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3권 10화 – 류은경, 우여곡절 끝에 남궁상을 만나다
류은경, 우여곡절 끝에 남궁상을 만나다
-남궁상, 위기일발!
“저기…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한참을 기다린 다음에야 은발소년은 간신히 나예린과 연비를 향해 입을 뗄 수 있었다. 한동안은 전혀 말을 붙일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겨우 좀 분위기가 진정되는 것 같자 용기를 내 말을 걸어본 것이다.
“물어봐요.”
연비가 대답했다.
“방금 절 도와주신 분이 누구인지 혹시 아세요?”
은발소년의 질문은 조금 의외의 것이었다.
“그걸 왜 묻죠?”
“절 도와주신 분이니 나중에 감사 인사라도 드릴려고요. 경황이 없어 인사도 못 드려서…….?”
“킥킥, 방금 그 광경을 보고도 우리에게 묻다니 참 이상한 사람이네요. 아니면 순진한 건가? 아니면 단순한 둔탱이?”
어찌 됐든 참 뜻밖의 반응이라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분은… 제 사자세요.”
대답한 것은 아직도 영령이 사라진 방향을 묵묵히 응시하고 있던 나예린이었다.
“방금 그분은 아니라고…….”
그러나 류은경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아뇨. 저분은 틀림없이 제 사자세요. 이 세상에 오직 그것만이 진실이라는 것을 곧 증명해 보이겠어요.”
단호한 어조로 나예린이 말했다.
“저…그럼 한 가지만 더 물어봐도 실례가 안 될까요?”
머뭇머뭇거리며 류은경이 질문했다.
“이번엔 뭐죠?”
연비가 물었다. 은발소년이 머뭇머뭇하며 입을 뗐다.
“저어… 두 분은 누구시죠?”
그러고 보니 아직 통성명도 하지 않은 세 사람이었다.
“지나가던 두 사람이요.”
연비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소개는 아무래도 자신이 먼저 해야 할 것 같았다. 은발소년이 부랴부랴 포권하며 말했다.
“저… 실례했습니다. 소생은 호북에서 온 류은룡이라고 합니다. 두 분 소저께서는 존함이 어찌 되시는지요?”
그 어색한 말투에 연비는 그만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푸하하하하하!”
연비가 배를 잡고 깔깔거리자 나예린은 그 모습을 보고 묘한 미소를 지으며 난처해했다. 소년의 얼굴이 삽시간에 빨개졌다.
“저… 왜 웃으시는 겁니까, 소저?”
연비는 한참을 웃은 다음에야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당신 사실 여자죠?”
“예?”
은발소년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여자 맞죠?”
연비가 다시 강한 어조로 추궁했다.
“그… 그건..”
눈에 띄게 당황한 그 모습에 연비가 피식 웃었다.
“같은 여자끼리 숨길 필요가 있을까요? 솔직히 불어봐요. 여자 맞죠?”
연비의 단호한 태도에 은발소년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 아니, 맞아요.”
어느새 목소리도 어색한 소년의 목소리에서 어린 소녀의 목소리로 돌아와 있었다.
“연비 말이 맞았네요.”
나예린이 순순히 시인하자 연비는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조금은 아까의 충격에서 벗어난 모양이었다.
“그럼 아가씨의 본명이 뭐죠?”
“처음 뵙겠습니다. 세류보의 류은경이라 합니다.”
“들은 적 있어요?”
연비가 나예린 쪽을 쳐다보며 물었다.
“아뇨, 처음이에요.”
그다지 유명하지 않다는 이야기였다.
“두 분 소저의 성함을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우물쭈물한 목소리로 류은경이 물었다.
“난 연비, 이쪽은 린이에요.”
연비가 간략하게 자신들을 소개했다. 본명과 별호는 알려주지 않았다.
“한데 참 큰일 날 뻔했었네요. 몸은 괜찮아요?”
연비의 물음에 류은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다행히 그 여성분께서 도와주셔서 괜찮습니다.”
다시 영령의 이야기가 화제로 나오자 나예린의 안색이 눈에 띄게 나빠졌다. 연비는 얼른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런데 투기제에 참가하고 싶다고요?”
그러자 류은경은 자신이 왜 여기에 왔는지 다시 기억해 냈다.
