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111화
천전흥은 침착했다.
종리추, 모진아, 혈영신마… 하나같이 무서운 강호들인데 그런 사람들 앞에서 등까지 보이며 검을 찾아 손에 들었다.
“술잔이 비었으니 남을 사람은 남고 갈 사람은 가야겠지. 살문주, 살문주는 잘못된 길을 걷고 있어. 그냥 천부에 눌러앉았다면 아무런 해도 없었을 텐데.”
모진아가 사태를 짐작하고 도로 주저앉았다.
그는 침통해 보였다.
“살문주나 혈영신마나… 모두 돌아가지 못해. 살문주, 알아? 병기를 구하겠다고 무림에 나간 사람들… 지금쯤 모두 고혼(孤魂)이 되어 저승을 떠돌고 있을 거야.”
모진아의 양손이 부르르 떨렸다.
그는 싸움에 관한 한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경험을 가졌다.
중원에서는 백전노장(百戰老將)이란 말을 잘 사용하는데 정작 그 소리를 들을 사람은 모진아였다.
그의 판단에는 천전흥의 말이 옳다.
앞에서 날아오는 검날은 막을 수 있어도 뒤에서 찔러대는 비수는 막지 못한다. 외부가 아니라 내부의 적이다. 간세가 있어 적과 내통한다면 백전백패(百戰百敗)다.
유구, 유회……
그들도 무림에 나가 있다.
천전흥의 말대로라면 그들 역시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종리추가 옅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병기는 얻을 거야. 우리도 무사히 돌아갈 거고. 사실 혈영신마를 구하겠다는 생각은 자네가 없었으면 하지 못했지. 큰 모험이기에 확실한 게 필요했어. 그게 자네지.”
“……?”
“이상하지 않나? 지금에 와서야 이런 말을 하다니 말이야. 왜냐하면 이제는 돌아가야 할 때거든.”
천전흥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종리추는 알고 있었다.
살문에 있을 때부터 천전흥의 존재를 알았다. 그러면서도 태연히 속아주었다. 속아주기뿐인가? 살문이 멸문할 때는 마지막 구명줄을 그에게 맡기기도 했다.
그렇다면… 모든 게 백지로 변했다. 종리추가 생각했던 대로 살문의 수하들은 병장기를 얻을 것이다. 매복이 있다 해도 알고 빼앗으려 드는 사람은 당할 도리가 없다. 아마도 매복에 대한 대처도 철두철미하게 해놨을 게다.
안산에 배를 준비해 놔라, 어촌에 마차를 준비해라… 모두 거짓이다. 중원 무림은 안산을 비롯해 독산호, 소양호, 어촌 등에 개미 새끼 한 마리 빠져나가지 못할 엄밀한 막을 형성하겠지만… 앞으로 종리추가 어디로 갈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자신 잘못이다. 자신이 종리추에게 살 길을 열어주었다.
“살문주… 무서운 사람이군.”
“아니, 가여운 사람이지. 살려고 발버둥 치는.”
움막을 나온 두 사람은 검을 겨눴다.
자광이 붉은 노을처럼 은은하게 번져 나는 적룡검과 불가 무공을 익힌 사람답지 않게 새파란 살기로 번뜩이는 청강장검.
쉬익!
천전흥이 먼저 신형을 띄웠다.
청강장검에서 터져 나는 새파란 청광이 허공을 반으로 베어냈다.
츄우악……!
검기는 곧장 짓쳐와 종리추의 허리를 양단해 버릴 듯했다.
종리추는 뒤로 물러섰다.
베어오는 검은 물러서면 그만이다. 거리를 벌리면 어떤 공격이라도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다. 찔러오는 공격은 옆으로 피하면 된다. 문제는 속도와 제일검 다음에 이어질 변화다.
츄우우욱……!
천전흥의 장검은 채찍질을 당하는 적토마처럼 힘차게 달려왔다. 종리추가 한 걸음 물러서면 한 걸음만큼, 두 걸음 물러서면 두 걸음만큼……
그의 두 발이 현란하게 움직였다. 도망가는 적을 쫓아오는 신법이다. 검에는 눈이 달려 쫓아오고 발은 종리추의 발과 끈으로 묶여 있는 것 같다.
물러서고 쫓기를 무려 이 장.
천전흥은 똑같은 검식(劍式)을 열두 번이나 펼쳤다. 그러던 어느 한순간.
쉬이익……!
