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9권 4화 – 흔들! 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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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29권 4화 – 흔들! 흔들!

흔들! 흔들!

ᅳ격(激)하게 흔들리는 비밀 통로

“끄아아아악! 무너진다, 무너져!”

본능적으로 머리를 양손으로 감싼 금영호의 입에서 짤막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쿠르르르릉.

“겁도 많기는!”

보고 있던 마하령이 짐짓 태연한 척 핀잔을 주었으나, 당황한 것은 금영호뿐이 아니었다.

“차라리 적과 싸우다 죽지, 이런 식으로 생매장당하는 건 사양하고 싶어요!”

금영호처럼 머리를 감싸며 진령이 울 것만 같은 얼굴로 외쳤다.

아무리 담대한 아미파의 기재라 해도, 폐쇄된 통로에서 천장이 흔들리며 먼지가 후두둑 머리 위로 떨어지는 데서 평정을 유지한다는 것은 매우 지난한 일이었다. “참아, 진 소저. 지금 뛰쳐나가 봤자 개죽음일 뿐이야.”

“언제 천장이 무너져 생매장을 당할지도 모르는데, 마 소저는 무섭지 않아요?”

“무, 물론 난 안 무섭지. 당연하잖아? 이깟 게 뭐가 무서워?”

당찬 대답과 달리 마하령의 안색은 그리 좋지 않았다. 입가에는 미소가 걸렸으나 그 미소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사실 폐소공포증에 관해서라면 진령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마하령이었다. 다른 때라면 좁은 곳에만 들어가도 사방의 벽이 자신을 짓누르는 듯한 느낌에 호흡곤란마저 느낄 정도였다. 다만 지금 그녀의 곁에는 용천명이 있었고, 지금 진령의 곁에는 남궁상이 없었다. 차이는 그뿐이었다.

진령은 그게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다.

‘궁상, 이 인간은 이런 중요한 때에 내 옆에 없고! 바보, 바보, 바보!’

하지만 속으로 천 번 만 번을 욕한다 한들 없는 남궁상이 뚝 하고 나타날 리 만무했다.

쿠르르르릉!

다시금 천장이 흔들리며 후두두둑, 흙모래가 떨어져 내렸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거지?

비밀 통로의 끝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아무 일도 없었는데…….

통로 밖에서는 여전히 재수없는 연주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아악! 듣기 싫어!”

진령은 듣기 싫다는 듯 양손으로 귀를 막았다. 그녀에게는 저 합주 소리가 마치 저승사자의 웃음소리처럼 들렸던 것이다. 누가 제발 저 금과 피리 소리를 멈춰주면 소원이 없을 듯했다.

‘정말이지,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야!’

왜 고작 ‘이각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이렇게 천국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해야 하냐고!

속으로 절규해 보았지만, 딱히 하소연할 데는 없었다.

“좀 전부터 들려오는 연주 소리가 원인인 듯합니다.”

비밀 통로에 들어온 이후로 용천명의 뒤를 따르며 계속 조용히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형산일기 백무영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자 삼절검 청흔도 기다렸다는 듯이 동의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한낱 연주로 이 정도 위력을 낼 수 있다니! 정말 놀랍군요.”

이 음악 소리는 사람들의 고막을 괴롭힐 정도로 시끄럽거나 강하지는 않았다. 크지 않은 목소리로 말하는 일행의 대화가 또렷하게 들리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 다.

그렇다면 저 음파는 오로지 비밀 통로 및 통로를 구축하고 있는 석판들에만 충격을 가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대체 어떻게?’

모두의 머릿속을 스쳐 가는 의문은 그 한 가지였다.

“아마도 공진(振)이겠군요!”

침음성처럼 흘려내는 용천명의 말에 나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 밖에서 진을 치고 있는 이들 중 하나는 음공이 절정의 경지에 이른 고수가 분명할 테지요.”

지금 당장 천장이 흙더미와 함께 쏟아져 내려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나예린의 목소리는 그 누구보다도 지극히 담담했다.

“이 여인은 이런 상황에서도 공포를 느끼지 않는단 말인가?”

