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4권 1화 – 북천과 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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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24권 1화 – 북천과 은명

북천과 은명

하도 넓고 넓어, 여기가 진짜 호수인지 바다인지 헛갈리게 하는 바람에 사람들로 하여금 손가락으로 수면을 찍어 물맛을 보게 만드는 동정호(洞庭湖). 그 동정호 한가운데 덩그러니 솟아나 있는 한 섬에 위치한 마천각(魔天閣) 지하에, 사람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어둡고 음습한 비밀의 장소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이 안에 자리하고 있는 자는 깊고 어두운 암흑 속에 도사리고 앉은 채 마천각의 모든 것을 손바닥 보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마천각 안에서 그의 지배를 벗어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지배하고 명령하고 조종하는 자였다. 그를 아는 모든 이들은 북좌(北座)의 어둠 속에 앉아 세상을 오시하는 그를 두려워 했다. 그는 백 년 전의 혈전에서 살아남은 망령이며, 수많은 죽음 속에서 살아남은 자였다. 그는 지난 백 년간 멸겁이라 새겨진 저 어두운 장막 뒤에 앉아 다가올 때 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바위처럼 움직이지 않았지만, 모든 이들이 그를 위해 그의 눈과 귀, 손과 발이 되어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현재 검은 장막의 남쪽에 공손한 자세로 부복해 있는 흑의청년 역시 그런 이들 중 하나였다. 그는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특별한 손발이었다. 이 청년은 언젠가 접수처에 앉아 영령이라는 여 인에게 마천각 입학시험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했던 바로 그 흑의서생 은명(隱名)이었다.

그가 이 공간 안으로 들어와 공손히 무릎을 꿇고 기다린 지 이각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여전히 장막 너머에서는 아무런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말이 들려올 때까지 이대로 언제까지나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먼저 입을 여는 것은 아직 그가 허락받지 못한 일이었다. 암흑이 그의 심신을 옥죄어오는 듯해서 답답했 다. 언제나 이곳은 숨 쉬기가 힘들었다.

“준비는 잘되어가고 있느냐?”

드디어 침묵이 깨지며 장막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느 때처럼 어떤 감정도 담겨져 있지 않은 차가운 목소리였다. 저런 목소리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도 영혼이 얼어붙어 있는 사람뿐일 거라고 은명은 생각했다. 그리고 아마 자신의 영혼도 똑같이 얼어붙어 있는 건지도 몰랐다.

들려온 목소리 어디에도 혈육의 잔재는 느껴지지 않았다. 질문은 오직 한 가지 대답만을 허락하고 있었다.

“네, 문제없이 잘 진행되어 가고 있습니다.”

은명이 공손한 어조로 대답했다.

“차질은 없을 테지?”

나직하지만 위압적인 목소리에 은명은 숨이 막혔다. 저것은 용서를 모르는 목소리였다.

“그자는 영원히 침묵할 것입니다.”

이제 실수 같은 것은 이곳에서 용납되지 않았다. 그는 이제까지 너무 많은 실책을 범했다. 더 이상의 실수는 위험했다.

“지금은 칠상흔이라 불린다고 했던가? 그자의 입은 절대로 열려서는 안 된다, 절대로.”

어둠 너머의 존재가 힘주어 강조했다.

“정말로 칠상흔, 그자가 구 년 전에 행방불명되었던 그 사람이 틀림없습니까?”

“틀림없다.”

이미 확인이 끝났다는 그 말에 은명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언젠가 맞닥뜨려야 될 때가 올 거라 생각하곤 있었다. 하지만 설마 이런 곳에서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그자와 얼굴을 마주 볼 일은 없었다. 그러기 전에 그자를 제거하거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일이었다. 적절한 도구를 사용하여. “그가 무엇을 보았습니까? 무엇을 알고 있기에 그렇게까지 견제하시는 것입니까?”

평소라면 감히 하지 않았을 질문이었다. 그만큼 그의 지금 심정은 복잡했다. 이미 모든 감정을 끊어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잔재가 남아 있는 모양이다. “알려고 하지 마라. 아직은 너도 그것을 알 단계가 아니다. 너는 준비만 착실히 하면 된다.”

왜냐고 묻지 말라. 의문을 품는 것은 지금 너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이다, 라고 목소리는 말하고 있었다. 은명은 동정호의 아침 안개처럼 뭉클뭉클 피어오르는 의문 을 접어 가슴속 깊은 곳에 묻었다.

“안배는 이미 끝나 있습니다.”

그리고는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칠상흔, 그자는 이 대회의 마지막 승자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까지 ‘그것’이 쓸 만하더냐?”

어둠 너머의 존재가 물었다.

“그것이라니요?”

은명이 반문했다.

“그 계집 말이다, 네가 화산에서 주워온.”

은명의 몸이 순간 움찔했다.

“물론 쓸만합니다.”

