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대 일 대결을 하자!
-녹림왕은 그러지 않았다
원래부터 흑룡왕은 일 대 일 대결을 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는 케케묵고 꽉 막히고 고리타분한 정파 나부랭이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가식적이 되어야 할 필요 성을 전혀 못 느꼈다. 약탈에 무슨 법도가 있겠는가! 물 흐르듯, 바람 부는 듯 그냥 내키는 대로 사는 게 그의 방식이었다(이렇게 말하려니 물과 바람에게 미안할 따 름이다). 쉽게 빼앗을 수 있는 것을 굳이 어렵게 빼앗을 필요는 전혀 없었다.
원래 그들의 양심이나 의리나 자존심에 손톱만큼의 기대도 품고 있지 않았던 비류연은 자신을 포위하고 있는 사내들의 면면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전혀 두려움이 없는 얼굴이었다. 몇몇은 그를 비웃는 웃음까지 머금고 있었다. 자신을 죽이기 위한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연장을 들고 대기하고 있는 이들을 하나씩 하나씩 다 둘 러본 후 마지막으로 흑룡왕과 눈을 마주쳤다.
너무나 침착하고 고요한 그 깊은 왼쪽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흑룡왕은 흠칫했다. 비류연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이거 참 실망이네요. 전에 만났던 녹림칠십이채 총채주이신 녹림왕 임호걸은 이렇게까지 비겁하지 않던데 말이죠. 그분은 참 호탕했는데.”
그 말을 듣고 화들짝 놀란 흑룡왕이 눈을 크게 뜨며 반문했다.
“뭣이라! 네놈이 임가 그놈을 만난 적이 있단 말이냐?”
흑룡왕은 비류연이 기대한 그 이상의 과민한 반응을 보였다. 사실 두 사람은 영원한 경쟁 관계 겸 앙숙 관계였다. 사이가 안 좋다는 말로는 설명이 부족할 만큼 적 대심과 경쟁심을 품고 있었다. 원래 물과 흙은 섞일 수 없는 법이었다.
“그럼요. 전에 우리 일행의 앞길을 막은 적이 있는데 호기롭게 일 대 일 대결에 응해주셨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사실은 사실이었다. 그때 녹림의 왕과 일 대 일 대결을 벌였던 이는 비류연 본인이 아니라 녹림왕의 친자인 진성곤 임성진이었지만 말이다. “그,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
“한 번 겨뤄보더니 그냥 가라 하시더군요. 배웅까지 받았지요. 그때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우리는 물에서 헤엄치는 장강의 붕어 놈들과는 차원이 달라. 우리 산 사나이들은 유쾌상쾌통쾌하지!’라고 말이에요.”
“뭣이라! 붕어라고! 그 산고양이 놈이 우릴 보고 붕어라고 말했다고!”
비류연의 말 몇 마디에 홀라당 넘어간 흑룡왕이 발끈 성내며 외쳤다.
“그럼요. 확실히 붕어라고 했어요. 뭍에 올라오면 숨도 제대로 못 쉬는 머저리들이라고.”
싱글싱글 웃으며 비류연이 대꾸했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속을 긁지 않는 것이 없었다.
“크… 임가 자식! 그놈이 감히……!”
물론 이것들은 비류연이 지어낸 말이었다. 하지만 아마 짐작컨대 녹림왕은 진짜 그런 마음을 품고 있을 게 분명했다.
흑룡왕은 고개를 숙이고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젠장! 저건 십이 할 도발인데. 임가, 그놈은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이나 벌여서 이 몸을 번거롭게 만들고 지랄이야! 임가 놈 이름이 나왔으니 물러설 수도 없잖 아, 젠장! 자존심이 있지! 게다가 애들이 뒤에서 눈깔 부라리고 있는데 여기서 뒤로 뺐다간 어디 위엄이 서겠나!’
그랬다간 앞으로 부하들을 관리, 통솔하는 데 애로 사항이 꽃필 게 분명했다. 도적들이란 원체 태생부터 충성심과는 담 쌓고 사는 놈들이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흑룡왕이 마침내 결심이 섰는지 가슴을 활짝 펴며 말했다.
“좋다! 본좌가 이번만큼은 특별히 네 도발에 넘어가 주도록 하마!”
이미 녹림왕 임가의 이름이 나왔을 때부터 그는 물러날 수 없는 입장이 되었다. 부하들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는 가운데 꼬리 마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어불 성설이었다.
“좋아요. 물에 사는 분답게 시원시원해서 좋군요. 그래야 일파의 종주죠!”
겉으로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줬지만 속으로는,
‘바보!”
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비류연으로선 자신의 뜻대로 일이 술술 풀려가니 어쨌든 기분은 좋았다. 그런데 왜 사부한테만은 제대로 먹히지 않는지 그것이 의문이었 다.
‘설마 저런 애송이에게 질 리가 있겠는가!’
많은 사람이 비류연을 앞에 두고 그랬듯, 흑룡왕 역시 그를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우를 똑같이 범하고 말았다. 그것은 비류연이 오히려 원하는 바였다. 자기 밑 천 다 드러내 놓고 장사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자, 그럼 빨리 준비하세요. 나도 후딱 끝내고 가서 자야 하거든요, 하암!”
하품을 한 번 하고 난 후 비류연은 임시로 들고 나온 쇠몽둥이 정신봉을 자연스럽게 늘어뜨렸다.
“얘들아, 그걸. 가져와라!”
흑룡왕의 명령에 가마를 매고 있던 네 명의 장정이 끙끙거리며 다가오더니 그의 앞에 가마를 내려놓고는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는 네 명이 합심하여 그 안에서 무 언가를 꺼내기 위해 또다시 끙끙거렸다.
“빨랑빨랑 좀 해라. 굼벵이를 삶아 먹었냐?!”
