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8권 13화 – 현녀강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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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28권 13화 – 현녀강림!

현녀강림!

―인과응보(因果應報)

“이제 네 녀석만 남았으니, 너도 저세상으로 가서 업(業)의 무게를 깨닫도록 하거라!”

화룡을 형상화한 왼손이 초운을 향해 뻗어졌다.

“염룡포효(炎龍炮喙)!”

짧은 한마디와 함께 여인의 손에서 불꽃에 휘감긴 화룡 한 마리가 초운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이제 초운에게는 그가 걸친 백삼과 함께 새까만 재가 될 운명만이 남아 있었다.

화르르르르륵.

그러나 염룡포효에 직격을 당하고도 의외로 초운의 신색은 멀쩡했다. 그의 손에 들린 채 휘몰아치는 채찍으로부터, 푸르스름하게 안개 같은 서리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서리가 그와 불꽃 사이를 단절시켜 준 것이다.

“바퀴벌레 같은 녀석이 제법이구나!”

붉은 머리의 여인이 눈에 이채를 띠면서 소매를 살짝 털어내자, 푸르스름한 서리가 엷어지면서 초운의 손에 들린 채찍이 명확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휘둘릴 때마다 쐐애액 쐐애액, 기분 나쁜 소리를 내는 그것은, 그 끝이 여섯 가닥으로 갈라져 각자 뱀처럼 비늘이 달려 있었다. 마치 여섯 개의 머리가 달린 뱀처럼 생긴 그 채찍을 보고, 빙검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육두청사편!”

그 말에 남궁상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럴 리가요. 육두청사편이라면 오십 년 전 척살당한 색마황이 마지막까지 가지고 있던 독문병기 아닙니까? 그의 죽음과 함께 유실된 걸로 알고 있는데요?” 설혹 초운이라는 사내가 아무리 색마황의 후예라 해도, 그가 육두청사편을 가지고 있기란 불가능했다. 그것은 그자의 몸과 함께 천길 낭떠러지 밑으로 흐르는 급 류 속에 삼켜졌기에.

“간단해요. 그건 저자가 바로 색마황 그자라는 이야기죠.”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비류연이 불쑥 말했다.

“그건 너무 심한 억측 아닌가?”

장홍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반문했다.

“글쎄, 과연 어떨까요? 논리적으로 추론해 봤을 때 그것만이 남는다면, 아무리 그것이 비논리적으로 보여도 사실일 확률이 가장 높은 법이라고요.”

“하지만 저자는 아무리 봐도 이십대 중반으로밖에 보이지 않지 않나?”

장홍의 반문에 비류연은 코웃음을 쳤다.

“에이, 잘 알면서. 무림에서 겉모습은 별 의미가 없잖아요?”

“그럼 저자가 반로환동의 고수란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는 게 가장 타당하지 않겠어요? 상당히 비겁하고 추잡한 방법을 쓴 것 같긴 하지만. 봐요. 본인도 부정하지 않고 있잖아요.”

사람들의 시선을 일제히 받으며 서 있는 초운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떠올랐다. 동시에 그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극음의 기운이 폭출해 나왔다.

“크흐흐흐흐, 용케도 알아차렸구나! 바로 보았다. 이 어르신이 바로 색마들의 지존, 풍류남아, 십덕군자, 색마황 초운락 본인이시다!”

“…어떻게 그런 일이!”

비류연의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설마하며 반신반의하고 있다가, 본인의 입으로 확언을 듣자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 이럴 수가! 어찌 이런 일이…….”

누구보다 큰 충격을 받은 이는 그들에게 사제들을 모두 잃은 형산일응 곽현이었다. 그의 입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신생 마두인 줄 알고 추격했던 인물이, 처녀들 의 생기를 빨아먹고 젊어진 전대의 거마(巨魔)였음이 밝혀졌으니 그가 어찌 경악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역시! 제자나 아들 따위가 아니었군. 찍었는데.”

비류연의 마지막 한마디에 사람들은 적잖이 황당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방금 전엔 논리적인 추론이라고 하지 않았나?”

장홍이 따졌다.

“그래야 그럴듯하게 들리잖아요?”

마치 그런 건 상식 아니냐는 투였다.

