궤짝은 꿍꿍이를 싣고
-비연태의 호언장담
남궁상은 선실을 둘러보며 생각에 잠겼다.
‘왠지 더 수상한걸. 나도 대사형의 영향으로 시선이 삐딱해진 건가?”
그는 고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선실은 서너 명의 인원이 함께 쓸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하고 안락했다. 배는 이미 출발했는데도 별다른 부유감이나 흔들림을 느낄 수 없었다.
충격에 대비하기 위해선지 침상이나 탁자가 바닥에 고정되어 있다는 것, 가구들의 모서리가 죄다 둥글둥글하다는 것, 또한 천장이 낮다는 것을 제외하면 마치 뭍 에 있는 값비싼 객실에 들어온 같았다. 색조가 지나치게 밝고 화려해서 도리어 격이 떨어진다는 게 아쉬울 뿐이었다.
“그나저나 이건 어디다 쓰는 물건일까?”
남궁상은 둥근 탁자 앞에 앉아 자신이 들고 온 나무 궤짝을 바라보았다. 초대장과 함께 온 물건이었다. 서찰엔 배에 타면 열어보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남궁상 은 순진하게도 그 말을 지금까지 계속 지키고 있었다.
“그럼 배에도 탔으니 슬슬 이걸 열어볼까요?”
남궁상은 고개를 들며 앞에 앉아 있는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탁자 맞은편에는 용천명과 마하령, 백무영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그게 좋겠네. 물건의 종류와 상황에 따라서 긴급 대책을 세우는 게 좋으니.”
최악의 경우를 상정한 듯 백무영은 무겁게 말했다.
“설마 위험한 물건은 아니겠죠?”
마하령도 긴장한 모양이었다. 기실 흑도의 습성으로 볼 때 이 안에 살인적인 기관장치가 설치되어 있다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내가 살펴본 바에 의하면 특별한 장치 같은 건 되어 있지 않는 것 같소, 하령. 독 검사도 이미 끝났고.”
친근하게 부르는 하령이란 호칭에 남궁상은 깜짝 놀랐다.
“아니, 이 두 사람, 언제부터 막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 거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하던 앙숙 사이가 아니었던가. 정말 남녀 사이의 일은 너무나 변화무쌍하여 자신의 둔한 사고로는 도저히 쫓아갈 수 가 없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죠.”
잠시 생각하던 마하령이 대답했다.
“물론이오. 충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하오. 그렇잖은가, 대장?”
“아직 ‘임시’입니다.”
남궁상이 새삼 강조했다. 얼렁뚱땅 자리를 꿰차는 대사형 같은 방식을 그는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충분히 주의를 기울일 겁니다. 그러니 안심하시지요, 마 소저.”
“그럼 부탁드려요, 대장님.”
남궁상이 열쇠를 들고 앞으로 나섰다. 열쇠를 여는 것은 대장인 자신의 몫이었다.
“이것도 시험인가?”
불안하고 찜찜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회피할 수도 없었다. 그랬다간 당장에 겁쟁이 취급 당할 게 분명했다. 그리고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이상 다른 사람에게 맡긴 다는 것도 탐탁지 않았다.
철컥.
열쇠가 조용히 열쇠 구멍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상자와 일체형인 자물쇠가 더욱 불안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에잇, 그렇다고 열쇠를 돌리자마자 뻥 하고 터지진 않겠지??
아무리 흑도 놈들이라지만 철천지원수도 아니고 그렇게까지 무모한 행동은 걸어오지 않을 것이었다. 최소한 그렇게 믿는 게 정신 건강상 좋았다.
“에잇, 왜 대장 같은 걸 시켜서…….?”
오늘부터 무척 상자나 자물쇠가 싫어질 것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하나… 둘…….?
조금 떨어진 곳에서 대기하고 있는 두 사람이 대비할 수 있도록 숫자를 센다.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크게 하고 언제든지 뒤로 튀어나갈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며, 남궁상은 천천히 열쇠를 돌렸다. 찰칵!
마침내 잠금이 풀렸다.
다행히 상자는 폭발하지 않았다. 그들 세 사람 역시 무사했다. 하지만 상자 안에 든 물건이 뭔지는 아직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그들로선 처음 보는 물건이었기 때문 이다.