그 느려터진 모습이 답답했는지 호통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조금쯤은 더 빨라졌는데 그래 봤자 오십보백보였다. 네 명의 장정이 가마 안에서 간신히 무언가를 꺼 내 들어 자신들의 두목에게 가져다 바쳤다.
“웃차!”
네 명의 장정이 버거워하는 그 무지막지한 물건을 흑룡왕은 가볍게 한 손으로 받아 들어 어깨에 걸쳤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거대한 쇳덩이였는데, 동그란 구멍에 굵은 쇠사슬이 길게 연결되어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 모양의 쇳덩인데?”
그건 바로 배를 물 위에서 고정시킬 때 쓰는 닻이라는 물건이었다.
“크하하하하! 놀랐느냐? ‘철혈묘(鐵血猫)’라는 물건이지. 바로 이 본좌의 독문병기이시다!”
흑룡왕이 오만하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무식이 철철 흐르는 무기네요.”
비류연이 짧게 촌평했다.
“꼭 저런 무식한 걸 무기로 써야 강해 보이나?”
그가 보기엔 그저 무겁고 둔한 쇳덩이일 뿐이었다. 울퉁불퉁한 근육으로 다져진 흑룡왕의 몸 역시 저 무기를 다루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크하하하하하! 이것이야말로 남자의 힘이지!”
흑룡왕은 어깨에 걸쳐 메고 있던 철혈묘를 땅에 힘차게 내리꽂았다.
쿵!
대지가 지진이라도 난 듯 부르르 떨었다. 동시에 그의 가슴 근육과 팔 근육도 함께 실룩실룩, 불끈불끈 요동쳤다.
“보기만 해도 덥네.’
저런 것을 보기 위해 눈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눈이란 건 보다 많은 것을 보고 느끼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보고자 한다면 세계의 본모습까지도 보여줄 수 있으리라.
“나중에 예린을 보며 씻어내든지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악몽이라도 꿀 것 같았다. 아름답고 좋은 것만 보고 살고 싶지만, 역시 세상은 만만치가 않다.
“자, 시작할까?”
득의만면한 미소를 지으며 흑룡왕이 말했다.
“아빠, 그런 싸가지없는 놈 따윈 그냥 죽여 버려요!”
딸 해어화가 주먹을 흔들며 소리쳐 응원했다.
“으하하하하! 걱정 말고 이 아빠만 믿어라!”
그런 응원도 좋은지 입을 헤벌쭉 벌리며 마주 손을 흔들어주는 모습이 아주 가관이었다.
“하아~ 내 팔자야~ 이래서 무료 봉사는 싫었는데……”
비류연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런 돈도 안 되는 공짜 노동을 한시라도 빨리 끝내 버리고 좀 더 생산적인 일을 하고 싶었다.
“빨리 끝내고 집에 갑시다.”
비류연이 한숨을 그치지 않은 채 한마디 했다.
“얘들아! 다들 물러나라! 두목님께서 움직이신다. 가까이 있으면 위험해!”
장강수로십팔채의 세 호법 호강(江), 호하(護河), 호천(呼天) 중 선두에 서 있는 호강이 명령하자 흑룡왕의 부하들이 모두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 들은 무엇인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들은 커다란 위협을 피하는 초식동물들 같았다. 마지막으로 세 명의 호법이 물러났다.
찰그랑!
흑룡왕이 쇠사슬을 가볍게 한 번 흔들어본 다음, 근육질로 뭉쳐진 오른손으로 지면에 내려진 닻을 끌어 올렸다. 장강 수천 리 길을 부르르 떨게 만든 철혈묘라 불 리는 악명 높은 물건이었다.
그는 이 쇠닻을 사정없이 휘두르며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모든 적들을 쓸어버렸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쇠닻의 광풍을 막아낼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것이 가진 엄청난 무게가 속도를 만나며 가로막는 모든 병기를 분쇄했다. 아무리 쇠처럼 질긴 묵린혈망의 가죽을 특수하게 가공하여 만든 현천은린이라 해도 이 닻의 화
살촉 같은 양 끝머리에 맞으면 무사를 장담할 수 없었다.
‘아참, 지금은 그것마저도 없었지!’
비류연은 신중하게 접근하기로 했다.
“그런 걸 잘도 무기랍시고 들고 다니는군요. 누가 무식한 해적 아니랄까 봐.”
일단 말로 시작했다.
“흥, 무서우냐? 지금이라도 땅바닥을 벌벌 기며 용서를 빌면 용서해 줄 수도 있다. 크하하하하!”
“꿈도 크시군요.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으니 걱정 말아요, 해적 아저씨.”
비류연이 가볍게 코웃음 치며 말했다.
“본좌를 해적이라 부리지 마라! 본좌는 수왕(王)이다! 그리고 장강의 지배자다!”
흑룡왕이 분개하며 외쳤다.
“본좌 참 좋아하시네요. 본좌라고 하지 않으면 안 세 보이나 보죠?”
본좌 본좌 해봤자 비류연에겐 아무런 권위도 없는 말이었다. 아니, 웃음거리로나 삼으면 딱 좋을 그런 말이었다. 얼마나 내세울 게 없으면 스스로 부르는 호칭 따 위에나 연연한단 말인가. 가진 게 아무것도 없으니 형체도 없는 신기루 같은 호칭에 집착하는 것 아니겠는가.
“본좌가 어때서! 좋다. 그렇다면 힘으로 증명해 주마!”
역시 마지막엔 모두 힘으로 귀결되는 모양이었다. 그는 힘으로 적을 섬멸했고, 힘으로 지금의 자리에 올랐으며, 앞으로도 힘으로 그 자리를 유지할 예정이었다. “역시 그것밖에 없는 모양이군요. 별로 우아한 방법은 아니지만..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일.
비류연은 자신이 새롭게 이름을 부여한 쇠몽둥이 ‘구타각성(狗打覺醒’을 들어 흑룡왕의 얼굴을 정면으로 가리키며 선언했다.