“예, 맞아요. 전 꼭 투기제에 참가해서 우승해야만 해요.”
농담이라고 받아넘기기엔 그 눈동자가 너무나 진지했다.
“아무래도 진심인 모양이네…….”
“물론 진심이에요.”
“이길 수 있어요, 아가씨가? 그 칠상흔을?”
“그… 그건……?
은발소녀는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그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고 있는 모양이군요.”
“사실 소문만 들어봤어요. 직접 본 적은 없어요.”
대답하는 소녀의 어깨는 축 늘어져 있었다. 그녀가 들은 소문은 바로 단목세가의 삼가주 철혈창 단목우가 신풍삼영 중 나머지 둘인 호검과 잔도와 함께 덤볐다가 칠상흔에게 패했다는 무시무시한 내용이었다. 직접 보지 않았어도 팔대세가의 삼가주가 어느 정도 실력인지는 어림잡아 짐작할 수 있었다.
“하, 하지만 도와줄 사람만 찾으면 괜찮을 거예요. 사부님이 소개시켜 준 분이니까요.”
어째 자신을 북돋우듯이 류은경이 말했다.
“도우미가 있나 보죠? 그 사람이 누군데요?”
“그, 그건…….”
류은경이 잠시 망설이자 연비가 말했다.
“말해봐요. 혹시 알아요, 길이 열릴지.”
연비가 내보인 그 자신만만한 미소에 류은경의 마음이 움직였다. 그것이 마수에 걸려드는 거라는 것도 알지 못한 채 소녀는 그 이름을 내뱉었다.
“뇌전검룡이라 불리시는 남궁세가의 남궁상 공자님이세요.”
의외의 인물의 입에서 의외의 이름이 나오자 연비는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에 대한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풋!”
연비는 가까스로 폭소를 참아낼 수 있었다.
“그, 그건 또 의외의 이름이네요.”
참 신기하다는 투로 연비가 말했다.
“그분을 아세요?”
설마 알고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고 있던 류은경은 깜짝 놀라 물었다.
“어느 정도는 좀 아는 편이죠.”
오른쪽 눈가를 검지로 긁적이며 연비는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가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었다니…….”
그녀는 강호의 세력이나 유명 인사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어서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연비로부터 뇌전검룡 남궁상에 대한 이야기를 대충 들은 류은경은 벌 써부터 압도되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대단한 것 같지는 않은데??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자기가 쓰고 있는 가면을 벗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유명한 사람이 저 같은 걸 도와줄까요?”
자신없는 목소리로 류은경이 중얼거렸다.
‘그렇게 유명 인사였었나?”
물론 이 말도 입 밖에는 내지 않았다.
“아마 도와줄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지금 그쪽 상황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쉽게 승낙할 수는 없을 듯하긴 했다.
“하지만 대가는 지불해야 하겠지요?”
“그거야 뭐…….”
도움을 받은 다음 그에 대한 보답을 하는 거야 전혀 나쁜 일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본인이 판단해서 처리할 일이었다. 연비가 보기에 남궁상은 도움을 받고 그 대가를 요구할 만큼 계산 밝은 녀석은 아니었다.
“그럼 전 무슨 대가를 치르면 될까요?”
류은경이 대뜸 물었다. 연비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는 꽤 심각했다. 왜 이런 심각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건지 연비로선 의아하기만 했다.
“대가요? 글쎄요, 말로 잘 부탁하면 그냥 들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니요. 그럴 리가 없어요. 분명 무슨 대가를 요구할 거예요. 가령 제 몸이라던가…….”
“풉!”
하마터면 연비는 각혈할 뻔했다. 입 안에 뭔가를 머금고 있었다면 바로 뿜어내고 말았을 것이었다.
“재밌는 농담이네요.”
얼토당토않은 망상에 빠져든 류은경을 보며 연비가 촌평했다. 류은경은 류은경 대로 연비를 같은 여자라 생각했기에 조금쯤 마음 놓고 물어볼 수 있었다. 그런 면 에서 인간을 완전히 불신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아니면 어설프게 불신하거나. 어설프게 불신하는 건 어설프게 믿는 것만큼이나 매한가지로 위험했다. 특히 상대가 연비 같은 사람이었을 경우에는 더욱더.