허공으로 솟구친 종리추가 천전흥의 머리를 뛰어넘어 반대쪽으로 떨어져 내렸다.
천전흥이 검을 위로 추켜 올렸다면 꼼짝없이 당했을 도박성이 짙은 행동이었다. 하지만 천전흥은 그러지 못했다. 그는 열세 번째 초식을 막 전개하려던 순간이었고, 종리추의 급작스러운 행동은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다.
‘이런 비상식적인!’
후회해도 늦다. 종리추는 검도 마주치지 않은 상태에서 달마삼검 중 일검을 피해냈다.
‘왜……?’
모진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종리추는 왜 검으로 막지 않고 물러선 것일까? 머리를 뛰어넘으면서… 난화각을 펼치면 머리를 날릴 수 있는데 왜 펼치지 않았을까?
달마삼검이 어떤 검인지 지켜보겠다는 심산인가? 아니다.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다. 독주를 구한답시고 밖으로 나간 천전흥은 이미 연락을 취했을 게고 연락을 받은 무림 고수들이 달려오고 있다.
그들과 싸울 생각이라면 모를까 피할 생각이라면 시간이 없다.
‘왜……?’
모진아는 이해하지 못했다.
츄뤼릭……!
천전흥은 똑같은 검식을 다시 전개했다.
검을 옆으로 뉘이고 곧장 달려오는 기세. 물러서지 않고 맞부딪치려 한다면 단숨에 허리를 갈라 버릴 기세다.
쉬익!
종리추는 다시 허공으로 솟구쳤다. 하지만.
슈아악……!
천전흥의 검이 비스듬히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허공에 떠 있는 종리추를 향해 곧장 베어가는 검이 아니라 움직일 방위를 없애 버리는 검식이다.
종리추의 신형이 갑자기 무거운 추를 달아놓은 것처럼 뚝 떨어져 내렸다.
불가 무학 중 하나인 천근추(千斤墜) 수법이 종리추의 몸에서 재현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천근추는 아니다. 종리추가 전개한 천근추는 진기를 양발에 집중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슈우욱……!
천전흥의 검기가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천전흥의 신형은 위로 솟구치는 장검을 쫓아 마치 연에 이끌려 허공에 떠오르는 사람처럼 둥실 떠오른 상태였다.
천전흥의 눈가에 놀란 빛이 어렸다.
천전흥은 허공에서 몸을 뒤집었다. 검세도 거뒀다. 발이 땅에 닿으려는 찰나 종리추의 신형을 확실히 포착한 후 다시 달려들었다. 청강장검은 달마삼검 중 제일식을 펼쳐 냈다.
츄우욱……!
천전흥은 빠른 신법으로 피할 수 있는 모든 방위를 차단했다. 천전흥의 공격을 받으면 피해 봤자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그의 신법은 단순한 것 같으면서도 피할 방위를 허락하지 않는다.
하기는 어쩌면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무서운지도……
이번 검식의 시작은 달마삼검 제일식이었으나 중도에서 검세가 변했다.
검을 휘두르는 데는 네 가지 방법이 있다.
횡(橫)으로, 종(縱)으로, 사선(斜線)으로, 원(圓)으로.
청강장검은 원을 사용했다.
검끝이 미미하게 흔들리는 정도의 작은 원에서 시작하여 점점 크게 선을 그려 나갔다.
공격을 받는 종리추의 입장에서는 피할 방위도 잃었고, 신형을 허공으로 띄울 수도 없게 되었다.
마지막 방법은 오직 검을 부딪치는 것뿐이다.
천전흥은 철저하게 검이 부딪치는 것을 원하고 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의 검세가 그런 방향으로 유도하고 있다.
쉬이익……!
드디어 적룡검이 허공을 갈랐다.
놀라운 절학을 뿜어내는 것이 아니라 단순하게 위에서 아래로 내려치는 천지양단(天地兩斷)의 검초였다.
검과 검이 부딪치지 않을 수 없다.
캉! 까가강……!
단순하고 느리게만 보이던 검초들이 현란하게 작렬했다.
종리추와 천전흥은 단 한순간의 접촉에서 무려 십여 초의 검식을 주고받았다. 그러던 한순간.
“크윽!”
천전흥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의복은 검초에 휩쓸려 너덜거렸고, 머리에 둘러메고 있던 영웅건(英雄巾)도 잘라져 떨어졌다. 머리도 마구 헝클어져 산발한 귀신 형상이 되었다.
결정적으로 그는 피를 흘리고 있다.
