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7권 14화 – 남궁상, 절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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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27권 14화 – 남궁상, 절망하다

남궁상, 절망하다

ᅳ가깝지만 먼 길

아무것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친구들이 죽고, 동료들이 다쳐 가는데도 남궁상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은 한없이 무력하기만 했다.

남궁상이 지금까지 이렇게 절망적인 경험은 해본 적이 없었다.

“이럴 수는 없어!”

‘내가 죽더라도 친구들은 살려야 한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그 생각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서천의 실력은 압도적이었다.

그가 내뿜는 기파만으로도 청흔과 백무영, 그리고 남궁상과 진령은 이빨이 딱딱 부딪치고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릴 정도였다.

보이지 않는 손이 그들의 심장을 움켜쥐고 찌부러뜨리려 하고 있었다. 공포라는 이름의 냉기가 그들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고 있었다.

다리가 떨린다. 손이 떨린다. 이빨이 떨린다.

도망쳐라! 도망쳐라! 도망쳐라!

그들의 본능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지금 당장 도망쳐야 된다. 이 싸움에 승기는 없다. 싸우면 곧 죽을 뿐이다. 그것은 무의미한 죽음이었다. 싸워보기도 전에 이 미 승패가 나 있었다. 지금 그들의 실력으로는 그들에게 다가온 이 죽음을 벗어날 길이 없었다. 유일한 활로는 도망치는 것뿐.

으득!

남궁상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모든 압력을 견뎌내면서 한 발 앞으로 내딛었다. 그것을 본 서천의 눈이 이채가 떠올랐다. 자신의 살기를 받고도 이성을 유지한 채 움직이다니, 어린것들 중에도 상당히 강단이 있는 놈이 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저자를 막겠네. 자네들은 어서 배에 타게.”

검을 들어 서천의 미간을 겨누었다. 그러자 자신을 향해 쏘아져 오던 살기가 검극을 타고 갈라지며 조금 더 운신의 폭이 넓어졌다.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사나이라면 죽는 걸 알면서도 물러서지 못할 때가 있는 법이오. 그리고 그때가 바로 지금이오. 나는 이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겠소. 난 저들의 방패. 여기를 지나가려면 먼저 나 남궁상을 쓰러뜨리고 가야 할 것이오!”

“호오, 네가 바로 현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진의 아들이냐?”

“삼남 남궁상이오. 그리고 아버님의 존함을 함부로 입에 담지 마시오!”

“하하하하하! 너는 오히려 본좌에게 감사해야 한다. 큰절을 올려도 모자랄 판에 검을 겨누다니, 너야말로 은혜를 모르는구나.”

서천이 웃으며 한 말에 남궁상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은혜라니, 무슨 소리요? 아버님은 당신 같은 악적에게 빚을 질 분이 아니시오.”

“아니지, 빚이 있고말고. 은혜를 입었고말고. 왜냐하면 그 남궁진을 지금의 남궁세가 가주로 만들어준 게 바로 이 몸이기 때문이다.”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크크크크, 당대 남궁세가의 가주이자 남궁진의 무능한 형을 죽이고, 형보다 몇 배나 검술이 뛰어나다는 평을 듣고 있던 남궁진을 가주로 만들어준 게 바로 나다.” 남궁상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그에 관한 이야기는 들은 기억이 있었던 것이다.

“당신이 바로…… 아버님께서 쫓고 있던 ‘가문의 원수’였군.”

팔대세가 중 하나인 남궁세가의 가주이면서도, 아직도 남궁진이 정천맹에서 호법 일을 자청해서 하고 있는 것은 맹의 정보력을 이용해 가문의 원수를 쫓기 위함이 었다. 구 년 전 있었던 일은 기밀 중의 기밀이었지만, 남궁진은 그날 그곳에 있었던 당사자 중 한 명이었기에 정보에 대한 접근이 가능했었다. 물론 남궁상은 그런 사실까지는 몰랐다. 남궁진 자신은 원수의 정체를 알고 있었지만, 특급기밀이라 아들에게조차 알려줄 수 없었던 것이다.

“풋, 가문의 원수라? 가문의 은인을 잘못 말한 것이겠지. 왜냐하면 남궁세가는 멍청한 가주 때문에 쇄락해 가던 팔대세가 내의 위치를 내 덕분에 되돌릴 수 있었으 니까. 무능한데다 아첨꾼이었던 남궁호가 계속 가주로 있었다면 남궁세가가 지금 같은 성세를 누릴 수 있었을 것 같으냐?”