“……”

장홍은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하긴 흡정유음마공을 저 정도까지 연성한 인물은 색마황 본인 한 명뿐이긴 했지. 하지만 그는 분명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혹시나 해서 절벽 주위와 그가 떨어졌던 강 주위를 칠 일 밤낮으로 수색했지만, 그가 살아 있다는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전해지고 있었다.

“나는 그때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정천맹 놈들의 척살대에 쫓겨 절벽에서 떨어졌다! 급류 속에 휘말렸던 나는 그나마 급히 흡정유음신공의 비법인 귀식음유대법 을 펼쳐 살아남을 수 있었지!”

귀식음유대법은 몸에 저장된 음기를 격발하여 그 한기로 신체의 운동을 급격히 떨어뜨린 후, 몸을 일종의 가사 상태로 만드는 비법이었다.

“삼일 밤, 삼일 낮을 떠내려갔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살아남았다. 그러나 상처가 심하고 진원지기의 손상이 심해서 그것을 회복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소비되 었지. 십 년 이상을 기다려서야 겨우 본래의 내공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난 결심했다! 복수를 위해 흡정유음신공을 더욱 강하게 만들기로!”

그가 어떤 식으로 내공을 회복하고, 어떤 식으로 무공을 증진시켰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중인들의 얼굴에 짙은 혐오감이 떠올랐다. 비류연은 새삼 감탄 했다는 듯이 반문했다.

“용케도 들키지 않았군요?”

“크흐흐, 지난 몇십 년간 얼마나 조심했는 줄 아느냐?! 그 노력엔 하늘도 감동을 했는지, 도와주는 놈들을 모으고 흡정유음마공을 대성의 경지까지 단련하자 몸이 점점 젊어지기 시작하더구나! 과연 처녀들의 순음지기는 미용에 효과가 탁월하더군.”

그가 아는 하늘은 이상한 데서 감동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채홍칠마가 타고 남은 재를 바라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 일곱 놈은 알아서 여자들을 잡아다가 내게 바치는 훌륭한 일꾼이었는데, 이렇게 한 줌의 재가 되었으니 다시 구하게 되지 않았나. 쯧쯧. 애석한 일이야, 애석한 일.”

정체를 드러낸 그는 혼자 남았음에도 좀 전보다 훨씬 자신감이 넘쳤다. 숫자 따위는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듯이.

“어쩐지 자신만만하군요. 색마황이라는 자가 그토록 대단한 자입니까, 노사님?”

모용휘가 인상을 찌푸리며 빙검에게 물었다. 이미 오래전에 죽었다고 알려진 인물인데다가 그 신분 또한 색마라는 지저분한 부류라서, 그는 예전에 들었을 때에도 그리 깊게 알려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는 그런 쓰레기 같은 인간을 같은 무림인이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절차탁마하며 무공을 익히는 다른 많은 무림인들에 대한 모욕처럼 느껴졌던 것이 다.

“저자가 만일 색마황 초운락 본인이고 현재의 공력이 예전과 같다면 그럴 만도 하지. 아니, 본인 말에 의하면 더 강해졌다고 하지 않느냐?”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만큼 저자가 자신이 있다는 이야기다. 지금까지는 정체를 숨기기 위해 본신의 힘을 발휘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겠지.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정천맹의 제마척 사대 세 개 부대가 그자 단 한 명의 손에 의해 괴멸되다시피 했다고 한다. 그런 공격을 받고도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니 확실히 저자의 저력은 측량하기 쉽지가 않구 나.”

빙검 정도의 초극강 검도고수가 색마황 초운락을 경계하고 있다. 그 점이 모용휘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빙검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귀가 밝은 초운락은 그의 말을 한 자도 빠짐없이 다 들을 수 있었다.

“흐흐흐, 표두 나부랭이 주제에 제법 보는 눈이 있구나. 맞다. 방금까지 보여준 것은 노부의 진신진력 중 삼 할에 불과하다!”

어느새 그는 자신을 가리켜 ‘노부’라는 단어를 쓰고 있었다. 하긴 오십여 년 전 그가 악명을 떨칠 때는 사십대였으니, 지금에 와서는 거의 구십에 가까운 나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이미 노부는 계집들의 순음지기 덕분에 회춘(回春)의 경지에 달했으니, 난 영원한 젊음과 영원한 정력을 이 손에 넣은 것이다, 알겠느냐? 크하하하하하!” 색마황 초운락의 입에서 앙천대소가 터져 나왔다. 그는 오십 년 만에 강호에 복귀한 것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는 듯했다. 그는 자신을 쫓아낸 강호로 화려하게 돌 아온 것이다.

