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방문자
-접객당주 정한의 당황
[흑도천하무림총연합연맹.]
줄여서 흑천맹(黑天盟).
언제나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거대한 흑천맹의 대문은 언제나 방문하는 이들을 압도한다. 물론 이 커다란 대문이 없더라도, 그 이름만으로도 방문자는 심신을 압박받게 마련이다.
하지만 오늘따라 언제나 진중하던 흑천맹의 접객당이 때 아니게 소란스러웠다.
“그, 그게 정말인가?”
접객당주 정한은 자신이 눈앞에 들고 있는 첩지를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저, 정말입니다.”
그의 부하 역시 믿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이렇게 첩지를 받아 들고 한달음에 달려온 것 아니겠는가.
“그럴 리가 없네. 그럴 리가 없어. 뭔가 잘못된 거야. 뭔가 잘못됐어. 분명 가짜가 분명해!”
접객당주 정한으로서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게 가장 타당했다.
“그, 그럼 쫓아낼까요?”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접객당 소속의 부하가 되물었다.
“미쳤냐?!”
정한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만에 하나, 억에 하나 진짜라면?”
감히 어디서 거짓부렁을 씨부렁거리느냐고 으름장을 놓았던 문지기를 너무도 간단히 바닥에 패대기쳤다고 하지 않는가. 흑천맹의 정문 앞에서 그런 일을 할 배짱 을 가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듣기로는 기도 역시 범상치 않다고 한다.
사실 여부가 명확하지 않을 때엔 사람을 접대하는 자로서 신중을 기해야 한다. 왜냐하면 접객이라는 것은 그 조직 전체의 첫인상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야간 당직은 ‘그분’이시지?”
정한이 확인차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만? 서, 설마!”
접객당주 정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분에게로 가자. 검마(劍魔)님, 그분이라면 진위를 구분해 주실 수 있을 거네. 이 첩지를 가져온 자가 진짜인지 아닌지.”
검마 초월.
흑천맹 십대고수인 흑천십비(黑天十碑)의 한 사람.
검의 귀재, 검의 마인.
만일 가짜라면, 그자는 살아남지 못하리라.
지금까지 검마를 분노케 하고 살아남은 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만일 진짜라면.
수십 년에 한 번 받을까 말까 한 손님이라 할 수 있었다.
***
똑똑.
“무슨 일이냐?”
흑천맹 당직실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훑어보고 있던 검마 초월은 잠시 보던 서류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초 호법님, 접객당주 정한입니다.”
“접객당? 접객당에서 무슨 일이지, 날 다 찾고?”
이미 접객 시간은 끝나 있었으니 접객당주가 그를 방문할 이유가 딱히 없었다.
“손님이 한 분 찾아왔습니다.”
“이런 시각에?”
“그 사람을 한번 만나봐 주셔야겠습니다.”
“노부한테 온 손님인가?”
“아닙니다.”
“그럼?”
검마 초월의 눈썹 끝이 꿈틀거렸다. 그는 무력 전문이었지 손님 접대는 해본 적이 없었다. 설령 검마가 사람을 맞이한다 해도, 그를 눈앞에 둔 손님이 두려움으로 덜덜 떨 게 분명하기 때문에 적합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자신에게 찾아온 것도 아닌 손님을 대체 어쩌라는 건가.
검마의 독촉 어린 시선에도 불구하고 정한은 한동안 뜸을 들이다가 우물쭈물 답했다.
“초대장도 없고 약속도 잡히지 않은 손님이 맹주님을 만나 뵙고자 왔습니다만..
검마의 인상이 더욱 찡그려졌다. 접객당 당주가 여기까지 온 걸 보면 이름 좀 있는 위인이 찾아왔나 본데, 그래 봤자 예정에 없는 불청객은 불청객일 뿐. 더는 볼 것 도 없었다.
“돌려보내게. 흑천맹의 맹주를 만나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보다 자네가 알지 않나. 게다가 이미 객을 받는 시각도 지나지 않았나? 그래도 정 만 나고 싶다면 정식으로 면담 신청을 요청하라고 하게 한 육 개월 후라면 잠시 짬이 날지도 모르지.”
