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1권 16화 – 하늘을 지배하는 자, 흙을 지배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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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21권 16화 – 하늘을 지배하는 자, 흙을 지배하는 자

하늘을 지배하는 자, 흙을 지배하는 자

-날개가 가져온 바람

“헉헉헉!”

가녀린 소녀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청량하면서도 알싸한 산 내음이 목을 훑고 폐부로 스며들었다.

맑은 하늘, 뜨거운 햇살, 가파른 산길. 원래 산이 높고 험하기로 유명한 사천, 그 사천에서도 유명한 아미산이다. 산 초입까지는 마차를 탔고 산 중턱에 목적지가 있 다곤 했지만, 린의 가느다란 다리는 거친 산길이 벌써부터 버거웠다. 그나마 편안한 남자 옷차림인 게 다행이었다.

두 사람은 천향루를 나서던 아침녘에 남궁진과 실랑이를 벌여야 했다. 린에게 얘기를 들었던 나백천이 출타 전에 남궁진과 세 명의 호위를 남겨뒀던 것이다. 당연 히 린은 호위들이 따라오는 걸 질색했고, 연비와 남궁진은 신경전 끝에 겨우 타협을 보았다.

‘린은 남장, 호위는 한 명. 연락용 피리 지참’이 타협안이었다. 다만 린이 우락부락한 호위는 무섭다는 바람에 근래 연비와 면식을 나눈 후원의 보초가 멀찍이서 있 는 듯 없는 듯 따라가게 되었다.

남궁진은 세 명의 호위를 데리고 은밀히 뒤를 따랐다. 그의 어깨에는 깃털을 붉게 물들인 비둘기가 한 마리 앉아 있었다. 날짐승 전용의 특수한 피리 소리를 따라 정확한 위치로 날아가는 수색구(搜索鳩)였다. 보초가 반 시진에 한 번씩 피리를 불면, 수색구로 추적해서 남궁진 일행이 한 박자 늦게 따라가는 식이었다. 그러면 비상시라도 최대한 속도를 내서 반 식경 내에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 보초가 유사시에 반 식경이나 제대로 버텨줄지 모르겠군.”

남궁진은 불안했다. 보초란 본디 떨거지들을 막는 데에나 쓰지, 막상 일이 터졌을 땐 쓰러지기 전에 비명이라도 질러주면 다행이었다. 그나마 연비라는 소녀는 다 소 실력이 있는 것 같았으니, 유사시엔 둘이서 어떻게든 버텨주길 빌 뿐이었다.

그 순간에도 소모품으로 낙인찍힌 보초는 아무것도 모른 채 연비와 십 장 정도의 간격을 두고 노심초사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두 사람을 놓칠까 봐 전전긍긍이었 다. 수풀과 굴곡에 따라선 한 치 앞에서도 일행을 놓치게 되는 것이 산행인지라, 십장이란 실로 엄청난 간격이었다. 은근슬쩍 거리를 좁히고 싶어도, 맨 앞의 저 산 고양이 같은 소녀가 유유한 발걸음으로 자꾸만 거리를 벌려놓는다.

연비는 그야말로 평지를 걷듯 가뿐하게 길을 이끌었다. 바위 사이를 사슴처럼 통통 튀어 오르는 게, 도저히 린과 같은 또래의 여자 아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모습 이었다.

“연비…….”

숨이 턱까지 차오른 린이 연비를 불렀다. 더 이상은 한계였다.

“아, 미안해요. 익숙한 길이다 보니 어느새 걸음이 빨라졌네요. 조금 쉬었다 갈까요?”

연비는 허리에 차고 있던 호리병을 린에게 건네주며 바위에 걸터앉았다. 마침 한쪽으로는 수려한 바위와 늘어진 노송들이, 반대쪽으로는 맑은 냇물이 보이는 아름 다운 곳이다.

“너무 마시면 못 움직이니까 두세 모금만 마셔요.”

목을 축인 린은 여전히 숨을 헐떡이며 호리병을 돌려주었다.

“연비는 이런 곳에서, 후우… 어떻게…….”

숨을 고르느라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한다.