그때 한쪽에 호통 소리가 터져 나왔다.

“닥치거라. 듣자 듣자 하니 방자함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벽력같은 호통을 친 사람은 다름 아닌 붉은 머리의 여인이었다. 색마황 초운락은 자신의 이름을 알게 되었으면서도 그저 불쾌한 듯 호통을 치는 이 여인을 쳐다보 았다.

“쯧쯧, 이 껍데기는 싱싱한 계집이 어째 간이 배 밖으로 나왔을꼬? 모름지기 계집이라면 장부에게 어찌해야 하는지 이 노부가 직접…….!”

“그만! 더 이상 듣다가는 본녀의 귀가 썩겠구나.”

음험한 미소를 곁들이며 되는대로 내뱉는 그의 말을, 현의부인이 엄중한 목소리로 잘랐다.

“됐다, 동생들은 물러나게.”

“심화(心)의 고초를 겪고 계실진대, 직접 손을 쓰시면 일이 커지진 않을는지요.”

푸른 머리칼의 여인이 차분하게 말하며 중인들 쪽으로 시선을 짧게 한 번 던졌다. 기이하게도, 심화를 겪었다는 대부인보다는 길거리에 널려 있는 행인들이 염려 된다는 듯한 시선이었다. 현의부인은 그 말에 단호하게 말했다.

“괜찮네. 뿌린 대로 거둔다는 게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려는 것뿐이니. 두 동생은 걱정할 것 없네.”

현의부인의 말에는 광오함이 담겨 있었다.

그 말에 붉은 머리칼의 여인이 마지못해 물러나자, 현의부인은 짧게 말했다.

“자, 오너라.”

색마황 초운락은 기가 막힌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거기 있는 귀부인께서는 정말로 세상 무서운 걸 모르시는구려. 오늘 이 노부가 특별히 일대일로 세상의 무서움을 가르쳐 드리리까? 크흐흐흐흐.”

초운락의 입에서 듣기만 해도 소름이 돋는 음소가 흘러나왔다.

그러자 현의부인의 눈에서 은은한 신광이 쏟아졌다.

“그래? 재밌겠구나. 어서 오너라.”

“미친 계집! 과연 잠시 후 이 어르신의 육두청사편의 매운 맛을 보고도 그렇게 꼿꼿하게 서 있을 수 있는지 두고 보자! 남아 있는 음기 한 방울까지 모두 빨아 먹어 주마! 크하하하하하!”

색마황 초운락이 오른팔을 떨치자 육두청사편이 살아 있는 뱀처럼 영활하게 현의부인의 몸을 유린하기 위해 날아갔다.

현의부인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투두둑!

그다음 순간, 매서운 기세로 날아가던 여섯 마리 청사의 몸이 동강동강 나며 힘없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이 의외의 사태에 깜짝 놀란 초운락이 급히 공력을 운용하며 쌍장을 후려쳤다.

닿기만 해도 상대의 피와 살을 얼려 버리는 죽음의 푸른 안개 ‘창음상’이 피어올랐다.

차가운 냉기를 머금은 불길한 안개가 현의부인을 향해 밀려갔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극음의 한빙장이었다.

“피하십시오, 부인!”

보고 있던 모용휘가 조용히 입 다물고 보고 있으라는 염도의 주의를 무시하고 소리쳤다. 덕분에 그는 ‘닥치고 보고 있으랬잖아’ 하는 핀잔을 들어야만 했다. 현의부인은 피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오른손을 마주 뻗어 날아오는 한빙장에 대항했다.

이때다 싶어 초운락은 내뻗은 우장(右掌)을 갈고리처럼 만들어 현의부인의 오른손을 낚아챘다. 음탐낭조(淫貪狼爪)라 불리는 수법으로, 정말이지 쾌속무비한 금 나수법이 아닐 수 없었다.

현의부인의 백옥 같은 손이 별 반항도 없이 잡혀오자, 초운락의 입에서 썩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크하하하하! 노부의 손에 잡힌 이상 끝장이다! 노부의 품에서 성불하게 해주마!”

