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잎과 함께 사라지다
-미폭국(美國)의 임금님
마천각 본부에서도 최중심부에 자리한 마천루(魔天樓).
총 높이 십육 간(間), 무려 구십육 척(尺)에 달하는 화려하고 위풍당당한 팔층 누각. 그 최상층에 오랜만에 네 개의 자리가 마련되었다. 십여 명이 둘러앉아 잔치를 벌여도 넉넉할 만큼 커다란 원형 탁자 둘레에, 옥좌처럼 묵직하고 화려한 의자가 동서남북으로 놓여 있었다.
날이 저물고 묵빛으로 물든 하늘에 금빛의 실처럼 가느다란 초승달이 걸렸다. 네 개의 자리는 어느새 조용히 만석이 되었으나, 탁자 위는 여전히 술잔도 산해진미 도 없이 휑뎅그렁하기만 했다. 처음으로 입을 연 것은 서쪽 의자에 앉아서 무표정한 얼굴로 칼을 닦던 장신의 거한이었다.
“그래, 저쪽의 대장은 정해졌나?”
“결정되긴 한 모양인데 임시라고 하더군.”
남쪽에 앉아 있던 남자가 주판을 튕기며 대답했다.
“임시(臨時)?”
서쪽의 남자가 반문했다.
“그래, 임시. 잠시 동안만 대장을 맡았다는 의미일세. 이 경우는 임시변통(臨時變通)에 더 가깝겠지만.”
“누가 그런 걸 몰라서 묻나? 왜 임시로 뽑았는지를 묻는 거다.”
남쪽의 남자는 여전히 주판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말했지 않나? 임시변통, 갑작스레 터진 일은 대강대강 둘러맞춰 처리한다는 뜻일세. 하루 만에 뽑자니 시간이 부족해서 임시 대장을 뽑은 거겠지.”
“따분한 이야기군.”
동쪽의 남자가 손을 턱에 괸 채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재밌는 일 없나? 아아, 따분해! 따분해! 따분해!”
그는 참을 수 없는 따분함을 연신 성토했으나, 다른 이들은 모두 그의 울부짖음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서쪽의 남자가 다시 물었다.
“그래서 그 임시 대장은 누군가?”
“그게 결과가 좀 의외야. 창천룡 용천명이나 철옥잠 마하령이 아니더군.”
남쪽의 남자는 왼손으로 주판 놀리기를 계속하면서 오른손으로 장부에 숫자를 기입했다. 서쪽의 남자가 놀랍다는 투로 물었다.
“예측이 빗나갔단 말인가?”
“그런 셈. 뇌전검룡 남궁상, 남궁세가의 셋째 도련님이라더군.”
“최근 들어본 이름이다. 아미일봉 진령의 정인이라는 자. 맞나?”
시위하듯 하품을 계속하던 동쪽의 남자가 잠시 눈을 빛냈다. 여자, 그것도 미녀의 이름이 거론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머지 세 사람은 잘 알고 있었다.
“과연 그 정도 인물이 우리를 상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서쪽의 남자가 투덜거렸다. 어지간히 쌓인 게 많은 듯한 말투였다.
“임시라곤 해도 대장이 새로 생겼으니까 우리 사천왕도 축하 인사를 해야겠군. 안 그래?”
동쪽의 남자가 북쪽의 남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렇군.”
지금껏 한 번도 입을 열지 않고 있던 북쪽의 남자가 짧게 대답했다. 어찌 되든 그다지 상관없다는 말투였다.
“그래그래, 조촐한 환영회라도 열어주는 게 어떨까? 어때? 어때?”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동쪽의 남자가 의견을 제시했다, 멋진 제안에 박수갈채가 돌아오길 바라며.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은 눈썹 하나도 까딱하지 않았다. 동쪽의 남자가 이놈의 탁자를 뒤엎을까 말까 고민하는 순간, 구원의 손길이 의외로 서쪽에서 뻗어왔다.
“좋다. 신고식은 치르게 해야지. 난 찬성이다.”
