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2권 14화 – 협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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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22권 14화 – 협상하다

협상하다

-돈왕의 집무실

그자는 검투가 가장 잘 보이는 곳, 생사를 가름하는 순간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서 언제나 이 원통투기장을 굽어보고 있었다. 그의 집무실 겸 관람석까지 올라오기 위해선 적어도 몇 달 전에 그와 미리 선약을 잡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수십 개의 도검창부의 열렬한 환영을 감내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오늘 예약도 없는 시각에 그의 집무실 문이 열리며 두 명의 방문객이 찾아왔다. 놀 랍게도 그 두 사람은 젊은 여자였다. 한 명은 밤처럼 새카만 검은 옷에 검은 우산을 들고 있는 미인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면사를 두른 초립을 쓰고 있었기에 얼굴 은 알 수 없었지만, 마치 조각처럼 아름답고 우아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으며 걸음걸이 하나하나에 기품이 넘쳤다.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으셨소?”

항상 공대보다 하대가 많은 돈왕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아무리 상대가 어린 여자들이라 해도 공대였다.

“어멋, 물론 걸어 올라왔죠.”

검은 옷의 여인, 연비가 미소까지 띤 채 발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담담한 말에 산전수전 다 겪은 돈왕도 오싹함을 느꼈다.

“오십 명이나 되는 무사들은 어떻게 하고?”

“지금쯤 밖에서 모두들 자고 있을 거예요.”

오십 명이나 되는 무사들을 모두 기절시켰다는 말에 돈왕은 잠시 침음성을 삼켰다.

“이거 안 되겠구려. 근무 시간에 잠이나 처자다니. 월급을 깎든지 해고를 하든지 해야겠소이다.” 짐짓 태연한 척 돈왕이 대꾸했다.

“좋은 판단이에요. 하지만 그 수가 지금의 두 배였다 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 같군요.”

실력을 충분히 보여줬다는 이야기였다.

“그것참 믿기 어려운 말씀을…….”

“증명해 보일까요?”

연비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돈왕은 그 미소가 무척 불길하게 느껴졌다.

“아니, 사양하겠소.”

“그럼 호위무사들도 다 자는 것 같고, 이제 회담을 가져 볼까요?”

“안 되오.”

“왜 안 되죠?”

“그거야…….”

그 순간 연비와 나예린을 등진 벽의 모서리 그림자로부터 두 개의 인영이 비호처럼 뛰쳐나오며 도광을 내뿜었다.

“아직 호법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오.”

돈왕이 담담하게 말했다. 모서리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두 사람은 계단을 지키는 자들과는 격이 다른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래서요?”

연비는 알고 있었다는 듯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검은 우산을 번뜩이는 도광 속으로 찔러 넣었다. 그러자 살기를 내뿜던 도기의 폭풍이 일순간에 잠잠해졌다. 퍽!

다음 순간 오른쪽 모서리에서 달려왔던 그자는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옆통수가 상당히 얼얼할 터였다.

나예린 역시 연비의 도움은 필요없었다. 그들의 은신술이 뛰어나다고는 하나 그 정도 화후로는 그녀의 감각을 속이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그녀의 하얀 검이 비조처럼 날렵하게 허공을 갈랐다. 그 순간 상대의 도초도 함께 갈라졌다. 그다음 순간 경악의 마음이 다 가시기도 전에 검기가 혈도를 찔렀고, 그자는 뻣뻣한 통나무가 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찰칵!

나예린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조용히 칼집에 검을 꽂았다.

“이제 다시 모두 자게 되었군요. 안 그런가요?”

연비가 웃었다.

“언제부터 알았소?”

“그야 물론 들어왔을 때부터죠.”

연비가 당연한 것 아니냐는 듯 대답했다. 돈왕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설마 자신이 이런 어린 계집애에게 이렇게까지 몰리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그는 장사치답게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하기로 했다.

“하아, 내가 졌소. 그래, 용건이 무엇이오? 여기까지 올라온 이유가 있을 텐데?”

“물론 있죠. 그런 것도 없이 이런 귀찮은 일을 했을까 봐요?”

