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4권 3화 – 바람의 검법, 구름의 신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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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24권 3화 – 바람의 검법, 구름의 신법

바람의 검법, 구름의 신법

-미녀와 야수

“죽어라!”

부웅!

천둥 같은 파공음이 일어나며, 사나운 권풍이 소녀를 향해 내달렸다. 그의 장기는 단단하게 단련된 근육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권법이었다. 그동안 많은 단련을 거친 듯 그의 두 주먹은 마치 암석처럼 거칠게 단련되어 있었고, 또한 빨랐다. 류은경은 그 일권을 미처 피해내지 못했다. 무시무시한 일권을 맞은 그녀의 몸이 부웅 허공중으로 떠올랐다.

“꺄악!”

그 끔찍한 광경을 목도한 윤미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저 주먹에 깃든 강맹한 위력은 연약하기 짝이 없는 한 소녀를 피떡으로 만들기에 충분한 위력을 지니 고 있었던 것이다.

나예린도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러나 그녀는 곧바로 비명을 삼켰다. 류은경이 거력왕의 일권을 미처 피하진 못했지만 그의 주먹이 그녀의 몸에 닿은 것 도 아니었던 것이다. 부웅 허공중에 떠올랐던 소녀의 작은 몸은 마치 깃털처럼 사뿐하게 다시 땅에 착지했다. 다만 처음보다 조금 더 뒤로 밀려났을 뿐 상당히 멀쩡 해 보였다.

“…….?”

이렇게 되자 알쏭달쏭하게 된 쪽은 오히려 거력왕이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주먹과 소녀를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의 불신의 빛이 역력했다.

“부, 분명히 맞았는데…….”

그런데도 제대로 된 타격감이, 자신의 주먹이 사물을 분쇄하는 느낌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솜뭉치를 치는 것만 같았다.

“저게 어찌 된 일이죠?”

분명 피떡이 되어 널브러졌을 거라 생각했던 류은경이 생각 이상으로 멀쩡하자 깜짝 놀란 윤미가 반문했다.

“킥, 재밌는 보법이네요.”

당황하는 거력왕의 모습이 재미있어 보였는지 연비가 킥킥 웃으며 말했다.

“연비도 그렇게 생각해요? 제 생각엔 보법이라기보단 운신법이라고 하는 쪽이 더 정확할 것 같지만요.”

나예린이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본 일련의 광경을 분석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하긴, 발로 움직이는 건 아니니까 린의 말대로 운신법이라 지칭하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그냥 보법이라 하죠. 어차피 보법도 운신법의 일종이 니까요. 그런데 저런 재주를 숨기고 있었다니…… 예상 이상으로 재미있는 광경을 보여주네요.”

“바람을 타고 움직이다니. 마치 깃털 같아요. 저도 처음 보는 보법이에요.”

나예린 자신이 배운 검각의 비전보법 비설보(飛雪)는 상대의 눈을 현혹시킬 정도로 빠르게 신형을 움직이는 보법이다. 상대의 가시 영역을 뛰어넘는 움직임으 로 마치 눈발이 흩날린 듯한 환상을 심어준다. 그러나 저것은 달랐다. 저것은 기다리는 보법이었다. 상대의 공격이 일으킨 바람을 타고 몸을 움직인다. 조금 전에도 얇은 공기의 막이 거력왕의 주먹과 소녀의 몸 사이를 가로막는 것을 나예린은 놓치지 않았다. 소녀는 그 힘을 타고 몸을 뒤로 움직인 것이다. 막대한 내공과 체력을 소모하는 비설보에 비해 지극히 경제적인 보법이라 할 수 있었다.

“이얍!”

부웅! 부웅! 부웅!

혹시나 방금 전의 일은 요행일지도 모른다고 믿은 거력왕은 쉴 새 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무수한 권의 그림자가 소녀의 몸 앞을 가득 메웠다. 그러나 그의 주먹이 아무리 빠르고 힘있게 내질러져도 결코 소녀의 몸에 닿는 법은 없었다. 이번에도 소녀는 거력왕이 일으킨 바람을 타고 가뿐하게 몸을 움직였다. 한 푼의 무게도 느 껴지지 않는 너무도 가벼운 움직임이었다.

짝짝짝!

“훌륭해요! 마치 구름이라도 밟고 선 듯한 보법이네요. 이름이 뭐죠?”

흥이 나서 박수를 친 것은 한참 열심히 관전 중이던 연비였다. 조용히 말한 듯했지만 그 목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시합장 한가운데 있는 류은경에게까지 들릴 정도 였다. 은근히 목소리에 내공을 실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 이 무공의 이름은……..”

류은경이 멀리 떨어져 있는 연비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싸움 중에 그것은 매우 어리석은 행위였다. 게다가 연비는 거의 측면 쪽에 앉아 있었다.

“감히 이 몸을 무시해!”

