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117화
암울한 절망이 밀려들었다.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빠져나갈 구멍은 보이지 않았다. 뒤는 깊고 험한 협곡이다. 그곳에는 아직도 뜨거운 피를 흘리고 있는 묵월광 살수들의 죽음이 찐득하게 묻어난다. 화살에 살을 갠 무인들의 눈초리도 살기로 번뜩인다.
‘물러서는 자, 화살이 용납지 않는다.’
그들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병가에 배수진이라고 있지만 그것도 싸울 기력이 있을 때나 사용되는 말이다. 지금처럼 힘의 균형이 철저하게 무너진 상태에서는 배수진이라는 말이 통용되지 않는다. 고양이가 쥐를 몰 경우에도 살 길은 터놓고 몬다고 했다. 쥐라도 막다른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에게 덤벼들기 때문이다.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이라면 하찮은 미물일지라도 살기 위해 악착같이 발버둥 친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경우에는 살려고 발버둥 쳐봤자 죽음만 더욱 힘들어질 뿐이다.
수적으로 너무 차이가 난다. 물 반, 고기 반이라는 말이 있지만 눈앞의 현실이야말로 수림 반, 인간 반이다. 천천히, 천천히 수를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무인이 서둘지 않고 움직인다.
‘결사–.’
묵월광 살수들은 똑같은 생각을 했다. 무림으로부터 버림받은 살수들의 운명이 어떻던가. 죽어서 땅속에 묻히면 그나마 다행이다. 인적이 끊긴 외진 곳에 드러누워 살이 썩고 뼈가 문드러지는 것이 보통이다. 비바람을 고스란히 맞으며 지나가는 동물들에게, 무수한 개미 떼, 구더기에게 살점을 내주며.
“퉤!”
살아남은 십이사령 중 한 명이 손에 침을 뱉고 도를 고쳐 잡았다. 그의 얼굴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찾을 수 없었다. 두 눈이 이글이글 타올라 한 명이라도 더 죽이고 죽겠다는 치열한 의지가 엿보였다.
사령주 적사가 말했다. “축혼팔도는 죽음의 도학이다. 오늘 마음껏 죽음의 춤을 추어라. 죽기 전에 축혼팔도를 남김없이 펼치도록 해라.” 그는 말하고 있다. 일도에 한 명씩, 적어도 여덟 명은 죽이고 죽으라고.
십이사령의 눈가에 단호한 결의가 맺혔다. 화령주 소여은은 생긋 웃었다.
“모두들 몸에 무기 같은 것 가지고 있으면 버려. 쇠붙이란 쇠붙이는 모두 버려. 비녀, 노리개…. 흉기가 될 만한 장신구도 모두 버려.”
소여은의 명령은 뜻밖이었다. 그녀의 이런 돌연한 명령은 적사는 물론 소고까지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었다.
“너희는 암습을 배웠지 무공을 배운 게 아냐. 저들은 무인이야. 정면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저들이 죽이려고 마음먹었으니 죽을 수밖에 없겠지. 할 수 없어. 죽어야지. 그러나 죽을 때 죽더라도 화령 살수들답게 웃으면서 죽어. 살려달라고 비명 지르지 말고 죽는 순간까지도 품위를 잃지 마.”
적사의 인상이 가늘게 찌푸려졌다. 화령주 소여은이 말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무공이래야 이제 갓 검을 잡은 수준에 불과하니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악착같은 근성이라도 보여줘야 하지 않겠는가. 묵월광 살수들은 과연 독했다는 인상만이라도 강하게 심어 주려면, 아니, 잠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식은땀을 흘리게 만들려면.
화령 살수 아홉 명이 몸에 지니고 있던 병장기를 풀었다. 그녀들은 소여은을 따라서 웃음 지었다. 어떤 여인은 가늘게 웃음을 머금은 정도였고 어떤 여인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적사는 여자의 웃음에는 종류가 많다는 것을 배웠다. 소여은의 웃음은 어떤 웃음인가? 그녀의 웃음에는 처량함이 깃들어 있다. 그녀의 웃음을 접하면 알지 못할 우울함이 깃들게 된다. 감싸 안아주고 싶고, 그녀의 마음속에 있는 고민을 풀어주고 싶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하고 싶어진다.
소여은은 참 많이 변했다. 어렸을 때는 너무 어렸으니 그렇다 치고 삼이도에서 봤을 때만 해도 이렇지 않았다. 아름다움 속에 성난 암코양이 같은 표독함이 엿보였다. 그게 소여은의 매력이기도 했다. 적사는 소여은의 매력을 한눈에 알아봤다. 그녀는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세상 천지가 드넓다지만 마음을 줄 수 있는 친구 한 명 없고 잠을 자면서도 몸에서 검을 떼어놓지 않아야 하는 고독한 사람. 소여은이 적사 자신과 다른 점이 있다면 자란 환경이다. 적사 자신은 내만족에 들어가 차분하게 무공을 익혔다. 그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마음껏 무공을 익혔고 축혼팔도의 난폭함을 흠씬 받아들였다. 하나 소여은은 눈치를 보며 살았다. 어산적들 틈에서 몸 하나 간수하기에도 전전긍긍했다. 명유마괴, 녹림마왕이라 불리는 자에게 무공을 전수받았지만 그녀의 삶에서 밝은 면을 찾기란 어렵다. 소여은은 성질을 부릴 수 없었다. 마음에 안 드는 일이라도 입을 꾹 다물고 행해야 했다. 그래야만 살 수 있다. 마음을 숨긴다. 환경에 동화한다. 이 두 가지가 소여은이 익힌 최대의 무공이리라.
삼이도에서만 해도 놀랄 만큼 날카롭고 강하던 기운이 흔적 없이 숨어버린 것도 몸에 붙은 습성 때문이다. 무공으로 소고에게 밀렸을 때부터 어산적과 생활했을 때처럼 강한 기운을 숨기고 자신을 보존하는 쪽으로 선회했다. 살수로 첫발을 내디디면서 산적들에게 백화현녀라는 별호를 얻을 정도로 손속에 사정을 둔 것은 그녀가 의식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기운을 잃었기 때문이다. 무림을 향해 맹렬하게 치달리던 마음이, 무림에만 나서면 이름을 날리고 당당하게 살 수 있다는 마음이 소고에게 막히면서 싸우고 싶은 의욕을 잃어버렸다.
적사는 소여은의 상태를 잘 파악했다. 그 역시 소여은과 같은 심적 고통을 겪었으니 그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을 게다. 소여은은 묵월광에서 자신의 위치를 굳혔다. 그것이 지금 모습이다. 소고를 친언니처럼 받들며 묵월광을 중원 제일의 살수 문파로 키우는 데 온 마음을 쏟아붓기로 작정했다. 자신이 사무령이 되지 못하는 대신 소고가 사무령이 될 수 있는 밑거름이 되기로 결심했다. 소여은이 사는 의미는 오직 그곳에 있다. 소여은이 웃는다. 사무령에 대한 꿈도, 묵월광을 키우고자 했던 의미도 모두 사라진 지금…. 웃는다.
‘죽으려는 거야. 무기를 버리라고? 무슨 속셈이 있는 거겠지. 분명한 것은 죽음을 각오했다는 것.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죽음이지만 아마도 적각녀…네가 가장 처참하게 죽을 것 같구나. 살아남은 무인들이 오늘 일을 되새길 때 다른 사람은 다 잊어도 너만은 기억하게 될 거야. 가장 잔인했던 여자로.’
적사는 소여은의 차분하고 쓸쓸한 웃음 속에서 자신보다도 더욱 강렬하게 타오르는 투지를 읽었다. 소여은이 불쌍하다거나 애처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 생각이 들 까닭도, 여유도 없었다.
‘살수로 태어났으니 어차피 곱게 죽지는 못했을 운명.’
적사는 도를 꽉 움켜잡았다.
해가 넘어가려면 아직도 한참 남았는데 사위는 어둑어둑해졌다. 짙은 산그늘이 엄청난 거인이 되어 절곡을 뒤덮었다. 저벅! 저벅……! 무인들이 내딛는 발걸음 소리가 귀신의 호곡성처럼 음산했다. 죽임을 당해야 하는 입장에서 보면 무인들의 모습이 좋게 보일 리 없다. 사방을 빼곡히 에워싸고 포위망을 좁혀오는 무인들의 모습은 염라지옥의 악귀와도 같았다.
