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비의 고민
ᅳ세 번째 사람은 누구로?
비단처럼 긴 검은 머리에 밤처럼 검은 현의를 걸친 이 하나가 의자에 앉아 책상 위에 펼쳐진 종이를 심각한 표정으로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종이 위에 적힌 것은 이름들이었는데, 대부분의 이름들에 줄이 그어져 있었다.
이진설
남궁상
모용휘
효룡
………
그 외의 다른 이름들도 모두 줄이 그어져 있었다. 모두 검은 옷의 주인공 손에 들린 붓의 소행이었다.
“흠, 어쩔까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인재가 없네, 인재가.”
현재 연비에게는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이성 문제 같은 시시한 고민보다 훨씬 더 중요한 고민이었다. 투기제의 날은 시시각각 앞으로 다가오고 있는데 아직도 참 가 조원의 세 번째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언제든지 그 빈자리를 쉽게 메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구하려 하니 막막해져 버렸다. 투기제 하루 전까지 세 번째 여 자 선수를 등록하지 않으면 계약 위반에 해당된다. 위약금을 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바로 내일이었다.
원래 연비와 나예린은 맨 처음 이진설을 생각하고 느긋하게 있었다. 비록 위험한 일이긴 하지만 이진설이라면 충분히 해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꼭 싸울 필요는 없었다. 목숨을 거는 건 연비 자신 한 명이면 충분했다. 다만 머릿수를 채워주고 만일의 사태에서 몸을 지킬 만큼의 실력을 지니고 있으면 충분했다. 유사시엔 기권 시키면 그만이었다. 그 유사시란 물론 연비 자신이 대전 상대의 손에 패배하는 일을 의미했다. 그 결과가 죽음이 된다 해도 복수는 필요없었다. 그냥 기권하면 됐다.
물론 나름대로 계산도 서 있었다. 나예린의 부탁이라면 거절할 이진설이 아니었다. 그런데 바로 어제 문제가 발생했다. 이진설은 참가하고 싶어도 참가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어, 언니… 미, 미안해요…….”
가냘픈 목소리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진설은 사과했다. 침상에 누워 있는 그녀의 안색은 무공이 전폐된 사람처럼 핼쑥했다. 뺨은 홀쭉하고 눈은 퀭하다. 입술은 가뭄 날의 논바닥처럼 갈라져 있었고 핏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설아!”
나예린이 침상 밑에 꿇어앉은 채 이진설의 앙상한 손을 꽉 움켜쥐었다.
“언니, 미안해요… 미안해요…….?
두 줄기 눈물이 창백한 뺨을 타고 쪼르륵 흘러내렸다. 나예린은 이진설의 힘없는 사과에 목이 멨다. 그렇게 발랄하고 건강하던 아이가 하루아침에 이렇게 되다 니…….
“누가 널 이렇게 만든 거냐?”
이진설의 손을 놓지 않은 채 나예린이 물었다.
“그, 그 사람을 믿은 내가 잘못이었어요.”
회한이 서린 목소리로 이진설이 대답했다.
“서, 설마…….”
나예린의 얼굴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이진설에게 그 사람이라고 불릴 만한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설마… 효 공자가 그 사람이더냐?”
이진설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이 가져온 것을 먹는 게 아니었어요……..”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할 땐 경계를 했어야 했다며 이진설은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순간이나마 감격했던 제가 바보 같아요. 흑흑!”
이진설이 작게 흐느꼈다. 안쓰러워진 나예린은 손을 들어 이진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다. 살아났으니 된 것 아니니.”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고마웠다.
“하지만… 하지만..
이진설은 아직도 생각만 하면 분하고 억울한 모양이었다.
“그렇게까지 더럽게 맛이 없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으드득!”
이진설이 이를 빠드득 갈며 분노의 일갈을 내뱉었다.
그걸 먹고 난 뒤로 삼 일, 그녀는 끊임없는 복통과 설(삐)와 싸워야 했다. 그동안 얼마나 생사의 경계를 넘었는지 헤아릴 수도 없었다. 그건 음식이 아니라 독이 었다. 아니, 최종 병기였다. 사천당가 최흉(崔凶)의 독(毒)이라는 ‘절대지독’도 그것보다는 덜 독할 게 분명했다.
어떻게 고작 기름과 설탕과 소금과 고기와 야채들로 그런 무시무시한 맹독을 제조해 낼 수 있는지 불가사의가 아닐 수 없었다. 그 가격 대 성능비를 생각하면 분명 사천당가에서도 눈독 들일 게 분명했다. ‘틀림없이 그럴 거야!’라고 이진설은 이를 갈며 생각했다. 그런 생각까지 들게 하는 걸 보면 무시무시하긴 무시무시했던 모 양이다.
‘효룡~ 잊지 않겠다! 이 굴욕! 이 치욕! 내 절대 잊지 않으리! 평생 괴롭혀 줄 테다아! 두 번 다시 부엌에 가까이 가게 하나 봐라! 요리엔 손도 못 대게 해야지. 하지 만 그럼 만날 내가 요리해 줘야 하잖아? .뭐, 그것도 나쁘진 않은가?”
그래도 끝내 헤어진다고는 말 안 하는 이진설이었다. 그래도 대가는 치르게 할 생각이었다.