그 커다란 빈틈을 놓칠 리 없는 거력왕이 암석도 파쇄할 만한 거력이 담긴 일권으로 소녀의 얼굴을 향해 날렸다. 폭풍처럼 사나운 권풍이 류은경의 전신을 후려쳤다.

“위험……!”

다급한 목소리로 나예린이 외쳤지만, 그다지 필요한 행동은 아니었다.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는데도 공기의 벽은 거력왕의 주먹이 소녀의 몸을 침범하려는 것을 막아주었다.

다시 한 번 상대가 보내준 바람을 타고 살짝 몸을 뒤로 날리며 사뿐히 착지한 류은경은 하려던 말을 마저 했다.

“수약답운(水躍踏雲)이라고 해요.”

* * *

친어머니에게조차 사랑받지 못한다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가출한 류은경은 산에서 길을 잃고 늑대 떼를 만나 죽을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그때 그녀는 한 명의 이인(異人)을 만났다. 그 사람은 사십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얼굴에 병색이 완연한 중년 여인이었다. 그 여인은 소녀가 늑대들에게 포위당해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홀연히 나타나 그녀를 구해주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몸인데도 불구하고, 수십 마리의 늑대가 사방에서 달려들어도 그 잔인한 짐승들의 이빨은 병약 한 여인의 옷자락조차 스치지 못했던 그 신비한 광경을 소녀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여인은 자신을 불승불패(不勝不敗) 검선자(劍仙) 이약빙이라고 소개했 다. 가족에게서 버림받았던 소녀는 새로운 인연을 만나 거두어지게 되었다. 참된 사부와의 만남이었다.

소녀의 사부 검선자 이약빙은 어려서부터 몸이 무척 약했다. 그녀의 몸은 병치레가 잦았고 맷집 같은 것은 기대할 수도 없었다. 그녀의 몸은 다른 보통 여인들의 몸보다도 훨씬 약했다. 그녀는 오히려 너무나 약했기에 무의 길에 들어섰다. 약체 그 자체인 자신과 정면으로 싸우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운명에 대한 도전이었다. 무의 길은 멀었다. 하지만 이약빙은 비록 몸은 약했지만, 정신까지 약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나 육체가 약했던 그녀는 자신에게 맞는 보법을 개발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보법은 금방 부서질 것만 같은 연약한 육신을 지닌 그녀에게 어울리는 보법이 아니었다. 그런 보법은 근육과 관절의 힘을 한계까지 짜내야 하는데, 그런 걸 시전했다가는 적의 공격이 적중하기도 전에 스스로 자멸할 게 뻔했다.

몸이 약한 대신 머리가 비상했던 이약빙은 오랜 연구 끝에 본인은 가만히 서 있으면서도 적의 공격을 피해낼 수 있는 신비의 보법 ‘수약답운’을 개발하는 데 마침 내 성공하게 된다. 적이 일으키는 바람을 타고 몸을 피하는 매우 특이한 보법이었다. 꼭 큰 바람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었다. 아주 미세한 바람만으로도 충분했다. 수약답운을 완성한 그녀의 몸을 건드릴 수 있는 무공은 어디에도 없었다. 어떤 적과 싸워도 그녀는 패배하지 않았다. 하지만 선천적으로 몸이 약한 그녀에겐 대적 한 적을 패퇴시킬 비장의 일초가 모자랐다. 때문에 그녀는 어떤 적에게도 패배하진 않았지만 이기지도 못했다. 그녀의 또 다른 별호인 불승불패는 그렇게 해서 붙여 진 이름이었다.

수약답운(水躍踏雲)!

확실히 그것은 수비에 있어선 가장 뛰어난 최고의 운신법이라 할 만했다.

***

“사부님께 들은 적이 있어요. 바람을 희롱하는 듯 바람을 타고 노닐며 어떤 공격도 다다르게 하지 않는 환상의 보법이 있다고. 분명 그 보법의 이름이 ‘수약답 운’이었어요. 설마 그 환상의 보법을 이런 곳에서 보게 되다니…….?

정말이지 사람의 운명이란 어디서 어떻게 펼쳐질지 모르는 것인 모양이다.

“흠, 그래요? 꽤 유명한가 보네요?”

꽤 실력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유명한 무공의 소유자인 줄은 꿈에도 몰랐던 연비였다. 물론 알아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주의이기도 했다. 연비에게 중요한 건 현재 본인이 지닌 실력이지 뒷배경이나 사승 같은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부는 밥 먹여주지 않는다. 그것은 죽을 때까지 변치 않을 그의 굳건한 신념이었다. “몇 안 되는 여검객이라 꽤 관심있어 하셨거든요.”

강호 여검객의 실력을 보다 발전시켜 멍청한 사내들이 구시렁거릴 수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게 그녀의 사부인 검후의 오랜 생각이었다.

“설마 저 아이가 검선자 이약빙 여협의 고제자였다니…….”