“이게 뭐죠?”
마하령이 상자 안에 든 물건 중 하나를 꺼내며 물었다.
“글쎄요? 처음 보는 것이로군요.”
“동전처럼 생겼는데…….”
“목전인가?”
모양은 동그랗고 크기는 동전보다 조금 더 컸는데, 재질을 보아하니 꼭 나무로 만든 동전 같았다. 빨간색과 파란색, 총 두 종류로 이루어져 있었다.
“어디에 쓰는 물건일까요?”
가운데에 십(+)과 백(百)이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물건을 살 때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걸 받아주는 가게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 다. 국가 공인 검증도 거치지 않은, 그것도 나무 쪼가리를 누가 받아주겠는가?
“잠깐만요. 여기에 글자가 새겨져 있네요?”
그녀의 말대로 자세히 보니 동그란 목전의 네 귀퉁이에는 각기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마하령은 천천히 그것을 한 글자씩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
연비는 그림처럼 우아하게 난간에 기대어서서 멀어져 가는 마천각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남궁상, 이 녀석은 대체 뭐 하는 거야! 어디로 가는지 정도는 후딱 알아내서 알리지 않고.’
배가 출발한 지금까지도 감감무소식이라니. 나중에 단단히 재교육을 시킬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나예린이 선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관계로, 연비 는 일단 간편하고 조속한 수단을 택하기로 했다. 적당한 사람을 물색한 다음 붙잡고 물어보면 답은 금방 나올 터였다.
“저기, 실례합니다.”
“응? 헛, 넵.”
청년이 잔뜩 긴장하며 대답했다. 어째서인지 얼굴이 붉다.
“이 배의 목적지는 어딘가요?”
“예? 그, 그야…….”
***
“강(江)… 호(湖)… 란(亂)… 도(島)……? 지명일까요?”
마하령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명칭을 보아하니 무슨 섬 같은데, 그녀로선 처음 듣는 생경한 지명이었다.
“우리가 향하는 곳의 지명이 아무래도 그 강호란도 같군요.”
백무영의 말에 남궁상이 동의를 표했다.
“동감입니다. 그럼 이것은 혹시 그 강호란도라는 곳에서 쓰는 화폐가 아닐까요?”
불친절하게도 초대장에는 이 안의 물건에 대해 일언반구도 적혀 있지 않았기에, 아직은 추측밖에 할 수 없었다. 마하령에게서 건네받은 목전을 뚫어져라 살펴보던 용천명이 한마디 했다.
“그럴듯하군. 하지만 확실히 하려면 일단 위로 올라가서 유능한 조언자를 구하는 게 좋을 것 같네.”
그때, 선실 문이 스르르 열리며 대답이 들려왔다.
“멀리 갈 필요 없이 내가 알려주지.”
남궁상 일행은 크게 놀라서 문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나 활짝 열려진 문 바깥에는 아무도 없었다. 마치 문이 저 혼자 열린 것 같았다. 분명 문고리를 걸어놓 았건만,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마하령은 바람처럼 복도로 달려나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누구냐? 모습을 드러내라!”
복도엔 사람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은은한 불빛에 그녀의 그림자만이 길게 드리워져 있을 뿐이었다.
챙!
뒤따라 나온 용천명이 조용히 도를 뽑으며 말했다.
“찾아오신 손님께서는 선실로 들어오시지요.”
“아아, 손님은 무슨. 같은 편이네, 같은 편. 어이쿠, 미용에 안 좋으니까 그렇게 인상 찡그리지 말게나. 주름살이 생기면 아깝지, 아깝고말고.”
살짝 드리워져 있던 선실 그림자 중 왼쪽 귀퉁이가 일렁이더니 그 부분만 불쑥 앞쪽으로 길게 늘어났다. 그리고는 그 그림자 뒤에서 한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럴 수가!”
문 앞에 따라 나온 남궁상이 놀라며 외쳤다. 그는 그 비좁은 그림자 안에 은신하고 있기엔 너무나 덩치가 컸다.
“대체 언제부터?”
용천명의 목소리에도 미미한 감탄이 어려 있었다. 이 세 사람의 이목을 속이다니, 은신술이 보통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네… 네놈은……!”
