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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130~131화


백정은 아주 천한 직업이다.

저희들도 무시받고 천대받기는 마찬가지면서도 백정을 보면 침을 뱉는다.

백정 자식은 양민과 어울리지 못한다. 몸에 피 냄새가 배어 있다면 질겁을 한다. 보고 배운 것이 도끼질에 살점 뜯어내는 일이니 커서도 인간 백정이 될 게 뻔하다면서 야유한다. 맞는 말이다.

백정의 자식은 어려서부터 도끼질을 배운다. 도끼를 후려쳐 순식간에 소를 죽인다. 칼을 갈아서 소 껍질을 벗기고 육각을 떼어낸다. 염통과 우랑(소의 불알)도 신속하게 끊어낸다.

피 냄새가 밸 만도 하다.

소는 뿔에서부터 꼬리까지 버리는 것이 하나도 없다. 특히 우랑은 없어서 팔지 못한다. 소를 잡는 날에는 우랑을 먼저 사겠다고 아우성들이다.

백정이라고 멸시하면서도 백정이 잡은 고기는 잘만 사 간다.

서로 앞다투어 우랑을 사려고 하면서도 공손한 말은 절대 하지 않는다.

아이고 어른이고 무조건 반말이다.

백정의 자식 중에 신동이 탄생할 경우도 있다. 자식이 똑똑하니 얼마나 좋은가.

하지만 백정에게는 신동 자식이 재앙이다.

불평등한 현실을 보면서 자란 아이는 도끼를 올바르게 잡지 않는다.

대부분은 인간 백정이 되고, 칼로 일어선 자 칼로 망한다고 길가에 나뒹구는 시신이 된다.

살천문주…. 그도 재앙이었다. 책이라고는 한 권도 접해보지 못했지만, 서당에서 들리는 소리만 듣고 글을 깨우쳤다.

밤이 되면 몰래 서당으로 숨어들어 가 글공부를 했다.

살천문주의 그런 행동은 결국 화를 불러왔고, 부모 형제가 몰매를 맞아 죽는 불상사까지 일어났다.

‘죽여 버릴 거야. 인간이란 인간은 모두 죽여 버릴 거야! 이 세상에 인간이란 인간은 한 놈도 남겨두지 않겠어.’

이를 갈았건만… 사람을 죽이는 살수가 되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한 문파의 문주가 되어 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러나 인간의 씨를 말려버리겠다는 그의 생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루어지기는커녕 스무 명에 달하는 부인을 얻었고 서른 명이 넘어 이름도 헷갈리는 많은 자식을 얻었다.

모두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부모 형제가 죽었을 때는 세상 사람들은 모두 죽이겠다고 다짐했지만, 처자식이 죽었을 때는 그런 생각조차도 들지 않았다.

그는 이미 환갑을 넘긴 노인이다.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세상이 그렇게 만만치 않다는 것을 배운 것이 그를 침묵으로 끌어내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살천문주는 오랜만에 검을 손질했다.

검을 뽑아 녹을 제거했다.

사람들은 녹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지만 무인의 눈에는 녹이 보인다.

녹이 두텁게 싸이면 살을 깨끗이 베어내지 못한다.

녹을 제거한 후에는 날을 갈았다.

삭삭삭…!

검이 새 생명을 얻은 듯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날을 바짝 세워 검에 묻은 기름까지 깨끗이 제거한 후에는 사슴 가죽으로 닦아냈다.

검이 반짝반짝 윤기를 토해낸다.

마지막으로 정향나무 기름을 검 전체에 얇게 발랐다.

검집은 기름칠을 하지 않는다. 그냥 마른 솜으로 잘 닦아주면 된다.

손질된 검을 비스듬히 들어 올려 감상했다.

‘몇 명이나 될까? 이 검에 죽어나간 사람이…..’

수를 헤아릴 수도 없다. 스무 명까지는 헤아렸지만 그 후에는 포기해버렸다.

‘아주 완벽하게 손질했어. 오랜만에 기분 좋게. 너무 아깝군. 이런 검에 또 피를 묻혀야 하다니.’

검의 날을 무디게 만드는 것은 피가 아니다.

베어내는 살점도 아니다. 사람 몸에서 묻어나는 기름이다.

살천문주는 검을 햇살에 비쳤다.

반짝반짝 검광이 아주 맑게 발산된다.

쉬익!

신형을 떠올렸다. 그리고 천장을 향해 일검을 전개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행동이다.

츄우우욱,,,,,!

천장이 갈라지며 피가 주르륵 쏟아져 내렸다. 잠시 후 큰 물체가 힘없이 떨어져 나뒹굴었다.

“살천문주, 그대를 베게 돼서 영광이오.”

검을 들이댄 자는 매섭게 생겼다.

하관이 빠르게 돌고 눈매가 찢어져서 그렇게 보인다.

“그대는?”

“부곡주라고만 알아두시오.”

“그런가? 팔부령에서 죽은 마설송 대신 그대가 부곡주가 되었구먼. 마설송은 조금 안면이 있었는데, 마설송이 부곡주일 때 그대는 뭐하고 있었지? 마설송은 꺾은 검인가?”

“살천문주답지 않소. 살지 못한다는 걸 알 텐데.”

“쯧! 불쌍한 사람….. 이보시게. 마설송이 왜 부곡주가 된 줄 아는가? 머리가 있기 때문이야. 자기가 불리한지 유리한지 명확히 알았고 진퇴에 망설임이 없었지. 허허! 무공만 강하다고 부곡주를 맡은 것은 아닐세.”

“무슨 뜻이오?”

“지금은 내가 살려달라고 애원할 때가 아니란 거지. 자네가 살려달라고 애원할 때라는 것일세.”

“후후후!”

“아무래도 자네는 죽을 운명인 것 같으이.”

“영감탱이가 혓바닥만 살았군.”

“그것 보게. 벌써 격동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아는 사람은 이런 말을 했다네. 살수는 무공으로 싸우는 게 아니다. 살인 방법으로 싸운다. 절대 무공으로 싸우지 마라.”

“…….”

“사곡이 왜 무인들을 상대하지 않는 줄 아는가? 살수 문파 중에서 가장 형편없기 때문일세. 마설송이 없었다면 그나마도 유지하지 못했지. 사실 사곡은 마설송이 죽으면서 끝난 것이나 진배없네. 잘 가게. 내게 죽는 것이 혈배의 대상이 되는 것보다 나을 것이네.”

“쳐라!”

눈매가 날카로운 자가 허공에 대고 말했다.

살천문주는 부곡주만을 바라볼 뿐 사방에서 공격해 올 살검은 신경 쓰지도 않았다.

조용했다. 움직이는 검은 없었다.

“쳐, 쳐라!”

부곡주는 당황했다. 살천문주의 종적을 잡아내고 무려 이십여 명이 달려왔다.

그런데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자네의 명령은 별로 실효성이 없군. 그래서 어떻게 부곡주를 하겠나? 명령이 떨어지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도록 만들었어야지. 내가 한번 해볼까?”

“….?”

“쳐라!”

고오오……!

공기가 파랑을 일으켰다.

움직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살기가 물밀 듯이 밀려왔다.

“이, 이런!”

부곡주는 재빨리 검을 들어 좌측 삼 장 너머를 겨냥했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좌측에서 살기가 밀려왔는데 주변을 자세히 살펴보아도 고양이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

‘이, 이런 일이!’

길보다는 흉이 많다.

부곡주는 곁눈질로 살천문주를 살폈다.

틈을 노리고 달려들 수도 있다. 살천문주는 그렇지 않았다. 여유 있게 웃으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

고오오오…!

다시 살기가 밀려왔다.

이번에는 우측 삼사 장 밖이다.

‘좌측에서 우측으로? 이렇게 빠른 신법도 있다니! 이목까지 완벽하게 속이고, 안 되겠어, 일단은 물러섰다가……..’

파아아앗!

이번 살기는 그냥 끝나지 않았다.

단순히 경각심만 일깨워 주의를 분산시키려는 의도적인 살기 발출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공격해 왔다.

“어림없….”

우측을 향해 검을 내뻗던 부곡주가 길게 찢어진 눈을 부릅떴다.