존경하는 사부님인 검후는 눈이 굉장히 까다로워 칭찬하는 무공은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데 그중 하나이며 환상의 보법이라고까지 불리우는 무공이 지금 그녀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나예린도 한 명의 검객이었다. 그녀는 더욱 시선을 집중하며 소녀와 거인의 대결을 바라보았다. 두 눈에 소녀의 일거수일투 족을 놓치지 않으려는 의지가 가득했다.

“그렇다면 저 보법엔 약점이 없다는 건가요?”

여전히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혹은 깃털처럼 요리조리 잘 피해 다니고 있는 류은경을 지켜보며 연비가 물었다.

“아니요. 약점은 있어요.”

나예린은 이미 알고 있는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사부인 검후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었던 것이다.

“호오? 그게 뭐죠?”

나예린은 류은경의 움직임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저 수약답운이란 보법은 저 거력왕이 뿜어내는 권법이나 퇴법 같은 바람을 일으키며 질풍처럼 적을 공격하는 무공들엔 상극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강해요. 하지 만 그런 반면 바람을 가르는 쾌속한 검술에는 매우 취약하죠.”

아무리 힘이 담긴 주먹이라도 떨어지는 낙엽이나 솜뭉치를 부수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물을 베고 바람을 베는 날카롭고 신속한 검술이라면 그것들을 절단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본인도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아요,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일을 당했으니까.”

“그건 왜 그렇죠?”

“강호에 알려지진 않았지만 불승불패라 불리우던 검선자 이약빙에게 최초의 패배를 안겨준 사람이 바로 저희 사부님이시니까요.”

연비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이상하잖아요? 한 번 졌으면 이미 불승불패가 아니잖아요? 불승일패(不勝-敗)지!”

“왜냐하면 누구보다 사부님 본인이 그 사실을 알리길 원치 않으셨으니까요.”

“그건 왜죠?”

“자신과 십 합 이상을 겨룰 수 있는 여검객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사부님은 만족스러우셨대요. 게다가 본인 스스로 강호 여검객의 대표 중 하나를 깎아내리 고 싶지도 않으셨고요.”

그것은 강호에 알려지지 않은 비사였다.

“사부님께 패배한 후 검선자 이약빙은 반드시 수약답운의 취약점을 보강해 다시 사부님께 도전하겠다고 맹세했죠.”

“사부님은 얼씨구나 좋다고 받아들였겠군요?”

“그, 그걸 어떻게?”

나예린이 깜짝 놀라 반문했다.

“왠지 그럴 것 같았어요.”

연비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 아줌마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요, 란 말은 생략했다.

“그래서 성공했대요?”

나예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쉽게도 그건 아무도 몰라요. 왜냐하면 그 후로 검선자 이약빙의 행적은 뚝 끊겼으니까요.”

아마도 심산유곡이나 모종의 장소에 틀어박혀 취약점을 보강할 방법을 찾기 위해 심신을 쏟아 부었을 것이 분명했다.

“만일 이약빙이 보강에 성공했고, 그 진전이 저 아이에게 전해졌다면 우리는 새로운 ‘환상’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아마 그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면 무척 행복할 것이다. 만일 그 사실이 알려지면 사부님은 또 얼마나 기뻐하실까. 그 모습을 그리는 것만으로도 입가에 살짝 미소 가 맺히는 나예린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환상의 보법으로 사뿐사뿐히, 너무도 가볍게, 혹은 바람을 타고 노는 솜털처럼 몸을 움직이고는 있었지만 결판은 좀처럼 쉽게 나지 않았다. 기회가 될 때마다 휘두르는 류은경의 양손검은 번번이 거력왕의 팔뚝에 감싸인 철토시에 막혀 무위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거력왕이 연성한 강권은 암석을 부수고, 철괴를 우그러뜨릴 수 있었고, 맨손으로 창칼을 막을 수는 있었지만, 검기까지 맨손으로 막을 만큼 화후가 높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두꺼운 강철토시로 그 부족한 부분 을 메우고 있었다.

땅땅땅!

다시 류은경이 빈틈을 타서 세 번 검을 휘둘렀지만 또다시 그의 강철 팔뚝에 막혀 버리고 말았다. 몸집이 큰 만큼 두 개의 통나무 같은 팔뚝을 앞으로 내밀고 있으 면 조그만 류은경으로서는 그 팔 안쪽 간격으로 들어가기가 무척이나 어려웠다.

“역시 마무리 기술이 부족하군요. 저래선 매듭을 지을 수 없을 텐데…….”

현 상태라면 최소한의 내공 소모를 자랑하는 보법을 이용해 상대가 지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비장의 절초 말이군요.”

“맞아요. 바로 그거죠.”

방어만 해서는 싸움이 끝나지 않는다. 싸움에 종지부를 찍을 만한 기술이 필요한 것이다. 갑자기 대적하는 상대가 평화주의자로 돌아서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척 어리석은 일 아닌가.