“파쇄진!”
적사가 고함을 내지르자 십이사령이 일제히 움직여 적사의 등 뒤로 늘어섰다. 적사의 바로 뒤에 두 명, 두 명 뒤에 세 명, 세 명 뒤에 네 명, 네 명 뒤에 마지막 남은 세 명. 적사를 정점으로 화살촉과 같은 모습으로 진을 구성했다. 적사는 소고와 소여은을 보지 않았다. 두 여인들에게 굳이 남길 말이 없다. 그녀들 역시 오늘의 횡액을 벗어날 재주가 없으니 곧 뒤따라올 것이다. 뚜벅! 적사가 첫걸음을 떼어놓았다. 십이사령이 마치 한 몸이라도 된 듯 일제히 첫걸음을 내디뎠다.
파쇄진은 옥쇄를 각오한 진이다. 무인들의 싸움이 아니라 군인들의 싸움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진형이기도 하다. 돌진하여 뚫고 나가는 진이 아니다. 배수진처럼 생즉필사, 사즉필생의 묘를 얻고자 하는 진형도 아니다. 파쇄진이란 오로지 죽기 위한 진이다. 항복보다는 죽음을 택한 결사의 진이지만 한 명이라도 더 죽이고 죽겠다는 의지도 깃들어 있지 않다. 그들은 단지 싸울 뿐이고 순차적으로 죽어간다. 파쇄진의 진형대로라면 제일 먼저 죽는 사람은 적사가 된다. 그는 자신이 죽일 수 있는 능력껏 죽일 것이다. 한 명도 죽이지 못하고 죽는 불상사가 일어나도 아쉬울 것은 없다. 적을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죽어야 할 장소에서 죽을 방법으로 싸움을 택한 것뿐이니까. 그렇다고 무의미하게 죽는다는 말은 아니다.
적사가 명령한 대로 적사를 비롯한 십이사령은 지닌 바 무공을 십분 펼쳐 낼 것이다. 그동안 수련하고 가다듬은 축혼팔도가 마지막 폭발을 일으킬 게다.
소고는 적사를 제지하지 못했다. 무기를 버리는 소여은, 그리고 화령들에게도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아무것도 없었다.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무와 지혜를 세웠는데…. 사무령이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어. 난 만들어가는 것인 줄 알았는데,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사무령은 처음부터 사무령이어야 해. 만들어가는 게 아냐. 자금, 지혜, 무공….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어야 하고, 세 개가 어우러진 힘은 세상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절대적인 천력이어야 해. 출발부터 그런 상태가 아니면 사무령이 될 수 없어.’
사무령은 살수계의 전설이다. 하지만 사무령이 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 소고처럼 만들어가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중원 무림은 눈뜬장님이 아니다. 거대한 힘으로 자신들의 숨통을 조일지도 모르는 살수 집단의 성장을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으리라. 또한 그들의 이목을 속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도 잘못이다. 중원 무림이 판단하기에 묵월광은 위험 수위에 육박했다고 본 것이다. 그렇기에 종리추를 잡으라는 명령으로 숨통을 조이려던 게다. 종리추를 죽였어도…. 묵월광의 멸문은 정해진 이치였다. 중원 무림은 또 다른 꼬투리를 잡아 묵월광을 멸문으로 이끌었을 게다. 그들은 자신들 대신 손에 피를 묻혀줄 수족이 필요했지 살수 문파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소고는 이제야 살혼부와 살천문이 공존할 수 있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다른 성에는 살수 문파가 오직 한 문파밖에 없다. 현 하남 무림에도 묵월광 한 문파만이 존재한다. 묵월광이 쓰러지고 나면 또 다른 어떤 문파가 뒤를 잇겠지만.
종리추가 살문을 세우기 전까지는 살천문 하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는 살천문과 더불어 살혼부가 존재했다. 살천문에는 일류 고수를 소리 없이 죽여줄 특급 살수가 없었던 게다. 살혼부가 단 다섯 명에 불과하면서 살천문과 더불어 하남 무림에 적을 둘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하나같이 일류 고수를 죽일 수 있는 특급 살수였기 때문이다.
‘검이란 있어도 없는 것이요, 없어도 있는 것이다. 마음이 검이니 하늘인들 베지 못할까.’
살혼부 살수들은 무공이 화경지경에 접어들었다는 구지신검을 죽임으로써 자신들의 무공을 한껏 뽐냈다. 하지만 살천문은 살혼부를 공격할 수 없었다. 구파일방의 명이 없이는 그들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기에 공격하지 못했다. 그것뿐이다. 구파일방마저 특급 살수로 인정한 살혼부지만 뜻을 거스른 지금 어떻게 되었는가.
‘내 무공이라는 것… 내 계략이라는 것…. 모두 부처님 손바닥 안의 오공에 불과한 것이야.’
소고는 청면살수의 얼굴을 떠올렸다. 잔혹하게 사지를 잘린 한 서린 인간의 모습이 보였다. 소천나찰, 비원살수, 미안공자… 사숙들의 모습도 스쳐 갔다.
‘사무령은 되지 못했어도 사무령이 되고자 했던 사람답게 죽는 거야. 당당하게.’
소고는 검을 고쳐 잡았다. 순간 그녀는 눈을 부릅떴다.
소여은이 옷을 벗었다. 산그늘이 깔려 어둑해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한낮이 분명한데….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무인들이 살기에 번뜩인 눈으로 다가오는 면전에서 소록소록 옷을 벗어나갔다. 몇 겹 되지 않는 옷을 벗어 던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속살이 드러났다. 백옥처럼 맑고 수정처럼 투명해 보이는 속살은 차가운 산바람에 질린 듯 파르르 떠는 듯했다. 소여은은 계속 손을 놀렸다. 젖가리개가 풀어헤쳐지고 탐스러운 가슴이 뭇 사내들 앞에서 꼿꼿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녀의 고의는 빨간색이다. 빨간 고의마저 나풀나풀 떨어져 나가자 그녀는 세상에 태어난 모습 그대로 알몸이 되었다. 옷을 벗은 것은 소여은만이 아니다. 살아남은 화령 살수 아홉 명이 소여은을 따라 옷을 벗었다.
폭풍의 눈처럼 살기를 간직한 정적 속에 알몸의 여인들이 서 있는 모습은 기이하기 이를 데 없었다.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그녀들을 향해 다가오던 무인들이 주춤거렸다. 아무리 죽여야 할 여인들이지만 무기도 버리고 알몸 상태로 서 있는 여인들에게 다가서기에는 그들의 도덕심이 용납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명문정파의 무인들이라는 허울이 무겁게 씌워져 있지 않은가.
사박! 사박 ‥‥! 소여은이 발걸음을 떼어놓았다. 그녀가 향하는 곳은 무인들이 멈춰 있는 곳이다. 차가운 겨울 바람에 가릴 것 하나 없이 드러난 알몸은 파랗게 얼어붙었고 눈을 밟는 발바닥은 걸음을 떼어놓을 때마다 움찔거린다. 그녀의 모습은 처절한 여인의 한으로 비쳐졌다. 무기도 들지 않은 여인, 알몸의 여인이다. 어디 죽여봐라. 명문정파라는 허울이 얼마나 가증스러운지 세상천지에 똑똑히 알리고 말겠다. 사박! 사박 ‥‥! 화령 여인들이 소여은의 뒤를 따랐다. 그나마 소여은은 무공이라도 익히고 있지만 화령 살수들은 무공다운 무공을 익힌 여인들이 없다. 그녀들이 혹한의 날씨 속에 알몸으로 발걸음을 떼어놓는 모습은 애처로움까지 불러일으켰다.
‘이런 싸움이 될 줄은 몰랐군.’
