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7권 17화 – 바람을 부리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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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27권 17화 – 바람을 부리는 자

바람을 부리는 자

-그리고 새로운 일행

‘서, 설마……..

용천명과 마하령을 비롯한 천무학관의 사절단들은 좀 전에 그들이 목격한 광경에 너무 놀란 나머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고 있었다.

이런 게 인간의 몸으로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혹, 지금 그들이 꿈을 꾼 것은 아닌가?

용천명은 좀 전과 같은 현상을 본 기억이 있었다. 그가 수모를 당했던 화산지회의 홍매곡에서.

물론 그때는 지금과 같은 물기둥이 아니었다. 그때는 하늘을 태워 버릴 듯 이글이글거리던 화염 기둥이었다. 용천명은 그때 그 눈에 화인(印)처럼 박힌 그 광경 을 지금도 결코 잊지 못하고 있었다.

후일, 그는 그 업적이 오직 단 한 사람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듣고 경악했다.

그리고 경탄했다. 그 사람이 그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젊은 청년 고수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더욱더 감복하게 되었다. 그러나 끝끝내 그 사람의 정체까지는 듣지 못 했다. 화산지회에 참가한 모든 사람을 구하는 위업을 달성했으면서도 자신을 내세우지 않다니, 그 겸손함에는 탄복, 또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때 그 사람에게 붙여진 별호가 바로…….

용천명의 시선이 비류연의 얼굴로 향했다. 그를 따라 천무학관 사절단 대부분이 비류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떨리는 목소리로 용천명은 입을 열었다. 그 안으로부터 한 사람의 별호가 흘러나왔다.

“신풍협(神風俠)…….”

그제야 사람들은 자신들이 신풍협이라 부르며 우러러보던 이의 정체가 그들이 운수대통 격타금’이라 이름 붙이고 조롱하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달았 다.

때 아닌 찬비를 맞으며, 비통함을 가슴속 깊이 갈무리하던 비류연은 한참 후에야 조용한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왜 이렇게 조용해? 모두들 벙어리라도 된 거야?”

갑판 위는 경악에 휩싸인 사람들로 인해 침묵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모두들 좀 전에 그들의 주위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경악하고 있었다.

“이젠 모두 끝난 거겠지?”

남궁상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비류연의 몸이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풍신을 쓰느라 모든 기력을 소모한 탓이었다. 그렇게 무너지는 그를, 깜짝 놀라며 뒤에서 받아 드는 새하얀 손이 있었다. 그 옥수의 주인은 다름 아닌 나예린이었 다. 쓰러지듯 품에 안긴 비류연을 나예린은 조심스레 바닥에 눕혔다.

“류연, 괜찮아요?”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가 부드럽게 귀를 울렸다.

아, 부드럽다.

아, 포근하다.

은은하고 부드러운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하늘하늘 부드러운 비단의 감촉이 그의 볼을 간질였다.

그는 어느새 나예린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는 상태가 되었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려고 했으나, 제대로 보이지가 않았다.

눈꺼풀이 자꾸만 천근만근 무겁게 그의 시야를 눌러 내리기 때문이었다.

깜빡, 또 깜빡. 꾸벅, 또 꾸벅.

피로와 함께 엄청난 졸음이 쏟아져 내렸다.

편수 풍신을 성공시켰다는 성취감을 채 맛보기도 전에, 졸음이 그의 이성을 빼앗아가고 있었다.

풍신을 쓰고 아직도 의식이 남아 있는 게 신기할 뿐이었다.

“좌수룡을 제압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일까??”

하지만 그 경지도 이 졸음을 막아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졸렸다. 미치도록 졸렸다.

‘이제 모두 끝났겠지?”

더 이상 추적의 손길은 없겠지?

그러니까, 이제 맘 편히 자도 되겠지?

맘이 편하든 안 편하든 일단 잘 생각이긴 하지만..

펑! 펑!

그때 저 멀리서 환청 같은 폭음을 동반하며 쪽배 하나가 바람 같은 속도로 날아왔다. 그 배는 호수 위를 나아가고 있는 게 아니라 거의 물수제비처럼 수면 위를 튀 며 날아오고 있었다.

그 위에 타고 있는 사람은 은발의 젊은 남자와 한 명의 여리여리해 보이는 소년이었는데, 바로 육번대 대장 무명과 부대장 쾌검동자 장소옥이었다.

챙!

수십 개의 검이 무명을 향했다.

긴박한 상황 때문에 억지로 정신을 차린 비류연은, 눈을 뜨자마자 고소를 금치 못했다.

“어쩌지?”

지금의 자신들이 떼로 덤빈다 해도 그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비류연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냥 잡혀줄 수도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제 그에겐 더 이상 싸울 힘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런 중에 가장 무서운 적과 마주치게 되다니.

쩝!

천하의 비류연이라 해도 진퇴양난의 기분을 맛볼 수밖에 없었다.

“왜들 이래? 흉험하게 병장기들을 꺼내 들고는? 빨리 그것들 좀 치워.”

무명은 이들의 행동이 이해가 안 가는 모양이었다. 무명의 행동이 이해가 안 가기는 비류연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

나예린의 품에서 몸을 일으켜 앉은 비류연은 실소를 금치 못하고 되물었다.

“왜 이러긴요? 우리들을 잡으러 온 것 아니었나요?”

“아니, 왜 내가 그런 일을 해야 하는데?”

“그야 마천십삼대의 대장이니까요.”

지금 그들에게는 마천각의 추살령이 떨어져 있으리라. 그러니 마천각의 대장인 그에게는 그들을 보는 즉시 죽이거나 잡아들일 의무가 있을 것이 아닌가. “아, 그거라면 걱정 마. 지금은 휴가 중이야.”

“휴가요?”

