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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104화


“천전홍, 배를 준비해.”

“알겠습니다.”

“안산(安山)에다 준비시켜 놔. 마차는 소양호(昭陽湖) 어태(魚台)에 준비시켜 놓고, 안산에서 배를 타고 독산호(獨山湖)를 거쳐 소양호까지 내처 가야 하니까 나룻배 같은 것보다는 유람선 쪽이 좋겠지. 돈을 아끼지 말고 큰 배를 빌려놔.”

“걱정하지 마십시오.”

천전홍은 일개 외장 문도였으나 성격이 꼼꼼했다. 거기에 배포까지 있어서 웬만한 위험쯤에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 사내다. 죽은 진무동이 가장 아끼던 수하로 무림인들에게는 생소한 인물이지만 소(小)도둑들 세계에서는 제법 이름이 알려진 사내이기도 했다.

종리추는 천전홍이 사라지기 무섭게 모진아를 변장시켰다.

“갑갑하군요. 꼭 이럴 필요가 있습니까?”

모진아는 자부심이 상당히 강해졌다.

중원에 들어올 때만 해도 무공에 확신을 갖지 못했는데 지난 세월 동안 무림인들을 지켜본 결과 자신의 무공이 상당히 높은 경지라는 것을 깨달은 것 같다.

종리추에게 완벽히 지기는 했지만……

그는 종리추에게 진 것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기고 지는 것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는 까닭이다.

그에게 무공이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는 정도면 족했다. 천하제일이 되려는 욕심도 없고 무공으로 명예를 얻으려는 생각도 없다.

그는 종리추의 노예로 만족했다.

천부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한 종류는 천부에 머물러 평온하게 지내기를 바라는 사람들이고 다른 한 종류는 무림에 나와 죽든 살든 뜻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모진아는 후자였다.

암연족을 강성하게 키워 남만을 평정하겠다던 야심은 십여 년 전에 버렸지만 어느 한 세계를 정복하겠다는 뜻은 버리지 않았다.

그는 남만 대신 무림을 택했다.

그렇다고 오독마군처럼 중원 제일인자가 되고픈 욕심은 없었다. 그는 자신이 그럴 만한 그릇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일찍 깨달았다. 중원무림인들이 겉보기에는 허술하고 무능력해 보여도 속으로 파고들면 자신과 맞상대할 고수가 부지기수로 많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그는 무림을 겉만 본 것이 아니라 속까지 샅샅이 훑어냈다.

결과로, 그는 종리추가 사무령이 되기를 원했다. 종리추가 사무령이 되는 데 일조를 할 수 있다면 자신의 역할은 다한 셈이고 웃으며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에게는 그릇이 있다.

모진아는 자기 자신을 비하시키지도 않았지만 부풀리지도 않았다.

있는 그대로 본 결단이다.

어쩌면 ‘노예’라는 말을 꺼냈던 순간부터 오늘 같은 날을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앞으로는 벙어리가 되어야 해.”

“벙어리까지요?”

“피부나 얼굴 모습은 고칠 수 있지만 말투는 고치지 못해. 입을 여는 순간 중원인이 아니란 걸 알게 될 거야. 조금이라도 의심을 하게 만들면 안 되지. 귀를 막도록 해.”

“조금 어렵겠군요.”

“모진아.”

“네?”

“돌아가고 싶어?”

“또 왜 그러십니까. 전 말도 못 합니까? 조금 있으면 벙어리가 될 몸인데 좀 봐주십시오.”

“너무 해이해진 것 같은데… 비무 한번 할까?”

“아이고! 봐주십시오. 입 뚝 다물겠습니다.”

모진아는 정말 입술을 꽉 다물었다.

그런 모진아를 보며 종리추는 싱긋 웃었다.

모진아는 종리추에게서 부정(父情)을 느끼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알았다. 그는 종리추처럼 강한 자식을 낳는 게 소원이었고, 하늘이 내려주지 않는 자식을 인위적으로 찾았다. 노예가 되어서.