“약속하는데, 아저씨의 그 무식한 쇳덩이는 내 옷자락 하나 스치지 못할 겁니다.”
“시건방진 놈! 실로 광오하구나! 본좌도 약속하마! 네놈은 이 철혈묘에 얻어맞아 피떡이 될 것이다!”
누구 말이 맞을지는 직접 부딪쳐 보지 않는 이상 모를 일이었다.
“시작하기 전에 이것 하나만은 확실히 해두죠.”
“또 뭘?”
흑룡왕이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언제나 기분 내키는 대로 적들을 때려잡아 온 그로서는 싸우기 전에 왜 이렇게 번거로운 절차를 거쳐야 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 다. 맨 처음 협박을 하고, 듣지 않으면 죽인다. 그러면 모든 재물은 그의 것이 되었다. 공정은 더할 나위 없이 간단했다. 그는 그렇게 탐욕스럽게 자신의 것을 넓혀왔 다.
“성급하긴. 잠자코 들어봐요. 수적 아저씨가 이기면 배를 그냥 주죠. 하지만 내가 이기면 배 세 대분 대금을 확실히 지불할 것. 이의없겠죠?”
“이의없다! 하지만 본좌도 조건이 있다!”
“뭐죠?”
“본좌가 이기면 애송이, 네놈의 목숨도 함께 받아가겠다!”
비류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좋으실 대로.”
어차피 배를 못 팔아 가면 사부가 가만히 있을 리도 없었다.
“아, 그리고 마지막.”
“아씨, 또 뭔데!”
비류연이 상큼하게 웃으며 말했다.
“한 번만 더 날 ‘애송이’라고 칭하면 그 더러운 이빨을 몽창 부러뜨려 주겠어요.”
무식(無識), 무참(無慘), 무자비(無慈悲)!
장강수로십팔채의 채주 흑룡왕의 무공을 짧게 표현하자면 이 세 마디로 요약할 수 있었다.
비류연도 이런저런 무식한 무기들을 병기랍시고 쓰는 인간들을 많이 봐왔지만 흑룡왕에 비하면 모두들 조족지혈에 불과했다. 그의 무공은 섬세함과는 가장 머나 먼 곳에 동떨어져 있었고, 정묘함과는 헤어진 지 오래였다. 무식함과 무자비함에 있어서 그는 단연 압도적이었다. 비록 무식함이라도 궁극에 이르면 일파의 종주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였다.
하지만 역시 우아하진 못해!’
붕붕붕! 콰직! 쾅! 콰직! 쾅! 콰직! 쾅!
불끈불끈 근육으로 뭉쳐진 오른손을 높이 들어 쇠사슬을 휘두르자 닻에 걸린 아름드리나무들이 몽땅 부러져 나갔다. 흑룡왕은 환경 문제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러니 그걸 파괴하는 데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붕붕붕!쾅! 쾅! 쾅!
쇠사슬 끝에 달린 닻의 속도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파괴 행위는 더욱 가속되고 자연은 무참히 도륙되어 갔다. 자칫 잘못하면 부하들까지도 휩쓸고 들어가 버릴 것 같았다. 그의 방식은 간단했다. 자신의 힘이 미치는 모든 곳을 무자비하게 초토화시키면 그 안에 있던 적도 함께 섬멸된다는 식의 생각이었다.
‘저러니 다들 도망가지.’
슬금슬금 꼬랑지를 말고 몸을 피한 부하들은 멀찌감치 뒤로 물러난 채 구경만 하고 있었다. 그들도 생존 본능이 있어서 아는 것이다, 저 무식한 지랄발광에 끼어들 었다간 뼈도 못 추린다는 것을. 그들의 지배자는 남과 함께 싸울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으하하하하하! 어떠냐? 무섭냐? 무섭지?! 으하하하하! 뼈와 살을 한데 버무려 주마!”
콰과과과쾅!
말하는 도중에도 철혈묘는 쉬지 않고 주위를 파괴해 나갔다. 주변의 경관을 급격토로 변경시키는 파괴의 파도가 비류연을 향해 조금씩 조금씩 점점 더 가까이 다 가왔다.
“하암…….”
묵묵히 그걸 보고 있던 비류연의 입에서 하품이 터져 나왔다. 참거나 하는 일 없이 편하게 하품을 한다. 그만큼 지루한 것이다. 사부를 만난 여파가 큰 모양이었다. 무언가 극(極)에 이른 걸 본다는 것은 호강이기도 하지만 비극이기도 하다. 이미 최고를 알게 되면 되돌아갈 수 없다. 한 번 높여진 눈높이는 쉽사리 내려가려 하지 않는다. 특히나 그것이 자기 앞 저 멀리 가고 있는 존재일 때는 두 가지로 반응하게 된다. 하나는 감탄과 존경을 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증오와 좌절이다. 자신 이 만난 최고의 것을 산이라 생각한다면 그는 그 산을 오를 수 있다. 하지만 하늘에 떠 있는 해와 달이라 생각해 버리면 쫓아가지 못하고 좌절하고 만다. 자기는 절 대 따라잡을 수 없다고 마음속에 결정이 나버리기 때문이다. 물론 땅바닥에서 좌절한 채 궁상떠는 취미는 없었다. 그러나 수준 차가 비교되다 보니 지루한 것만은 참을 수가 없었다.
사부를 능가하고 싶다. 오랜 세월 품어왔고, 요 며칠간 더욱 증폭되어 상기된 그 길에 도움을 줄 만한 존재가 아니면 싸울 가치도 없었다. 싸울 가치가 없는 싸움, 서로 도움이 안 되는 싸움, 서로 교류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싸움은 그저 지루한 노동에 불과할 뿐이었다.
‘힘들겠군.’