“그게 저…… 그럴 수가 없습니다.”
정한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왜 그럴 수가 없단 말인가?”
검마 초월의 눈썹이 순간 꿈틀거렸다.
“그게 저… 그 사람의 신분 때문입니다.”
“그자의 신분이 뭐기에 감히 흑천맹에서 고집을 피운단 말인가?”
검마가 버럭 소리쳤다. 노기가 가득한 목소리였다. 정한은 점점 더 송구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저…… 이번 방문자가 자신을 정천맹주 나백천이라고 밝혔기 때문입니다.”
“뭐라고? 그게 정말인가?”
좀처럼 놀라는 일이 없던 검마 초월의 눈이 경악으로 인해 부릅떠졌다.
“제가 어찌 초 호법님 앞에서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가짜가 아니고?”
정천맹주씩이나 되는 사람이 이런 야밤에 아무런 약속도 없이 올 리가 없지 않은가?
“물론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 선에서 판단할 문제가 아닌지라…….”
“그래서 노부한테 온 것이로군. 노부가 나 맹주와 안면이 있으니까.”
“네, 그렇습니다.”
진위 확인도 맡기고, 책임 전가도 하고, 정한의 입장에서는 일석이조라 할 수 있었다.
“맹주님은?”
물론 ‘이쪽’ 맹주 얘기였다.
“아직 집무실에 불이 밝혀져 있는 걸 확인하고 오는 길입니다.”
“앞장서게.”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할 때, 검마 자신이 직접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채비를 하고 방을 나서면서도 검마의 머릿속은 수십 가지 의문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쩐지 불길하군.’
왠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이때, 흑천맹주 갈중천은 집무실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부재는 그리 길지 않았다.
“후아, 시워~언하다.”
‘그녀들에게서 온 서찰을 정리하다가 잠시 용변을 보기 위해 집무실을 비웠다가 돌아온 갈중천은 깜짝 놀랐다. 집무실 안에 인기척이 느껴졌던 것이다.
“누가 왔다는 보고는 듣지 못했는데?”
그의 집무실 주변은 다섯 겹의 호위 체계가 갖추어져 있었다. 그런데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이곳까지 들어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 다.
‘암살자치고는 너무 노골적인데??
일류 암살자라면 이렇게 ‘나 여기 있소’라고 외치는 듯한 기척은 내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그런 하류 암살자라면 이곳까지 들어오지도 못한다.
‘그렇다면 대체 누구지?”
불안감보다는 호기심이 먼저 솟아올랐다. 그 역시 흑도 전체를 통괄하는 흑천맹의 맹주였다. 그러기 위한 정신적인 능력 및 육체적인 능력 역시 모두 갖추고 있다 고 자부하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쉽게 당하지 않는다는, 누구라도 쓰러뜨릴 수 있다는 그런 자부심이었다. 때문에 그는 두려움없이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 느닷없는 불청객의 정체가 궁금했던 것이다.
“…..”
그자는 자신의 집무실 탁자 앞에 태연히 앉아 있었다. 그의 뒷모습은 무척 낯이 익은 것이라 갈중천은 깜짝 놀랐다. 아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선생님?”
흑천맹주의 입에서 높임말이 나왔다. 상대는 그가 경어를 쓰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그의 집무실에 당당히 앉아 있는 사람, 그는 바로 마천각주였다. 갈중천 역시 한때 그의 밑에서 배운 적이 있었다. 아직 그의 아버지가 흑천맹을 통솔하고 있을 때, 그는 마천각의 학생으로 오랜 시간을 보냈었다. 지금은 수십 년의 시간이 흘렀는데도 마천각주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변함이 없었다. 아니, 더 깊어졌다.
이 사람은 어디까지 강해질 생각인 걸까?
“아, 자네 왔군. 잠깐 자네에게 비밀리에 해줄 얘기가 있어서 찾아왔네. 중요한 일이지.”
가면을 쓰고 있는 장포인, 마천각주가 고개를 돌리며 대꾸했다. 그 역시 갈중천에게 경어를 쓰지 않는 입장이었다.
