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8권 15화 – 남대문을 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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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28권 15화 – 남대문을 열어라

남대문을 열어라

-남문을 지키는 자

강호에는 이런 금언이 있다.

흑천맹이 있는 무한의 수문장들은 절대로 깔보지 말라는.

왜냐하면 비록 그들의 신분이 병졸이라 해도, 어떤 실력을 숨기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생각해 보라.

백 년간 흑천맹은 이곳에 뿌리를 내려오며 이곳 군부 깊숙이 침투해 왔다.

흑천맹에서 무공을 익힌 자들이 군문(軍門)에 발탁되는 데는 얼마나 유리하겠는가!

흑천맹의 입김이 이곳 성의 요직들을 꿰차고, 깊숙한 곳까지 입김이 미치게 된 데에는 그다지 많은 세월이 필요치 않았다.

대부분이 하수라 해도 개중엔 간간이 정체를 숨긴 고수들이 숨어 있었고, 그들은 합법적으로 이곳 성내의 출입과 방어를 총괄하고 있었다.

이 성안의 모든 군사력은 흑천맹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진짜로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특히나 이처럼 비상경계 시에는. 그리고 병졸이라 해서 안심해서도 절대로 안 되는 것이다.

그 사실을 구출대는 너무 간과했다. 그들이 주의를 기울이던 ‘눈썰미의 강목’이 잠시 남문을 비웠다는 사실에 너무 안도했던 것이다.

“중양표국 호북 지국이라고?”

남문 수문장 남희성의 목소리에는 어딘지 모를 불쾌감이 감돌고 있었다.

“예, 그렇습니다, 남 수문장님!”

장이하가 만면에 활짝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중양표국 호북 지국이라니…… 그런 곳은 처음 듣는 것 같군.”

짐짓 딴청을 피우며 수문장 남희성이 말했다.

“그, 그럴 리가요? 잘못 아신 걸 겁니다.”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장이하가 항변했다.

“자네는 중양표국이란 표국 들어봤나?”

“글쎄요? 처음 듣는데요, 수문장님?”

질문을 받은 병졸 역시 짐짓 시치미를 떼며 대답했다.

“저희 중양표국의 표행이 얼마나 많이 이 무창을 들락거렸는데 그러십니까? 하하.”

장이하는 당황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런가? 그런데 내가 지키는 남문에는 중양표국의 깃발 끄트머리도 안 보였다니 참으로 이상한 일 아닌가? 그러니 내가 그 존재를 의심할 수밖에! 여긴 동쪽이 아니라 남쪽이라서 말이야.”

장이하는 속으로 ‘그럼 그렇지!’ 하고 욕설을 내뱉었다.

‘젠장, 이래서 내가 남문으로 오기 싫었는데. 모르긴 뭘 몰라! 알면서 모른 척하는 거지!’

알면서도 처음 보는 표국의 표행처럼 시치미를 떼는 이유는 뻔했다. 그동안 중양표국 호북 지국이 동문의 수문장에게만 선물을 안겨주는 것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역시 비상시를 대비해서 이쪽 성문도 뚫어놓을 걸 그랬나?”

아직 호북 지국이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런 작업이 더디게 진행되고 있었다.

“하하하, 걱정 마십시오. 저희 중양표국은 요즘 한창 성장하고 있는 신흥 표국 아니겠습니까? 남수문장님 같은 분의 관심이 없었다면 그리될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저희 표국에 도움을 주시는 분들을 찾아뵈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미심쩍어하는 남희성의 반문에 장이하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고말고요! 십이 할 정말입니다!”

그러더니 남희성의 귀에다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지금은 보는 눈이 많으니 힘들지만, 나중에 제가 따로 자리를 마련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에 수문장 남희성의 얼굴이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펴졌다.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이군.”

“그럼 앞으로 종종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남 수문장님. 저, 그럼 이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음, 그러게. 지금 성안이 어수선해서 검문이 매우 삼엄해졌다네. 하지만 내 특별히 중양표국의 이름과 장 지국주의 얼굴을 봐서 통과시켜 주는 것일세. 알겠나?”

장이하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암, 여부가 있겠습니다. 이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꼭 명심하게. 동문보다는 남문이 좋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주지시키듯 남희성이 말했다. 앞으로는 동문이 아니라 남문으로 자주 다니라는 이야기였다.

