 같은 순찰 조에 꼭 뽑히지 않아도 외출을 명목으로 함께 동행할 수 있었는데, 그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라면 통금(通禁)을 어길 각오도 되어 있었다. 그런 큰 소동의 와중에도 비류연은 거기에 끼어들지 않은 채 조용히 돈이나 세며 책이나 읽었고, 그 점이 남궁상의 궁금증을 자극했던 것이다.

“응?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질문을 받은 쪽은 오히려 궁상이었다.

“아니, 그거야…….”

남궁상은 자신의 상식이 부정당하자 갑자기 말문이 막혀 버렸다.

“난 그녀를 모욕하고 싶지 않아.”

그 대답 역시 그의 상식 범위 안에 포함된 답이 아니었다.

“어째서 거기서 모욕이란 말이 튀어나오죠?”

“예린은 어린애가 아냐. 더욱이 그녀의 검은 상당히 날카롭지. 아무리 너라 해도 승부를 장담할 순 없을걸?”

“그거야 그렇지만.

그 너무나 뛰어난 미모에 가려 잘 드러나진 않지만 그 역시 검객 나부랭이인지라 빙백봉 나예린이 얼마나 강한지 싸워보지 않고도 알고 있었다. 어쩌면 질지도 몰 랐다.

“하지만 여자잖아요?”

남궁상은 마침내 말하고 말았다. 그의 말은 일반적 상식과 고정관념의 결정체라 할 만한 것이었다. 때문에 그만큼 사회 내에서 강력한 설득력을 지닌 채 유통되고 있었다. 하지만 비류연에게 그것은 이미 유통 기한이 만료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응? 여자가 뭐 어때서? 강하잖아? 자기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내가 해줄 필요가 어디 있지? 그것도 여자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그런 건 부모라도 피해야 마 땅한 행동이라구. 의타심을 잔뜩 키워봤자 느는 건 어리광뿐이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여잔데..

모기가 기어들어 가는 듯한 목소리로 남궁상이 말했다.

“넌 앵무새냐, 아니면 세뇌당했냐? 그 말밖에 할 줄 모르냐? 막상 싸우면 이길 수 있을지도 장담 못하는 주제에?”

비류연의 입가에 낀 그것은 역력한 비웃음이었다. 그러나 정곡을 찔린 남궁상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 집요한 병적 미행자들이 주제 파악도 못하고 자꾸만 자기들이 보호해 주겠다고 날뛰는데 그거야말로 민폐지. 예린보다 족히 백배는 약해 빠진 놈들이 누가 누 굴 감히 보호하겠다는 건지. 앵앵거리기 전에 자기 자신의 꼬락서니들이나 제대로 돌아보라고 말해주고 싶군.”

남자라는 생물학적 사실이 자신이 약자라는 사회적 현실을 바꿔주지 못함에도 불구하고ᅳ당연한 일 아닌가!턱없는 착각에 빠지곤 하는 게 큰 문제였다.

“내가 예린의 순찰에 동행한다는 것은 내 사고방식 근저에 그녀를 믿지 않는다는 바탕 생각이 깔려 있다는 이야기랑 똑같아. 즉, 나의 무의식은 이미 그녀가 무능 하다고 결론을 내렸다는 소리가 되는 거라구. 예린이 그런 취급을 받고 싶을까? 게다가 이건 사적인 일도 아니고 공적인 일이잖아? 일단은 말이지. 만일 내가 예린 이라면 그런 취급을 당했다면 무척이나 불쾌하게 느껴졌을 것 같은데?”

“하지만… 하지만… 나 소저는 여자고, 남자는 언제나 여자를 보호해야…….”

남궁상의 목소리는 조금 전에 비해 더욱더 한없이 위축되어 있었다. 이미 그는 자기 자신이 하는 말의 정당성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 예린은 여자야. 난 남자고.”

당연한 소리 지껄여서 공기를 낭비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동등(同等)하다고 생각하면 그에 상응하는 태도를 보여줘야 할 거 아냐? 입만 살았냐? 말로만 떠들어대면 끝이냐? 여자들도 그렇게 무시당하며 살고 싶진 않을 걸?”

“그럼 여자를 보호하지 않아도 된다는 겁니까? 아무리 약한 위치에 있는 여자라도요? 아무리 위기에 빠진 여자라도요?”

남자보다 여자가 더 위험에 처하는 일이 많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자 현실이었다.

“너 진짜 바보구나? 여자만 약한 게 아니지. 남자 중에도 약한 사람 많아. 다만 남자 중의 약자에 비해 여자 중의 약자가 상대적으로 많은 것뿐이잖아? 여자라서 도 와주는 게 아니라 약자라서 도와줘야 되는 거 아냐? 아니면 여기저기 널린 다른 여타의 사람들처럼 강자 앞에서 약하고 약자 앞에서 강하던가.”

비류연의 말은 신랄하기 그지없었다.

“여자라서 앞뒤 안 재보고 무조건 도와줘야 한다니? 검후한테 가서 그런 이야길 해보지 그래?”

“그, 그건…….”

아무리 자신이 조금쯤 궁상맞다 해도 그런 무모한 자살 방식은 택하고 싶지 않았다. 남궁상은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이제 와서 그녀에 대한 믿음을 저버릴 생각은 추호도 없다.”

비류연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로만 존중하지 말고 실천으로 옮겨. 말을 자위 수단으로 삼지 마. 행동이 따르지 않는 말만큼 추하고 비겁한 건 없으니깐 말야. 입 발린 말이 무슨 면죄부라도 되는 줄 착각한단 말이지. 쯧쯧.”

남궁상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래서 비류연은 불쌍한 궁상의 걱정을 덜어주기로 했다.

“궁상아.”

“예?”

“근데 거기 너도 껴 있었냐?”

“예? 어딜요?”

화들짝 놀란 목소리로 남궁상이 반문했다.

“대소동의 한가운데 말야.”

알면서 뭐 하러 되묻느냐는 투로 비류연이 쏘아주었다.

“부, 불길한 소리 하지 마십시오! 그랬다간 전 즉시 사망이라구요!”

너도 한 마리의 파리가 아니었느냐는 물음에 남궁상은 얼굴이 사색이 된 채 몸을 부르르 떨며 부정했다. 아무리 조연보다는 주연이 낫다지만 아직은 연인에게 살 해당하는 비극의 주인공 역할 따윈 맡고 싶지 않았다. 그 다음 작품은 틀림없이 들어오지 않을 테니 말이다.

생명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여전히 미덕이었고, 특히 그 생명이 자기 자신의 것이라면 그것을 아끼고 사랑하고 유지하는 것은 열심히 생을 유지하기 위해 움직 이는 육체에 대한 의무라 할 수 있었다.

“하긴 네 녀석에게 그 정도 담이 있을 거라곤 생각 안 하지만…..

“그, 그럼요. 그렇고말굽쇼. 대사형도 아시다시피 저 소심하잖아요? 안 그렇습니까? 간도 튼튼해서 부기도 없다구요.”

아무래도 미래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것도 삶의 한 방식일지도 모르지만 자신의 취향은 아니었다. 잘도 저런 한심한 상태이면서 여성 보호를 외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리고는 어떤 예감 같은 것이 매우 강력한 확신 속에서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저 녀석, 잡혀 살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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