마하령은 그가 모습을 숨기고 있을 때보다 더욱더 경계하며 외쳤다. 겨누고 있던 도를 치울 생각이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 “네놈이라니. 너무하는구만, 마 소저! 그래도 일단 선배인데.”
거구의 사내가 작게 불평하며 남궁상들을 향해 걸어왔다. 그가 한 걸음 한 걸음을 뗄 때마다 배가 기우뚱거리는 것만 같았다.
“당신이 왜 여기 나타난 거죠?”
호칭은 바꿨지만 그 안에 스며진 혐오감은 여전했다. 칼도 여전히 그 사내를 겨누고 있었다.
“허참, 그래도 일단 정보 담당관 아닌가.”
그러고 보니 그런 일이 있었던 것도 같았다. 그때 좀 더 여성들을 대표해서 결사적으로 반대했어야 했는데……. 지금 그런 생각 해봤자 때늦은 후회였다.
“멀리서 찾을 건 없다는 게 무슨 뜻이지요, 선배?”
피를 부르고 싶어 부르르 떨고 있는 마하령의 도를 조심스레 내려주며 용천명이 물었다. 그는 그녀의 도를 다시 도집에 넣기 위해 한참이나 그녀를 달래야만 했다.
“아, 자네들이 알고 싶어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강호란도의 정보, 그걸 내가 알려주겠네. 오랜 세월 동안 모든 미녀들의 정보를 연구하고 관장해 온 내가 말일세!”
그림자 속에서 나타난 거구의 정체는 바로 ‘여자들의 적’, ‘변태지존’, ‘여성평화위협지존재(女性平和威稽之存在)’등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애소저회의 영구명예회주 비연태였다.
“천무학관에는 재학연한 같은 게 없습니까? 십 년 내에 졸업해야 한다거나 하는.”
되묻는 용천명의 목소리도 따뜻하진 않았다. 그가 처음 천무학관에 입학했을 때도 그는 애소저회의 회주로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했다.
“그럴 리가. 사람은 배움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되는 법 아니겠나? 좀 더 모르는 것을 배우기 위해선 끝없이 노력해야지. 난 아직 모르는 게 많아. 그 모든 것을 학문 으로 집대성하기 전에 이곳을 그만둘 수 있겠는가!”
주먹을 불끈 쥐며 신념에 가득 찬 목소리로 비연태가 외쳤다. 멋모르는 사람이라면 심금이 울릴 정도로 진심이 담겨 있는 말이었다.
“학문? 대체 무슨 내용이기에?”
백무영은 한쪽에서 고개를 젓고 있는 남궁상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반문했다.
“삼부수치(三部數値)!”
주먹을 불끈 쥐며 뜨거운 피에 불타는 눈으로 비연태가 외쳤다. 그의 살들도 동시에 출렁였다.
“삼부?”
백무영의 의아함과 함께 마하령의 눈썹이 본능적으로 꿈틀거렸다. 남궁상은 속으로 한탄했다. 자신들의 정보 담당관이 가장 모으고 싶어하는 정보는 앞으로도 역 시 그런 쪽의 정보가 아닐까 하는 불길한 예감이 엄습하기 때문이었다.
“천무학관에 거하고 있는 모든 미인들의 삼부수치를 모두 알지 못하다니. 아아, 난 나의 무지가 너무나 수치스럽고 부끄럽다네! 자네들도 나의 이 부끄러운 마음 을 알겠는가?”
울 것 같은 눈으로 비연태가 물었다.
“선배와 같은 학관 출신이라는 사실이 좀 부끄럽긴 하군요.”
한숨을 팍팍 내쉬며 남궁상이 대답했다.
“그것보다 강호란도에 대해서나 알려주십쇼. 그렇게 호언장담하시는 걸 보니 확실히 알아오셨겠죠?”
남궁상의 요구에 비연태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날 누구라고 생각하나? 물론 알아왔네. 미녀들이 즐겨 입는 속옷 색깔이나 삼부수치, 혹은 신체 비밀들을 캐내는 것에 비하면 이런 것을 알아내는 것쯤은 누워서 떡 먹기라네.”
“아, 그러세요?”