“말해보시오, 경청할 준비가 되었으니.”

“좋군요, 이야기가 빨라서. 간단히 말하죠. 칠상흔과 싸우고 싶어요. 그런데 접수처에선 안 받아주더군요. 그런 일은 여기 주인인 당신 몫이고 자신은 아무런 권한 도 없으니 이쪽 가서 상담해 보라고 해서 귀찮지만 이렇게 찾아온 거예요.”

접수처 장씨가 들었다면 얼굴도, 머릿속도 새하얗게 탈색될 만한 이야기였다.

“허허, 거참. 접수처 장씨가 그런 말을 했단 말이오?”

“뭐, 장사가 좀 될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면 더 잘 먹힐 거라고 친절하게 충고도 해주길래 번거롭지만 이렇게 실력 발휘도 좀 하면서 올라온 거예요.”

이미 머릿속이 탈색된 장씨가 이 이야기를 들으면 충격으로 유체이탈까지 할 만한 이야기였다.

“왜 그렇게 칠상흔과 싸우고 싶은 거요?”

저번에 왔던 단목강처럼 원한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던 것이다.

“꼭 이유가 필요한가요? 그리고 이유가 있다 해도 굳이 알려줄 필요까진 없을 것 같은데요? 뭐, 일단은 ‘상금”이라 해두죠. 그게 피차 납득하기 편할 테니.”

“죽을 수도 있소. 아니, 구 할 구 푼 구리의 확률로 죽겠지. 그런데도 할 거요?”

“어머, 누가 보면 생명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인 줄 알겠어요? 이런 어린 여자애들이 죽든 말든 댁은 전혀 상관없잖아요? 댁이야 중간에서 돈이나 벌면 만사형통이 잖아요? 남들이야 거기서 죽든 말든 그저 흥행만 되면 되잖아요, 안 그래요?”

가시가 담뿍 담긴 말이었지만 돈왕은 굳이 부정하려 들지 않았다.

“뭐, 부정하진 않겠소. 문제는 아가씨들이 나가서 과연 흥행이 될까 하는 거요.”

그의 머릿속엔 오직 흥행에 대한 것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이런 예쁘장한 아가씨가 둘이나 나서는데 흥행이 안 될 리 있겠어요? 이런 대박 흥행 요소를 가지고도 만일 흥행이 안 되면 그건 아저씨 능력 부족을 탓해야 할 것 같은데요?”

“아, 아저씨…….?”

강호란도 어둠의 지배자로 등극한 이래 그런 호칭은 처음이었다.

“그래, 상금이라면 얼마를 원하는 거요?”

“음… 최소한도로 잡아서 한 삼십만 냥쯤?”

연비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사, 삼십만 냥? 아가씨, 제정신이오?”

거액의 돈 이야기가 나오자 돈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물론 제정신인데요?”

뭘 그런 걸 가지고 일일이 놀라냐는 투로 연비가 대답했다. 돈왕은 골치가 아픈지 엄지와 검지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하아~검은 아가씨가 강하다는 건 알겠소. 매력적이란 것도 인정하지.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해. 흥행이 되질 않는단 말씀이지. 게다가 이쁘장한 아가씨 둘이라 는데 저쪽 아가씨는 지금 쓰고 있는 초립도 안 벗고 있잖소? 내가 투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맨 얼굴도 안 보고 미녀인지 아닌지 어찌 알 수 있겠소?”

그러자 연비가 경악하며 외쳤다.

“어멋, 몰랐어요? 원래 초립이나 면사로 얼굴을 가리는 게 바로 초절정 미인이라는 증거라구요! 그런 상식도 모르다니 믿을 수가 없군요!”

그러나 산전수전 다 겪은 돈왕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속설만 믿고 장사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런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가는 사업을 오래할 수 없소. 뭐든지 이 두 눈으로 확인한 것만 진짜인 거요.”

그는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확인만 시켜주면 가능한가요?”

지금까지 모든 일을 연비에게 맡겨놓고 침묵하고 있던 나예린이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린?!”

