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건의 분노
-음모 태동
중원표국 남창지국에 후원 깊숙이에 비밀스럽게 자리한 건물 한곳에서 한줄기 연기가 솟아올랐다. 화로 위에서 끓고 있는 것은 탕약이었다. 약재를 써는 의원의 부지런한 손놀림, 다섯 개의 화로에 연신 부채질하는 다섯 명의 하녀들, 폐가가 아닌가 의심될 정도로 조용했던 이곳이 오늘따라 부산하기만 하다.
다 달여진 탕약이 하얀 사발에 부어진다. 쟁반을 든 시녀의 움직임은 신주단지를 모시듯 공손하고 조심스럽다. 방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중원표국의 대표 두이자 금강십이벽의 한 사람인 윤이정이었기 때문이다.
병상 옆에 시립해 있던 윤이정이 약이 담긴 사발을 받아 몇 번 입으로 후후 분 다음 조심스레 환자의 입으로 약을 가져갔다.
“약이 다 달여졌습니다. 식기 전에 어서……..”
“…..”
그러나 돌아누운 환자는 말이 없었다.
“어서 드시지요, 공자님! 이틀 동안이나 혼수상태에 계셨습니다. 허해진 몸을 보하지 않으면……..
다시 한 번 사발을 가까이 가져가며 권하자 환자는 신경질적으로 팔을 내저었다.
휙!
“어이쿠!”
윤이정은 환자의 갑작스런 팔놀림에 그만 사발을 놓치고 말았다.
쨍그랑!
바닥에 떨어진 사발이 반으로 쪼개지며 검은 물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공자님!”
깜짝 놀란 윤이정이 환자를 불렀다. 늪에서 헤엄이라도 치는 듯이 침상에서 허우적거리듯 팔을 휘저으며 이시건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벗겨진 상의 대신 붕 대가 상처 부위를 이리저리 감싸고 있었다.
“이대로 돌아갈 수 없어, 이대로는!”
그가 신경질적이고 절망적인 목소리로 외쳤다. “이공자, 진정하십시오. 상처에 좋지 않습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윤이정이 얼른 그를 말렸다. 찌릿!
이시건의 신경질적인 시선이 윤이정에게 꽂히자 그는 가슴이 덜컹했다. 핏발 선 그의 눈에 살의가 서려 있는 것을 감지했던 것이다.
“이― 공자아……?”
짓씹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농밀한 분노에 윤이정은 가슴이 철렁했다. 눈치 빠른 윤이정이 얼른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주.군! 죽을죄를 졌습니다.”
비굴하다 해도 상관없었다. 타는 듯한 분노에 기름을 끼얹을 필요는 전혀 없었다. 이성을 잃고 맹렬히 타오르는 그 불이 지금 그 자신을 집어삼킬 수도 있는 노릇 이었다. 지금은 자신의 실수를 어떻게 만회할까 급급할 따름이었다.
“잊지 마라! 너의 주인은 이제 나라는 것을. 너는 나의 운명 아래 속해 있다는 것을. 주인의 존재를 잊은 종은 내침당하게 마련이지.”
이시건이 못 박듯 말했다.
“잊지 마라! 나의 운명이 곧 너의 운명이라는 것을.”
“물론입니다, 주군. 속하는 결코 잊지 않고 있습니다.”
주인 된 자가 미친개처럼 날뛸 때는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었다.
“그럼 됐다.”
다시 이시건은 냉정을 되찾았다(물론 본인 생각이긴 했지만). 윤이정을 일격에 때려죽이지 않은 것만 해도 그는 자신이 냉정을 찾았다고 믿고 있었지만 그의 상태 로 보아선 별로 설득력이 없었다.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가서 뭐라고 말씀드려야 한단 말이냐? 큰소리 떵떵 치고 갔다가 멋지게 실패하고 돌아왔다고? 내가 그분께 그렇게 말해야겠나?”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마에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윤이정이 대답했다.
‘젠장! 칼날 위를 걷는 기분도 지금 이 순간보다는 상쾌할 것 같네!’
윤이정은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불붙은 석탄 위에서 맨발로 춤을 춰도 지금 이 순간보다는 더 행복할 것 같았다.
“내가 선택을 잘못했나?”