이제 남궁상에겐 반박할 기운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만 하십시오. 계속하다가는 저희까지 강호 절반의 공분을 살지도 모르니까요.”
기운 빠진 대장과 멍해진 참모, 움찔거리는 마하령을 대신해 부대장 용천명이 나섰다. “그런가? 야박하기는.”
비연태가 투덜거렸다. 마하령이 참지 못하고 한마디를 내뱉었다.
“당연한 반응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짐승에 대한 대비는 여자 스스로 해야죠.”
비록 철로 만든 칼은 거뒀지만 혀 밑의 칼까지 거둘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누구한테 알아온 정보입니까? 출처는 믿을 만합니까?”
조심성 많아 때때로 소심하다는 평을 받고 있는 남궁상이 되물었다.
“물론 믿을 만하네.”
“누굽니까, 그게?”
“여성의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칭송하는 고결한 마음씨를 가진 나 같은 사람이라네. 지기를 만난 듯한 기분이었지, 음!”
그 만남을 다시 한 번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무척 만족스러운 듯 비연태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네 사람은 그 점에서 더욱더 믿음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그 지기가 대체 누굽니까?”
“자군, 자기를 자군이라 하더군. 별호가 그러니깐 뭐라더라? 아, 맞다! 미폭공자였지. 참, 다른 건 다 좋은데 그 작명 감각만큼은 따라가기 힘들더군. 대단한 친구야!”
그것이 칭찬의 의미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헷갈리는 네 사람이었다.
“아, 그 사람 말입니까? 용케도 그런 정신 구조가 독특한 사람한테 정보를 빼올 수 있으셨군요, 선배?”
“아, 그거야 거래를 좀 했지.”
기쁜 듯이 전신의 살을 출렁이며 비연태가 대답했다. 그 모습에 마하령은 절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본능적인 혐오감을 느끼며 무의식적인 방어 태세에 들어 가 있었다. 그 용천명에게서도 승리를 이끌어낸 마하령이었다. 그녀는 강했다. 하지만 이자는 조심해야 한다고, 이자는 위험하다고 마하령의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 다. 그녀는 그 경고를 조금도 소흘히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거래? 설마……?”
남궁상의 반문에 비연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말게, 우리 쪽에 대한 정보를 거래 재료로 삼지는 않았으니까. 그런 걸 거래할 수야 없지.”
그런 기본적인 것도 모를까 봐서? 비연태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를 보고 있으면 하나부터 열까지 다 걱정되는 네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가장 원초적 인 것, 즉 상식이라는 것이 결여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그럼 뭘로 거래했습니까?”
“그거야 그가 매우 흥미로워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지.”
“그게 대체 뭡니까?”
“그거야 뻔한 것 아니겠나? 바로 검은 제비, 그러니까 연비 소저에 대한 정보였지.”
비연태의 자신만만한 대답에 남궁상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것도 결국은 ‘우리 쪽에 대한 정보가 아니던가. 비록 전혀 다른 방향인 것 같긴 했지만. 일행 중에서 가장 빨리 이성을 회복한 백무영이 의아함을 표출했다.
“연비 소저의 정보? 그게 그렇게 결정적인 정보였습니까?”
“당연하지. 청혼하기 위한 정보인데.”
마하령은 기가 차서 반문했다.
“청혼이요? 그거 농담 아니었나요?”
“글쎄… 적어도 내가 보기엔 진담인 것 같더군. 그건 거짓말하는 자의 눈이 아니었어.”
자아도취에 빠진 인간의 눈일지도 모른다는 의견은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그래서, 넘겨주었습니까?”
남궁상의 긴장 어린 확인에 비연태는 고개를 저었다.
“그 정보는 우리 업계 사람들 사이에서도 매우 비싼 값이 매겨져 있다네. 빙백봉 나예린보다는 못하지만 최근 들어 그 가치가 급속도로 높아지고 있지. 하지만 정 보가 너무 적어. 수십 명이 달라붙었지만 아직 정보 하나, 속옷 한 점 빼내오지 못했다네. 그 누구도, 단 한 명도 말일세.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네.”
“그야말로 철벽성(鐵壁城)이로군요.”
““자네 말대로야.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네. 암, 안타깝고말고.”