행인들이 있는 산 초입까지는 마차를 타다가 감춰진 오솔길 앞에서야 비로소 산행을 시작했기 때문에 아직까지 낯선 사람과 부딪칠 일은 전혀 없었다. 혹 멀리서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기라도 하면, 연비는 린을 데리고 잠시 옆길이나 수풀 뒤로 길을 돌아갔다. 그만큼 불편을 감수하고 사람의 흔적이 거의 없는 오솔길로만 지나 왔으니, 린이 보기에 이곳은 험악한 야생 세계 그 자체였으리라.

“이렇게 험한 곳에서 어떻게 사냐는 거죠?”

뒷말을 짐작한 연비는 손수건을 물에 적셔 린에게 건넸다.

“글쎄요, 사부가 여기 있으니까요. 그래도 살다 보면 괜찮은 곳이에요. 물을 길으려고 계곡 상류까지 수차례 왕복하거나, 장을 보려고 십여 리를 오가는 게 귀찮긴 하지만요. 가끔씩 만나는 독사, 지네, 맹수, 독충, 산사태, 눈사태만 넘기면 그럭저럭 살 만해요. 경치 좋고 조용한 데다 땅값이 없잖아요?”

태연히 열거하는 연비의 말에 린은 넋을 잃고 있었다. 그녀는 난데없이 머뭇거리며 다가와 연비의 옆구리를 두어 번 쿡쿡 찔렀다.

“앗, 왜 그래요?”

“역시, 살아 있군요.”

안도하는 린의 반응에 연비는 어이없는 얼굴로 물었다.

“그럼 설마 유령이라도 되는 줄 알았어요?”

“…약간.”

애매모호한 답이다. 린은 사실 연비를 처음 만날 때부터 일말의 의심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눈동자나 춤뿐 아니라 행동도 워낙 신출귀몰한 데다, 높은 곳에도

새처럼 날아오르지 않는가.

물론 웬만한 고수라면 연비처럼 높이 도약하는 것쯤은 그다지 일도 아니었다. 아버지인 나백천만 해도 산 위는 물론이요, 짧은 거리는 물 위도 뛰어다닐 고수였으 나,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던 그녀는 그런 광경을 목격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풉, 저처럼 대낮에 열심히 돌아다니는 유령이 어디 있어요? 린처럼 방에만 있는 사람한테 유령 같다고 하는 거죠. 봐요, 지금도 거의 녹아내릴 것 같은데요?” 녹아내린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린의 이마는 방금 전 손수건으로 닦아냈는데도 또다시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히고 있었다.

“쯧쯧, 완전 운동 부족이군요.”

연비는 딱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손수건을 다시 시원하게 적셔주었다.

“운동 부족?”

“매일 방에만 처박혀 있었으니 당연하죠. 그래도 하다 보면 상쾌해지는 게 운동의 재미! 여긴 다른 데 비하면 별로 험한 길은 아니에요. 자, 그럼 다시 부족한 운동 을 채워볼까요?”

“으우…….”

벌떡 일어나는 연비를 보며 린은 자기도 모르게 신음했다. 연비는 그 소리에 빙긋 웃으면서도 가차없이 다시 산행을 시작했다.

정말이지 아무도 없었다. 그녀에게 폐인이라느니 운동 부족이라느니, 이렇게 막말과 충고를 버무리면서 운동을 시키는 사람은. 편히 대해주는 것도, 엄하게 대해 주는 것도 연비가 처음이었다. 다른 이는 모두 그녀를 깨지기 쉬운 유리 조각처럼 취급했던 것이다.

잠시 말없이 길을 걷던 연비는 문득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어때요? 걷다 보니 좀 익숙해지지 않아요?”

“아뇨, 전혀.”

어쩐지 린답지 않게 단호하고 재빠른 대답이었다. 표정에도 단호한 확신이 배어 있었다. 연비는 애석해하는 건지 웃음을 참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저런. 아직 힘들어요?”

끄덕끄덕!

린이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휴우, 산에 들어온 지 이제 겨우 한 시진 넘었는데. 앞으로 정말 운동 많이 해야겠어요. 우리 다음부턴 만날 때마다 산에 갈까요?”