“나도 찬성이네, 예산(豫算) 범위 안이라면.”
남쪽의 남자도 주판을 고르며 동의했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예산 책정에 들어갈 태세였다.
마지막까지 잠잠하던 북쪽의 남자가 무언의 압박에 입을 열었다.
“그러지, 그럼.”
“아아아, 이제야 결정이군! 크게 선심 써서 통고 역은 내가 맡지. 겸사겸사 인사도 나누고 말이야. 역시, 가는 김에 정식으로 소개도 해야겠지?”
의욕이 넘치는 수준을 넘어서 신이 난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인사는 무슨 꿍꿍이는 다른 데 있는 것 아닌가?”
서쪽의 남자가 딱딱거렸다.
“앗! 자네의 발언은 대체 무슨 뜻이지? 남들이 들으면 이 순수한 마음을 오해하겠어! 설혹 이 몸이 쿠쿠쿳, 사절단에 미인이 많이 섞여 있더만요, 형님’이라는 말 을 정보관에게 듣고 눈을 빛낸 적은 있다 하되, 그게 어찌 내 일개인의 사사로운 마음 때문이겠나?! 나는 단지 한 사람의 사내대장부로서 지고한 대업 ‘미국(美爆 國)’을 완성하고자 애쓸 뿐! 억울한 말은 어서 거두어주게!”
그는 사무치는 억울함에 어깨를 파르르 떨며 두 눈을 부릅떴다.
“억울한 말이라니? 그 미국인지 자폭국인지가 바로 불순하고 사사로운 마음의 결정체라는 거다.”
서쪽의 남자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칼날을 손끝으로 튕겼다. 남쪽의 남자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뭐, 진심이라는 면에선 순수하다고도 볼 수 있지. 게다가 본격적으로 가다듬어 착수하면 대업은 몰라도 대사업은 가능한 구상이군. 뜻이 있으면 언제든 내게 말 해주게나. 이윤 배분은 삼 대 칠. 물론 내가 칠일세.”
“사업이라니! 자네의 그 세속적인 발언은 나의 이 지고한 사명과 대업에 막대한 상처가 되었네! 아, 아름다움을 모르는 자들은 이 얼마나 흉흉하단 말인가!” 두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움켜잡으며 동쪽의 남자가 절규했다.
“심각한 상태다.”
서쪽의 남자는 길 가던 사람이 광견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동쪽의 남자를 곁눈질했다.
“어쨌든 가서 소란 피우진 말게.”
묵묵히 사태를 지켜보던 북쪽 남자의 말이었다.
“당연한 말씀! 이 내가 누군가? 사랑할 자(慈)에 임금님 군(君)! 자군(慈) 아닌가, 자군! 이 사랑나라의 임금님은 아름다움에 반(反)하는 짓은 절대로 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말게!”
역시 뭔가 하긴 할 모양이었다.
“뭐든 적당히 하게.”
그렇게 당부를 하긴 했지만, 여기는 그 누구도 자군이 ‘적당히’라는 훌륭한 개념을 이해할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하하하, 그럼 난 이만!”
느닷없이 불어 닥친 꽃바람과 함께 그의 신형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스윽!
남쪽의 남자가 장부 위에 떨어진 꽃잎 한 장을 손가락으로 집어 올렸다. 생화, 그것도 상당한 고품질의 싱싱한 붉은 장미였다.
“쓸데없이 화려하지만 않으면 좋으련만. 요즘 꽃 값도 한창 올라가고 있는데.”
***
마천각에 도착하고 한동안 감감무소식이 되었던 은설란이 오랜만에 식당에 얼굴을 내비쳤다. 요귀한테 홀려서 기력을 온통 빨린 것처럼 핼쑥한 얼굴이었다. 식사를 막 마친 후 연비, 이진설과 함께 찻잔을 기울이던 나예린은 급히 일어나 비틀거리는 은설란을 부축했다.
“괜찮아요?”
도리도리!