저렇게 힘과 수고를 많이 들여 협박을 하다니, 낭비도 저런 낭비가 없었다. 그냥 서 있기만 해도 그 존재 자체만으로 두려운 사람이 있는 반면, 아무리 으름장을 놓 고 힘자랑을 벌여놓아도 콧방귀만 나오는 사람이 있었다.
“으하하하하! 지금이라도 항복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너무 눈에 빤히 보이는 수작이라 귀엽지도 않았다.
“그건 즉, 목숨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장할 수 없다는 이야기잖아요?”
“그건 그렇지, 흐흐흐흐!”
흉한 괴소를 흘리며 흑룡왕이 대꾸했다.
“눈알을 뽑든 팔다리를 자르든 노예로 팔든 무슨 상관이겠어요? 어쨌든 목숨만은 붙여주는데. 안 그래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은 채 비류연이 말했다.
“어쩜 그리도 이 본좌의 마음을 잘 아느냐? 바로 그럴 생각이다!”
흑룡왕의 외침이 떨어지는 순간 ‘출렁’ 쇠닻이 변화를 보였다.
해폭난파(海暴亂波)!
부우우우우우우웅!
쇠사슬 끝에 매달려 있던 쇠닻이 단두대의 칼날처럼 날카롭게 비류연의 몸을 찢어발기기 위해 무시무시한 파공성을 내며 달려들었다.
“하암, 느려 터졌네요.”
아무리 빨라봤자 위력을 위해서 대부분의 빠름을 희생한 철혈묘의 움직임은 비류연의 눈에 하품이 날 정도로 느리고 단순해 보였다. 그런 공격을 피하는 것은 비 류연에게 일도 아니었다. 빨리 이 지루하고 영양가없는 노동을 끝내고 예린이 기다리고 있는 숙소로 돌아가자고 싶었다.
그때 흑룡왕이 소리쳤다.
“과연 그럴까?!”
그런데 예기치 못한 변수가 발생했다.
파바바박!
단순한 공격이라 생각했던 철혈묘의 그림자가 하나에서 셋으로 분화되었다. 일종의 무기 분신 공격으로 셋 모두 거의 실체와 같은 위력을 발휘한다. 그리고 그 사 정권 안에 비류연도 들어 있었다. 이 기술은 순간적으로 유효 사정거리를 광범위화하는 비술이었다.
“……!”
허를 찔렸다. 설마 저런 무식한 공격이 분영(分影)을 만들어낼 줄이야! 그러나 그렇다고 돌발 사태에 멍하니 있다가 갈가리 찢겨져 나가는 것은 취향이 아니었다.
비뢰문(飛門독문신법(獨門身法).
봉황무(鳳凰舞) 오의(奧義).
삼첩영(三疊.
이에는 이, 잔상에는 잔상! 분영에는 분영! 비류연의 그림자가 순식간에 셋으로 분리되었다. 상대의 공격 방향이나 시간차에 따라 이 셋 중 어느 것이든 하나가 실 체화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셋 중 하나가 실체화되는 순간 나머지 둘은 허상이 되어 적의 공격에 휩쓸려도 타격을 입지 않는다. 일시적으로 실체를 셋으로 늘여 유효 범위를 넓히는 해폭난파보다 한 실체와 두 허상을 순식간에 바꿔칠 수 있는 삼첩영 쪽이 수준 면에서 보면 한 단계 더 높은 기술이라 할 수 있었다
스르륵!
콰콰콰콰
삼첩영의 세 번째 그림자는 아슬아슬하게 해폭난파의 유효 범위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역시 거대 흑도 세력의 우두머리답게 병아리 삐약삐약대는 천무학관의 애송이들과는 수준이 달랐다.
“이… 이럴 수가! 해폭난파를 피해내다니……
저런 나약해 빠져 보이는 애송이가 자신이 자랑하는 무차별 파괴술의 마수에서 벗어날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이런 무식한 기술쯤이야 나처럼 지적인 사람에게 걸리면 무용지물이죠.”
사뿐히 지면에 내려선 비류연이 약간 조롱기 섞인 말투로 말했다.
“이익! 겨우 그거 하나 피해냈다고 자만하지 마라! 본좌의 무공이 그게 끝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니까. 이번에 더 큰 파도를 보여주마!”
저런 어린 애송이한테 비웃음을 당했다고 생각하니 흑룡왕은 눈알이 까뒤집힐 것처럼 분했다.
‘죽여주마, 애송아!’
다시 한 번 내공을 있는 힘껏 짜내며 힘차게 쇠사슬을 돌리기 시작한다.
부웅부웅부웅!
또다시 그의 머리 위에서 무시무시한 풍차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워낙 큰 기술이다 보니 허점이 많은 것 같기도 했지만, 이외로 기술을 시전 중인 흑룡왕의 몸에는 이렇다 할 허점이 없었다. 지면에 바싹 붙어 무시무시한 파공성을 내며 돌아가는 쇠닻의 풍차가 이 안에 들어온 모든 것을 분쇄하겠다고 선언하며 그것을 가로막고 있었다.
‘쳇, 비뢰도만 있었어도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이런 무식한 쇠몽둥이로 구현할 수 있는 무공에는 한계가 있었다. 특히 거리 면에서 문제가 컸다. 마치 자신의 팔이 한없이 짧아진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일단 저 간격 안으로 뛰어들어야겠지.’
물러서면 물러설수록 이쪽의 승기는 없었다.
“어떻게 하지??
우격다짐 힘으로 밀어붙인다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그것은 그다지 우아한 해결책이 아니었다.
“이크, 얘들아, 좀 더 뒤로 물러나라! 파도가 온다!”
호법 중 볼에 상처가 있는 남자 호하가 외쳤다. 그는 아무래도 이다음에 무엇이 올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후다닥!
호법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부하들 역시 재빨리 서 있던 곳보다 훨씬 뒤로 물러났다.
“흐합!”
