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국지색(傾國之色)
-미인계?
“자, 물러나는 게 어때?”
“무슨 말씀! 물러나야 할 쪽은 내가 아니라 자네 쪽이지!”
“호오, 해보겠다 이건가?”
“좋을 대로.”
“칠영, 자넨 정말 목숨이 아까운 줄 모르는 친구군”
“오영, 자네야말로 욕심이 끝도 없군. 한 번 했으면 됐지, 두 번이나 하려고 하다니 말이야.”
“우리 둘 다 한 번씩 갖다줬으니 비겼지. 자네나 나나 각각 한 번씩 이니까.”
그리고 이번이 두 번째. 옥 안에 갇혀 있는 절세미녀에게 합법적으로 식사를 가져다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니 두 사람 중 어느 한쪽도 물러서지는 않는다. 이미 두 사람 모두 그녀의 미모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 걸 아마도 경국지색이라고 한다던가?
두 사람 중 뒤로 반 발자국이라도 물러난 사람은 없었다. 십년지기의 우정 역시 지금 이 순간 앞에서는 무의미했다.
“좋아, 승부다!”
두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전력으로 싸움에 임했다.
가위, 바위, 보! 가위, 바위, 보!
마침내 승부가 가려졌다.
장오영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누가 식사를 가져다줄지 정하는 승부에서 또다시 승리를 거머쥔 것이다.
꿀꺽!
이상하게 진정이 되지 않았다. 그는 ‘서쪽 하늘’을 섬기는 심복 중의 심복이었다. 삼십 년 동안 동정을 유지한 동료 이칠영과 다르게 숫총각도 아니었다. 이미 많은 여자를 경험해 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 그의 심장은 마치 첫사랑에 빠진 열다섯 소년처럼 쿵쾅거리고 있었다. 심장이 고동치는 소리에 고막이 상하는 게 아닐 까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식사 당번이 되면 그녀의 얼굴을 단 한 번이라도 슬쩍 보고 올 수 있다. 그 자태를.
맨 처음, 철문에 달린 작은 감시창을 열어서 안을 들여다본 것은 전적으로 호기심 때문이었다. 대체 어떤 여자이기에 그의 주군이 이렇게까지 집착하는 것일까? 마음만 먹으면 수백 명의 여자도 거느릴 수 있는 분이? 그가 간수이긴 하지만, 천겁의 사람이긴 하지만 그에게도 귀는 있었다. 그의 주군과 저 철문 안의 대화는 그 들에게도 분명히 들렸다. 다만 듣고도 못 들은 척했을 뿐이다. 그게 현명한 행동이기에.
그저 살짝만 보자, 보는 것뿐이라면 누가 뭐라고 하지 않잖아?
그리고 장오영은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못 박히고 말았다.
얼굴을 살짝 옆으로 돌리고 있어서 제대로 보이지 않는데도, 살짝 숙인 얼굴,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그리고 버드나무처럼 드리운 팔과 쭉 뻗은 날씬한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보일락 말락, 보일락 말락.
조금만 더 머리카락이 치워지기만 하면 제대로 얼굴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장오영은 미칠 듯한 갈증에 사로잡혔다.
마치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것은 마치 마약과도 같아서 한 번 보다 보면 금방 또 보고 싶어졌다. 계속 계속 보고 싶어졌다. 해야만 한다면 심장이 라도 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저 옥에는 접근금지 명령이 내려져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그 기회를 만들려고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기회가 또다시 돌아온 것이다.
이제 다시 한 번 그녀를 볼 수 있어…….
다시 한 번….
마치 넋이 나간 사람처럼 장오영의 눈동자는 풀려 있었다.
“식사 가져왔습니다, 소저.”
감옥을 지키는 악질 간수답지 않은 정중한 목소리.
“……”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뭔가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기대는―물론 그렇게 되면 정말 횡재한 듯한 기분이 들겠지만ᅳ하지 않았다.
잡혀온 수인들이 가장 흔하게 하는 ‘도와주세요!’, ‘내보내주세요!’, 혹은 ‘살려주세요!’라는 말조차도, 저 여인에게서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러니 그런 기대는 저버리고 살짝만 보는 거야, 살짝만 저 멀리 앉아 있는 자태를 살짝만.
꿀꺽!
장오영은 마른침을 한 번 삼킨 다음 감시창을 열었다.
그리고 선 자리에서 그대로 꽁꽁 얼어붙었다.
그 한순간에 혼이 날아가 버린 것처럼.
감시창의 문을 열자마자 나타난 두 눈동자, 두 개의 밤하늘처럼 깊은 검은 눈동자가 그와 마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똑바로 보고 있다. 바로 앞에서, 조금도 눈을 돌리지 않은 채. 그녀는 자신의 가녀린 발목과 손목을 묶고 있는 쇠사슬이 늘어나는 한계까지 걸어와 그 자리에 선 채 당당하게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침내 장오영은 나예린의 얼굴을 처음으로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그의 정신은 이미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아무렇지도 않게 무표정한 얼굴로 나예린이 물었다. 결코 상냥한 어조는 아니었다. 게다가 어딘지 위엄까지 느껴진다.
“아, 아뇨. 그럴 리가요.”
장오영은 긴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요, 다행이네요.”
그녀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았다는 사실에 장오영은 안도했다. 옥 안에 갇혀 있는 것은 나예린이고 간수는 장오영이었는데도, 그녀는 마치 황궁의 여황처럼 보였 다. 그리고 이 문은 그따위는 감히 열고 들어갈 수 없는 황궁의 문처럼 느껴졌다.
“이건, 식사인가요?”
“네, 넵. 식사입니다!”