“없는 걸까요, 아니면 아직 안 보여준 걸까요?”

연비가 무척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후자였으면 좋겠군요.”

류은경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 이제 피하는 데는 자신이 붙었다. 그녀의 사부님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았고, 어떤 공격도 그녀를 상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 러나 이제 문제는 저 어마어마한 거구를 어떻게 쓰러뜨리는가 하는 것이었다.

몇 가지 공격에 특화된 초식들이 있었지만, 저 단단한 피부를 지닌 거인에겐 통용되지 않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간격 안으로 늘어가는 게 어려웠다.

‘역시 ‘그것’밖에 없나?!’

아직 미완성이니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던 그 기술이라면 저 거인을 쓰러뜨릴 수 있으리라. 그것은 몸집이 크고 작든 상관치 않는 기술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어!’

되돌아갈 길 따윈 없어. 앞으로 나아가기만 할 뿐. 그 길을 열 수 있는 것은 지금 자신의 두 손이 움켜쥐고 있는 한 자루의 은빛 검뿐이었다.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서는 온몸을 다해 전심전력으로 부딪쳐야 한다고 사부 이약빙은 가르쳐 주었다. 사부 본인이 병약한 신체라는 운명과 맞서 싸웠듯, 그녀는 그녀가 가지고 태어난 성(性)과 가족들이 얽어매어 오는 가혹한 운명의 속박과 맞서 싸울 운명이라고 했다. 그것은 피해진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것을 정 복하거나 그것에 복속되거나 선택지가 두 가지밖에 없으며 어느 쪽도 선택 안는다는 선택지는 그 사이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차분한 목소리로 경고 했다. 쉽게 바뀌는 운명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고. 거저 먹으려 하면 된통 당하기만 할 뿐이라고. 대가를 치르지 않고 얻은 물건은 언제가 어떤 형태로든 그 대가를 요구하고 만다. 그때 그 대가엔 막대한 이자가 붙어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것은 사부와 제자라기보단 앞서 운명과 싸웠던 선배로서 후배에게 해주는 조언이었 다. 그런 앙금을 남기지 않으려면 지금 이 순간 회계 정산을 끝마치는 수밖에 없었다.

완벽하게 안전한 길 따윈 없는 것이다. 위험을 짊어지지 않으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얻을 수 없다.

‘필요한 것은 각오!’

류은경은 마침내 결심했다. 그러자 은빛 검이 새하얗게 빛나며 바람을 뿜어대기 시작했다. 동시에 고요하게 멈춰 있던 류은경의 몸이 바람에 펄럭이기 시작했다. 그녀를 보호하고 있던 바람의 단층이 풀려나며 일으키는 바람이었다.

“저토록 어린 나이에 어떻게 저런 내공이……!”

나예린은 깜짝 놀랐다. 자그마한 소녀의 몸에 들어 있기엔 너무나 커다란 힘이었던 것이다.

“기연을 얻어서 영약을 먹었거나 아니면…… 이미 그녀의 사부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지도 몰라요. 아니면 상당히 몸이 약해져 있거나…….

“그 말은 자신의 내공을 제자에게 모조리 전수했다는 이야긴가요? 그렇다면 본인도 무사하지 못할 텐데요?”

“아마 더 이상 현역으로 뛸 수 없는 상태일 가능성이 높아요. 저 소녀는 비록 눈치 채고 있지 못한 것 같지만 말이에요. 아마 자신이 아직 남을 가르칠 수 있을 때 후계자를 만들고 싶었을 거예요. 그래서 자신의 절학을 전수할 만한 제자를 찾았던 거구요. 그게 마침 저 소녀였던 거겠죠. 그렇지 않으면 설명이 안 돼요.”

뒷산에서 천년하수오나 인형설삼 같은 영약을 캐 먹었다는 것보다는 훨씬 설득력있는 가설이었다. 본인이 바로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는 것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 은 연비였다.

“저 나이에 저 정도로 뚜렷하게 신체 변이가 있었던 것이 이상하긴 했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앞뒤가 딱 맞았다.

“그렇다면 넘긴 건 단순한 내공만은 아니겠죠. 새로운 그릇을 만난 그녀의 무공은 새로운 가능성을 꽃피웠을 수도 있으니까요.”

병약한 몸으로도 검선자 이약빙은 검후 이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놀라운 업적을 남겼다.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극복한 것이다. 그 무공이 건강한 신체를 만나면 얼마만한 위력을 발휘하게 될까? 그것은 이제 이약빙의 기(氣)와 기술, 그리고 정신을 모두 전수받은 류은경 본인 이외에는 아무도 알려줄 수 없는 일이었 다.

“이… 이게 뭐지?!”

거력왕은 갑작스레 자신을 향해 불어오는 세찬 바람 때문에 눈 뜨기조차 버거웠다. 눈살을 찌푸린 채 바라본 바람의 근원은 소녀가 들고 있는 은빛 검이었다. 