직접적으로 접촉한 이상 승리는 그에게 있었다. 이제 이 여인의 생사여탈권은 오직 그의 손아귀에 달려 있는 것이었다.

“흡정유음신공(吸精幽陰神功) 흡음결(吸陰訣)!”

초운락은 흡정유음마공의 흡음결을 운행했다. 접촉한 상대의 음기를 빨아들이는 사악한 마공이 발동한 것이다. 이 흡음결이 시전되면 여인들은 꼼짝없이 자신들 이 가지고 있는 순음지기를 그에게 바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마음만 먹으면 이 흡음결을 이용해 양기만을 빼내고 음기를 승하게 해서, 여인들을 음욕과 도탄에 빠 뜨리는 열락도 즐길 수 있었다.

이 꼿꼿하고 광오할 정도로 건방지기 짝이 없는 현의부인이 이제 곧 신음하며 그에게 목숨을 구걸하게 될 것이라는 데 그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 어라?”

뭔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뭔가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없었다.

당연히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어야 할 현의부인이, 여전히 허리를 꼿꼿이 편 채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이럴 리가 없는데…….”

그러고 보니 그의 오른손으로부터 아무런 기(氣)도 흡수되고 있지 않았다.

“흡정유신공 흡음결!”

다시 한 번 외쳐보지만, 여전히 반응은 똑같았다.

“흡음결! 흡음결! 흡음결!”

여전히 그것은 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너의 가르침은 그걸로 끝났느냐?!”

현의부인의 입에서 추상같이 날카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초운락의 몸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는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털썩.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초운락은 다시 무릎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별 의미는 없었다. 무릎 관절이 현의부인의 가벼운 발길질 한번에 의해 완전히 가루가 되었기 때문이다.

힘이 없는 건 무릎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전신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힘이 빨려 들어가는 곳은 다름 아닌 현의부인 쪽이었다. 강줄기가 바다로 흘러가듯 그의 온몸에 있는 기운이 몽 땅 현의부인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아무리 흡정유음마공을 일으켜 흐름을 되돌리려 해도, 황하의 거센 급류와도 같은 그 격한 흐름을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기가 급격히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초운락의 창백하던 피부에서 점점 더 윤기가 사라져 가며 퍼석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이윽고 구겨진 종이처럼 거죽이 푸석푸석 들떴다. 처녀들이 그에게 기를 빨려 나가서 죽기 일보 직전에 다다랐을 때, 애걸복걸하며 살려달라고 외칠 때 자주 보여주던 상태였다.

충격을 감추진 못하고 초운락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다, 당신도 흡정유음신공을 익혔단 말이오?”

‘너’라는 반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 말에 현의부인의 날카로운 눈썹이 꿈틀거렸다.

“가르침을 준다더니, 너는 공부가 심히 부족하구나. 이번엔 제대로 비교해 보거라!”

그와 동시에, 초운락의 입에서 소름 끼치도록 오싹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아아아아아악!”

그는 몸 안의 오장육부를 불개미가 물어뜯는 것 같은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전신의 심맥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만 같아 그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 었다.

“아프더냐?”

비명을 지르고 몸부림치며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채 초운락이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러자 현의부인이 차가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그 불쌍한 여자아이들은 이보다 더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연민에 가득 찬 목소리였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악!”

초운락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이 더욱 커졌다. 그의 몸을 물어뜯는 불개미가 두 배로 증가한 것 같았다.

“그 아이들이 예쁘게 태어난 것 말고 무슨 죄가 있었느냐?”

듣는 이의 폐부를 울리는 목소리로 현의부인이 말했다.

“그 아이들을 잃은 부모들은 또 얼마나 가슴이 찢어졌겠느냐?”

그리고 그녀는 그 고통의 일부를 가르쳐 주었다.

초운락은 눈을 하얗게 까뒤집고, 입에 하얀 거품을 물며 온몸을 푸들푸들 떨었다.

“꺽…… 꺽…… 꺽……..”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현의부인은 보내고 있던 힘을 반으로 줄였다.

“꾸웨에에에에엑! 죽여주시오! 제발 죽여주시오!”