“이익…….”

그의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당시 무능한 남궁호가 가주가 되자 남궁세가의 위상은 날이 갈수록 쇠락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다시 되돌린 것이 바로 현 가주 남궁진의 공적이었다. 그는 무능한 형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기재로, 가문의 절기인 뇌전검법을 극성까지 연마한 인물이었다.

“쯧쯧, 남궁진도 어리석군. 본좌가 힘을 써서 가주로 만들어줬으면 그대로 부귀영화를 누렸으면 됐을 것을, 가주의 신분으로 무림맹주의 개 노릇이나 하고 있다니.”

“아버님은 백부님의 원수를 갚기 전에는 결코 남궁세가에 돌아오실 생각이 없다고 하셨소. 자신은 어디까지나 가주 대리라고. 원수를 갚는 날 남궁세가의 가주 위 에 오르겠노라고 맹세하셨소. 그 맹세의 무거움을 당신 같은 악인이 어찌 안단 말이오!”

세간에서는 남궁세가의 가주를 남궁진으로 인정하고 있지만 본인만은 자신을 여전히 가주 대리라고 칭하고 있었다. 물론 남궁세가의 대소사는 챙겼지만, 아직까 지도 무림맹에서 호법 일을 하는 것은 형님을 죽인 흉수의 행방을 쫓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이 바로 무림맹주 나백천의 곁이었기 때문이다.

“삼남이라고 했느냐? 아쉽겠구나. 하지만 방법이 있다. 형들이 무능하다고 생각하면 그 검으로 그들의 목을 베어라. 그럼 너는 다음 대의 남궁세가 가주가 될 수 있다. 정말 매력적인 일이 아니냐?”

“헛소리 마시오! 나 남궁상은 친혈육을 더러운 수법을 써서 상처 입히면서까지 가주가 되고 싶은 마음은 결코 없소!”

“불알이 달려 있나 의심스러운 녀석이로구나. 그래서야 사내라 할 수 있겠느냐?”

“당신 같은 살인마에게 사내가 아니라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소!”

서천을 똑바로 보며 남궁상이 외쳤다.

“야망이 없고서야 어찌 사내라 할 수 있겠느냐? 정말이지, 불알 두 쪽은 달려 있느냐?”

“닥치세요. 이 사람은 누구보다도 멀쩡하고 당당한 사내예요! 제가 증명할 수 있어요.”

갑자기 끼어든 것은 일행들이 노학과 당문혜를 지혈하느라 애쓰는 것을 걱정스레 지켜보고 있던 진령이었다. 자신의 남자가 사내 취급도 제대로 못 받자 경황 중 에도 열이 받아서 끼어든 것이다.

“호오, 직접 확인이라도 해본 듯한 말투로구나? 저 녀석의 여자냐?”

“그, 그, 그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남이 확인을 했든 안했든! 아무 상관도 없잖아요!”

얼굴이 홍시처럼 빨개진 채 진령이 소리쳤다. 그제야 자신이 욱하는 잠깐의 감정을 주체 못하고 제 무덤을 팠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뭐라고 더 쏘아붙이려고 하는 진령을 남궁상이 강제로 뜯어말렸다. 그냥 뒀다가는 상황이 더 악화될 뿐만 아니라, 쓸데없는 얘기까지 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난 엄연한 사내요. 당신이야말로 여인처럼 질투나 하지 않소? 가주 자리가 그렇게도 가지고 싶었소? 팔 병신이 되면서까지?”

누가 뭐래도 남궁상은 비류연의 수제자였다. 대사형이 어떻게 사람의 복장을 뒤집어놓는지 바로 옆에서 가장 많이 지켜본 사람이 바로 남궁상이었다. 남의 복장을 후벼 파는 방법은 그의 몸 안에서 숙성될 대로 숙성되어 있었다.

“흐흐흐, 그 입이 네 명을 재촉하는구나. 오늘 살아 돌아갈 생각은 말아라.”

“어차피 그런 건 포기했소! 하지만 내 연인과 친구들에게는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하게 하겠소! 내 목숨과 바꿔서라도!”

바로 그때였다.

“쯧쯧, 이 둔탱아. 내가 몇 번을 얘기해야 알아듣겠냐? 어떤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말랬지? 마음이 꺾이는 순간이 뭐라고?”

그 목소리는 남궁상의 바로 오른쪽 뒤에서 들려왔다. 남궁상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 서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마치 그에게 도전하기라도 하듯이. “바로 패배하는 때입니다.”