‘도대체 뭘 하려는 거지?”

무엇을 하든 상관없었다. 그는 저 소녀의 공격을 모두 막아낼 자신이 있었다. 기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해도 그에겐 그 격차를 메울 수 있는 단련된 육체가 존재 했다.

“지금 어르신이 흘린 땀을 식혀주는 거냐? 착하기도 하지. 그런 바람 수십 번 일으켜 봤자 시원하기만 할 뿐이다. 헛수곤 집어치워!”

그러나 류은경은 뿜어내는 기를 거둘 생각이 없었다. 이런 바람으론 사람을 상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검이 베고자 하는 것은 거력왕 의 질긴 육체가 아니었다. 그녀가 지금 베고자 하는 것은 바람 그 자체였다. 그녀의 검은 지금 바람으로 바람을 베려 하고 있었다.

풍령검風비전(秘傳).

오의(義).

선풍검계.

류은경의 은빛 검, 은풍(銀風)이 천지 사이를 횡으로 갈랐다. 그러자 그녀가 내지른 일격이 일으키는 바람이 소용돌이가 되어 거력왕의 몸을 휘감았다.

갑작스럽게 생겨난 바람벽에 거력왕은 당황했다. 그러나 그 바람벽은 그를 직접 공격하고 있지도 않았다.

“이쯤이야!”

거력왕은 바람벽을 꿰뚫어 버릴 기세로 양손을 그곳에 가져다 대었다.

파팟!

그 순간 그는 화끈한 통증과 함께 황급히 손을 떼야 했다. 보이지 않는 검격이 그의 주먹을 가로막았던 탓이다.

“이익……!”

먼지로 가득 싸인 벽 때문에 사방을 분간하기가 힘들었다. 어디서 어떻게 공격이 들어올지 알 수 없게 되자 문득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볼 수 있는 검은 두렵지 않 았지만, 볼 수 없는 검은 그를 두렵게 만들었다. 그 두려움이 그의 발목을 잡았고 그의 움직임을 봉쇄했다.

이번엔 어디서 공격이 날아올까, 라는 생각이 어떻게 이곳을 빠져나가지, 라는 생각보다 우선시 되었다. 서너 번 더 시도해 보았지만 번번이 보이지 않는 장벽 너 머의 검격에 가로막힐 뿐이었다. 게다가 정면을 집중하고 있으면 갑자기 뒤쪽에서 보이지 않는 공격이 채찍처럼 날아오기도 했다. 그러나 그를 패퇴시킬 만큼 강력 한 공격은 아니었다. 이 바람벽 안에서도 그의 철갑은 그 위력이 유효했다.

“저 공격이 효과가 있을까요? 기술의 크기에 비해 효과는 적은 것 같군요.”

안타까운 어조로 나예린이 말했다. 저토록 거대한 바람벽을 만들어내는 내공과 기술은 놀랍지만 그것은 여전히 상대에게 타격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저 아이의 얼굴에는 확신이 남아 있네요. 다른 의도가 있는 걸까요? 그것이 무엇이든 빨리 결과가 나와야 할 텐데요.”

기술이 크다는 것은 그것의 지속 시간이 짧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저 정도의 기술을 오래 발동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커다란 기술은 양날의 검과 마찬가지. 지금 저 기술이 무너지면 막대한 힘을 소비한 소녀는 거력왕의 제물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머리 나 쁜 거력왕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멍청한년! 이런 바람벽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어차피 이런 건 오래 끌 수 없겠지. 이 성가신 바람이 가시면 네까짓 년은…… 어?”

그 순간 거력왕은 갑자기 머리가 띵해졌다.

“어라?”

다음 순간 그의 무릎은 땅에 꿇려 있었다. 그리고 눈앞이 가물가물해지기 시작했다. 사고가 흐릿해지면서 점점 더 의식이 아득해져 갔다.

“이게 어찌 된…… 수… 숨 쉬기가…….”

어찌 된 일인지 숨 쉬기가 괴로웠다.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처럼 입을 뻐끔뻐끔해 보지만 입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그저 텅 빈 허공뿐이었다.

“이게 대체…….?”

쿵!

마침내 거력왕은 땅바닥에 고개를 처박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그제야 그를 감싸고 있던 바람벽이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 벽을 만 들기 위해 쉴 새 없이 휘둘러지고 있던 류은경의 검이 잦아들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하아! 하아!”

선풍검계를 펼치기 위해 쉴 새 없이 검을 휘둘렀던 류은경은 기진맥진해 있었다. 검계의 효과가 조금만 더 늦게 나타났더라면 쓰러진 사람은 거력왕이 아니라 바 로 그녀 자신이었을 것이다.

“설마 검풍으로 진공 상태를 만들다니…….”