무불신개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인상을 찡그렸다. 한쪽에서는 몇 안 되는 살수들이 파쇄진을 펼친 채 비장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다른 한쪽은 창피함도 모르는 계집들이 알몸이 되어 죽여달라고 발악한다. 어느 쪽이나 쉽지 않았다. 사내들을 죽이기 위해서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그들 수에 버금가는 무인들이 피를 흘려야 할 게다. 여인들은 더 어렵다. 평소 같으면 수치도 모르는 계집들이라고 일갈이라도 내지르련만 죽음이 기정사실로 굳어진 지금 어떻게 소리를 지른단 말인가. 이것은 검을 맞대는 것보다 더욱 지독하다.
“적명개.”
무불신개는 개방 산양 분타주를 불렀다.
“예.”
산양 분타주가 기막히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문도 서른두 명을 보내라. 휴우! 아무래도 이 오명은 개방이 뒤집어써야 할 것 같다.”
산양 분타주의 눈이 부릅떠졌다.
“장로님, 그럼…..!”
“묵월광 살수들이다. 혹 반격이 있을지 모르니 타구진을 펼치도록 해. 죽일 때는 사혈을 골라서 일격에 죽이도록 하고. 가급적이면 빠른 시간 내에 끝내는 것이 좋겠어.”
“알….겠습니다.”
힘들게 대답한 산양 분타주가 호적을 불었다. 무인들 틈에 섞여 있던 개방도들이 일제히 튕겨 나와 산양 분타주 앞에 시립했다.
“제일로, 타구진을 펼친다.”
산양 분타주는 산양 분타 개방도들 중에서도 가장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제일로 문도에게 명을 내렸다.
산양 분타 제일로 개방도들은 개방에 입문하여 무공을 수련한 지 십여 년에 이르는 문도들이다. 그들의 무공은 분타주의 수위에 육박한다고 봐도 크게 다르지 않다. 매듭만 이결일 뿐 무공은 삼결에 육박하는 문도들. 그들이 개방 유일의 진법, 타구진을 펼쳤다.
“아이고! 아이고!”
“흑흑! 킥킥….!”
곡성을 내지르는 자, 미친 듯 광란하는 자, 술에 취한 것처럼 흐느적거리는 자, 몹쓸 병에 걸린 듯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리는 자….
타구진은 천여 명에 이르는 문도가 펼쳐야 제맛이 난다. 타구진에 휘말린 사람은 장터 한가운데 서 있는 느낌을 받는다. 개방도는 위협거리가 아니라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정신이나 사납게 하지 않으면 좋으련만 천여 명이 일제히 내지르는 알지 못할 웅얼거림은 혼마저 빼앗아가는 듯 정신이 없다.
타구진은 제일 먼저 인체의 구궁을 자극한다.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를 엉뚱한 동작으로 두 눈을 현혹시키고, 몸에서 내뿜는 악취로 코를 자극하고, 온갖 소리가 어우러진 웅얼거림으로 귀를 틀어막고 싶은 느낌이 들게 만든다. 만약 정말 그런 느낌이 든다면 평정심을 잃은 것이다. 무릇 동물과 동물이 싸울 때는 기선을 제압하는 쪽이 우세하듯 천여 명이 일제히 펼치는 대진으로 기부터 제압하는 것이다. 하지만 타구진의 정작 무서운 점은 속에 숨어 있다. 타구진은 여덟 명에서 시작한다.
팔괘, 즉 일건천, 이태택, 삼이화, 사진뢰, 오손풍, 육감수, 칠간산, 살곤지의 방위를 점해 상대를 포위하기 때문이다. 단지 허장성세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진실한 힘이 숨겨져 있다. 건천을 담당하고 있는 걸개가 여덟 명, 일조를 통솔한다. 건천의 통솔 권한은 일대, 일조가 열 개 모여 팔십 명이 움직이기 전까지 유지된다. 일대라는 인원이 타구진을 펼칠 경우 통솔 권한은 중오천간에 위치한 자에게 주어지며, 일대가 열 개 모여 일진이 형성될 경우에는 칠결 이상의 고수가 통솔하게 된다. 팔백 명이 일제히 움직이는 타구진이란 보기 드문 것이고, 그러한 사건에는 장로 이상이 가담하기 마련이니.
서른두 명의 걸개들은 어수선하게 흩어져 곡성, 비란, 즐거운 웃음 등 세상 온갖 소리를 토해내며 슬금슬금 다가들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질서가 없는 것처럼 보이나 걸개들 개개인은 자기가 속한 조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으며 일정한 거리를 두고 같이 움직인다. 정상적인 팔방을 점유한 조도 있고, 넓게 퍼져 있는 조도 있으며, 방향을 약간 틀어 삐뚤어진 팔방을 점유한 조도 있다. 포위당한 사람은 누구누구가 같은 조인지 알지 못하기에 천간을 파악할 수 없고 모두 한 뭉텅이로 보게 된다.
“휴우! 이놈의 세상….”
걸개 중 한 명이 땅에 털썩 주저앉으며 탄식을 토해냈다. 그와 동시에, 쉬익! 가벼운 미풍이 부는 듯 살랑거리는 바람이 일어났다. 땅에 털썩 주저앉은 걸개와는 정반대 방향에서. 곤방에 있던 걸개가 일장을 뻗어냈다. 개방 절기 중 하나인 회선장법으로 노리는 목표는 하얀 나신으로 서 있는 여인의 등 뒤 명문혈이다. 우연일까? 무공을 전혀 모르는 듯한 여인이 추위에 바르르 떨었다. 두 팔을 웅크려 가려지지도 않을 풍만한 가슴을 가리고 종종걸음으로 두어 걸음 달려나갔다.
앞선 여인들을 황급히 뒤따라가는 듯. 휘이잉…..! 걸개가 날린 일장은 보기 좋게 허공을 갈랐다. 개방도는 방심하고 있었다. 상대가 일류 고수라면 이렇게 싱거운 공격을 할 리도 없고, 일장이 벗어났다 싶은 순간 재빨리 제이 초식으로 전환하여 연속 공격을 가했을 게다. 그들은 오직 하나만 생각했다. 가급적 고통 없이 빠르게, 본인은 죽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죽이는 것. 손이 닿았다 싶은 순간 여인들의 영혼이 구천으로 흘러들게 만드는 것.
무방비 상태의 여인들…… 묵월광 자체가 탄생한 지 일 년 갓 넘은 신흥 문파다. 하남성에서 활동한 묵월광과는 직접적으로 인연이 없던 산서성 산양 분타 걸개들이다.
여인들이 살수 집단의 살수들이라고는 하지만 그녀들을 살수로 볼 수 있는 대목은 뭇 사내들 앞에서 태연히 옷을 벗어 던진 대담함밖에 보이지 않았다. 무공 고수가 내뿜는 예기도, 살수들이 지녔음 직한 살기도 읽을 수 없었다. 타구진까지 펼친 개방도가 경계할 대상이 아니다.
알몸의 여인들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한 여인이 개방도의 압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춤을 추기 시작하자 다른 여인들이 덩달아 넘실넘실 춤을 췄다. 알몸의 여인 열 명이 치부를 고스란히 드러낸 채 춤을 추는 모습은 평생 두 번은 구경하지 못할 일대 장관이었다. 무림 군웅은 발걸음을 멈추고 무림사에 다시없을 광경을 지켜봤다. 적사도 걸음을 멈췄다. 파쇄진도 함께 멈췄다. 숱한 사람들의 시선은 청루에서도 구경하지 못할 진귀한 광경을 구경하는 데 쏠렸다. 더불어 여인들을 포위한 개방도가 언제 어떤 식으로 공격할지도 관심사였다.
‘저건!’
무불신개는 뭇 군웅들과는 달리 바싹 긴장했다. 단지 전설에 불과할 뿐이지만…… 그렇다. 전설에 불과하다. 도문에는 하나의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먼 옛날, 곤륜에 서왕모가 살았다는 전설이다. 후세인들에게 그려진 서왕모의 모습은 왜가리에 앉아 있는 모습이 대부분이다. 전설에 서왕모는 왜가리를 타고 다녔다고 전해지니까. 그녀는 혼자 그려지지 않는다. 큰 부채를 들고 있는 시녀와 복숭아를 들고 있는 시녀의 모습이 함께 그려진다. 때로는 서왕모의 전령인 청조가 그려져 있기도 하다. 무림인들이 관심을 가진 부분은 무림의 전설인 서왕모와 동황군이 혼인할 때 서왕모의 시녀가 추었다는 춤이다. 그림에 그려진 서왕모의 시녀는 두 명이었으나 기실 서왕모의 시녀는 다섯 명이다. 세인들에게 옥녀, 혹은 신녀라 불리는 서왕모의 시녀들도 각기 칭호가 있는데, 나반의 다섯 방위 색깔과 같다.