‘어, 언제! 미, 믿을 수 없어!’

부곡주는 휘청휘청 걸어갔다.

우측….. 그곳에는 한 팔이 없는 사내가 묵빛 검을 들고 서 있다.

역시 의도적인 살기 발출이다. 그는 공격할 생각이 없었다.

공격을 가장했을 뿐.

진짜 공격은 좌측 삼 장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번개처럼 날아 부곡주의 등에 도끼를 박아 넣었다.

후속 행동도 재빠르다. 그는 공격이 성공한 순간 병기를 놓아버리고 뒤로 물러섰다. 혹시나 있을 최후의 반격마저 완벽하게 차단한 행동이다.

죽을 자다. 병기는 죽은 후에 회수해도 된다.

‘살천문이 아니야… 살문이 이런 수법을 쓴다고 들었는데.. 살문? 살문인가?’

부곡주는 몇 걸음 더 걷다가 철퍼덕 쓰러졌다.

그는 자신의 등에 도끼를 박아 넣은 자가 누군지도 보지 못했다.

죽음의 계곡, 사곡.

사곡은 심산유곡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성 서안의 중심부에 위치한다.

원래는 백애산에서 출발했지만 구파일방의 묵인 아래 섬서성을 장악한 다음에 아예 서안으로 들어와 정원을 꾸몄다.

혈배를 들고자 하는 자들은 걱정하지 않았다.

개방 분타주 도룡신개는 막대한 은자를 뜯어가는 대신 혈배를 들고자 암암리에 움직이는 자들을 말해줬다.

도룡신개와 무언의 밀약이 지속되는 한 사곡이 위험에 처할 염려는 없다.

‘마음이 바뀌었어! 그 여우 같은 자식이 사곡을 살천문에 팔아먹었어. 사곡은 끝난 거야.’ 사곡주는 술잔을 기울였다.

사곡이 섬서성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도룡신개의 도움 덕분이다.

도룡신개는 섬서성에서 ‘죽음의 손’으로 불리던 귀마수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줬다.

“헤헤! 입이 많다 보니 돈 들어갈 일도 많고…. 알다시피 동냥짓거리해서는 만두 한 개 사 먹기도 힘들고…. 서로 좋자는 얘기지 뭐.”

평생 싸움만 전전하다 싸움판에서 죽고 싶다던 귀마수의 우수 탈혼마검과 머리 속에 천 가지 지략이 숨어 있다는 좌수 대두귀호를 혈배의 재물로 삼았다. 아주 간단했다.

도룡신개가 제공해 준 정보를 토대로 탈혼마검은 그가 잘 가는 술집에서 독살해 버렸고, 여섯 번째 첩과 정사를 벌이던 대두귀호는 천장에서 떨어져 내린 검날에 등이 꿰어 죽었다. 여섯 번째 첩과 함께.

이제는 반대가 되었다.

자신의 오늘을 있게 만든 도룡신개가 무슨 이유에선지 사곡의 모든 정보를 살천문에게 넘겼다.

그렇지 않으면 나가는 살수마다 도륙될 리가 없다.

그만한 정보를 가진 문파는 개방밖에 없다.

‘늙은이…. 그때 죽여 버릴 것을.’

벌컥벌컥 술을 들이켰다.

독한 술기운이 뱃속을 화끈하게 달궜다.

‘두고 보면 알겠지. 부곡주가 나갔으니. 부곡주마저 당했다면 틀림없이 그 늙은이가 팔아먹은 거야. 후후후! 기껏 이용만 당하고 죽는 꼴이라니.’

사곡의 기반을 잃고 싶지 않았기에 무리한 부탁도 들어주곤 했는데, 들어줄 수밖에 없었는데…..

죽은 마설송이 팔부령으로 떠나기 전에 한 말이 기억났다.

“곡주님, 이렇게 구파일방 눈치만 보다가는 언젠가는 우리 모두 요절날 게 뻔합니다. 차라리 살문처럼 우릴 건드리지 마라! 하고 선포하는 것이 나을지도….”

그때 뭐라고 말했는가.

“미친 소리 하지 마! 곱게 죽는 것도 모자라서 사지육신 다 떨어져 나가고 싶어! 네 눈에는 십망이 장난으로 보이냐? 중원에 있는 살수 놈들이란 살수 놈들은 모조리 기어들 텐데, 감당할 자신이나 있어? 꼴값 떨지 말고 가서 종리추란 놈 모가지나 베어 와.”

그때 마설송은 말했다.

“곡주, 혼자서 하기 힘드시다면 이 길로 살문과 합류하는 것이 좋을 수도….”

더 듣지 않고 벼루를 집어 던졌다.

‘마설송…. 미안하다…’

뒤늦은 후회가 찾아왔다.

정말 이렇게 끝날 줄 알았으면 마설송의 말대로 하거나 수하들을 이끌고 살문으로 귀의해 버리는 건데. 설마 살문이 연합한 살수 문파의 살수들을 몰살시키고 중원 무림인들의 합공까지 받아낼 줄이야 생각이나 했는가.

팔부령에 틀어박혀 나오지 못하는 처지지만 살문이 부러웠다.

사사사삭….!

“크윽!”

“컥!”

비명이 터지기 시작했다.

장원 여기저기서 일시에 터져 나온 비명이다.

‘부곡주가 당했군.’

이제는 확실해졌다. 도룡신개가 자신을 팔아먹었다.

살천문주는 어디서 문도를 규합했을까? 살천문은 이미 몰살해 중원에서 사라졌는데….

이건 이변이다. 구파일방은 멸문한 살수 문파를 묵인한 경우가 없다.

혹 재기하려는 움직임이 보이면 슬그머니 소식을 전해와 발본색원하게 만들었다.

살수가 되고자 하는 놈들을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세상에는 한 많은 놈들이 많고 그들 중 마음이 독한 놈들만 추려도 몇 수레는 나올 게다.

살수 문파로 일어서기는 어렵다.

살수가 되기 위해서는 무공도 익혀야 하고 독심도 더욱 키워야 하고 수련하는 도중 기존 살수 문파의 견제도 받아야 한다.

기존 살수 문파보다 뛰어난 살수를 양성하기란 정말 어렵다.

살수 문주는 살수를 키울 능력이 있다. 그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짧다. 살천문이 무너진 게 이 년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살수를 양성했다니.

정말 그렇다면 살천문주는 희대의 살수다.

그가 살천문주의 직위에서 쫓겨난 것은 운이 없어서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으아악!”

비명이 대청 바로 앞에서 들렸다. 그리고 정적이 찾아왔다.

어머니 뱃속에서처럼 안온하고 편안한 정적이다.

흘러드는 바람결에 피 냄새가 맡아진다.

정겨운 냄새다. 처음 살인을 했을 적에는 사지가 부들부들 떨리고 죽인 자의 얼굴이 꿈속에서도 나타나 벌떡벌떡 깨어나곤 했는데, 어느새 익숙하고 편안한 냄새가 되었다.

덜컹!

대청 문이 열리며 세 사내가 들어섰다.

한 팔이 없는 사내, 목이 없고 머리가 곧바로 몸에 붙은 듯한 사내, 그리고 살천문주.

사곡주는 술병째 들어 입에 틀어박았다.

꿀꺽꿀꺽……….!

술병에 들어 있던 술이 모두 뱃속으로 흘러들어가자 대청 한쪽에 걸려 있던 미인도를 향해 집어 던졌다.

술병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졌다.

사곡주는 더 많은 사람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

하지만 세 사람 이외에 더 들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살천문주가 먼저 입을 열어 말했다.

“사곡주, 오랜만이오.”

“…….”

“아마 한 십여 년 된 것 같은데. 악양에서 만난 후 처음이니까.”

“……. 세, 세 명뿐이오?”

“허허! 세 명이면 충분하다고 생각지 않소?”

사곡주는 눈을 부릅떴다.

자신의 기반이 단 세 명에게 무너졌다는 것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아는 사람은 그렇더이다. 완벽한 살수 한 명은 한 문파를 전멸시킬 수 있다고. 이 사람들은 내가 아는 한 가장 뛰어난 살수들이라오. 일 인이 능히 한 문파를 멸문시킬 수 있는.”