“그 말을 들으니 좀 안심이 되는군요. 한 명이라도 더 늑대들로부터 안전할 수 있다면 여성들에겐 크나큰 흥복이겠지요.”
마하령의 목소리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꼭 그렇게 삐딱하게만 보지 말고 좀 더 열린 마음을 가지도록 하게나.”
“그러다간 늑대의 먹이가 되기 십상이겠죠.”
마하령의 대답은 여전히 퉁명스러웠다.
“연비 소저에 대한 정보 획득은 나마저도 아직 성공을 거두지 못했네. 하지만 내가 가진 정보의 양이 가장 방대하지. 특히나 나 소저에 대한 정보는 정말 좀처럼 얻 기 힘든 희귀 정보거든. 천무학관 칠봉에 대한 정보는 정사 흑백을 막론하고 언제나 높은 가치를 자랑하지.”
그 말을 들은 마하령의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서, 설마 거기에 나에 대한 정보도 들어가 있는 건 아니겠죠?”
“아니, 있네. 왜 없겠나?”
‘설마 그 안에 몸무게도?!’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서는 곤란했다.
당장 죽여 버리겠어! 금세라도 달려들어 비연태를 때려눕히려는 마하령을 용천명이 달려들어 간신히 진정시켰다.
“용건만 간단히 말해주시오, 선배. 내가 그녀를 아직 막을 수 있을 때 말이오.”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용천명도 마하령을 막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음, 알겠네. 한마디로 말해 강호란도란…….?”
비연태는 자신이 알아온 정보의 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계속되면 계속될수록 남궁상을 위시한 네 사람의 얼굴엔 놀라움이 떠올랐다. 강호란도, 그곳은 그들이 짐작하고 있던 곳과는 전혀 달랐다.
***
“강호… 란도(江湖亂島)……?”
나예린은 연비에게 들은 이름을 한 번 입 안에서 굴려보았다.
“명칭으로 봐선 섬이겠군요?”
“하지만… 처음 듣는 이름이에요.”
그 부분이 나예린은 걸리는 모양이었다.
“그러게요. 유명한 섬이라면 분명 우리들의 귀에도 들어왔을 테니 말이죠.”
정보가 턱없이 부족했다.
“그 청년의 말로는 모든 오락거리를 한곳에서 즐길 수 있는 지상천국과도 같은 곳이라던데…
그런 쪽으로는 거의 숙맥이나 다름없는 나예린으로서는 머릿속으로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흠… 그렇다는 건 비밀 유흥지인가…… 법의 손길이 닿지 않는……?”
그렇다는 것은……
““밤의 자금이 모이는 곳이라…… 이거 갑자기 흥미가 돋는걸요!”
연비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예?”
그 쾌활한 모습에 나예린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한다.
“꽤 재미있어질지도 모르겠어요.”
이제 마천각의 불빛은 희미한 잔영만 남긴 채 어둠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 * *
같은 시각.
염도와 빙검은 마천각 내의 십삼번대 기숙사 인솔자 숙소에서 관도들의 수련 계획을 짜며 어떻게 하면 애들을 데굴데굴 굴릴 수 있을까 심도있게 고민하고 있었 다. 언제 실전이 일어나도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훈련받고 있는 마천각에 비해 천무학관의 체계는 너무나 긴장감이 부족했다. 지금까지의 안이한 대처와 정 신 상태로는 마천각의 밥이 될 뿐이라는 경각심이 드는 것은 멀쩡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의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똑똑!
“누군가?”
이런저런 방안들이 적혀 있는 계획서에서 눈길을 떼지 않은 채 빙검이 물었다.
“저희들입니다.”
“들어와.”
좀 더 화끈한 수련 방법이 없나 고민하며 염도가 말했다. 곧 문이 열리고 남녀 두 사람이 들어왔다. 두 사람 모두 출중한 기도를 가진 무인들이었는데, 그들은 바로 인솔자를 자청해서 따라온 아미신녀 진소령과 점창제일검 유은성이었다.
“아이들이 간 곳은 확인했나?”
빙검이 먼저 질문했다.
“예. 하지만 설마 배를 타고 모두들 마천각 밖으로 나갈 줄은 몰랐습니다.”