“농담이라뇨? 전 진담이에요.”
저 정도면 확실히 중증이라 할 만했다. 그래도 나름 인연이 있는 처지인지라 변명해 주기로 했다.
“글쎄요? 좀 궁상맞아 보이긴 해도 그런 파렴치한 사람 같아 보이진 않았는데요?”
연비가 보기에 아직도 물렁물렁하기 그지없는 남궁상이라면 이런 어린 소녀의 눈물 어린 부탁이라면 백이면 백 냉큼 앞뒤 재보지도 않고 들어줄 것이 분명했다. 물론 지금 그럴 정신이 있을 때의 얘기였지만 말이다. 아무리 궁상이 사람 좋고 착실하고 성실하고 소심하다고 해도 지금은 사절단의 단장으로서 사절단이 맞이한 대위기—자업자득이라 해야 마땅할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에 대한 것만으로도 머리통이 지글지글 익어버릴 지경일 테니 말이다.
“아니에요, 분명 그럴 거예요. 흔한 이야기잖아요! 남자들은 원래 다 그렇지 않나요? 좀 전의 그 세 사람만 봐도 그렇잖아요. 그 사람도 분명 그럴 거예요. 같은 남 자잖아요. 게다가 유명 인사라잖아요. 분명 더 그럴 거예요.”
“유명 인사라서 더 그렇다니, 그건 좀 편견인 것 같은데요?”
그러나 이미 류은경은 듣고 있지 않았다.
반짝!
그때 갑자기 연비는 장난기가 발동했다. 이렇게 불신에 가득 찬 아가씨를 보자 이런 때 뭔가 장난 한 번 쳐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막연한 의무감 같은 것이 온몸
을 지배했던 것이다. 그 강렬한 의무감―유혹이라 해야 마땅할에 넘어간 연비는 가벼운 손짓으로 류은경을 부른 다음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렇다면 그 남궁상이란 사람을 설득시킬 비책을 알려줄게요.”
“정말요?”
귀를 고정시킨 채 류은경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럼요, 물론이고말고요. 이래 봬도 좀 아는 사이이거든요 그 궁… 아니, 남궁상이란 사람하고는요.”
그러나 이미 시선이 연비의 어깨에 닿아 있는 류은경은 귓가를 간질이는 연비의 입김만 느낄 수 있을 뿐, 그 붉은 입술과 긴 속눈썹을 가진 호안의 눈이 짓궂게 미 소 짓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연비…….”
나예린이 약간 당황하며 망설이는 어조로 연비를 불렀다. 그러자 연비는 그녀를 돌아보며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댔다.
쉿!
조용하라는 신호를 보내는 연비의 호박색 눈이 장난기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정말로 비책을 알려주실 수 있나요?”
다시 류은경에게로 고개를 돌린 연비가 귀에다 바싹 입을 대고 말했다.
“물론이죠. 나만 믿어요. 한마디로 몸을 주지 않으면서도 도움은 얻어낼 수 있는 궁극의 비책이니까요. 이거라면 틀림없이 먹힐 거예요.”
“정말요?”
“그럼 정말이죠.”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연비가 대답했다. 달콤한 속삭임과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류은경은 귀를 기울였다. 속삭임이 귓속에 울려 퍼졌다.
“그러니까 말이죠, 어떻게 하냐면은…….?
연비는 뜨거운 숨결과 함께 류은경의 귓가에 소위 비책이라는 것을 속삭여 주었다. 이 속삭임이 악마의 속삭임이라는 것을 이때까지만 해도 류은경은 눈치 채지 못했다. 그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망연자실 듣고 있을 뿐이었다.
몸을 주지 않으면서 도움도 얻을 있는 비책이라는데 어떻게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그 달콤한 속삭임 속으로 류은경은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간간이 고개를 끄덕 일 뿐 한마디도 놓치지 않기 위해 귀를 기울이는 류은경의 모습에는 가공할 집착이 느껴졌다. 무서운 집중력이 아닐 수 없었다.
“여기가 바로 그 사람이 있는 곳이구나.”