얼굴에 비스듬히 그어진 혈선을 타고 핏방울이 한 방울, 두 방울 새어 나왔다. 그러다… 머리 한 귀퉁이가 스르륵 미끄러졌다.
피 분수가 솟구쳤다.
머리의 삼 할을 잃은 천전흥은 잠시 뒤뚱거리다 썩은 고목처럼 무너졌다.
쿵!
둔탁한 소리가 지축을 흔들었다.
모진아가 다가가 천전흥의 장검을 집어 들었다.
장검은 이미 장검으로서의 기능을 잃었다. 날카롭게 곤두섰던 검날이 마치 톱날처럼 이가 빠졌다.
모진아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종리추는 충격을 받은 듯 천전흥이 죽었어도 검을 집어넣지 않고 멍하니 서 있었다.
혈영신마가 눈을 빛내며 다가와 물었다.
“살문주라? 누군가 했더니 하남을 떨쳐 울리던 살문의 문주이셨군. 듣기로는 멸문당했다고 하던데 건재했었어. 그건 그렇고… 문주, 어찌 된 일이오? 지금 천전흥이 펼친 검초가 달마삼검이 맞다면, 그리고 내가 잘못 보지 않았다면… 나와 싸울 때 문주가 전개한 도초와 아주 흡사하던데?”
“……”
종리추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을 잃었다.
혈영신마의 말이 맞다.
종리추가 혈영신마와 싸울 때 펼쳤던 도초는 달마삼검 제이초식이다. 아니다. 그는 달마삼검을 수련한 적도 없고 몸으로 견식한 것도 처음이니 달마삼검이라고 할 수 없다. 그때의 도초는 종리추가 창안한 도초다.
그렇지만… 너무 똑같다.
어떻게 이리 똑같을 수 있을까?
혈영신마와 모진아는 종리추의 내심을 추측조차 할 수 없지만 그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하게 고민했다.
천전흥이 펼친 제일초… 그것은 자신이 창안한 도법의 제일초였다.
제이초 역시 자신의 도초와 똑같았다.
제삼초는 약간 달랐다. 달마삼검은 원을 그렸지만 종리추는 사선을 생각했다. 원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사선은 시작점에서 변화를 일으키면 되고 원은 끊임없이 검초를 전개해야 한다.
자신이 제삼초를 펼칠 경우 신법은 적이 움직일 수 있는 모든 행동 반경을 차단하지만 도는 비스듬히 하늘로 솟구친 채 움직이지 않는다.
도가 움직일 경우는 상대가 움직였을 때다. 상대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따라가는 도초다.
상대보다 더욱 빠르게 도초를 전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을 때 전개할 수 있는 도법이다.
반면에 달마삼검은 원을 그린다. 끊임없이 원을 그리며 상대로 하여금 병장기를 부딪쳐 올 수밖에 없게끔 만든다. 상대가 병장기를 움직여 오는 순간 검초는 변한다.
역시 상대보다 빠르게 검초를 전개할 자신이 있어야 한다.
달마삼검은 무서운 쾌검이다.
종리추는 그런 연유로 공격하지 않았다. 제일초를 보고 깜짝 놀라 제이초, 제삼초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천전흥이 패하고 종리추가 이긴 것은 종리추의 검이 더 빨랐기 때문이다. 천전흥은 청강장검에 전신의 진기를 모두 쏟아부어 서른 근 철봉도 반으로 갈라 버릴 괴력을 실었지만 종리추의 내력이 더 강했다.
내력, 속도… 모두 빨랐다.
하지만… 천전흥을 이겼다고 백천의를 이긴다는 보장은 없다. 소림 장문인은 더욱 그렇다. 달마삼검을 이긴 게 아니다. 천전흥을 이긴 것뿐이다.
‘달마삼검은 달마십삼검을 익힌 후에 수련하지. 결국 검을 전개하는 데 십삼 초식까지 필요 없다는 거야. 단 삼 초식에 모든 변화를 담은 이상……’
종리추는 이번 싸움에서 몇 가지 배운 게 있다.
모든 무공은 하나로 통한다.
말로야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종리추는 몸으로 깨달았다. 불가의 무공이든, 도가의 무공이든, 속가의 무공이든… 모든 무공은 하나로 귀일(歸一)한다.
초식이 똑같다고 이상할 게 없다.
