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8권 2화 – 강호란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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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28권 2화 – 강호란도로

강호란도로

-모녀 상봉

쏴아아아아아!

비가 떨어져 내렸다. 하늘은 파랗게 맑은데도 비가 내렸다.

무시무시한 용권풍과 함께 한 마리의 수룡이 승천한 후 생긴 일이었다.

용오름이 끝나고 거세졌던 파도가 잠잠해지자, 근처에 있던 어부들은 서로가 수룡이 승천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수군거리며 그쪽 방향을 향해 넙죽넙죽 큰절을 올 렸다. 용신의 분노를 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이 한 인간이 만들어낸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이는 이들 중에 아무도 없었다.

배 위에서 오체투지한 채 절을 올리던 어부들은, 한정된 장소에서 떨어지는 빗속을 뚫고 한 척의 배가 호면(湖面) 위로 미끄러져 나오는 것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 레졌다. 그 배의 고물에 이리저리 부딪치며 흩어지고 있는 것은 틀림없이 조금 전 승천한 용에게 잡아먹힌 침몰한 배들의 잔해들이었다.

아무리 솜씨 좋은 뱃사공이라도 좀 전과 같은 회오리바람에 휩쓸리면 답이 없다. 그저 자연의 거대함을 온몸으로 만끽하며 산산조각 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때 문에 그들의 경악은 더욱더 컸다. 어떻게 천재(天災)가 휩쓸고 지나간 바로 그 장소에서 멀쩡한 배가 미끄러져 나올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듯했다. ‘설마 유령선?”

동정호의 내로라하는 어부들이 그저 입을 쩍 벌린 채 그 배가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볼을 힘차게 꼬집으며

유령선이라고 의심받는 그 배 위에 탄 이들은 유령들이 아니었다. 이들은 바로, 방금 전 나예린을 구출하고 마천각을 탈출한 비류연 일행이었다.

당문혜를 잃은 충격 때문에 배를 타고 있는 사람들의 분위기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절대로 잃을 것 같지 않던 동료를 잃어버린 것이다. 언제나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던 그들 중 하나가 사라진 것이다, 영원히.

너무나 의외의 사태였기에, 모두들 분노나 슬픔을 표하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서 있었다.

만일 대사형 비류연이 그자, ‘서천’과 마천 일번대의 공세를 단신으로 막아주지 않았다면, 그들은 모두 자죽도에서 명을 달리했을 것이다.

그중에서 특히 남궁상의 상심은 매우 컸다. 그는 스스로에게 자괴감과 죄책감을 품은 채 쪼그리고 앉아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너무 상심하지 말아요, 상!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보다 못한 진령이 남궁상의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위로했다.

“아니오, 내 잘못이오.”

남궁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임시라고는 하나 사절단의 대장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였소. 또한 주작단의 단장 또한 나고. 일단 자리를 맡은 이상 나에게는 그들을 잘 이끌 의무가 있었소.” 하지만 결과는 보다시피 참담했다.

“당신은 충분히 잘 싸웠어요. 그러니 너무 자신을 자책하지 말아요. 더 이상 자신에게 채찍질하지 말아요.”

옆에서 보고 있는 그녀의 마음이 더 아팠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궁상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무조건 앞장서서 싸우는 게 대장의 역할이 아니오. 대장은 싸울 때와 싸우지 말아야 할 때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하오. 그런데 난…… 나는 무모하게 돌진하는 당 삼, 그 친구를 막지 못했소. 그래서 결국은……..

남궁상은 그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너무나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동료들을 통솔하는 데 실패한 것은 변명의 여지 없는 나의 책임이오.”

남궁상의 얼굴에 다시 우울함이 번져 가기 시작했다. 진령은 그런 그를 보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당삼은…… 어떻소?”

남궁상의 질문에 진령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며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수혈을 짚어놓았기 때문에 아직 깨어나지 않았어요. 마음의 충격이 너무 심해 정신을 놓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어서요.”