연비가 깜짝 놀라 외쳤다.

“음… 그래도 어렵소. 아무리 미녀라 해도 두 사람에겐 결정적으로 부족한 게 있단 말이오.”

“그게 뭐죠?”

돈왕은 짧게 대답했다.

“명성(名聲)!”

“평판 말인가요?”

나예린이 반문했다.

“그렇소! 바로 명성! 평판이라도 불러도 좋고 이름값이라 불러도 좋소. 두 사람에겐 결정적으로 명성이라는 게 필요하단 말이오, 명성이! 많은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고 취하게 할 수 있는 명성! 강호를 진동시킬 만한 이름이! 그런 명성이 확보되지 않은 사람에게 뭘 믿고 삼십만 냥이란 거금을 투자할 수 있겠소? 어림없지. 암, 어림없고말고.”

“그렇다면 저는 어떤가요?”

그렇게 말하며 나예린은 조용히 쓰고 있던 면사 달린 초립을 벗었다. 그 안에서 나타난 아름다움에 돈왕은 잠시 숨을 삼켜야 했다. 그것은 많은 미녀를 섭렵했던 그도 아직까지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그런 아름다움이었다.

“오오, 이런 아름다움이 있을 줄이야…….”

나이에 상관없이 보는 이의 숨을 막히게 하는 아름다움이 실제로 존재했던 것이다. 자신처럼 산전수전 다 겪은 인간을 동요하게 만들다니… 경국지색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의 아름다움이 아닐 수 없었다.

“린, 굳이 초립을 벗을 필요는 없었는데!”

연비조차도 나예린이 이곳에서 초립을 벗을 줄을 예상치 못한 모양인지 조금 당황해하고 있었다.

“린? 소저는 설마… 천하제일미라 불리는 빙백봉…….”

나예린은 차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과분하고 부담스러운 호칭이지만 빙백봉 나예린이 바로 저라고 묻는다면, 맞아요. 제가 바로 무림맹주 백뢰진천검 나백천과 빙월선자 예청의 딸, 빙백봉 나예린 이에요. ‘저’ 정도의 명성이면 충분한가요?”

“충분하냐고? 물론이오! 물론이고말고. 충분하고말고. 천하제일미라 불리는 나 소저라면 충분하고도 넘치오. 나 소저께서 직접 맨 얼굴로 나서주기만 하면 삼십 만 냥이 아니라 오십만 냥도 가능하오!”

돈왕이 흥분한 어조로 외쳤다. 나예린의 초립을 벗는 순간 돈왕은 직감적으로 ‘이건 된다!’라고 느꼈다. 이 감각이 빗나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럼 백만 냥으로 하죠. 이제 삼십만 냥으로는 부족하니까요.”

연비의 표정은 웃고 있지 않았다.

“생각이 바뀌었어요. 이쪽이 희생하는 게 너무 크군요.”

이런 희생까지 치르는데 싸구려 대우를 받을 수는 없었다.

“배… 백만 냥?”

“왜요? 너무 적나요?”

돈왕은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잠시 흥분해서 말은 그렇게 했지만 백만 냥은 솔직히 너무 크구려. 음, 오십만 냥이 어떻겠소? 그 정도로는 타협 볼 수 있을 듯한데?”

“좋아요. 좀 모자란 듯하지만 오십만 냥으로 하죠.”

연비가 합의했다.

짝!

돈왕이 타결을 자축하는 의미에서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소, 아가씨들! 아가씨들의 도발에 넘어가 주기로 하겠소!”

“잘 생각했어요.”

린이 초립까지 벗었는데 만일 잘못됐다면 가만히 있지 않았을 예정인 연비가 대답했다.

“하지만 조건이 있소.”

“무슨 조건이죠?”

“아가씨들은 아직 두 명이오. 세 명을 채우시오. 그리고 나머지 한 명 역시 같은 여자여야 하오. 특히 예쁜 아가씨로 부탁하오. 사람들은 피도 미녀의 피를 좋아하 니 말이오.”