다시 한 번 우렁찬 기합 소리가 터져 나옴과 동시에 쇠닻이 날아올랐다.
“광풍노도(狂風怒濤)!”
흑룡왕의 기합성과 함께 수직으로 날아올랐던 쇠닻이 비류연의 머리 위로 급전직하했다. 저런 무식한 걸 이런 쇠몽둥이 하나로 막기엔 무리가 있었다. 공들여 만
든 현천은린을 쓴다 해도 멀쩡할 수 없었다. 그것은 날카로움에는 강하지만 저런 무지막지함에는 약했다. 그러나 걱정하진 않았다.
“풋! 이따위 것, 눈 감고도 피하겠네!”
아무리 위력이 강맹하다 해도 맞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 말을 몸소 증명이라도 하듯 왼발로 바닥을 살짝 찍으며 몸을 뒤로 물렸다.
“크하하! 피할 거란 예상은 이미 하고 있었다!”
흑룡왕이 의기양양한 외침을 터뜨리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뭐?”
콰콰ᅳ 쿠쾅!
거대한 강철쇳덩이인 쇠닻이 비류연이 서 있던 장소에 직격했다. 그러자 귀를 먹먹하게 하는 굉음이 울려 퍼지며 흙더미의 파도가 해일처럼 일어나 비류연을 덮 쳤다. 조금 전 무식해 보이던 일격은 이 흙파도를 일으키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이런!”
그제야 비류연은 왜 이 초식의 이름이 광풍노도인지 알 수 있었다. 흙파도와 함께 일어난 먼지폭풍 때문에 시야가 거의 가려져 버렸다. 비류연은 투덜거리며 쇠몽 둥이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안 보이잖아!”
그대로 내리긋는다. 쇠몽둥이의 궤적이 직선을 그린다.
서걱!
그 일격은 솟구쳐 오는 파도와 불어닥치는 바람을 거짓말처럼 반으로 갈랐다. 비류연은 뒤로 피신하지 않고 날아오는 흙파도를 향해 정면으로 몸을 날렸다.
비뢰문(飛門) 독문신법(獨門身法).
봉황무(鳳凰舞) 오의(奧義).
섬전일시(閃電矢).
갈라진 흙파도의 빈틈 사이로 비류연은 한줄기 섬전이 되어 쏘아져 나갔다.
“헉! 이런 씨발이!”
해석하면 ‘헉! 이런! 말도 안 되게 바보 같은 일이 벌어질 순 없어!’라는 뜻의 경호성을 터뜨리며 흑룡왕은 철혈묘를 급히 회수해 방어 태세에 들어갔다. 설마 저 애송이가 이렇게 대담한 방식으로 자신의 간격 안으로 파고들어 올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보통 이 광풍노도의 초식에 맞닥뜨린 인간들은 당황하여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빼게 된다. 자신의 키 높이만큼 높은 흙파도를 맞닥뜨리고 보면 자연스레 그런 마 음이 들게 된다. 그것이 이 수법이 노리는 바였다. 그렇게 몸을 뒤로 날리는 적의 시야는 먼지폭풍에 의해 어두워져 주위를 쉽게 분간할 수 없다. 그 틈에 사신의 낫 이나 사형대 위의 작두처럼 철혈묘의 첨단이 우왕좌왕하는 그 몸에 내리꽂히게 된다. 그때는 이미 때가 늦어 막아도 소용이 없다. 막으면 막는 대로 병기와 함께 적 의 신체를 으스러뜨리고 부숴 버리는 게 바로 철혈묘의 진정한 저력이었다.
알아도 소용없고, 막아도 소용없다. 부딪친 자에겐 오직 파멸만을 선물해 줄 뿐이었다. 이 무시한 무공이 흑룡왕 그를 지난 이십 년 동안 장강수로채의 지배자로 군림시킨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었다.
그런데 설마 그 초식이 저런 어린 애송이에게 깨뜨려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허를 찔린 흑룡왕은 서둘러 몸을 뒤로 날렸다. 그러나 ‘기우뚱!’ 너무 급히 움직이는 바람에 균형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런 자세면 다음에 이어질 초식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지. 좀 부주의했네.’
흑룡왕이 불끈불끈한 근육을 써서 휘두르는 철혈묘의 위력은 무지막지하게 강맹하지만, 그런 만큼 대지에 굳건하게 발을 디디고 있지 않으면 제대로 부릴 수가 없 었다. 중심이 흐트러지면 철혈묘에 되레 끌려 다닐 위험성이 항상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승부, 나의 승리인 것 같군요!”
상대가 놓쳐 버린 승기를 잡는 데 주저함이 있을 리 없었다. 이제 두 사람 간의 거리는 일 장도 채 안 되었다. 이미 균형을 잃은 흑룡왕이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잡고 반격에 나서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그러나…
“아직이다!”
그도 흑도방파의 정점에 서 있는 자였다. 이런 비상사태를 대비한 비장의 한 수가 그에는 존재했다. 그는 어깨에 걸머메고 있던 철혈묘의 첨단 부분을 비류연의 코 앞에 갖다 댔다.
철컹!
“…….?”
쇠닻의 첨단 부분이 덜컹 열리며 주먹만 한 검은 구멍이 드러났다. 어둡고 깊은 구멍을 본 순간, 오싹!
비류연의 등줄기를 타고 차가운 한기가 뇌전처럼 훑고 지나갔다.
“이건 위험하다!’
본능적으로 비류연은 정신봉을 들어 몸의 중심에 세웠다. 곧추세운 정신봉 너머로 흑룡왕의 회심 어린 미소가 흘낏 보인 것 같았다.
홱!
흑룡왕은 검은 구멍을 연비에게 조준한 채 철혈묘에 달린 끈 하나를 재빨리 잡아당겼다.
쾅!
