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8권 14화 – 긴장된 동행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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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28권 14화 – 긴장된 동행 관계

긴장된 동행 관계

-위(胃) 천공(穿孔)

“으으으으…..”

누가 볼까 봐 초립을 깊게 눌러쓴 염도가 눈살을 찌푸리며 오른손으로 배의 중단전 쪽을 살며시 문질렀다.

“왜 그러나? 시끄럽게.”

퉁명스런 어조로 빙검이 주의를 주었다. 이상한 소리를 내서 이쪽으로 이목이 집중되게 하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 내지는 핀잔이었다.

보통 때 같았으면, 당장 그 말에 발끈해서 ‘이 얼음땡이가! 말 다 했냐!’라고 외치며 투닥투닥 말싸움에 들어갔겠지만, 웬일인지 염도는 인상만 더 찌푸릴 뿐 그저 똑같이 퉁명스런 어조로 대꾸했다.

“그냥 위가 쓰려서 그런다, 왜?”

여기서 언쟁을 벌였다가는 대번에 여인들의 시선이 그들에게 날아와 꽂힐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억지로 화를 억누른 것이다. 불타는 개차반이라고까지 불릴 정도로 성격이 폭급한 염도가 이토록 출중한 인내심을 발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불가사의할 정도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이쯤 에서 그냥 넘어갈 염도가 아니었다.

“흥, 차가운 얼음땡이 녀석이 이 몸의 섬세한 마음을 어떻게 이해하겠냐? 너같이 무신경한 놈은 위장도 강철 같아서 멀쩡하겠지.”

염도가 먼 산을 바라보며 날린 전음에, 빙검의 날카로운 청은색 눈썹 끝이 실룩거렸다.

“섬세가 다 불타 죽었나 보군. 자네한테 그런 신기한 게 다 남아 있을 리가.”

“뭐라고? 말 다 했나?”

말싸움은 하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어느새 다투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다만 평소보다 훨씬 조용한, 조용하지만 치열한 물밑싸움이었다.

“당연히 다 안 했지. 자네 혼자 섬세한 척하지 말게. 어울리지도 않으니까. 아니, 오히려 기분 나쁘군.”

“뭐라고?! 한번 해볼 테냐?”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떠는 염도를 보며 빙검은 코웃음을 쳤다.

“또 그렇게 금방 발끈하지. 자넨 정말 변함이 없군. 지금 상황을 잘 생각해 보란 말일세.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게다가 위장에 구멍난 게 혼자만이라고 생 각하진 말게.”

“응?”

그게 무슨 뜻이냐는 듯 염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위에도 벌써 애저녁에 구멍 두세 개는 족히 뚫렸네.”

염도가 빙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불쑥 전음을 날렸다.

“그런데 왜 그렇게 멀쩡한 얼굴이냐?”

염도를 쳐다보는 빙검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맺혔다.

“이게 멀쩡한 걸로 보이나? 이건 멀쩡한 게 아니라 무표정한 걸세. 난 원래 아프면 무표정해지는 체질이거든. 그리고 ‘냉각통증마취’라는 긴급요상법도 사용했 지.”

냉각통증마취란 신체의 일부를 차갑게 해서 통증을 둔화시키는 운공요상법이었다. 빙한계의 무공을 극상승의 경지까지 익힌 빙검이기에 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 “얼음땡이, 너 지금 자기 위를 얼려놓았다는 거냐?”

이런 황당한 놈을 다 봤나 하는 표정으로 염도가 빙검을 쳐다보았다. 빙검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겠나?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위장을 부여잡고 쓰러질 판인데. 아마 모르긴 몰라도 자네보다 위에 뚫린 구멍 개수가 더 많을 것일세. 책임감이 다르니까.” 천무학관에서의 위치상 빙검은 염도보다 지위가 훨씬 높은, 대무사부의 신분이었다. 무사부들을 총괄하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책임감이 남달랐다.

“자넨 자네의 어깨에 짊어진 책임을 외면해 왔지만, 난 그러지 않았어. 그녀만 해도…….?

“그녀 얘긴 그만 하지!”

