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1권 15화 – 불효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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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21권 15화 – 불효란 무엇인가?

불효란 무엇인가?

-일탈의 시작

다음날 오전. 눈처럼 하얀 매 한 마리가 바람을 가르며 마천각 상공을 활공했다. 하늘을 지배하는 자만의 고고하고 당당한 위엄을 뽐내려는 것일까. 하얀 매는 다 시 한 번 원을 그리며 선회하더니 날개를 접으며 지상으로 낙하해 들어왔다. 매가 날아드는 지점에는 그에 못지않게 고결한 사람, 나예린이 손을 뻗고 있었다. 나예린은 흰 매의 다리에 묶여 있는 전서통에서 조그만 서찰을 꺼내어 펼쳐 보았다. 순간 그녀의 얼굴에 엷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안 좋은 소식이에요?”

연비의 걱정스런 물음에 나예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그냥 좀 실망한 것뿐이에요. 언제나처럼 똑같은 소식이군요. 아직도 독고 사자의 행방을 찾지 못했다는…….

연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예린의 어깨를 토닥였다.

“걱정 말아요, 린! 그 사람이라면 분명 무사할 테니!”

“고마워요. 그런데 연비, 혹시 독고 사자를 본 적이 있어요?”

의아한 표정으로 나예린이 물었다.

“어머, 제가요? 그 독고 사자라는 분도 예전엔 사천에 있었나요?”

연비는 티끌만한 동요도 보이지 않고 반문했다. 태연한 반응에 머뭇거린 것은 오히려 나예린이었다.

“아니요, 그런 건 아니지만…….”

“흐흥,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질문을?”

“조금 전 꼭 독고 사자를 알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해서요.”

“풋, 그랬어요? 으음, 린의 사자라면 저도 어서 만나고 싶군요. 분명 무사할 거라고 믿어요.”

딱히 봤다는 답도, 못 봤다는 답도 아닌 미묘한 말이었다. 하지만 자연스런 대화의 흐름 덕에 나예린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고마워요. 연비가 그렇게 말하니 위로가 되네요. 그래요. 분명 독고 사자는 괜찮을 거예요. 누가 뭐래도 언니는 검후 그분이 실력을 인정한 사람이니까요.”

독고령에 대한 나예린의 신뢰는 깊고 두터웠다.

“그 정도까지 린에게 신뢰받다니, 정말 부러운데요.”

“전 연비도 깊이 신뢰하고 있어요.”

그러자 연비가 허리를 살짝 숙이며 정중히 대답했다.

“영광입니다, 아가씨! 이 몸도 평생 충성을 다하겠사와요!”

나예린은 살며시 웃음을 터뜨리자, 어느덧 어깨에 자리를 잡은 흰 매가 그녀의 얼굴에 머리를 비볐다. 나름대로 재롱이었다.

“연비! 이 아이, 기억하고 있어요?”

잡티 하나 없이 눈처럼 하얀 깃털을 가진 우아하게 생긴 매였다.

“물론이죠. 어떻게 이 녀석을 잊겠어요? 요 녀석, 이렇게나 자라다니! 정말 오랜만이구나.”

연비가 매를 향해 웃으며 인사했다. 백응은 흰 날개를 활짝 펴며 반갑게 화답했다. 연비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이 녀석, 정말 몰라보게 늠름해졌는걸요? 그때만 해도 너무 약해서 곧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죠? 그땐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이 아이도… 그리고 연비도…….”

흰 매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동자 가득히 아련한 감회가 서서히 차오르기 시작했다.

***

“분, 입술연지, 고난이도 머리 땋기, 장신구 일체, 의복 장착, 모두 완료! 화장 끝! 좋아, 좋아. 그럼 슬슬 일하러 가볼까나!”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점검을 마친 연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어째 요즘 즐거워 보이는구나?”

연비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사부.””

어느새 열린 문간에 기대 노사부가 서 있었다.

“숙녀 방에 들어올 땐 ‘기별’해야 한다는 예의도 몰라요? 이 주정뱅이 사부!”

연비가 소리를 빽 질렀다.

“숙녀는 누가 숙녀냐! 결정적으로 네 녀석 남자잖아!”

별 같잖은 이야길 다 들어본다는 투로 노사부가 지적했다.

“그런 말씀 하시면 곤란하지요. 알맹이까지 여자가 되라고 하실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말씀을 바꾸시다니요. 그래서야 어찌 스승으로서 타의 모범이 될 수 있겠 사옵니까?”

연비의 말은 다소곳하면서도 논리 정연했다.

“허참! 그 가식적이긴 말투가 왠지 주먹을 들끓게 하긴 한다만, 조리있게 말하는 힘은 제법 틀이 잡혔구나!”