“사, 살천문주가 아는 사람이라면….?”

“사, 살문! 말도 안 돼! 살문은 팔부령에 틀어박혀 있는데!”

“세상일이란 눈에 보이는 것만 믿어서는 안 되는 법이라오. 사곡주도 그만한 이치쯤은 알고 계실 텐데.”

잘못 생각했다.

이들이 살문 살수라면 도룡신개가 자신을 팔아먹었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개방도 이들의 종적을 잡아내지 못하고 있는 게다.

“그, 그런데 왜 나를…….?”

“곡주의 불행이라면 팔부령과 가까이 있다는 점이오. 개인적인 유감은 없소이다.”

“그…렇군. 살문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어. 하하하! 그래야지. 살수는 살인을 해야지. 하하하!”

“곡주는 내가 직접 상대해 드리리다. 곡주와 무주. 이만하면 예우는 해드리는 것이 될 게요.”

살천문주가 검을 뽑았다.

사곡주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난 살천문주 같지 않소.”

“………..”

“살천문주는 목숨을 구해줄 사람이라도 있고, 이렇게 다시 무림으로 끌어들일 사람이라도 있지만…. 내게는 아무도 없소. 사곡이 무너졌으니 나도 죽은 목숨. 살문주에게 전해주시오. 사무령이 되어 살수들의 목에 묶인 끈을 풀어달라고.”

“그건 걱정 마시오, 곡주. 살문주는 이미 사무령임을 선포했다오.”

“뭐, 뭐요! 사, 사무령을?”

“……..”

살천문주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하! 그렇군, 그랬어. 역시… 그래, 부곡주가 옳았어. 살문과 합류했어야 해. 살문과 하하하!”

스르릉…..!

사곡주의 애검이 뽑혀졌다.

애검은 푸른 인광을 뿜어냈다. 살천문주의 검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뺏은 흉검이다.

흉검은 마지막 살광을 자신의 주인에게 뿌렸다.

검이 휘둘러지고, 사곡주의 목이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설마

“이렇게 많은 시체 본 적 있어?”

“구, 구역질이 나오려고 해요.”

“이건 시체가 아냐. 고깃덩이야.”

개방 서안 분타주 도룡신개는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많은 사람과 싸워봤고, 죽여도 봤고, 죽음의 위험에 처한 적도 있지만 이렇게 많은 시신을 본 적은 없다. 본 적이 있기는 하다.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서른을 갓 넘었을 때일 게다. 백 년 만에 처음이라는 가뭄…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역병까지 나돌아 시체 때문에 걸음을 떼어놓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때 외에는 본 적이 없다, 이렇게 시신이 많이 나뒹구는 모습은.

“모두 몇 명이야?”

“지, 지금 파악하고… 우욱!”

기어이 이결 제자는 아침 먹은 것을 게워냈다. 도룡신개는 나무라지 않았다. 비위가 좋은 자신도 울렁거리는 것이 속이 편치 못했다. 시체들은 한결같이 끔찍하다.

사람을 일격에 죽이는 방법은 다양하다. 지법으로 사혈을 눌러 죽이기도 하고, 단번에 목을 잘라내는 경우도 있다.

이번 경우는 정도가 너무 심했다.

일격에 사혈을 베어내기는 했는데 귀신도 되살아날 수 없을 만큼 완벽하게 죽였다.

내장이 쏟아져 나오지 않은 시신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라면.

‘이건 살천문주 수법이 아냐. 살천문이 잔혹하기는 했어도 이 정도는 아냐. 살천문주가 이럴 사람도 아니고. 살문이라고 하기에도… 살문은 깨끗이 죽이는 편이지 이토록 잔혹한 수법을 쓰는 문파는 아닌데… 빌어먹을! 도대체 어떤 놈들이 이 짓거리를 한 거야!’

도룡신개는 발걸음을 떼어놓기가 싫었다. 피가 강을 이루고 있어 발길을 떼어놓을 곳이 없다.

감히 장담하건대 살아 있는 자는 한 명도 없으리라.

이결 제자가 급히 달려와 보고했다.

“모두 스물두 명입니다. 사곡 살수들이고요. 살아 있는 사람은 한 명도…”

“됐어. 수법은?”

“예?”

“어떻게 죽었느냔 말야!”

“그, 그건…”

“도대체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그런 정신머리로 뭘 하겠다는 거야! 다시 파악해!”

소리를 지르는 도룡신개는 죽어 있는 시신 중 한 인물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저자는…’

사곡 부곡주다.

마설송이 죽은 다음 부곡주를 맡았으니 몇 달 해보지도 못하고 죽었다.

‘부곡주가 여기 왔다는 것은… 그렇군. 살천문주야. 살천문주가 이 짓을 했어. 살천문주… 잔혹하게 변했구나, 아주 잔혹하게. 구파일방에게 검을 들겠다는 것인가…’

개방은 사곡에게 살천문주를 흘렸다.

사곡과 살천문주가 싸우는 틈을 타서 살천문주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알아보려는 속셈이었다, 그의 예측대로 살문이 맞는지.

그는 몇 가지 실수를 했다.

먼저 사곡이 이토록 빨리 살천문주를 찾아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의 생각에는 자신이 살천문주에 대한 정보를 알려준 다음에야 사곡이 움직일 줄 알았다.

사곡은 사람을 찾아내는 능력이 없다.

그들은 개방의 정보에 의존했고, 길들여졌다.

그렇다면 결론은 자명하다. 살천문주가 그들 앞에 나타난 게다. 그들에게 자신이 있는 곳을 슬쩍 흘린 게다. 사곡은 겁도 없이 덥석 먹이를 물었고.

그게 두 번째 실수다.

살천문주의 배후에 살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면서도 살천문주의 종적을 잡아내지 못했다.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섰어야 했다. 개방도 전원을 풀어 낮이고 밤이고 뒤졌어야 했다.

세 번째 실수는 살천문주의 무공을 너무 간과했다는 것.

이토록 강할 줄은 몰랐다. 아니, 살천문주의 무공이 아니라 그의 뒤에 있는 자들이 이토록 강할 줄은…

‘살문이야. 살천문주에게 힘을 실어줄 곳은 살문밖에 없어. 살천문주가 이토록 잔인하게 변했다면 살문이라고 변하지 않을 까닭이 없지. 놈들이 팔부령에서 나왔어. 분명해.’

이것 또한 중대 사안이다.

팔부령에는 소림사가 버티고 있다.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백팔 나한과 육십칠 단승이다.

소림사는 봉문까지 선언하고, 살문이 절대로 팔부령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공언했지 않은가.

확실한 증빙도 없이 살문이 팔부령을 벗어났다고 하면… 소림사가 가만있지 않으리라. 그건 바로 소림사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건드리는 결과가 되니까.

‘확실한 증거를 잡아야 해. 증거가 있으나 없으나 살문이 활동하기 시작한 건 분명한데…’

이결 제자가 달려왔다.

“세 명입니다.”

“뭐가?”

“흉수 말입니다. 세 명이 사곡 살수 모두를 죽였어요.”

“뭐야? 확실해?”

“한 명은 너무 확실합니다. 도끼를 사용하는 자인데 아주 손속이 잔혹해요. 그자에게 당한 자들은 모두…”

“그리고 다른 자는?”

다음 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사곡 부곡주처럼 인간 통나무가 되어 쓰러졌겠지.

“다른 두 명은 검을 쓰는데 검이 각기 달라요. 한 명은 검이 굉장히 날카롭고, 죽인 자도 세 명밖에 되지 않아요. 수법도 깨끗해서 시신이 제대로 보존되어 있고요.”

‘살천문주야.’

그가 누군지 쉽게 생각할 수 있다.

사람의 손속이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살천문주의 원한이 하늘에 닿았어도 직접적인 원한이 없는 사람에게는 옛날 버릇대로 산뜻한 죽음을 내린다.

“다른 한 명은…”

“됐어. 그래서 세 명이란 말이지?”

“네.”

“다른 흔적은?”

“모두 잠자듯이 죽었어요.”