그러고 나서야 뒤를 돌아보며 기쁘게 외쳤다.

““대사형!”

그의 등 뒤에서 당당하게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비류연이었다.

“어디서 굴러먹던 말뼈다귀지? 저 앞머리가 치렁치렁한 놈은?

비류연을 본 서천의 머릿속에 첫 번째로 든 생각이었다.

“…….”

יין

그리고는 놀라고, 그런 다음 분노했다.

비류연의 곁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나예린이었다. 그리고 비류연의 손은 부축을 빙자하여 나예린의 허리에 감겨져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타인과의 신체적 접촉을 극도로 꺼리는 나예린이 별다른 혐오감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서천의 눈에서 무시무시한 기광이 번뜩였다. 검은 욕망이 그의 두 눈을 통해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가 그렇게 손에 넣고 싶어하던 순백의 작은 새가, 저 앞머리가 눈까지 가리는 어디서 굴러먹는지도 모를 말뼈다귀를 의지하고 있다니.

그 순간 무한한 질투가 그의 어두운 마음속에서 솟구쳐 올랐다.

“예린아, 넌 내 것이다! 그 누구의 것도 될 수 없어. 감히 본좌의 손아귀에서 도망치려 하다니! 다시 새장 속으로 돌려보내 주마!”

“그런 생각은 버리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전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전 이제 당신이 무섭지 않아요. 그래서 여기, 이렇게 섰습니다. 과거의 악몽을 잘라내기 위

해서.”

자신에 대한 두려움이 엷어진다는 것은 그의 존재감 자체가 옅어진다는 이야기였다. 그런 일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네 어미처럼 너도 날 버리고 떠날 생각이냐?! 그 늙은이에게로!”

서천이 광기 어린 목소리로 고함쳤다.

“어머니가 당신을 버리다뇨? 그게 대체 무슨 뜻이죠?”

나예린이 흠칫 몸을 굳히며 물었다. 그냥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서천이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채 소리쳤다.

“내가 두렵지 않다고? 과거의 상처를 회복하기라도 했다는 거냐? 웃기지도 않는구나. 하나 걱정하지 마라. 오늘 너에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겨줄 테 니. 아직 처녀겠지? 좋다, 내가 가져가마! 그 누구에게도 주지 않아! 난 더 이상 그자에게 내가 원하는 것을 빼앗기지 않는다! 두 번 다시!”

서천의 주위에서 어둡고 음습한 기운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지옥의 틈새에서 흘러나오는 독기 같았다. 그 독기는 나예린을 본능적으로 움츠리게 만들고 혐오감 을 불러일으켰다. 뱀처럼 붉은 혀와 사안이 그녀를 돌처럼 굳게 만들고 있었다.

아물었다고, 극복했다고 믿었던 상처가 삐걱삐걱 비명을 지르며 다시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그녀의 전신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자신을 압박해 오는 사기에 대응하기 위해 막대한 심력을 소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녀의 어깨를 감싸는 따뜻한 손 하나가 있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녀를 압박해 오던 사기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갑자기 몸이 가벼워진 나예린은 옆을 돌아 보았다. 그녀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린 채 비류연이 웃고 있었다.

“괜찮아요. 예린은 이겨낼 수 있어요. 원래 변태랑 정신병자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는 게 아니라고 그랬어요. 어차피 제정신도 아닌 말에 신경 쓰는 것 자체가 지는 거라고요. 저런 변태 아저씨 따위 두려워할 필요 없어요. 그리고 나도 있잖아요?”

“류연.”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서 따뜻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그 감정이 그녀의 전신을 감싸며 보호해 주는 듯했다. 류연의 말대로였다. 지금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 녀는 자신과 마주 보기로 결정했다. 이제 더 이상 과거의 악몽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기로 결정했다. 과거의 악몽을 끊어내고, 앞으로 나가기로 결정했다.

“그래요, 무섭지 않아요. 류연, 당신이 함께 있으니까요. 이제 전 악몽으로부터 도망치지 않아요. 나 자신으로부터도 도망치지 않아요. 과거의 악몽과 절 괴롭히던 세계와 마주 보겠어요. 전 더 이상 마음을 걸어 잠근 채 벌벌 떨던 어린 여자아이가 아니니까요. 그 굳게 잠긴 마음의 빗장을 당신이 열어줬으니까요. 전 앞으로 나 가겠어요.’