용천명은 나예린을 다시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생매장은 따 놓은 당상 아닙니까?”

공손절휘가 좌절하듯 말했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긴 했지만, 그 말에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생매장이라니! 그런 건 전적으로 사양하겠어요!”

마하령 역시 무림인이었다. 그런 허무한 죽음은 딱 질색이었다.

“맞아요! 죽을 때 죽더라도, 무인답게 당당하게 맞서 싸워요! 백도 여협들의 기개를 저들에게 맛보여 주는 거예요!”

진령이 맞장구를 쳤다.

“저, 저도…… 언니의 말에 찬성이에요.”

지금까지 존재감조차 없이 함께했던 첩실 지망생, 류은경이 손을 들어 올리며 모기만 한 목소리로 말했다.

“옳소!”

“찬성!”

“찬성이에요!”

지금껏 불안에 떨며 침묵을 지키던 일행들까지도 여기저기서 찬성과 동조의 소리를 내며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그럼 결정된 것 같군요. 용 회주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나예린이 용천명의 의향을 물었다. 염도와 빙검이 없는 지금, 이중에서 가장 높은 권한을 지니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용천명과 마하령 두 사람이었다. “회주라니, 이제 본인은 감당할 수 없소. 그건 마 소저에게 물어보시오. 이제부터 그녀가 천무학관 학생 총회주니 말이오.”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받아들일 시간을 주기 위해 잠시 말을 끊은 다음, 용천명이 다시 말을 이었다.

“소생은 그저 총대장인 그녀의 말에 따를 뿐이오.”

“어, 어떻게 그런 일을 상의도 없이…….”

그 말을 들은 청흔과 백무영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자존심 높고 당당한 용천명이 이렇듯 쉽게 여인의 말을 따를 줄은 몰랐던 것이다.

“내 독단이네. 자네들도 동의해 주면 좋겠네만?”

“지금은 대답할 수 없습니다.”

청흔과 백무영이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직은 납득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마 소저가 이 위기를 넘길 만한 능력을 보이신다면 저희 두 사람도 생각해 보겠습니다. 용 회주를 이긴 그 실력은 인정하지만, 사람을 통솔해서 위기의 순 간을 극복할 수 있는지는 아직 보지 못했지 않습니까?”

백무영이 회의적인 어조로 말했다.

“마 소저께서 구파일방의 제자들이 주축이 된 구정회(九正會)와 팔대세가와 군소문파가 주축이 된 군웅팔가회 양쪽을 이끌 만한 지도자라면, 그 기량을 증명해 주 십시오. 그러기 전에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청흔의 태도는 명확했다.

“그렇다는군요. 어쩌시겠어요, 마 소저? 아니, 마 총회주님?”

나예린이 마하령을 향해 물었다. 갑작스럽기는 마하령도 마찬가지였는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동안 쌓였던 반감들이 있는데 그 벽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거 라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었다. 하지만 물러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용천명의 결단을 허투루 하고 싶지 않았다.

당당하게 허리를 곧게 펴고 구정회의 무상, 문상을 바라보며 철옥잠 마하령이 당찬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요. 청흔, 무영, 두 사람이 나의 지시에 따른다면 이 난관을 돌파해 보이겠어요. 두 사람의 의향은 어떤가요? 나의 지시에 따르겠나요?”

잠시 고민 후 청흔과 백무영이 동시에 대답했다.

“이번에 한해서는 당신의 지시에 따르겠소.”

어디까지나 시험 삼아 따라보겠다는 것이었다.

“걱정 말아요. 당신들은 앞으로도 계속 내 지시를 따르게 될 테니까!”

그제야 마하령은 빙긋 웃으며 용천명 쪽으로 고개를 돌린 다음 물었다.

“천명, 나를 도와줄 수 있나요?”

“이미 말하지 않았소? 나의 대장은 하령 당신이라고!”

“좋아요. 그럼 까짓것, 한번 해보죠.”

드디어 마하령의 결심이 섰음을 확인한 나예린은 시선을 다른 쪽으로 향했다.

“옥 교관님께서는 어쩌시겠습니까?”