염도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소리칠 뻔한 걸 억지로 참은 것이다. 이런 순간에 과거의 상처를 후벼 파이고 싶지는 않았다.

“좋아, 그만 하지.”

그리고 두 사람은 동시에 다시금 입을 닫았다.

무거운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

이윽고 둘은 서로를 외면한 채 걷기 시작했다.

역시 그들은 얼음과 불, 결코 섞일 수가 없었다.

이 불협화음의 현장을 멀리서 조용히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한 사람 있었으니, 그녀는 바로 검은 옷의 대부인, 구천현녀 무화였다.

그 여로는 빙검과 염도의 위장에 구멍 몇 개를 슝슝 뚫어놓을 정도로 험난하고 신경 팍팍 쓰이는 그런 여정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 둘의 속은 점점 더 쓰려왔다.

구천현녀를 비롯한 삼대낭랑들과 신마팔선자에게 정체가 들켰다가는 무슨 경을 칠지 모를 일이라, 노심초사하고 안절부절못했던 것이다.

빙검은 이 여정이 끝날 때까지 자신의 위가 버텨주길 바랄 뿐이었다.

더구나 중간 중간 날아오는 효혜의 가벼운 듯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질문은, 위뿐만 아니라 이 둘의 심장을 덜컥 내려앉게 하기에 충분했다.

“어쩐지 이곳 표국은 표사들 중에 젊은 친구들이 많군요.”

“젊은이를 많이 키워야죠. 저희는 신생 표국이라 일손이 많이 달리는 형편입니다.”

“일손이 달리는 형편치고는 젊은 청년들의 기개가 헌앙하고 기도가 날카롭네요. 참 놀라워요.”

“하하하, 아직 멀었소이다. 하하하.”

삐질삐질삐질.

한여름에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빙검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나올 정도였다. 그는 몇 번이고 여인들의 선두에 서 있는 구천현녀에게로 몰래몰래 시선을 옮겼 다. 수시로 확인하지 않으면 안심이 안 되었다.

“과연, 요즘 중원 표국계를 휩쓸며 약진하고 있는 신진 표국답네요. 투자할 보람이 있겠어요.”

“하하, 신마가의 투자를 받을 수 있다면 천군만마를 얻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그렇게만 되면 욱일승천하는 기세를 멈출 곳은 아무도 없을 것이오.”

“그것도 중양표국에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관 표두님께서도 투자에는 상호간의 신뢰 관계가 중요하다는 건 알고 계시겠죠?”

은근한 어조로 말에 무게를 담아 효혜가 말했다.

“물론이오. 그건 상식 아니겠소이까?”

“그렇다면 서로 속이는 것도 없어야겠지요?”

말투가 더욱 낮아지고 더욱 은근해졌다. 빙검은 이 여인이 왜 이러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어쩐지 자신을 바라보는 효혜의 시선이 날카로워진 것 같았다. “물론이오.”

“정말 관 표두님은 저희들에게 속이고 있는 것이 없나요?”

은은한 미소가 서려 있던 효혜의 얼굴이 이 순간만큼은 한없이 진지했다. 보는 사람의 마음을 뜨끔하게 할 정도로. 또한 그녀의 지혜로 가득 찬 눈동자는 사람의 심리를 훤히 꿰뚫어보는 듯했다. 어떤 거짓도 저 눈을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빙검은 떨리는 심장을 빙백심결을 이용해 간신히 진정시킨 다음에야 담담한 목소리로 말할 수 있었다.

“무슨 말씀이시오? 그럴 리 없지 않겠소이까?”

“그렇죠? 그럴 리 없겠죠.”

진지한 표정을 거두며 효혜가 활짝 웃었다.

그제야 빙검은 조용히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이 차가운 얼음 검도 이 여인만큼은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마치 그의 아내처럼, 차갑게 언 그의 마음을 이리저리 가지고 노는 재주가 있었다. 물론 그의 아내만큼은 못하지만. 문제는 이 여인은 그들의 잠재적인 위협 요인 이라는 점이었다.

“그런데 이곳 젊은 청년들은 어쩐지 몸이 가냘프네요?”

“그렇소이까?”

“그래요, 몇몇 사람들은 마치 여자들 같은걸요?”