은명이 떨림을 억누른 채 대답했다.

“믿고 있구나?”

‘무엇을 믿고 있는지 말하지 않아도 은명은 그 무엇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전 믿고 있습니다.”

그러자 나직한 비웃음 소리가 장막 너머에서 들려왔다.

“세상은 언제나 사람의 기대를 배신하게 마련이지. 특히 믿음은 말이다. 꼭두각시 인형을 믿다니,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

네 녀석, 지금 제정신이 아니구나, 라고 힐책하고 있는 것이다. 은명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는 대답했다.

“전 믿습니다.”

하마터면 목소리가 갈라질 뻔했다. 축축해진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도구는 도구일 뿐이다. 그 사실을 잊은 건 아니겠지?”

“물론입니다.”

“그럼 됐다.”

확신하는 은명의 대답을 들은 뒤 장막 뒤의 존재는 잠시 침묵했다.

“듣자 하니 이번에 참가하면 나예린이라는 계집아이랑 싸우게 될 수도 있다더구나?”

“그걸 어떻게?”

그것은 장막 너머의 사람이 신경 쓸 만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위험은 없겠지?”

“없습니다.”

은명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넌 그 계집하고만 연관되면 마음이 흐트러지는구나. 네 믿음이 그저 너의 단순한 기대가 아니길 바란다.”

“그, 그건 그렇지…….”

그러나 장막 뒤의 존재는 그의 말을 더 들을 일 없다는 듯 끊었다.

“그때 한 맹세는 잊지 않았겠지?”

묵직한 목소리가 기억의 상기를 불러왔다.

“제가 어찌 그 맹세를 잊을 수 있겠습니까?”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그때 그녀를 또 한 번 죽이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아마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할 기억일 터였다. 그것은 분명 용서받지 못할 일이었겠 지. 그녀가 그 사실을 안다면 자신을 끝없이 증오할 게 분명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녀가 그 사실을 아는 일은 아마도 이제 없을 테니까.

“몽환산장으로 보내겠다고? 그 의미를 알고 있느냐?”

“알고 있습니다.”

“그건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다.”

“허락해 주십시오.”

“…...좋다. 허락하겠다. 하지만 한 가지 맹세해라.”

“무엇입니까?”

“새로 태어난 그 아이를 철저한 도구로 사용하겠다는 것을. 그것이 네가 데려온 그 계집아이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 길밖에 없다면…….

“약속하겠습니다.”

“그 아이가 이곳으로 오게 되면 첫 임무는 내가 내리겠다.”

“직접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불만있느냐?”

“아, 아닙니다. 명에 따르겠습니다.”

그때 주고받았던 문답이 다시 한 번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제 첫 번째 임무가 내려질 때였다.

“그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겠다. 대신 그 계집아이가 너의 통제 아래에서 완전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여라.”

“어떻게 말입니까? 방법을 알려주십시오.”

분명 그 방법까지 생각해 놓고 있는 게 분명했다.

“너의 말은 절대적으로 충성한다고 하니 시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게다가 기억을 되살릴 수 있는 실마리는 미리미리 제거해 놓는 게 좋은 법.” 그 시험 방법은 다음과 같았다.

“만일 그 아이가 나예린이란 계집아이를 만나게 되거든.”

은명은 그 뒤에 나올 말이 무엇인지 알고 부르르 몸을 떨었다.

“죽여라.”

***

등 뒤에서 철문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은명은 찐뜩찐뜩하게 달라붙어 있던 어둠 속에서 빠져나와 다시 빛 아래 서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몸에는 오한이 가시지 않고 남아 있었다. 그는 눈부신 하늘의 햇살을 바라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렇게 가까운 곳에 있었다니 짐작도 못했습니다. 그곳은 당신의 안식처입니까? 아니면 도피처입니까? 난 당신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총대 장.”

그는 한때 자신의 우상 중 한 명이었던 사람을 떠올려 보았다. 이 즐거운 한때가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이라 믿던 때의 추억을. 그러나 이미 그 추억이 빛바래 있었 고,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분께선 그 일을 용납하지 않으시죠. 전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이 남에게 넘어가기 전에 그것을 제거해야만 합니다. 그건 곧 당신의 말살을 의미하지요. 그 리고 그 임무를 맡은 사람은..

은명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차갑게 얼려놓았던 감정들이 날뛰려 하고 있었다.

“네 도구가 쓸모있길 바란다.”

아직도 귓가에서 목소리가 웅웅거리는 듯했다.

“하나의 추억으로 다른 하나의 추억을 말살하라 명하시다니 그분께서도 참으로 잔인하시군요.”

그 의미가 그의 마음을 묵직하게 했다.

“둘 중 하나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그 명을 따르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역시 도구이긴 마찬가지라는 것을. 그리고 차라리 몰랐다면 훨씬 더 행복했을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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