그런 걸로 해결될 문제인가? 하는 의심이 들지 않는 건 아니지만, 무명에게는 그걸로 끝인 모양이었다.

“엉, 휴가 중. 백 년 만의 휴가지.”

그의 기억이 틀림없다면 지난 백 년간 거의 쓴 적이 없는 휴가이기도 했다.

“서, 설마 아까 했던 말씀이 농담이 아니라 진짜란 말입니까?! 아니, 그건 둘째 치고 아직 휴가계도 안 내셨잖아요!” 창백한 얼굴로 옆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장소옥이 경악하며 끼어들었다.

“냈는데? 휴가계, 유급휴가로, 소옥이도 함께 봤잖아?”

그 말을 들은 장소옥의 얼굴이 순간 창백하게 변했다.

“설마, 혹시나 해서 묻는데, 그… 각주님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그 ‘종이 쪼가리’ 말씀이신가요, 대장님?”

“어, 그거.”

무명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옥이 것까지 확실히 두 장 냈어. 나 잘했지?”

장소옥의 고개가 영영 꺾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푹 꺾였다.

“뭐라고 써놓으셨는데요?”

“그거야…….”

장소옥의 얼굴 위로 서서히 비참한 표정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거의 절망에 가까운 비참함이었다. 무엇이 이 소년을 이리도 비참한 기분에 젖게 만드는 것일까? 그는 기억났던 것이다. 무명이 그 종이 쪼가리 위에 뭐라고 써 갈겨 놨는지가.

무명:유급으로 장기휴가 감. 찾지 말 것.

장소옥따라감. 이하동문.

그렇게 두 장을 휘갈겨 쓴 다음, 툭 던져 놓고는 그대로 달려온 것이다. 게다가 그 휴가처가 마천각을 침입한 침입자들의 곁이라니, 놀랄 노자가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더 큰 문제가 아직 남아 있었다. 휴가계를 제출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결재를 받지는 않았던 것이다.

과연 그 휴가계가 통과되기나 할까?’

소옥이 머리를 쥐어뜯든 말든 비류연은 다시 질문을 이어갔다.

“간만에 유급 휴가라니 축하해야겠네요. 근데 왜 이 배를 타신 거죠? 휴가지로 가시려면 다른 배를 타는 게 더 낫지 않겠어요?”

“아니, 왜 다른 배를 타?”

“왜라니요? 당연히 그래야죠, 목적지가 다르잖아요?”

“걱정 말게. 목적지는 같으니까.”

“…….”

이 인간이 지금 뭐라고 지껄이고 있는 거지? 비류연은 지금 엄청 피곤한 관계로, 잠이 비 오듯 쏟아지고 있어서 사고를 명쾌하게 진행할 수가 없었다. 다만 막연한 불길함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난 자네들과 함께 휴가를 보낼 생각이거든.”

무명이 비류연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그 눈은 특히 자네랑’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모처럼의 휴가라면서요? 고맙지만 이쪽은 사양할게요. 어딘가 멀쩡한 선착장에 도착하면 내려 드릴 테니, 그동안 천천히 행선지를 변경하시지요?”

“아니, 사양 안 해도 돼. 다른 데는 다 시시하거든. 내 흥미는 오직 자네뿐일세.”

“별로 기쁘지 않은 고백이군요. 전 남자 취향은 아니거든요.”

“상관없네, 자네의 기분은. 중요한 건 내 기분이지.”

비류연의 기분은 어찌 됐든 상관없다는 그런 태도였다. 자신이 당하니 참으로 신선할 정도로 빌어먹을 기분이었다. 이 인간도 지지 않을 정도로 상당히 자기 중심 적인 인간인 듯했다.

“원하는 게 뭐죠?”

비류연의 물음에 무명은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자네와의 승부(勝負)!”

나예린이 약간 경계하는 시선으로 비류연을 감쌌다. 비류연은 점점 골치가 아파졌다.

“왜 승부에 집착하죠? 별로 그런 거에 집착할 것처럼 보이진 않는데요?”

무명, 그에게는 어딘지 초탈한 듯한 분위기가 있었다. 승부의 행방 따윈 그리 중요한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자네와의 승부는 의미가 있어. 날 완전하게 만들어줄 것 같다는 묘한 예감이 든단 말일세.”

무명으로선 잃어버린 기억에 대한 유일한 단서를 이대로 놓아줄 생각은 결코 없었다.

‘내려달라고 해도 안 내리겠지??

지금이라도 내려주면 좋겠지만, 동정호 한가운데서 뛰어내릴 생각은 좀처럼 없는 듯했다. 그렇다고 강제로 하선시키기에는 이쪽의 전력이 부족했다.

“그런 이유로 당분간 자네 옆에 있을 테니, 잔말 말라고.”

그걸로 대화는 끝이었다.

“아무래도 엉뚱한 혹이 붙은 것 같네요…….”

비류연답지 않은 한숨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 혹은 어째 생각만큼 쉽게 떨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지 않았다.

“그럼 예린…… 난 잠깐 눈 좀 붙일게요.”

“네, 잘 자요, 류연.”

비류연은 나예린의 무릎을 베개 삼아 다시 누운 채,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막대한 기력을 소모한 이상, 더는 쏟아지는 잠을 이겨낼 수 없었다. 일단 무명의 존재

가 당장은 위협이 되지 않을 것 같다는 사실로 만족해야 될 듯했다.

“아무래도 긴 휴가가 될 것 같군.”

무명이 걷혀가는 안개를 보며 가슴을 활짝 펴고 외쳤다.

그의 입가에는 앞으로 기다리고 있는 나날들에 대한 기대로 미소가 가득했다.

반면 그제야 무장을 해제한 남궁상들의 얼굴에는 경계심만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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