“어지간하면 각을 떠나지 않는 분이 일부러 이곳까지 오시다니요? 그것도 ‘그곳’까지 써가시며. 깜짝 놀랐습니다.”
“남에게 시킬 수 없는 일이었네.”
“어지간히 중요한 일인 모양이지요? 대체 무슨 일입니까?”
“자네에게 경고를 해주기 위해서라네.”
“경고요? 무슨 경고 말입니까?”
잠시 무겁게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자네를 노리는 암살 계획이 물밑에서 진행되고 있네. 자네의 목숨이 위험하네!”
가면 때문에 표정을 알 수 없었지만, 그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암살 위협이오?”
갈중천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렇네. 그것도 극도로 높은 가능성을 지닌 계획이네.”
마천각주가 매우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갈중천은 오히려 파안대소했다.
“크하하하하하! 난 또 뭐라고. 크하하하하하하. 겨우 그런 일로 그 먼 길을 오셨습니까?”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한 갈중천의 태도에 마천각주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웃을 일은 아닌 것 같네만?”
“저야 그런 계획이나 암살 위협을 하루에도 수차례나 받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는 거의 일상이지요. 그런 거 무서우면 어디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흑천맹의 맹주 자리란 그런 위협이 그저 일상이나 다를 바 없는 세계였다.
“이번에 자네 목숨을 노리는 자는 그런 잡어(雜魚)랑은 다르네.”
“누굽니까? 천하의 흑천맹 맹주의 목을 딸 수 있는 사람이 말입니다. 전 무림을 통틀어도 열도 채 안 될 것 같은데요?”
“그건 인정하지. 하지만 그렇기에 내가 직접 온 것이라네.”
“설마…….?
이번에야말로 갈중천은 진짜로 놀랐다.
“맞네. 이번 암살자는 그 열() 중 하나일세.”
“누굽니까, 그 사람이?”
“듣고 놀라지 말게. 그건 바로 정천맹주 나백천, 그 사람이라네.”
듣고 놀라지 말라고 했지만 갈중천은 놀라고 말았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선생님. 잘못된 정보겠지요.”
갈중천이 강하게 부정했다. 그의 상식으로 볼 때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마천각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안타깝지만 사실일세.”
확신에 가득 찬 말투에 갈중천의 마음이 잠시 흔들렸다. 그러나 역시 납득이 되지 않는다.
“나 맹주 그 사람은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아무리 흑도와 백도로 갈라져서 대립하고 있지만, 그렇게까지 엄한 일을 저지를 인물이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그와는 먼 친척뻘이었다. 그와 빙월선자 예청이 가까운 인척 관계이니 말이다. 그에게는 일부러 분란을 만들―그것도 전쟁으로까지 번질 수 있는― 이유가 없었다.
“물론 그럴 인물이 아니지.”
마천각주도 그 사실에는 순순히 인정했다.
“그런데 왜……?”
더욱더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이번 일은 그 인물됨과는 상관없네. 아니, 그 친구가 사람이 너무 좋아서 이 일을 벌일 가능성이 있지.”
“무슨 일이 있습니까?”
심상치 않음을 느낀 갈중천이 반문했다.
“노부가 얻은 정보에 의하면 그의 딸 나예린이 납치된 것 같네.”
“예린이가요?”
갈중천도 그 기이한 마력을 지닌 아름다운 아이를 기억하고 있었다. 직접 만나본 적까지 있었다. 큰 숙부라고 부르라고 했던 일도 있었다. 그 나백천이 딸에 대해 서라면 얼마나 정성을 쏟는지, 얼마나 팔불출인지, 얼마나 물불 안 가리는지, 얼마나 무모해지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리고 그를 납치한 자들이 그에게 협박하고 있다는 정보가 있네. 그 딸아이의 목숨을 살리고 싶다면 자네의 목을 가져오라고 말일세.”
갈중천은 무의식중에 자신의 목을 손으로 쓸었다. 백뢰진천검 나백천의 노림을 받는다는 것은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었다. 다만 그가 흑천맹주 갈중천이 아니라면 말이다.
“믿을 수가 없군요.”