긴장해서인지 등을 곧게 쫙 펴서 장오영이 대답했다.
“그래요, 얼마 전의 식사도 모두 당신이 가져왔던 건가요?”
“옙, 무, 물론 제가 다 가져왔습니다.”
친구를 배신하며 장오영이 그렇게 말했다.
“그래요? 고맙군요.”
순간 장오영은 머리를 한 대 후려맞은 듯한 충격에 빠졌다. 그가 본 것.
그것은 바로 나예린의 입가에 걸릴 듯 말 듯 살며시 그림자를 드리운 미소였다.
“아, 아름답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 이상의 말을 자아낼 언어 능력이 그에게는 부족했다. 자신이 그동안 글공부를 안 한 게 오늘만큼 후회되는 순간이 없었다. 일순간 얼음바위에서 새하얀 꽃이 피어나는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장오영은 완전히 혼이 나가고 말았다.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평생 따르겠습니다. 전 영원한 당신의 종입니다, 딸랑딸랑.
이성이고 명령이고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그런데 공기가 좀 탁하군요. 가슴이 답답해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무표정한 표정으로 나예린이 말했다.
기실 미인계를 쓰겠다고 다짐하긴 했지만, 색기 어린 표정은 어떻게 지어야 되는지, 색기 어린 동작을 하려면 어떤 자세를 취해야 되는지를 그녀는 전혀 모르고 있 었다. 그저 최대한 미소를 지어 보이려고 노력한 후, 가슴이 답답하다고 말한 것만이 그녀가 시도할 수 있었던 최선이었다. 속으로는 열심히 노력하고는 있었지만, 겉보기로는 그 외의 행동이나 말투에 그다지 변화가 없었다. 그런데도 효과는 있었다.
“가, 가, 가슴이요?”
슬픈 남자의 본성 탓인지, 가슴이라는 한마디에 장오영은 미칠 듯이 격하게 반응했다. 당장에라도 눈알이 튀어나오는 게 아닐까 걱정될 만큼 눈이 새빨갛게 충혈 되어 있었다. 금방 코피라도 쏟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네, 가슴이요. 무슨 문제 있나요?”
장오영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나예린이 무뚝뚝하지만 위엄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문제라뇨? 당치도 않습니다. 아무 문제 없습니다, 아무 문제도.”
장오영은 밤하늘처럼 맑고 깊고 신비한 눈동자 속으로 자신의 영혼이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니, 이미 애저녁에 빨려 들어가 있었다. 지금 철 문 밖에 서 있는 간수 장오영은 그저 껍데기에 불과했다.
아아, 그럼 그런 게 문제가 될 리가 어디 있겠는가. 아주 바람직한 일 아닌가.
나예린은 무표정한 시선으로 장오영을 쳐다보면서 다시금 본 화제로 돌아갔다.
“아무튼, 답답해서 숨 쉬기가 조금 힘드네요.”
간수의 경계심이 극도로 낮아지는 걸 보니 효과가 있기는 한 것 같은데, 그걸로는 부족했다. 어떻게든 간수가 의심없이 스스로 이 문을 열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미인계 하면 떠오르는 극단의 조치가 필요한 모양이었다.
지금이야말로 저 간수를 유인할 자연스럽고 요염하기 그지없는 연기를 발휘해야 할 때!
나예린은 침중한 마음이 드러나지 않도록, 수줍은 듯 요염한 표정을 최대한으로 떠올려 보며 총력을 기울여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 결과, 나예린의 연기력이 집결된 자태를 눈앞에 마주한 장오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한 영혼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이럴 수가! 내, 내가 뭔가를 잘못한 건가?! 저 아름다운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지게 만들다니! 내, 내가 분명 뭔가를 잘못한 거야!’
연기에 집중하느라 여유가 없었던 나예린은, 미처 장오영이 눈을 홉뜨고 놀라는 이유도 간파하지 못한 채 그저 다음 수순을 위해 박차를 가할 뿐이었다. 다행히도 자신의 요염함을 끌어올린 연기가 먹힌 모양이라고 짐작하며.
자, 이제는 최후의 한 방이 남았을 뿐!
나예린은 그녀 일생 최대의 연기력을 한데 끌어모은 얼굴, 즉 무뚝뚝한 표정으로 그녀의 윗옷에 묶여 있는 고름을 살짝 풀었다.
색기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동작이었다. 아니, 그보다는 대사와 행동과 표정이 극단적인 엇박자로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효과는 있었다.
그것도 극명하게.
장오영은 그야말로 혼돈과 흥분으로 질식할 것만 같은 상태에 빠져들었다.
“그, 그래! 답답한 거야! 그거 때문이었던 거야! 그녀를 저렇게나 괴롭게 만들다니! 어, 어쩌지?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저, 정말 수, 숨 쉬기가 히, 힘드네요. 저, 저, 정말로. 네, 진짜로.”
이미 그의 머릿속에는 어서 빨리 저 답답함을 풀어줘야겠다는 충동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그가 받았던 접근금지 명령 따위는 어디론가 이미 날아가 버리고 없었 다.
“물론 딱히 문을 열어달라는 것은 아니에요.”
“답답하시잖아요?”
특히 가슴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음, 답답하긴 하죠. 네, 답답해요.”
장오영은 숨이 막혀 질식할 것만 같았다.
헉헉헉!
자신이 이렇게 숨 쉬기 힘들 정도인 걸 보면 뭔가 문제가 생긴 게 분명했다.
“그, 그렇습니까? 그럼 바로 문을 열어드리지요. 그러면 금방 시원해질 겁니다! 금방!”
지금 장오영의 머릿속에는 이성이라고는 털끝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어서 그녀를 구해야 했다.