이번에는 그의 내장이 칼로 난도질당한 다음,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잡아 뜯겨지는 것만 같았다. 살아 있는 채, 정신이 남아 있는 채 몸이 찢어지는 경험을 하니 차 라리 죽는 게 더 낫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가 혀를 깨물고자 하는 순간, 현의부인은 그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힘을 늘렸다.

“크아아아아아악!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용서, 용서해 주십시오! 엉엉엉엉엉엉엉!”

구십이 넘었다는 전대의 거마가 어린아이처럼 울고불고 사정하는 모습은 경극에나 나올 법한 장면이었다. 그만큼 그것은 현실감이 떨어지는 광경이었다.

단 한 명의 여인에게, 무림공적으로까지 지정되었던 전대 거마 색마황 초운락이 뒹굴며 애걸하고 있다는 것을 누가 곧이곧대로 믿어주겠는가.

“나에게 용서를 구하면 무얼 하느냐? 이미 그 사과를 들어줄 아이들은 여기에 없거늘.”

“엉엉엉,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엉엉엉엉!”

“하지만 안 하는 것보다는 하는 게 낫겠지. 네가 그동안 희생당한 불쌍한 여인들을 향해 고두(叩頭)로 사과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구나.”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쿵!

한 손이 잡힌 채, 무릎을 꿇고 있던 초운락의 이마가 절굿공이처럼 땅을 찧었다. 금세 이마가 깨지며 피가 튀었다. 어찌 된 일인지 지금 이 순간은 여인들의 음기를 흡수해 연성했던 호신강기가 전혀 소용이 없었다.

쿵! 쿵! 쿵! 쿵! 쿵!

팟! 팟! 팟! 팟! 푸확!

이마가 깨지고 피가 철철 흘러내리더니 그가 입고 있던 깨끗한 백삼이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로 벌겋게 물들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아홉 번을 하고서야 초운락은 겨우 고개를 들었다.

이제 끝인가? 이제 죽을 수 있는 건가?

“헤헤헤헤헤.

실성한 사람 같은 웃음이 초운락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냥 확 정신을 놓고 미치고 싶은데도, 그의 뇌 속 심맥을 감싼 보이지 않는 힘 때문에 미칠 수가 없었다. 심 지어 정신을 잃을 수도 없었다. 그는 어느 때보다 예민해진 감각으로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을 생생히 절감해야 했다.

그때 다시 현의부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듣기로, 그 흡정유음마공이라는 것은 처녀 백 명의 순음지기가 필요하다지?”

초운락의 마음속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당장 돌아버리고 싶은 충동이 그의 전신을 감쌌다. 그리고 절망적인 한마디가 들려왔다.

“그렇다면 이제 아흔한 번 남았구나!”

백 번의 고두를 채우라는 이야기였다. 초운락은 감히 거역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

그것은 실로 기이한 광경이었다.

과거 수많은 여성들과 강호인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색마황 초운락이 기계처럼 반복해서 단단한 땅에 절구를 찧듯 고두를 해대는 광경은.

여인들의 일행은 물론이고, 지켜보던 비류연 일행 중에서도 그 누구도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무거운 침묵이 장내에 내려앉은 가운데, 누군가의 머리 찧는 소리만 이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쿵! 아흔일곱! 쿵! 아흔여덟! 쿵! 아흔아홉! 쿵! 일백(一百)!

드디어 일백 번의 고두가 끝이 났다.

고개를 든 초운락의 얼굴은 피와 흙이 뒤범벅되어 있어 이미 사람의 얼굴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를 불쌍하다 여기지 않았다. 그를 불쌍히 여기기에는 그동안 그의 손에 희생당한 여인들의 한이 너무나 깊었다.

그를 불쌍히 여긴다는 것은, 인생을 채 꽃 피워보기도 전에 저 색마들의 손에 의해 짓밟혀야 했던 여인들에 대한 모독이 될 것 같았다. 또한 저 색마에게 딸아이를 빼앗긴 부모들에 대한 지독한 무신경과 능멸이 될 것 같았다.

서서히 물들어가던 백삼은 이제 스스로 흘린 피로 인해 완전히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헤헤헤…… 헤헤헤……”

초운락의 헤벌린 입가에서 침이 질질 흘러나왔다.