“배? 목적지는 어딘가?”
“예, 동정호 안에 있는 강호란도란 섬이라고 합니다. 흑도에선 유명한 유흥지라고 하는군요. 배편은 정해진 휴식일마다 정기적으로 있는 모양이었습니다. 아무래 도 며칠간은 모두들 돌아오지 않을 듯합니다.”
그러자 순간 빙검의 몸이 움찔했다. 순간 날카로운 바늘이 그의 몸에서 솟구치는 듯했다.
“지금 방금 유흥지라고 했나? 게다가 외박이라고?”
스산한 목소리로 빙검이 물었다.
“예? 아, 유흥지는 맞습니다만, 외박이라기보다는 그저 며칠간 단체 일정이…….”
쾅!
빙검이 탁자를 힘껏 내려쳤다.
“닥치게!”
버럭 호통이 터져 나왔다.
“그게 외박이 아니고 뭐겠나! 그것도 무단외박! 아비의 허락도 받지 않고 외박을 하다니, 그게 말이나 될 법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나, 자네는?” 유은성을 쏘아보는 빙검의 두 눈에는 시퍼런 한광이 번뜩이고 있었다.
“그… 그러면 안 되겠죠…… 안 되고말고요.”
가슴이 서늘해진 유은성은 그렇게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 되겠군. 당장 쫓아가야겠네.”
빙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이봐, 얼음땡이. 이번 일은 애들끼리 벌이는 일이니 참견하지 않기로 한 것 아니었나?”
탁자에 앉아 있던 염도가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며 말했다.
“마음이 바뀌었네.”
“이유가 뭔가?”
“그 아이들 안에 설지가 있네. 난 아직까지 딸아이의 무단외박을 허락한 적이 한 번도 없었네. 혹시라도 만일 설지에게 찝쩍대는 놈이 있다면….”
“있다면?”
“그놈은 내 검의 감촉이 얼마나 서늘한지 확인해야 할 걸세.”
빙검이 힘주어 말했다.
“이 사람이 정말 그 성정이 북풍한설처럼 차갑고 냉정하고 침착하기로 유명한 그 빙검 노사가 맞나??
유은성의 머릿속에 그런 의문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지금 출발하시겠습니까?”
진소령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배편은 아직 있나?”
“한 시진 후에 그곳으로 향하는 배가 있습니다.”
이미 알아보고 온 모양이었다. 사실 진소령 역시 진령이 걱정되던 참이었다. 다음 운송편이 없었다면 그 배에 함께 올라탈 작정이었다. 다행히 다음 편도 있어서 이렇게 보고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좋군. 자네들도 준비하도록 하게.”
“예, 알겠습니다.”
진소령과 유은성은 포권을 취한 다음에 준비를 하러 나갔다.
“얼음땡이, 자네가 이렇게 흥분하는 건 처음 보는군.”
나름대로 신선한 광경이었다. 염도는 저 시퍼런 냉혈 인간에게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닌가 가끔 자문해 보곤 했던 것이었다.
“불덩이, 자네도 딸을 낳아보면 알아. 아비란 그런 것일세.”
“그러다 미움받을걸?”
왠지 자랑하는 것 같아 열이 받은 염도가 한마디 해주었다.
“내버려 두게. 어느 도둑놈이 그 아이를 내 곁에서 훔쳐 갈지 모르지만 그전까진 안 돼!”
강경한 목소리로 빙검이 말했다. 염도는 실소를 흘렸다.
“만나기도 전에, 아니, 있는지 없는지 확인도 하기 전에 도둑놈 소리가 바로바로 나오다니. 따님 달라고 사윗감이 찾아오기라도 하면 그 즉시 일단 주먹부터 한 방 날리고 시작하겠군.”
“흥. 검(劍) 놔두고 뭣하러.”
염도는 기가 막혔다. 딸 가진 아빠 마음은 다 그런 건가? 아이는 커녕 아직 결혼도 해보지 못한 염도로서는 알 수 없는 영역의 일이었다.
“어이어이, 자네 딸내미를 비구니로 만들 셈은 아니겠지?”
“그 아이를 데려가려면 적어도 나보단 강해야지.”
빙검은 무거운 한마디를 남기고 채비를 갖추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