“잠자듯이 죽어?”

“반항한 흔적이 없단 말이죠.”

“으음…!”

도룡신개는 신음을 터뜨렸다.

이결 제자가 검이 날카롭다고 말했으니 다른 한 명은 검이 약간 무딜 것이다. 중검이다. 아마도 무딘 검을 사용하는 자는 천력의 소유자일 게다.

도룡신개는 말을 중간에서 끊어버린 바람에 중요한 사실 하나를 놓쳤다.

이결 제자는 검이 무디다고 말하려 했다. 또 하나, 무딘 검에 당한 자는 상흔에 화상 자국이 남아 있었다는 말도 하려고 했다.

화상 자국을 남기는 검은 흔치 않다.

아마도 보고를 끝까지 들었다면 쉽게 묵린검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그는 하나만 생각했다.

잠자듯이 죽었다는 것.

그것은 바로 살수에게 당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암습에, 살수가 암습에 당했다. 암습이라면 일가견 있는 사람들이 암습에…

상대가 살수라는 말이다. 그것도 너무 뛰어난 살수.

“가자. 너흰 시신을 모두 화장한 다음에 따라와. 사람들이 이 꼴을 보면 어떻겠어? 쯧!”

도룡신개는 혀를 차며 돌아섰다. 그때,

“분타주님!”

멀리서부터 분타주를 부르며 달려오는 제자의 모습이 비쳤다.

도룡신개는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또 무슨 일이…’

“뭐, 뭐, 뭐?”

“사, 사곡이 멸문했다니까요. 장원이 온통 피바다예요. 주위 사람들 말로는 비명 소리가 끊이지 않았대요.”

사곡 장원과 이곳과는 오백여 장 거리다.

살천문주는 사곡 살수 일부를 유인해 죽이고 장원을 급습했다.

사곡 살수들은 다른 곳도 아니고 서안 자신들의 장원을 급습해 오는 미친놈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게다.

살천문주의 배후의 인물들이 이곳과 마찬가지로 암습을 했다면… 사곡이 멸문하는 것은 당연하리라.

‘너무 방심했어. 너무! 제길! 미치겠네.’

천외천 흑봉광괴에게 밀서를 건넨 게 엊그제인데 벌써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도룡신개는 사곡 장원을 향해 신형을 날리면서 생각했다.

‘아무래도 이번 일은 내가 직접 보고해야겠어. 살문 놈들… 네놈들은 골칫덩이야.’

개방 용두방주는 팔장로를 모두 소집했다.

중원에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팔부령 싸움으로 상실감에 빠진 정도는 문제도 되지 않는 중대한 사안이다.

차기 개방을 이끌 후계도 자리를 같이했다.

후계는 폐관 수련을 마치고 나온 길이었다.

용두방주와 팔장로는 축하도 해주기 전에 묵직한 이야기부터 꺼내야 했다.

“사곡이 멸문당한 사실은 이미 들어 알고 있을 것이오.”

도룡신개는 제일 먼저 전서를 날렸다. 그리고 좀 더 상세하게 사실을 고하기 위해 직접 개봉으로 달려왔다.

그가 고한 말은 모두 치를 떨기에 충분했다.

“…”

“사곡을 멸문시킨 곳이 과연 살문인지 하는 점을 집중적으로 캐내야겠소. 누가 해주시겠소?”

“…”

팔장로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소림사와의 미묘한 관계가 얽혀 있는 일이다.

비적마의를 장벽 삼아 팔부령에 숨어 있는 살문과 접촉하기도 쉽지 않다.

팔부령을 슬쩍 둘러보는 정도로 알 수 있는 일이라면 이비 분타 제자들의 이목에 걸려들었을 게다. 소림사의 무승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게고.

“이 일은 분운추월 이장로가 맡아주시오.”

방주가 직접 거명했다.

“예, 방주님.”

분운추월은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뇌리에 종리추의 모습이 스쳐 갔다.

“당부할 점은… 살문에 약간의 온정이 남아 있더라도 이번 일만은 냉정히 처리해 주시오. 그러지 못하겠거든 지금 말하고.”

“냉정할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살문과 손속을 부딪치는 것도 아닌데.”

“또 하나, 혈잠화가 멸문했소.”

“…”

이번에도 팔장로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혈잠화는 공백이 된 하남성을 채우는 중이었지. 그런데 멸문했으니… 그것뿐만이 아니라 공백을 메우려는 살수 문파가 모두 중도에서 좌절당하고 있소. 묵월광이 하남성으로 들어갔으니 이 일은 묵월광 소행이 분명할 것인데… 묵월광을 묶어둘 필요가 있소. 누가 해주시겠소?”

“묶어둘 게 무에 있습니까. 차라리 이번 기회에…”

“흑봉광괴.”

“흐르는 강물을 멈추게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겠소?”

“…”

“제방을 쌓으면 될까?”

“방주, 근원지를 찾아 물이 솟구치는 즉시 말려 버리면 되는 일이오. 근원지에서 솟구치는 물은 적어서 말릴 수 있지만 강이 되어 흐르게 되면 멈추게 할 방도가 없소. 악의 씨는 싹이 나올 때 캐내야 하는 것이오.”

“흐름은 멈추게 할 수 없소. 다만 제어할 수 있을 뿐.”

“방주님의 뜻… 알겠습니다.”

흑봉광괴는 공손히 대답했다.

“묵월광은 패도적인 살수 집단이오. 지상에서 사라져야 할 살수들이지. 소고가 혈암검귀의 무공을 익힌 이상 반드시 사라져야 하오. 하지만 지금은 아니오. 난 지금 매우 괴롭소. 개방에 이런 일은 없었는데 내 대에 와서 모두가 귀머거리에 장님이 된 기분이오. 모두 부덕의 소치겠지.”

“…”

“이 일은 무불신개 오장로가 맡아주시오.”

“알겠습니다.”

무불신개는 개운치 않았다.

팔부령에 이어 또 살수들과 부딪쳐야 하다니.

“한 가지 더 있소. 혈잠화와 사곡이 멸문했는데 흉수로 짐작되는 곳이 살문과 묵월광이오. 모두 알다시피 살문과 묵월광은 모종의 연관이 있소. 이번 일도 서로 약속한 계획적인 일인 것 같은데… 무엇을 노리고 벌인 일인지 알아야겠소. 이 일은 화두망 육장로가 책임지고 알아 와 주시오.”

“알겠습니다.”

염색이라도 한 듯 붉은 머리를 지닌 걸개가 대답했다.

참으로 우연한 일이다.

묵월광과 살문은 서로 약조한 일이 없지만 거의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일을 벌였다.

묵월광은 혈잠화를 몰살했을 뿐 별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죽이고 숨고, 느닷없이 나타나 죽이는 일을 반복한다.

살문도 비슷한 행위를 한다.

사곡을 몰살했을 뿐 아니라 섬서성에서 살수 문파로 입지를 굳히려는 살수들을 눈 뜨고 보기 어려울 만큼 잔인하게 도륙한다.

두 문파 모두 살수 문파가 자리 잡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다.

자신들이 살수 문파를 운용하는 것도 아니다. 일절 청부를 받지도 않는다.

하는 행위로만 보아서는 마치 살수를 극도로 미워하는 인의대협 같다.

“너도 견문을 넓히는 게 좋겠지. 장로들을 따라 세상 구경이나 하고 와라. 누구와 함께 가고 싶으냐?”

용두방주가 후계에게 물었다.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행동이 반듯해 도저히 개방도 같아 보이지 않는 청년이 말했다.

“이장로님과 함께 가고 싶습니다.”

“팔부령에?”

“예. 종리추란 자에 대해서는 누누이 들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만나보고 싶습니다.”

“만나서 무엇 하려고?”

“그가 어떤 자인지 알고 싶습니다. 그의 생각을 읽고 싶습니다.”

“생각을 읽는다?”

“생각을 읽지 못하면…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방주님께서 말씀하신 제어도 불가능합니다.”

후계는 스물여섯 살의 나이에 총타 집법당주를 맡은 기재다.