은설란은 답하기도 힘겨운지 그저 고개를 두 번 내저어 보였다. 별말이 없어도, 까칠해진 피부에 푸석해진 머릿결은 그녀가 그간 얼마나 괜찮지 못했는지를 여실 히 보여주고 있었다. 자리를 권하자 은설란은 무너지듯 앉았다.
“차를 더 내올까요?”
힘겹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은설란은 꺼져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밥, 밥부터…..”
그리하여 빈사의 은설란을 구출하기 위한 식사 주문이 긴급 전개되었다.
“조심해요.”
세 번째 밥그릇을 묵묵히 비워낸 은설란이 뜬금없이 말을 꺼냈다. 파리해진 얼굴에 제법 혈색이 돌아온 상태였다. 본인 말로는 밀린 보고서 작성을 위해 끼니도 띄
엄띄엄 삼 일을 꼬박 철야한 결과라지만, 누가 보면 꼭 며칠 감금됐다 막 탈출한 사람의 몰골이었다.
“조심하라니, 갑자기 무슨 얘기예요, 설란 언니?”
이진설이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그들 네 명이 오랜만에 회합을 가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거의 일 년 만에 회합까지 열 정도라면 각오해 두는 게 좋아요.”
나름대로 진지한 목소리였지만,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게다가 저렇게 숟가락을 힘껏 움켜쥐고 빈 그릇을 노려보며 심각한 얘기를 해봤자, 생기려던 긴 장감도 푹 꺼질 지경이었다.
“그 네 명이란 게 대체 누군데요?”
이진설의 반문에 은설란은 비로소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다.
“사, 사천왕! 바로 마천각의 사천왕이라 불리는 자들이에요.”
“사천왕?”
“네. 동서남북 네 개의 섬을 각자 담당하는 고수들이에요. 모두 학생 신분으로 대장에 오른 예외적인 존재들이죠.”
“그들을 조심해야 하는 이유는 뭔데요? 우리가 뭐 잘못한 것도 없잖아요?”
“아니, 그게…….”
순진한 반문에 은설란은 찰나 말문이 막힐 뻔했다.
“이 시기에 모인다는 건, 사절단이 왔으니 뭔가 행동을 하겠다는 취지예요. 조만간에 분명 모종의 행동을 걸어올 거라는 거죠.”
“무력행사…….”
나예린이 생각에 잠겨서 중얼거렸다.
“요컨대 기선 제압이군요.”
조용히 차를 마시던 연비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은설란과는 배에 있을 때 이미 통성명을 나눈 사이였다.
“연 소저 말이 맞아요. 그들에게 사절단은 방해꾼이나 다름없으니까요. 그리고 천무학관에서 온 우수한 인재들을 잔뜩 골탕 먹일 수 있다면, 즐겁게 승리의 축배 를 들 수 있지 않겠어요? 제가 보기에도 그들의 힘을 시험하기에 그대들만큼 적절하고 적당한 존재들은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마지막 부분은 영 껄끄러운 표현이 아닐 수 없었다. 나예린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감상을 피력했다.
“무시당하는 기분도 좋지는 않군요.”
“별수없죠. 강아지도 자기 집 앞마당에선 호랑이 노릇을 한다잖아요?”
연비의 비유에 은설란은 그만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푸훗, 그렇게 들으니 할 말이 없네요. 하지만 주의하는 게 좋아요. 사람들이 좀 이상하긴 해도 그들의 실력은 진짜니까요.”
그것만은 진심이었다.
“고마워요, 이렇게 일부러 귀띔까지 해주고. 사실 우린 소속도 다른데…….”
비록 적대 관계는 아니라지만, 은설란과 그들은 엄밀히 말하자면 경쟁 관계에 있는 셈이었다. 그런데도 이렇게까지 배려를 해주니 고맙지 않을 리 없었다. “뭘요. 우린 친구잖아요. 게다가 전에 도움도 받았었고.”
은설란이 웃었다.
“아참, 그러고 보니 나 소저는 특별히 더 주의하세요.”