그의 입은 쉬지 않고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자세히 들어보고 있으면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를 쉬지 않고 반복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이 저지른 행위, 즉 업(業)의 무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지난 구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깨닫지 못했던 인과응보(因果應報) 의 도리를 온몸과 온 정신으로 깨닫고 있었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살고 싶어도 살 수 없는 게 얼마나 비통한 것인지. 그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이제, 이제 알겠습니다!”

초운락이 흐느끼며 절규했다. 좀 전과는 달라진 목소리였다. 현의부인은 그런 그를 꿰뚫을 듯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하냐? 이제는 구천에 있는 여자아이들을 만나러 가도 괜찮겠느냐?”

그 말에 초운락이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저를 지옥으로 보내주십시오! 어흐흐흐흐흑!”

쿵쿵쿵!

초운락이 질리지도 않는지 다시 고두를 했다. 죽을 수만 있다면 그는 어찌 되든 좋은 듯했다. 그런 초운락을 바라보는 현의부인의 눈은 심원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좋다. 그 정도 각오라면 이제 죽어도 되겠구나. 수십, 수백 번의 죽음으로도 어찌 네 업을 지우겠냐마는, 그렇다고 하여 또 어찌 너를 살려두겠느냐?”

그녀의 말에는 오랜 세월의 무게와 심혼을 울리는 힘이 깃들어 있었다.

초운락은 깨달았다.

자신이 얼마나 ‘조무래기’였는지를, 거마(巨魔)라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호칭이었는지를.

이제는 정신의 티끌조차 남아 있지 않은 색마황 초운락을 향해, 현의부인이 새하얀 옥수를 내뻗어 그의 천령개에 올려놓더니 준엄한 목소리로 고했다.

“여인의 몸에서 나와 여인들의 목숨으로 이루어진 몸이니, 너의 갈 곳 없는 육신은 흙으로 돌려놓도록 하겠다.”

다음 순간, 현의부인의 전신에서 검은 불꽃 같은 아홉 줄기의 기운이 뻗어 나왔다. 그와 함께 초운락은 전신에 차 있던 기운이 현의부인의 손바닥을 타고 빠져나가 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엄청난 흡입력이 그의 공력을 모두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것은 흡정유음마공과 비슷하면서도 확연히 달랐다. 그의 몸 안에 있던 진기가 거 대한 바다를 찾아 흘러들어 가는 것 같았다.

아득해지는 한편 기이하게도 맑아지는 의식 속에서, 그는 언젠가 들었던 이와 비슷한 무공에 관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것은 전설의 북명현해신공’에 관한 이야기였다.

“검은 옷, 아홉 줄기의 묵린염. 그리고 흡성대법! 설마… 설마……..”

양 무릎을 땅에 꿇은 채 현의부인을 올려다보던 색마황 초운락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또 하나의 전설이 그의 뇌리에 떠올랐던 것이다.

그것은 여인의 몸으로 북명현해신공을 대성한 일세 여걸에 대한 전설이었다.

이미 백 년 전이라 이제는 기억하는 사람도 많지 않은 전설…….

작금에 와서는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강호의 신화인 한 사람의 첫째 부인으로만 알고 있었지만, 구십이나 된 초운락은 다른 이름으로 그 전설을 기억하고 있었 다.

선녀들 중에서도 가장 높다는 대선녀의 칭호를 지니고 있는 여인.

그 별호는…….

현의부인을 바라보는 초운락의 두 눈에는 믿을 수 없는 것을 본 사람처럼 경악과 불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당신께서는 설마.. 구천현녀(女)?!”

현의부인은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 본녀는 구천현녀 무화라 한다.”

푸석푸석해져 있던 얼굴에 점점 더 주름이 생겨나고, 검었던 머리가 점점 더 새하얗게 변해갔다. 그리고 주름지던 그의 피부가 쭈글쭈글해지기 시작하더니 온몸이 쪼그라들었다. 그는 순식간에 구십 년이란 나이를 먹은 것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뼈와 가죽만 남았다. 이제 그의 몸에는 단 한 방울의 진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쩌적쩌적!

다음 순간 그의 온몸에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부서져 내렸다, 수백 년의 세월에 풍화되기라도 한 듯이.

한때 강호를 주름잡던 색마의 지존이 한 줌의 먼지로 돌아간 것이다.