“으, 으우우……!”

“푸후후훗, 농담이에요, 농담.”

울상을 짓는 린의 얼굴을 보고 웃다가 연비는 문득 가슴이 철렁해졌다.

‘헉, 그러고 보니 사부가 날 굴리던 건 이런 재미 때문이었나!’

악의 고리는 순환한다는 말의 의미를 진정으로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거… 버릇될지도…….’

“흠흠, 아무튼 저처럼 매일 다니다 보면 린도 이만한 길은 식은 죽 먹기일 테니 힘내요. 전 이제 여긴 눈 감고도 다닐 수 있는걸요?” 깨닫는 것과 반성하는 것은 별개임을 증명하는 호언장담이었다.

“정말요?”

“그럼요. 자, 봐요.”

“그, 그만둬요.”

린은 다급히 말렸지만 연비는 이미 눈을 감은 후였다.

“자, 그럼 출발!”

린은 조마조마한 눈으로 연비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정확히 열한 걸음째. 우당탕 소리를 내며 연비는 작은 바위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연비!”

“아야야……. 괘, 괜찮아요. 으으, 요 못된 바위 녀석이 갑자기 고개를 불쑥 내밀지 뭐예요? 요 녀석, 넌 갑자기 어디서 온 게냐!” 연비는 얼굴을 붉히며 애꿎은 바위를 괜히 발끝으로 콩콩 찼다.

“푸훗!”

린도 살풋 웃음을 터뜨렸다. 자연의 속삭임 덕인지 연비의 능청 때문인지는 몰라도, 린의 웃음은 조금씩 환해지고 있었다.

산에 오른 지 두 시진. 경사는 더욱 가팔라졌다. 연비는 여유만만이면서도 말없이 걸음을 늦추어주었다. 린의 속도에 맞춰주기 위해서였다. 잠시 숨을 고르며 하늘

을 올려다보던 린은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와아! 아름다워요!”

하얀 날개가 푸른 하늘을 비스듬히 가른다. 눈처럼 하얀 매였다. 자유로이 창공을 가로지르는 흰 매는 기품이 넘쳤다. 바람을 날개 밑에 쌓고 높이 높이 비상하는 매.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자신과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백응(白鷹) 말이죠? 이 산에선 한자리 하는 녀석이에요. 이쪽 산맥 부근 하늘은 모두 저 녀석 영역이랍니다.”

자유로운 바람, 나도 저렇게…….

린은 하얀 바람, 하얀 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무한한 동경이 뿌연 눈동자를 가득 채웠다. 백응은 금세 흰 점처럼 작아지더니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역시 바 람은 붙잡아 맬 수 없는 것일까.

“아아, 가버렸네요. 그치만 금방 또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우리가 가려는 곳 부근에 저 녀석들의 왕좌가 있거든요. 린도 보고 싶죠?”

연비는 린의 마음을 읽은 듯 물었다. 린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땀을 닦았다. 체력 부족이 분명한데도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상쾌해지는 기분이었다. 하얀 날개 가 좋은 바람을 가져온 모양이었다.

“자, 잠시 후면 험난한 모험도 끝! 곧 기가 막힌 곳을 보여줄 테니 기대해도 좋아요!”

그리고 그것은 연비의 말대로 되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끝이 나게 될 줄은 미처 예상치 못한 린이었다.

얼마 후, 거침없이 산길을 오르던 연비의 발걸음이 우뚝 멎었다. 린도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연비를 바라보았다. 연비의 얼굴이 약간 굳어 있었다. “흐흠, 이상하지요?”

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이상한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뭔가 조용한데요?”

연비는 산 전체를 잠식해 가는 미묘한 정적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인적없는 산길이라도 그 안에는 많은 소리들이 어우러져 있다.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 물 이 바위를 스치는 소리, 이따금 동물들이 풀숲을 스치는 소리……. 그런데 지금 그중 뭔가가 완전히 빠져 있었다.

“아, 새소리가 안 들려요!”

푸드득!

연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앞쪽에서 새 한 마리가 나무 위로 날아올랐다. 깜짝 놀란 린이 어깨를 움찔했다.