“잘했소. 아마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태일 거요. 차라리 의식이 없는 쪽이 더 낫소.”

당삼과 같은 쌍둥이인 남궁상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쌍둥이 중 한쪽을 잃는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자신 역시 남궁산산이 크게 다쳐 중상을 입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비슷한 감각을 느낀 적이 있었다. 물론 당삼이 느낀 감각에 비한다면 수십 배 이상 약한 강도 (强度)이겠지만, 그것은 분명 신체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듯한, 가슴 밑바닥이 서늘해지는 그런 감각이었다.

“언제쯤 깨울까요?”

“당분간 이대로 재워둡시다.”

모두들 자죽도를 탈출하느라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있었다. 마음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이 상태에서 당삼이 울고불고 날뛰며 당문혜의 일을 상기시킨다면, 모두들 그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말 게 분명했다.

“그건 좋지 않아. 정신적으로 더욱더 타격을 입고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질 뿐이야.’

아직 그들은 동정호 위에 떠 있었다. 바람을 받으며 배가 앞으로 나가고 있지만, 여기는 여전히 적의 세력권 한가운데였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그 런 곳이었다. 당장 마음을 추슬러도 모자랄 판에 더욱 약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그들은 아직 동료의, 친구의 죽음에 조의(弔意)를 표할 여유조차 없었다.

이곳을 빠져나가 강호란도에 도착해 염도, 빙검 노사님과 아미신녀 진 여협, 점창제일검 유은성과 만나기 전까지는 결코 방심할 수 없었다.

이미 하나를 잃었다. 또 하나는 오른팔을 영원히 잃고 말았다. 어디 그뿐인가. 그의 여동생은 부상으로 인해 혼수상태였고, 오랜 친구는 그 동생을 구하기 위해 극 독을 삼켜 지금 중독상태였다. 여기서 더 이상 주작단을 피로 적시는 참사가 생기게 할 수는 없었다.

‘절대로!’

이 지독한 상실감과 슬픔을 또다시 느끼고 싶지는 않았다.

‘대사형이 깨어난다면 대체 뭐라고 말할까?”

차라리 한 대 얻어맞으면 이 울혈처럼 응어리진 기분이 조금 풀릴 것 같았다.

그러나 대사형은 여전히 나예린의 무릎베개에 누운 채 일어날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

누워 있는 대사형과 그런 그에게 무릎베개를 해주고 있는 나예린.

천하의 빙백봉 나예린이 그런 걸 해준다고 말하면 믿을 사람이 이 강호상에 과연 몇 명이나 될까? 하지만 나예린의 표정은 조용하기만 했다.

어쩐지 익숙했다.

***

‘어느새…….”

겨우 두 번밖에 안 했는데도 어쩐지 익숙하다는 사실이 그녀는 무척 놀라웠다.

잠이 든 남자에게 자신의 무릎을 베개 삼아 빌려주다니, 예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다른 사람과는 옷자락이 스치는 것조차 질색을 했던 그녀가 아닌 가?

하지만 지금, 그녀는 자신의 무릎을 베고 잠든 남자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심지어, 살살 쓸어 넘겨보기까지 한다.

그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고 있었다. 피곤하긴 정말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다.

누워 있는데도 여전히 앞머리가 눈 위를 덮고 있다.

그 앞머리의 뒤를 본 사람은 많지 않다.

“지금 손으로 이 머리카락을 치워도 류연은 아무런 반항도 못하겠지??

손가락으로 비류연의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나예린이 생각했다.

이 손을 조금만 좌우로 몇 번 움직이면 끝날 일이었다. 그럼 비류연의 얼굴도 만천하에 공개될 것이다.

‘살짝만??

그런 짓궂은 생각이 설핏 들었지만, 나예린은 그저 미소만 짓고 말았다. 그것은 비류연의 의사를 무시하는 일이기도 하고, 그의 눈을 굳이 장난치듯 훔쳐보고 싶진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나예린은 내심 깜짝 놀랐다.