“어머, 그런 차별적인 말을 하다니. 다 늙은 아저씨가 부끄러운 줄 아셔야죠.”

연비가 핀잔을 주었으나 돈왕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별로.”

시큰둥한 어조로 돈왕이 대답했다.

“그럼 이야기는 끝난 것 같군요.”

그다음엔 시합 일시나 과정에 대한 세부적인 논의가 있었다.

“칠상흔에게 도전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가씨들만이 아니오. 다른 이들이 있을 경우 아가씨들은 그들과 실력을 겨루어야만 하오. 빙백봉이 출전한다는 소문이 돌면 소저와 겨루고 싶어하는 여성들이 대거 참가할 가능성도 있소.”

“상관없어요.”

나예린이 조용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좋소, 그럼 이의없는 거요?”

“이의없어요. 그럼 결정된 건가요?”

“아직은 아니오.”

“뭐죠? 아직 아니라니?”

갑자기 연비의 온몸에서 스산한 기운이 뻗쳐 올랐다. 산전수전 다 겪었다는 돈왕마저 심장이 서늘해지는 그런 기운이었다.

“이런 중대한 일을 나 혼자서는 결정할 수는 없소. 잠시 사람들이랑 상의해 봐야 하오.”

마치 다 결정한 듯 말하고선 마지막엔 발을 뺄 속셈인가? 연비는 잔뜩 의심스런 눈으로 돈왕을 쏘아보며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호오, 강호란도의 금적신 돈왕이 사업을 아랫사람과 소상히 상의하는 그런 사람이었나요?”

아무리 봐도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다.

“물론 그렇게 하오. 큰일일수록 더욱 그렇게 해야지.”

“그럼 여기서 계속 기다려야 하나요? 하릴없이?”

“걱정 마시오. 숙소에 가서 쉬고 있으면 인편으로 알려 드릴 테니.”

“어디에 묵는 줄 알고요?”

아직 묵을 숙소조차 정하지 않은 두 사람이었다.

“아, 그건 상관없소. 어느 숙소에 머물던 금방 알아낼 수 있으니 그 건은 걱정 마시오.”

과연 강호란도의 지배자, 그 정도 정보는 금방 손에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좋아요. 즐거운 소식 기다리지요.”

만일 나쁜 소식이 온다면 이쪽도 결코 즐거워지지 않을 터였다.

“걱정 마시오, 실망시키지 않을 테니.”

“부디 그러길 바라요. 그게 피차에게 좋은 일일 테니깐요. 그만 가요, 린.”

나예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초립을 썼다. 그 빛나는 듯한 미모가 초립과 면사에 가려지자 묘한 아쉬움이 돈왕의 가슴속에 번져 나갔다. 두 사람이 사라질 때 까지도 그 파문은 여전히 그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는 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럴 때가 아니지. 어서 그분께 연락하지 않으면!”

돈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서둘러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서가 쪽으로 걸어갔다. 서가는 모두 여섯 칸이었는데, 각종 장부들로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그가 맨 처음 뽑아 든 책은 맨 위쪽 칸 왼쪽에서 두 번째에 위치한 ‘주식(主食)시장 완전정복’이라는 ‘쌀 시장’에 관한 유명한 책이었다. 책 뒤에는 손잡이가 달려 있었 다. 당겼다.

드르륵!!

그러나 최초의 작동음 이외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작동은 아니었다. 기관 불량도 아니었다. 반품할 필요도, 무상 수리를 받을 필요도 없었다. 그는 실 망하지 않고 둘째 칸의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와 셋째 칸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책을 뽑아 들었다. 각각 강호의 젊은 부자들’과 ‘강호에 돈을 묻어라!’라는 책이었지 만 책 제목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이 책들 뒤에도 역시 손잡이가 있었고 그는 차례대로 그것을 당겼다. 그는 아래 남은 세 칸에서도 똑같은 일을 반복했다. 각 칸 에서 하나씩 책을 뽑고 그 뒤에 있는 손잡이들을 차례로 잡아당겼다.

그르르르르릉!