그녀들, 오신녀는 혼인날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알몸으로 오행에 걸맞는 영력을 발휘하며. 그녀들이 알몸으로 춤을 추었던 것은 신선들의 잔치였기 때문이다. 인간의 오욕칠정을 벗어난 신선들에게 여인의 알몸이 주는 의미는 인간의 욕정과는 사뭇 거리가 멀다. 신선들은 욕정의 눈으로 보지 않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의 절정만을 본다. 오신녀의 춤은 금화무라 불린다. 신선들의 넋마저 빼앗을 정도로 아름다운 춤인데 속세의 인간들이 보게 되면 어떻겠는가. 지금은 이름도 잊혀진 금화무다. 심신을 탁마해야 할 도인들이 알몸이 되어 춤춘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할 비상식적인 행동이다. 도문 전설로 구전되는 이야기이지만 정통 도문에서는 입에 올리는 것조차 꺼리는 금화무.
하지만…… 여관이 있는 도문, 색욕에 물든, 타락하여 도인이라 할 수 없는 사이비 도인들 중에 쾌락의 일부분으로 금화무를 재현했던 사례는 많다. 물론 전설의 금화무는 아니다. 그들이 재현한 것은 나무에 불과할 뿐 욕정을 자극하지 않고 인간의 넋을 빼앗는 심오한 춤의 이치는 담겨 있지 않다.
묵월광 여살수들이 펼치는 춤도 인간의 몸짓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알몸으로 추는 춤은 욕정만 심하게 자극한다. 너무 심하게. 무불신개의 머리 속에 금화무의 전설이 스쳐 간 것은 기우일까?
‘빨리! 되도록 빨리 죽여야 돼. 시간을 주면 안 돼!’
무불신개는 한달음에 달려가 일장에 쳐 죽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묵월광 여살수들은 천박하지 않았다. 그들은 손짓 하나, 몸짓 하나, 웃음 하나에도 사내를 홀릴 만한 매력을 풍겨냈다. 여린 성품을 지녔으나 어쩔 수 없는 환경이기에 옷을 벗고 춤을 추는 여인은 얼굴 표정마저 울먹이는 듯했다. 가슴은 백일하에 드러내놓고 있으나 비소는 보일 듯 말 듯 폈다가 움츠리고, 움츠렸다가는 살포시 보여주는 여인의 모습은 도발적이었다. 춤을 추는 여인들은 각기 다른 모습이었으나 하나같이 보듬어 안고 싶은 여인들이었다. 여인들은 마르지도 뚱뚱하지도 않았다. 키가 조금 큰 여인, 작은 여인… 체형, 생김새… 모두 다르지만 ‘아름답다’는 말에서 벗어나는 여인은 한 명도 없었다.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그래서 냉정해 보이는 한 여인이 미친 듯 웃어 젖히는 개방도 앞에 섰다. 여인의 얼굴에는 서릿발이 맺혔다. 그런 여인이다. 그것이 매력으로 보이는 여인이다. 얼굴에 얼음꽃을 피워낸 여인은 걸개 한 명만을 위한 춤을 추었다. 춤을 출 때마다 도톰한 가슴이 출렁댔다.
“꿀꺽!”
개방도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누더기를 입고 다니고 몇 날 며칠 씻지 않아 고약한 냄새를 풍기지만 그도 여인을 품에 안아본 적이 있다. 여인의 가슴이, 비소가, 살갗이 어떤 쾌감을 주는지 너무 잘 알고 있다.
‘다른 세상에서 다른 인연으로 만났으면 좋은 관계가 될 수도 있었으련만…… 그래, 장로님 명령대로 빨리 죽여주는 것이 고해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이 되겠지.’
개방도는 타구봉을 꼭 움켜잡았다. 어떻게 죽여야 하나? 개를 죽이듯이 때려 죽일 수는 없다. 이런 여인을 죽이는 데 개방 무공은 너무 잔혹하다. 그는 자신의 병기인 타구봉조차도 싫었다. 검이었다면 단숨에 죽여줄 수 있을 텐데. 고통을 느낄 사이도 없이…… 개방도는 혈도를 찌르기로 했다. 타구봉은 장과는 효용이 다른 단봉이라 찌르는 병기가 아니지만 사혈을 찌르는 것이 가장 고통이 적은 죽음을 줄 것 같았다. 개방도는 큰 걸음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여인의 살 내음이 코를 간질였다. 추위를 이기지 못해 소름이 돋아있는 살결이지만 몸에 착 달라붙는 듯했다. 단지 여인과 가까이 있다는 느낌만으로도 여인을 안고 있는 듯했다.
‘용서해라.’
그가 무공을 펼치면서 상대에게 용서를 구한 적은 단연코 없었다. 쉬익! 타구봉이 허공을 갈랐다.
하지만 그가 내지른 타구봉에는 진기가 실려 있지 않았다. 그도 예상하지 못한 사태. 춤을 추던 여인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쉴 줄 누가 알았는가. 얼음이 풀풀 날리던 얼굴이 애처롭게 변하며 눈물을 글썽일 줄, 그리고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더니 품속으로 안겨들 줄….
‘이, 이거……!’
개방도는 당황했다. 또 경악했다.
여인이 품속으로 달려든 것은 당황하기에 충분했고, 목을 휘감은 여인의 손이 의외로 투박하다는 것… 아니, 여인의 손가락 사이에 비침이 들렸고, 그것이 자신의 목 뒤를 찔렀다는 것은 경악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다, 당했어!’
그는 여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비침에는 독이 묻어 있는지 사지가 마비되어 꼼짝할 수가 없었다. 세상이 노랗게, 까맣게 물드는 사이로 요악하게 웃는 여인의 얼굴이 보였다.
‘역시 묵월광 살수…’
그는 자신이 상대했던 여인이 묵월광 살수라는 점을 다시금 인식했다. 죽음의 문턱을 넘어선 후에야.
죽음은 동시에 일어났다. 묵월광 살수들은 서로 약조한 것도 아닌데 빙 둘러선 걸개들을 일시에 무너뜨렸다. 타구진 제일조가 제일 먼저 공격을 시작했고, 그들은 묵월광 살수와 지척에 있었으면서도 방심했다. 죽음은 그들에게 일어났다. 쉬익! 소여은이 허공에 신형을 띄운 것은 그때였다.
한 마리 백학처럼 허공에 훌쩍 떠오른 나녀. 둥그런 가슴도 여인만의 비소도 활짝 열어젖힌 그녀는 자신의 신체를 낱낱이 살펴보라는 듯 허공에서 한 바퀴 몸을 굴렸다.
“크윽!”
“컥!”
개방도 두 명이 속절없이 무너졌다. 도대체 비침이 어디 숨어 있던 것일까? 옷을 다 벗어버린 알몸이라 숨길 곳도 없는데. 춤을 출 때 열 손가락을 활짝 펼쳐 손에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다고 은연중에 암시했는데. 개방도 중 한 명이 여인의 다음 행동을 목격했다.
“머리닷! 머리에 암기를 숨기고 있닷! 으아악‥‥!”
개방도는 자신이 목격한 것을 힘껏 소리쳐 알렸으나 대가로 한 눈을 잃고 말았다. 너무나 귀여워 살인과는 거리가 멀 것 같던 여인이 비녀를 뽑아 그의 눈 속에 찔러 넣었다. 그가 본 것은 암기가 아니라 여인의 비녀였다. 비녀도 암기라면 할 수 없지만. 소여은도 비녀를 뽑아냈다. 검은 머리가 출렁이며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여인들처럼 조심스럽게 접근하지도 않았고 비녀를 날리지도 않았다. 그녀는 전광석화처럼 신형을 날리며 개방도 사이를 누비고 다닌다.