나예린은 금세 그 기술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었다. 어떤 생물이든 숨을 쉬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 호흡이란 세계와의 연결이며 생명을 생명으로서 지속시키 는 최우선 유지 행위이기도 했다. 그것이 단절된다면 가깝게는 두통과 호흡 곤란으로 의식이 혼미해지고, 그보다 심해지면 죽음에 이른다. 그전에 뇌가 타격을 입을 수도 있었다. 선풍검계는 적의 몸을 절단시키는 게 아니라 적의 호흡을 단절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기술이었던 것이다.

“흠, 나쁘진 않은데, 좀 비능률적이긴 하군요. 아직 미완성이라서 그런가? 아무래도 저 다음에 한 단계가 더 있는 것 같아요. 왠지 그런 느낌이 들어요. 아직 거기 까지 이르지 못한 것 같지만요.”

하지만 저런 위험 상황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새로운 기술에 도전한 배짱은 칭찬해 줄 만했다. 물러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은 언제나 극소수인 것이다. 소녀는 앞으로 한 발짝을 내딛었고, 멋지게 성공했다. 그 사실 하나로 충분했다.

“승부가 났군요.”

보는 이들의 예상을 뒤엎고 시합은 류은경의 승리로 돌아갔다.

“아름다운 검법이었어요.”

그리고 류은경은 나예린의 감탄사를 끌어내는 위업을 달성했다. 그녀가 이렇게 타인의 검법을 보고 칭찬하는 것은 무척 드문 일이었다.

“저런, 진언니는 좀 더 긴장해야겠는걸요. 지금 저 모습을 보고 궁상 대장이 뻑 가버리면 어떻게 해요?”

무시무시한 눈길이 연비를 향해 쏟아졌다.

“나완 상관없는 일이다!”

이글거리는 눈빛을 연비에게 고정시킨 채 진령이 소리쳤다.

“과연 그럴까요? 이제 눈에 보이는 승리를 거머쥐었으니, 저기 대기석에서 기다리고 있던 두 남자도 저 아가씨를 다른 눈으로 보게 될 텐데?”

‘두 남자라는 말에 진령은 물론이고 옆에 있는 마하령까지 덩달아 어깨를 움찔했다. 그 미약하지만 확실한 반응을 보고 연비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울컥한 진령이 소리쳤다.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물론 너와도!”

“정말요?”

“끈질기군. 정말이다!”

“흠, 정말이군요……. 앗! 저기 궁상 대장이 그 아가씨랑 서로 껴안고 있어요!”

진령은 고개가 거의 빛의 속도로 돌아갔다. 엄청난 박력이었다. 그러나 류은경은 남궁상과 껴안고 있기는커녕 아직 대기석에 도착도 하기 전이었다. 류은경을 멀 리서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한기 어린 눈빛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 상기된 얼굴로 대기석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이 시합은 그녀에게 있어서도 의미있는 첫 승 리였던 것이다. 연비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음, 그렇군요. 정말로 전혀 상관없었군요.”

얼굴에는 재미있어하는 기색이 역력해서 진령을 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이이…….”

자신이 깜박 속은 것을 깨달은 진령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그런데 갑자기 그 일이 일어났다.

상기된 얼굴로 돌아온 류은경을 향해 남궁상이 환한 얼굴로 달려나오더니 두 손을 덥석 붙잡은 것이다. 부끄러운지 볼을 발갛게 붉히는 류은경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연비 덕분에 그 광경을 똑똑히 지켜보고 있게 된 진령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배신감에 파들파들 떨고 있는 진령을 보며 연비는 머리를 긁적이며 조용히 혼자 중얼거렸다.

“바보 궁상 녀석. 제 무덤이 덜 깊다고 삽질을 해요, 삽질을.”

그 어리석음에 대해 연비는 모른 척하기로 했다. 다행히도 이 혼잣말을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두 번째 시합 선수는 용천명이었다. 강맹삼인방 측에서는 거도(巨刀)라는 자가 나왔다. 별호 그대로 자기 키보다 더 큰 거대한 칼을 들고 있었다. 황소도 단숨에 두 동강 낼 수 있을 것 같은 칼이었다. 그는 조금 전 쓰러진 거력왕보다 서열이 두 단계 더 높은 자였다.

“쳇, 이런 샌님하고 싸워야 하다니, 이 어르신의 칼이 운다, 울어. ‘거력졸(巨卒) 그 녀석은 쓸데없이 방심이나 해가지고 이 형님을 피곤하게 만드는군.”

자신의 싸움 상대를 한번 흘끗 본 거도가 불만스런 어조로 툴툴거렸다. 그 말을 들은 용천명이 미간을 찡그렸다.

“역시 흑도의 무리라 그런지 예의범절이란 걸 전혀 모르는군. 학습 능력도 없고.”

용천명이 불쾌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는 언제나 격식을 중요시했는데, 이곳 마천각 쪽에서는 거의 지켜지는 일이 없었다.