게다가 문을 열면 이 작고 답답한 감시창이 아니라 확 트인 시야로 저 여인을 볼 수 있었다. 만질 수 없다 해도 좋았다. 지금 이 순간 그는 한 발짝, 아니, 반 발짝만 이라도 더 앞에 가서 그녀를 볼 수 있어도 여한이 없었다. 숨 쉬기도 힘들다고 하니, 이 답답한 철문을 열면 좀 더 시원하지 않겠는가? 만일 이 여인의 몸에 무슨 일 이 생기면 큰일 날 게 분명했다. 자신은 지금 바른 일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지극히 바른 일. 어차피 쇠사슬은 벽에 붙어 있으니 별다른 위험도 없을 터였다. “난 어디까지나 그분의 명령을 충실히 따를 뿐이야.”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마친 후 손을 허리춤에 가져가 열쇠를 꺼냈다.
그리고는 천천히 열쇠를 뇌옥의 열쇠구멍으로 가져갔다.
찰칵!
열쇠를 한 번 틀자, 쇳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풀렸다. 장오영은 철문의 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잡아당겼다.
그그그그그긍!
마침내 뇌옥의 문이 열린 것이다.
“좀 낫군요. 그런데 여기 이…….”
“네? 뭐, 뭔가요?”
장오영은 자석에 끌려가는 쇠붙이처럼 나예린을 향해 걸어갔다. 정신이 반쯤 나가 있어서 자세도 엉망이었다.
“이 족쇄도 무척 답답하네요.”
철그렁. 그녀가 양손의 족쇄를 들어 올리자 쇠사슬이 요동쳤다.
스르륵!
동시에 소매가 내려가며 백옥처럼 하얀 팔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꿀꺽!
장오영은 갑자기 그 하얀 팔을 미칠 듯이 잡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나예린은 머뭇거리는 장오영을 보며 아차 싶었다. 족쇄까지 풀어줄까 싶었던 건 역시 안일한 바람인 듯했다. 어차피 문을 열고 들어온 이상, 이제 그는 그녀의 ‘범 위’ 내에 있었다. 경계심을 품지 않도록만 한다면, 간수가 등을 보이는 순간 제압하면 되리라.
“그, 그냥 답답하다는 것뿐이지 별 뜻은 없어요. 음, 이제 나가셔도 좋아요. 민폐를 끼쳐서 미안하군요.”
딴생각에 정신이 팔려 멍하니 서 있는 장오영을 향해 나예린이 차갑게 말하며 내밀었던 손을 거두었다. 장오영은 냉랭한 그녀의 말에 심장이 마구 찔리는 듯했다. 하얀 팔이…… 하얀 팔목이…….
멀어져 가고 있어……. 멀어져 가고 있어…….
“미, 민폐라니요? 다, 당치도 않습니다.”
당황한 장오영이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답답하든 말든 그건 제 문제지, 당신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니까요.”
이미 상관없다는 그녀의 말에 장오영은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사, 상관없을 리가요! 안에 계신 분들을 살펴 드리는 것도 간수 된 자의 도리! 답답하시다니 큰일이잖습니까!”
지금 그에게 가장 두려운 일은 나예린에게 미움받는 일이었다.
“아뇨, 괜찮아요. 어차피 당신이 족쇄를 풀 수 있을 리도 없고.”
나예린은 이제 당신과는 얘기가 끝났으니 어서 나가라는 듯한 눈으로 장오영을 바라봤다. 장오영은 그 눈길에 가슴이 천 갈래로 찢어지는 듯했다. 그리하여, 그는 돌이킬 수 없는 한 발을 내디디고 말았다.
“푸, 풀 수는 있습니다! 제겐 열쇠가 있으니까요!”
“쓸 수 없는 열쇠죠.”
“아닙니다. 쓸 수 있습니다. 쓸 수 있는 열쇠예요. 아니, 쓰게 해주세요!”
“굳이 당신이 안 풀어도 되는데.”
어차피 그녀는 그를 제압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리고 직접 풀면 그만이었다.
“아닙니다. 풀 수 있습니다. 아니, 풀게 해주십시오, 제발!”
장오영이 애걸했다. 그는 너무 슬퍼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자신의 한심함 때문에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하다니, 당장에라도 목을 매달아 죽고 싶었다. 저 족쇄가 풀리면, 그 저 투박한 족쇄만 벗기면 새하얀 손과 하얀 팔을 연결하는 새하얀 팔목이 드러날 것이다. 엄지와 검지만으로 쥐어질 듯한 가녀린 팔목이…….
장오영은 이미 제정신이라 할 수 없었다.
“그럼, 할 수 없군요.”
나예린이 마지못하다는 듯 양손을 내밀었다. 그리고는 차갑게 말했다.
“풀어도 좋아요.”
마치 윤허를 내리는 듯했다.
“네, 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장오영은 허리를 숙였다.
풀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풀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장오영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만년한철로 제작된 철문을 연 후에도 여전히 들고 있던 열쇠꾸러미를 뒤적거렸다. 그리고 그중 좀 더 작은 열쇠를 집어 나예린의 손목에 차인 족쇄 쪽으로 가져갔다.
바로 그때였다, 뇌옥 문 밖에서 일갈이 들려온 것은.
“이보게, 장오영! 지금 자네 뭐 하는 짓인가!”
장오영은 그 일갈에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그곳에 서 있는 것은 바로 동료 간수 이칠영이었다.
아직 철이 들기 전부터 빙백봉 나예린은 그 미모가 너무나 출중하여 가히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는 말을 자주 들어왔다. 때문에 그 미모 때문에 많은 재액에 휘 말려야 했다.