사부는 탄식하며 말했다.

“좋다. 다음부턴 기별을 하지. 그런데 말이다, 화장이 끝났는데도 아직 남자로 남아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냐? 좀 전의 그 머슴아 같은 혼잣말은 실로 볼썽사납더구 Lt.”

“윽!”

그 부분에 대해선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한동안 그냥 뒀더니 네 녀석이 쓰고 있던 유리면구에 금이 간 모양인 게지. 제자야, 우리 다시 한 번 특훈할까? 보수도 할 겸?”

넌지시 이야기한다. 특훈을 빙자한 고문의 역사가 주마등처럼 연비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닙니다. 사양하겠사옵니다.”

여성스런 목소리로 연비가 답했다.

“그래? 그것참 유감이구나. 그런데 진짜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게냐? 언젠 가기 싫다고 투덜거리더니만, 요즘은 가무를 팔러 가는 데 의외로 적극적이더구나?” ‘윽, 눈치도 빠르긴.’

역시 방심할 수 없는 존재였다. 연비는 최대한의 그림자를 눈 밑으로 불러들이며 짐짓 한숨을 내쉬었다.

“좋은 일이라… 뭐, 기왕 하는 거 즐겁게 하면 짜증도 덜 나고 좋죠. 언제까지 악덕 사부에게 팔린 불쌍한 어린양인 채로 울고 있을 수는 없지 않겠어요?”

“누가 악덕 사부냐? 욘석아, 다 널 위해서다.”

“숙녀에게 욘석이라니요! 그런 무신경한 말씀을 하시다니, 너무해욧! 아흑!”

연비가 몸을 비틀며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쳤다. 어딜 봐도 가련한 소녀였으나, 노사부는 못 볼 걸 봤다는 눈으로 파리를 쫓듯 손을 내저었다.

“객쩍은 소리 말고 얼른 가라, 가. 오늘도 열심히 벌어오도록.”

“아아, 오늘도 이 불쌍한 소녀는 사부의 밥벌이를 위해 주루에…… 흑흑흑.”

다시금 소매로 눈물을 훔친다.

“그 모습으로 그러니 참으로 가증스럽구나, 제자야! 냉큼 다녀오는 게 어떻겠느냐? 이 사부의 자상함이 떨리는 주먹을 달래고 있는 이참에.”

“알았어요. 가면 되잖아요, 가면!”

자기 몸보다 커다란 금을 훌떡 메어들고 연비는 초옥을 나섰다.

“이리하여 소녀는 오늘도 무능한 주정뱅이 노인의 수발을 들기 위해 천근처럼 무거운 금을 메어들고 물집 잡힌 발로 타박타박 산길을 걸어 내려갔던 것이었습니 다.”

감정 잡은 목소리로 변설을 읊는다.

퍽!

“아야!”

사부는 백 보나 떨어져 있는데 이 꿀밤은 대체 어디서 날아왔을까.

“언제 어디서 뭐가 날아들지 모르니 산길은 조용조용 입 다물고 가려무나, 제자야!”

듣자 하니 범인이 틀림없는 사부가 저만치 뒤에서 걱정해 주는 척 한마디 한다.

“백보꿀밤이라니… 과연 사부!’

역시 방심할 수 없는 존재였다.

챠랑, 챠라랑.

샘물보다도 청량한 미성(聲)을 들으며, 어린 소녀 린은 창틀에 턱을 괴고 창밖의 후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쪽 손에는 좀 전까지 창문의 틈새에 끼워놓았던 붉은 수건을 꼭 쥐고서, 린은 한숨처럼 탄성을 흘려냈다.

바람에 하얗게 꽃잎을 흩날리는 배꽃나무에서 보일 듯 말 듯 가지 사이를 노니는 장난스런 제비. 오늘의 연비는 딱 그런 느낌의 춤을 추고 있었다. 경쾌하긴 하지 만 경박하진 않고, 화려하긴 하지만 어지럽지도 않았다. 바람이 일면 꽃잎이 일고, 바람이 잦아들면 제비가 꽃가지를 짓친다.

그러다 일순간, 거센 바람이 일면서 꽃잎의 물결이 별처럼 빛을 발하더니 제비가 꽃잎을 타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하아… 음, 아?”

다시금 한숨을 내쉬던 린은 갑자기 당황을 금치 못했다. 춤이 절정에 달했는가 싶었더니만, 날아오른 제비, 아니, 연비가 그대로 창문으로 몸을 날리는 것이 아닌 가. 연비는 몸이 떠 있는 상태에서 다시 한 번 은빛의 주단으로 매섭게 땅을 튕기고는 각 층의 돌출물을 가볍게 박차며 제비처럼 신형을 날렸다.