천둥치는 듯한 굉음과 함께 어깨에 둘러멘 쇠닻의 검은 구멍으로부터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터엉!
휘이이이이이익!
지근거리에서 포탄에 맞은 비류연의 몸이 끊어진 연처럼 훨훨 오 장 밖으로 날아갔다.
“크하하하하하! 어떠냐, 벽력포 맛이!”
발사의 반동으로 이 장쯤 더 뒤로 물러난 후 간신히 자세를 잡은 흑룡왕이 외쳤다. 그의 머리카락에는 먼지와 지푸라기가 여기저기 묻어 있고, 검은 비단옷 역시 먼지로 더럽혀져 있었는데, 그건 불안정한 자세로 대포를 쏜 탓에 바닥에 두어 번 뒹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금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흑룡왕은 자신에 찬 광소 를 터뜨렸다. 그는 이제 승자였기에 무얼 해도 괜찮았다.
오 장 밖으로 날아간 비류연의 머리는 곧 땅에 거꾸로 부딪칠 운명에 놓여 있었다. 아무리 비류연이라 해도 저렇게 무방비로 추락해서는 뇌수가 튀어나오는 것을 방지할 수 없었다. 그러나 땅에 거꾸로 처박히려는 찰나 휘릭 비류연은 몸을 한 번 뒤집더니 발끝으로 지면에 사뿐히 착지했다. 흑룡왕이 그 모습을 보곤 경악하며 외쳤다.
“마, 말도 안 돼! ‘벽력포(霹靂砲)’를 정면으로 맞고 멀쩡하다니!”
철혈묘 안에 숨겨진 벽력포는 작지만 그 위력은 대구경 대포 못지않았다.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어지간한 큰 배도 그것 한 방이면 측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릴 터였다. 그러니 그걸 인간의 몸으로 정면에 맞으면 배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야 정상이었다.
“콜록콜록! 우와! 이번 건 진짜 위험했어요. 휘유~ 죽을 뻔했네.”
비류연이 연신 기침을 터뜨리며 투덜거렸다. 그 말은 아직 멀쩡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확실히 이번 것은 위험했다.
‘설마 그런 걸 숨기고 있을 줄이야…….’
역시 승부의 세계에선 방심하면 곧바로 죽음으로 직결될 수 있었다.
“이 일은 사부한테 비밀로 해야겠다!’
그렇게 결심했다. 만일 알려졌다가는 무슨 놀림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살아난 거냐, 이 애송이 녀석? 설마 네놈이 금강불괴라도 된다더냐?”
흑룡왕의 경악 섞인 외침에 비류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이런 연약한 몸이 그런 무식한 무공을 익힐 리 있겠어요.”
금강불괴로 가는 과정은 무식에 무식을 넘어서는 장대한 과정이라고 했다. 쇠몽둥이로 온몸을 두드리는 건 예사인 것이 그 수련 과정이었다.
“그, 그럼 어떻게?”
“답은 정면으로 안 맞았으니깐, 이죠.”
그러면서 비류연은 쇠몽둥이를 들어 보였다. 가운데 부분이 옴폭 휘어져 있었다. 그나마 흘려보냈기에 망정이지 정통으로 맞았으면 멀쩡하기 힘들었으리라.
“휴우, 다행히 부러지지는 않았네요. 손에 느껴지는 압력 때문에 부러지는 게 아닌가 걱정했거든요.”
“그런 쇠몽둥이 하나로 이 벽력포를 막았다고? 개소리 하지 마라!”
“바보같이. 정면으로 안 맞았다고 했잖아요. 포탄이 이 철봉에 부딪치는 순간 손목을 살짝 비틀어 회전을 준 다음 방향만 틀었을 뿐이에요. 알겠어요, 멍청한 해적 아저씨?”
그 짧은 순간에 반사적으로 그런 일련의 행동을 할 수 있다니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흑룡왕은 쉽사리 믿음이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 꼼수를 써서 실패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좀 전엔 기습을 당해서 좀 당황하긴 했지만 이제는 통하지 않을 거예요, 그거.”
손가락으로 아직도 초연이 피어오르고 있는 쇠닻을 가리키며 비류연이 경고했다.
“이 벽력포가 통하지 않는다고?”
“그럼요. 못 믿겠으면 시험해 보던가.”
“오냐! 시험해 보마!”
벽력포의 구멍이 정면으로 자신을 향하는데도 비류연은 다시 똑바르게 편 쇠몽둥이를 늘어뜨린 채 조용히 서 있었다.
“피하지 않는 거냐? 쏜다?”
흑룡왕이 위협했다.
“좋으실 대로.”
비류연이 아무렇게나 대꾸했다. 지금 그의 관심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흐음, 그러니까 어떻게 베는 거더라……?”
사부가 보여줬던 간단한 몇 가지 동작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맨 처음 보여줬던 작은 비도로 나무토막을 잘라 자신을 놀라게 했던 것부터, 갈댓잎 하나로 쇠를 베 어내던 모습까지… 별로 힘도 안 들이고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 일들을 해냈다.
“이런 건 그냥 심심풀이 묘기 같은 거다. 원래는 검을 들기도 전에, 휘두르기 전에 이겨야 하는 거라는 걸 명심해라. 일일이 귀찮게 어떻게 싸우냐? 안 그러냐?”
그때 본 것이 꿈이 아니라면 들고 있는 물건이 무엇이든 검이 될 수 있었다.
“먼저 마음으로 벤다. 몸은 단지 거들 뿐!”
마음속에 한 자루의 검이 생겨났다. 모든 것을 베어내는 날카로움의 정화. 다시 한 번 도화선을 당기는 흑룡왕의 모습이 매우 느리게 보였다. “네놈의 무모함! 지옥에나 가서 후회해라!”
쾅!
다시 한 번 천둥이 쳤다. 불꽃의 배웅을 받으며 벽력탄이 날았다. 이번엔 특제 뇌탄으로 내부에 화약이 잔뜩 들어간 놈이었다.