경국지색, 한마디로 나라를 기울게 하는 미모라는 뜻이다. 단 한 여인이 미모로 나라를 무너뜨린다니, 쉽게 믿기지 않는 허풍 같지만 진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 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알고 있다. 실제로 저 은 왕조의 멸망 역시 달기라는 미인 때문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대체 한 나라의 국운(國運)조차 바꿀 정도의 미모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런 미모가 있다면 누구나 한 번이라도 그 미모를 보고 싶어하지 않을까? 그 미모의 소유자에게 손을 대고 싶어하지 않을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말이다.
나라가 무너지는 것은 가장 나중에 일어나는 것이다.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은 바로 사람의 마음이다. 선비가 무너지고, 관리가 무너지고, 장군이 무너지고, 왕이 무너진다.
그렇다면 그 경국지색의 매력이, 사람의 이성과 감성을 송두리째 빼앗는 미모. 일국을 무너뜨릴 수 있는 미모가 진정으로 개화하면 어떻게 될까? 굳이 최면술 같 은 잡기를 쓸 필요도 없이, 그저 부드럽게 드리워진 속눈썹을 살며시 파르르 떠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고 오직 그녀만 바라보고 그녀만 생각하 게 만들 수 있지 않겠는가?
그동안 나예린은 자신의 미모를 저주라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있어 미모란 마(魔)를 불러오는 원흉이었다. 너무 지나친 미(美)는 그녀에게 어릴 때부터 너무나 과 격한 운명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음탕한 눈빛들, 시시때때로 당하는 유괴의 위협, 그 모든 것이 미모 때문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녀는 ‘용안(龍眼)’을 갖고 태어났기에, 사람들의 마음을 간파해 낼 수 있었기에 더더욱 삶이 혹독했다. 사람의 본심을 안다는 것은 결코 좋은 일만 은 아니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때때로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것이 고여 있는 곳이었다. 가식이라는 한 장의 얇은 껍데기로 그 오물들을 덮고 있는 자들이 부지기수 였다. 어린 그녀에게 그것은 견딜 수 없는 충격이었다. 부서져 가는 마음을 지키기 위해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억제하고 마음을 걸어 잠가야 했다. 주변과의 교류를 차단하고 차가운 얼음인형이 되는 길, 그것이 그녀가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갇혀진 공간, 걸어 잠근 자물쇠를 풀고 그녀를 그곳에서 꺼내준 것이 바로 비류연이었다. 만일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지금도 여전히 보이지 않는 감옥 안 에 갇혀 있어야 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녀는 스스로의 미모와 매력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 미모는 일부분만 표출되어 사람들의 마음에 어두운 음심(淫心)을 불러일으켰다. 그렇다 면 그 매력을 완전히 제어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나라의 운명마저 휘저을 수 있는 매력이라면, 한 사람의 마음을 장악하는 것쯤은 그다지 수고롭다고 할 수도 없지 않을까.
그리하여 그녀는 스스로도 깜짝 놀랄 정도로 별 어려움 없이 감옥의 문을 열 수 있었다. 방해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족쇄까지도 풀 수 있었을 터였다.
이칠영은 장오영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자 무슨 일이 생겼나 걱정돼서 온 것도, 희미하게 철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수상해서 뒤쫓아온 것도 아니었다. 순전히 자기도 오고 싶어서, 보고 싶어서 쫓아왔던 것이다. 철문이 열려 있는 것과 장오영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여인의 족쇄를 풀려는 모습을 목격한 것은 그다음이었다. 웬 백의의 선녀 같은 여인의 앞섶 옷고름이 풀려져 있는 게 아닌가. 살짝 열린 앞섶 사이로 새하얀 살결과 미끈한 쇄골이 드러나면서 활처럼 휜 쇄골 위로 턱선의 그 림자가 음영을 드리우고 있었다. 이칠영은 눈앞이 아찔해져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츄릅!
저절로 눈이 땡그래지고 침이 흘러나왔다. 그는 그 옷고름의 범인이 썩을 놈의 장오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감히 삼십 년 동정인 동지를 놔두고 지 놈 혼자! 우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그러니 어찌 그의 입에서 분노의 일갈이 터져 나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일갈에 장오영은 살짝 정신이 돌아왔다.
‘허걱, 내가 뭘 하고 있었던 거지?”
그리고는 자신이 열쇠를 들고, 지금 막 족쇄의 열쇠 구멍에 집어 넣으려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화들짝 놀라 들고 있던 열쇠를 뒤로 던졌다. 이칠영이 허겁지 겁 날아오는 열쇠를 받아 들었다.
“이게 어찌 된…….”
장오영은 무림인답게 본능적으로 허리에 있는 칼을 뽑아 들려 했다.
“왜 그러시죠? 두 분? 무슨 일 있나요?”
나예린이 웃었다. 아니, 웃으려고 했다. 하지만 워낙 남을 향해 웃는 게 익숙지 않다 보니 눈꼬리가 살짝 떨리는 걸로 그치고 말았다.
그것이 지금 나예린이 할 수 있는 최선.
아직 그녀는 웃는다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역시 실패했나??
그러나 다 웃을 필요도 없었다. 효과는 그걸로 충분했다.
그녀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리는 순간, 잠깐 돌아왔던 장오영의 정신이 다시 외출해 버렸다. 이칠영 또한 나예린의 ‘미소’에 넋을 놓고 말았다. 웃지도 않았는데. 그
럼에도 이칠영은 저 살짝 떨리는 눈꼬리가, 움찔하는 눈썹 끝이 자신을 향한 미소라고 굳게 믿었다.