그것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구천현녀가 옆에 시립해 있던 첫째 딸 효인을 향해 한마디 툭 내뱉었다.

“남쪽 문은 사람을 바꿔야겠구나.”

효인은 즉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맹에 들어가는 즉시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어머님.”

“그러려무나. 다음번엔 저런 광경을 다시 보고 싶지 않구나. 어찌 도둑놈에게 대문의 열쇠를 맡길 수 있겠느냐?”

“지당하십니다, 어머님. 즉각 갈아치우도록 하겠습니다.”

멀리서 지켜보는 여인들에 의해 자신의 운명이 결정된 줄도 모른 채 남희성은 희희낙락하며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성문을 열어라!”

굳게 닫혀 있던 남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흑천맹의 앞마당으로 들어가는구나!’

조마조마하던 남궁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저 열린 문을 통과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걸로 드디어 저 여자들이랑 떨어질 수 있겠지??

빙검과 염도의 머릿속에는 오직 그 생각밖에 없었다.

“아버님, 드디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곧 구해 드리러 가겠습니다.”

나예린은 속으로 조용히 다짐했다. 그런 나예린을 바라보며 비류연은 생각했다.

“드디어 호랑이 굴로 들어가는 건가?”

활짝 열린 남문이 호랑이 굴로 들어가는 동혈(同穴)처럼 보였다. 다들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있을 바로 그때, 우렁찬 목소리 하나가 울려 퍼졌다.

“잠깐!”

막 출발 신호를 보내려던 장이하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모두의 시선이 외침이 터져 나온 곳을 향했다. 그곳에 있는 것은 이곳 남문을 지키는 수문장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한 것은 허름한 군복을 입은 일개 늙은 병졸이었다. 원래 검었을 군복은 얼마나 오래 입었는지 여기저기가 헤져 있었고, 머리는 부 스스해서 봉두난발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방금 자고 일어났는지 눈이 게슴츠레해서, 어딘지 술주정뱅이처럼 보이기도 했다. 저렇게 나이가 들었는데도 아직까지 겨우 병졸 신분이라는 게 믿기지 않 을 정도였다. 그나마 눈에 띄는 점이라면 양쪽 허리춤에 매달려 유달리 검게 반짝이는 한 쌍의 검은 포승줄 정도였다.

아, 잘못 들었군.

그래, 당연히 잘못 들었겠지.

장이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일개 병졸이 우리 중양표국의 표행길을 ‘잠깐!’이라는 말로 멈춰 세울 리가 없잖아?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겨우 병졸인 주제에. 그리고 저렇게 나이가 들어서 도 아직 병졸이라니. 쯧쯧쯧, 얼마나 무능했으면.

지국주는 이성적으로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는 다시 원래대로 고개를 돌린 후 손을 들어 표행에게 출발 명령을 내리려 했다.

“잠깐!! 멈추라 했다!”

다시 똑같은 일갈이 들려왔다.

장이하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소리가 나는 방향에는 그 늙은 병졸이 서 있었다. 그는 물론 구출대 역시 황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감히 일개 병졸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단 말인가? 대체 무슨 배짱으로?

“무슨 볼일이라도 있소?”

반말을 쓰지 않은 것만으로도 장이하는 굉장한 자제심을 발휘한 것이었다. 그러자 늙은 병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볼일? 암, 있고말고. 당신들, 쓰고 있는 삿갓들을 벗어줘야겠다. 그리고 표물도 까고.”

뜬금없이 튀어나온 반말투에 모두들 기가 막혀 숨을 삼켰다.

“일개 병졸로 보이는데 말이 너무 짧구려?”

장이하가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진정시키며 날카롭게 말했다.

혹시 작정하고 남문 전체가 짜고 작당을 부리고 있는 것일 가능성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신중하게 더 높은 이를 상대하기로 했다.

“당신이 무슨 권한으로 우릴 막는단 말이오? 이곳의 책임자는 이분 남수문장님인 것 같소만 당신은 나이는 들었으나, 일개 병졸이 아니오? 안 그렇습니까, 수문 “장님?”

그리고는 저런 병졸의 독단적인 돌출 행동을 왜 용납하는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으로 장이하는 수문장 남희성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뭔가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수문장…… 님?”

남수문장의 안색은 분노로 인해 빨갛게 달아오른 게 아니라, 머쓱하고 퍼렇게 질려 있었던 것이다.