“자넨 날 믿어야 하네.”
마천각주가 예의 그 확신에 가득 찬 어조로 말했다. 그의 말은 조용했지만, 한 점의 의심도 담겨 있지 않아 듣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다.
“어떻게 말입니까?”
“자네도 이 일이 커지는 것을 원치 않겠지?”
“그야 그렇죠. 두 사람 개인의 문제로 끝나지 않을 테니까요.”
성공하든 실패하든 이 일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일이었다.
“나에게 좋은 생각이 있네.”
그리고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의 계획은 이러했다.
나백천이 어쩔 수 없이 암살을 시도할 가능성이 있다. 포기할 가능성도 있지만 그의 딸 사랑을 생각해 볼 때 보장할 수 없다. 그렇다면 마천각주가 몰래 이 집무실 에 숨어 있다가 나백천이 공격을 하면 그가 대비하고 있다가 나백천을 제압하는 게 어떠냐는 계획이었다.
“물론 미수로 끝나더라도 암살을 시도한 일 자체가 문제가 되겠지. 그렇게 되면 그걸 빌미로 몇 가지 이권을 긁어낼 수 있을 걸세. 지금까지 대립하며 말썽을 부리 던 몇몇 안건에 대해서도 양보를 받아낼 수 있을 거네. 무엇보다 정천맹주의 약점 하나를 쥐게 되는 거지.”
빌미를 잡는 건 좋지만, 공개되는 것은 갈중천으로서도 원치 않는 일이었다.
“그거 좋은 생각인 것 같군요.”
“동의하나?”
“동의합니다. 그런데 선생님?”
“왜 그러나?”
“그 더워 보이는 가면은 이제 그만 슬슬 벗어도 좋지 않을까요?”
“시답잖기는. 자네도 알다시피 이 가면이 없으면 학생들에게 위엄이 서지 않지 않겠나?”
“그건 그렇군요.”
“마천각을 맡은 입장으로서는 곤란하지. 자, 그럼.”
자리에서 일어선 마천각주는 갈중천의 등 뒤에 펼쳐져 있는 팔폭 병풍 뒤로 조용히 모습을 감추었다. 병풍 뒤에 몸을 숨긴 그는 자신의 장포를 살짝 들추었다. 그 곳에는 하얀 뇌광처럼 빛나는 새하얀 검 한 자루가 매달려 있었다.
접객당주 정한을 따라나선 검마는 신중을 기하기 위해, 바로 접객당으로 향하진 않았다. 대신 대기실 건넌방으로 가서 비밀 구멍을 통해 방문자를 살펴보았다. “어떻습니까?”
“확실히 같은 얼굴이군.”
검마가 자신도 모르게 낮은 침음성을 흘리며 말했다. 분명 저 얼굴은 정천맹주 나백천의 얼굴이었다. 그런데 왜 이런 시각에 이런 장소에서 이런 방식으로 방문한 단 말인가? 그 점이 너무나도 이상했다.
“하지만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해서 진짜라는 보장은 없지.”
여긴 온갖 귀계가 난무하는 강호였다. 겉만으로 선뜻 판단하기에는 섣부른 감이 있었다. 남과 똑같은 얼굴로 변하는 역용술마저 존재하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겉만 보고 판단하다가는 큰코다치는 수가 있었다.
“노부가 직접 확인해 봐야겠네.”
알맹이를 확인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단 하나. 검을 섞어보면 알 수 있었다. 얼굴은 흉내 낼 수 있어도 검기마저 흉내 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검마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검기를 끌어올렸다.
가만히 앉아 있던 나백천의 입이 열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언제부터 검마씩이나 되는 사람이 숨어서 남이나 몰래 엿보게 되었나?”
그 한마디에 검마는 몸을 굳혔다. 그의 검은 검집에서 채 반도 뽑혀 나오지 못했다.
“어…… 어떻게 그걸……..
검마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나백천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검마, 자네 정도 되는 검객의 기세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나? 그 정도는 기억하고 있다네.” 검초가 아니라 검을 뽑을 때의 기세만으로도 벽 너머의 존재가 그를 알아챘다는 뜻이었다. “확실히 진짜로군.”