진중한 눈빛으로 은설란이 말했다.
“사천왕과 관련된 일인가요?”
은설란이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들 중에 꽤 특이한 인간 하나가 섞여 있거든요. 음. 네 명 모두 특이하긴 하지만, 그는 특히 여자에 관해서 특이하죠.”
그 말에 모두들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확인을 시도한 것은 이진설이었다.
“혹시 여자를 밝히는 인간이에요?”
백도에도 그런 인간들은 잔뜩 있었다. 하물며 여기는 흑도. 위선의 가면조차 필요없는 곳이었다.
“그건 아마… 아닐 거예요. 조금 달라요.”
“아마?”
괴이한 표현이었다.
“잘 설명할 수가 없군요. 어쨌든 그냥 조심하세요. 무조건 조심하세요. 이건 친구로서의 충고예요. 알겠죠?”
친구라는 그 말이 무척 따뜻하게 들렸다.
“알았어요, 조심할게요. 걱정 말아요.”
“누, 누가 걱정한다고 그래요?”
“은 소저, 고마워요.”
옆에서 예린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켜보는 연비의 입가에도 가느다란 미소가 맺혔다.
텅 비어 있던 그녀의 주변에 이제 좋은 친구들이 채워져 가고 있었다.
은설란의 경고가 실현되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한 시진도 채 지나지 않은 오후, 제십삼 기숙사 앞에서였다.
오후 일과를 위해 기숙사 앞으로 속속 모여들던 천무학관 사절단원들은, 갑자기 어디선가 들려온 알 수 없는 음악 소리에 하나같이 움직임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 다.
“이게 무슨 소리지?”
“일단 음악 소린데?”
“앗, 저길 보게!”
화려막측한 음색과 함께 어디선가 나타난 흰옷을 입은 여자들이 좌우로 도열했다. 십여 명에 달하는 그녀들은 모두 흰색 바탕에 붉은 선이 들어간 똑같은 옷을 맞 춰 입고 있었다. 게다가 모두들 손에 꽃바구니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붉은 꽃잎을 흩뿌리며 여자들이 일제히 노래를 시작했다.
“아아~ 작렬하라~ 미의 꼬옻~잎이여어~!!”
왠지 듣는 이들을 주화입마로 빠뜨리는 합창 소리가 절정에 달하자, 붉은 꽃잎이 작렬하듯 공중으로 치솟았다. 몰아치는 꽃잎의 폭풍에 몇몇은 눈을 가릴 정도였 다.
화려하게 흩날리는 꽃잎들 사이로 한 남자가 온몸에 꽃잎을 휘감고 등장하는 것이 보였다.
빰빠라라밤― 빰빰빠, 빰빠라밤!
출처를 알 수 없는 요란한 음악이 들려왔다. 사뿐히 꽃잎을 즈려밟고 나타난 남자의 등장을 알리려는 의도적인 연출이 분명했다.
‘오, 오늘 오후 일과가 혹시 집단 주화입마 체험이었나?”
목구멍으로 울컥 피를 토할 것 같은 괴로운 감각을 애써 억누르며, 남궁상은 화급히 품 안에서 일정표를 뒤적거렸다. 그가 손을 부들부들 떨며 일정표에 집중하고 자 안간힘을 쓰는 동안 나머지 일행들은 천무학관에서는 결코 볼 수 없던 그 괴현상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음악이 멈추자 곧 거짓말처럼 꽃의 폭풍도 수그러들었다. 돌풍이 사라진 중심에 예의 그 남자가 서 있었다. 옷감 전체를 장미 꽃잎처럼 붉게 수놓은 터무니없이 화 려한 옷을 걸친 남자였다.
그를 바라보는 합창단 여자들의 눈이 이상할 정도로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영민하게 반짝인다기보다는 아득하고 몽롱한 시선이었다.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는 가운데, 남자는 우수에 잠긴 표정으로 한동안 석상처럼 서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에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이런이런! 아무리 기다려도 나의 이름을 물어주는 이가 아무도 없으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슬피 울부짖던 사내는 씁쓸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후우, 그렇군!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게 연출된 이 아름다운 등장에, 미(美)의 문외한들이 할 말을 잃는 것은 이해 못할 바도 아니지. 하지만 아아, 아름다움의 재 현, 그것은 곧 잔혹한 사명일지니!”