게다가 아직도 그의 눈앞에는 우미하게 휘어진 쇄골이 살랑살랑 팔랑이는 옷깃에 가려졌다 보여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의 눈을 그걸 따라가느라 정신이 없었 다.
두 사내는 완전히 정지했다.
철썩!
장오영은 자신을 오른손을 매섭게 내려치는 무시무시한 타격에 그만 도를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이미 넋이 나갈 대로 나가 있어서 맞았는지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손등을 내려친 채찍의 정체는 바로 나예린이 조금 전 풀어낸 고름이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옷고름에다가 진기를 주입해서 채찍처럼 휘두른 것이 다. 그리고는 재빨리 옷고름을 길게 펼쳐 이칠영의 머리를 휘감은 다음 뇌옥 속으로 끌어들였다. 팽그르르, 팽이처럼 회전하며 이철영의 몸이 뇌옥 안으로 날아왔 다.
“잠깐 잠들어줘야겠어요.”
그러자 두 남자가 동시에 대답했다.
“네, 당신의 곁에서 잠들 수만 있다면… 죽어도…….”
철썩! 철썩!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들은 얼굴의 급소를 얻어맞았다.
두 사람의 눈앞에 별이 번쩍였고, 그대로 두 사람은 기절했다. 옷고름으로 때리는데도 마치 쇠몽둥이로 후려치는 듯한 타격에 정신을 놓고 만 것이다.
그런데 어쩐지 기절한 그들의 얼굴은 행복으로 가득 차 있었다.
“너무 간단하네…….”
쓰러진 간수를 보며 나예린이 중얼거렸다.
“이래도 되는 걸까…….”
생각한 대로 일이 너무 쉽게 풀리자 오히려 불안해졌던 것이다. 미인계라는 게 원래 이렇게 잘 먹히는 거였을까? 아니면.
“혹시 다른 함정이 있는 게 아닐까?”
다시 용안의 능력을 발휘하여 주위를 살폈다. 그녀의 의식이 주변으로 확장되어 갔지만 별다른 낌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만이 천둥 처럼 그녀의 귀에 울릴 뿐이었다. 이제 열쇠로 족쇄를 풀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어?”
그런데 없었다.
열쇠꾸러미가 이칠영의 몸 어디에도 없었다. 좀 전까지 분명히 가지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없었다.
이칠영이 넋이 나간 탓에 옷고름에 끌려 들어오면서 가지고 있던 열쇠 꾸러미를 꽉 잡고 있지 않아서 뇌옥의 통로 저편으로 날아가 버린 것이다. 나예린의 옷고름 이 도저히 닿지 않을 거리였다.
“…….”
나예린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코 포기한 얼굴이 아니었다. 그녀의 얼음처럼 차갑고 고고한 얼굴에 떠오른 것은 하나의 결의였다.
즈즈즈즈즈즈즈!
강렬한 기가 주입되자 그녀가 들고 있는 옷고름이 마치 검처럼 팽팽하게 펴졌다. 그 비단 천으로 된 검안으로 나예린은 강기를 주입했다. 그러자 옷고름이 새하얀 백광을 뿜으며 빛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나는 누군가가 구해주기만을 기다렸어. 하지만 이제 나 스스로 그동안 날 묶어놓았던 저주스런 사슬을 끊어버리겠어.”
강기를 주입해 강철 검처럼 단단해진 옷고름을 휘둘러 그녀를 봉쇄하고 있던 쇠사슬을 향해 휘둘렀다.
휙휙!
챙강!
강기가 주입된 옷고름은 어떤 명검보다 날카로웠다. 백련정강으로 만들어진 족쇄가 너무도 간단히 조각나서 바닥에 떨어졌다. 나예린이 손으로 그동안 혹사당한 자신의 두 발목을 어루만졌다. 그녀의 발목에는 족쇄가 채워진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자국은 자국. 그 자국은 그녀가 스스로 자유를 획득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저주스런 족쇄는 더 이상 그녀의 두 발목에 채워져 있지 않았기에.
나예린은 자신의 발로 그곳을 걸어나갔다. 그리고는 간수들이 번을 서고 있던 곳에 세워져 있는 자신의 애검 ‘빙루’를 발견하곤 무척이나 기뻤다. 이제는 영영 찾 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검은 얌전히 주인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자가 이것을 가지고 가는 것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하긴 그에게 이 검은 별로 의미가 없겠지…….’
그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그녀 자신뿐이었으니까.
“서두르자!”
여기서 더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그 악적이 다시 이곳을 찾아오기 전에 탈출해야 했다. 애검 ‘빙루’를 되찾자 그녀는 잃어버린 동료를 찾은 듯 기쁘기도 했지만 또 한 마음이 든든했다. 날카로운 검은 이렇게 험한 곳에서는 마음의 위안이 되기 때문이다. 뇌옥의 끝에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 이 뇌옥 안에 있는 유일한 계단 이었다. 예상대로 이 뇌옥은 지하에 자리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용안을 활짝 개방한 채 나예린은 위로 향하는 계단을 뛰어올라 갔다. 감옥은 의외로 깊은 곳에 마련되어 있었다. 한참을 올라가고 나서야 나예린은 눈앞을 가로막 고 있는 철문 하나와 만날 수 있었다. 문은 그녀의 머리 위에 달려 있었다. 아직 용안의 능력이 발휘되고 있는 그녀는 즉시 알 수 있었다. 이 문이 바로 지상으로 연결 되는 곳이라는 것을.
다행히 안에서 열 때는 별다른 열쇠가 필요없었다. 기관장치를 작동하자 머리 위를 덮고 있던 문이 열렸다.
“이곳은…….”