“겨우 일개 늙은 병졸한테 수문장씩이나 되는 자가 벌벌 떨어??

뭔가 사태가 심상치 않았다.

이럴 때는 빨리 자리를 뜨는 게 상책이었다.

“그럼 우린 이만. 얘들아, 가자!”

이미 문은 열려 있겠다, 장이하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지시를 내렸다. 즉시 표행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촤라라라락!

그때, 공기를 가르는 매서운 소리가 울리며 대문을 향해 무언가가 날아가더니 열려진 대문의 양쪽을 교묘하게 후려쳤다.

쾅! 쾅! 끼이이이익!

두 번의 굉음이 연속적으로 울려 퍼지더니, 쇠가 긁히는 소리가 나며 열렸던 문이 빠른 속도로 닫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허공을 휘저으며 원래의 주인에게로 재빠르게 돌아갔다. 늙은 병졸이 다시 받아 든 것은 검은 밧줄의 뭉치였다.

“어딜 감히 마음대로 지나가려 하느냐!”

그 늙은 병졸이 입가에 씨익 하고 냉소를 치더니 회수했던 검은 밧줄을 잡고는 다시 휘둘러 던졌다.

휘리리리리릭!

그러자 허리춤에 걸려 있던 검은 밧줄이 놀랍게도 주욱 늘어나더니 살아 있는 생물처럼 정문을 향해 날아갔다.

“내 허락 없이는 이 남문을 통과할 수 없다!”

살아 있는 뱀처럼 영활하게 허공을 미끄러진 밧줄이 대문 양쪽에 주르륵 박혀 있는 고리들을 갈지자로 왔다 갔다 칭칭 감았다. 정문에는 금세 검은 밧줄로 된 굵고 거대한 그물이 형성되었다. 게다가 척 보기에도 윤기 나는 이 검은 밧줄은, 도검으로도 쉽게 상할 것 같지 않은 강호의 기물(奇物)인 듯했다. 이런 기물을 지닌 이가 평범한 병졸일 리가 없었다.

“……!”

그리고 그 순간 철심장 장이하의 머릿속에 잠시 잊고 있었던 괴담이 되살아났다.

흑천맹이 자리하는 무창에서 근무하는 병졸 중에서도 가장 최악의 병졸로, 악명 높은 검은 밧줄을 살아 있는 생물처럼 자유자재로 다루는 한 사람의 이야기가 떠 올랐다. 그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허공을 칠팔장이나 단숨에 날아와 앞을 막아선 늙은 병졸의 산발된 이마를 뚫어지게 쳐다본 장이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런 개[犬] 같은 일이!’

장이하는 속으로 욕을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산발된 채 아무렇게나 묶여 있는 그의 이마에 새겨진 글자는 다름 아닌 ‘개 견(犬)’자였던 것이다.

자신의 이마에 ‘나는 개로소이다!’라고 적어놓는 사람이 있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그러나 장이하는 그런 그를 비웃지 못했다. 대신 그는 울고 싶어졌다.

“시, 실례지만 대협의 존성대명을 가르쳐 주실 수 있겠습니까?”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정중하게 포권을 하고는 장이하가 물었다. 겹쳐진 손이 떨리지 않게 하는 것만으로도 그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었다.

“크크크, 이런 노폐물한테 거창하게 존성대명은 무슨. 그냥 사람들은 늙은 병졸이라 해서 노졸(老卒)이라 부르는 모양이야.”

그 순간 지국주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고 주작단의 일행 중 그 이름을 알아들은 자들이 몸을 잔뜩 긴장시켰다.

그리고 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최강노졸 흑(黑犬)!” 노졸 흑견(黑犬).

그 가공할 무공을 가지고도 어찌 된 일인지 몇십 년째 군문의 졸병 생활만 줄창 하고 있다는 최강의 병졸.

그리고는 그에게는 또 하나 따라다니는 칭호가 있었다.

중인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흑천십비(黑十碑)!”

그렇다! 그는 검마(劍魔) 초월과 같은 흑천맹 십대고수 중 한 명인 흑천십비의 일인이었던 것이다. 결코 좌시할 수 없고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병졸이면서도 이곳 성내의 군사들을 움직여 그들을 핍박할 만큼의 힘이 있었다. 남문의 일개 수문장인 남희성이 그 앞에서 벌벌 떠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크크크, 이제 생각이 바뀌었나? 이 늙은 병졸을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군.”