챙!

백설처럼 눈부신 검이 검집으로부터 뽑혀 나왔다. 새하얀 한기가 흐르는 검극이 서천의 미간으로 향했다.

“다시는 나의 잠을 괴롭히도록 두지 않겠어요.”

그것은 스스로 과거를 이겨내겠다는 당당한 선언이었다.

짝짝짝!

옆에서 보고 있던 비류연이 잘했다고 박수를 쳤다. 그런 다음 검을 쥔 그녀의 손을 잡으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물론 그래야죠. 하지만 지금 이 자리는 나한테 맡겨줄래요, 예린?”

“하지만…….”

“나도 지각한 것을 만회해야죠.”

비류연이 다시 미소 지으며 말했다. 사실 현재 나예린에겐 누군가와 싸울 만큼의 내공이 남아 있지 않았다. 금제를 풀고 뇌옥을 탈출하고, 그러다가 우연히 무명과 싸우면서 대부분의 진기를 소모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렇게 검을 빼 들고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의지의 힘이었다. 물론 지금 이 순간에는 저자와 맞서겠다는 그 ‘의지’가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니 비류연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의 의지는 잘 봤다. 이제 그다음은 나에게 맡겨라, 라고.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그래요. 그럼 지금은 류연에게 맡길게요.”

나예린은 다시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잘 생각했어요.”

비류연은 서천을 견제하며 진령에게 신호를 보냈다. 서천은 무방비해 보이는 자세로 팔짱마저 낀 채 별 우스운 구경을 다 한다는 듯 비류연 등을 보며 히죽거리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이쪽도 방심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대사형의 신호를 받은 진령은 주작단의 동료와 함께 그녀를 호위하며 배로 향했다.

피범벅을 한 채 기절한 노학, 지혈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슴에 구멍이 뚫린 채 흔들릴 때마다 왈칵왈칵 피를 쏟아내는 당문혜, 아직도 가사상태에 빠져 생사를 넘 나드는 현운, 치료는 받았지만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남궁산산 등이 최대한 신속하게 옮겨져 갔다.

옥유경은 영령과 힘을 합해 남궁산산을 옮겨가면서 서천을 스쳐 지나갔지만, 그의 얼굴을 본 옥유경은 한순간 눈을 빛냈을 뿐 입으로는 아무런 말을 내뱉지 않았

다. 물론 옥유경은 이미 초립을 빌려 쓰고 있었던지라 서천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게다가 언제든 나예린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일까? 아니면 너희들은 절대로 이 섬을 빠져나갈 수 없다는 자신감 때문이었을까? 별다른 제지도 없이 비웃음을 흘리고 있던 서천은 나예린이 지나갈 때는 홍소마저 터뜨렸다.

무명의 애송이인 비류연 따위는 단 일격에 처리하고 배가 항구를 떠나기 전에 바로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게다가 때마침 저쪽에서는 그의 심복들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이미 모든 것은 그의 손아귀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는 자신감. 그가 지닌 오만할 정도의 자신감 은 비류연에게도 확실히 느껴졌다.

마지막까지 비류연의 곁에 남은 것은 남궁상이었다.

“궁상아, 너도 먼저 가라.”

비류연이 남궁상을 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대사형!”

그의 시선은 다가오는 붉은 장삼의 남자 서천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좀 전에 그가 보여주었던 악마 같은 위세가 아직도 그의 몸을 떨게 하고 있었다. 과연 저런 괴 물에게 대사형이 이길 수 있을까? 이번만큼은 남궁상도 확신할 수 없었다.

“여긴 내가 막는다. 그러니 네 녀석은 애들을 데리고 빨리 배를 출항시켜.”

아직 남궁상을 비롯한 주작단이 저자를 상대하기에는 일렀다. 지금 상태로는 자신 역시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알 수 없었다.

“싫습니다. 대사형 곁에 있겠습니다. 저도 싸울 수 있습니다.”

주작단의 동료인 당문혜와 노학이, 그리고 천야진을 비롯한 동료들이 저 악마의 손에 피를 뿌렸다. 동료들의 희생에 조의를 표하지도 못한 채, 그 복수도 못한 채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멍청아, 그 몸으로 싸우긴 어떻게 싸우겠다는 거냐?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을 한 주제에? 그런 몸으로는 방해가 될 뿐이야.”

“싫습니다. 함께 배운 동문들의, 함께 웃고 떠들던 친구들의 원수가 눈앞에 있습니다. 저자를 그냥 두고 그냥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자 비류연은 남궁상의 머리카락을 마구 흐트러뜨려 주었다.