모진아가 말이 많아질 때는 종리추와 단둘이 있을 때뿐이었다.

곁에 한 사람이라도 더 있으면 시키지 않아도 벙어리가 되었다.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이 오가도 중간에 끼어드는 법은 절대 없다. 철저하게 노예가 되어 버린 것이다.

종리추도 모진아를 노예가 아닌 일가족으로 대했다. 그런 점은 유구나 유회에게도 마찬가지다.

모두 같은 마음이다.

그들은 같은 피를 지니지 않았지만 친혈육보다도 끈끈한 사이다.

종리추는 자신의 분장을 하기 시작했다.

꼼꼼한 손놀림이 필요한 작업이다.

종리추가 인피면구를 뒤집어쓰고 잔손질까지 마무리했을 때 그는 영락없이 사십 대의 중후한 중년인으로 변해 있었다.

“중원무림은 남쪽은 권(拳)을, 북쪽은 각(脚)을 주로 수련하지. 같은 권법이라도 남쪽으로 가면 권이 위주가 되고 북쪽으로 가면 각법 위주가 돼.”

“남권북퇴(南拳北腿), 그 정도는 압니다.”

모진아가 입을 열었다.

그의 침묵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럴 줄 알았지만.

“우리가 남권북퇴가 되는 거야. 모진아는 북퇴가 돼. 나는 남권이 되지.”

“저야 구연진해가 있으니 북퇴가 돼도 상관없지만 주공께서는… 남권이라 불릴 만한 무공이 없잖습니까?”

“금종수가 있다는 걸 잊었나?”

“금종수는……”

‘초식이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하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비무했을 때의 광경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종리추는 구연진해를 펼치면서도 권법을 사용했다. 종류를 알 수 없는 전혀 낯선.

‘주공이라면… 쯧! 물은 내가 바보지.’

모진아의 생각을 알고 있다는 듯 종리추가 말했다.

“모진아, 바보지?”

동창부에 접어들자 병장기를 지닌 무림인들의 숫자가 급격하게 불어났다.

산동 무림인들은 모두 모인 것 같았다.

무림인들은 비무 대회라도 열린 것처럼 눈에 살기를 띠고 거리를 휩쓸며 다녔다.

“대단하군요.”

벙어리가 되라고 그렇게 당부했는데도 모진아는 입을 열고 말았다. 많은 무림인들이 모였을 거라는 생각을 했으면서도 막상 눈으로 수많은 무림인들을 보게 되자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온 말이다.

“휴우! 안 되겠군. 아무래도 벙어리가 되라는 건 무리일 것 같아.”

“잘 생각하셨습니다. 멀쩡한 입을 놔두고 왜 말을 안 합니까?”

“으이구!”

“이렇게 하죠. 중원인이지만 천축(天竺)에서 자랐다… 어떻습니까? 괜찮지 않습니까? 어차피 제 무공도 중원에서는 낯선 무공일 테니 어디서 자랐든 무슨 상관 있습니까? 천축의 고수가 강호에 초행(初行)을 했다. 괜찮죠?”

모진아는 벙어리가 되라는 말을 들은 다음부터 말을 할 수 있는 동기만 찾은 사람처럼 술술 말했다.

“……”

종리추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예전 살문 문주로 돌아갔다. 전처럼 무심한 표정이 아니라 훈훈한 미소를 입가에 매달고 있지만 숨을 쉬면서도 경계를 하는 예전의 모습이다.

‘가급적이면 무림인들과 부딪치지 말아야 해. 그들과 말을 나눌 이유도 없고 시비가 붙어도 피해야 한다. 가급적이면.’

그러나… 세상 일이 생각대로 돌아가던가.

“무인 같은데 어디 사는 뉘시오?”

말을 걸어온 걸개의 몸에서는 쉰 냄새가 풀풀 풍겼다.

쇠똥 밭에서 뒹굴다 온 것 같기도 하고 술 취한 사람의 토악질을 온몸으로 받아낸 사람 같기도 했다.