강릉객잔이라고 적힌 현판을 올려다보며 류은경이 조용히 뇌까렸다. 잠시 문가에서 망설이던 류은경은 이내 결심을 굳힌 듯 객잔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미 좀 전에 연비라는 처자를 만난 인연으로 남궁상이 어디에 묵고 있는지 들어 알고 있었다. 점원의 안내 없이도 찾을 수 있을 정도였기에 류은경은 자신이 목표하던 곳을 향해 힘차게 발걸음을 옮겼다.
“류 소저께선 이약빙 선배님과 어떤 관계가 되시는지요?”
류은경이 건네준 이약빙의 소개장을 받아 들며 남궁상이 공손히 물었다.
“그분께선 못난 저의 사부님 되십니다. 저에겐 과분한 분이시죠.”
그 말을 듣고 남궁상은 놀랍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선배님께서도 드디어 제자 분을 구하셨군요. 예전에 가끔 세가에 놀러 오셨을 때 뵌 적이 있습니다. 제 어머님의 친구 분이시죠. 무척 병약해 보이는 분이셨는 데, 그분을 겉만 보고 파악해선 안 된다고 아버님께 호된 꾸지람을 들었지 뭡니까. 하하하!”
과거를 회상하며 아련한 눈빛으로 말하던 남궁상은 그때의 일이 생각나는지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다음 소개장을 개봉해 찬찬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모친의 지인인 것을 떠나 존경하는 검객이기에 결코 소홀히 할 수 없었다.
받아 든 소개장을 모두 읽은 다음 남궁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했다. 류은경에겐 그 일각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 마치 십오 년처럼 느껴졌 다. 한참을 고민한 후 마침내 남궁상이 입을 열었다.
“사정은 잘 알겠습니다.”
“그럼?”
약간의 희망을 가지며 류은경이 반문했다. 하지만 남궁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죄송합니다, 류 소저. 저도 돕고 싶지만 지금은 힘들 것 같습니다. 보통 때라면 모르겠지만 현재는 비상시입니다. 현재 제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는 처지에 남을 도 울 자격이 안 되는군요.”
현재 자신이 처리해야 하는 일만으로도 남궁상은 허리가 휠 지경이었다. 남을 도와주려고 해도 여력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역시 안 되는군요…….”
어깨가 축 처진 류은경이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그냥은 안 된다더니… 사실이었군요.”
들릴락말락 한 작은 목소리로 류은경이 중얼거렸다.
“예? 방금 뭐라고 하셨나요?”
남궁상의 물음은 귓등으로 흘려들은 채 류은경이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
“걱정 마세요. 저도 아무런 대가 없이 도와주시리라 기대하진 않았습니다. 공짜로 도와달라는 것은 어불성설이죠. 대가는 충분히 지불하겠습니다. 여, 여자를 좋 아하신다고 좀 전에 만난 어느 여성 분께 들었습니다.”
뒷말은 부끄러운지 점점 목소리가 모기처럼 작아졌다.
“예? 여자요?”
중간에 나온 단어 하나에 화들짝 놀라며 남궁상이 반문했다. 뭔가 착오가 있다면 바로잡아야만 했다.
“그건 오해…….”
그러나 남궁상은 뒷말을 이을 수 없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혀가 마비되고 만 것이다.
스르륵!
약간 망설이던 류은경이 옷고름을 풀었다. 사라락 풀려진 옷고름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참으며 류은경이 필사적으로 말을 자아냈다. 눈물이 날 것 같은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천천히 양손을 고름이 풀려진 상의에 가져간 류은경이 조막만 한 손으로 옷자락을 움켜쥐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부디 도와주세요. 도와주신다면… 도와주신다면, 제 몸이라도…….”
느닷없이 양손으로 상의를 벗어젖히려 하자 소심한 사절단장은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만큼 깜짝 놀라고 말았다.
“후히엑!”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기겁하며 달려간 남궁상이 더욱 아래로 내려가려는 류은경의 손을 양손으로 꽉 붙잡았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류은경의 뽀얀 어깨 속살이 공기 중에 다 드러난 이후였다. 남궁상의 재빠른 처신 덕분에 간신히 더 아래로 내려가는 불상사는 막을 수 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더 이상의 진행은… 이라고 안심 하고 있을 때……
벌컥!