“새, 있는데요?”

“그, 그렇긴 하네요.”

연비는 그래도 왠지 찜찜한 마음을 떨치지 못했다. 어쩐지 산이 조용히 술렁이는 것 같았다.

“린, 아쉽지만 우리 오늘은 여기까지만 보고 돌아갈까요?”

“돌아가요?”

린은 충격으로 눈이 동그래졌다. 힘든 와중에도 이제야 바위를 밟는 요령이 조금씩 생기는 것 같았고, 산길에도 조금씩 재미를 붙이던 참이었다. 게다가 잠시 후면 목적지라니 내심 기대했던 것이다.

“백응의 둥지는 아직 먼가요?”

“그곳이요? 으음, 저쪽 수풀만 넘어가면 되지만… 왠지 오늘은 찜찜해서요.”

설명하기는 어려웠지만, 잔잔히 불어오는 바람에 무언가 불길한 냄새가 묻어 있었다. 혼자라면 몰라도 린을 데려가기는 찜찜했다.

하지만 웬일일까. 어느새 다가와 연비의 소매를 붙잡은 린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불안해하는 기색이라곤 전혀 없이, 아쉬움과 의지가 가득 담긴 눈. 척 보기에 도돌아가기 싫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치 창문에서 뛰어내렸던 그날, 돌아가기 전에 연비의 소매를 붙잡았던 때 같았다.

“잠깐 백응만 보는 건.

작은 목소리, 얼버무리는 말이지만 강력한 염원이 담겨 있다. 백응이 그토록 인상적이었던 것일까. 린이 이렇게 ‘하고 싶은 것’을 말하는 일은 좀처럼 보기 힘들었 다.

“하아, 괜찮을까 모르겠네요.”

그 말만으로도 린의 얼굴이 한층 더 밝아진다. 연비는 보초가 서 있는 저 아래쪽을 흘낏 한 번 바라보았다.

보초는 때마침 그놈의 들리지 않는 피리를 꺼내서 불고 있었다. 산에 오르고 벌써 두 시진 반이 흐른 것인가. 차분히 피리를 품에 넣는 모습을 보니 별다른 이상은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흐음. 사람들도 있으니 괜찮으려나?”

그러고 보면 여기까지 데려와 놓고 돌아가자는 것도 우습긴 했고, 이런 마무리로는 린을 다시 방 밖으로 끌고 나오기가 더욱 힘들어질 공산이 컸다. 게다가 이미 점심때도 슬슬 지나고 있다.

‘그래. 하긴 어차피 먹을 거, 역시 그 무지개가 걸리는 폭포를 보면서 먹는 게 제일이지.’

린을 데려가려는 장소. 그곳은 기가 막힐 정도로 미려한 폭포를 볼 수 있는 명당이었다.

연비가 새들의 왕좌라고 부르는 측백나무 뒤쪽의 샛길로 살짝만 돌아가면 한순간에 눈앞이 탁 트이면서 여섯 줄기의 폭포가 기적처럼 펼쳐진다. 반원형으로 펼쳐 져 뽀얗게 일어나는 물의 장막 덕분인지, 맑은 날이면 물줄기가 만나는 중심부에 색색의 무지개가 걸리는 천혜의 사원.

지금 연비가 서 있는 곳은, 조용히 귀를 기울이면 어렴풋이 물소리가 쏴아아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연비는 걱정을 떨쳐 내듯 어깨를 으쓱해 보았다. 폭포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마음이 한결 상쾌해졌다.

“뭐어, 괜찮겠죠? 가요, 가.”

작은 주먹을 굳세게 쥐며 린이 싱긋 웃었다. 산 내음이 스며들어 한층 더 맑아진 웃음이었다.

수풀을 헤치자 나타난 것은 거대한 적갈색의 기둥, 그 기둥을 구름처럼 감싼 짙푸른 침엽(葉)의 주렴이었다. 족히 수백 년간 온갖 풍상을 이겨냈을 거대한 측백 나무. 높이가 얼마나 까마득한지, 못해도 십오 장은 훨씬 넘어 보이는 아름드리 나무였다.