“삼결… 개방의 거야 분타주 되시는군요.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듣자 하니 혈영신마라는 자에게 십망을 선포하셨다는데 무림 동도의 한 사람으로 간과할 수 없어 이렇게 달려왔습니다.”

종리추는 정중히 포권지례를 취하며 말했다.

그의 태도에서는 개방을 존경하는 모습이, 거야 분타주를 존중하는 모습이 역력히 보였다.

걸개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너무 빠른 순간에 떠올랐다 사라진 눈빛이라 포착하기가 힘들었지만 종리추의 눈썰미를 피해가지는 못했다.

“어디 사는 뉘시오?”

개방 삼결제자는 아까의 질문을 되풀이했다. 그의 가늘게 뜬 눈은 모진아를 샅샅이 훑어내리고 있었다.

무림인들의 신경은 날카롭게 곤두섰다.

혈영신마로 말하자면 십망을 선포하여 공동으로 협격(挾擊)할 만큼 무공이 뛰어난 자다. 그런 자는 약간의 틈만 보여도 도주할 우려가 높다.

무인들이 신경을 곤두세우는 부분은 방조자(傍助者)다.

현재까지는 독 안에 갇힌 쥐와 마찬가지인 신세지만 방조자가 나타나면 어느 구석이 뚫릴지 모른다.

혈영신마 십망을 주도하고 있는 무당파의 현학 도장이나 이번 십망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구파일방의 무인들로서는 낯선 무인의 등장이 달가울 리 없다.

종리추와 모진아는 완전히 생소한 자들이었다.

종리추는 모진아를 힐끔 쳐다보았지만 그는 벙어리인 양 입을 다물고 있다. 걸개의 몸에서 풍기는 쉰 냄새에 연신 코만 실룩이면서. 종리추에게는 천축이니 어쩌니 너스레를 떨었지만 종리추가 시킨 일을 항명할 모진아는 아니었다.

‘정말 못 말릴 사람이군.’

“과산(果山)에서 온 이용헌(李湧軒)이라고 하오. 이분은 사형 되시는 장무(張茂)라고 합니다. 벙어리라 말을 할 수 없습니다.”

걸개의 눈이 다시 반짝 빛났다.

“과산이라면 거야에서 이백여 리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인데 댁들 같은 사람이 있다는 말은……”

“무공에 자신이 없어 무림에 나온 적이 없으니 모르실 겁니다. 무공이래야 겨우 호신지공(護身之功)에 불과해서……”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으니……”

“도움이 되지 않을 줄은 알지만 구경이라도 하고 싶어서 들렀습니다. 안목도 넓힐 겸.”

종리추와 모진아는 중후한 중년인이었으나 세상 물정 모르고 촌에 묻혀 사는 촌사람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안목을 넓히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괜한 일에 끼어들지 마시오. 그리고 일금(一禁) 지역에는 절대 들어가지 말고.”

“일금이라뇨?”

“그런 게 있소. 무조건 일금이라는 소리만 들으면 발길을 돌리시오. 불상사 당하고 싶지 않으면.”

종리추와 모진아는 거야 분타주의 심문을 쉽게 벗어났다.

종리추나 모진아의 모습을 본 사람이면 혈영신마의 방조자라고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워낙 투박하고 순진해 보였다.

거야 분타주는 종리추와 모진아의 모습이 멀어지자 명을 내렸다.

“지금 바로 전서를 보내. 과산에 이용헌과 장무라는 자가 있는지 알아봐. 보고는 내게 직접 해.”

거야 분타주를 따르던 이결제자가 황급히 신형을 날려 사라졌다.

“너희 넷은 저 두 사람을 뒤쫓아. 조금이라도 수상한 기미가 보이면 달려들 생각 말고 연락을 해. 절대 달려들지 마. 혈영신마를 도우러 온 놈들이라면 보통내기가 아닐 테니까.”

‘달려들어도 상관없겠지만.’

거야 분타주는 두 사람을 경시했다.