빙검은 속으로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이 여인은 아무 눈치도 채지 못한 채 그냥 흥미 본위로 물어보는 것일까, 아니면 이미 눈치채고도 모른 척 묻는 것일까?

만일 전자라면 물론 ‘남자들이지요, 하하하’라고 대답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하지만 후자라면… 그들의 여정은 매우 힘든 위기에 봉착하게 될지도 몰랐다. 빙검이 마음속으로 갈등하고 있을 때 갈효혜가 웃으며 말했다.

“후후후, 정말 이상하죠? 여자들이 표사 일을 할 리가 없는데 말이에요. 역시 제 착각이었겠죠?”

빙검의 입에서 반사적으로 대답이 나왔다.

“그야…….”

바로 그때였다.

“안 돼요, 부정하면!”

“물론 착각이시오’라고 무의식적으로 대답할 뻔했던 빙검의 말이 우뚝 멈추었다. 그의 고막을 꿰뚫듯 누군가의 날카로운 전음밀입지성이 들려왔던 것이다. “인정해요. 그들이 사실 여자라는 것을요.”

빙검은 곧 방금 전 그 전음성을 보낸 사람이 다름 아닌 비류연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정말 괜찮을까? 그 말대로 따라도?

빙검이 갈등하고 있을 때 다시 전음성이 들려왔다.

“걱정 말아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빙검은 더욱더 걱정이 아주 많이 되었다. 다 알아서 한다고 하니 걱정이 세 배 정도 더 증가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다시 비류연의 전음성이 들려왔다.

“방금 전 저 여인의 말은 유도신문이었을걸요? 마음의 방어를 누그러뜨려서 원하는 대답을 들으려는 함정이었을 거예요.”

그 말에 빙검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확실히 생각해 보면 이 효혜라는 여인은 그가 ‘착각이시오’라고 말하기 쉽도록 질문을 몰아가고 있었다.

만일 그녀가 이미 이 표행에 많은 수의 여인들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고 그런 질문을 했다면, 그가 그 사실을 부정하는 것 자체가 곧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결정 적인 증거가 되는 것이다. 자신들이 수상쩍다는 것을 자랑하고 다니는 꼴이 되는 것이다.

“왜 말이 없으세요, 관표두님? 제가 그렇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한 건가요?”

갈효혜의 지성이 넘치는 눈동자가 빙검을 향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해 내기라도 하듯이. 갈등하던 빙검은 마침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아, 들키고 말았군요. 사실 저 친구들, 여자가 맞소이다.”

그 말을 듣고 갈효혜는 눈에 이채를 띠었다.

“이런, 정말인가요?”

그 대답에 놀란 이는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표사로 분장한 채 정체를 숨기고 있던 대다수의 천무학관도들이 속으로 깜짝 놀랐다. 특히 염도는 얼굴이 쉴 새 없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대체 저 얼음땡이가 무슨 속셈이지??

왜 스스로 무덤을 파는지 염도는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옆구리에 팔꿈치라도 한 방 먹여주고 싶었다.

“…….”

다시 뭐라고 말해야 할지 변명거리가 떨어졌을 때, 귓속에 비류연의 전음성이 들려왔다. 빙검은 그 말 그대로 책을 읽듯 말했다.

“음…… 그러니까 사실 이건 아직 비밀이지만, 저희 중양표국은 타 표국과 차별화된 인선정책을 펼치고 있소이다. 그중 하나가 여표사를 뽑는 일이지요.” 비밀이라고 말한 것은 그들이 그 사실을 숨기는 것이 당연하다는 인상을 풍기기 위한 사전 조작이라 할 수 있었다.

“호오, 표국에서 그런 일을 하다니 정말 놀랍군요.”

갈효혜 역시 무림의 선두에 서 있는 여성으로서 충분히 흥미를 가질 만한 내용인 것일까. 빙검은 내친김에 비류연이 전해주는 말을 그대로 덧붙였다.

“실력만 있다면 남녀 가리지 않고 표사를 뽑는 게 저희 중양표국의 방침이라오.”

“정말 상당히 파격적인 정책이네요.”