“으악!”
“큭!”
그녀가 이르는 곳에는 죽음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삐익! 삐이익…..! 날카로운 호적이 울리자 개방도는 황급히 정신을 수습하고 일 장 뒤로 물러섰다. 그들의 눈에는 조금 전까지 보였던 동정의 빛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대신 밀려든 것은 분노요, 살기였다. 알지 모르겠지만 묵월광 여살수들은 정파 무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비겁한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눈 깜빡할 사이에 죽은 자는 열다섯 명. 타구진을 펼쳤던 개방도 중에 절반이나 죽어 넘어졌다. 소림 나한진과 더불어 불패로 불리던 타구진이 이토록 어처구니없게 무너진 것도 처음이리라.
상대가 십망을 받을 정도로 무공이 고강한 마두라면 크게 욕될 것도 없다. 팔백 명이 펼치는 대진이 깨진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여덟 명이 펼치는 타구진은, 아니, 일대 팔십 명이 펼치는 타구진도 깨진 적이 있다.
과거 십망을 선포한 혈암검귀를 추살할 때였다. 십망의 주체가 된 무당파가 추살에 실패한 후 소림과 개방이 공조하여 팔을 걷어붙였다. 혈암검귀는 곧 포위되었고 개방은 삼 개 분타를 동원하여 타구진을 펼쳤다.
팔십 명으로 이루어진 타구진. 하지만 타구진이 무너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한 시진. 한 시진 만에 타구진이 무너졌다. 검광이 반짝이는 곳에 피 보라가 솟구쳤다. 혈암검귀의 검공이 쾌검 위주로 이루어진 초식이라 죽음이 더욱 빨리 찾아왔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런 것도 아니다. 단지 방심했다는 이유만으로 열다섯 명이나 목숨을 잃었다.
쉬이익….!
한 여인이 득달같이 달려왔다. 개방도는 더 이상 방심하지 않았다. 다른 여인들은 몰라도 이 여인만은 진정한 고수다. 암습이 아니라 무공으로 싸워도 승패를 장담할 수 없는 절정 고수다. 그런 여인이 암습을 펼쳤고 한쪽은 방심했으니 죽지 않을 수 없다. 일조 여덟 명을 다른 여인들이 암습했다면 나머지 일조에 죽은 일곱 명은 바로 이 여인에게 당했다.
삐이익!
호적이 날카롭게 울렸다. 개방도의 신형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날렵해졌다. 절반으로 쫙 갈린 개방도는 한쪽은 무리 지어 있는 여인들에게, 다른 한쪽은 비녀 하나를 가지고 성난 호랑이처럼 날뛰는 여인에게 달라붙었다.
퍼엉!
“아악!”
둔탁한 소리와 동시에 째지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여인들은 저항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진신 무공으로 겨룬다 해도 이길 승산이 전혀 없는 여인들이었다. 그녀들은 자신들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으며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오직 한 여인, 소여은만이 개방 타구진을 맞이하여 팽팽한 균형을 유지했다. 아니, 그녀는 오히려 압도해 나갔다.
쉬익! 쒜에엑…..!
손방과 감방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걸개들이 신형을 날렸다. 소여은이 곤방에 있는 걸개를 몰아붙인 후 바로 몸을 돌려 태방 걸개를 공격하려던 순간이었다. 몸을 돌리는 자의 등은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다. 타구진을 익힌 걸개들은 찰나에 불과한, 찰나만 지나면 사라져 버릴 허점을 놓치지 않았다.
페에엑……!
소여은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왼발을 축으로 완전히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 왼손을 갈고리처럼 굽혀 얼굴을 찍어왔다. 오른손은 장을 사용하여 하늘에서 땅으로 내리누르고.
일련의 동작은 너무도 절묘해서 감방 걸개의 타구봉을 중도에서 차단했다. 또한 갈고리 같은 손아귀는 감방 걸개의 얼굴을 노렸다. 감방 걸개와 같이 공격을 가했던 손방 걸개는 감방 걸개에게 길이 막혀 허공만 치는 격이 되고 말았다.
“헛!”
감방 걸개가 다급히 헛바람을 내지르며 뒤로 주룩 물러섰다. 찌이익…..! 듣기 거북한 소리는 옷을 찢는 소리에 불과한데 감방 걸개에게는 마치 살점을 뜯어내는 소리처럼 들려 모골이 주뼛 섰다.
“음풍조에 복마장법!”
천간을 맡고 있던 걸개가 놀라 소리쳤다. 여인은 그들이 짐작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강한 고수다. 고통 없이 죽이겠다는 생각은 사치였다. 알몸의 여인을 어떻게 공격하느냐는 생각도 건방지기 이를 데 없었다. 여인은 그들이 전력을 다해도 승부를 점칠 수 없는 마녀다.
퍼억!
“헉!”
다른 쪽에서 또 한 여인이 다급한 비명을 질렀다. 살기가 끓어오른 개방도는 여인들의 헛손질조차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무공 중에서 가장 지독한 초식을 펼쳐 냈고, 타구봉에 실린 진기도 최고조로 이끌어냈다. 여인들이 도륙당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복마장법에 음풍조!”
무불신개는 눈을 부릅떴다. 성난 호랑이처럼 날뛰는 여인의 무공은 뜻밖에도 정종 무공인 공동파의 진산 비기다. 이건 정말 뜻밖의 사건이다. 어떻게 공동파의 진산 비기가 묵월광 같은 살수 집단에 흘러들 수 있단 말인가? 만약 여인이 공동파에서 파문당했다면…..? 개방은 타구진을 펼쳤다. 군웅들 중에는 여인의 무공을 알아본 자들도 있을 터이고, 그들은 다른 눈으로 싸움을 지켜보고 있을 게다. 개방과 공동파의 무공을 비교하면서.
‘역시 이 싸움은 빨리 끝내는 게 옳았어. 못난 것들, 그렇게 방심하지 말라고 일렀거늘.’
“분타주!”
“넷!”
“문도를 모두 투입해. 저기 저놈들과 여살수들의 사이를 가로막도록. 싸움을 할 필요는 없어. 사이만 가로막으면 돼.”
무불신개의 눈이 한 무리의 사내들에게 향했다. 파쇄진을 펼친 채 여인들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 자들.
‘되도록이면 빨리….’
“호각을 불어!”
“넷!”
산양 분타주가 힘껏 호각을 불어냈다. 삐익! 삐이이익…..! 여인들이 알몸이 된 순간부터 얼어붙은 듯 서 있던 군웅들이 호각 소리를 듣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파쇄진을 펼친 사내 쪽이다. 산양 분타 개방도도 움직였다. 그들은 파쇄진을 펼친 사내와 여인들의 사이를 가로질렀다.
‘저 여자들은 무공을 거의 몰라. 죽이는 것은 여반장. 타구진 이조면 저 여자를 상대할 수 있지.’
복잡할 것이 없다. 이 싸움은 질래야 질 수 없는 싸움이다.
무불신개는 석상처럼 굳어 있는 여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소고라고 했던가? 묵월광의 소고, 네 목숨은 내가 거둬야겠군.’
그는 또 다른 변수가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사내들이 파쇄진을 펼쳐 죽음의 의지를 보이고 여인들이 옷을 벗어 던진 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랄 만큼 놀랐다. 더군다나 살수답게 암습을 펼친 여인들에게 개방도가 열다섯 명이나 죽은 것은 예상치 못한 비극이다. 아마도 이번 일은 묵월광을 초토화시킨 후에도 크게 자랑스러워할 일이 되지 못하리라.
묵월광 여살수들은 겁에 질려 뒤로 물러서기 급급했다. 공동파 무학을 절정으로 익힌 여인은 개방도를 압박하지만 타구진의 효용 덕분에 당분간은 균형을 유지할 게다. 다른 조가 여인들을 죽인 후 합류할 때까지는.