두 사람에게서는 절대 강자가 내뿜는 강인한 기운 같은 것은 솜털까지 곤두세워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공이 어느 정도 틀에 올라와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태양혈(太陽穴)이 불쑥 솟아 있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무공을 익힌 무인인 것만은 틀림없는데… 강한 자들은 아니다.

그날 저녁 거야 분타주는 개방 문도가 보내온 전서구를 받았다.

이결제자는 그의 특명대로 전통을 열어볼 생각도 하지 않고 전서구째 가져왔다.

분타주 전(前).

장무, 이용헌 실존. 무명(武名)은 북퇴, 남권, 천수독각(千手毒脚) 구정광(丘正洸)의 전인(傳人). 천수독각은 이 년 전 살문 살수에게 피살당함. 장무는 벙어리임.

“음… 돌아오라고 해. 미행할 필요 없어.”

거야 분타주는 자신이 너무 예민했다고 생각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알아보지도 않았을 텐데. 무공이 그렇게 뛰어나 보이지도 않은 자들을.

‘북퇴, 남권? 남권북퇴? 흐흐! 겨우 천수독각의 무공 정도로 남권북퇴를 칭하다니. 이번 혈전을 보면 완전히 쥐구멍 속으로 숨어들 자들이군. 아쉽게 됐어. 무림에서 남권북퇴가 사라지다니.’

거야 분타주는 웃음이 실실 새어 나왔다.

그도, 과산에서 두 사람을 탐문한 걸개도 장무와 이용헌이 천수독각의 죽음과 함께 세상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종리추의 면구술은 날로 발전해서 지금은 적지인살도 따르지 못할 정도였다. 적지인살은 인피를 벗기더라도 원형 그대로 복원시킬 수 없지만 종리추는 인피 소유자의 얼굴을 그대로 복원해 냈다. 얼굴이 너무 작거나 너무 큰 특이한 얼굴형만 아니라면.

거야 분타주가 말한 일금(一禁)은 쉽게 찾았다.

동하를 벗어나 하진(河津)으로 방향을 잡고 걷다 보면 높이 이백여 장쯤 되는 산이 나타난다.

물이 없고 척박하여 이름도 붙어 있지 않은 야산이다.

촌로(村老)가 땔감이나 밸 목적으로 찾는 게 아니라면서 사람 발길이 끊어졌을 야산이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무인들이 이름없는 야산을 겹겹이 에워쌌다.

야산 주변은 무인들로 발 디딜 틈도 없이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뤘다.

구경 삼아 찾은 무인들은 야산 주변에 다가서지도 못했다.

야산에 다가갈 수 있는 무인들은 산동 무림에서도 무공이 높기로 정평이 난 사람들이었다. 일문의 문주, 혹은 일문의 절기를 십성 깨우쳤다는 고수들… 그들이 야산을 포위했다.

그러나 그들도 야산에 발을 들여놓지는 못했다.

‘개죽음당할 필요 없으니 여기 지켜 서 있다가 놈이 뛰쳐나오면 잠시 시간이나 벌어줘.’

어찌 들으면 모욕이 될 수도 있는 말이지만 감수해야 했다.

야산에 들어선 무인들은 그들도 인정하는 진정한 고수들이다. 소위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안다는, 자신의 무공에 각별한 자신을 갖고 있는 고수들이다.

‘어렵겠군.’

종리추는 이 정도로 포위망이 좁혀졌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는 자신이 십망에 쫓길 것을 생각했고, 어느 정도 융통성이 있을 줄 알았지 이처럼 막다른 궁지에 몰려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혈영신마는 십망이 선포되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피하지 않았어. 피하고자 했으면 피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는 도주하는 대신 천하무림인을 상대로 싸움을 시작했어.’

종리추가 여기까지 온 이유였다.

십망을 선포받고 쫓긴 사람은 많지만 천하 무림인과 정면으로 부딪친 사람은 혈영신마가 최초였다. 그는 도망다니다 어쩔 수 없이 부딪친 것이 아니라 도전해 오는 자는 얼마든지 받아주겠다는 배포였다.