무공뿐만 아니라 지혜도 뛰어나고, 무엇보다 침착성이 돋보인다. 장수로 치자면 지장에 해당되리라.

팔장로는 서슴없이 후계로 추천했고, 방주는 판결을 내렸다.

후계의 임명.

개방이 한 세대에서 또 한 세대로 넘어가는 준비를 마쳤다.

남은 일은 후계가 대개방을 무리 없이 이끌 수 있도록 무공을 보내주고, 지략을 더해주고, 경륜을 쌓아주는 일뿐이다.

한 가지는 마쳤다. 무공.

후계는 천부적인 무인이라고 봐야 한다.

오성이 뛰어나도 그토록 뛰어날 수가 없다. 혹여 하늘이 시샘하여 재난이라도 주지 않을까 염려스러울 정도다.

개방 무공을 두루 섭렵해 젊은 나이에 많은 선배들을 제치고 집법당주를 맡았다. 무공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후계는 집법당주 시절에도 팔장로와 맞겨룰 만큼 강했다.

세상 모든 일에는 천재가 있다. 무인도 천재들이다. 무공을 익혀 명성을 날린 사람이라면 모두 천재라고 할 수 있다. 무에 관한 천재. 그중에서도 특히 뛰어난 천재가 있다. 보통 무인들이 문일지십이라면 천재는 문일지백이다.

그런 자는 당할 수 없다.

나이가 젊다고 해서, 무공을 익힌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해서 경시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후계는 천재다.

이제 폐관 수련을 마쳤으니 강룡십팔장은 얼마나 더 강해졌을까?

하지만 후계는 무공을 사용하려고 들지 않는다. 그는 무공보다는 지략을 믿고, 지략보다는 덕을 중시한다.

용두방주로 가장 적합한 사람이지 않는가.

“생각을 읽지 못하면 제어도 불가능하다? 맞는 말이군. 좋아, 이번에는 분운추월을 따라가 봐. 소림 무승도 있으니 안면을 익혀두는 것도 좋겠지.”

분운추월은 더욱 어깨가 무거워졌다.

후계는 개방의 장래를 짊어지고 있다.

본인 스스로 자신의 몸 가림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만약 무슨 일이라도 벌어진다면…

살문과 후계.

종리추와 후계.

분운추월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두 청년은 너무 흡사하다.

천재라는 점도 그렇고, 무공을 최우선으로 치지 않는 점도 그렇다.

수하를 다룰 때도 다른 무엇보다 덕과 의를 중시한다.

너무 흡사하다.

둘이 같은 길을 걷는다면 세상에서 다시없는 좋은 벗이 될 수 있겠지만… 서로 다른 길을 걸으니… 너무도 다른 길을 걸으니.

봄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봄비라고 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아마도 초여름으로 들어서는 길목에서 쏟아지는 비일 것이다.

장국태… 사람들이 장노라고 부르는 그는 전신으로 봄비를 맞았다.

뼈마디가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쑤셔댄다. 얼굴은 고개도 돌리지 못할 만큼 아프다.

수십 명에게 둘러싸여 흠씬 두들겨 맞았으니 죽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다.

“흐흐흐! 흐흐흐흐…!”

괜히 웃음이 새어 나왔다.

봄비에 씻겨 내려갔지만 두 눈에서는 눈물도 쏟아졌다.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리고 말겠어.’

장노는 이를 악다물었다.

이대로 죽을 수 없다는, 죽어서는 안 된다는 강한 생존 본능이 가슴 밑바닥에서 솟구쳤다.

그는 일어나려고 허우적거렸다.

생각뿐이다. 일어나기에는 너무 많이 맞았다.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두 다리는 완전히 부러져 나뭇가지처럼 꺾였고, 팔도 한쪽은 완전히 뒤로 돌아갔다.

이도 성하지 못했다. 이란 이(齒牙)는 모두 부러져 나가 붉은 핏물이 흘러내렸다.

코뼈도 주저앉았고, 머리도 깨졌다.

죽이려고 때린 것이다.

‘일어나야 해. 이대로 죽을 순 없어, 이대로는…’

장노는 가물거리는 의식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그것도 생각뿐 의식을 잃어버렸다.

장노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비가 오지 않았다.

‘아직 죽지 않았어. 살 수 있어.’

본인 스스로가 의식이 돌아온 것을 느꼈다.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자 자신의 몸 상태를 살펴야 한다는 생각,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보다 앞서서 엉뚱한 생각이 먼저 찾아왔다.

‘어떻게 죽이지… 죽여야 하는데… 반드시 죽이고 말 거야. 가만두지 않겠어. 절대로…’

죽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그때서야 비로소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치밀었다.

장노는 일어나기 위해 바동거렸다.

“일어났나? 쯧! 두들겨 맞아도 흠씬 두들겨 맞았구먼. 보아하니 노름판에서 맞은 것 같은데, 다 잊게.”

낯선 음성이다.

‘노름판? 노름판에서 맞았다면 원이나 없지.’

장노는 음성의 주인을 찾기 위해 고개를 돌리려고 했지만 돌릴 수가 없었다.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눈동자밖에 움직일 수 없었다.

“쯧! 움직일 생각은 말게. 자넨 너무 많이 맞았어.”

‘많이 맞았지, 너무 많이…’

칠 주야쯤 지나 맞은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 무렵이 되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움직일 수 없었다. 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린 듯 말을 듣지 않았다.

“팔 하나와 다리를 잘라냈네.”

‘팔과 다리를… 팔 하나와 다리? 그럼 앉은뱅이?’

절망이 밀려왔다.

저들은 자신이 바라는 대로 했다. 죽이지는 못했지만 죽인 것과 다름없다. 팔 하나와 다리가 없는데 무슨 수로 그들을 죽인단 말인가.

“허리도 다친 것 같네. 앞으로 움직이기 어려울 거야.”

‘허리까지… 아!’

모든 게 끝났다.

“왜…”

“무슨 말이 하고 싶은가? 해보게. 마음에 맺힌 게 있으면 툭 털어놓고 말해 보게. 그럼 좀 시원해질 걸세.”

“왜… 구하셨어요.”

원망이 밀려왔다. 그토록 중한 상태였으면 죽도록 내버려 둘 것이지 뭐 하러 구했단 말인가.

앞으로 어떻게 살라고. 일가붙이 하나 없는데 무슨 수로 살라고.

“사람 목숨이란 그런 게 아니네. 살아 있으면 구해야지. 운 좋은 줄 알게. 내가 마침 거기로 지나가지 않았으면 들개 밥이 되었을 거야.”

“차라리…”

들개 밥이 되는 게 더 낫다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입술이 바짝 말라 말을 할 수 없었다.

사나흘이 무심히 지나갔다.

장노는 며칠이나 지났는지도 알지 못했다.

장노는 억울한 사정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가슴에 맺힌 한이 너무 커서 혼자만 간직할 수가 없었다.

이야기가 끝난 후 노인이 말했다.

“업보일세. 그게 자네 업보야. 다 잊고 편히 쉬게나.”

‘그럴 수밖에 없죠. 내가 이 몸으로 무얼 어떻게 하겠습니까? 잊을 수밖에요.’

“그만 일어나게. 반가운 손님이 왔는데 얼굴은 봐야지.”

장노는 노인의 음성에 부스스 눈을 떴다.

‘반가운 손님…?’

장노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노인이 등 뒤로 손을 넣어 일으켜 앉혔다.

장노는 무려 십여 일 만에 일어나 앉아본 것이다.

아직도 상처가 욱신거렸다. 고통이 엄습했다. 머리끝이 쭈뼛 서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몰매를 맞을 때도 아팠지만 지금은 더 아팠다.

누워 있을 때는 몰랐다, 이토록 중한 상처였는지.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고 앞을 보자…

“너!”

장노는 자신도 모르게 고함부터 질렀다.

“으으으…”

짐승의 울부짖음이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그는 연신 꿈지럭거렸다. 움직일 수 없는 처지란 것을 망각한 듯 자꾸만 달려들려고 했다.

단단한 체격의 노인은 뒤로 물러서 잠자코 있었다.

장노가 마음껏 욕설을 퍼부을 수 있도록 시간을 주었다.