기척도 없이 문이 활짝 열렸다.
“허거걱!”
급작스런 돌발 사태에 당황한 남궁상의 두 눈이 경악으로 휘둥그레졌다. 몸은 얼음 조각처럼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그 모습에 류은경의 얼굴엔 의아함이 떠올랐 다. 남궁상의 얼굴은 마치 염라대왕이라도 만난 듯한 얼굴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방문 쪽을 바라보았다. 한 홍의 비단옷을 입은 여인이 그곳에 서 있었다. 갑작스레 문을 열고 들어온 그 여인도 남궁상과 마찬가지로 석상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녀는 바로 진령이었다.
이게 뭘까? 자신이 지금 보고 있는 게 뭘까? 이건 혹시 꿈이 아닐까? 요즘은 꿈도 참 괴상하네? 요즘 의심병이 많아져서 그런가? 하지만 오감으로 느껴지는 이 불 길하고 생생한 느낌은 아무리 현실을 부정하려고 해도 이것이 꿈이 아니라고 있는 힘껏 외치고 있었다.
‘그럼 도대체 이 말도 안 되는 광경은 무엇이란 말인가?”
진령은 눈을 질끈 감고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한곳을 향해 뚫어져라 고정되어 있었다.
처음 보는 여자가 옷고름을 푼 채 남세스럽게 어깨를 모두 드러내 놓고 있었고, 벗겨지려 하는 상의를 움켜쥐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연인의 손이었다. 저 광경은 어딜 봐도 남자가 생판 모르는 여자의 옷을 강제로, 혹은 합의하에 벗기려 하고 있는 광경이었다. 진령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파랗게 질린 것은 진령뿐만 이 아니었다.
“아, 아니오, 령. 이건 그러니까…….”
남궁상이 뭐라고 열심히 떠드는 것 같지만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그런 말을 일일이 듣고 판단하기엔 그녀의 머리가 너무 복잡했다.
“오, 오해요, 오해!”
남궁상이 필사적으로 외쳤다.
“오해요? 제가 뭘 오해했다는 거죠?”
떨리는 목소리로 진령이 물었다. 그녀는 지금 무척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러니까 령, 그대가 보고 있는 이 광경이 오해라는 거요.”
“별로 오해할 건더기는 없을 것 같은데요?”
아무리 봐도 상황은 명백했다.
“류 소저도 뭐라고 말 좀 해보시오!”
남궁상이 다급한 목소리로 구원을 청했다. 이렇게 된 이상 기댈 수 있는 건 류은경뿐이었다.
“저…….”
류은경은 남궁상의 기겁한 얼굴과 분노로 인해 파들파들 떨고 있는 여인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제발… 제발…….?
자신을 바라보는 남궁상의 시선에는 간절함이 깃들어 있었다.
털썩!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안절부절못하던 류은경은 그만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으아아아아앙!”
류은경의 입에서 어린애 같은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허걱! 이게 무슨……!’
남궁상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 돌발 행동은 남궁상의 얼굴에 그나마 남아 있던 푸른 핏기까지 모조리 빼앗아가 버리고 말았다.
“이래선 변명의 여지가 없잖아!! 끄아아아악!’
속으로 비명을 터뜨려 보았지만 이미 수습할 수준은 떠나 있었다.
남궁상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두렵다는 듯 머뭇머뭇거리며 진령의 반응을 살폈다. 차마 정면으로 볼 용기가 없어 힐끔 곁눈질하는 게 고작이었지만 사태 파악에 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키기기기깅!
떨리는 진령의 옥수가 검집으로부터 부들부들 떨리는 검을 힘겹게 뽑아냈다.
“자… 잠깐만! 잠깐! 기다려 주시오!”
기겁한 남궁상이 양손을 세차게 흔들었다.
“문답무용!”
단 한마디로 남궁상의 말을 일축하며 진령은 조용히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일단 죽여놓고 생각하자!
진령은 그렇게 결심했다.
“헉헉헉! 왜… 왜 해명해 주지 않았소? 왜? 하마터면 진짜로 죽을 뻔했잖소?!”