그 장장한 측백나무 주변의 이삼 장 이내엔 이렇다 할 나무가 보이지 않았다. 나무가 큰 만큼 널따랗게 그늘이 져서인지, 무릎 밑 높이의 잡초만이 무성해서 자연 스레 둥그스름한 공터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 공터의 뒤쪽엔 커다란 바위들이 병풍처럼 겹겹이 둘러져 있었다.

쏴아아아……..

머릿속을 씻어 내릴 듯 세찬 낙수(落) 소리가 바위벽을 울린다. 겹겹이 포개진 비좁은 바위 틈새를 돌아나가면 마침내 목적지인 것이다. 연비는 청량한 측백나 무 향기를 깊숙이 들이마시며 린을 돌아보았다.

“이 나무가 바로 백응이 둥지를 트는 곳이에요. 백응의 보금자리, 그러니까 새들의 왕이 머무는 왕좌지요.”

“왕좌…….”

린은 고개를 한껏 들어올리며 연비가 가리킨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백응의 둥지는 겹겹의 나뭇가지와 무수한 침엽의 안개에 감싸여 알 듯 말 듯 찾기가 어려웠다. 연비가 다시금 손가락을 들어 정확히 위치를 가리켜 준 후에야 린은 비로소 백응의 둥지를 찾을 수 있었다.

푸드드득!

다급한 날갯짓 소리가 들리며 하얀 깃털 몇 개가 그들의 눈앞에 하늘하늘 떨어져 내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깃털의 주인은 바로 백응이었다. 그토록 늠름한 하늘의 왕이 지금은 매우 마음이 급한 듯 측백나무 주위를 빙빙 돌며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다.

“하악!”

린이 갑자기 급히 숨을 들이키며 연비의 품에 와락 안겼다. 의아해하던 연비는 린의 시선을 따라 측백나무 옆을 바라보고는 나직한 소리로 경악했다.

“저, 저건!”

어느 결에 아름드리 나무 기둥 뒤에서 슬며시 몸을 드러낸 그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장정의 허리만큼이나 굵다랗고 기다란 몸뚱이, 뒤집힌 눈의 흰자위처럼 미끈 거리며 섬뜩하게 빛나는 허연 비늘, 요석처럼 빛나는 붉은 눈동자, 그것은 바로…….

“백교(白蛟)!”

억지로 소리를 낮춘 말이었다. 작은 어깨를 파르르 떠는 린을 감싸며 연비는 돌처럼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등 뒤로 부스럭거리며 수풀을 헤치는 소리가 들려왔 지만 연비는 굳이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발소리만 들어도 보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린이 놀라는 소리를 듣고 맘대로 거리를 좁혀온 것이리라. 연비는 차분하고 확실한 어조로 경고했다.

“백 년도 넘게 산 이무기가 되다 만 녀석이에요. 다행히 우리한텐 관심이 없는 것 같으니 큰 소리나 큰 움직임으로 자극하면 안 돼요.”

품에서 반사적으로 피리를 꺼내 들던 보초는 그 말에 재빨리 동작을 멈추었다. 날짐승에게 들린다는 피리 소리라면, 자칫 백교를 자극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는 피 리를 그대로 들고 상황을 주시했다.

“저도 말로만 들었지만, 저 녀석과 한 번 눈을 마주치면 한순간에 끝이라더군요. 이대로 서서히 물러나요, 린.”

연비는 백교에게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린의 손을 굳게 잡았다. 린도 이번에는 물러나는 데 이의가 없었지만,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다.

“백응도 못 피하나요?”

“아뇨, 날개가 있으니까요. 앗, 설마……!”

연비는 얼른 백응의 둥지로 홱 시선을 옮겼다.

백응은 칼날처럼 날개를 세우고 둥지 주변을 계속해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둥지 안에서 희끗희끗한 뭔가가 어른거리는 것을 보니, 아직 어린 새끼들이 있는 것 같았다.

“둥지에 어린 새들이!”

백응이 필사적으로 저지하는 데도 백교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둥지로 다가가고 있었다. 아마도 어미일 것으로 짐작되는 백응은 잔뜩 날을 세우고 둥지 앞을 막아섰다.