문을 나온 나예린은 깜짝 놀랐다. 전혀 상상치 못하던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혹시나 또 다른 간수들이 지키고 있는 감옥인가 했는데, 주위는 온통 쌀포대와 마른 나물과 각종 먹을 것들과 잡동사니들로 가득 차 있었다. 상당히 고급 식재료들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곳은 광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상당히 고급의. “큰일이구나. 어서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지 않으면!”
광이라면 감옥보다 훨씬 사람의 출입이 많을 터. 이대로 머물러 있는 것은 위험했다. 왜 그녀가 갇혀 있던 감옥의 유일한 출구가 이런 광과 연결되어 있는지는 나 중에 걱정하면 될 일이었다.
“난 진짜 탈출한 거야.”
나예린은 기뻐하며 광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는 경악했다. 광 문 밖에 누군가가 있었던 것이다.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어떻게?”
은실을 길게 뽑아놓은 듯 머리카락이 하얀 사내가 왠지 나른한 표정을 지은 채 홀로 서 있었다. 세상 만사가 다 귀찮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서.
“응? 광 안에서 웬 예쁜 아가씨가 나오다니? 참 이상하군. 그건 그렇고, 참으로 이쁜 아가씨일세.
사내도 나예린을 보고 놀란 듯했다. 일단 그녀를 잡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는 바로 무명이었다.
‘읽을 수 없어.”
불시에 무명과 대면한 나예린은 당황했다. 분명 기척을 읽었을 때는 아무도 없었는데 광의 문을 열자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으니 그녀가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 는가. 게다가 더욱 충격적인 것은 눈앞에 있는 남자의 마음을 전혀 읽을 수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아니, 읽을 수 없는 것은 마음뿐만이 아니었다.
“이 사람, 진짜 존재하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그에게서는 아무런 정보도 읽어낼 수 없었다. 그는 마치…….
텅 비어 있는 ‘무(無)’와 같았다.
그녀의 용안이 상대를 읽을 수 없는 것은 비류연 이래로 처음이었다.
“어째서? 이자가 대체 누구기에??
나예린은 이런 기도를 가진 자는 처음이었다. 사고를 읽을 수 없는 건, 본질을 간파할 수 없는 것은 비류연과 똑같았지만 이 남자 쪽이 훨씬 읽어내기가 어려웠다. 이런 자가 대체 어디서 나타났단 말인가, 갑자기 땅에서 솟구치기라도 했단 말인가?
“당신 누구죠?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거죠?”
그 말에 무명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예쁜 아가씨. 말은 똑바로 해야 하지 않겠어? 갑자기 나타난 건 아가씨라네. 내가 아니지. 난 그냥 여기서 목이 말라 소옥이가 떠오는 물을 기다리…….?”
쉬익!
나예린이 휘두른 애검 빙루가 무명의 몸을 그대로 베고 들어갔다.
‘들어갔나?”
이렇게 쉽게?
그렇게 생각한 것도 잠깐, 검이 가르고 지나간 무명의 신형이 허깨비처럼 사라졌다.
“어라? 아가씨, 아가씨가 아무리 예쁘다 해도 사람의 말을 중간에 자르는 건 좋은 버릇이 아니야. 예쁘면 대부분 용서되지만, 모두 다 용서되는 건 아니거든.” 그 목소리는 어느새 전혀 다른 방향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뒤!’
나예린은 급히 왼발로 땅을 찍으며 몸을 돌려 다시 기수식을 펼쳤다.
“이 사람, 위험해!’
그녀의 본능이 맹렬하게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눈앞의 이 사내는 위험하다고.
“비켜주셔야겠습니다. 지나가겠어요!”
그녀는 지금 만나러 가야 할 사람이 있었다. 여기서 우물쭈물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미안하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겠는데. 물어볼 것도 있고…….”
무명이 아무런 긴장감도 없는 얼굴로 말했다.
지이이이이잉!
한상옥령신검 오의(義)
설풍란영(雪風亂影)
나예린은 더 기다리지 않고 전력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이거참. 말을 끝까지 들으라니까…….”
나예린의 신형이 점점 빨라지며 새하얀 서리가 낀 듯한 검에서 눈보라 같은 검풍이 몰아쳐 무명의 몸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흠, 오오. 이건 어디서 본 기억이 있는 검초군. 확실히 기억이 있어. 분명 한상…… 어쩌고라는 이름이었는데! 우왓, 내가 검술명을 두 자나 기억하다니! 이거 놀 랍군요. 근데 대체 언제 본 거지……?”
겨울의 폭풍을 연상케 하는 범상치 않은 검기가 사방에서 쏟아지는데도 무명의 목소리는 여전히 태평했다. 그는 검술의 위력보다 자신이 이 검술의 명을 ‘두 자나’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더 놀란 듯했다. 그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기억에 누군가 다른 이의 검술이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 같은 일이었던 것이다.
“음, 예전에 분명 이 검술을 쓰던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매서운 눈보라처럼 몰아치는 검기의 폭풍우를 거의 움직이지도 않고 피해내며 무명이 중얼거렸다. 이 기억을 되살리는 것이 그에게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 는 듯, 그는 기억을 떠올리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나예린의 검이 그를 유린하든 말든 전혀 관심없다는 기색이었다. 그런데도 그의 몸은 그의 의사나 의도 따 위와는 별개의 존재라는 듯 나예린의 검초를 머리카락 한 올 차로 모두 피해내고 있었다. 검이 닿을락 말락 하면서도 결코 닿지 않자 나예린의 기력 소모는 더욱 극 심해졌다.
“이 사람은 대체 뭐란 말인가?”
