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깃발
-최고의 상징
“어떻습니까, 국주님?”
“으음.”
장우양은 자신이 받아 든 옷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의 눈은 무척 신중했고 태도는 매우 진중했다. 눈에 확 띄게 전면에 새겨진 백호 문양이 당장이라도 포효할 듯했다.
“좋군. 이걸로 가도록 하지. 표기는 아직 완성 전인가?”
“예. 표사복만 먼저 완성되었기에 우선적으로 가져왔습니다.”
“홍보는 어떻게 되고 있나?”
“이미 손을 써두었습니다.”
“좋아, 좋아! 지금이야말로 우리 중양표국이 중원표국을 뛰어넘어 천하제일표국으로 비상할 때일세!”
장우양은 매우 흡족해하며 외쳤다.
“이 권리를 위해 우리는 상당한 투자를 했네! 이제 그 이상을 뽑아내야 할 때이네!”
“물론입니다!”
그 진땀나던 거래의 순간을 다시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절대 실패란 있을 수 없었다. 승산은 충분했다. 이 자리에서 노사부와 마주 보고 앉아 있던 며칠 전 그 순간이 알 수 없는 뜨거운 열기와 함께 다시 떠올랐다. 마치 마법처럼 그때 그 당시 느꼈던 뜨거운 야망과 열정과 꿈이 다시 한 번 그의 가슴속에서 불꽃처럼 일 어났다.
***
“어떻습니까, 노사부님?”
장우양은 침을 꼴깍 삼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의 인생이 이번 한마디에 걸려 있었다. 어찌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음… 그러니깐 자네의 말은 우리 ‘하양이’를 중양표국의 얼굴로 삼고 싶다 이건가?”
“그, 그렇습니다. 표기나 의복 등에 모두 아미산의 수호신이자 백호 중의 백호, 하얀 뇌광 백무후의 늠름한 문양을 넣고 싶습니다. 또한……..
“중양표국의 수호신으로 받들고 싶다 이거지?”
이미 다섯 번이나 반복된 말이었기에 치매가 아닌 이상 노사부도 기억하고 있었다.
“예. 물론 그에 상응하는 조치는 취할 생각입니다.”
지금 중양표국에 무엇보다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특별한 ‘상징’이었다. 현재 자신의 표국이 계속해서 세력을 확장해 가며 꾸준한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고는 하나 역사가 깊지 않은 신생표국이었다. 반면 현재 업계 일위를 기백 년간 고수하고 있는 중원표국은 백오십 년도 넘는 까마득한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긴 역사는 곧 신용과도 직결되기에 백오십 년의 시간은 중원표국의 신용도를 나타내는 상징이 되었다.
그가 인생을 바친 중양표국이 천하제일표국이 되기 위해서는 강호제일로 인정받고 있는 중원표국의 오랜 연륜과 명성을 위협할 만한 최고의 상징이 절실히 필요 했다. 어지간히 강력한 무기 없이는 오랜 역사를 방패로 사람들의 뇌리 속에 기억되어 있는 중원표국의 짙은 그림자를 깨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런데 사용료는 얼마나 낼 생각인가?”
노사부가 조용한 목소리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장우양에게 있어서 그것은 밤의 뒷골목에서 날아오는 기습 공격과도 같았다.
“네? 사용료요?”
“물론일세. 하양이의 얼굴을 사용하려면 그에 따른 올바른 대가를 지불해야 하지 않겠나? 설마 공짜로 거저먹으려 한 것은 아니겠지? 그건 상도덕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매우 파렴치한 짓이라네.”
“무, 물론 내야죠! 그런데 누구한테 사용료를 내면 됩니까? 설마 공물이라도 바쳐야 하는 건가요?”
“굳이 멀리까지 갈 필요 없네. 공물 같은 복잡한 절차도 필요없고. 가까운 곳에서 찾게, 가까운 곳에서 엎어지면 코 닿는 데 있으니 이 어찌 아니 친절한가. 허허허 허!”
티 한 점 없이 새하얀 수염을 쓰다듬으며 노사부가 말했다.
“그, 그럼 노사부님께요?”