린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둥지 쪽을 뚫어져라 살펴보았다. 물러서던 발걸음이 주춤해지자 뒤쪽에서 지켜보던 보초는 한층 더 초조한 기색이 되었다. 

“역시, 백응이 늘어나면 곤란하니까 미리 없애려는 거예요.”

“곤란해요?”

“구렁이는 매를 싫어할 수밖에 없어요. 늘 땅에 붙어 있어야 하니까 날개 달린 짐승은 상대하기 까다롭잖아요?”

그동안은 눈에 거슬리더라도 별 충돌 없이 거리를 유지했는데, 이제는 더 이상 상면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백응 쪽이 큰일이에요. 한 마리가 나가 있으니, 혼자서 백교를 상대하며 새끼들을 지키기는 버거울 거예요.”

“그럼 우린 어떡하죠?”

연비는 린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보초를 슬쩍 돌아보았다. 한쪽은 뭔가 백응을 돕고 싶다는 순수한 얼굴, 또 한쪽은 제정신이면 빨리 물러나라는 절박한 얼굴이었 다. 심정적으로는 린에게 마음이 치우쳤지만, 연비는 결국 절박한 현실을 직시하기로 했다.

“위험하니까 일단 물러나야 해요. 백응은..

연비는 쓴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그들에게 별다른 방도는 없었다.

“응원하는 수밖에요.”

지금은 자연의 섭리에 맡겨야 할 때였다.

인간세계에는 독립하려는 자식의 날개를 꺾고는 ‘널 위해서야!’라고 족쇄를 채우는 부모들, 혹은 ‘그래, 넌 언제까지나 나의 아가란다’라며 장성한 자식을 언제까 지나 감싸 안는 부모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자연의 권속들은 스스로 날아야 할 때가 되면 부모 곁을 떠나 독립하는 것이 자연의 섭리. 날지 못하는 새는 언젠가 추락하게 마련이니, 귀여운 새끼라면 적절한 때에 둥지 밖으로 끌어내는 것이 때를 알고 순리를 따르는 것이다.

다만 이들도 어린 새끼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호하는 법. 자식을 지키려는 어미 백응의 본능은 강력했다.

백교의 이빨과 섬뜩한 혓바닥이 아찔하게 독기를 뿜어내며 날아들 때마다 백응은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으로 번개처럼 막아냈다. 민첩하고 정교한 움직임 덕에 위 험한 독기는 모조리 피해낼 수 있었지만, 문제는 강철 같은 백교의 비늘이었다.

단단한 비늘 때문에 백응은 예리한 발톱으로도 백교에게 별다른 타격을 입힐 수 없었다. 더구나 백교가 몸을 비틀며 촤악촤악 비늘을 일으킬 때 조금이라도 스치 면, 백응의 깃털에서는 곧바로 선홍색의 피가 배어 나왔다. 결국 백응은 몸통 공격을 포기하고 백교의 눈알을 집요하게 노리며 상승과 급하강을 반복하며 집요하게 공격을 계속했다.

매와 뱀의 대결은 처절했다.

눈처럼 새하얗던 백응의 날개는 어느덧 복사꽃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여기저기 깃털이 뽑힌 처참한 몰골이었다. 백교도 비늘 몇 군데가 떨어져 나가긴 했지만 백응보다는 훨씬 상태가 나았다.

삐이이이이—!!

높다란 휘파람처럼 날카로운 소리를 울리며 하늘에서 또 한 마리의 백응이 날아들었다. 외출했던 아비가 돌아온 것이었다.

수풀 속으로 물러나서 숨을 죽이고 있던 연비와 린은 손을 맞잡고 기뻐했다. 백교가 긴급히 몸을 돌리는 순간, 붉게 물든 어미 백응이 전광석화처럼 파고들어 백교 의 눈을 쪼았다. 린은 끔찍한 광경에 몸을 움칠하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쐐에에에에엑—!!

쇠를 긁듯 끔찍한 울림과 함께 백교가 고통스레 요동치는 소리가 들렸다.