현의부인은 먼지가 되어 흩어지는 한가운데 조용히 서 있었다. 감히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태산과도 같은 기운이 번져 나왔다.

“……”

아무도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그때, 첫째 딸 효인이 그녀를 향해 걸어가더니 허리를 깍듯이 숙이며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어머님. 저희들이 무능하여 세 분 어머님을 번거롭게 만들어 드리고 말았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녀들 선에서 끝냈다면 어찌 현의부인이 굳이 손을 더럽혀야 했겠는가. 고지식한 그녀는 그것이 그렇게 죄송할 수가 없었다.

“괜찮다. 내가 직접 손을 쓴 것도 이자의 업이 불러온 응보(應報)일 것이니.”

그렇다면 그건 참으로 엄격하고 준엄한 응보가 아닐 수 없다고 효인은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한 행적을 보면 당연하다면 당연할 수 있었다.

흡정유음마공으로 처녀들의 순음지기를 빼앗아오던 자가, 한 여인이 펼친 흡성대법에 의해 진기가 모두 흩어지고 먼지로 돌아간 것 역시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간 인과율의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그건 오직 하늘만이 알 일이었다.

“우리도 또 다른 응보를 돌려주기 위해 길을 서둘러야겠구나.”

어딘지 한없이 쓸쓸한 애잔함이 감도는 목소리로 현의부인이 조용히 뇌까렸다.

“그자와 그자를 도우려 하는 모든 자들이 그에 합당한 응보를 받을 것입니다! 하늘이 벌을 내리지 않는다 해도 우리들이 반드시 그자에게 벌을 내려야겠지요!”

붉은 머리칼의 여인, 즉 둘째 처 단혜의 말에는 한 치의 의심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그래, 그리될 것이다, 내가 그리할 것이니까. 내가 그리할 것이야.”

조용하지만 흔들림없는 목소리로 현의부인이 중얼거렸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중양표국 표행의 인솔자인 철심장 장이하를 쳐보며 물었다.

““자네, 표행의 목적지는 어디인가?”

장이하의 철심장은 이미 다 녹아서 물이 되어 있었다. 그가 원래 담이 작은 사람이었다면 어찌 철심장이라는 별호를 얻을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그 별호가 무색하 게장이하의 몸은 사시나무 떨리듯 오돌오돌 떨리고 있었다.

“그, 그, 그러니까 흑, 흑천맹이 있는 무, 무창입니다.”

이를 딱딱 부딪치며 장이하가 간신히 대답했다. 말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만 해도 그는 있는 힘 없는 힘을 다 짜내서 쓰고 있는 형편이었다.

조금 전에 펼쳐졌던 광경을 직접 목도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그 때문인지 그의 행동을 비난하는 이는 없었다.

“그런가? 셋째 동생, 어떤가.”

“동행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표행의 속도도 빠른 것 같았으니 별문제는 없겠습니다.”

두 부인의 대화에 일행은 불길한 예감을 억누르며 식은땀을 흘렸다. 그러나 잔혹하게도 불길한 예감은 반드시 십중팔구 들어맞는 법. 구천현녀는 장이하를 보며 무시무시한 한마디를 꺼내고 말았다.

“좋다,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인데 함께 동행하지 않겠나?”

그것은 청천벽력 같은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가장 놀란 것은 빙검과 염도였다.

“거절하게! 당장 거절해! 반드시! 절대로!”

빙검과 염도는 동시에 전음으로 그렇게 외치며 거절하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방금 전 그 광경을 생생하게 곁에서 지켜보았던 장이하에게는 무리한 요구였다. “그, 그렇게 해주시면 오히려 이쪽이 영광이지요. 어허허허, 기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장이하가 말에서 내려 떨리는 손을 맞잡아 읍하며 최대한 공손하게 예를 표하며 말했다. 그 순간, 빙검과 염도는 절망에 빠져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그 태도와 언행이 흡족한지 구천현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말했다.

“그럼 수락한 걸로 알겠다. 아직 갈 길이 남았으니 서두르도록 하지.”

“당장 그리하겠습니다.”

장이하가 현의부인의 의견을 수락하는 것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던 셋째 딸, 갈효혜는 입가에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다.”

마치 그렇게 말하는 듯한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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