나예린의 질문에 모두의 시선이 옥유경을 향해 모였다. 그녀는 일행의 맨 뒤에 서서 기척을 죽인 채 팔짱을 끼고 계속해서 지켜보던 중이었다.

‘언제부터 저기 있었던 거야?”

‘글쎄, 아까부터 계속 있지 않았을까?”

‘그랬나?’

“그렇겠지.’

“어째서 우리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거지?”

‘글쎄, 그걸 나한테 물으면 안 되지. 나도 모르니까.’

옥유경 정도로 존재감이 있는 인물을 지금까지 잊고 있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가장 가까이에서 걸어왔던 공손절휘를 뺀 나머지 일행은 까맣게 그 존재감을 잊고 있었다. 그것은 다시 말해, 사람들의 인식(認識)조차 희미해질 정도로 완벽하게 기척을 죽이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러고 보니 또 한 명 더 있지 않았나?”

‘아니, 없었어!’

“아냐, 있었어. 희미하지만 기억이 나는 듯해. 그, 웬 쪼끄만 꼬맹이랑 함께…….’

‘그런가? 그러고 보니 그 쪼끄만 꼬맹이는 기억이 나는 것 같기도…….?

그러나 옥유경의 뒤에 선 무명과 장소옥을 일행이 미처 인식하기도 전에, 옥유경이 반문하는 바람에 사람들의 이목이 다시 그녀에게로만 집중되었다. “그건 왜 묻느냐? 내가 너희들의 행사를 방해할까 봐 그러느냐?”

옥유경이 입꼬리를 살짝 치켜올리며 물었다. 어딘지 도발하는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예린은 그런 도발에도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전 저희 행사를 방해하지 않고 그저 지켜보고만 있겠다고 하셨던 옥 교관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이번 질문은, 혹시나 저 희를 위해 한 팔 거들어주실 수 있는지를 여쭤보고자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나예린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차분했다.

“영리한 아이구나. 그렇게까지 말하면 내가 최소한 ‘너희에게 손을 쓸 수는 없으리라 생각한 것이겠지? 걱정 말거라. 그 사람이 올 때까지 나는 그저 지켜보고만 있을 테니. 아직 명확해지지 않은 의문도 있고. 그 의혹이 풀리기 전까지는 관찰자로 남아 있을 예정이다. 물론 큰 언니들에게 대들 수도 없는 노릇이니 내가 너희를 거드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옥유경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큰 언니들이라니…… 설마……?”

“그래, 맞다. 누구긴 누구겠느냐? 저 바깥에서 이곳을 포위하고 있는 분들이시지.”

“아시는 분들이었다니, 놀랍군요.”

“그러니 미안하지만 난 면사로 얼굴을 가린 채 구경이나 해야겠다. 잊지 말거라, 우리는 여기에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옥유경의 말처럼 나예린이 먼저 치밀한 계산을 하고 꺼낸 말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방해하지 않는 것만 해도 과분할 정도였다.

“으음… 하지만 미리 한 가지 경고를 해주마.”

옥유경이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경청하겠습니다.”

“저분들은 절대 만만한 존재가 아니다. 이 상태로 덤비다가는 그 즉시 죽음을 면치 못할 게야. 얕보지 말거라. 그러다가 다 같이 죽.는.다.” 그것이 그녀가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충고였다.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옥유경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 아마 모를 것이다. 이 무림에 몸담고 있는 이들 대부분이 모르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고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옥유경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정면으로 맞설 생각은 절대로 피하고, 도망칠 생각만 해라. 내가 해줄 수 있는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오늘 내가 너무 많은 말을 했구나.”

실제로 지금까지 해준 것만으로도 옥유경은 과분할 정도로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옥유경은 그대로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때였다.

“으응? 난 도와줘도 되는데?”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유령처럼 존재하고 있던 무명이 불쑥 한마디를 내뱉었다.

‘허억! 역시 있었어! 그 쪼끄만 꼬마랑 붙어 있는 흰 머리 남자!’

·진짜네, 언제 나타났지??

‘나타난 게 아니라 계속 따라오고 있었나 본데??