그는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고뇌에 휩싸였다. 말인즉슨 아무래도 본인이 직접 그런 괴기스런 등장을 연출한 것 같았다.
고뇌에 휩싸인 자는 천무학관 측에도 또 한 명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효룡이었다. 그는 좀 전부터 골치가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움켜잡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자네는 왜 그래? 그나저나 저 녀석, 미쳤나?”
장홍이 효룡을 보며 수군거렸다. 고뇌하던 효룡은 화들짝 놀라며 경고했다.
“앗, 그런 말을 함부로 하…….”
휘익!
효룡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두 자루의 비수가 장홍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헉!”
효룡은 다급하게 검을 들어올려서 살기를 머금은 두 자루의 비수를 막아냈다. 그의 검 자루에 박힌 비수가 부르르 떨렸다.
“이분을 모욕하는 자는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저희 미폭수호단(美爆守護團)의 이름을 걸고!”
좌우로 도열해 있는 여인들의 선두에서 두 여인이 동시에 외쳤다.
“이분이 누군지 궁금하시다고요?”
그것이 범인들이 가져야 할 마땅한 덕목이라는 시선으로 우측의 여인이 말했다. 눈빛이 아련한 것이 상당히 위험했다.
“그렇다면 알려 드리지요.”
사실 아무도 알고 싶어하지 않았다.
“이분이야말로 용모 준수, 재기 발랄, 무공 출중하면서도 막대한 사명을 어깨에 짊어지셨기에 우수에 찬 고독을 품고 있는 슬픈 분, 바로 사천왕의 한 명이자 동쪽 섬의 우두머리이신 자군 공자님이십니다!”
“끼아아아아악!”
도열한 여인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단말마와는 약간 성질이 다른 비명이었다. 저런 식으로도 좋아하는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니, 놀라울 뿐이었다. “정말이지 여러모로 어이가 없군.”
툴툴거리긴 했지만 사실 장홍도 감탄하는 마음이 없지는 않았다. 저런 정신 나간 짓을 아무나 할 수 없다는 점에선 확실히 범상치 않은 자였다. 탕!
다시 한 번 비수가 날아들었다. 여전히 날카로운 솜씨였으나 이번에는 장홍이 가볍게 처리했다.
“이미 경고했습니다.”
비수를 던졌던 것은 선두 좌측의 여자였다. 말은 짧았지만 의도는 명확했다.
“이거야 원, 살벌해서.”
역시 여인들의 원한을 사는 것은 현명한 처사가 못 되는 듯했다. 장홍은 한층 더 소리를 낮춰 효룡과 수군거렸다.
“저자는… 혹시 최면술법의 달인인가?”
저 사이비 교주 같은 녀석의 정체가 대체 뭐냐는 말을, 혹여 들릴까 봐 완곡히 순화한 표현이었다. 겨우 불평 한마디 좀 했다고 두 번씩이나 비수가 날아오다니. 기 분이 좋을 리는 만무했지만 또다시 비수를 받고 싶진 않았다.
“특기가 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꽤 화려한 무기를 쓸 것 같기는 하지만, 설마 꽃을 무기로 쓰지는 않을 테고…… 어쩌면 환술사일지도 모르겠군요.” 효룡 역시 그의 진짜 실력은 본 적이 없었다. 장홍은 전음까지 써가며 의문을 표했다.
“환술사라기보단 사이비 교주 같은데?”
효룡도 전음으로 장홍에게 답했다.
“상대를 현혹시킨다는 건 같죠. 차이가 있다면 환술사는 개인을 상대로 하는 반면 사이비 교주는 다수의 대중이 사냥감이라는 것이겠군요.”
빰빠라라밤!