인간의 움직임은 태초부터 똑같았다. 그러던 것이 경력을 싣는 과정에서 좀 더 폭발적인 움직임을 싣기 위해 색다른 움직임이 나왔다. 곧장 주먹을 내지르는 것보다 주먹을 뒤로 뺐다가 내지르는 것이 더 강한 타격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몸속에 진기가 흐른다는 것을 알게 된 다음에는 움직임이 더욱 복잡해졌다.
문파가 생기고 무공의 종류도 다양해졌다.
하지만 궁극에 다다르면 본연의 인간으로 돌아간다.
단순한 움직임 속에 세상의 변화와 힘이 실려 있다. 그리고 단순함은 같을 수도 있다.
그것보다 더욱 중요하고 실전적인 깨달음이 있다.
달마삼검이나 자신이 창안한 도법이나 모두 기다리는 무공이다. 상대가 움직인 다음에야 전개할 수 있는 무공이다. 천전흥처럼 선공을 가해 상대를 압박할 수도 있지만 자신도 혈영신마와 싸울 적에는 공격적으로 운용했지만… 근본은 기다리는 무공이다.
천전흥이 십여 초 만에 머리가 잘린 것은 속도와 내력에서 뒤진 탓도 있지만 먼저 공격했기 때문이다. 사실 검을 부딪친 후 천전흥은 밀리기만 하다가 당했다.
초식대로라면 그렇지 않다. 전신에서 끌어올린 진기가 병기에 집중되어 거대한 응축력을 지닌다. 신형의 움직임을 따라 호선(弧線)을 그리며 뻗어 나가면서 더욱 강한 경력을 담게 된다.
병장기와 부딪칠 때는 상대하지 못할 괴력으로 변해 있어 마주치는 모든 물질을 잘라 버린다.
천전흥은 병기가 잘리지 않았다. 검에 막강한 괴력을 싣는 것은 성공했다. 하지만 그는 먼저 움직였기에 검에 담은 괴력이 미약하게나마 흘러나갔다.
결정적인 패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조금 더 버텼을지도 모른다.
‘싸워서 이기려고 익히는 것이 무공이다. 굴복시키든 죽이든 싸웠으면 이겨야 한다. 그러나… 될 수 있으면 싸우지 않는 무공, 그것이 달마삼검이다.’
종리추는 벽안(碧眼)의 승려 달마의 체취를 느꼈다.
그의 사상, 그의 무공… 그의 설법(說法)이 귓전에 맴돌았다.
안산은 포구(浦口)이다.
포구 중에서도 제법 이름이 나 각종 어물과 연관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상인들에게는 일확천금(一攫千金)을 거머쥘 수 있는 놓칠 수 없는 땅이며 독산호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들에게는 생계를 유지시켜 주는 곳이다.
안산에서 거래되는 어물의 양이 산동성 전체 거래량의 삼 할에 육박한다고 하니 얼마나 활발한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고 모두 다 잘 사는 것은 아니다.
주체하지 못할 만큼 많은 돈을 거머쥔 자도 있고 하루 세끼 걱정 없이 사는 사람도 있지만 하루 종일 고된 일을 하고도 식솔들의 끼니 걱정에 주름살만 깊어가는 사람들도 있다.
벽상촌(壁上村) 사람들이 그랬다.
벽상촌 사람들은 안산에서도 알아줄 만큼 빈곤하다.
외지에서 흘러 들어온 떠돌이가 가장 먼저 자리를 잡는 곳도 벽상촌이며 싼값에 허드렛일을 할 사람을 찾기 위해 제일 먼저 발걸음을 옮기는 곳도 벽상촌이다.
벽상촌에 개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개미들은 부산하게 움직인다. 하지만 움직이는 소리는 귀를 기울여도 들을 수 없다.
벽상촌에 모여드는 개미들은 은밀하고 신속했으며 일사불란하면서도 살기로 번뜩였다.
벽상촌은 독산호 호반에 위치했다.
앞으로는 바다처럼 넓은 독산호가 탁 트여 있고, 마을 왼쪽으로는 어린아이도 한달음에 올라갈 수 있는 바위 산이, 뒤쪽으로는 바위 산보다는 조금 높지만 야트막하다는 표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야산이 버티고 있다.
벽상촌 주민들, 그리고 벽상촌에 볼일이 있는 사람들은 마을 오른쪽에 나 있는 길을 통해 드나든다.
개미들은 편한 길을 마다하고 야산을 넘었다.
너무 가난해서 궁기(窮氣)가 자르르 흐르는 마을이지만 가구 수는 많아서 무려 이백여 호의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개미들은 마을 외곽을 포위하고 그중 일부는 안으로 들어섰다.