장이하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더 버텼다가는 중양표국 호북 지국은 더 이상 무창성에 발을 들이지 못할 수도 있었다.

“이봐, 이제 어떡하지, 얼음땡이? 강행 돌파할까?”

“좀 더 참아보게! 여기서 정체를 드러내면 지금까지의 노력을 모두 물거품으로 만든다는 걸 알면서 그러나?”

아직 신마가의 여인들이 그들의 뒤에 버티고 서 있었다.

“그럼 어쩔 텐가? 어차피 벗으면 다 드러날 텐데? 다른 뾰족한 수라도 있나?”

“없네.”

빙검의 대답은 간결했지만 염도의 복장을 뒤집어놓기엔 충분한 것이었다.

“…허참! 이럴 때까지 얼음 칼처럼 딱 잘라 말하지 말라고.”

초립을 벗으면 그들의 수상쩍은 면모가 만천하에 공개되고 만다. 이렇게 특이한 표사들이 있을 리가 없었다. 더는 변명할 여지도 없다. ‘젠장…….’

염도와 빙검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바로 그때였다.

“자네는 언제까지 내 앞길을 막고 있을 텐가?”

뒤에서 표행의 검문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구천현녀가 태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기세등등하던 흑견의 몸이 꽁꽁 얼어붙었다. 그는 뻣뻣하게 굳어버린 목을 간신히 틀어 그녀들을 향했다.

선두에 서 있는 검은 옷의 미부인을 본 흑견의 눈이 격동으로 뒤흔들렸다. 그다음 보인 그의 행동에 사람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바람처럼 그녀 앞으로 달려간 그가 땅바닥에 몸을 던지듯 오체투지하며 큰절을 올렸던 것이다.

“비천한 노졸이 큰마님을 뵙습니다!”

흑견의 입에서 감개무량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그래, 날세. 그간 잘 있었나?”

흑견은 잠시 목이 메는 듯하더니 금세 입을 열었다.

“네, 물론입니다. 큰마님께서는 여전히 아름다우십니다. 이 노졸 감복, 또 감복했습니다.”

머리를 연신 조아리며 노졸이 외쳤다.

“저 인간, 갑자기 왜 저러나?”

뜻밖의 사태를 접한 장홍이 비류연에게 전음을 보내 물었다.

“글쎄, 아무리 봐도 감동에 몸을 떠는 것 같은데요? 저 큰마님의 추종자인가 보네요.”

“저렇게 늙어서 말인가?”

“쯧쯧,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 뿐이죠. 저 초롱초롱 빛나는 눈과 흥분에 들뜬 두 뺨을 봐요. 아마, 지금쯤 ‘큰마님’ 머리 뒤에 비치고 있는 후광을 보고 있을걸요?” 장홍을 비롯한 일행들이 얼어붙어 있는 동안, 구천현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입 발린 말이라도 고맙네.”

흑천십비 중 한 사람을 무슨 귀여운 동네 꼬마 내지는 꼬리 치는 강아지쯤으로 보는 듯했다. 그런데도 노졸은 싫기는커녕 오히려 좋기만 한 모양이었다.

“입 발린 말이라굽쇼?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입니다. 큰마님께서는 정말로 여전히 아름다우십니다! 만일 제 말이 거짓이라면 제 혀를 뽑아서 열두 토막을 치셔도 상관없습니다. 감히 큰마님의 아름다움을 모욕하는 자가 있다면 제가 당장 그놈의 혀를 뽑고 머리통을 깨부숴 놓겠습니다.”

그리고는 그런 불민한 생각을 품고 있는 이가 누구인지 색출해 내서 본보기를 보여주겠다는 듯,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위를 훑었다.

“저 날선 시선 속에 번뜩이는 광기, 봤나?”

“저거… 진심이네요.”

“중증이야! 중증!”

그것은 의심할 여지조차 없는 명명백백한 사실이었다. 그는 정말로 자신의 말대로 행할 작정인 것이다. 그는 과거 이 큰마님의 대단한 추종자였던 게 분명했다(그 리고, 현재도).

“사람이 호들갑은. 자넨 여전하군.”

“물론입니다. 전 큰마님의 영원한 종입니다.”

흑천십비의 한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는 그런 광경이었다. 그리고 흑견이 그러면 그럴수록 구천현녀의 무서움이 더욱더 뼈에 사무쳐 왔다.