장노는 눈을 감은 채 파르르 떨었다.

원수가 눈앞에 있지만 어찌할 수 없는 처지이지 않은가. 갑자기 자신의 처지가 불쌍하게 생각되고 세상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죽이고 싶었는데 그런 생각조차도 들지 않았다.

머리 속이 하얗게 탈색되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두 남녀가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었다.

중년 사내는 기름진 음식만 먹었는지 턱살이 두툼했다. 배도 임신한 여자보다 더 많이 튀어나왔다. 여자는 예쁘장하지만 가느다랗고 작았다. 또 젊었다.

두 남녀가 나란히 앉아 있자 마치 부녀간처럼 보였다.

장노가 다시 눈을 떠 사내를 노려보았다.

“사, 살려주게. 잘못했네. 바라는 것이 있으면 말해 보게. 평생 호의호식하며 살게 해달라면 그렇게 해주겠네. 그만한 능력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잖나.”

“사, 살려주세요.”

두 남녀는 비단옷을 입고 있었지만 왠지 초라해 보였다.

장노는 원인을 알았다.

중년 사내의 오른 손목이 절단되어 있다. 천으로 둘둘 말았는데 천에 묻은 피가 선홍색인 것으로 봐서 잡혀올 때 절단된 듯하다.

노인이 장노를 쳐다봤다.

그의 의사를 묻고 있는 게다.

장노는 대답하지 않았다. 중년 사내와 여자를 바라보며 뜨거운 살기만 활활 불살랐다. 그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노인 곁에 있는 사내가 나섰다.

키가 작고 약간 뚱뚱하며 다부진 체격을 지닌 사내는 도끼를 들고 있다.

쒜에엑…!

도끼가 바람을 일으켰고, 중년 사내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머리가 떨어졌다.

“아악! 아아악! 아악…!”

비명은 여자가 질렀다.

너무 놀라 양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공포에 질려 바락바락 비명을 질렀다.

도끼 든 사내가 여인에게 다가섰다.

“사, 살려줘. 제, 제발! 제발 살려줘요, 네? 살려만 주시면 뭐든지 다 할게요.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애원을 하던 여인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옷을 벗기 시작했다.

“제발요! 잠깐만요!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쒜에엑!

도끼가 다시 허공을 갈랐고, 마지막 발버둥을 치던 여인은 풀썩 고꾸라졌다.

여인의 머리가 몸통에서 분리되어 떼구르르 굴렀다.

“우린 자네를 돌봐줄 수 없네.”

“…”

장노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죽어 자빠진 두 남녀의 모습만 지켜봤다.

사내는 이제 겨우 여덟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를 강간했다.

음부가 찢어져 피가 철철 흘러내리는데 치료는커녕 헛간에 가둬 버렸다.

여덟 살… 세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아이는 하루에도 몇 번씩 사내의 노리개가 되었다. 상처가 아물지도 않았는데 운다고 때려대면서 강간했다.

여인은 옆에서 즐거움을 만끽했다.

사내가 동녀를 강간하는데도 말릴 생각은 하지 않고 낄낄거리며 같이 즐겼다.

어린아이는 자신이 무슨 일을 당하는지도 몰랐다.

아이가 고통스러워한 것은 하체의 고통도, 사내의 묵중한 체구도 아니었다. 배고픔이었다. 하루가 이틀이 되고 이틀이 사흘이 되었을 때, 아이는 배고픔에 지쳐 쓰러졌다.

여덟 살 어린아이는 그렇게 죽었다.

두 남녀는 아이의 시신을 뒷간에 버렸다.

강간하고 굶겨 죽인 것도 모자라 영혼마저 편히 쉬지 못하도록 똥오줌이 가득한 곳에 던져 버렸다.

혼자서 동냥젖을 얻어 먹이며 키운 아이가 오물 속에 파묻혔다.

그의 직업이 분뇨를 치우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날 동전 두 푼을 받고 분뇨를 치우지 않았다면 딸자식이 분뇨 속에 파묻혀 죽은 사실도 몰랐을 게다.

아이가 왜 남의 집 뒷간에 빠져 죽었을까? 볼일이 급해 아무 집이나 들어왔다가 발을 헛디딘 것일까? 그렇다면 왜 하의는 벗겨져 있는 것일까?

주변을 탐문한 끝에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은 사람으로부터 아이가 당했을 고통을 전해 들었다.

아프다는 소리, 살려달라는 소리. 배고프다는 소리…

사실을 알고 난 그에게 돌아온 것은 몰매였다.

두 남녀는 죽었다. 하지만 시원하지가 않다. 어떻게 해야 마음이 풀릴까?

노인의 음성이 귓전을 간질였다.

“어디 연고 없나? 자네에게 큰 도움을 받았으니 자네를 이대로 두고 떠나면 도리가 아니지.”

‘…큰 도움?’

도움을 준 일이 없는데, 오히려 큰 도움을 받았는데 왜 노인은 도움을 받았다고 하는 것일까?

문득 장노의 눈에 도끼 든 사내가 들어왔다.

그는 이제야 자신의 마음이 편안해지는 방법을 알았다.

“사람… 죽이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던데 뭘 하는 분들이신지요?”

“살수라네.”

노인은 숨기지 않았다.

“살수이긴 하지만 공공연히 드러내 놓고 청부를 받을 수 없는 살수지. 입에 풀칠은 해야겠고… 어쩌겠나? 자네같이 반쯤 죽었다 살아난 사람은 원한이 많지. 이제야 알겠는가, 자네에게 도움을 받았다고 말한 뜻이 무엇인지? 너무 야박하다고 생각 말게.”

“어, 어르신, 저는 돈이…”

“걱정 말게. 청부금은 저자가 이미 지불했네. 논 문서, 밭 문서, 노비 문서, 차용증까지… 재산이 상당하더군. 자, 이제 자네가 머물 곳을 말해 보게. 어디든 가야 할 게 아닌가?”

“어르신, 부탁이 있습니다.”

“말해 보게.”

“딸내미 곁으로 보내주십시오.”

노인은 잠자코 장노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중년 부부는 감쪽같이 실종되었다.

고래등 같은 장원과 수십 필지의 논과 밭을 그대로 두고, 돈을 빌려준 사람들에게 갚으라는 말 한마디 없이 사라졌다.

그들이 가져간 것은 액수가 얼마인지 추측도 되지 않는 막대한 은덩이다.

그것도 내원 담벼락 있는 곳에 푹 파인 구덩이가 없었다면 짐작해 내지 못했을 게다.

“이거 항아리 묻었던 자국 아냐?”

“그런 것 같은데. 몇 개나 돼?”

“여섯 개. 여섯 항아리야.”

“여섯 개면 돈이 얼마야?”

“못해도 십만 냥은 넘지 않을까?”

“그 돼지가 그렇게 부자였어? 햐아!”

살판이 난 사람은 중년 사내에게 금전을 차용한 사람들이다. 또 노비들이다.

울상을 지은 사람은 하인들이다.

그들은 작게는 일 년에서 많게는 십 년까지 세경을 받지 못했다.

하인들은 며칠간 더 머물렀고, 중년 부부가 돌아오지 않자 집 안 살림을 나눠 가졌다.

“이게 뭐야? 패물이란 패물은 몽땅 가져갔잖아? 죽일 놈들!”

“그러나저러나 저 논밭은 어떻게 하지? 이 집도 그렇고 말야.”

“신경 쓰지 마. 문서도 사라진 걸 보니 어디 가서 모르는 놈한테 팔아먹겠지 뭐. 그 사람들이 횡재한 거지. 그렇게 파는데 제값이나 받겠어?”

중년 부부가 도주한 것에 대해서는 크게 의아해하지 않았다.

“천벌이 두려웠던 게지. 아이를 그렇게 죽였으니. 아이만 죽였어? 그 아비는 또 어떻게 죽였고? 그런 연놈은 다른 데 가서도 편히 살지 못할 거야. 콱 도둑이나 만나서 몽땅 뺏겨 버렸으면 속이 다 시원하겠네. 따지고 보면 저 하인 놈들도 천벌을 받아야 돼. 시킨다고 때려 죽이는 놈들이 어디 있어!”