“오우, 성깔있는 샌님이셨군. 몰라 봬서 죄송하게 됐습니다, 이 자식아! 케케케!”

용천명은 조용히 분노했다. 그리고는 검지손가락 하나를 들어 털이 숭숭한 두 번째 사내 앞에 내밀었다.

“그 손가락은 뭐냐, 샌님? 어르신 귓구멍이라도 파주게? 아니면 이 어르신의 콧구멍이라도 파는 영광을 줄까? 케케케, 그건 아주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아주 말이 야.”

그러자 용천명이 차가운 어조로 대꾸했다.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털보? 너 같은 무뢰한이 휘두르는 크기만 크고 쓸데는 없는 잡칼을 상대하는 데는 이 손가락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그 말에 거도가 폭소를 터뜨렸다.

“푸하하하하!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이 샌님아, 정신이 나가기라도 했냐? 얼굴은 반반하게 생긴 게 맛이 갔군. 제정신이 아냐.”

안됐다는 듯 거도가 혀를 찼다. 그러나 용천명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건 곧 알게 될 거다. 이게 평범한 손가락으로 보이나? 이건 소림(少林)의 공부가 깃든 손가락이다.”

거도는 비웃기 위해 한번 피식 웃었고 그런 다음 시뻘게진 얼굴로 자기 키보다 더 큰 칼을 직선으로 찔러 들어갔다. 휘두르거나 내려칠 거라고 생각하고 있던 관중 들은 이 의외의 공격에 깜짝 놀랐다. 당황한 탓인가, 용천명은 검지손가락을 치켜든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큰 소리는 나지 않았다. ‘땅!’ 하고 한 번 맑은 금속성 울림이 울렸을 뿐이다. 그러나 어느새 용천명과 거도 사이의 거리는 ‘무(無)’가 되어 있었다. 용천명 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있던 채 그대로였다.

그 광경을 지켜본 마하령의 안색이 파랗게 변했다. 커다란 도는 용천명의 등 뒤로 삐죽이 튀어나와 있었다. 마하령은 숨 쉬는 것조차 잊어버린 듯 창백했다. “커르르르륵! 커르르르륵!”

그때 어디선가 탁하게 가래 끓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소리의 진원지는 용천명과 거도가 격돌한 곳, 바로 그 중간이었다.

털썩!

한 사람의 무릎이 꺾이며 땅을 때렸다. 바로 거도였다. 어느새 그는 용천명을 향해 무릎을 꿇는 자세가 되었다. 용천명은 그런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 선은 무감정했다.

거도는 이내 부처님을 향해 절을 하듯 용천명 쪽으로 풀썩 쓰러졌다. 몇몇 고수들만이 그가 쓰러지기 전에 그의 목에 뚫린 동그란 구멍을 볼 수 있었다.

“저게 바로 소림의 탄지신통(彈指神通)!”

윤미는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다. 그가 비록 같은 구대문파의 하나인 화산파의 제자이기는 하나 다른 구파의 비전을 견식할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이 다. 그러던 차에 이런 곳에서 저런 절기를 견식하자 저도 모르게 흥분하여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러자 연비가 말했다.

“그래서는 삼십 점짜리 답안이에요. 첫 번째는 분명 그 탄지신통인지 뭔지 하는 건지도 몰라도 두 번째는 다른 지법이었어요.”

“두 번째요?”

“저기 저 털보의 목에 구멍을 낸 초식은 분명 다른 지법이었어요. 그렇지 않아요, 린?”

“연비 말이 맞아요. 아무래도 두 번째 지법은 소림의 금강지(金剛指)인 것 같아요. 하지만 큰 칼의 찌르기를 살짝 튕겨낸 지법은 탄지신통이 확실한 것 같아요. ‘깡!’ 하는 금속성은 그때 울린 거구요.”

“그걸로 백 점인가요?”

“그것까지 합쳐도 아직 육십 점이죠. 왜냐하면 마지막 하나가 더 있어요.”

“그것도 지법인가요?”

연비와 나예린은 동시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동시에 말했다.

“아뇨, 그건 바로 보법(步法)이에요.”

“보법이라고요? 하지만 용 공자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는데요?”

“그러니까 보법이죠.”

윤미는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연비도 그것이 보법이라는 것만 알고 이름까지는 알지 못했다. 사실 연비는 다른 문파의 비기 같은 것에 그다지 관심 이 없어서 제대로 깊게 알아보려고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다만 기억력이 좋아 그동안 천무학관에서 지내면서 귀동냥으로 들은 거랑 어쩔 수 없이 수업 시간에 필 수 교양 과목으로 배운 것을 잊지 않고 있는 것이 전부였다.

“이게 어찌 된 일이죠? 무박 선생님? 저 용천명 선수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쓰러진 것은 거도 선수일까요?”