그러나 갑작스런 무명의 말에 일행보다도 더욱더 놀란 사람은 따로 있었다.

“대장님! 지금 제정신이십니까!”

무명의 곁에 있던 부대장 장소옥이 그의 천진무구한 한마디에 발끈 화를 내며 소리친 것이다.

“왜? 안 돼?”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마주보는 무명을 장소옥은 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연히 안 되죠! 이들은 백도 사람들이라고요! 이 사람들을 도와서 ‘그분들’에게 맞서시겠다고요?”

하지만 무명은 오히려 고개를 갸우뚱할 뿐이었다.

“그게 어때서? 약하고 곤란에 빠진 쪽을 도와주는 게 당연하잖아?”

“언제부터 그렇게 착한 분이었다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리고 그게 흑도인이 할 말입니까? 부끄러운 줄 아세요!”

장소옥은 얼굴까지 시뻘게져서 무명에게 화를 냈다. 장소옥 역시 악한 인상과는 거리가 먼 외모와 언행을 지니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은 흑도 인으로서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무명은 소옥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잠시 고개를 끄덕이다가 답했다.

“으응, 그렇구나. 근데 그럼 소옥이 넌 나쁜 사람이었어?”

그 말에 적잖이 당황하던 소옥은 마음을 다잡고 다시 말을 돌리며 반격에 나섰다.

“요, 요즘 왜 이러세요? 원래 수면 시간과 단것 이외에는 사람이 죽든 말든 별 관심도 없었던 분이시면서!”

“아냐, 나 원래 착했어. 부끄러운 흑도인이지.”

그러자 장소옥이 웃기지 말라는 얼굴로 외쳤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이제 자신이 예전에 어떻게 행동했는지도 까먹으신 겁니까?”

“글쎄? 기억 안 나.”

부대장 장소옥이 발을 동동 구르든 말든, 무명의 태도는 태연하기만 했다. 오히려 방방 뛰는 장소옥의 반응을 즐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마저 일 정도였 다.

“정말 안 돼?”

고개를 모로 꼬며 무명이 장소옥을 빤히 쳐다봤다.

“그런 전법엔 안 넘어갑니다! 제가 한두 번 당한 줄 아십니까? 절대 안 됩니다.”

강아지처럼 눈을 빛내는 무명의 얼굴을 아예 쳐다보지 않으려는 듯, 장소옥이 고개를 반대쪽으로 홱 돌렸다.

“소옥아? 정말정말정말 안 돼?”

“아참, 순진한 척하지 마세요! 정말정말정말로 안 됩니다, 대장님!”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풀 죽은 목소리로 무명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제 마음을 알아주신 거군요, 대장님!”

자신의 의견이 먹혔다는 사실에 감동하며, 존경하는 대장님을 향해 고개를 홱 돌린 장소옥의 눈이 부릅 떠졌다.

“…..!!”

그의 대장인 무명은 어째선지 어디에서 났는지 모를 몽둥이 하나를 머리 위에 들고 있었다.

“미안.”

퍽!

그리고, 장소옥의 눈앞이 캄캄한 어둠으로 뒤덮였다.

“자, 방해꾼도 사라졌고, 우린 이야기를 계속해 볼까?”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로 무명이 밝게 웃으며 말을 꺼냈다. 이런 사람의 도움을 받느니 차라리 자신들의 힘만으로 싸우는 게 백배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일행의 머릿속을 스쳐 갈 정도로 태연한 모습이었다.

마천십이대 대장 무명(無名).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내였다. 진령은 불안한 가슴을 달래며 속으로 생각했다.

“더 이상 이렇게 이상하고 불편한 일행은 안 늘었으면 좋겠는데…….’

그녀의 염원이 이루어질지 아닐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었다.

“그럼 다들 나가도록 하죠. 그런데 그전에…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옥 교관님이 언니라고 부르신다면, 바깥에 있는 분들의 나이는 대체 어떻게 되는 거죠?”

마하령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옥유경의 말로 미루어보면, 신마팔선자 중 일부 또는 전체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녀들은 겉보기 엔 이십대 후반에서 삼십대 초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무척이나 젊은 모습이 아니었던가.