흐름이 끊겼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한 번 풍악이 울렸다. 그리고 또다시 꽃잎이 화려하게 날렸다.
“저거 또 왜 저러나?”
“아무래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는 것 아닐까요?”
“뭣이?!”
효룡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그나마 합창이 생략된 것이 다행이었다. 붉은 꽃보라와 함께 다시금 자세를 가다듬은 자군은, 고개를 반쯤 떨구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말했다.
“먼 여정을 지나 이곳 동정호의 외딴 섬을 방문한 아름다운 꽃들을 나 자군은 진심으로 환영하는 바입니다. 아름다움이란 덧없지만 고귀한 것. 그 고귀한 빛으로 이 황량한 섬을 밝혀줄 그대들을 내 어찌 그냥 가만히 묵과할 수 있겠소? 이에 나 미폭공자 자군은 그대들 백도의 꽃을 진심으로, 진심으로 열렬히 환영하겠소!” 과장된 동작으로 그가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그리고는 번개처럼 주위를 훑었다. 여성의 얼굴을 검색하고 분석 판단하는 데 있어 그의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 다. 그는 단박에 백도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정평이 나 있는 차가운 얼음의 꽃을 발견했다.
그가 미끄러지듯 주욱 나예린 앞으로 다가가더니 사뿐히 무릎을 꿇었다.
“아아, 차가운 한 떨기 얼음 꽃이여! 이제 걱정하지 마시오. 나 자군이 언제까지나 그대를 지키리라! 미(美)의 왕국은 영원할지니! 미폭만세(美爆萬歲)!” 갑작스런 자군의 행동에 나예린은 깜짝 놀랐다.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이 사람 왜 이러죠?”
의아해하면서 연비가 물었다.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군요.”
나예린이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이 비처럼 내리는 꽃잎들이 모두 생화라는 것뿐이었다.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리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자군이 나예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말했다.
“나의 연인이 되어주시오! 미폭국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소이다!”
“뭣시라라라라라라!’
주위에서 지켜보고 있던 천무학관의 사내들이 동시에 속으로 괴성을 내질렀다. 미폭국인지 미역국인지는 도대체 뭔지 모르겠지만, 그 앞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아, 대답하지 않아도 좋소! 물론 거절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이미 다 알고 있으니 말이오. 이처럼 운명적인 인연을 그 누가 거부할 수 있으리오!”
이미 그의 정신은 다른 세계에서 노닐고 있었다.
“자, 갑시다!”
와락!
달려온 자군이 나예린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아니, 잡으려 했다.
“엉?”
의아해진 두 눈이 크게 떠졌다. 그가 잡고 있는 손은 싸늘하게 굳어 있는 연비의 손이었다.
“사양하겠어요.”
연비는 살짝 한 번 미소 짓더니 인정사정없이 자군의 뺨을 후려갈겼다.
짝!
경쾌한 소리가 푸른 하늘 위로 울려 퍼졌다. 연비는 차가운 눈으로 말을 이었다.
“그것은 무례함에 대한 답례입니다.”
냉정한 어조였다.
“끼아아아악! 자군 공자니이임!!”
자칭 미폭수호단 쪽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자군의 얼굴이 찌그러지는 것을 보고 정신적인 외상을 입은 모양이었다.
“이, 이럴 수가!”
자군은 발갛게 부어오른 뺨을 부여잡고 뒷걸음질을 치면서 넋이 나간 눈으로 중얼거렸다.
“아빠한테도 맞은 적이 없는데…….”
충격의 도가니에서 허우적거리던 자군은 갑자기 두 눈을 빛내며 연비의 두 손을 덥석 잡았다.
“나와 부디 결혼해 주시오!”
“엥?”
“헉!”
“꺄아아악! 안 돼요!”
사절단 일행과 마천각 여인들 사이에서 여기저기 뜨거운 반응들이 쏟아져 나왔다. 장홍이나 남궁상처럼 입을 쩍 벌리는 것은 그나마 태연한 반응에 속했다. 돌기 둥처럼 굳어버린 나예린의 옆에서, 이진설은 복잡다단한 얼굴로 경악했다.