“기다리기도 지루한데 이만 슬슬 보내주는 게 어떻겠나? 저 친구들은 우리들과 한동안 동행했던 사이네.”

구천현녀가 타이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흑견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이, 이런! 큰마님께서 아시는 분들이셨습니까? 노졸이 큰 실수를 범할 뻔했군요. 아무래도 표행 중에 여인들이 섞여 있는 것 같아…….”

좀 전의 기세등등했던 모습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아, 그거라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되네. 실력만 있다면 여표사도 고용하겠다는군. 새로운 시도란 건 언제든 저항을 받게 마련이지. 언제가 저 초립을 벗고 여인들이 표행계에서 활약하는 걸 지켜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 될 것 같네만.”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어찌 그가 감히 안 된다고 할 수 있겠는가.

“큰마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노졸이 어찌 감히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허리를 펴고 일어나 흑견이 오른손을 몇 번 휘두르자, 대문 양쪽에 휘감겨 있던 검은 밧줄이 순식간에 풀리며 그의 손으로 회수되었다.

“자네의 밧줄 다루는 솜씨는 여전하군.”

“이 노졸이 그만 잡기로 큰마님의 눈을 어지럽혀 드렸군요.”

흑견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부끄러운 듯 말하며, 한 발 옆으로 비켜섰다.

“들어가시지요.”

구천현녀는 고개를 한번 끄덕여 보이고는, 딸들과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따라 중양표국의 표행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을 바라보는 흑견의 시선은 의 문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듯 여전히 날카로웠지만, 그들을 제지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남문을 완전히 통과한 다음에야 구출대 일행은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삼대낭랑과 신마팔선자가 옆에 있었기 때문에 안심하기는 일렀다.

“자네들은 어디에 머무를 예정들인가?”

“네, 용산객잔에 머무를 생각입니다, 큰마님.”

장이하가 공손하게 공수하며 말했다.

“그런가? 그럼 본녀는 가야 할 곳이 있어서 먼저 가겠네.”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진한 슬픔이 떠올랐다.

“네, 살펴 가십시오, 큰마님.”

구천현녀 무화는 동생 둘과 팔선자를 이끌고 흑천맹 쪽으로 향했다. 그녀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장이하와 빙검, 염도는 길게 장읍을 했다. 그녀들의 그림자마저 시야에서 사라지자, 염도와 빙검은 겨우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휴우, 살았다. 젠장, 들키는 줄 알고 얼마나 조마조마했던지.”

“설마 그런 곳에서 만날 줄 누가 알았겠나?”

“못 알아봤겠지?”

“알아봤으면 그냥 안 있었겠지, 그분 성격에.”

“그래, 다행이야. 네 녀석의 파란 머리가 눈에 띌까 봐 안절부절못했더니만.”

염도가 십년감수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의 주책없이 뻘거스름한 머리가 더 문제였지. 그러게 염색하라고 권고하지 않았나?”

“내 머리카락은 사부님도 칭찬하신 내 자랑이야. 자네의 퍼런 머리카락이나 좀 시커멓게 칠하지 그랬나? 아니면 아예 하얗게 탈색하든지?”

“그런 짓 했다가는 그녀에게 야단맞아서 안 돼.”

그 말에 염도의 몸이 흠칫 굳었다. 방금 말한 ‘그녀’가 누군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

“……”

빙검도 더 이상 뭐라고 말하지 않았다.

갑자기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일행의 어른 격인 두 사람이 저렇게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누구도 함부로 나서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때 누가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외쳤다. 

“나 배고파요.”

밥을 보채는 그 목소리에, 침묵하고 있던 염도와 빙검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누가 감히 이런 무모한 짓을??

다들 경악하고 있는데 일을 저지른 본인만은 태평했다. 보통 이럴 때 무모한 짓을 하는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손을 번쩍 들어 올리고 말한 사람은 다름 아닌 비류 연이었던 것이다.

“이제 그만 가죠?”

염도와 빙검의 시선을 태연히 받으며 말하는 비류연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가세.”

먼저 입을 연 것은 빙검이었다.

“가자구.”

염도가 입을 삐죽 내밀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염도와 빙검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자, 표행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쨌든 숨 막히던 동행 길은 이걸로 끝난 것이다.

두 사람은 그걸 위로로 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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