“윽, 대, 대사형!”

“멍청아, 넌 대장이야. 네가 책임지고 있는 녀석들을 끝까지 살려내야지. 때로는 사석도 던지라고.”

“대사형..

그 사석으로 자기 자신을 삼으라는 뜻이었다.

“알겠냐? 날 기다릴 필요는 없다. 배에 타자마자 돛을 올리고 무조건 떠나. 자, 가라!”

“대사형, 죽으시면 안 됩니다.”

“멍청아, 죽으면 네놈들을 괴롭힐 수 없잖아. 난 안 죽어. 원래 난 초절정 불사신 미소년이니까.”

싱긋 남궁상을 향해 웃어주었다. 남궁상이 비류연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인 그의 두 눈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렇게 자신들을 괴롭히던 대사형이 이런 때 자신들을 위해 희생을 하려 하다니…… 그만 감격하고 말았던 것이다. 감정이 북받쳐 올라 심장이 타오르는 듯했다. 하지만 대사형의 말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이미 서천의 부하들이 지척에 달해 있었다. 여기서 그가 발을 멈춘다면 지금까지의 희생은 물거품이 되리라.

“그럼 가보겠습니다, 대사형!”

남궁상은 이를 악물고 배를 향해 달렸다. 비류연은 돌아보지 않은 채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래, 좀 있다 만나자.”

촤악!

비류연이 손을 휘두르자 그의 발치 뒤에 기다랗게 금 하나가 그어졌다. 족히 삼 장은 되어 보이는 금이었다.

“여기서부터는 통행금지예요. 다른 길을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그러나 코앞까지 달려온 일번대 대원들이 비류연의 말을 들을 리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 그는 그저 제거해야 할 적이었다. 그들은 일제히 병장기를 뽑아 들고 달려 들었다. 일번대답게 훈련된 숙련도가 다르다.

그러나 오늘은 상대가 나빴다.

비뢰도(飛刀) 오의(奧義)

검기사살기(死殺)

풍운뢰명(風雲鳴)의 장(章)

뇌광류하곡(雷光流河曲)

비류연의 손에서 다섯 줄기의 비뢰도가 발출됨과 동시에 음악을 연주하듯 비류연의 손가락이 뇌령사 위를 누빈다.

그것은 하나의 연주, 바람과 구름과 천둥을 부리는 전율의 연주였다.

공간을 찢어발기듯 뇌광이 달린다.

뇌령사가 뇌전의 그물이 되어 하늘과 땅 사이를 감싸며, 그에게 걸려든 모든 것을 잘라낸다.

그것도 목숨만은 남겨놓은 채, 옷가지와 무기들을 골라내 잘라 버린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비뢰도의 힘. 사람의 생사는 뇌령사 위를 누비는 비뢰도의 주인에게 달려 있었다.

뇌광류하곡이 일거에 주변을 휩쓸자, 여기저기서 일번대 대원들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당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쓰러져야 했다.

죽이지는 않았지만, 상처를 입히는 것까지 망설일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다만 사번대가 좀 바빠질 것이고, 치료받는 일번대 대원들에게는 끔찍한 기억으로 남게 되리라. 이것은 나예린을 납치해 간 자를 따르는 자들에 대한 벌이라 봐도 좋았다.

‘역시 위력엔 이상이 없는데…….?

편수 다섯 개로 펼치는 뇌광류하곡이었지만, 그다지 위력에 문제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편수를 펼치는 것치고는 예전보다 날카로움이나 위력이 증가한 듯 보였다. 역시 약간의 깨달음을 얻어 좌수룡을 제압한 덕분일까? 미세한 제어력은 훨씬 더 강화된 것 같다.

그런데 왜 좀 전에는 파훼되었지? 위력에는 아무 이상이 없는데?

그자는 대체 누굴까?

하긴 그 자신도 자기를 모른다니까, 그가 누구인지 대답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얘기였다.

비류연은 머리를 설레설레 저으며 눈앞의 적에 한층 더 집중했다. 그 무명이라는 자와는 어차피 당분간 만날 일도 없을 테니, 그자에 대해서는 천천히 생각해도 늦 지 않았다.

비류연은 눈을 들어 서천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저자는 자신의 적.

그리고 예린의 적.

그리고 무림의 적.

그는 마침내 예린의 마음에 상처를 내놓았던 놈과 조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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