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4권 19화 – 열세 번째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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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24권 19화 – 열세 번째 도

열세 번째 도

-천외일도

확실히 그가 장담한 대로 두 개의 칼로 펼치는 칠상흔의 도법은 산을 뽑고 바다를 뒤엎을 만큼 무시무시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반 토막의 칼을 버리고 두 개의 칼을 집어 들었을 때부터 비로소 그의 진가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칠상흔은 앞을 가로막는 것이라면 산이라도 부술 것 같은 기세로 두 개의 도가 목표물을 도 륙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확실히 호언장담할 만하네.’

그러나 위력에 비해 확실히 정교함은 부족했다. 흔들리는 감정이 칼끝의 흔들림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연비 자신이었다. 자신이 유도한 것에 당할 만큼 연비는 어수룩하지 않았다.

“저런! 지난 시간 동안 놀고 계셨던 모양이네요, 전혀 소용이 없으니. 백 인 베기로는 좀 부족했나 보죠?”

대지를 가르는 도강을 가뿐히 피해낸 연비가 사뿐히 땅 위에 착지하며 말했다.

“글쎄, 과연 그럴까?”

칠상흔은 실망하지 않았다. 아무리 쌍도를 집어 들었다 해도 단 일초에 베일 상대라면 관 뚜껑을 열지도 않았을 것이다.

팔랑!

연비의 소매가 사르륵 날카롭게 갈라졌다.

“다음은 소매 하나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칠상흔이 경고했다. 그러자 연비가 비난의 눈초리를 쏘아 보내며 외쳤다.

“엉큼하긴! 변태!”

이 뜬금없는 비난에 칠상흔은 기가 막혔다.

“누가 엉큼하단 거냐!”

그가 비록 수년간 이곳 원통투기장에서 엄청난 피를 흘려왔지만, 그는 뼛속까지 무인이었다. 그의 앞에 선 모든 적들을 그는 오직 무력으로 깨부숴 왔던 것이다. 그에게 향하는 모든 원한과 증오에 그는 언제나 힘으로 맞서왔다. 그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옳든 그르든 상관없었다. 다만 수단을 택하는 데 있어 그는 언제나 한 가지만을 써왔다. 바로 무력이었다. 그러나 어린 계집한테 ‘엉큼하다느니 ‘변태’라느니 하는 말을 들으니 어찌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난 변태가 아니다! 나는 여태껏 ‘순수한 무’만을 추구해 왔다. 그러니 날 모욕할 생각은 하지 마라!”

그러나 연비는 생각이 있었다.

“순수한 무’만을 추구하다 보니 그 외의 것은 다 잊어버렸나 보군요.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기본적인 감정들 말이에요, 오욕칠정 모두를.”

“그렇다. 난 그 모든 것을 버렸다. 사부님을 배신하고 사제로부터 등을 돌리고 오직 순수한 ‘무(武)’만을 찾아왔다!”

“모두 버렸다고요? 거짓말! 정을 버리고, 사랑을 버리고, 도덕을 버리고, 윤리를 버리고, 도귀(鬼)가 되길 원했지만, 오직 한 가지만은 버리지 못했어요.” “그게 뭐냐?”

“두려움!”

연비가 대답했다.

“말도 안 돼! 난 모든 두려움을 극복했다!”

그가 발작적으로 외쳤다.

“그렇다면 왜 그걸 마주 보지 못하죠? 왜 모든 감정을 버렸다는 당신의 마음에 그 말은 파문을 일으키는 거죠? 그것도 눈에 확 띄게? 그건 바로 당신 자신이 스스 로 아직 두려움을 버리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증거예요, 그래서 난 당신이 하나도 두렵지 않아요. 이미 두려워하는 게 있는 사람을 두려워한다는 건 왠지 바 보같잖아요?”

그 순간 연비의 호안석 같은 눈동자가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게다가 난 자기를 버린 사람 따위 하나도 겁나지 않아요. 왜냐고요? 지금 거기 있는 당신은 가짜니까. 자신의 과거조차 감싸안지 못하는 그런 허접한 녀석이죠.” 칠상흔은 코웃음을 치며 연비의 말을 무시했다. 저런 폭언은 더 들어줄 수가 없었다.

“아직 실망할 필요 없다. 지난 구 년 동안 백인참의 수행을 통해 완성한 것을 보여주마.”