연인에게 참살당할 뻔하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부지한 남궁상이 억울한 어조로 류은경을 책망했다. 자신의 회피 실력이 조금만 더 모자랐더라도 명년 오늘이 그 의 제삿날이 되었을 것이다. 사실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은 기분이었다.
“당장 가서 해명해 주시오. 그건 오해였다고, 사고였다고 말이오!”
이미 진령은 거의 울 듯한 얼굴로 방을 뛰쳐나간 후였다.
“흑흑흑, 꼭 제가 그래야 하나요?”
류은경의 돌연한 반문을 들은 남궁상은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다 아가씨 때문이잖소! 아가씨가 그런 돌발 행동만 하지 않았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 거요!”
“하지만 남자한테 부탁할 때는 그 방법이 즉효라고……..
밑져 봐야 본전이라 생각했다. 벗는 시늉만 해도 충분히 당황시킬 수 있으니, 충분히 효과를 볼 수 있을 거라는 연비의 귀띔은 정말로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연비라는 처자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은 굳이 알리지 않았다.
“하아, 효과는 개뿔이. 어쨌든 긴말하기 싫소. 빨리 가서 해명해 주시오.”
그러자 류은경은 좀 전에 길에서 만났던 검은 옷의 여인이 해준 말이 떠올랐다.
“절대 물러서면 안 돼요. 당황하고 있을 때, 그때가 바로 기회예요. 그걸 잡아요!”
“어떻게 하면 되죠?”
“그냥 콱 울어버려요.”
류은경은 속으로 모종의 결심을 했다. 그리고는 다시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하기 시작했다.
“우아아아아아아앙!”
서럽고 비통하기 짝이 없는 그 울음을 듣자 남궁상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왜 우는 거요? 울고 싶은 건 나란 말이오!”
그러나 류은경의 울음은 그칠 줄 몰랐다.
“하지만… 하지만… 자꾸 윽박만 지르잖아요…… 으엉엉!”
그 울음소리가 어찌나 서러웠는지 자신이 너무 심하게 몰아붙였나 하는 자책감까지 들었다.
“아, 그만 우시오. 보는 나까지 울적해지네. 알았소, 일단 사정부터 들어봅시다. 뭘 원하는 거요?”
소심하다 보니 남의 감정에 쉽사리 동조되는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누가 자기 앞에서 슬피 우는 게 정말 싫었다. 그 한마디에 류은경의 울음이 거짓말처럼 멎었 다.
“저와 함께 조를 짜주세요!”
류은경이 절실한 목소리로 외쳤다.
“조라니? 설마 투기제 참가조를 말하는 거요?”
류은경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이런 기막힌 일이…….”
그 소심해 보이던 아가씨가 갑자기 이렇게 당돌하게 나올 줄 몰랐던 남궁상은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만일 싫다면 어쩌겠소?”
사실 그는 지금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사절단이 하룻밤 만에 진 거대한 도박 빚을 청산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인 투기제에 어떻게 누구누구랑 참가할 것인가 가 그의 최대 화두였던 것이다.
“흑흑, 할 수 없죠. 그분한테 가서 제가 어떻게 해서 순결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는지 자초지종을 상세히 얘기할 수밖에요. 흑흑흑!”
“누, 누가 들으면 경을 칠 소릴! 그건 사실무근이오!”
한순간 가슴 한구석이 얼음물에 담겨졌다 나온 것처럼 서늘해진 남궁상이 흥분하며 소리쳤다. 류은경은 다시 겁먹은 듯 울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남궁상은 다시 한 번 더 류은경을 달래야 했다. 그에게 이보다 더한 고난은 없었다.
“흑흑흑, 그분은 그렇게 생각 안 하실 수도 있죠. 소녀는 남궁 공자의 판단이 현명하길 기대하겠어요, 흑흑흑!”
“허허… 이거 참.”
아무래도 선택의 여지가 없는 듯했다. 된통 걸리고 만 것이다. 갑자기 허탈해지는 남궁상이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장난질이 개입된 게 아닌가 의심하게 되는 남궁상이었다.
“누가 내 운명을 가지고 장난이라도 치고 있는 건가?”
삼 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둔한 남궁상이었다. 정말로 이 사건은 배후에서 개입해 장난을 친 장본인이 누군지 안다면 놀라 자빠질 게 분명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