파쇄진을 펼친 사내들은 개방도에게 길목이 막혔다. 그들은 죽음을 각오한 사내들답게 사방에서 밀려오는 군웅들을 담담히 바라보고 있다. 숨을 크게 두어 번 들이쉬고 나면 싸움이 시작되리라. 마음속으로 백 정도 세고 나면 싸움이 끝나 있으리라. 무불신개는 소고를 향해 걸음을 떼어놓았다. 그때,
제육십팔화 – 화마
무불신개는 서너 걸음도 옮기기 전에 걸음을 멈췄다. 파쇄진을 향해 마주쳐 가던 군웅들도 걸음을 멈추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여인들을 몰아붙이던 개방도도, 물러서기에 급급했던 여인들도 모두 의아한 기색으로 적이 아닌 다른 곳을 쳐다봤다. 소여은도 곤방 무인을 공격한 후 일 장 뒤로 물러섰다. 타구진을 펼친 개방도도 소여은을 뒤쫓지 않았다. 그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낯빛을 굳힌 채 사방을 살폈다. 타닥! 타닥! 후두둑..! 천군만마가 일시에 질주하는 듯한 요란한 소리가 산 곳곳에서 들려왔다.
“부, 불이닷!”
누군가 소리쳤다. 군웅들은 불이라고 일러주기 전부터 불이 난 것을 알았다. 안개가 피어나듯 자욱하게 퍼져 오르는 연기며 매캐한 내음, 그리고 뒤이어 솟구치는 빨간 불꽃.
“살…. 문!”
무불신개는 이를 악물며 중얼거렸다. 산불은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불을 질렀고, 팔부령에서 이런 짓을 할 집단은 오직 살문밖에 없다.
불의 성질은 위로 솟구치는 것이다. 아래에서 피어나 위로 솟구친다. 불길이 번져 가는 것도 불길이 거세진 다음에는 몰라도 초기에는 산정을 향해 번져 가기 마련이다. 지금 일어난 산불은 기세도 그렇고 번지는 방향도 빠르다. 협곡을 에워싸듯 한꺼번에 불길이 솟구쳤고, 산정이 아니라 협곡을 향해 치달려 내려오고 있다. 붉은 적토마가 달려오듯이.
‘준비하고 있었어. 기름을 묻혀놨어!’
무불신개는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연적으로 일어난 산불이라면 묵월광 살수들을 모조리 휩쓸어 버린 다음 진화에 들어가도 늦지 않을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일어난 산불은 굶주린 황소 떼처럼 빠르게 치달려 내려오고 있었다. 타닥! 타라닥…..! 산불은 나무에 불길이 옮겨붙기도 전에 다음 나무를 향해 치달렸다. 아예 일이 장 정도는 무시하고 건너뛰는 불길이 대부분이었다. 불길을 놓는 순간, 협곡까지 일시에 불길이 휘감기도록 치밀하게 계산된 화공임에 틀림없다.
후두둑! 후두두둑….! 산에는 많은 동물이 살았다. 토끼, 노루, 늑대, 오소리…. 느닷없는 산불에 놀란 동물들이 쏜살같이 치달려왔다. 어떤 놈은 벌써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는 불덩이가 달려오는 듯했다.
“죽여! 빨리 죽여!”
무불신개는 진기를 끌어올려 고함 질렀다. 살문에 대한 징계는 구파일방 영수들이 모인 다음에 처리해도 늦지 않는다. 지금은 묵월광을 소탕해 버릴 때다. 산불에 밀려나 놓아줄 수는 없었다. 소고가 익혔다는 혈암검귀의 혈뢰삼벽, 그리고 적사라는 자와 그의 무리들이 익힌 내만족 도공, 무공도 미천한 한낱 여인들이 보여준 독심. 이들이 종리추에게 가도록 내버려 둘 수 없다.
정면으로 들이쳐도 충분한 묵월광을 협곡으로 몰아넣으며 퇴로를 막은 연유도 확실하게 뿌리를 뽑고자 해서였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소고만은 살려둬서는 안 된다. 그녀가 진정 혈암검귀의 혈뢰삼벽을 익혔다면.
무불신개, 그는 혈암검귀를 알고 있다. 혈암검귀가 십망에 쫓길 때 그는 먼발치에서 혈암검귀의 무공을 보았다. 치가 떨리도록 잔혹하고 빠른 검법을. 두 번 다시 똑같은 일이 반복되게 만들 수는 없다. 소고가 어느 경지까지 익혔는지는 모르지만 혈암검귀의 뿌리는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
어쩌자고, 어쩌자고 소림 장문인은 혈암검귀의 후인이 묵월광이란 살수 집단을 이끌도록 용납했는가. 이해는 간다. 개방 또한 묵월광의 소고가 혈암검귀의 후인이란 사실을 꿈에도 몰랐으니…..
“죽여! 빨리!!”
무불신개의 음성은 협곡을 쩌렁 울렸지만 너무 큰 소란에 모래알처럼 묻혀 버렸다.
후두두둑…..! 컹컹…..! 나무에 불이 붙으며 터지는 굉음, 놀란 짐승들이 내지르는 비명. 더욱 사태를 악화시킨 것은 불길의 방향이다. 협곡으로 내리꽂히는 불길이 있는가 하면 옆으로 확산되는 불길도 있었다. 밑으로 쓸려 내려오는 불길은 군웅들을 위협하고 옆으로 확산되는 불길은 협곡을 가로막는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협곡까지 불길에 휩싸일 터이고 군웅들은 독 안에 든 쥐가 되어 불타 죽고 말리라.
아우성은 벌써 시작되었다. 검 한 자루에 목숨을 내맡긴 무인들이 화급히 신형을 날려 협곡을 빠져나가려고 발버둥 쳤다. 타구진을 펼쳤던 개방도들은 소여은과 여인들을 악착같이 몰아붙이지 않았다. 느닷없이 일어난 산불에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협곡 위에서 화살을 겨누고 있던 군웅들도 다급히 자리를 옮기는 모습이 비쳤다. 대자연이 일궈낸 재앙은 한낱 인간으로서는 감당하지 못할 거대한 공포였다. 산불이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맹렬하게 휘몰아친 탓도 크지만.
아수라장 속에서 파쇄진을 펼친 사내들과 나녀들은 오히려 산불 쪽으로 몸을 피했다. 협곡을 빠져나가는 군웅들이 휘두른 병기에 맞아 죽는 것은 전쟁터에서 유시에 맞는 것처럼 덧없다. 소고는 일사불란하게 나녀들을 챙겼고, 뒤이어 현란한 무공을 선보였던 소여은까지 가세하자 그녀들을 공격하는 군웅은 없었다. 묵월광에 쉽게 볼 수 없는 고수들이 있다는 점도 싸움을 피하게 만들었다.
타구진을 농락하던 소여은, 혈암검귀의 무공을 이어받아 천하의 마두로 공표되어 십망을 받은 소고.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시간을 끌지 않고 단숨에 처단할 자신이 있어야 검을 들이댈 수 있는데 그럴 만한 자신이 있는 무인은 흔치 않았다. 산불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싸울 각오가 되어 있지만 지금은 산불이란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났다. 더군다나 묵월광 살수들이 몸을 피하는 곳은 군웅들과는 정반대 방향인 산불이 일어나는 쪽이다. 어차피 산불을 피한다 해도 군웅들 손에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바에는 그래도 살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을 찾아 산불로 달려드는 게다. 어차피 타 죽을 운명. 백척간두의 싸움을 벌일 필요가 없다. 무불신개는 몸을 날리려다 말고 멈칫거렸다. 그도 군웅들과 같은 생각을 했다.
화마가 쏜살같이 달려와 등 뒤를 덮치고 있다. 아마도 묵월광 살수들은 뜨거운 열기를 느끼고 있으리라. 십여 장이나 떨어진 곳에서도 열기를 느끼는데 알몸의 나녀들이야 오죽하겠는가.
‘도망갈 길이 없어. 일단은 여길 벗어난 후에…….’
무불신개는 군웅들을 이끌고 묵월광보다 한발 앞서 협곡으로 들어왔다. 협곡을 벗어나 달리 빠져나갈 길이 있는지 알아보는 것은 함정을 파는 데는 기본에 속한다. 빠져나갈 길이 없다. 협곡을 벗어나면 가파른 산비탈을 타고 올라가야 한다. 정상적인 상황이고 무공을 익힌 무인이라 해도 혀를 내두를 만큼 험하고 가파른 산등성이다. 거기에서 산불이 일어나 아래로 내리꽂히고 있다.