용안이 통하지 않으니 그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는 동정호 전체를 뒤덮은 뿌연 안개 같은 존재였다. 그녀의 검은 그 짙고 깊은 안개 속에서 길 을 잃은 듯 전혀 제 위력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고수가 마천각에 있었다니…….?
지금까지 이렇게 젊은 얼굴에 하얀 머리카락을 지니고, 아마도 검을 사용할 듯한 인물에 대한 소문은 전혀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대로 포기할 수도 없었다.
한상옥령신검 오의(義)
사설화
나예린의 신형이 넷으로 분리되며 무명의 동서남북을 일제히 점했다. 나름 궁지에 몰렸는데도 그는 아직도 기억 상기에 골몰하고 있었다.
두 자 다음에 올 글자들을.
때문에 그의 몸은 빈틈 투성이였다. 나예린은 사양하지 않고 그 빈틈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스르륵!
“아, 드디어 생각났다! 맞아, 기억났어. 하하하, 기억났다!”
다시 목소리가 들린 것은 나예린의 등 뒤에서였다. 나예린은 몸을 돌리려 했다. 그때 무명이 기쁜 듯한 얼굴로 손을 뻗었다.
콱!
너무나 손쉽게 나예린의 손목이 무명의 손에 잡혔다.
“이럴 수가! 말도 안 돼!’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잡혀 있었다, 그런 느낌이었다. 그는 싱글벙글거리는 얼굴로 나예린의 얼굴 앞에 머리를 들이밀더니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한상옥령신검 맞지? 예전에 한상이라는 땅꼬마 아가씨가 썼던? 그치? 그치?”
그는 건망증이 심각한 자신이 그런 사실을 기억해 냈다는 게 무척이나 자랑스러운 모양이었다. 나예린은 어이가 없었다.
‘한상이라니…….?
설마 싶기는 하지만 그 말이 지칭하는 것은 아무래도 그녀의 사부인 검후 이한상밖에는 없었다. 딱 보기에도 그다지 나이가 많지 않은 듯 보이는데, 감히 사부님의 존함을 옆집 사는 계집애 부르듯 함부로 부르다니…….
게다가…….
‘땅꼬마 아가씨??
천무삼성의 일좌인 검후를 보고 꼬마 아가씨? 이 사람 제정신인가? 과연 자신이 땅꼬마 아가씨라고 불렸다는 것을 들으면 사부님은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
꼬마도 아니고, 땅꼬마라니…….
나예린은 그 뒤에 벌어질 일을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놓으세요, 무례하게.”
나예린은 무명의 손을 뿌리쳤다. 그는 의외로 순순히 그녀를 놓아줬다.
“아, 미안. 별로 나쁘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그냥 물어볼 게 있을 뿐이야.”
“전 대답할 게 없습니다.”
“그래서 얘기도 안 하고 공격하려고? 어차피 그걸로 날 이기는 건 불가능한데, 그건 이미 다 알고 있거든. 내가 이름을 다 기억하고 있는 걸 보면 그 검술도 다 기 억하고 있는 게 분명해.”
사문의 비검이 무시당했다는 사실에 나예린은 약간 울컥했다.
“글쎄요, 가능한지 불가능한지는 시험해 보지 않으면 모르지요. 방금 다 알고 있다고 하셨나요? 그럼,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한상옥령신검을 보여 드리
죠!”
나예린은 전수받았던 비기를 다시 쓰기로 결심했다. 지금 그녀의 상태는 금제의 해금과 탈출에 기력을 상당히 많이 소모하고 있었지만, 어차피 이자를 어찌하지 않고서는 탈출 자체가 불가능했다.
나예린은 자신이 가진 마지막 한 방울의 힘까지 모두 짜내기로 결심했다.
자신의 검으로 자신의 길을 열겠다고.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비키세요. 지나가겠습니다!”
일순간 나예린의 몸이 사라지는가 싶더니 십수 개의 인영으로 나뉘며 순백의 검이 날아들었다.
한상옥령신검(霜玉靈神劍) 신생(生) 극오의(極奧義)
해상비조천참절(海上飛鳥千斬切)
비설보와 한상옥령신검의 극오의가 나예린의 몸에서 동시에 펼쳐져 나왔다. 천 마리의 바닷새를 일순간에 베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검기가 공간을 가득 메운다. 천변만화하는 면면부절의 변화.
그리고 쾌속!
이것이야말로 나예린이 스승 검후로부터 전수받은 최고의 검기였다. 십수 개로 갈라진 나예린의 신영이 끝없는 검무를 춘다.
“아름답군…….?”9
이 검초에는 무명 역시 그냥 설렁설렁 받아낼 수 없었는지 검집에 손을 가져다 댔다. 무명은 그의 무의식이 행하는 대로 검을 뽑았다. 그녀가 보여준 검기에 경의 를 보이려는 듯이.
찰칵!
검이 뽑혀 나오고 섬광이 번쩍이자 수십 개로 갈라졌던 나예린의 잔영이, 그리고 공간을 가득 메우던 날카로운 검기가 마치 신기루처럼 일순간에 사라졌다. “이럴 수가…….”
나예린은 검을 든 채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상비조천참절이 파해되다니……. 믿을 수가 없어요.”
검후 직전(直傳)의 오의, 그녀의 존경해 마지않는 사부가 십수 년의 고련 끝에 만들어낸 검기가 이렇게 간단하게 깨질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부랴부 랴 물을 떠서 돌아오다가 이 광경을 본 장소옥의 놀람은 더 대단했다. 하마터면 물을 담은 병을 떨어뜨릴 뻔했다.
“이, 이런 일이…… 대, 대장님이 검을 뽑다니……!”