어린아이를 강간한 사건은 쉬쉬했지만 입에서 입을 타고 건너가는 중이었다.

십삼만 냥짜리 청부.

대단히 큰 청부다.

개방과 하오문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는 이런 식으로밖에 움직일 수가 없다.

청부금을 표적에게서 받는다는 발상도 어쩔 수 없이 하게 됐는데… 이렇게 큰 청부가 될 줄은 생각지 못했다.

뒤끝도 깨끗하다.

개방이나 하오문, 그 어느 곳도 중년 부부의 실종 사건에 뛰어들지 않는다.

살천문주는 은자와 은덩이가 가득 든 항아리 여섯 개를 마차에 실었다.

“잘 가게. 안부나 전하고.”

“네, 문주님도 몸조심하시고요.”

“문주님은 무슨… 이제 다른 말로 불러주게.”

“다음에는 그러죠.”

외팔이 사내, 좌리살검이 마차 좌석에 앉아 대답했다.

“그럼 이만… 끼럇!”

살천문주와 광부는 멀어져 가는 마차를 눈으로 배웅했다.

저만한 돈이면 살문 외장이 굴러갈 수 있다. 또 한 가지 소득이라면 개방과 하오문의 이목을 속이고 청부받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전에는 청부자를 기다렸지만 이제는 찾아다닌다.

소극적인 방법에서 적극적인 방법으로 바뀌었다.

문제는 청부자의 입 단속인데… 그것도 살문 외장이 본격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하면 입이 가벼운 자로도 얼마든지 단속할 수 있다.

“이번에는 좌리살검이 왔으니 다음에는 구류검수가 오겠군요.”

광부가 중얼거렸다.

“그런가? 차례가 그렇게 되나? 허허! 이번에 좌리살검이 큰 욕을 봤어. 자네도 그렇고. 사람을 그렇게 죽여본 적 있었나?”

“다시 그런 살수는 펼치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래야지. 나도 섬뜩했는걸.”

종리추는 가장 무서운 살수를 원했다.

가능하다면 일검에 양단해 버리는 방법도 좋다고 했다. 구파일방의 십망처럼 갈기갈기 찢어 죽일 수 있으면 더욱 좋다고.

살천문주와 살문은 깨끗한 수법을 쓴다.

사람을 죽이더라도 필요한 부분에 필요한 힘만 가해서 죽인다.

그런 관념을 완전히 깰 필요가 있다. 그래야 살문이 움직인다고 생각하면서도 혼란스러워한다. 당분간만 지속되는 효과에 불과하겠지만 적어도 살문 외장이 본격적으로 돌아갈 시간은 벌어놔야 한다.

살천문주와 광부는 흩어졌다.

광부는 산속으로 숨어들어 갔고, 살천문주는 아무 거리낌 없이 도읍을 향해 휘적휘적 내려갔다.

비사

꾸르르릉…! 꽈앙!

하늘이 아침부터 우중충하더니 기어이 천둥 번개가 몰아쳤다.

여름으로 들어섰는가 싶더니 비부터 쏟아낸다. 아마도 이 비가 그치면 살을 태우는 태양 열기가 내리쬐기 시작할 게다.

‘쉽게 그칠 비가 아냐.’

백돈인은 눈을 감았다. 장마가 시작된 것 같다. 그러면 더욱 좋다. 일 년 열두 달 비가 그치지 않고 쏟아졌으면 좋겠다.

그는 가랑비보다도 지금처럼 펑펑 쏟아지는 폭우가 좋다.

옷섶을 파고들어 살을 적시는 축축한 쾌감이 좋다.

장마가 그치면 폭염이 내리쬔다. 그러면 또 기다려지는 것이 있다.

태풍이다. 태풍은 장마처럼 길게 오지는 않지만 빗줄기는 한결 거세고 양도 많다.

빗줄기가 시야를 가려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구릉 아래는 희뿌연 안개뿐 코끼리가 지나가도 보지 못할 것 같다.

‘지겨운 일도 거의 끝나가는군.’

명문대파에서 차출했다는 젊은 기재들은 백돈인이 깜짝 놀랄 정도로 성취가 빨랐다.

처음에는 우습게 생각한 게 사실이다.

무인이면 무공이나 익힐 것이지 살수들이 사용하는 은신술을 배워서 무엇에 쓴단 말인가. 더군다나 신법만 펼쳐서 따라잡겠다니.

일 년은 족히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재들을 잘못 본 거다.

그들은 건방지지 않았다. 성심성의를 다해 은신술을 파악하려고 애썼다. 그들이 장담한 대로 신법 이외에는 일절 다른 무공을 사용하지 않았다.

백돈인은 이제야 이들이 여기서 무얼 하는지 알았다.

은신술을 배워 살수들을 상대하겠다는 것은 진작 알았다. 살문에 호되게 망신당했으니 절치부심하는 것도 이해했다.

그런데 그것뿐만이 아니다.

이들은 살수의 무공을 배우고 있다.

살수들의 은신술은 진작 파악했으나 쉽게 놓아주려고 하지 않는다.

일부러 허점을 드러내 공격하도록 유혹하고, 당한다.

이들이 배우는 것은 살수의 검이다.

은신한 상태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 검은 언제 어떻게 전개하는지, 초식은 무엇이며… 하다못해 검을 전개할 때 어떤 심리 상태인지까지 배운다. 골수까지 아주 철저히 배운다.

‘큰 실수를 저질렀어. 앞으로 이들 앞에 선 살수는 고양이 앞에 쥐야. 내가 이 손으로 살수들의 숨통을 조여 버린 거야.’

후회 막급했지만 이미 지나 버린 일이다. 또 거절할 수도 없었다. 비망사를 지키기 위해서는.

살인을 하고도 무사하려면.

‘살문… 정말 대단한 놈이야. 한번 만나보고 싶군. 어떤 자인지. 후후! 그대도 알았겠지, 살수 문파가 느끼는 비애를. 그래서 그런 행동을 했을 게고. 아무도 꿈꾸지 못했던 길… 사무령… 부디 성공하기 바란다.’

살문과 인연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살문은 비망사 식구를 많이도 죽였다. 가장 큰 손실은 오른팔이나 다름없던 왕공안이 죽은 것이다.

그래도 살문주가 뜻을 펼치기를 바랐다.

공격이야 이쪽에서 먼저 한 것이니… 그것도 구파일방의 사주를 받고.

쏴아아…!

빗방울이 더욱 굵어졌다.

백돈인은 문득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사위가 너무 조용하다. 공격이 시작된 지 한 시진이 흘렀으니 지금쯤이면 모습을 드러냈어야 한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접전이 벌어졌어야 한다.

조용하기만 하다. 폭우가 쏟아지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

‘이상해. 시간이 지났는데…’

백돈인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전신에 진기를 휘돌렸다. 한바탕 전신을 휘돌고 돌아와 단전에 고이는 진기를 다시 끌어올려 청각에 집중시켰다.

쏴아아아…!

굵은 빗방울 소리가 고막을 찢어낼 듯 거세게 들렸다.

제거했다. 빗소리는 듣고자 하는 소리가 아니다. 의념으로 빗소리를 무의식중에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청력을 넓혀갔다.

사사사삭…!

움직이고 있다. 비 때문에 공격이 늦어진 겐가? 아니다. 그럴 리 없다. 그가 알고 있는 무림 기재들은 결코 빗방울 따위에 길이 막힐 사람들이 아니다.

촤아악!

‘이건!’

백돈인은 깜짝 놀랐다.

하마터면 청력에 모인 진기가 흐트러져 전신으로 마구 뒤엉켜 들어갈 뻔했다. 그렇게 되면 주화입마다. 진기를 끌어올린 상태에서는 격동해서는 안 되는 것을.

그는 진기를 풀고 일어섰다.

‘확인해야 돼.’

풀숲에 배를 깔고 엎드렸다. 그리고 쏜살같이 산 아래를 향해 기어 내려갔다.

‘아!’

비명이 새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열두 살짜리 꼬마가 찾아온 적이 있다. 꼬마는 살수들이 우글거리는 비망사에 들어와서도 전혀 기죽지 않았다.