(단)!
비류연이 늘어뜨려 놓은 쇠몽둥이를 아래에서 위로 수직을 그리며 올려 그었다. 사나운 바람이 비류연이 몸을 때리고 지나가자 그의 머리카락이 파르르 날렸다. 다음 순간, 비류연의 등 뒤 호수 양편에서 콰쾅, 울리는 굉음 소리와 함께 두 개의 물기둥이 솟아올랐다.
오싹!
그것을 본 흑룡왕의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이 담 큰 사내의 등골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말도 안 돼! 내가 지금 저런 꼬마 녀석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고……??
부정해 봤지만 몸의 반응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비장의 수는 이제 바닥이 나버려 더 이상 쓸 게 남아 있지 않았다.
‘서… 설마 저런 뭉툭한 쇠몽둥이로 날아오는 벽력탄을 그 자리에서 반으로 가르다니……!’
이게 무슨 귀신 곡할 노릇이란 말인가. 어떻게 저런 허접한 쇠몽둥이로 날아오는 포탄을 가르는 신묘한 재주를 부릴 수 있단 말인가. 저것이 쇠몽둥이의 묘용일 리 는 없었다. 저건 순수한 개인의 솜씨였다. 그것도 신기(神技)에 가까운 경지였다. 저건 신공이나 그런 것이 아니었다. 수만 번의 반복 속에서 피어난 깨달음을 토대 로 한 기술의 정화였다. 벤다는 것에 대한 이치를 깨닫지 못한 자는 도달할 수 없는 경지였다. 그렇다면 정면으로 싸우는 걸 포기하고 협상으로..
“그럴 리가 있겠냐, 바보야! 아직 안 끝났다!!”
이대로 물러서면 그의 위상은 장강 수면 밑바닥으로 가라앉고 만다. 죽으면 죽었지 물러설 수 없었다.
철컥!
다시 한 번 벽력포를 들어 비류연을 겨누었다. 사실 이 벽력포 안에는 총 세 발의 벽력탄이 장전되어 있었는데,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비류연의 움 직임이 빨랐다. 묘기는 한 번으로 충분했다. 그다음은 이길 생각을 해야 했다.
슈욱!!
어느새 쇠몽둥이의 끝은 철혈묘의 검은 구멍 안으로 빨려 들어가 있었다. 기겁한 흑룡왕이 철혈묘를 버리고 몸을 뒤로 날렸다.
그 순간 ‘쾅!’ 하는 굉음과 함께 철혈묘가 부서졌다.
“역시 아무리 단단한 쇳덩이라 해도 내부에서의 폭발엔 견딜 수 없는 모양이군요.”
그런 부분은 저런 무기나 거대한 조직이나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이… 이럴 수가…….”
그의 분신 같은 독문병기가 허무하게 부서지자 흑룡왕은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업할 때 쓰던 배를 잃더니, 이번에는 그의 상징과도 같은 철혈묘를 잃어 버렸다. 밑천이 거덜나고 있는 중이었다.
“이제 끝났죠?”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고 항복하란 말이었다. 이 정도까지 했으면 귀머거리가 아니니 알아들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비류연의 오산이었다. 그의 귀는 훨 씬 더 꽉 막혀 있었다.
“아직 안 끝났어! 내겐 이 쇠사슬이 남아 있다! 숨겨진 단도도 몇 개 있다! 암기도 있어! 그러니 아직 끝난 게 아냐!”
흑룡왕이 신경질적으로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추하군요. 물러날 때를 알아야 장부라는 말도 몰라요? 이미 끝난 일을 가지고 발버둥 치다니 볼썽사납군요. 패배를 인정하는 것도 용기죠.”
흑룡왕이 바닥에 침을 뱉으며 거칠게 외쳤다.
“카악! 퉤! 뭐라 해도 좋다! 날 땅바닥에 쓰러뜨리지 않는 이상 끝난 게 아냐! 흑도의 끈질김이 무엇인지 보여주마! 최후에 일어서 있는 자가 승리자야!”
“뭐, 그거야 동의하지만.. 그렇다면 소원대로 누가 최후에 서 있는 사람인지 확인시켜 드리죠. 더 이상 수긍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그러면서 쇠몽둥이를 들어 중단세를 취했다. 비류연의 의식이 검끝으로 집중되어 갔다.
“마지막인 만큼 화려하게 장식해 드리죠.”
그게 비류연이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였다.
“쉽게 안 될 거다, 이 애송이 놈아!”
흑룡왕은 마지막 남은 자존심인 쇠사슬을 붕붕 돌리며 비류연에게 맞섰다.
‘좀 전에 이렇게 벴었지, 아마?”
비류연은 마음이 가는 대로 몸을 움직였다. 무기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마음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러나 의식하지 않는 동작을 기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저 ‘느낌’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비류연이 하고자 하는 것도 그 ‘느낌’의 재생이었다. 깨달음이란 이론이 아니라 느낌이며 체험이기 때문에 남과 공유할 수 없는 것이다. 마음이 움직인 궤도를 따라 쇠몽둥이가 지나갔다. 마음이 먼저였는지 몸이 먼저였는지, 아니면 둘이 동시였는지 기억나지는 않는다. 쇠몽둥이가 아름다운 호를 그리며 나아갔다.
투두두두둑!
그 순간 벌어진 일은 흑룡왕의 인지의 범위를 벗어난 것이었다. 무척 쉬운 듯 별 힘 안들이고 움직이는 곡선에 부딪친 흑룡왕의 쇠사슬이 썩은 동아줄처럼 동강동 강 잘려 나갔다.
“이게 뭐지?”