그 순간 팔짱을 끼고 있던 옥유경의 눈빛이 무시무시한 빛을 내며 매섭게 빛났다. 이것은 일종의 경고였다. 갑자기 주위의 공기가 싸늘해지는 듯한 느낌과 함께 몸 서리가 쳐질 정도의 진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뜻은 명백했다.

“그, 그건 알려고 하지 않는 편이 더 현명하겠군요.”

마하령이 옥유경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그러자 진령도 어색하게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그, 그렇군요. 그게 좋겠어요. 아하하하하.”

세상에는 결코 묻지 말아야 할 것도 있고, 영원히 의문과 의혹 속에 봉인해 둬야 하는 질문도 있는 것이다. 쓸데없는 호기심은 언제나 자신의 몸을 망치게 마련이 다.

땅, 따다당당!

밖에서 들려오는 연주 소리가 한층 더 강해졌다.

쿠르트

르르.

비밀 통로 전체가 비명을 지르듯 크게 흔들리며 흙먼지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이제 흑소와 은금의 합주는 절정에 도달해 있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통로는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요동쳤다.

쩌―저―저─적!

급기야는 석판을 타고 미세한 균열들이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실로 무시무시한 속도여서 언제 가루가 되어 부서져도 이상하지 않은 모양새였다.

후두둑!

균열을 견디지 못하고 갈리진 석판의 한 귀퉁이가 마하령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퍽!

그 순간 용천명의 주먹에 녹색의 강기가 맺히더니, 가벼운 주먹질 한 번에 파편은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아무래도 임계점인 것 같습니다. 더 이상 통로가 버티지 못합니다.”

담 총관이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제 그 수밖에 없는 것 같군요. 부탁할게요, 마소저.”

나예린의 말에 마하령이 청흔과 백무영, 그리고 용천명을 보며 물었다.

“모두 다 기억했죠? 준비는 끝났나요?”

좀 전에 옥유경과 무명이 얘기를 하는 동안, 마하령과 머리를 맞대고 간단히 대책을 논의했던 세 명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시작하죠. 부탁해요, 백 문상.”

백무영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다음 품 속에서 옥소를 꺼내 들어 입가에 가져갔다.

삐―리리리—리리리—!

갈효민에게는 지금 들려오는 피리 소리가 무척이나 가소롭게 느껴졌다. 그녀 정도의 악사라면 단 한 소절만으로도 상대의 실력을 가늠해 볼 수가 있었다. 그녀가 보기에 비밀 통로 안에서 들려오기 시작한 피리 소리는 무척 젊은 청년의 솜씨가 분명한데, 아직 그 깊이나 공력 및 기술이 한참이나 모자랐다.

살짝만 더 힘을 주어도 그녀라면 단번에 이 피리 소리를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이 다음엔 뭘 어떻게 몸부림칠 생각인지 좀 더 두고 볼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그것 역시 길지 않았다.

한계에 다다른 백무영이 피리를 입에서 떼지 않은 채 청흔에게 신호를 보냈다. 청흔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인 다음, 천장에 뚫린 입구를 향해 검결지를 쥔 좌우 양손을 쭉 뻗었다.

펑!

갑작스런 폭음과 함께 포위망 한가운데서 모래가 용천수처럼 솟구쳐 나왔다. 그 모래에 섞여 청흔도 함께 뛰어올랐다.

통로의 입구로부터 제운종으로 뛰어오른 청흔은 검결지를 쥔 양손을 동시에 앞으로 뻗었다.

챙! 챙! 챙!

청흔의 등에 메인 세 개의 검집으로부터 세 자루의 검이 저절로 뽑혀져 나오더니, 갈효민과 갈효효, 갈효묘를 향해 빛의 화살처럼 쏟아져 나갔다.

삼정태극검혜(情太極劍慧)

상승乘) 오의(義)

삼검교연(三劍交宴)

챙! 챙! 채챙!

세 자루의 검이 서로 교미를 하듯 엇갈리며, 은쟁반에 구르는 옥구슬처럼 맑은 검명(劍鳴)을 토해냈다.