“이런, 연 소저가 예린 언니를 이겨 버렸어! 언니가 겨우 연인인데 연 소저한테는 청혼이라니! 아, 아니, 이런 건 언니가 아니어서 다행인 건가……? 하지만, 하지 만!’
불필요한 안면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이진설만이 아니었다. 연비 일행에게서 다소 떨어진 뒤쪽에서는 그보다도 극심한 안면 경련으로 떨고 있는 자가 있었으 니, 그는 다름 아닌 공손절휘였다. 공손절휘 정도는 아니지만 그와 뜻을 함께하며 주먹을 부르르 떠는 남자관도들의 숫자도 결코 한둘이 아니었다.
지고의 미(美)를 자랑하는 빙백봉 나예린은 원래부터 만인이 마음에 품고 있는 만인의 여신이었다. 또한 천하의 악적 비류연의 존재도 빼놓을 수 없었기에, 이런 일에는 어느 정도 면역력이 형성되어 있었다. 마천각 녀석들이 빙백봉에게 접근해 올 것임은 누구든 예상할 수 있었으니, 그나마 괴성 정도로 마음을 정리할 수 있 었다.
그러나 연비는 얘기가 달랐다. 천무학관의 신입생으로 뽑히자마자 사절단에 섞여왔기에 아직은 사절단 이외의 천무학관 관도들에겐 알려지지도 않은 풋풋하고 고아한 절세의 미녀! 한술 더 떠 빙백봉 나예린과 비슷한 반열의 미모와 품격, 화룡점정으로 연인도 없는 것 같지 않은가!
사절단의 일부 남자 관도들은 그 풋풋한 절세미녀와 일 년 동안을 함께 지내게 된 운명적인 특혜를 내심 흐뭇해하고 있었다. 일명 좌절공자 공손절휘에 대한 절묘 한 대처, 또한 나예린과 늘 함께 다녀서 아름다움을 배가시키는 연비의 요소요소는 날이 갈수록 이 남자 관도들의 마음을 포로로 사로잡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금 단의 보루에 괴상한 놈이 침입해 왔으니, 이들이 충격 속에서 주먹을 떠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나 뛰는 자가 있으면 나는 자도 있는 법. 자칭 미폭수호단의 여자들 중에는 충격을 이기지 못해 기절하는 아가씨들이 속출했다. 다들 자군의 광적인 추종자들이 었다.
그중 선두에 서 있던 여인은 옷고름을 잘근 깨물었다. 두 눈에서 증오의 불길이 솟아올랐다. 질투의 업화였다.
“농담은 때와 장소를 가려서 해주세요.”
삽시간에 태풍이 지나간 것처럼 초토화되어 버린 분위기 속에서도 연비의 반응은 매우 정상적이었다. 충격적인 사태에 대한 연비의 대응은 실로 초연하기까지 하 다고 칭찬받을 만했다.
“아니오, 진심이오. 당신에겐 이 진실로 빛나는 두 눈이 보이지 않는단 말이오?”
“안 보이는데요.”
연비의 말은 여전히 냉정했다.
“크윽! 자세히 보시오, 자세히.”
“부디 저쪽으로 치워주세요. 부담스러우니까. 게다가…….”
“게다가?”
“언제까지 잡고 있을 생각인가요? 무례하게!”
연비가 손목을 살짝 꺾자 자군의 몸이 한 바퀴 빙글 돌았다. 깔끔한 금나수법이었다. 그러나 그도 명색이 사천왕이라 불리는 자였다. 자군은 빙그르르 몸을 뒤집더 니 한쪽 무릎을 사뿐히 굽히며 그럴듯하게 착지했다. 아직도 손을 붙잡고 있는 채였다.
‘호오??
그래도 역시 어중이떠중이는 아닌 모양이었다.
“난 진심이오. 잘 생각해 보시오, 연 소저!”