노사부는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일세. 난 그 녀석의 전권 대리인이니까. 물론 자네가 다른 사람을 중개인으로 해서 협상을 진행할 용의가 있다 해도 노부는 말리지 않겠네. 그거야 자네가 판 단할 문제지. 하지만 그 중개인의 사지나 머리통 중 하나가 협상 도중 없어진다 해도 날 원망하지는 말게나. 그것까지 일일이 책임져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말일 세.”
절대로 자신하고만 일을 진행해야 한다는 이야기보다 더 무시무시하게 들렸다.
“그럼 무단으로 사용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장우양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아니, 자네, 지금 범행 예고를 하는 건가?”
노사부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을 본 장우양은 오해를 살까 두려워 급히 손사래를 치며 자신의 범행 예고를 전면 부인했다.
“아, 아닙니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냥 단순한 호기심이었습니다. 왜 있잖습니까?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별 쓸모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물어 보고야 마는 그런 허무한 호기심 말입니다.”
“흠, 나야 혹여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해도 아무 일도 안 할 작정이네. 굳이 노부가 뭔가를 할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어느 날 자네의 표국이나 표행이 호환(虎患) 을 당하는 일이 있다 해도 그건 내가 어찌해 줄 수 없는 문제겠지.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까지 그런 용기를 낼 수 있다면 그건 진정으로 장한 일일세. 암, 장한 일이고 말고.”
만용도 용기로 구분할 수 있다면 그렇다는 얘기였다.
“그, 그렇군요. 아무래도 전 장해지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 같습니다.”
입을 뻐끔거리며 대답하는 장우양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사실 간단한 양해만 구하면 가능하리라 여기고 있었던 자신이 너무 물렀던 것이다. 그는 이 노인이 누구의 사부인지 잠시 망각하고 마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던 것이다.
“최고의 것을 얻기 위해서는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만 하지. 자네는 과연 그런 각오가 되어 있나?”
꼴깍!
자연스레 마른침이 넘어갔다.
잠시 생각할 짬을 준 다음 노사부가 선언했다.
“자, 그럼 협상에 들어가 볼까?”
장우양은 온몸을 바짝 긴장시키며 일생일대의 거래에 돌입했다. 사천제일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그에게 실수가 있어서는 아니 되었다. 사실 협상은 이미 끝나 있 었다. 마지막 말은 협상의 시작을 알리는 게 아니라 협상이 끝났음을 알리는 소리였다. 최고의 대가를 지불하라. 성심을 내보여라. 장우양은 그럴 용의가 있었다.
“아, 그리고 ‘하양이’로부터의 추가적인 요구도 있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무슨 요구 말씀이십니까?”
“한 달에 한 번 다양하고 신선한 먹이를 소홍루의 ‘소홍주’ 다섯 동이와 함께 공급할 것이 바로 그것일세.”
“백호가 수, 술도 마십니까?”
장우양이 어이가 없어 반문했다.
“당연하지. 그 녀석은 저래 봬도 꽤나 입맛이 까다로워서 아무 술이나 마시지 않는다네. 자넨 왜 아미산 밑에 위치한 소홍루의 술 창고가 몇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 로 부서지는지 궁금하지 않았나?”
물론 궁금했다. 근방에서는 유명한 이야기였으니까.
“서, 설마 그 ‘그믐의 방문자’가…….”
“바로 그 설마지!”
달이 어둠의 그림자 뒤에 모습을 숨긴 칠흑 같은 밤이면 언제나 나타나 소홍루의 술 창고를 부수고 사라지는 의문의 방문자.
그때마다 최고급술 다섯 동이씩이 정확하게 없어져서 주인의 골치를 썩였으나 아무리 경비를 강화해도 매번 똑같이 당하는 바람에 이제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 로 손 놓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 신출귀몰한 범인에 대해서 이런저런 설들이 많았지만 그것이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런데 설마 이 산중지왕 의 짓이었을 줄이야.
“그렇지, 하양아?”
부름과 동시에 어둠 속에서 황금빛 눈이 번쩍 빛나며 한 형체가 드러났다. 그 두 태양 같은 눈동자를 마주하자 벌써부터 오금이 저려지는 게 느껴졌다. 크르르르르!
백무후가 그르렁거렸다.