그러나 이미 선택지는 지나갔고 다시 되돌릴 방법은 없었다. 어떻게든 동요하고 있는 주인을 진정시키고 지금의 난관을 타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안 돼! 이대론 난 파멸이야! 영원히 그 녀석의 밑에서 발이나 핥을 수밖에 없단 말이야. 그렇게는 안 돼! 난 그날 맹세했다. 어떻게든 그 잘나신 얼굴을 부숴주고 야 말겠다고. 그놈이 날 쓰러뜨리고 비웃음을 짓던 그날 말이야. 내 자존심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긴 그놈을 난 용서하지 않아! 절대로! 반드시 후회하 게 해주겠어. 그런데… 그런데…….?
이대로는 그날이 오기 전에 처벌받을 수 있었다. 조직의 벌은 무겁고 엄중했다.
“걱정 마십시오, 주군. 저희들에게는 아직 방법이 남아 있습니다.”
더 이상 내버려 두면 위험하다는 판단 아래 윤이정이 재빨리 개입했다.
“무슨 방법?”
“마음의 혼란이 가라앉으시면 주군께서도 금방 떠올리실 그런 방법이지요.”
그는 절대 자신이 잘나서 그런 방법을 기억해 낸 게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자존심 강한 상사를 대할 때는 요령이 필요한 법이다.
“그래? 뭐 그거야 당연한 일이지만…….”
이시건이 눈짓으로 어서 말해보라는 신호를 보냈다.
“잊으셨습니까, 주군? 청룡은장의 두 꼬맹이들을요. 그 아이들에게는 아직 ‘그것’이 있습니다. 그 ‘열쇠’만 손에 넣는다면…….”
그리고 윤이정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 다음은 말 안 해도 다 아시리라 믿는다는 그런 미소였다. 물론 이시건은 완전히 이해했다. 그는 참지 못하고 자리 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오, 열쇠! 그래, 그게 있었지! 그것만 손에 넣으면 다른 실수는 모두 무마할 수 있을 터! 내가 왜 진작에 그 생각을 못했지?!”
좀 전까지만 해도 거의 꺼져 가던, 불씨만 남아 있는 검은 회색 재 같던 눈동자에서 다시금 욕망의 불꽃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절망에 허덕 이던 흐릿한 눈동자가 지금은 새로운 희망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나도 참! 그런 중요한 걸 여태 까먹고 있었다니! 그래! 그게 있었어, 그게 나의 미래를 열어줄 열쇠가! 그것만 손에 넣는다면 그분께서도 날 책하진 않으실 게야, 이정!”
“예, 주군!”
“중양표국을 친다! ‘십삼혈(血) 전원을 소환하겠다.”
“십, 십삼혈 전원을…….”
윤이정이 마른침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지난밤 이시건은 그들까지 필요할 일은 없을 거란 생각에 미처 데려가지 않았었다. 애송이들 사냥하는데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고, 자신의 손 하나면 충분하다고 자만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제 그들만 있었다면 오늘 침상에 누워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놈들이었을 텐데…….”
그러던 이시건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냐아냐, 그들이 누울 곳은 침상도 과분해! 무덤으로 쓸 차가운 땅뙈기 한 뼘이면 과분하지.”
“그렇고말굽쇼, 주군!”
윤이정이 맞장구쳤다.
“그럼 문제는 그 두 연놈이로군.”
중양표국을 치기 전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직 남아 있었다.
“아미신녀 진소령과 점창제일검 유은성 말씀이시군요!”
“그놈들 말고 다른 놈들이 감히 이 몸의 골칫거리가 될 자격이 있겠느냐?”
모용휘와 남궁상에게 데일 뻔한 일은 이미 싸그리 잊어버린 듯했다.
“확실히 그 두 연놈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아는데도 정면으로 쳐들어간다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입니다. 설령 성공한다 해도 저희 쪽의 피해가 너무 막심 합니다.”
주군의 심기를 더 이상 불쾌하게 자극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윤이정은 그 점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확실히 그놈들은 강하다.”
아려오는 상처 부위를 왼손으로 감싸며 이시건은 이를 갈았다. 기회가 이때라는 듯 윤이정이 몸을 앞으로 바싹 내민다.
“주군, 그에 관해서라면 저에게 방책이 있습니다. 흐흐흐흐!”
야비한 미소를 지으며 윤이정이 운을 띄웠다.
“방책?”
“예! 하루의 말미만 주신다면 멋지게 해결해 보이겠습니다.”
이 순간 윤이정의 머리는 비열과 치사와 야비의 도가니 속에서 미칠 듯이 격렬하게 회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