빙검은 속으로 참 말도 안 되는 정책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이런 걸 하는 표국이 있다면 미쳤다고 온갖 표국들의 손가락질을 받을 게 분명했다. 비류연의 전음이 계속되었다.

“확실히 표국계는 그 특성상 거친 남자들이 하는 일로 인식되어 왔지만, 강호에서는 하찮은 남자들보다 강한 여협들이 얼마든지 있지요. 사실 멀리 가서 찾아볼 필요도 없소이다. 이 길 위에만 해도 최고의 실력을 겸비하신 분들이 최소한 열 분도 넘게 계시니 말이오.”

“어머, 과찬이세요. 관 표두님께선 의외로 달콤한 말씀을 잘하시는군요.”

갈효혜는 손사래를 치며 겸양했으나, 미소는 어쩐지 흐뭇해 보였다.

“아무튼 그런 정책이지만, 아직 너무 파격적이라 어쩔 수 없이 남장을 시키고 말았소이다. 아직 주위의 시선이 그렇게 좋지 않아서……..

“그럴 것 같네요.”

그 맘 충분히 이해한다며 효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표국의 신용과 관련된 문제라…….”

“그렇겠지요. 여자들이 표사로 들어가 있다면 그 표국에 대한 신뢰도가 많이 떨어지겠죠? 오죽 사람이 없으면 여자들을 쓰냐고 생각할 테니 말이에요.”

빙검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말을 하고 있는 빙검조차 속으로는 ‘나라도 그런 곳엔 안 간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달랐다. “그러니 더더욱 실적이 필요한 것이외다. 이 표행은 그 시범적인 것이기도 해서, 반드시 성공해야 하오. 그래야 강호 여성들도 직업 선택의 폭이 좀 더 넓어지지 않

겠소이까?”

“그런 좋은 취지를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네요. 꼭 성공하길 빌겠어요.”

“감사하오. 여러분들도 계시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소이까? 이 표행은 반드시 아무 일 없이 무창에 도착할 것이오.”

“저희 가문에서도 적극적으로 지원하도록 해야겠네요. 아, 그리고 무림에 새로 나타난 여표사들도 꼭 보고 싶군요.”

빙검은 속으로 뜨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하하하, 나중에 꼭 그리하도록 하지요. 하지만 지금은 첫 표행이니 긴장을 늦추게 하진 않는 게 좋겠소이다. 쓸데없는 바람을 넣고 싶지 않아서…….”

“후후, 우리 팔선자의 관심을 쓸데없는 바람이라고 하실 수 있는 분은 관 표두님 정도뿐일 거예요.”

“이거 제가 말실수를 했군요. 죄송합니다.”

“아니요, 전 원칙을 준수하는 사람들을 좋아한답니다. 그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거든요. 아쉽게도 지금은 볼 수 없지만, 나중에 꼭 따로 만나보고 싶군요.” “이번 표행이 끝나면 꼭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해드리겠습니다.”

“기대하고 있겠어요.”

잠깐의 위기를 넘기려고 만들어낸 이 한마디 때문에 중양표국은 정말로 꼼짝없이 남녀의 성별보다는 실력으로 표사들을 뽑아야 할 판국이었다. 구천현녀 앞에서 허언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살고 나서나 걱정해야 할 일. 갈효혜가 살짝 인사를 하고는 자매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며, 빙검과 염도는 조용히 가슴을 쓸어내렸다. 일단 눈앞의 위기는 어찌어찌 넘긴 듯했다.

빙검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나예린에게 이런저런 말을 걸고 있는 비류연을 한번 힐끔 바라보았다.

결코 달변이라 할 수 없는 자신이, 비류연의 말재주가 없었다면 이 위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을까? 빙검은 감히 장담할 수 없었다.

신마팔선자가 그동안 쌓아온 명성은 어마어마했다. 그녀들 하나하나가 최절정고수였다. 과연 호랑이의 새끼는 호랑이였다. 수컷이든 암컷이든 호랑이라는 데는 아무런 변함이 없었다.

