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죽을 순 없다
-물귀신 작전
망연자실해 있던 남궁상의 귀에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방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들어왔다.
“이보게, 남궁 대장. 방금 전 진 소저가 무시무시한 얼굴을 하고 밖으로 달려나가던데 혹시 아는…….”
진령에 의해 세게 닫혀진 문을 드르륵 열며 말을 잇던 용천명은 자신이 목격한 광경을 보곤 그만 말을 잃고 말았다. 진령의 등장 때문에 딱딱하게 굳어 있던 남궁 상과 류은경의 상태는 진령이 봤을 때랑 거의 달라진 게 없었던 것이다.
“어흠, 난 이만 돌아가겠네. 방해해서 미안하고. 좋은 시간 되게!”
용천명은 급히 문을 닫고는 뒤돌아서 사라지려 했다.
“잠깐! 잠깐 기다리세요, 용 형! 기다려!”
남궁상의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이 이상 오해를 늘려서 좋을 게 하나도 없는 남궁상은 어떻게든 이 사건이 번져 나가지 않도록 처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자신이 류은경과 단둘이 계속해서 있는 사태를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다른 나머지 한 사람이 누가 되든 상관없었다. 게다가 무엇보다 혼자 물에 빠지기에는 너무 억울했다. 이 사실을 알 턱이 없는 용천명은 그만 남궁상의 간계에 걸려들고 말았다.
“내가 계속 있으면 곤란한 것 같아 자리를 피해주려 했는데…….”
나름대로 신경 써준다고 한 행동인 것 같았지만 남궁상은 전혀 고맙지 않았다.
“그러니까 오해입니다, 오해! 아무 일도 없었어요! 물론 아무 관계도 아니고!”
그러자 회의적인 표정을 하며 용천명이 물었다.
“그 변명, 먹혀들었나?”
침울한 표정으로 남궁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 한마디 꺼낼 기회조차 없었습니다.”
“하긴 그럴 것 같았네. 안 그랬으면 그런 표정 지을 리 없었겠지. 엄청난 살기였다네. 나조차도 모르는 새에 한 걸음 물러나며 길을 터줄 정도였으니 말 다했지.” 복도에서 진령과 마주친 용천명은 그 서슬 퍼런 살기에 놀라 저도 모르게 벽 쪽으로 한 걸음 물러나며 길을 비켜주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니 부디 들어와 주세요. 더 이상 절 곤란하게 만들지 말고요.”
“그럼 실례하겠네.”
그제야 마지못한 듯 용천명이 객실 안으로 들어왔다. 이쯤엔 류은경도 흐트러졌던 옷매무새를 완전히 가다듬고 난 이후였다. 용천명이 들어오자 한동안 어색한 침 묵이 흘렀다.
“아,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이분 용 형은 ‘창천룡’이라고 불리우는 소림의 촉망받는 기재로 여인의 곤란함을 못 본 척할 만큼 비도덕적인 분이 아니니까요.”
즉, 만일 자초지종을 듣고도 일을 거들어주겠다고 나서지 않으면 졸지에 비도덕적이고 메마른 감정의 소유자가 되는 것이었다. 은근슬쩍 이렇게 빼도 박도 못하게 못 박아놓는 물귀신 작전은 원래 대사형 비류연에게서 경험으로 배운 수법으로 오늘 이 자리에서 무의식중에 그 배움이 빛을 발하게 된 것이었다. 된통 걸렸다는 것 을 깨달은 용천명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자, 그럼 성함이…….?
“세류보의 류은경이라고 합니다.”
두 사람 모두 이름 정도는 들어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 정사 중립적인 성격을 띠는 곳이었지만 굳이 따지자면 백도에 속하는 곳이라 할 수 있었다.
“그곳의 금지옥엽께서 이런 곳까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그리고 도대체 무슨 도움이 필요하신 겁니까?”
어떻게든 이 일을 해결해서 류은경의 해명을 받아내지 못하면 진령에게 끝장날 것 같다는 위기감이 남궁상을 움직였다. 그러니 어찌 되었든 연비가 살짝 귀띔해 주었던 조언은 효과가 있었다고 할 수 있었다.
다시 눈가에 글썽글썽한 눈물을 훔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앉은 류은경은 어느 틈에 남궁상이 끓여 내놓은 차를 한 모금 들이켠 후 입을 열었다.
“그럼 지금부터 소녀의 이야기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두 분도 아시게 되겠지요, 제가 이곳에 온 자초지종을.”
은발의 소녀는 조곤조곤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