그는 자신이 있었다. 이 한 수를 위해 지난 구 년을 바쳤던 것이다.

“기다리다가 막 하품이 날 참이었는데, 당신이 구 년 동안 도망치며 뭘 준비했는지 좀 궁금하긴 하군요. 부디 그게 당신의 두려움을 이길 만한 것이길 빌겠어요. 아 니면 별로 재미없을 테니까요.”

막 하품이 나오려는 입을 손으로 가리며 연비가 말했다.

“충분히 재미있을 것이다. 그건 보증하지.”

그는 자신만만했다. 두 자루의 도가 만남으로서 굉천도 갈중혁의 비전절학 혈류십이도는 본래의 위력을 온전히 되찾았기 때문이다.

“함부로 보증 서다가는 패가망신당하는 수가 있어요. 천오백 년 전의 고책에도 그런 말이 나온다고요. 네 이웃이 네게 보증을 서준다면 그는 자신의 목숨을 건 것 이다. 경배하라!”

얼마 전 윤미에게도 써먹었던 말이다. 보증과 패가망신의 역사가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당신이 지난 구 년 동안 갈구해 온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함부로 보증 서지 않는 게 좋아요.”

그러자 칠상흔이 대답했다.

“천외일도(天外一刀).”

“응? 그게 뭐죠?”

연비가 되물었다.

“천외일도, 굉천도 혈류십이도의 제십삼도, 그것이 바로 내가 찾아 헤매던 것이다.”

“천외일도!”

초대장 덕분에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구경하고 있던 나백천은 너무 흥분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림맹주로서 그다지 체통있는 모습은 아니기에 예청은 얼른 남편을 끌어다가 다시 자리에 앉혔다.

“천외일도? 그게 뭔데요?”

예청이 쌀쌀맞게 물었다.

“아니, 부인. 정말 모른단 말이오?”

나백천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게 당신 바람 핀 여자의 이름이라도 되나요? 왜 제가 그걸 꼭 알아야 하는 거죠?”

‘바람’이란 한마디가 나백천의 가슴에 찬바람을 몰아닥치게 했는지 그의 안색이 순식간에 시커메졌다.

“무, 무슨 말씀이시오. 바, 바람이라니! 난, 결코……!”

말까지 더듬는다.

“그냥 예가 그렇다는 거죠, 예가. 당신이 정말 그랬으면 그냥 말 한마디로 끝났겠어요? 그보다 그게 뭐죠? 천외일도란 게?”

“그건 십삼도요.”

그다지 상세한 설명은 아니었다. 오히려 예청의 의문만 증폭시켰을 뿐이다.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나백천이 다시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건 한 사람의 열세 번째 도법이오. 그 사람이 누군지는 부인께서도 잘 아실 거요. 요 얼마 전에 직접 만나기까지 했으니. 좀 손버릇이 안 좋은 어르신이지.” 그 말에 예청이 깜짝 놀랐다.

“서, 설마!”

그런 손버릇이 안 좋은 영감에 쌍칼을 들면 당해낼 사람이 없는 엄청난 무공의 소유자라면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바로 그 색골변태 할아버님이시오.”

그러자 옆에서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보게, 꼭 옆에 본인이 없는 것처럼 말하지 말아주겠나?”

나백천이 시선을 조금 돌리자 그의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던 혁중노인의 얼굴이 들어왔다.

“기왕이면 색골변태보다는 ‘신마’ 어르신이라 불러주게, 이 공처가 무림맹추야!”

그 말에 나백천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었다.

“노대형! 방금 일부러 맹추라고 했죠? 맹주라고 안 하고?”

발끈한 나백천이 외쳤다.

“맞아요! 이이가 왜 맹추예요, 맹주지!”

예청이 씩씩거리며 항의했다. 천하의 신마에게 이렇게 대들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혁중노인이 두 사람을 번갈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거참, 희한하군.”

그의 말에는 나직한 감탄이 배어 있었다. 거참, 이런 일도 다 있군. 역시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이야’라는 긴 감탄이 밑바닥에 함축된 말이기도 했다.

“뭐가 말입니까?”

“뭐가 말이에욧?”

부부가 동시에 외쳤다.

“둘 다 아무도 공처가란 부분에 대해서는 짚고 넘어가지 않으니 말이야. 안 그런가?”

“…….”

그 지적에 부부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것만 봐도 충분히 맹추라 불릴 수 있겠네. 안 그런가?”