“조, 조심……!”

떨어질까 두려운지 더듬거리기까지 하는 외침. 연이어 도약해 오르던 연비는 린을 올려다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따사로운 햇살이 연비의 눈동자에 아롱지며 신 비로운 빛을 발했다.

어두운 곳에서는 깊고 짙은 고동색으로 보이지만, 햇살이 비치면 서늘하고 투명한 금빛을 발하는 호안석 같은 눈. 첫 만남은 그늘 밑에서였기에 몰랐었으나, 그 뒤 서너 번을 더 만나면서 그녀는 연비의 눈동자가 특이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호안석(石) 같아……!”

라고 처음으로 경탄을 터뜨렸을 때, 연비는 린에게 떨떠름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었다.

“아, 이거요? 으음… 부작용이에요, 부작용. 지금은 이렇지만 언젠간 원래대로 돌아가겠죠.”

“하지만… 예쁜걸요?”

“아, 아하하, 하. 위로해 줘서 고마워요, 린. 흐흑.”

그렇게 우는 시늉까지 하는 연비를 보았기에, 린은 그 후부터 눈에 대한 얘기를 웬만하면 피했다. 아무래도 연비 본인은 그 호안석 같은 눈을 떨떠름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린은 몰랐지만 연비의 눈은 뇌령심법을 익히는 단계에서 과도기적인 부작용으로 빛이 흔들리는 상태였다. 물론 그처럼 일찍 과도기에 들어서는 것도 쉬운 일은 아 니었다. 인형설삼의 복용, 자칭 천재적인 자질, 혹독하다 못해 지옥 같은 수련으로 채찍질해 주는 노사부의 존재 덕에 그토록 빠른 성취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부의 ‘덜된 녀석’이라는 입버릇처럼, 그는 이미 호안석의 눈을 뛰어넘어야 할 장애물로 인식하고 있었다. 모르는 이들은 아름답다고 할지언정 비뢰문도 인 그로서는 그 눈이야말로 자신이 ‘미완(未完)의 존재’임을 드러내는 낙인이었다. 아무튼 그런 내막을 알 리 없는 린은 호안석의 눈동자와 마주칠 때마다 빨려 들 어갈 듯한 느낌을 받았다.

타닥.

연비는 경쾌한 발소리를 내며 삽시간에 창틀에 올라앉았다. 햇살을 등지고 앉자 눈동자는 다시 심연처럼 깊은 고동빛으로 돌아갔다. 사뿐히 방 안에 내려선 연비 는 유쾌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이얍! 오늘 연습은 이대로 끝! 흐흠, 그나저나 며칠 새에 더 예뻐졌네요? 어디어디, 볼 좀 봐봐요.”

연비는 린의 두 뺨을 손으로 가볍게 감쌌다. 린은 손에서 전해져 오는 부드러운 온기를 느끼며 가만히 있었다. 이상하게도 연비의 접촉은 그다지 거부감이 들지 않 았다. 연비의 말도 다른 사람들의 것과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이를테면 방긋 웃으며 ‘예뻐졌네요?’라고 하는 말과 스멀스멀한 웃음을 지으며 ‘예, 예쁘구나, 크흐흐 흐. .’ 하는 것의 차이랄까.

“호오. 상처들도 다 아문 것 같고, 이렇게 보니까 린도 제법 예쁜데요? 후후후.”

린의 본래 모습을 아는 자들이 코웃음 칠 얘기를 하며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듯 즐거워하던 연비는 갑자기 정색을 했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군요.”

그리고는 짐짓 날카로운 눈으로 린의 모습을 이리저리 뜯어본다.

“갈 길이요?”

“네. 역시, 그 눈빛과 머릿결, 그리고 혈색이 문제예요.”

뿌옇게 변한 눈과 윤기를 잃은 머리칼, 파리한 안색은 아직 그대로였다. 특히 눈동자의 변화는 용안을 잃어버린 이후로 전혀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아마 린이 매일 방구석에만 있어서 그럴 거예요. 그러고 보니 린은 답답하지 않아요? 나보고 방에 있으라면 사흘도 못 참을 텐데.”

“글쎄요, 별로.”

무심할 정도로 태연한 답이었다. 연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아하니 꽤 오래전부터 방에 틀어박힌 모양인데, 이제는 그에 익숙해져서 아무런 답답함도 못 느끼 는 것일까. 아니, 그럴 리는 없었다. 자신이 방문하고 돌아가면 길어야 사흘, 빠르면 이틀 후엔 붉은 수건이 창에 걸렸으니까.