‘내가 왜 이러지?”

그런 식의 사고방식은 예전의 빙백봉이라 불리던 나예린의 사고방식이 아니었다. 예전의 그녀라면 절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될 수 있으면 느끼지 않 고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그것이 그녀의 마음을 지키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비류연을 만나고 그 얼음들이 하나둘씩 녹기 시작하더니, 무언가가 나오려 하고 있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무언가 자신의 안에서 조그만 변화가 생긴 것 같았다.

‘장난이라니…….?’

예전의 그녀라면 절대로 상상도 못했을 일.

나예린은 좌우로 치워보려던 머리카락을 다시 원상복구시키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이 파랗다.

구름이 바람을 타고 자유롭게 흘러간다. 새 한 마리가 창공을 가르며 날아간다.

푸른 하늘 끝을 향해, 높이 높이.

무언가 오랫동안 그녀를 묶고 있던 족쇄가 풀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를 과거에 묶어놓고 있던 단단하기 짝이 없던 질기고 질긴 족쇄가.

이제 그녀도 날아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높이, 아주 높이.

다행히 더 이상의 추적자는 없었다. 어스름이 진 호수 저편 수평선 너머로 차가운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비류연 일행이 탄 배는 번화한 선착장을 피해 인적이 드문 기슭으로 배를 몰았다.

선착장에 배를 대게 되면 보는 눈이 너무 많아서 곤란했다. 때문에 미리 배 대기 좋은 기슭을 알아둔 참이었다.

떠오르는 달 아래, 그 어스름 속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날씬한 윤곽.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기품이 느껴지는 자태.

그 사람을 보자마자 나예린의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드러났다. 나예린은 배가 채 부두에 닿기도 전에 그 사람을 향해 몸을 날렸다. “어머니!”

부두에서 그들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바로 초승달과 같은 차가운 달빛을 연상케 하는 미부인, 빙월선자 예청이었다.

원래 달빛을 머금은 것처럼 하얀 피부를 가진 그녀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창월(蒼月)처럼 창백해져 있었다. 벌써 이곳에서 몇 시진째 한 발자국도 떼지 않은 채 망 부석처럼 서 있었던 탓이리라.

그녀는 기도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속세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뭐든 인간의 힘으로 해결해야지, 스스로 노력하기도 전에 하늘에 빌기만 하는 것은 너무나 나 태한 행위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녀가 할 수 있던 일은 애석하게도 기도하는 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기도했다. 몇 시진째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그들이 그녀의 딸을 데려오 기를 기다리면서, 계속해서 하늘에 기도를 올리며.

딸이 납치당한 어미의 마음이 어찌 평안할 수 있겠는가. 기다리면서도 예청의 마음은 무척이나 불안했다.

‘과연 아무 일도 없을까? 혹여 흉한 일을 당하지 않을까?”

그것은 다시는 맛보고 싶지 않은 힘든 경험이었다.

걱정은 비단 그것 하나만이 아니었다.

이 일이 또다시 딸아이의 마음에 얼마만큼 깊은 상처를 남길지 짐작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그녀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짓눌렀다.

“괜찮으냐? 정말 괜찮으냐?”

묻고 또 묻는 예청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네, 어머니. 전 괜찮습니다.”

그것은 허세가 아니었다. 아무리 무표정한 딸이라지만, 엄마인 그녀는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어쩐지 예전보다 표정이 풍부해진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정말로? 그자에게 잡혀갔었는데도?”

그러나 역시 안심이 되지 않는지 다시 한 번 묻는다.

“걱정 마세요, 어머니.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요. 전 이제 더 이상 그자가 두렵지 않아요.”

나예린의 말은 담담하지만, 힘이 있었다.

‘이 아이…….”

예청은 깜짝 놀랐다.