“합(合)!”

청흔은 양손의 검결지를 십자 모양으로 교차시키며 외쳤다.

삼검교연(三劍交宴)

최종장(最終章)

삼검귀일(三劍歸)

마치 진인이 경문을 읊듯 검명음을 토해내던 세 자루의 검극이 허공에서 하나로 부딪치더니, 하늘과 땅을 뒤흔들 것 같은 굉음이 터져 나왔다. 쾅! 콰쾅!!

나뉘어져 있던 삼태극이 하나로 돌아가면서 엄청난 폭발을 일으킨 것이다.

가히 ‘파천명(破天鳴)’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는 어마어마한 소리가 울려 퍼지며, 면면부절하게 울려 퍼지던 효민과 효효의 연주를 상살(相殺)시켰다.

아무리 절정에 오른 음공의 대가라 해도, 공기가 찌르르 떨릴 정도로 엄청난 굉음 속에서 연주를 계속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내공은 높으나 음공에는 갈효민보다 조예가 낮았기에 갈효효의 박자가 먼저 어긋났고, 협연자의 박자가 어긋나자 갈효민의 흑소 소리 역시 함께 어긋나고 말았다. 구정회의 문무쌍절, 백무영과 청흔의 공격은 거의 성공한 듯 보였다.

하지만…….

삐―리리리리리리!

흑소 위를 움직이는 손가락이 급격히 빨라지더니, 갈효민은 다시 흐트러졌던 음과 박자를 원래대로 되돌렸다. 그러고는 그녀의 연주가 갈효효의 흐트러진 금음을 올바로 유도하기 시작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리기라도 하듯, 은금 위를 누비는 갈효효의 열 손가락이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감히 소음으로 음악을 모욕하다니!’

차가운 분노가 갈효민의 숨결을 타고 흑소 안에 불어넣어졌다. 그와 함께, 고고하고 차분하던 그녀의 눈이 무섭게 빛나기 시작했다.

‘히익! 큰일 났다!’

깊게 가라앉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며 갈효효는 속으로 기겁했다. 이 여섯째 언니가 평소에는 조용하지만, 한 번 화나면 얼마나 살벌해지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녀였다. 특히 연주를 방해하거나 하면 사람이 변해 버리는 특성이 있었다. 그녀가 알기론, 여섯째 언니는 음악을 모독한 놈을 이 세상에 남겨둘 만큼 자비롭 지 않았다.

지금은 흑소에 입을 대고 있으니 망정이지, 금이나 비파 같은 다른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면 분명 이렇게 외쳤으리라.

-그런 거친 잔꾀로 나의 연주를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느냐? 소음밖에 모르는 너희들에게 어울리는 것은 장송곡뿐이다!

효효는 효민의 외침이 귓가에 생생히 들려오는 듯했다.

“민 언니! 벌써 다 죽여 버리면 안 돼! 그렇게 되면 계획이…….”

갈효효의 악기는 다행히 은금인지라 급히 전음을 보냈다.

삐리리리리리리리리~

그러나 엄청난 힘이 담긴 피리 소리가 갈효민의 섬섬옥수에 들린 흑소로부터 뿜어져 나왔다.

“으악! 안 듣고 있어!’

전혀 안 들리는 건지, 아니면 듣고도 못 들은 척하는 건지 피리 소리는 더욱더 거세질 뿐이었다. 갈효효는 울상을 지으면서도, 조화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 은금의 소리를 더 높일 수밖에 없었다. 혼자서 급작스레 연주를 멈추거나 급격한 변화를 주었다가는 상황이 어찌 될지 모르는데다가 후환이 두려웠다.

차가운 분노가 소리로 변한 탓일까? 급격히 고조되기 시작한 두 사람의 합주는 마치 폭풍과 격랑이 몰아치는 바다 같았다.

-봐주는 것 없다. 이제는 모든 것을 쓸어버려 주마! 흔적도 없이!

고조된 두 사람의 합주 소리는 마치 그렇게 외치는 듯했다.

털썩!

청흔과 백무영은 양손으로 귀를 움켜잡으며 무릎을 꿇었다.