“으윽!”

연비의 신음성에 눈을 뜬 린은 놀라고 말았다.

“어? 왜, 왜 백응이……!”

한쪽 눈이 뽑혀 텅 비어 있는 백교의 앞에, 어미 백응이 구겨진 천 조각처럼 내던져져 있었던 것이다.

“꼬리를… 피하지 못했어요.”

린은 무겁게 잠긴 목소리에 놀라 연비를 돌아보았다. 연비의 눈동자 깊숙이에서 뭔가가 조용히 이글거리고 있었다.

어미 백응은 간신히 백교의 오른쪽 눈을 뽑아내고 재빨리 둥지로 돌아가려고 했다. 짝이 돌아오고 형세가 역전됐으니, 백교가 몸부림치는 통에 몸을 빼내 자신은 둥지를 지키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급한 것은 마음뿐, 숱한 상처를 입은 어미 백응은 긴장이 풀려서인지 날갯짓이 영 신통치 못했다. 그때였다, 몸을 비틀던 백교 가 백응을 향해 꼬리를 휘두른 것은.

“아직은… 괜찮을 거예요.”

연비의 목소리는 덧없이 허공을 떠돌았다. 어미 백응은 걸레처럼 바닥을 뒹굴며 풀잎을 붉게 적시고 있었다. 이미 가망이 없다는 것쯤은 린도 한눈에 알 수 있었 다. 남은 백응이 하늘을 찢을 듯 비통한 울음소리와 함께 백교에 격돌해 갔다.

목구멍으로 뭔가가 치밀어 오른다. 연비는 으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악물며 그 뭔지 모를 것을 억지로 삼켰다. 현재 자신의 실력을 객관적으로 판단해 보면, 백 교는 완전 무리다. 린도 옆에 있으니 이럴 때는 당연히 숨죽이고 있어야겠지. 그걸 냉정히 알고 있으면서도 가슴이 뜨겁게 끓어오르는 건 왜일까.

“그때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건, 그런 건. ..!’

이제는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감춰두고 싶은 기억이 심연으로부터 스멀스멀 기어 나오고 있었다.

***

빠짝 마른 땅. 거친 흙덩이가 손끝에서 파스스 부스러진다. 손톱도 같이 부스러진다. 껍질이 벗겨져 피가 흐르는 손에 흙가루가 덕지덕지 달라붙는다. 어깨가, 몸 이 부서지는 것 같다. 하지만 그래도 멈추지 않고 파고 파고 또 팠다.

타인의 힘은 빌릴 수 없었다. 마을에 남겨진 것은 혼자뿐. 며칠이 지났는지는 기억도 할 수 없었다.

파고 묻고, 파고 묻고를 반복하는 일상. 그래도 도망칠 수는 없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작은 손으로 파고 묻고, 파고 묻고를 계속했다. 그것이 혼자 남겨 진 아이의 사명이라도 되는 듯이.

아버지의 몸에는 더 이상 온기가 돌아오지 않는다. 납득할 수 없지만, 그렇다. 그러니까 묻는 거다. 흙으로 두텁게 덮어놓아도, 그 안에서 다시 따뜻해지진 않겠지. 흙은 차다, 아버지의 몸처럼.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묻지 않으면 짐승들, 벌레들에게 뜯어 먹힌다. 그건 싫다. 그러니까 묻어야 한다.

장소는 정해져 있었다. 몸이 차가워지기도 전, 그 힘없는 눈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볼 때부터 이미 아버지를 묻을 곳을 생각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묘 바로 옆, 그곳 밖엔 없었다.