한껏 눈웃음을 지으며 혁중노인이 물었다.

“그보다 천외일도라면 역시 그것 아닙니까, 노대형?”

갑자기 나백천이 한없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급작스럽게 화제를 돌린 것이다. 이대로 이야기가 계속되다가는 무림맹구나 무림행주로까지 불릴 가능성이 있었 다. 그런 사태는 되도록 피하고 싶었다. 이 제멋대로가 뭔지 온몸으로 보여주며 살아온 성질 나쁜 노인네에게 무림맹주에 대한 예우를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오판인 것이다. 깔끔하게 그 부분은 포기하기로 했다. 그보다는 이 천외일도 문젠데, 역시 본인에게 물어보는 게 제일 빨랐다. 그 열세 번째 칼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 는 인물이 바로 이 노인이었으니 말이다.

“그거지. 다른 게 있을 리 없잖나?”

노인이 짧게 대답했다. 영양가 하나 없는 말이었다.

“두 사람만 오붓하게 속닥거리지 말고 저도 좀 알면 안 될까요?”

설명은 나백천이 맡았다.

“아, 원래 천외일도라는 것은, 한때 잘나갔던 무신마의 비전도법인 혈류십이도의 존재하지 않는 열세 번째 초식을 이야기하는 거라오.”

이름에서도 바로 알 수 있듯, 무신마 패천도 갈중혁의 독문절기인 혈류십이도는 열두 개의 초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니 열세 번째 초식이라는 것 자체가 말 이 안 되었다. 그게 있으면 혈류십삼도지 왜 혈류십이도이겠는가.

“귀찮아서 개명을 포기한 건 아니죠?”

“내가 미쳤냐? 그 짓을 하게?”

혁중노인이 투덜거렸다.

“하지만 오랫동안 연구해 오셨잖습니까.”

“그랬지, 잠자리가 사나웠으니까.”

그 대답에 나백천은 기가 막혔다.

“노대형 같은 분도 꿈자리가 사나울 때가 있습니까? 천하에 두려울 게 없는 안하무인의 대명사 같은 분이오?”

그러자 혁중노인이 나백천을 째려보며 말했다.

“자넨 백 년 전에 그자와 직접 싸웠던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나? 자네가 싸워봤어? 싸워봤냐고!”

“물론. 못 싸워봤죠!”

지금이야 백도무림을 통괄하는 무림맹의 어엿한 맹주지만 그때만 해도 그는 어렸다. 그리고 큰 싸움에 나갈 순번도 아니었다.

“그자의 무서움은 직접 싸워보고 직접 살아남은 내가 제일 잘 알아. 그러니 제일 잠자리 설치는 자도 나고. 내가 자랑하던 열두 개 초식의 마지막 하나까지 다 쪽쪽 빨아 썼는데도 놈을 골로 보내지 못했으니 내가 잠이 왔겠나? 그것도 그 친구랑 같이 달려들어서.”

“하지만 결국 이기셨잖습니까?”

“운이 좋았지. 하지만 끝장을 본 것도 아니야. 살을 주고 뼈를 깎아 한 칼 먹여서 절벽 밑으로 떨어뜨렸지만… 시체는 끝내 확인하지 못했지. 기연은 더 필요도 없 는 놈이 뭐가 아쉬워 절벽으로 떨어진 거야, 쳇. 망할 놈. 시체라도 남겨놓을 것이지.”

“그래서 십삼도를……..”

그제야 예청도 혁중노인의 심정을 어느 정도 헤아릴 수 있었다. 그녀가 혁중노인이라도 그리했을 터였으니까.

“열두 개가 다 안 먹혔으니 별수있느냐? 열세 번째를 만들어내는 수밖에. 그런데 참 애매한 게, 만든다고 만들어지는 게 아니더라구.”

“그래서 저 친구는 그렇다 치고, 대형께선 성공하셨습니까?”

그 말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혁중노인이 눈을 부라렸다.

“감히 노부를 누구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럼?”

눈이 휘둥그레지는 나백천을 향해 혁중노인은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비밀이다.”

그리고는 얄밉게시리 입을 꾹 다물었다. 나백천은 너무나 어이가 없어 입을 쩍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 입에 파리 들어앉겠다, 좀 닫아라.”

그런 핀잔을 듣고 나서도 한참을 벌리고 있어야 했다. 충격이 가시기까지 좀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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