그런 행동을 내리게 된 데는 누구와 싸워도 이길 수 있다는 확고한 자신감이 밑바탕에 깔려 있으리라.

그는 도주할 생각이 없다. 여기서 싸울 만큼 싸우다가 죽을 생각이다. 아마도 이 장소 역시 그가 선택한 장소가 아닐까?

동하에 있다는 보고를 받은 지 며칠이 지났건만 아직까지 여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도주할 생각이었다면 싸움이라도 있어야 했다.

그런데 싸움도 없다.

무림인들 역시 포위만 하고 있을 뿐 달려들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고양이가 쥐를 쫓을 적에도 도망갈 길을 열어놓고 쫓는 법이다. 막다른 궁지에 몰리면 이판사판으로 달려들 것이 뻔하기에.

혈영신마는 달려드는 자는 누구든 할퀼 기세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자초했다.

‘혈영신마… 도대체 어떤 자인가.’

종리추는 천부에 있을 때부터 이런 상황을 직감했다.

거야 분타 무인들이 남왕호로 집결하고 있다는 전서를 읽었을 때는 죽음의 냄새를 확실히 맡았다.

그의 기억에 의하면 십망을 펼친 무인들은 움직임이 전광석화 같다. 쉴 새 없이 전서가 오가고 마두를 사지로 몰아넣기 위해 분주히 움직인다.

개방 거야 분타 무인들은 남왕호로 집결했다.

벽리군은 흘려 버렸지만 그전에도 이런 징조가 있었다.

산동 무림인들의 은밀한 움직임이 그것이다.

학문권(鶴雯拳)의 창시자인 운학권왕(雲鶴拳王)이 평양(平陽)으로 출타했다. 싸워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는 탈명신도(奪命神刀)가 양곡 객잔에 모습을 드러냈다.

거야 분타 무인들의 움직임이 있기 이전에 많은 무인들이 움직였다.

그리고 그들은 한 점 동하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평양은 동하에서 동남쪽으로 이백여 리 떨어진 도읍이며 양곡은 서남으로 백오십 리 밖이다.

혈영신마는 움직이지 않고 있다.

그는 기다리고 있다. 자신이 죽을 날과 시간을.

종리추가 달려온 것은 그것 때문이다.

그런 자라면 한번쯤 만나볼 가치가 있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기다리고 있어. 급히 싸울 필요가 없는 게지. 갈기가 곤두선 늑대를 몰아붙이는 것보다 투지가 꺾여 손쉽게 제압할 수 있을 때는 기다리는 거야. 혈영신마의 무공을 연구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혈영신마는 오래 버티지 못해. 이렇게 척박한 야산이라면 그가 아무리 준비를 많이 했어도……’

그동안만 해도 많은 시간이 흘렀다.

종리추는 옷깃을 잡아당기는 모진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모진아가 고갯짓을 했다.

그가 고갯짓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야산 정상에서 십여 장 밑으로 붉은 홍기(紅旗)가 보였다.

홍기는 색깔이 무척 진하다.

밝은 홍색이 아니라 칙칙한 갈색에 가까운 홍기다.

불안한 기운이 엄습했다.

혈영신마는 사람 피로 혈기를 만들었다. 혈기 끝에 걸린 둥그스름하고 뭉툭한 것은 사람 머리가 틀림없다.

그는 정말 피를 그리워하는 마인(魔人)인가.

혈기를 본 무림인들은 광분했다.

‘저건 인간이 아냐. 저런 놈은 반드시 죽여야 돼.’

‘사람이 아냐. 혈귀(血鬼)야. 저런 인간을 낳고도 미역국을 쳐 먹었겠지?’

‘죽일 놈! 저놈 목은 내가 벤다.’

분노한 군웅(群雄)들.

혈영신마는 일부러 군웅들을 자극하고 있다. 마치 죽이고 싶으면 얼마든지 죽여봐라 하고 약 올리는 듯하다.

‘살기는 틀렸어.’

종리추는 야산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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