게다가 그녀들은 그 엄사(嚴師:엄격한 사부) 중의 엄사라 할 수 있는 ‘삼대랑랑’ 밑에서, 근면성실하게 자신들을 단련해 왔다. 무신마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기 위 해서, 신마가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집안일에 대해 무신마 갈중혁이 뭐라고 입을 여는 일은 결코 없었다. 갈중혁은 천겁령의 남아 있는 불씨가 다시 타오르지 않도록 암중으로 진화하러 다니느라 바 빴고, 덕분에 신마가의 모든 것은 그녀들에게 일임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지금의 강성한 신마가가 있는 것은 삼대낭랑의 강철 같은 내조와 그 딸들의 활약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그녀들을 떼어놓고 앞서 달려가 따돌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당장 수상한 놈들로 찍힐 게 분명했다.

‘그리고 금방 따라잡히겠지.’

자신은 모르겠지만, 나머지 사람들의 경공 실력으로는 삼대낭랑은커녕 팔선자조차 따돌릴 수 없었다. 경신법에 조예가 낮은 염도도 의지가 안 되긴 마찬가지였다. “느려 터져서는!’

그러므로 절대로 그들이 나백천을 구출하러 가는 구출대라는 것을 들켜서는 안 되었다. 만일 들킨다 해도 그녀들과의 싸움은 극력 피해야 했다. 그녀들이 강하기 도 했지만, 그녀들 중 한 명이 싸우는 와중에 실수로라도 상처를 입었다가는 일이 더욱더 최악으로 꼬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빙검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제발 내 위가 그때까지 버텨주기를.’

지금은 그저 그렇게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의 고민 많은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런 초긴장 상태인 와중에도 대체 뭔 일이라도 있느냐는 듯 태평한 것은 비류연, 그리고 표물 위에 드러누운 채 쿨 쿨 계속 잠만 자는 무명 정도뿐이었다.

“저 사람은 무슨 일이 벌어져도 잘만 자는군.”

표물이 실린 수레 위를 힐끔 바라본 빙검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게, 잠귀신이라도 들린 모양이지.”

염도도 그와 비슷한 생각이라는 게 어쩐지 기분이 나빴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무명은 형산십이검의 우두머리가 나타났을 때도, 색마황 초운락이 구천현녀에게 당할 때도 깨어나지 않고 계속해서 잠만 잤다. 자신이 알 바 아니라는 듯.

‘시시한 싸움엔 아무런 관심도 없다 이건가? 아님 그냥 둔한 건가? 아니면 잠 못 자면 죽는 병이라도 걸린 건가?”

무명은 색마들이 불에 타든, 바람에 찢어지든, 물에 관통을 당하든 전혀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그저 계속해서 잤다.

‘그래, 차라리 자는 게 도와주는 거라고 생각하기로 하자.’

빙검은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깨어나서 나돌아다니면 오히려 민폐가 될 수도 있지. 무슨 말을 할지 알 수가 없으니까.’

신마팔선자와 무명은 되도록이면 안 만나도록 하는 게 좋았다.

다행히 빙검의 바람대로 무명의 잠은 흑천맹이 자리한 무창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드디어 도착했군.”

그들 표행은 마침내 흑천맹의 정문에 도착하게 된 것이다, 물론 신마가의 여인들과 함께.

불행 중 다행으로 그들의 정체가 들키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는 도착을 빌미 삼아 그녀들과 정당하게 헤어질 수 있게 되었으니, 빙검과 염도는 속으로 쾌 재를 불렀다.

평소 일희일비하지 않는 빙검이었지만, 이 순간만은 기뻐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이 동행이 반나절만 더 계속되었어도 그들은 위에 구멍이 뚫리고 말았을 터였 다.

“그럼 갈까요?”

철심장 장이하가 표행을 인솔해서 움직이려고 할 때, 갑자기 그들의 발길을 잡는 아름다운 목소리가 있었다.

“잠깐, 자네들 어디로 가는 겐가?”

그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신마가의 삼대낭랑 중 둘째 부인, 주단(朱緞)처럼 붉은빛이 흐르는 머리칼에 화려한 미모를 자랑하는 홍 련선자 단혜였다.

“그야 물론 도시 안으로 들어가려고 그럽니다.”

장이하가 벌렁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공손히 대답했다.