아버지의 얼굴로 떨어지는 흙덩이를 보면서 세상이 잠시 희뿌옇게 변했다. 하지만 단지 그뿐, 눈물은 흐르지 않았던 것 같다. 마을 사람들을 하나씩 흙으로 덮을 때마다 조금씩 몸 밖으로 흘러 나가서, 아버지에게 흘려줄 눈물은 미안하게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어쩌면 말라 버린 것은 눈물이 아니라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빴다. 어머니도, 친구들도, 그 친구들의 부모들도, 모두의 몸이 차례로 식어갈 때마다 무슨 짓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어른들이 그 위에 흙 을 덮는 일을 돕는 것뿐. 그리고 끝내는 흙을 덮어주던 어른들조차 흙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마침내 무덤은 완성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무덤을 만들 일도 없었다. 죽은 다음에는 무덤을 만들 수 없으니까. 이 몸은 짐승들이, 벌레들이 뜯어 먹게 되는 걸까. 그건 싫은데. 그렇게 멍하니 앉아 있자니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런 건 할 일, 할 일, 할 일을 찾아 배회하던 중에 문득 그것들이 보였다. 칼과 나무. 다행이었다. 아직은 할 일이 남은 것이다. 그러니까 아직은 좀 더 살아남아도 괜찮은 거다.

기억을 떠올리며 찬찬히 나무를 깎아나가기 시작했다. 이 일이 끝나면 더 이상 할 일은 남지 않는다. 그건 싫다. 혼자만 무덤에 들어가지 못하고 땅바닥에서 썩어 가는 것보다도 백배천배는 더 싫다. 이 일을 끝내 버리면 안 된다.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었다.

그러다 결국 조각이 끝났다. 필사적으로 만들어낸 결과물은 만족스러웠다, 그동안 만들었던 그 어떤 것과도 견줄 수 없을 정도로.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이 무덤을 네가 만들었냐?”

사람. 그것도 말을 하는 사람이었다. 가만, 이럴 때는 어떻게 대답해야 하더라.

“그렇다.”

약간 이상한 답이었던 것 같지만, 뭐 상관없겠지. 그보다도 그, 그 노인은 여전히 살아서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이 나무 조각도 네가 한 것이냐?”

“그렇소.”

조금 변화를 시켜보았지만 여전히 뭔가 어색한 답이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그의 말에 더 이상 그런 일에 신경 쓸 여유는 없어졌다.

“나와 같이 가지 않겠느냐?”

느닷없이 노인은 손을 불쑥 내밀어왔다. 그 커다란 손을 망연자실 바라보다가 문득 의심이 들었다. 이래도 되는 것일까, 이대로 이 손을 잡아버려도 되는 것일까 하는.

“당신을 따라가면 뭐가 생기지요?”

그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

“강해지게 도와주지, 천하제일의 무공으로.”

믿을 수 없었다. 그 말을 어떻게 믿느냐고 반문하자, 그는 가볍게 손을 휘둘러 소나무 십여 그루를 단번에 날려 보냈다.

“어때, 배우고 싶지?”

노인의 눈동자가 얼굴 가까이로 다가왔다. 마음을 꿰뚫어 보듯 깊고 잔잔한 시선이었다.

“적어도 할 일은 생길 게다.”

“……”

읽혀 버리고 말았다.

할 일이 있다. 강해질 수 있다.

무심결에 뒤를 돌아보았다. 차가운 흙 속에 누운 자들은 누구도 어떤 말도 해주지 않았다.

“알았어요!”

어쩔 수 없는 답이었다. 할 일이 필요했다. 강해지고 싶었다.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됐다.

***

푸드득, 푸드득!

남은 백응이 거칠게 날개를 떨치며 백교를 향해 날아들었다. 둥지에서는 새끼들이 숨을 죽이고 떨고 있었다. 제 짝의 죽음에 분노했기 때문일까. 백응의 공격은 무 모하기 짝이 없었다.

‘내 앞에서, 내 앞에서……!”

또다시 혼자가 되는 녀석이 만들어지리라.

연비는 타오르는 눈빛으로 백교를 노려보았다. 걱정스레 자신을 바라보는 린도, 뒤에서 초조해하는 보초의 존재도 그의 머릿속에서 점점 흐릿해져 가고 있었다.

백교의 꼬리가 다시 한 번 무시무시한 파공성을 내며 날아갔다. 백응은 간신히 꼬리를 피해냈지만, 꼬리가 일으킨 돌풍에 약간이나마 균형을 잃고 말았다. 확연히 드러난 허점, 백교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독니를 번뜩였다.

“멈춰!”

몸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뭔가가 바람을 가르며 백교를 향해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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