그렇다면 그녀는 왜 이런 방구석에서 처량하게 붉은 수건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물끄러미 린의 창백한 얼굴을 보던 연비에게 문득 짚이는 것이 있었다.

“혹시, 무서워요, 밖에 나가기가?”

입을 꾹 다무는 걸 보니 정곡을 찌른 것 같았다.

“저런, 아까워라. 밖에는 재밌고 좋은 것들도 많은데.”

“하지만 사람이… 밖에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러고 보니 린에게는 사람들의 마음이 흘러들어 와서 괴로움을 겪었다지.

“그럼 사람이 없는 곳은 어때요?”

“그런 곳이… 있나요?”

상당히 회의적인 반문이다.

“린이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사람이 거의 없는 곳은 몇 군데 있어요. 가까운 곳으로 안내해 드릴까요? 일단은 뒷산부터. 어때요?”

천향루 뒤쪽으로 가장 가까운 산이라면 분명히 아미산. 뒷산치고는 상당히 높고 험한 산이다.

“하지만 아빠가…….?

린이 말꼬리를 흐렸다.

“아, 그 어르신 말이군요.”

여러 정황을 통해 연비는 린의 아버지가 일전에 봤던 그 노인임을 알고 있었다. 그의 신분이나 나이는 다들 쉬쉬하는 분위기여서 제대로 묻지는 못했지만, 아무튼 수상쩍은 부녀지간이었다.

저렇게 어린 소녀가 최소한 백 살은 넘은 영감을 아버지로 두고 있다니, 이래서야 왠지 금단의 냄새가 풀풀 나지 않는가. 게다가 린에게는 왠지 가정폭력이나 아동 학대의 분위기가 풀풀 풍긴다. 이래서야 말 한마디 잘못 물었다가는 또 괜히 아픈 상처를 들쑤실까 봐서라도 호기심을 그저 묻어두는 수밖에 없다.

그래도 연비가 만났던 그 ‘어르신’은 절대로 악인 같지는 않았다. 딸아이를 걱정하는 팔불출 아버지에 가까운 인상이었다.

“하긴, 린의 아빠가 걱정하실 것 같긴 하네요.”

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내 생각엔 린이 방구석에만 갇혀 있어도 걱정하실 것 같은데요? 부모님들은 원래 이래도 걱정, 저래도 걱정이잖아요.”

“그런가요?”

린이 힘없는 목소리로 반문했다.

“물론이죠. 그러니 린은 어느 쪽이 자신에게 더 좋을까를 신중하게 선택하면 돼요. 단지 ‘부모님이 걱정하시니까’라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면, 그야말로 불효라 구요. 결국 자식이 잘되는 거야말로 부모님이 진짜 바라는 거니까요.”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듣다 보니 연비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내게 좋은 것…….”

“네에, 여기서는 뒷산에 가느냐 방구석에 있느냐가 되겠습니다.”

“거긴 사람들이 없다고요?”

어지간히 불안한지 다시 확인해 본다. 용안의 능력이 돌아오지 않은 고로 예전처럼 무방비 상태는 아니었지만, 여전히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두렵고 싫었다. “글쎄요. 도착할 곳은 우리 집 근방이긴 해도 거기서 누굴 만난 적은 거의 없어요. 산에 들어가기 전엔 행인들이 많을 테고 산길에도 사람은 있겠지만, 린이 신경 쓰이지 않도록 할 묘안이 있으니 안심해도 될 거예요.”

린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연비의 집이요? 그럼, 부모님이나 다른 가족들도 있겠네요?”

“가족이라……..”

순간 연비의 눈동자가 한층 더 짙어져 보였다.

“부모님이라면 예전에 다들 돌아가셨어요. 집에 있는 건 게으름뱅이 사부뿐이죠, 에휴.”

장난삼아 짓는 가벼운 한숨이었다. 하지만 그 한숨에 평소와는 다른 무거움이 실려 있다는 것은 린도 짐작할 수 있었다. 린은 당황했다. 그녀에게 있어 부모라는 존재는 그야말로 험난한 세상의 마지막 은신처, 최후의 보루였다. 특히 아버지인 나백천이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세인들의 탐욕에 난도질당했으리라.

그런데 연비는 부모님이 모두 안 계시다니, 그런 처참한 처지는 그녀로선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가, 가요, 산!”

할 수 있는 말이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렇게라도 위로해 주고 싶었던 것일까. 어느 쪽이었든 간에 연비의 눈은 생기로 반짝였다.

“오오, 정말이죠?”

환한 미소, 밝아진 눈. 그런 모습이 연비에겐 훨씬 더 잘 어울린다고 린은 생각했다.

“좋아요! 그럼 내일 아침까지 체력 보전해 둬요, 후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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