돌아온 딸아이의 얼굴이 상상 이상으로 밝았던 것이다. 그늘 하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상처를 입기는커녕, 그 상처를 떨치고 온 듯했다.

허세? 아니다. 허세가 아니었다.

그 짧은 시간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달라졌다…….’

엄마니까 알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항상 곁에서 아이가 커오는 것을 지켜본 어미니까 알 수 있었다.

딸아이의 무언가가 변했다는 것을. 딸아이는 훨씬 더 강해져서 돌아왔다는 것을. 더 이상 보호를 필요로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강해졌구나, 딸아.”

나예린은 살짝 미소를 짓더니, 따뜻한 시선으로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네, 모두 저 사람 덕분이에요.”

예청의 시선도 의외라는 듯 나예린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때,

퍽!

갑자기 나예린과 예청의 시선이 향한 저 앞쪽의 배 위에서 둔탁한 소리가 울려왔다. 그리고 곧 사람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딸과의 감동적인 상봉을 깨는 이 소란은 대체 뭐란 말인가?

예청의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배 위에서 소란스레 들려오는 소리에는 누군가의 기겁한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

“대, 대사형! 대체 뭐 하시는 겁니까?”

그리고 뒤따르는 태평한 목소리.

“보면 몰라? 배에 구멍 뚫었잖아.”

배에 구멍? 그러고 보니, 그녀의 딸이 타고 왔던 배가 서서히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멀쩡한 배에 구멍을 왜 뚫냐고요!”

“증거 인멸!”

“부, 부상자들은 헤엄도 못 치는데 어떡하라고요?”

“그야 너희들이 알아서 해야지. 기슭에 대면 배가 완전히 안 가라앉잖아. 그럼 난 먼저 간다.”

침몰해 가는 배 위에서 한 인영이 예청과 예린을 향해 날아왔다. 소매가 헐렁한 검은 옷차림에 앞머리가 길게 내려온 청년, 바로 비류연이었다.

나예린은 그가 소매를 털어내며 내려서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연스레 옆에 가 섰다. ‘저 사람 덕분’에서의 ‘저 사람’이란 필시 이 녀석을 가리키는 말이었 으리라.

‘저 녀석 때문이라고? 이 아이의 입에서 남자 덕분이라는 말이 이렇게 쉽게 나오다니…….?

어떻게 어미로서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예청의 눈이 비류연을 해체(解體)하기라도 하듯 뚫어지게 쳐다본다.

딸에게 이런 변화를 야기시키는 원인을 제공한 남자.

‘이름이 분명 비류연이라 했던가…….?

원래는 출신도 모르는 말뼈다귀 따위, 당장에 쫓아버리려 했다. 하지만 저 녀석이 예린이에게 좋은 영향을 준다면 좀 더 지켜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물론 그녀의 남편은 좋은 영향을 주든 말든 어디서 굴러먹었는지 알 수 없는 말뼈다귀, 아니, 남자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극구 반대하겠지만, 그녀는 엄마로서 딸 아이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녀는, ‘원래 딸이란 건, 결혼 같은 것 없이 평생 아빠랑 같이 사는 거잖소?’ 등등의 발언을 해대는 남편과는 달리 비교 적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 역시 자신의 딸아이가 연애는커녕 결혼이란 걸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적은 없었기에 거의 포기하고 있긴 했다. 그렇게나 남자라는 존재 그 자체에 대해 혐오감을 품고 있던 딸아이였기에, 정말로 천생연분이라 불릴 만한 짝이 아니면 강권할 생각 역시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일단 저 녀석은 자신이 예린이에게 소중한 존재라고 감히 주장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 이상의 존재가 될 거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예린이가 그 사실에 대해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어느 정도 마음속으로 이 남자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거다.

어쨌든 과거엔 모든 남자에 대해 혐오증을 가지고 있었고, 건드리는 것은커녕 접근하는 것조차 진저리를 쳤던 딸이 이렇게까지 변화하는 것은 확실히 좋은 징조라 고 봐도 좋았다.