채 뽑히지도 못한 검을 도로 집어넣으며 검마가 정한을 향해 말했다.
검마는 나백천이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들어가며 포권지례를 취했다.
“어서 오십시오, 나 맹주님. 오늘 방문이 너무나 급작스러운 일이다 보니 무례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좀 전의 무례는 부디 잊어주시기 바랍니다.” “신경 쓰지 않네. 오늘 방문이 급작스러운 건 나도 알고 있네. 하지만 꼭 갈 맹주를 뵈어야겠네. 기별을 넣어주겠나?”
상대가 진짜 나백천임을 확인한 이상 그의 선에서 그의 방문을 거절할 권한은 없었다.
“그리하겠습니다. 그런데 곤란한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곤란한 일? 그게 뭔가?”
검마는 약간 망설이는가 싶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원래 맹주님을 방문하시는 모든 분은 몸수색을 받아야 하는 게 본 맹의 규칙입니다.”
나백천은 잠시 침묵했다. 그의 신경이 무의식적으로 그가 품고 있는 쇄혼독비로 향했다. 이런 귀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알려져서는 좋을 게 없었다. “그래서 하겠다는 건가?”
“……”
검마는 즉답하지 못했다. 그 역시 이 상황이 매우 애매한 상황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정천맹 맹주인 나 나백천을 말인가?”
다른 사람이라면 맹주를 방문하기 전에 몸수색도 받고, 무기도 모두 맡겨놓고 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정천맹, 백도 무림맹의 맹주라면 얘기가 달랐다. 무림의 반을 통치하는 자를 의심하는 행위이기도 한 그 행동은 대단한 결례인 것이다.
“그것이 어떤 선례를 남길지는 자네도 알고 있겠지?”
정상회담에서 서로 칼을 휘두르는 일이란 원래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두 집단이 견원지간이라고 해도, 혹은 원수지간이라고 해도. 그것은 곧 대의명분을 잃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무림에서 매우 치명적인 일이었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갈 맹주가 우리 정천맹을 방문할 때 몸수색을 받는다면 자네 기분이 어떻겠나?”
그 말이 결정타였다.
“몸수색은 한 걸로 치겠습니다.”
더 이상 검마는 할 말이 없었다.
“그래 주면 고맙겠네.”
그걸로 모든 방문 절차는 끝났다.
“그럼 안내하겠습니다. 따라오시지요.”
검마의 뒤를 따라가면서도 나백천은 속이 편하지 않았다. 아니, 흑천맹주와의 면담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그의 마음은 점점 더 초조해지고 있었다. “아직도 아무런 소식이 없다니…….’
역시 단 하루 만에 딸아이를 구출한다는 생각은 너무나 무모한 행위였던 건가? 애초에 시작하기 전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던가?
나백천은 될 수 있는 한 선택의 시간을 늦추고 또 늦추어왔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미루어온 선택을 내릴 때가 된 것이다.
무림의 평화인가, 아니면 소중한 딸의 생명인가?
그것은 양쪽 다 저울에 달 물건이 아니었다.
하지만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그것은 저울 위에 올려졌고, 이제 그는 두 곳 중 한 곳을 택해야 했다.
그에게는 딱 한 가지만 선택할 권한밖에 주어져 있지 않았다.
그는 고민하고 고뇌하고 번민했다.
그리하여 이윽고 추가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자신이 이리도 약했는가?
최후의 최후의 순간에 가서는 대의를 택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가 내린 결론은 그의 예상조차도 빗나간 것이었다. “미안하네…….”
나백천은 자신의 품속에 갈무리되어 있는 맹독의 비수를 조심스레 만져 보았다. 그의 마음속으로 검은 죄책감이 번져 나갔다. “난 맹주로서의 자격이 없을지도 모르겠군.’
무거운 발걸음으로 나백천이 걸음을 옮기는 바로 그때.
삐익—!
매가 날아왔다. 푸른 깃털의 매가 아니라, 나백천이 기르고 있는 전서응 ‘백섬’으로 매우 하얀 깃털을 가진 매였다.