‘빠져나올 길은 오직 한 군데. 길목을 막고 산불을 피한 후에….’
무불신개는 불길을 피해 몸을 사리는 묵월광 살수들을 흘깃 쳐다본 후 신형을 날렸다.
“늑대를 피해 호랑이 굴로 들어왔군.”
적사가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보며 중얼거렸다. 거센 기세로 달려든 화마는 협곡으로 가는 길을 차단해 버렸다.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온통 새빨간 화염뿐 몸을 뺄 구석은 한군데도 없었다. 세상 천지에 불덩이만 보였다. 그렇게 많던 무인들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협곡에는 묵월광 살수들밖에 남지 않았다. 산불을 피해 협곡 밖으로 몸을 뺀 고수들이 죽은 개방도들마저 옮겨 갔으니…….
화살에 맞아 죽은 살수들은 화마에 몸뚱이를 맡기고 있으리라. 살아 있는 사람들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다. 그들도 곧 불길에 몸을 맡겨야 한다.
“여, 영주님….. 저, 저 먼저 갈게요.”
화령 중 한 명이 질린 표정으로 소여은에게 말했다.
“……..”
소여은은 ‘엉뚱한 짓 하지 마!’라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치밀었지만 말할 수 없었다. 군웅들로부터 몸을 빼냈다고는 하지만 화약이 터지듯 펑펑! 소리까지 흘리는 산불을 피할 길이 없어 보였다. 불에 타 죽느니 자진하는 것이 편한 죽음일지도 모른다.
얼핏 봐서는 이제 열대여섯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동안의 여인이 비녀를 뽑아 목에 댔다. 소여은은 애써 눈길을 피했다. 그때, 기적은 일어났다.
퍼엉!
불길이 공기를 태울 때 흘려내는 폭발음과 흡사한 소리가 지척에서 터져 나왔다. 묵월광 살수들 중 폭발음 따위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코앞까지 다가온 불길을 멍하니 바라볼 뿐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듯 보였다. 예정된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심정은 처절할 때도 있지만 담담할 때도 있는 법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 놈이라도 더 죽이는 건데…..”
적사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자신의 종말이 곱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예상했지만 싸우다 죽거나 암습을 당해 죽을 줄 알았지 불길에 휘말려 죽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때,
“죽일 기회는 많아. 지금은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생소한 사내의 음성이 들렸다. 묵월광 살수들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목에 비녀를 틀어박으려던 화령 살수도 움찔 손을 멈추고 음성이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기적이 있었다.
“들어오려면 들어오고 타 죽으려면 타 죽고.”
말은 쌀쌀맞게 했지만 그리 쌀쌀맞아 보이는 사람은 아닌 듯했다. 일순 묵월광 살수들은 할 말을 잊었다. 무인 같기도 한데 무인이라고 하기에는 뼈마디가 너무 여려 보이는 사내. 아니, 무인답지 않다고 느끼는 것은 화령 살수들뿐이다. 소고, 소여은, 적사, 그리고 사령 살수들은 사내에게서 칼처럼 날카로운 예기를 읽었다. 너무 신경질적이라 손만 대도 검을 들이댈 것 같은 사내다. 사내는 고수다. 그런 사내가 속 빈 고목을 폭파시키고 기어나와 살고 싶으면 들어오란다. 불의 폭풍이라고 생각했던 폭음이 실제로는 화약이 터지는 소리였던 모양이다. 화약이 터지는 것을 몰랐다니… 산불에 포위당하고, 나무가 지척에서 펑펑 터지는 것을 보지 않은 사람은 귀머거리냐고 놀려댈 게다. 사내가 억지로 남의 일에 끼어든 듯 귀찮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들어올 거야, 말 거야?”
앞뒤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가 누군지, 속이 빈 고목에 이 많은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것인지, 왜 자신들을 구하는지 의문이 순식간에 머리 속을 스쳐 갔지만 한마디도 묻지 못했다. 산불은 공기를 태워 버린다. 작은 불일 때는 공기를 태우는 힘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지만. 지금처럼 큰불이 되면 그 힘이 얼마나 가공스러운지 여실히 알게 된다. 당장 숨이 막혀 견딜 수가 없다. 몸이 빨려들 것 같기도 하고 튕겨 나갈 것 같기도 하다. 불길에 몸이 닿지 않고도 이런 느낌이 드는데, 정작 불길에 휩쓸리면… 도저히 살 수 없다. 묵월광 살수들은 신속히 신형을 날렸다. 적사는 제일 먼저 화령 살수들부터 고목 안으로 들이밀었다.
속 빈 고목은 넓은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사령 살수 열두 명, 화령 살수 일곱 명, 거기에 적사, 소여은, 소고와 사내까지…. 무려 스물세 명이나 들어왔는데도 비좁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끼이익! 그그그긍……..!
사내는 여유만만하게 기관을 조작했다. 철두철미하게 준비된 기관이다. 사내가 무언가를 만지작거리자 땅이 솟구쳐 올랐다. 아니다, 땅이 솟구친다는 것은 착각이다. 솟구치는 것은 단단한 청석이다. 그 위에 흙이 올려져 있어 땅이 올라온다는 착각이 들었다. 사내는 청석이 들어온 입구를 완전히 막은 다음에야 잡고 있는 막대기 같은 것을 옆으로 비틀었다. 청석은 허공에 걸려 단단하게 고정되었다. 청석을 떠받들고 있는 것은 굵은 밧줄로 엮은 그물이었다. 묵월광 살수들은 비로소 숨 쉬기가 자유로워졌다. 입구를 막은 암굴 속이 숨 쉬기 편하다면 이것 또한 놀림당하기 십상이다. 직접 겪어보지 못한 사람에게 말한다면 말이다. 산불은 암굴에 있는 공기까지 빨아내 태워 버렸다. 그러니 오히려 입구를 막아버린 것이 더 숨 쉬기에 편한 것이다.
“갑시다.”
사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히 묵월광 살수들을 안내했다.
‘종리추!’
소고, 소여은, 적사 세 사람은 약간의 여유가 생기자 거의 동시에 한 인물을 떠올렸다.
산에 불을 지르는 대담함과 군웅들로 하여금 묵월광 살수를 처치할 시간 여유조차 주지 않는 치밀함, 그리고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는 안배까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 종리추밖에 없었다.
묵월광 살수들은 예상 밖으로 넓은 세상에 감탄을 터뜨렸다. 한 사람이 간신히 들어올 수 있는 입구에 비해 지하 통로는 상당히 길고 촘촘했다. 촘촘하다? 그 말이 꼭 알맞은 표현이다. 지하 미로는 촘촘하게 짠 그물처럼 얼기설기 엮어져 있다. 길을 아는 사람이라도 쉽게 들어설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촘촘하게. 지하 통로는 또 하나의 세상이었다. 통로는 한 사람이 간신히 걸어갈 정도로 비좁았지만 군데군데 횃불이 밝혀져 있어 걷는 데는 불편함이 없었다. 대지의 열기가 스며들어서인지 후텁지근했다. 나무가 타는 환청이 들리는 듯했다. 산불이 암굴에까지 밀려드는 듯한 환각마저 느껴졌다. 약간의 여유가 생기자 비로소 공포가 슬금슬금 엄습해 왔다. 담담한 심정을 유지했다고는 하지만 산불이 보여준 자연의 공포는 엄청난 것이었다. 묵월광 살수들은 새삼스럽게 생명의 소중함을 배웠다. 그들은 말없이 걸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묵묵히 걸을 수밖에 없었다. 머리 속이 하얗게 탈색되어 티끌만한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동료들의 죽음도 잊었고 복수마저 생각나지 않았다. 지금은 살았다는 생각만이 몸과 정신을 지배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앞서 가던 사내가 걸음을 멈췄다.
“다 왔소. 사내들은 먼저 나가고 여인들은…. 잠시 기다리시오.”