이제는 더 이상 놀랄 힘도 없었다. 그저 의혹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비류연은 지면을 박차며 흑룡왕에게로 뛰어들었다. 자랑하던 무기를 잃은 흑룡왕은 거의 무방비나 다름없었다. 특히 그의 마음은 연속적인 정신적 충격으로 공황 상태에 가까웠다. 달려가는 비류연의 손에 움켜쥔 쇠몽둥이가 푸르스름한 빛을 발했다. 흑룡왕에게 비극이었던 건 타격각성 정신봉이라 이름 붙은 이 쇠몽둥이가 개방이 자랑하는 개 패는 막대기보다 훨씬 더 단단하다는 점이었다. 슈우우우우욱!
타격각성 정신봉을 향해 기가 모여들었다. 비류연의 팔 근육이 자유롭고 현란한 매타작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급속도로 이완되기 시작했다.
스스로 유연한 사고방식의 소유자라고 자처하는 비류연은 배울 게 있다면 제자들한테도 배운다는 주의였다. 과거 비류연에게 크나큰 감명을 준 초식이 하나 있었 는데, 그것은 바로 노학이 펼친 타구봉법의 최후 초식이었다. 예전에 노학이 쓰는 걸 본 적이 있었다. 그거 마지막 초식 이름이 뭐였더라……? 꽤나 호쾌한 이름이 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마 ‘천하무견’, 아니, ‘천하무구’라는 이름의 초식이었을 것이다. 하늘 아래에 존재하는 모든 개를 때려잡겠다는 장대하면서도 패기 넘치는(?) 기상이 가득한 궁 극의 기술이었다. 그것을 보고 비류연은 비로소 깨달았다, 아직도 자신의 삼복구타공이 부족하다는 것을. 아직도 엄격함이 부족하다는 것에 대해 비류연은 반성했 다. 좀 더 발상을 유연히 할 필요가 있었다. 천하의 개를 모두 때려잡겠다는 그 궁극의 타구공에 비해 오직 하나만 팬다는 삼복구타공은 규모나 포부 면에서 너무 작 았다. 비류연은 그 사실에 대해 깊이 반성하면서 자신의 삼복구타공을 새롭게 개량해 제자들 겸 사제들에게 다시금 선보일 날을 위해 남몰래 노력을 기울였었다. 그 대상이 비록 제자 겸 사제들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그 노력이 보상받는 날인 모양이었다.
천하무구라는 타구봉의 최후 초식은 매우 변화가 기괴막측한 초식이라 그 요체를 전부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중요한 건 분위기였다, 분위기! 다른 말로는 기세! 휘두르는 노학의 봉끝에는 기세가 부족했다. 천하의 모든 개를 때려잡겠다는 집요한 의지를 겸비한 패도적 기세가 말이다. 초식의 경로는 대충 흉내 냈지만, 기세만 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비류연은 자신의 부족한 부분 역시 그런 기세가 아닌가 생각했다. 역시 그동안 너무 마음이 심약했던(?) 것이다. 아끼는 제자이자 사랑하는 사제들이다 보니 너무 봐주면서 다뤄왔던 것이다. 그땐 자신의 나약함을 탓했지만 오늘 같은 경우라면 굳이 손속에 사정을 둘 필요는 없었다.
“미리 경고했는데, 경고를 밥 먹듯 어겼으니 지금 그 대가를 치르게 해주죠. 약속은 약속이니까!”
약속? 아아, 그것은 아마도 또다시 애송이라 부르면 아구창을 박살 내주겠다는 류의 내용이었던 것 같다.
삼복구타봉법(三伏狗打棒法).
말복(末伏).
천하무구(天下無狗) 복사개량판複寫改良版).
천지무견(天地無犬)!
파바바바바밧! 뚜두두두두두두! 빠바바바바박!
타구봉으로 잠시 역할 전환을 이룬 비류연의 정신봉이 화려한 잔상을 그리며 흑룡왕의 전신에 작렬했다. 엄청난 타작 소리와 함께 흑룡왕의 거구를 향해 비 오듯 봉영이 쏟아졌다. 아무리 흑룡왕이라 해도 심신이 너덜너덜해진 상태에서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봉들의 향연을 감당할 순 없었다. 생각해 보라, 천하의 모든 개를 때 려잡기 위한 몽둥이질이 단 한 사람의 몸에 쏟아지는 것을.
“꾸웨에에에에에엑!”
동정호 내에 위치한 한 섬의 물가에서 한 남자의 처절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맞는 당사자 본인은 물론이고 지켜보는 이들까지 돌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무지 막지한 구타의 향연이었다.
“항… 꾸웩! 복… 꾸웩! 항복… 꾸에에에에엑!”
더 이상 참지 못한 흑룡왕이 자존심을 꺾고 항복을 외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암, 겨우 끝났나? 오래 끌긴.”
멀리서 이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이 지루했다는 듯 하품을 터뜨렸다. 바로 노사부였다. 사부는 비류연과 흑룡왕의 싸움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 던 것이다. 그러나 그다지 재미있었던 건 아닌 듯했다.
“겨우 손에 익은 무기 하나가 없어졌다고 저렇게 당황하다니. 쯧쯧. 아직 멀었군, 멀었어. 좀 더 발전이 있었는 줄 알았는데 실망이야.”
사부는 제자의 성장이 영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지금 상태에 너무 안주한 모양이군.”
강해질 필요성을 그다지 절감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그걸 뼈저리게 절감시켜 주는 게 스승의 도리일 것이다.
“겨우 삼 년 정도 눈을 뗐다고 저 모양이라니, 쭛! 좀 더 단련시킬 필요가 있겠어, 좀 더.”
역시 제자란 사부의 관심을 먹으며 자라는 존재인 것이다.
“아아, 이렇게 제자에게 큰 관심을 쏟는 스승이라니, 이 얼마나 훌륭한 사부란 말인가. 훌륭해, 훌륭해. 훗후.”
비류연이 들었으면 각혈할 만한 말을 태연하게 내뱉으며 노사부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