여섯 칸의 여섯 손잡이 모두를 잡아당기고 나서야 비로소 비밀의 문이 열리며 숨겨진 입구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 서가의 기관장치 손잡이는 방금 뽑아낸 책 뒤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누군가 이곳을 침입하여 서가의 책을 몽땅 끄집어낸다 해도 그는 똑같은 모양의 손잡 이가 각 칸에 스물네 개씩 오(伍)와 열(列)을 맞추어 늘어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뿐이다. 하나라도 순서가 틀리면 문은 열리지 않는 구조로 되어 있다. 세 번 틀리면 보복이 주어진다.

각 칸에 모두 스물네 개씩 여섯 칸, 즉 이십이분의 일에 육승의 확률인 것이다.

드디어 그분에게로 가는 문이 열렸다.

도대체 강호란도 어둠의 지배자 돈왕에게 ‘그분’이라 불릴 수 있는 인물이 과연 누구일까? 돈왕의 모습이 비밀 통로 안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곧 침묵만이 텅 빈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금적신(金積神) 돈왕!

강호란도의 밤을 지배하는 뒷세계의 지배자. 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몰라도 돈왕만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이곳을 다스리는 진정한 지 배자의 그림자라는 것을. 그에게는 모시는 주인이 있었다. 주인의 공포와 힘을 경험해 본 그는 생각했다, 그분이야말로 밤의 지배자로서 진정으로 어울리는 분이라 고. 돈왕 자신은 그분의 대리인으로서 이곳을 관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에게는 돈을 쓰고 모으는 기술이, 그분에겐 힘과 공포가 있었다. 돈왕은 각종 영업과 거래 에 관해서라면 거의 모든 권한을 건네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건수가 너무 컸다. 아무리 그라지만 이 일은 주인과 상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어두운 복도는 그분께로 향하는 비밀 통로였다. 그 통로의 끝에 그분이 은밀히 머무는 비밀 방이 있었다. 오늘은 그 방의 주인이 그곳에 머무르는 날이었다. 주 인의 휴식을 방해하는 것은 죄송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고 공손한 태도로 문을 두드린 다음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주인은 피처럼 붉은 옷을 걸치고 그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만인을 압도하는 위압감을 가진 자였다. 돈왕은 좀 전에 있었던 일 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크크….”

웃음이다.

“크크크…!”

작은 웃음이다.

“크크크크크!”

그러나 점점 커지는 웃음이기도 했다. 그러나 작았던 그 웃음은 점점 커져 가기 시작하더니 곧 석실 안을 가득 메웠다.

“크하하하하하하! 설마 이런 곳에서 다시 만날 줄이야!”

작게 흔들리던 웃음이 마침내 광소가 되어 터져 나왔다. 웃음소리가 사방에 부딪치며 반향을 낳았다. 그는 자신의 주군이 이토록 기쁨에 차서 웃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분명 그 백의 계집이 빙백봉 나예린이라 했더냐?”

“예, 그렇습니다, 주군.”

최대한 공손한 태도로 돈왕이 대답했다. 강호란도의 밤을 지배하는 그도 이 붉은 옷의 남자 앞에서는 그저 한 명의 하인일 뿐이었다.

“확실한 거겠지?”

틀릴 경우 돈왕 자신의 목이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확실합니다. 그만한 미모에 그만한 검술을 지닌 여인이 많을 리 없지요. 빙백봉 나예린이 확실합니다.”

붉은 옷의 사내는 다시금 웃었다. 돈왕은 자신의 주인이 이런 식으로 웃는 것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모든 감정이 말살된 차가운 냉혈귀신이라 여겼던 그의 주 인이 지금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광기와 환희가 한데 어우러진 그런 웃음이었다.

“이런이런! 크크크! 이런 크나큰 즐거움이 절로 손안에 굴러 들어오다니! 세상은 정말 재밌어!”