“응? 남문은 저쪽에 있지 않은가?”

단혜는 화룡을 뿜어냈던 바로 그 손가락을 들어 왼쪽 저편을 가리켰다.

“하하하, 저희는 지금부터 동문으로 가려고 합니다.”

대답하는 철심장 장이하의 심장이 미칠 듯이 팔딱거렸다. 그의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저절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기선 동문보다 남문이 더 가깝네. 그리고 이런 시기에 외부인들의 출입이 가능한 곳은 남문밖에 없을 텐데?”

그런데 왜 굳이 동문을 택하는 것이냐고 그녀는 묻고 있는 것이었다.

“하하하, 그, 그렇군요.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뒤통수를 긁적이며 철심장 장이하가 대답했다.

물론 그도 그런 당연한 사실들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척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일이니까. 하지만……!

“안면 튼 문지기들은 다 동문 쪽에 있는 걸 나더러 어쩌라고…….’

장이하는 속으로 울고 싶었다.

남문 쪽에는 돈을 찔러둔 문지기가 거의 없었다. 그의 사람이라고 할 만한, 그들의 표행에 ‘특별하게 호의를 가진 이가 남문에는 거의 없었다. 특히 이런 면면들을 가지고 보통 때보다 경비가 세 배 이상 삼엄해진 남문으로 들어가는 것보다는, 오히려 ‘낯선 외인들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을 동문으로 가서 특별한 호의를 받아 통 과하는 편이 훨씬 더 현명했다.

“평소에 동문으로 자주 다니다 보니 버릇이 들었나봅니다, 하하하.”

그는 노련한 강호인답게 어떻게든 이 자리를 빠져나가 보려고 했다. 겨우 성씨가 국주랑 같은 장 씨라서 그가 지국주를 맡고 있는 게 아니었다. 실력이 뒷받침되기 때문에 그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기왕 여기까지 온 것, 같이 들어가는 게 어떻겠나?”

머뭇거리지 말고 빨리 가지… 라는 말은 빠져 있었지만 이해하는 데 부족함은 없었다.

“하하하, 갈 길이 급하신데 저희 같은 것들에게까지 굳이 신경 써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하하, 나, 남문으로요?’ 같은 수상쩍은 발언은 물론 하지 않았지만, 이어 옆에서 태연한 목소리로 끼어드는 갈효혜의 말에 장이하는 심장이 ‘쿵!’ 하고 땅에 떨 어지는 줄 알았다.

“혹시 남문으로 가면 안 되는 사정이라도 있나요?”

벌렁벌렁벌렁. 팔딱팔딱팔딱

건강에 치명적인 게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로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 일이 무사히 끝나면 철심장이란 별호를 바꿔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철심장이 아니라 솜심장으로 말이다.

“그건…….”

느닷없이 정곡을 찔리자 순간적으로 대처가 한발 늦었다. 그의 얼굴을 향한 스물두 개의 아름다운 눈동자들에는 차차 의아함이 어리고, 그의 얼굴은 점점 당황감 이 흙빛이 된 안색으로 드러나려 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쿵!

뭔가가 진짜로 떨어지는 소리가 여인들의 등 뒤에서 들렸다.

삼대낭랑와 팔선자의 시선이 곧바로 뒤를 향했다.

“에구구구, 자다가 굴러떨어져 버렸네.”

표물을 실은 수레 위에서 바닥에 떨어진 사람이 허리를 툭툭 치며 일어났다.

“설마 무명. 그가 깨어난 건가?”

만일 그라면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수 있었다. 삼대낭랑과 팔선자의 시선 역시 수레에서 떨어진 사람에게로 쏠려 있었으니까.

만일 팔선자가 마천각에서 기백 년 동안 교관 노릇을 했다는 무명을 알아본다면?

그 무명이 이 표행에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그리고 무명의 입에서는 무슨 말이 튀어나올까?

순간적으로 수만 가지 상념이 빙검의 머릿속을 헤집고 지나갔다. 그리고 뒤를 돌아본 빙검과 염도는 조용히 가슴을 쓸어내렸다.

“대체 언제 저 위에??