“어떠냐, 하양아? 이 정도 조건이면 만족하느냐?”
크륵크륵!
백무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명백한 거부 표시였다.
크르르륵크르르르르!
“음… 뭐? 그렇게 해달라고?”
사부는 하양이가 크르렁거릴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맞받아쳤다.
‘설마 대화를 나누는 건가?”
진짜 알아듣긴 알아듣는 건가? 아니면 흉내만 내는 건가? 그러나 그에게는 그 사실을 물어볼 용기가 부족했다.
“저… 뭐라고 하던가요?”
“술이 부족하다는군. 최소한 열 동이는 준비해야 한다는구먼.”
“그, 그건 너무합니다! 안 그래도 거기 술은 고급이라서 비싼데… 열 동이면..
“불만인가?”
“이, 일곱 동이로 어떻게 안 될까요?”
크륵!
물어볼 것 없다는 듯 백무후가 고개를 홱 옆으로 돌렸다. 크기가 크기다 보니 상당히 위협적인 동작이었다.
장우양은 칼을 뽑아 들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아냈다. 어차피 뽑아도 갈가리 찢기는 것은 자기 쪽이 될 것 같았다. 그럴 바에는 인내심을 갈고닦는 편이 훨씬 더 유리할 것이다.
“그럼 할 수 없지. 포기할 수밖에.”
노사부가 한마디 더 덧붙였다.
“안타깝게도 교섭은 결렬이군.”
“자,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깜짝 놀란 장우양이 벌떡 일어나 사정했다.
“서로의 의견이 다르면 같아지게 조율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잠시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미련없이 자리를 뜨려 하던 노사부는 다시 못 이기는 척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정작 장우양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
그는 아직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망설이고 있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노사부가 한마디 했다.
“한마디만 충고해 주겠네. 사람들은 보통 이 세상이 순서대로 서열이 매겨져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일, 이, 삼 등 이런 식으로 말일세. 그러나 그건 큰 착각일세.”
노사부가 손가락 두 개를 들어 보였다.
“알겠나? 이 세상에는 오직 두 무리밖에 없다네. 최고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
그 말은 날카로운 창이 되어 즉시 그의 폐부 깊숙이 박혔다.
그랬다. 천하 제이, 제삼 표국 따위는 아무도 거들떠봐 주지 않는다. 천하제이표국이라는 어정쩡한 간판보다는 사천제일표국이라는 간판이 훨씬 높은 상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 때문에 최근 중양표국에서도 이 점 ‘사천제일표국’을 강조하며 영업에 임하고 있었다.
“자넨 둘 중 어느 쪽에 속하고 싶은가?”
그는 다시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결정은 이미 오래전에 끝나 있었던 터다. 남아 있는 것은 실천뿐.
마침내 장우양은 결심을 굳혔다.
도전할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었고, 투자한 것 이상의 실익을 뽑아낼 수도 있었다. 최고가 되는 것과 이인자가 되는 것은 이윤 획득 측면에서 보아도 하늘과 땅 차 이였다. 그는 경험을 통해 그것을 체득하고 있었다.
현실에 안주하고 싶은 자만이 모험을 두려워한다.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다. 위험을 짊어진 모험을 해서라도 최고의 것을 손에 넣고 싶었다. 주판은 다른 쪽으로도 퉁겨지고 있었다.
자신 같은 표사 나부랭이 입장에서 노사부 같은 무림의 기인과 연을 맺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인연이었다. 전체 소득 중 일정 지분을 요구한다는 것은 반대로 생각 하면 동업자가 된다는 의미였다. 그가 많은 수익을 올릴수록 상대에게 더 많은 이익이 돌아가기 때문에 일종의 운명공동체가 형성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이런 기인과 동업자 입장에 놓이게 된다면 앞으로 사업을 하는 데 있어 유리한 점이 있을 터다. 약간 손해를 보더라도 좋은 인상을 남기는 게 훨씬 유리했다. 이 업 계에서는 평판이란 게 매우 중요했다. 또한 신용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
“좋습니다! 동의하겠습니다! 모두 받아들이겠습니다!”
노사부는 이 거래에 무척 만족한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고의 상징을 손에 넣은 것을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