“책임지세요, 효룡!”
이진설의 한 맺힌 외침에 효룡이 찔끔하며 반문했다.
“채, 책임 말이오?”
“그래요, 책임! 남자라면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죠.”
“하, 하지만 그건 불가항력적인…….?
“시끄러워요! 무슨 남자가 그렇게 변명이 많아요. 자신이 벌인 일은 자신이 책임져야죠!”
“조, 좋소! 책임지겠소! 혼인합시다!”
순간 이진설의 얼굴이 새빨간 사과처럼 변했다.
“호, 혼인이요? 갑자기 혼인은 왜요?”
“아, 그거 아니었소? 책임지라길래 반사적으로 그만…….”
그러고 보니 다행스러운 건지 불행스러운 건지 그런 건덕지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저질! 책임이라면 그런 것밖에 몰라요?”
파리하던 안색에 약간 발간 핏기가 돌아온 이진설이 외쳤다.
“그, 그럼 어떤 책임을…….”
“효룡 당신이 제 대신 나가세요, 투기제에! 여장 하고!”
“여, 여장 말이오?”
이진설의 요구에 효룡은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책임지는 것치고는 이상한 방식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요, 여장! 투기제에 참가할 여자가 필요한데 사람이 없으니 어떡해요. 당신이 여장이라도 해야죠!” 효룡으로서는 청천벽력 같은 말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나 같은 남자가 여장 하면 금방 들킬 거요. 그다지 예쁘지도 않을 거고. 게다가, 게다가…….”
“괜찮아요. 또 알아요? 볼 만할지?”
약간의 기대감을 품으며 이진설이 말했다. 긍정적으로 보면 그런 모습을 한 번쯤 봐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효룡은 그게 죽기보다 싫었다.
“그, 그러지 말고 다른 걸로 책임지면 안 되겠소, 설?”
“안 돼요!”
이진설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제 빈자리를 어떻게든 메워야만 해요.”
효룡은 재빨리 머리를 굴린 다음 말했다.
“그, 그럼 이렇게 합시다.”
빼도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효룡이 다른 타협안을 내놨다.
“나 대신 딴사람이 여장을 하고 거기에 나가는 거요, 어떻소?”
“누가 효룡 당신 대신 나간단 말이에요? 그것도 여장씩이나 하고? 그럴 만한 사람이 있나요?”
“무, 물론이오! 그 사람이라면 실력도 믿을 수 있소.”
그 말을 듣자 짐작 가는 사람이 한 사람 있었다.
“아, 그 사람 말인가요?”
“바로 그 사람이오. 실력도 내가 보증하겠소.”
“하지만 그래선 더 끔찍하지 않겠어요?”
“뭐, 뭐가 끔찍하단 말이오?”
금시초문이라는 듯 효룡이 눈을 끔벅였다.
“그 아저씨 같은 수염 듬성듬성한 장홍 아저씨가 여장이라니… 상상만 해도 소름 끼쳐요.”
몸을 부르르 떨며 도리질 쳤다.
“나, 나도 방금 끼쳤소, 소름. 그, 그럴 리가 없잖소? 어떻게 그 아저씨가 여장 같은 걸 하겠소? 그런 꼴을 봤다가 하루 종일 눈을 씻어야 될 거요.”
그건 매우 끔찍한 경험이 될 것이란 걸 장담할 수 있었다.
“그는 키도 나보다 작고 몸매도 여리여리하니 분명 나 같은 것보다 여장도 잘 어울릴 거요. 보증하리다.”
“그게 누군데요?”
“누구긴 누구겠소, 준호 군이지.”
“아, 화산파의 윤 공자?”
효룡은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말했다.
“바로 그요.”
“흐흠… 윤 공자라…….
확실히 윤준호라면 야리야리해서 여장을 해도 어울릴 것 같았다. 어깨도 효룡보다 훨씬 좁고 키도 아담하게 작았으며 허리도 생각보다 가늘었다. 그리고 피부도 고운 축에 속했다.
“확실히 윤공자라면 효룡 당신보다 더 어울릴 수도 있겠군요.”
“물론이오. 나 같은 것보다 백배는 더 잘 어울릴 거요. 사람들도 분명 잘 속아 넘어갈 거고. 나 같은 건 여장하고 나가도 바로 들킬 게 분명하오. 그러다 실격당하 면 얼마나 당신 언니께 미안한 일이겠소? 안 그렇소?”
이번 설득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마음이 움직인 이진설이 반문했다.
“그런데 나가려 할까요?”
“그건 걱정 마시오, 내가 책임지고 나가게 만들 테니!”
효룡이 가슴을 탕탕 치며 자신있게 외쳤다. 그로서는 배수의 진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시는 게 좋을 거예요. 안 그러면 여장을 하고 나가야 하는 건 당신이 될 테니깐요.”
“무, 물론이오. 꼭, 반드시, 결코 내보내겠소! 맡겨주시오!”
이렇게 해서 윤준호는 친구 대신 팔리는 처지가 되었다. 또 하나의 우정이 종언을 구하는 순간이었다.
‘자, 어떻게 할까? 역시 아저씨의 힘을 좀 빌려야겠어!’
우선 효룡은 거사의 실행을 위해 믿음직한 장홍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