소속 불명의 매가 삐익 하고 울음소리를 내며 날아 내려오자, 망루에서 지키고 있던 자들이 즉각 화살을 걸어 날아오는 매를 겨누었다. 본 적도 없는 매를 영내로 들일 수는 없었다.
정보를 물고 날아가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멈추게!”
나백천이 급히 외치며 그들을 저지했다.
피융! 피융!
그러나 정체도 모르는 방문객의 말을 들을 흑천맹의 무사들이 아니었다.
활시위를 놓자, 시위를 벗어난 화살이 일제히 흰매를 향해 날아갔다.
“안 돼!”
나백천에게는 기다리고 있는 소식이 있었다. 이런 곳에서 소식을 전달하는 사자를 잃을 수는 없었다.
화살은 모두 일곱.
사방에서 쏘아진 일곱 대의 화살이 일제히 백섬의 날개를 꺾기 위해 허공을 꿰뚫었다.
삐―익!
다시 한 번 날카롭게 울리는 소리와 함께, 흰매 백섬은 날아오는 일곱 대의 화살을 이리저리 피하며 그대로 꽂아 내리듯 떨어져 내렸다. 그녀의 주인이 있는 곳으 로.
평범한 화살 몇 대로는 한줄기 섬광처럼 빠른 그녀의 비행을 막을 수 없었다.
펄럭!
하얗고 커다란 날개를 활짝 펴며 나백천이 뻗은 팔 위에 백섬이 내려앉았다.
“너희들 따위의 활 솜씨로 본녀의 꼬리털이나 잡을 수 있겠어??
라고 외치는 듯한 태도로, 우아하게 날개를 접는 그녀의 발목에는 전서통이 매달려 있었다.
나백천은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그 전서통을 열었다.
그 안에서 전서를 꺼내 드는 나백천의 손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내심의 동요를 미처 다 억누르지 못한 듯.
딸과 강호와 자신의 운명이 이 한 통의 서찰에 달려 있었다.
나백천은 조심스럽게 전서를 펴 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흘러내리려는 것을 참아내며.
“다행이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딸을 버리는 선택을 내리지 않아 다행이었고, 흑천맹주를 암살하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딸 나예린이 무사해서 다행이었다.
무겁게 그를 짓누르고 있던 짐에서 겨우 해방된 느낌이었다.
아, 다행이다. 모든 악몽이 끝났구나.
아무래도 서천은 아직 건재한 모양이지만, 애초에 거기까지는 기대하지도 않던 나백천이었다. 그저 나예린을 구할 수 있다는 말뼈다귀 비류연의 장담에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그 미약한 희망이 그에게 이토록 찬란한 광명을 비추어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왜 그러십니까? 안 좋은 소식이라도 왔습니까?”
의아한 얼굴로 검마가 물었다. 흑천맹 안에 들어와서까지 무리하게 전서응을 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긴급한 사안이라는 의미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나백 천의 안색은 무척이나 심각했던 것이다.
“아닐세, 아니야. 안 좋은 소식이 아니라 아주 좋은 소식이라네. 하하하하.”
팡팡팡!
나백천은 파안대소하며 검마의 어깨를 두들겼다. 진심으로 웃는 웃음이지, 뭔가를 얼버무리려는 웃음은 아니었다.
“……”
ܕ܂
“자자, 가세, 가.”
머뭇거리는 그를 나백천이 재촉했다.
“아, 네. 저기 보이는 문이 바로 맹주님의 집무실로 통하는 마지막 관문입니다. 제가 안내할 수 있는 곳은 거기까지입니다.”
그다음은 직속호위들이 담당할 터였다.
“그런가. 자네에게 수고를 끼치는군.”
검마의 안내를 받아 가는 나백천의 발걸음은 날아갈 것처럼 가볍기만 했다.
모든 것은 끝났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럴 수가…….”
나백천은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초절한 정력과 인내심과 불굴의 정신력을 지닌 초인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자신이 지금 보고 있는 이 광경은 무엇인 가? 이것은 악몽인가?