“크아아아악!”

“크윽!”

귀를 틀어막은 채 몸부림치는 두 사람의 입에서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고막이 터져 나갈 것처럼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지금의 연주는 좀 전에 비밀 통로를 흔들었던 곡보다 훨씬 무자비했다.

쩌저저저적!

우르르르르르릉!

나머지 일행이 아직 몸을 숨기고 있던 비밀 통로 안은, 지진을 만난 듯 바닥마저 갈라지며 군데군데가 조금씩 붕괴하기 시작했다.

“이제 단 한 소절이면…….’

이제 단 한 소절이면 저 아래에 뚫려 있는 비밀 통로는 곧바로 생매장터로 변할 게 분명했다.

그때, 지하로 뚫린 비밀 통로의 문으로부터 한 인영이 튀어나왔다. 그의 손에는 녹옥빛으로 빛나는 한 자루의 검이 들려 있었다. 소림의 이대지보 중 하나인 녹옥 여래신검이었다. 바로 창천룡 용천명이 출수한 것이다.

소림(少林) 불문佛門) 비전(秘傳) 운신법(運身法)

연대구품(臺九品) 제삼품(第三品)

아미타阿彌陀) 삼존불(三尊佛) 불영삼재(佛影三在)

삼중(三重) 사자후(獅子吼)

연대(蓮臺)란 연화대, 즉 부처가 앉는 자리를 가리킨다. 연대구품이란 일종의 상승 분신술에 가까운 불문의 최상승 보법 중 하나로, 그 단계가 늘어갈수록 그림자 의 개수가 늘어나며, 종국에는 총 아홉의 불영(佛影)을 그 자리에 가부좌를 튼 채로 만들어낼 수 있다고 전해진다.

또한 이 불영, 그림자들은 단순한 분신이 아니다. 각각의 불영이 발휘하는 무공 초식이 모두 다르고 그 위력은 평소와 거의 흡사하다고 하니, 만일 구품의 불영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아홉 명의 용천명이 사방에서 동시에 공격하는 신묘한 묘용(妙用)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어허—엉!

세 방향의 삼존불영에서 동시에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

제삼품 삼존불은 대웅전에 놓은 세 불상처럼, 가운데 본존불에 해당하는 본존영과 그 본존을 보좌하는 두 개의 불영이 세 방향에서 동시에 제마의 기운이 담긴 공 격을 가하는 무공이었다. 이번 경우 용천명은 거기에 복마의 힘이 담긴 불문 사자후의 공력을 가미시키기까지 했다.

두―웅!

그것은 단순히 크기만 한 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새벽 삼경에 산사에 울려 퍼지는 타종 소리처럼, 강하고 웅장하며 폐부 속으로 스며드는 듯한 소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정신이 혼미한 이의 정신을 깨우고, 어리석음으로 자신의 눈을 가리고 있는 이의 눈을 뜨이며, 오만과 편견으로 귀가 막힌 자의 귀를 트이고, 궁극적으로 ‘마 (魔)’를 복속시켜 무릎을 꿇린다는 불타의 호통, ‘불문 사자후(佛門 獅子吼)’가 용천명의 몸을 빌려 터져 나온 것이다.

세 방향에서 동시에 발해진 사자후는, 밤하늘의 별에까지 가 닿을 듯했던 두 사람의 합주를 마지막 최고조에 달하기 바로 직전에 상쇄해 버렸다. 완전히 깨어져 나 간 음공 합주는 이번엔 청흔 때처럼 곧바로 회복하진 못했다. 게다가 신묘하게도 사자후는 ‘듣는 이’만을 공격할 뿐인지, 비밀 통로의 붕괴에는 어떠한 영향도 미치 지 않았다.

“잘 견뎌주었네, 둘 다.”

합주가 끊기자 음공의 압박에서 벗어나 겨우 다시 일어선 두 사람을 돌아보고, 용천명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기다리다가 고막 터지는 줄 알았습니다.”

무릎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청흔이 투덜거렸다.

“이렇게 오래 버티라는 얘기는 없었지 않습니까? 미리 언질을 주셨어야지요., 그런 건.”