땅바닥에서 일어나며 먼지 묻은 옷을 툭툭 털며 엄살을 떠는 이는 다름 아닌 비류연이었다. 수레 위에서 자고 있던 건 무명 한 사람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가 떨 어진 수레는 무명이 타고 있던 수레보다 앞쪽에 있던 수레였다.

노련한 경험이 있는 철심장 장이하는 즉각 비류연의 의도를 이해했다.

“자네, 또 몰래 낮잠 잔 건가? 자꾸 그러면 내가 삯을 깎겠다고 경고했었지?!”

짐짓 화난 척 장이하가 호통을 쳤다. 비류연이 싱글싱글 웃으며 대꾸했다.

“아이고, 월급만은 좀 봐주세요. 저도 먹고살아야죠. 표행하다 보면 피곤해지는 건 일상다반사 아니겠습니까? 자, 어서 ‘남문으로 들어가죠.”

장이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겉으로는 혀를 찼다.

“에잉, 자네랑 입씨름 한 내가 잘못이지. 자, 그럼 저희들이 앞장서겠습니다. 가시지요.”

물끄러미 상황을 주시하던 구천현녀는, 표행 중에 표물 위에서 잠을 잔 젊은 표사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잘 연마한 한 자루의 명검과도 같은 그녀의 시선을 받고 도 비류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장래가 기대되는 아이로구나. 아이야, 너도 이곳의 표사냐?”

그러자 비류연은 웃으며 대답했다.

“이곳은 저에게 무척 소중한 밥줄이죠.”

대답은 애매했지만, 그 대답에는 한 점의 거짓도 없었다. 오히려 어딘가 반짝반짝 빛이 나는 듯했다. 그런 비류연을 바라보는 구천현녀의 입가에 인자하지만 어딘 지 쓸쓸한 미소가 맺혔다.

“참으로 재미있는 아이구나.”

“제가 그런 말을 좀 많이 듣는 편이랍니다.”

얼굴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비류연이 그렇게 말했다.

“나에게도 앞으로가 기대되는 아들이 있었고…… 손자도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슬픔이 번져 나가자 장이하를 비롯한 표사들은 갑자기 뻗어 나오는 묵직한 압력에 호흡이 가빠졌다. 다행히 옆에 있던 셋째 부인, 사란이 혼잣말처 럼 하는 말에 구천현녀가 귀를 기울인 탓에 묵직한 압력은 금세 사라졌다.

“표행 중에 드러누워 자는 표사가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이라……. 참으로 태평한 표국이로군요. 실력이 있어서 그런 건지, 없어서 그런 건지.”

이번 동행 동안 무명이 깨어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잠을 잘 때는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기척이 약했다.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라도 하는 것처럼, 마 치 무(無)와 같은 엷은 기척만 남기에 어지간히 예리한 감각이 아니면 그 존재조차 포착할 수 없었다. 장소옥은 이에 대해 한숨을 푹 내쉬며 일행에게 이렇게 말했 었다.

“원래 저게 평상시 상태예요. 숨어서 주무시면 수색반이라도 가동해야 할 걸요.”

하지만 그녀들, 삼대낭랑은 여전히 높다란 표물 위에서 잠을 자고 있는 무명의 존재를 애당초 눈치채고 있었던 모양이다.

“물론 실력이죠. 나중에라도 표물을 맡길 곳이 있으면, 신속, 안전을 자랑하는 신용과 실력이 넘치는 저희 중양표국을 이용해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비류연은 중양표국의 선전까지 잊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은 연기라기보다 상당 부분 진심이 들어가 있었다. 왜냐하면 중양표국이 잘될수록 그에 게 돌아오는 이익도 커지기 때문이었다.

“생각해 보겠네. 이 정도 면면을 지닌 이들을 표사로 둔 곳이라면 공동 출자도 생각해 볼 만하지. 갑시다!”

단혜의 말을 끝으로 삼대낭랑이 남문을 향해 걷기 시작하자, 신마팔선자들도 그 뒤를 쫓았다.

‘제발 아무 일도 없길.’

속으로 그렇게 빌며 철심장 장이하는 표행의 출발을 지시했다.

남문까지는 눈 깜짝할 사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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