사내는 왼손으로 오른쪽 어깨 위를 매만졌다. 벌써 십수 년 가까이 되었지만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고통이 그곳에 새겨져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예린이란 이름을 다시 듣자마자 오랫동안 억눌러왔던 잠자고 있던 검은 욕망이 시커멓게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괴롭혀 주고 싶다. 울부짖는 모습을 보고 싶다. 무릎 꿇고 비는 모습을 보고 싶다. 무참히 유린당한 모습을 보고 싶다고 사내는 진심으로 생각했다. 그 순간 움켜쥐고 있던 오른쪽 어깨가 불에 데인 듯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곳에 새겨진 증오가 그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가라! 가서 유린하고 파괴해라!

“흐흐흐흐흐…..”

사내는 가슴 깊은 곳, 어두운 욕망의 바닥으로부터 스멀스멀 기어올라 오는 기쁨과 전율에 몸을 떨었다.

“착한 일도 안 했는데 하늘의 선물을 다 받을 줄이야! 이거야말로 깜짝 선물이로군.”

왜 저 순결한 소녀가 이곳에 있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딴 건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즐길 수만 있다면 그런 건 어찌 되어도 좋았다.

이런 희열을 단번에 끝장낼 수는 없었다. 음미하듯 천천히. 맛있는 음식은 급히 먹지 않는 법이었다.

“그년들을 아십니까?”

두 여인에게 망신을 당할 대로 당해 더 당할 망신도 남아 있지 않던 돈왕의 말투는 거칠기 짝이 없었다. “쿡쿡, 좀 알지. 특히 백의 계집애 쪽은 깊은 인연이 있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주군이라 불리운 사내가 다시 웃었다. 사이한 기운이 담긴 소름 끼치는 웃음에 그의 심복을 자처하는 돈왕마저 흠칫 몸을 떨 정도였다.

“한 가지 물어보지. 자넨 눈으로 새하얗게 덮인 정원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

돈왕의 주인 된 사내가 대뜸 물었다. 돈왕이 대답했다.

“어릴 땐 그곳에 누구보다 먼저 발자국을 내고 싶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지요. 이미 잊어버렸지만 말입니다.”

“크크, 왜 그런 심정이 드는 걸까?”

그의 주인은 평소보다 이상하게 말이 많았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의 주인은 답을 말하고 싶은 것이지 답을 듣고 싶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건 바로 더럽히고 싶기 때문이야! 순결하고 새하얀 것을 그냥 놔두고 싶지 않기 때문이지!”

단호하게 말하는 사내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어렸다.

“돈왕!”

“예, 주군!”

“축제를 벌이자, 피의 축제를! 시합이다, 상금 오십만 냥을 건.”

“사, 상금 오십만 냥.”

그것은 그동안 강호란도로 흘러들어 온 수많은 돈을 주무른 돈왕마저도 떨리게 할 정도의 금액이었다.

“송구스런 말씀이지만 상금 삼십만 냥도 충분히 많은 액수라고 여겨지옵니다. 제가 다시 협상하여……..

“왜? 자금이 부족하더냐?”

“아, 아닙니다. 오십만 냥이 많은 돈이라고는 하나 융통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닙니다. 그동안 모아놓은 자금이 좀 압박받긴 하겠지만. 무리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걸 고작 투기 제의 상금으로 쓴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볼 때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그걸 비상식이라 부른다.

“월척을 낚아 올리려면 미끼가 커야겠지. 그 공사다망하신 위선자를 낚으려면 말이야.”

말을 마친 그는 할 이야기가 끝났다는 듯, 더 이상의 반론은 듣지 않겠다는 듯 몸을 돌려 관람석의 창 측으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곧 저 위에 세 명의 미녀가 제물로 올려지겠군. 선명하게 피로 물든 그 모습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흥분되어 참을 수가 없구나.”

휘익!

그는 몸을 돌려 나가려다가 생각난 듯 말했다.

“아참, 초대장을 하나 보내라!”

“어디로 말씀이신지요?”

“무림맹!”

그리고는 잠시 침묵한 다음 다시 지시했다.

“받는 사람은 무림맹주 본인이다!”

비밀 문을 나서는 그의 오른팔이 바람에 펄럭였다.

강호란도의 어둠을 지배하는 붉은 옷의 사내,

그는 외팔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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