많은 집들을 지나쳤다.
그들은 목적한 곳이 있는 듯 일절 곁눈질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마을에서도 조금 떨어진 곳, 집이라고도 할 수도 없는 거지 소굴이나 다름없는 움막 앞에 이르자 은밀하기 이를 데 없던 개미들이 폭풍처럼 들이쳤다.
페에엑! 퍼억!
거세게 후려친 도기(刀氣)에 바람을 막아주던 거적떼기가 싹둑 잘려 나갔다. 하늘에서 바윗덩어리가 떨어진 듯 거센 굉음을 토해낸 철추는 움막의 기둥을 우지끈 부러뜨렸다.
개미들이 폭풍처럼 일어난 기세에 움막은 순식간에 초토화되었다.
“태상삼존(太上三尊), 태상삼존……”
현학 도인은 연신 태상삼존만 중얼거렸다.
그는 도호처럼 고고한 사람이 아니었다. 키는 작달막했고 수염은 산적처럼 거칠게 자랐으며 불쑥 튀어나온 배가 인심 좋은 복신(福神)을 연상시켰다.
그는 고리눈을 뜨고 얼굴이 갈라진 채 누워 있는 시신을 바라봤다.
시신은 잠자다가 죽은 듯이 편안해 보였다.
반듯하게 누워 양손을 배에 얹은 상태다. 머리 한쪽이 깨끗하게 잘려 나가지 않았다면 자연사했다고 생각해도 좋을 만큼 편안했다.
“태상삼존, 이 사람이 누군가?”
“제 동생입니다.”
움막에 들이쳤던 중인들이 시선이 일제히 한 청년에게 쏠렸다.
이목구비가 수려한 헌헌미장부가 중인들을 헤치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누구냐!”
미장부는 현학 도인의 일갈에도 주눅 들지 않고 스님들처럼 양손을 모아 합장했다.
“소림의 백천의라고 합니다.”
“백천의? 음… 소림의 속가제자 중에 사룡(四龍)이 있다더니 자네가 백천의였군.”
현학 도인은 길을 비켜주었다.
죽은 자가 백천의에게 어떤 존재인지는 모른다. 동생이라고 했으니… 친동생인지, 사촌동생인지, 의형제인지…… 두 가지 분명한 것은 죽은 자 덕분에 개방보다도 더욱 빠른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리추와 혈영신마를 놓쳤다는 사실이다.
죽은 줄 알았던 살문 문주가 되살아나 혈영신마를 구해갔으니… 하나도 골치 아픈데 둘이 함께 있으니……
‘범이 날개를 달았어. 태상천존, 태상천존……’
백천의는 죽은 자에게 다가가 얼굴을 쓰다듬었다.
백천흥, 죽은 자의 이름이다.
그가 천전흥으로 변해 종리추 곁에 머물다 죽임을 당했다. 이럴 수도 있었다. 백천흥이 살문에 잠입할 때부터 이런 경우가 생길 가능성은 농후했다.
백천흥의 얼굴은 깨끗했다.
우측 머리 위부터 이마를 지나 코와 왼쪽 눈 사이를 거쳐 볼에 이르는 혈선(血線)만 없다면 늘 보던 얼굴 그대로였다.
종리추는 잘려진 머리를 붙여놓았다.
피도 깨끗이 닦아놓고 일그러진 인상도 곧게 펴놓았다.
그는 죽은 자에게 최대한의 애도를 표하고 떠났다.
백천의는 종리추가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벗이 될 수도 있었으나 가는 길이 다르니 죽일 수밖에 없었다. 용서하라.”
종리추는 천전흥의 시신을 그런 마음으로 어루만졌으리라.
‘무인의 길을 걸었으니 이렇게 죽어도 여한은 없을 터… 못난 우형(愚兄)을 용서해라. 공화(孔嬅) 소저(小姐)가 보고 싶어서 어떻게 눈을 감았을까……’
백천의는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간신히 삼켰다.
동생에게는 정혼녀가 있다. 예쁘고 현숙하고, 지혜도 뛰어난 소저다. 둘은 태중 혼인이었으나 이 세상 누구보다도 서로를 사랑했다.
‘내가 너무 늦게 왔어. 늦게 오는 바람에 널 죽인 거야. 내가 널 죽였구나’
백천의는 자책했다.