마치 기분 나쁜 악몽이라도 본 듯한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부대장 직을 맡은 후로는 한 번도 무명이 검을 뽑는 모습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참 대단한 아가씨네. 설마 내가 검을 뽑게 될 줄은 몰랐어, 정말.”
언제 뽑았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자신의 검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무명이 중얼거렸다.
“게다가 아까운 옷까지…….”
좀 전의 검기에 당한 것인지 무명의 윗옷 가슴께가 사선으로 날카롭게 잘려 나가 있었다.
“흠, 내 옷자락에 닿다니, 아가씨도 상당히 재능이 있군. 매우 흥미로워. 아직 미완성의 기술이지만 완성되었을 땐 어떤 위력을 보여줄지 기대되는군.” 그러나 최후의 한 수까지 소모한 나예린에게는 더 이상 서 있을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나예린은 쓰러져 가면서, 멀어져 가는 의식 속에서 생각했다. ‘역시 미완성으로는 안 되는 건가…….’
해상비조천참절의 묘리를 거의 붙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부족했던 모양이다. 비장의 한 수가 실패로 돌아간 이상, 그녀에게 더 이상 남은 수는 없었다. 이미 무 리하게 극오의를 전개하느라 진기를 모두 소진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제 그녀에게는 서 있기는커녕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나는 역시 사슬을 끊지 못한 건가. 난 다시 갇혀 버리는 걸까……? 겨우 탈출했는데…… 다시…… 류연. 미안해요.”
그리고 나예린의 의식은 끊어졌다.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리는 그녀를 부축하는 손길이 있었으니, 그 손의 주인은 바로 무명이었다. 천상의 미인을 엉겁결에 안아 든 무명은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이것참 곤란하게 되었네.”
의료에는 별 재능이 없는 무명이었다.
“어쩌지, 소옥?”
이렇게 곤란해졌을 때는 부대장에게 물어보는 길이 제일 빨랐다.
“어쩌긴 뭘 어쩝니까. 사번대 대장님께라도 보여야죠. 그러니까 누가 그렇게 심하게 하라고 그랬습니까?”
장소옥이 발끈해서 소리쳤다.
“음, 오랜만에 멋진 검기를 만나다 보니 나도 모르게 흥이 났나 보네. 이거참.”
살살 하려 그랬는데 실수해 버렸네, 라며 하하 웃었다.
“거참, 이라며 웃어넘길 때가 아니라구요, 대장님!”
대장의 이런 태도 때문에 그동안 자신이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눈물이 폭포가 되어 떨어질 지경이었다.
“아하하하하, 이거 또 혼나 버렸네.”
뒤통수를 긁적이며 무명이 큰 소리로 웃었다.
“하아, 내가 죽고 말지.”
자신의 말이 여느 때처럼 마이동풍 대장에게 전혀 먹히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 장소옥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무리 봐도 마천각의 아가씨는 아닌 것 같은데요?”
게다가 이 미모는 대체 뭐란 말인가? 장소옥은 가까이서 그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금세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를 것 같 았다. ‘어라, 내가 왜 이러지?”라고는 생각하지만 그 이유까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침입자가 창고에서 나올 리도 없잖아?”
“그건 그렇죠. 역시 천무학관 사절단 중 한 사람인 것 같은데…….”
게다가 이만한 미모에 하얀 백의를 즐겨 입는 여인에 대한 소문이 떠올랐다. 그녀야말로 명실상부한 천하제일미라고 불리는 여인.
“설마 빙백봉 나예린?”
“응? 그게 누군데?”
“아니, 모르세요? 천하제일미라고요, 천하제일미! 얼음 봉황. 그 누구도 가까이 갈 수 없다는 한 마리의 차갑고 고고한 봉황.”
그녀를 가까이서 한 번만이라도 보는 게 강호 젊은이들의 소원이라는 이야기까지 돌 정도였다.
“확실히 이쁘기는 하네.”
“당연히 이쁘죠, 천하제일의 미인인데.”
가까이서 보니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게다가 정천맹주 나백천님의 딸이라고요. 한데 왜 백도 무림맹주의 딸이 이런 창고에서…….”
참으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거야 배가 고팠나 보지.”
아무렇지도 않게 한마디 툭 던졌다.
“아니, 그러니까 천하제일미라니까요.”
“소옥, 너 아까부터 그 말만 몇 번째 반복하고 있는 거 알어? 천하제일미도 밥은 먹어.”
“하지만 이런 식량 창고에 몰래 숨어들거나 하지는 않는다고요. 여기에는 무슨 연유가 있는 게 분명해요.”
혹시나 싶어서 창고 안을 조사해 봤지만 별다른 이상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그는 기관장치에 대해 그리 밝지 않았던 것이다.
“음…… 일단 사번대로 가자고. 연유야 이 아가씨가 깨어나면 물으면 되겠지. 그건 그렇고, 정말 예쁜 아가씨네.”
“대장님이 여자 외모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처음 보네요.”
대장의 관심은 언제나 수면뿐이었던 것이다. 강해지는 것에도 그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했고, 세력을 키우는 데도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런 무심한 태도 는 여자한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처음으로 그의 대장이 관심을 보이는 여자가 나타났다는 것이 놀라웠다.
‘역시 천하제일미…….’
핀잔을 피하기 위해 이번에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과연 그 여인은 보면 볼수록 요물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냥 가까이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저항력이 약한 소옥은 자신도 모르는 새에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였다.
“하하하, 소옥이가 빨개졌다.”
“안 빨개졌어요!”
“그럼 붉어진 거구나.”
“아, 아니라니까요.”
못 미더운 대장에게 또다시 놀림거리를 안겨주고 만 장소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