무박 선생은 잠시 턱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더니 이내 입을 열며 소리쳤다.

“부동(不動)!”

“예?”

“저건 바로 소림의 비전 중의 비전인 ‘부동명왕보(不動明王步)’입니다. 어허, 저런 절기를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이 자리를 맡은 보람이 있군요.” 그의 목소리에 미미한 감탄이 어려 있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죠.”

미성공자 유진이 부탁했다. 그 역시 방금 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무척이나 궁금하던 차였다.

“조금 전 거도 선수가 자신의 거대한 칼로 찌르기를 시도했죠.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습니다. 찌르기는 칼의 이동 거리가 적기 때문에 보다 적은 허점을 드러내니 까요. 그리고 최단 거리로 상대와의 거리를 좁힐 수 있는 장점이 있죠. 그 순간 거도 선수와 용천명 선수의 사이의 간합은 직선이 되었습니다. 거도 선수의 칼끝이 정확히 용천명 선수의 폐 부위를 노리고 있었으니까요. 정석적이고 빨랐지요. 하지만 용천명 선수의 대응은 더욱 대단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칼끝을 보고도 움직이지 않았죠. 그리고는 내뻗은 검지손가락을 튕겨 찌르기의 축을 약간 빗나가게 했습니다. 아마 이때 쓴 지법이 바로 탄지신통이겠죠. 틀어진 축은 손톱 하나 정도의 차이였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습니다. 서로 직선일 때는 이 정도의 뒤틀림이면 찌르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바뀌어져 버리니까요. 실제로 거도 선수의 찌르기는 용천명 선수의 목옆을 살짝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옷깃이 조금 베이긴 했지만 살갗은 무사했죠. 그 순간 이미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무’가 되었죠. 용천 명 선수는 자신을 향해 달려온 거도 선수의 목을 ‘금강복마지(金剛伏魔指)’로 꿰뚫었으니까요. 저 금강복마지가 괜히 마(魔)를 복속시킨다고 불리는 게 아닙니다. 저걸 제대로 맞으면 자신도 모르게 두 무릎을 꿇게 되고 호흡이 곤란해져 앞으로 절하듯 쓰러지게 되죠. 마치 오체투지하는 듯한 자세가 되는 거죠.”

“음, 그거 정말 무서운 무공이군요.”

확실히 용천명을 향해 몸을 조아린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거도의 모습은 실로 끔찍했다.

“그 잔인성 때문에 소림에서도 일상에서는 거의 쓰지 않는 기술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런 기술을 이런 곳에서 보게 되다니 행운이군요. 아시다시피 여기는 지역 특 성상 소림의 무공은 아~주 구경하기 힘들단 말이죠.”

무박 선생은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런데 부동명왕보는 언제 사용한 겁니까? 용 선수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잖습니까? 혹시 너무 빨리 움직여서 제 눈에 포착되지 않은 겁니까?”

“아마 정말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을 겁니다. 그게 바로 부동명왕보의 요체이니까요. 제가 듣기로는 경지에 오르면 오를수록 움직이는 걸음 수가 적어진 다고 합니다. 삼 보 이상 걸음을 떼면 이미 부동명왕보가 아니라고 하더군요. 이건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사실 보법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상승 비결이라 보는 게 옳겠

지요. 겪어보면 알겠지만, 찔러오는 칼끝을 예민하게 단련된 감각으로 느끼고도 몸을 피하지 않기 위해서는 대단한 정신력이 필요로 합니다. 아마 용천명 선수가 저 자리에서 조금이라도 움직였으면 거도 선수의 찌르기는 그의 얼굴이나 폐를 가르고 지나갔을 겁니다. 끝까지 부동을 유지한 용천명 선수의 승리인 거죠. 그의 장담 대로 말입니다.”

용천명의 시합은 너무도 싱겁게 끝났다. 거도의 울퉁불퉁한 근육과 무겁기만 한 병장기로는 이 소림의 기재를 막을 수 없었다.

이 소림의 기재는 그의 장담대로 검을 뽑지도 않고 손가락 하나만으로 상대를 쓰러뜨리고 말았다.

“끝났군요.”

연비가 말했다.

“그러네요.”

나예린이 대답했다.

“재미있는 시합이었어요. 저기 세 분 소저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말이에요.”

진령과 남궁산산과 마하령은 말이 없었다. 아직도 조금 전 시합의 여파와 그때 본 광경들이 눈앞에 아른거리고 있었다. 한마디 뭐라고 쏘아붙일 줄 알았는데 세 사 람 모두 말이 없자 연비는 곧 흥미를 잃었다.

“자, 그럼 다음은 우리 차례군요. 이만 일어날까요?”

“좋아요.”

연비, 나예린, 그리고 윤미 세 사람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시합을 준비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그 ‘백의의원들과 싸우는 건가.”

윤미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두 사람의 뒤를 따라갔다. 첫 번째 선수는 바로 윤미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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