“미안하네. 하지만 기다릴 수밖에 없었네, 합주가 최고조로 고조될 때를.”

용천명의 말투에 미안한 기색이 묻어났다. 하지만 다시 하라고 하면 똑같이 행동할 게 분명했다.

전력을 다하지 않고 힘을 아끼고 있는 상태라면 흔들어놓아도 금방 원래대로 회복하는 게 가능하다. 하지만 연주가 최고조에 달해 격렬해졌을 때는 연주자 또한 혼신의 힘을 쏟아 넣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원래 팽팽하게 당겨진 현은 더욱 끊어지기 쉬운 법이다.

“어지간한 내공으로는 입도 제대로 뻥긋하지 못한다는 사자후를, 그 나이에 그 정도로 심후하게 펼쳐 내다니. 제법이구나.”

절정의 순간을 맞이하려던 순간에 음악이 급격하게 끊어졌기에 그 반동 또한 상당했다. 아마 갈효민과 갈효효, 그리고 갈효묘의 내공 공부가 약했다면 합주가 파 훼된 반동을 견디지 못하고 피를 족히 한 말은 토하고 말았으리라.

“제법이긴 했다만 이 정도로 우리를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진 마라. 너 역시 방금 전의 한 수로 내공을 거의 소모한 듯 보이니 말이다.”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갈효민이 말했다. 내장이 진탕되었기 때문에 그녀 역시 회복하는 데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청흔과 백무영은 그 말에 깜짝 놀라 용천명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갈효민의 말대로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창백했다. 이마에는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혀 있기까지 했다. 하지만 용천명의 입가에 맺혀 있는 것은 절망이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다른 이들도 방금 전의 사자후를 견뎌낼 만큼 심후한 내공을 지녔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군요.”

‘아차!’

갈효민과 갈효효는 자신들이 간과(看過)한 것을 깨닫고 안력을 돋우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

비상 통로 주변으로부터 꽤 거리를 두고 흩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 멀리서 사방을 포위하고 있던 흑견대 대원들이 귀를 움켜잡고 비틀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신마가의 세 여인은 밑바탕이 튼튼했기에 용천명이 전력을 다해 극성으로 펼친 사자후를 버텨낼 수 있었지만,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던 흑견대 제이대는 그다지 무 사하지 못했다.

용천명의 목적은 애초에 상대하기 까다로운 신마팔선자 쪽이 아니라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는 흑견대 제이대 쪽이었던 것이다. 갈효민과 갈효효의 음공이 목표 대 상을 향해 집중되어 있었던 데 반해, 용천명의 사자후가 사방으로 폭발하듯 퍼져 나갔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너무 많은 이들을 유효 거리 안에 두느라 치명적인 공격을 가하지는 못했어도, 비틀거릴 정도의 타격을 주어 포위망을 혼란시킬 수는 있었다.

그러나 아직 그들 중 절반 정도는 애석하게도 건재했다. 역시 사자후 한 번으로 포위망을 부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비틀거리고 있는 이들은 흑견 대 중에서도 내공이 낮은 이들뿐이었다. 흑견대 제이대의 부대장 맹견을 비롯한 반수 정도는 여전히 흉흉한 기세를 내뿜으며 포위망을 유지하고 있었다.

“애는 썼다만, 안타깝겠구나. 목표를 이루지도 못하고 무용지물이 되었으니.”

약간의 비웃음이 담긴 갈효민의 말대로 이제 당분간 용천명은 전투 불능 상태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는 치명적인 실수를 했다는 자각이 없는지 창백한 얼굴로 시원하게 웃었다.

“아니오. 제 역할은 여기까지로 충분합니다.”

그러자 갈효민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설마 저 나무 위에 올라간 여자아이를 믿는 건 아니겠지?”

그 말에 청흔과 백무영의 시선이 그녀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나무를 향했다.

“어? 어디? 어라, 진짜로 있네?”

눈앞의 싸움에 정신이 팔려서 갈효효와 갈효묘도 눈치채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어느 틈에 올라간 것일까, 그 나무 꼭대기에는 어느새 마하령이 당당히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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