그리고는 연비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크윽!’
순간 연비의 온몸에서 바늘이 돋아나는 것 같았다. 까딱하면 한 마리의 닭이 되어버릴 것 같은 끔찍한 감각에, 연비는 무심결에 반사적으로 손을 털고 말았다. 퍽!
일장을 얻어맞은 자군이 주르륵 뒤로 밀려났다. 어중간한 상대였으면 그대로 즉사할 만한 위력이었다.
“하하하! 부끄러워하… 우웩!”
허세는 그리 길지 않았다.
“끼아아아악! 자군님!”
“피가… 피가……!”
입가에 핏자국을 남긴 채 자군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괜찮다오. 나의 아름다운 선녀들이여…… 쿨럭쿨럭!”
전혀 괜찮지 않았다.
““빨리 치료를!”
선두에 서 있던 여인이 재빨리 자군을 부축하며 말했다.
“그, 그럼 다음에 다시 봅시다, 나의 신부여.”
다시 한 번 쿨럭거리며 그는 또다시 붉은 꽃잎에 감싸여 화려하게 사라졌다.
“저런 상황에서도 꽃잎은 잊지 않네요.”
붉은 꽃잎이 소복이 쌓인 바닥을 바라보며 연비는 어이없어했다. 어떤 의미에선 정말 대단했다.
“그러게요. 정말 특이한 사람이군요.”
평정을 되찾은 나예린이 전적으로 동의하다가 문득 물었다.
“그런데 저 사람은 왜 왔을까요?”
처음엔 분명 용무가 있었는데 나중엔 까먹은 듯한 인상이었다.
“글쎄요? 별로 궁금하진 않네요.”
연비가 웃으며 대답했다. 세상은 넓고 이상한 놈은 많다. 매번 이상한 놈들을 만날 때마다 고민하면 끝이 없으리라. 그냥 맘 편하게 신경 끄기로 했다. 아니, 그러고 싶었다.
그런데..
뿌드득!
‘두고 보자!’
안 그래도 뜨거운 시선들이 무수히 자신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연비는 한 여인이 나무 뒤에 숨어 자신을 향해 맹렬한 질투의 불꽃을 태우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이 장차 끄고 싶었던 신경에 자꾸 불이 들어오게 할 것이라는 것도.
그녀는 바로 장강수로채 채주 흑룡번신 해응신의 딸, 해어화였다. 장홍에게 비도를 두 번씩이나 던진 바로 그 장본인이기도 했다.
“진짜 왜 온 거지?”
홀연히 나타났다 홀연히 사라진 현장을 보며 남궁상이 한숨을 쉬었다. 어지럽게 흩날렸던 꽃잎들은 지금 여러 사람의 발에 짓이겨지면서 점점 볼썽사나운 모습이 되어가고 있었다.
“청소나 해놓고 갔으면 좋으련만!”
이래서야 쓰레기 투척이랑 다를 바가 없었다.
“아무래도 그것 때문인 것 같은데요?”
“음?”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윤준호가 호기심에 찬 얼굴로 다가와 있는 게 보였다. 그의 시선을 따라 자신의 뒤쪽을 돌아보니 어느새 자신의 발 뒤에 두루마리 한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어느새…….”
남궁상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설마 자신의 이목을 속이고 이것을 놓고 갔단 말인가? 아무리 정신이 없었다고는 하지만 무인의 생명인 뒷자리를 점하고 가다니. 있 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미 벌어진 일이기도 했다. 필시 임시 대장으로 뽑힌 그에게, 실력을 자랑하는 동시에 간담을 서늘하게 해주겠다는 의도가 분명했다.
“적도 꽤 하는군요. 그렇죠, 남궁 공자?”
아직도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남궁상에게, 어느 결에 다가온 연비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그 화사한 웃음을 마주하는 순간, 어째서인지 남궁상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뭐, 뭐지? 이 서늘함은?”
설명할 수 없는 본능적인 불길함이 뜨겁던 심장 위를 스멀스멀 차갑게 기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