종리추가 천부를 떠날 때 그는 소림사로 향했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그때부터 잘못됐다. 직접 가는 것이 아니라 전서로 소식을 전했더라면 닷새는 줄일 수 있었다. 황금 같은 닷새…… 그 차이가 종리추를 놓치고 동생을 죽게 만들었다.
두 번째 실수도 있다.
그는 자신이 종리추를 제거하려고 했다.
시간 계산도 했다.
소림사에서 벽상촌으로 달려올 시간과 종리추가 혈영신마를 구하고 달려오는 시간.
종리추는 너무 빨랐다. 무림 군웅들이라는 작자들이 너무 쉽게 당했다. 적어도 이틀은 걸리리라 보았던 구출이 하루 만에 끝나고 말았다.
근본적으로는 그러지 말았어야 한다. 자신은 물러서고 무당파 현학 도장에게 양보했어야 했다. 소림사에서 종리추를 제거할 수밖에 없다는 명을 받았을 때 곧바로 현학 도장에게 전서를 날렸더라면… 그랬다면 혈영신마도 놓치지 않았을 것이고 동생도 죽지 않았으리라.
세 번째 실수는 종리추를 너무 가볍게 보았다는 것이다. 아니, 백천흥이 감쪽같이 신분을 속였다고 생각했다. 완벽하게 살문 잠입에 성공했다고. 지난 일 년 동안 천부에 숨어 지내면서 온갖 수발을 들어주었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발각된 사실을 조금이라도 눈치챘다면 백천흥을 종리추와 만나게 하는 우행은 저지르지 않았으리라.
‘바보같이…… 종리추는 이미 알고 있었는데. 네 번째 실수는 하지 않을 거야. 세 번이면 족해. 종리추… 이제는 생사대적(生死大敵)이 되었구나. 너 아니면 나, 둘 중에 한 명은 제 명에 죽지 못할 거야. 약속하지.’
백천의는 이를 악물었다.
“시신을 고향으로 보내고 싶습니다.”
현학 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천의가 동생의 죽음을 애통해하고 있을 때 현학 도인은 바쁘게 명령을 내렸다.
“한 시진밖에 지나지 않았다. 경신술을 펼쳤다 해도 삼십 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사방 이백 리를 막아라. 개미 한 마리 빠져나갈 틈을 주지 마라.”
현학 도인의 명령은 당장 실행에 옮겨졌다.
개방 문도는 더욱 바쁘게 움직였다.
벽상촌 인근은 물론 벽상촌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모든 도읍으로 전서가 날았다.
하오문에도 연락을 취했다.
평소에는 발톱에 낀 때만큼도 여기지 않는 부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하오문에 속한 마방(馬房)에는 구파일방의 고수 중 한 명이 달려가 마차를 이용하는 모든 손님의 신상명세를 받고 있으리라.
배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도 감시의 대상이다.
누구든 배를 타고 호수나 강으로 나가는 사람은 낱낱이 조사되고 있으리라.
수로(水路)와 육로(陸路)의 모든 교통 수단은 차단된다.
종리추에게는 벽상촌에서 훔쳐 간 배 한 척밖에 없다.
천전흥은 소선을 마련하지 않았다. 어촌에 마련해 두라던 마차는 물론 마련할 필요가 없었다. 종리추는 벽상촌에서 제거될 것이었기에.
그리고 한 시진만 여유가 있었다면 틀림없이 그렇게 되었을 테고.
호수는 완전히 막혔다.
호수에 떠 있는 배들은 샅샅이 조사받고 있다. 배를 댈 만한 곳에는 무림인들이 진을 치고 있다. 벌써 뭍으로 도주했다 해도 상관없다. 사람을 단 한 명이라도 만나는 순간 종리추의 운명은 종지부를 찍게 된다.
현학 도인은 백천흥… 죽은 자의 품속에 부적(符籍)을 넣어주었다.
이마에도 붙이고 양발 바닥에도 붙였다.
“휴우! 천선(天仙), 지선(地仙), 비선(飛仙), 진인(眞人), 신인(神人)의 기사와 병사, 일월성신(日月星辰), 모든 궁(宮), 구궁(九宮), 삼하(三河), 사해(四海), 오악(五嶽), 사독(四瀆)의 병사와 기사 구십 억이여! 이 재를 지키러……”
현학 도인은 죽은 자를 위해 도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
그는 죽어서도 영광일 것이다. 약제(藥祭)이기는 하지만 무당파의 장로가 직접 제를 올려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