화령 살수들은 그제야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녀들은 아직까지 알몸이었다. 옷을 벗을 때는 죽을 각오를 했으니 부끄러움이 대수로울 게 없었고 살수를 전개할 때는 부끄러움보다 긴장이 더욱 강했다. 그녀들은 부끄러움을 잊었다. 하지만 이제는 느낀다. 살아난 것이다, 확실하게.
암굴을 벗어난 후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따뜻하게 피어나는 모닥불이다. 장정 오십여 명이 무공을 수련해도 될 만큼 널찍한 공지 한가운데에 보기만 해도 따뜻해지는 모닥불이 일렁거렸다. 팔부령을 휘감은 혹한의 추위는 갓 산불 지옥에서 벗어난 사람들조차도 다시 불을 그리워하게 만들었다. 모닥불과 격차를 두지 않고 바로 눈에 들어온 광경은 모여 있는 사람들이다.
‘살문……!’
묵월광 살수들은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사람들이 누군지 바로 알았다.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살문 살수들은 무림 군웅이 개미 떼처럼 모여들었는데도 한가롭게 모여 앉아 한담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묵월광 살수 절반이 죽고 산 하나가 홀랑 타버리는 아비규환이 일어났는데도 자신들과는 상관없다는 듯 평화로웠다.
그중에서도 잊을 수 없는 사내가 보였다. 땅바닥에 곰 가죽을 깔고 그 위에 앉아 있는 미모의 여인. 그리고 여인의 무릎을 베개 삼아 한가로운 오후의 한낮을 즐기고 있는 듯한 사내. 예상대로 산에 불을 지르고 자신들을 구출한 사람은 종리추였다. 묵월광 살수들은 살문 살수들을 보는 순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살문 살수들의 편안한 모습은 천여 명이 넘는 군웅들에게 둘러싸였을 때보다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단지 편안한 모습뿐이었다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게다. 살수들 역시 사람이고 쉴 때는 쉬어줘야 하기 때문에 쉬는 시간만은 방해받는 것을 싫어한다. 가급적이면 세상사에 대한 신경을 모두 끊고 자신만의 시간을 즐긴다. 묵월광 살수들도 긴장이 높은 만큼 쉬는 시간은 철저하게 찾는다. 하지만 살문 살수들은 편안한 모습뿐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유를 가졌다. 간섭받기 싫다는 명목 하에 홀로 떨어져서 지내는 것이 아니라 다 같이 모여 웃고 떠든다. 예의나 격식 같은 모습은 찾을 수 없으나 엄격한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어설픈 자들이 보면 형편없는 살수들이지만 이름깨나 얻었다는 살수들이 보면 가까이하기 싫은 살수들이다. 이들은 정말 강한 자들이니까. 정말 강한 자만이 일각 뒤에 죽는다 해도 자유를 만끽하는 배포가 있으니까.
이들은 팔부령에 모인 군웅들을 관망만 하고 있지는 않았다. 군웅들의 목적이 자신들의 목숨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나름대로 대처를 하고 있었다. 산불이 일어난 것도 이들 소행이니 이들 중 몇 명은 직접 불을 질렀으리라. 썩어 문드러지는 시신을 옆에 놓고도 헛구역질이 치밀고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비위 상한 상황 하에서 태연히 밥을 먹는 것과 같다. 인성이 말살되어도 그럴 수 있지만 죽음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있는 사람도 그럴 수 있다.
“혈살편복, 수고했어. 한데 화령 살수들이 보이지 않는데?”
“화령 살수들은 알몸인지라….”
묵월광 살수들은 그들을 안전한 장소까지 안내해 온 사람이 혈살편복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혈살편복. 귀에 익은 이름이다. 살문 십사 살수 중 한 명으로 한창 악명을 높이던 자. 그런 자가 무인으로 보기 어려울 만큼 여려 보인다는 것은… 그것 또한 살수에게는 훌륭한 장점이다. 종리추는 무릎을 베고 있던 여인을 올려다봤다.
“알았어. 내가 갖다 줄게. 옷이 맞을라나 모르겠네. 혈살편복, 살아남은 여자가 모두 몇 명이야?’
“여덟.”
“여덟?”
여인은 반문하며 소고를 가리켰고 혈살편복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떻게 된 거야? 화령 살수들은 열 명 정도 살 거라고 했잖아? 두 명이 모자라네?”
이번 물음은 아직까지도 무릎을 베고 있는 종리추에게 던졌다.
“피하지 않았어. 그래서 당했지. 살수들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은 죽이는 능력이 아니라 도망가는 능력이야. 제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을 태만히 했다면 두 명이 아니라 열 명이라도 착오할 수 있어….”
“변명이야!”
여인은 종리추 이마에 ‘딱!’ 소리가 나도록 알밤을 먹였다. 그리고 일어서서 걸인들이 사는 움집보다도 더욱 초라해 보이는 움막 안으로 걸어갔다.
‘예측하고 있었어. 싸움이 어떻게 끝날지, 개방이 어떻게 나올지,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 적사, 소여은이 어떻게 행동할지….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소고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적사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도를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적사는 소고와는 다른 면을 보고 있었다. 무공이다. 소고가 전략과 사람들을 봤다면 그는 오직 한 사람 종리추의 무공만을 봤다. 종리추의 무공이 뛰어나게 성장했다. 일취월장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 정도로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괄목상대했다. 삼이도에서 봤을 때만 해도 관심이 가지 않았다. 몽골에서 온갖 생사 관문을 뚫고 지나온 후라 자신감이 충만했을 때라 해도. 소고, 적각녀, 야이간을 겨룰 상대로만 인식할 만큼 건방졌을 때였다고는 해도…… 지금은 확연히 눈에 들어온다. 종리추는 누워 있을 뿐이었다. 싸울 기세가 보인다거나 주위를 경계하는 모습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바늘 끝 하나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는다. 강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특이하다. 뭐랄까? 꼭 바다를 대하고 있는 느낌이다. 너무도 평온한 바다라 위험을 감지할 수는 없지만 어디로 검을 휘둘러야 될지 모를 상대였다.
‘이렇게… 이렇게까지 급성장할 수 있단 말인가? 무공이?’
적사는 일 대 일로 겨뤄서 져본 적이 딱 한 번 있다. 삼이도에서 소고와. 소고와는 다시 한 번 겨뤄보고 싶다. 언젠가 기회가 닿는다면 목숨을 걸고 싸울 필요는 없지만 무공 시합만은 해보고 싶다. 그러나 종리추와는 겨루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와 겨루면 꼭 질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다. 소고와 적사가 그럴진대 사령 살수들의 느낌은 어떻겠는가.
종리추가 몸을 일으켜 걸어왔다. 그는 소고에게 가벼운 포권지례를 취했다. 전과는 다른 인사법이다. 동등한 자격에서 문주와 문주가 만났을 때나 건넬 법한 인사법이다. 소고는 머리 속이 텅 비어 가는 웃음만 흘려냈다.
“조금 놀랐을 겁니다.”
‘조금?’
“우선 좀 쉬십시오.”
‘쉬어야지. 지금은 쉬어야지. 쉴 일밖에 없으니까.’
종리추에게 무릎을 내준 여인이 누군지 생각났다. ‘아내’라고 당당히 말하던 어린이라는 여인이다. 안면이 있는 벽리군이 어린과 함께 옷 더미를 안고 나오는 모습을 보자 그녀의 이름이 떠올랐다. 벽리군은 소고를 보자 그녀 특유의 교태가 배인 걸음걸이로 걸어와 밝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저기 작은 항아리 놓인 집 있죠? 저기 가서 쉬세요. 먼저 가 계세요. 전 이 옷 좀 전해주고 바로 갈게요.”
‘항아리 놓인 집?’
이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묵월광이 무슨 목적으로 팔부령에 왔는지, 또 야이간이 언제쯤 등을 돌릴 것인지, 싸움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시작되어 어떻게 끝날 것인지. 벽리군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반가운 사람이 찾아온 것 정도로만 인사를 건넸다.
‘모두 알고 있었어. 묵월광을 세울 목적으로 살문을 이용한 것도…. 여기…. 죽이려고 온 것도….’
소고는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