서찰의 협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 하지만 고민하고 있었다. 서찰에 적혀 있는 명령, ‘흑천맹주의 목을 가져오라는 말을 실행할 수 있을 리 가 없었다. 그것은 곧 정사지간의 대전쟁을 의미했다.
대의멸친이라는 말이 이때처럼 어깨를 짓무르는 때도 없었다.
하지만 그 일은 모두 끝나지 않았는가?
이제 모든 일이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았나?
이제 다시 언제나처럼 평화로운 일상이 시작되는 것 아니었나?
서로서로 견제하고, 가끔씩 찌릿찌릿 노려보면서 지내는 평화로운 일상이.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집무실 탁자에 한 남자가 고개를 처박고 쓰러져 있었다. 힘없이 옆으로 꺾인 얼굴은 두 눈을 부릅뜬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 얼굴의 주인을 나백천은 잘 알
고 있었다.
“중천이…….”
목소리가 목구멍에서 얼어붙은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 탁자에 머리를 박고 쓰러져 있는 자는 바로 이 방의 주인 흑천맹주 갈중천이었다.
쓰러진 그의 등 한가운데 새하얀 검 하나가 마치 묘비처럼 꽂혀 있었다. 그 기분 나쁠 정도로 하얀 묘비는 정확히 심장을 꿰뚫고 있었다.
바닥을 흥건하게 적신 축축하고 붉은 액체가 나백천의 발치에까지 와 닿았다. 저 백검으로 꿰뚫린 상처로부터 피가 물컹물컹 붉은 샘처럼 솟아 나오고 있었다. 그 는 지금 피바다의 한가운데 하얀 섬처럼 서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피에 발이 젖는 것 따위를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조금 전부터 나백천의 시선은 흑천맹주 갈중 천의 심장을 꿰뚫은 하얀 검에 못 박혀 있었다.
“저것이 어떻게 여기에…”
본 적이 있는 검이었다. 그리고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검이었다. 그는 저 검이 누구의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것에 가미된 장식, 길이, 무게, 그 리고 사소한 흠이나 손잡이의 마모된 부분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 모든 정보를 취합한 결과 저 검은 진짜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마치 주술에라도 걸린 것처럼, 내키지 않는 손을 뻗어 검을 뽑아 들었다. 착 감겨들 듯 익숙하게 손에 와 잡히는 느낌. 이제는 더더욱 부정하고 싶지만 부정할 수 없다. 망연자실한 그의 입에서 그 검의 이름이 새어 나왔다.
“백뢰(白雷)…….”
이 검은 바로 자신의 검이었다. 자신이 흑상루에 맡겼던 자신의 애검. 왜 자신의 애검이 저런 흉험한 곳에 꽂혀 있었던 것일까?
나백천의 머릿속이 순간 새하얗게 변했다.
다다다다다다다다!
이때 밖에서 다급히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흠칫.
나백천은 당황하며 몸을 떨었다. 이곳은 흑천맹주의 집무실. 밖으로 도망갈 크기의 창문은 보이지 않았다. 벽 역시 가운데에는 두꺼운 철판이 들어 있어서 단 일격 에 뚫고 나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유일한 출구는 방문뿐이었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여기서 자신이 억울하다고 하면 과연 믿어줄 것인가? 자신의 손에 들린 이 피 묻은 백뢰를 보고도? 흑천맹주의 피로 물들어 있는 이 검을 들고 있는 자신의 이 피 묻은 손을 보고도?
나백천은 무엇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발걸음은 더욱 가까워졌고, 문이 벌컥 열렸다.
“……!””
들어온 사람은 방 안의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란 듯 보였다. 그러나 나백천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그자는 나백천이 아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저자가 왜 여기에??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마천각주 본인이었다. 그 뒤로 검마와 흑천맹주의 호법들 몇이 서 있었다. 그들 역시 방 안의 상황을 보고는 깊게 침묵했다. 너무 나 끔찍한 악몽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래서 그런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했다.
곧 마천각주의 입에서 비통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정천맹주 나백천의 손에 흑천맹주님이 살해당했다!”
이날, 무림 평화의 시대는 그 종막을 고했다.
정사대전(正邪大戰) 발발의 시작이었다.
<『비뢰도』 제28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