예청의 시선이 힐끔 비류연 쪽을 향했다.

“저 아이가 과연 그만한 그릇이 될까? 아니면 겉만 그럴듯한 쭉정이일까?”

저 아이는 그 개자식’에게 잡혀간 나예린도 장담대로 이렇게 구해왔다. 그렇다면 말만 앞서는 허풍쟁이는 아닐 터였다.

“이 아이도 이 엄마를 닮아 남자 보는 눈이 있어야 할 텐데.

이 녀석이 진짜배기인지 아니면 이번 일은 우연인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일이겠지만, 당분간은 이대로 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것은 어머니로서의 결정이었다.

하지만 결코 아직 완전히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결코.

왜 어머니가 류연 쪽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걸까? 마치 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해체하려는 듯이. 그러면서도 딱히 그를 향해 화를 내거나, 혹은 쫓아내거나 하지는 않고.

감동스런 모녀 상봉의 여운이 끝나기도 전에 나예린의 마음속에 한 가닥 의혹이 피어올랐다.

그녀는, 이따금 아버지가 바빠서 달라붙는 사내들을 쫓아낼 수 없을 때면 두 자루의 언월도를 들고 그 역할을 대신하던 어머니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비류연이 그녀에게 이렇게 가까이 서 있는데도, 거의 어깨가 닿을락 말락 한 거리까지 다가와 있는데도 어머니는 눈감아주고 있었다.

“이 일은 대체 어떻게 생각해야 될까??

이 정도까지 ‘접근’을 용납한다는 것은 설마…….

그리고는 뭔가를 깨닫고 놀란다.

“난 왜 지금 이런 일에 신경 쓰고 있는 거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예린은 내심 깜짝 놀라서 고개를 저었다. 얼굴이 살짝 달아오를 것 같았지만, 다행히 오랜 습관 때문인지 얼굴은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 다. 한상옥령신공 덕분에 피부도 붉게 변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기야, 어머니는 눈감아준다 해도 그녀에게는 아직 절대굴강의 벽인 아버지라는 벽이 남아 있기에 당분간 큰 변화는 없을 터였다.

딸의 일만 관련되면 체통도 이성도 잃어버리는 아버지. 참 곤란하지만 자상한 아버지.

“그러고 보니 아버지께서는 어찌 되셨는지요?”

아버지 나백천이 그녀를 위해 흑천맹으로 향한 것은 비류연을 통해 들어서 이미 알고 있었다. 어떻게든 아버지께 그녀가 무사하다는 소식을 전해야 했다. 우뢰매 로는 나백천에게 소식을 전하는 게 불가능했기에 아직까지 미뤄두고 있었던 것이다.

“아참, 네가 무사히 돌아온 것을 아직 네 아빠에게 전하지 않았구나. 당장 백섬을 날려야겠다.”

예청이 품에서 새 피리를 꺼내 불자 하늘 어딘가에서 새하얀 매 한 마리가 강하해 오더니 그녀의 오른팔에 내려앉았다. 예청과 나백천이 함께 키우고 있는 전서응, 푸른 깃털을 가진 우뢰매와 다르게 하얀 깃털을 가진 매였다. 게다가 우아하고 긍지 높은 암컷이었다.

“지금이라면 아직 늦지 않았을 게다.”

예청은 짧게 쪽지를 쓴 다음, 백섬의 다리에 달린 전서통에 집어넣었다.

“부탁하마, 백섬아. 이제 믿을 건 네 튼튼한 두 날개뿐이구나. 부디 이 소식을 그이에게 한시라도 빨리 전해주렴.”

예청은 가볍게 백섬의 부리에 입을 맞춘 다음 하늘로 날려보냈다.

그녀의 말에 대답하기라도 하듯,

삐이이이이이

높은 울음소리를 내며 백섬은 점차 어두워지는 하늘을 향해 날아갔다.

이 백섬이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이때는 여기의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모든 게 끝났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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