“살수가 되고 싶어요.”

꼬마는 당당히 말했다.

그 기개가 좋아 살수로 양성했고 열여덟이 되던 해, 첫 살인을 시켰다.

“왜 살수가 되고 싶었니?”

“돈 많이 벌려고요.”

“사람을 죽여서?”

“어쩔 수 없잖아요. 집에는 농사지을 땅도 없는걸요. 제가 번 돈이면 부모님과 형제들이 평생 잘 먹고 잘살 거예요.”

“가족도… 네가 살수라는 것을 아니?”

“몰라요. 장사해서 갑부가 된 줄 알아요.”

그 아이가 죽었다.

첫 일격은 눈썹 위에 있는 양백혈에 가해졌다.

지법으로 짚은 것이 아니라 권이나 수로 파괴해 버렸다. 일격에 이마 뼈가 부서졌다.

그것만도 치명적인데 검이 중완혈을 뚫고 지나갔다.

아이는 아혈인 양백혈을 가격당해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무섭도록 치밀하고 잔인한 놈들이다.

‘놈들이 근처에 있을 거야.’

아이의 체온은 아직도 따뜻했다. 중완혈에서는 붉은 피가 흘러내려 빗물에 쓸려 내려간다.

백돈인은 아이의 부릅뜬 눈을 쓸어 내렸다. 그리고 소리 나지 않게 조심조심 엎드려 산 아래를 향해 기어갔다.

얼마쯤 기어갔을까?

숨죽이며 소리를 들어보았지만 빗방울 소리 외에는 들리지 않는다.

‘적어도 삼 장 이상은 떨어져 있어.’

삼 장이라고 해봐야 경공 한 번 펼치면 따라잡을 거리이기에 백돈인에게는 추적하기 충분한 거리다.

품에서 호각을 꺼내 입에 물었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항상 준비하고 다녔는데 여기서 써먹을 줄이야.

‘이놈들은 우릴 상대로 실전 수련을 시작했어. 진짜로 죽이는 거야. 잔혹한 놈들… 좋아, 어디 해보자고.’

삐이익…! 삐익…!

호각 소리가 빗방울을 뚫고 멀리 퍼져 나갔다.

진짜 죽고 죽이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여태까지처럼 공격 형식만 취하는 것이 아니라 검이 살에 닿고 뼈를 갉아낼 때까지 찔러 넣는 진짜 싸움이다.

비망사 살수들의 움직임이 기민해졌다.

사사사삭…! 쒜에엑…!

여기저기서 검풍이 날았다.

“크윽!”

답답한 신음도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기재들은 아혈을 제압할 필요성이 사라지자 거침없이 병기를 휘둘렀다. 신법만 펼치겠다는 약속도 저버리고 자신들이 익힌 최고의 무공을 펼쳤다.

구십여 명이 한꺼번에 펼치는 무학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무당파의 암향표가 보이는가 하면 종남파의 천하삼십육검도 모습을 드러냈다.

‘너무 강해. 우릴 속속들이 알고 있고. 제길! 틀렸어!’

절망은 백돈인에게도 찾아왔다.

기재 중 네 명이 동서남북 사방에서 물밀듯이 몰아쳐 왔다.

비망사 살수들이 전개하던 살공 그대로다. 놈들은 자신을 허공으로 띄우려 하는 게고, 수법에 말려들어 허공으로 솟구치는 순간 목숨이 끊어진다.

‘빌어먹을! 개 같은 세상!’

백돈인은 배를 깔고 납작 엎드렸다.

병기가 다가오고 있지만 개의치 않았다.

‘움직이면 죽는다.’

네 명의 병기가 일족일도의 거리에 들어섰을 때 백돈인은 동남쪽을 향해 튕기듯 굴러갔다.

파앗! 쒜에엑!

병기가 어깨를 스쳐 갔다. 또 다른 병기는 허벅지에 커다란 상처를 냈다.

‘망설이면 죽는다!’

백돈인은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벌떡 일어나 산 아래를 향해 질주했다.

호각을 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삐익! 삐…이익!

퇴각 신호!

과연 이들의 손에서 벗어나 퇴각하는 살수가 몇 명이나 될지.

‘죽을 때가 다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그렇군.’

기재들은 그를 뒤쫓지 않았다. 자신의 영역을 고수해야 한다는 살수들의 법칙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게다. 그래야 더 많은 고기들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그물을 펼쳤는데 그물이 제 마음대로 움직이면 고기들이 다 빠져나간다.

싸움은 순식간에 끝이 났다.

비객은 비망사를 너무 잘 알았고, 구십여 명이 일시에 무공을 펼치니 빠져나갈 자가 없었다.

“몇 명이지?”

“백스물한 명. 한 명 빠져나갔어.”

“비망신사 백돈인이군. 잘했어. 그자를 쫓았다가는 서너 명쯤 더 빠져나갔을 거야.”

비객은 나이의 상하가 없다. 배분도 필요없다. 무공의 상하도 없다. 사문과 혈족까지 버린 그들인데 가릴 것이 무엇인가. 그들은 모두 평등하다.

빗속에 구십여 명이 늘어섰다.

도인도 있고, 승복을 입고 있는 승인도 있고, 여인도 있다.

처음 입을 열었던 자가 목청을 높여 말했다.

눈빛이 솟구치는 불길처럼 활활 타오르고 입을 굳게 다물어 의지가 굳세 보이는 청년이다.

“자, 이제 우리는 건너갈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오늘 우리는 가장 잔혹한 수법으로 비망사를 몰살시켰다. 우린 정도인이 아니다. 명예를 탐해 앞에 나설 수도 없다. 어둠 속에 숨어 무림을 지키는 야조. 그게 우리다.”

구십 명의 기재들이 숨죽였다.

이제 그들은 도인도 승려도 아니다. 남자도 여자도 아니다. 구십 명은 이름도 없는 새가 되었다.

“건너갈 수 없는 강을 건넜으니 우리도 생존을 모색해야 한다. 구파일방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해준다지만 우리는 우리 스스로 살아남아야 한다. 우리를 이끌 영도자, 제일비객을 오늘 이 자리에서 뽑았으면 한다. 구십 명의 생명을 좌지우지할 절대무쌍의 권력을 지닌 영도자. 하고 싶은 자가 있으면 나와라.”

말을 마친 청년은 한쪽으로 물러섰다.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구십 명의 기재들은 모두 한 사람에게 눈길을 모았다.

방금 말을 꺼낸 청년, 그의 전 사문은 화산파다. 그는 매화검수였고, 서른네 명의 매화검수 중에서도 가장 강했다.

화산파 무인들은 모두 그가 화산파 차기 장문인이 되리라 생각했다. 비객에 지원하지 않았다면.

도복을 입은 젊은 도장이 말했다.

“우리 무공은 모두 엇비슷해. 우리끼리 승부를 내면 석 달 열흘이 지나도 판가름나지 않을 거야. 넌 우리와 다른 점이 있지. 결단력. 결단력만은 아주 탁월해. 잘못된 결단이라면 위험천만하지만 너의 결단은 항상 옳았어. 널 추천한다, 제일비객으로.”

“좋아, 나도 추천해.”

“나도 추천하지.”

여기저기서 한 사람 한 사람 그를 추천했다.

제일비객은 절대무쌍의 권력을 지녔지만 누가 하든 상관없다.

비객 자신들 스스로도 활동 기한을 모두 채울 수 없다고 생각하니까. 그전에 죽을 것이라고.

살문은 소림 오선사를 죽였다.

비객의 무공은 오선사에 비해 강하다고 할 수 없다. 최대한 많이 봐줘야 비등한 정도다.

오선사를 죽인 살문과 싸워야 하리라.

절대적인 장공으로 숱한 고수를 추풍낙엽처럼 쓸어버린 혈영신마도 죽여야 하리라.

그들보다 더 강한 마두가 나타날 것이고, 자신들이 죽여야 하리라.

“좋아, 그럼 내가 제일비객이 되겠다. 이의 있으면 말해라.”

“…”

“후후! 만장일치라면 박수 정도는 쳐야지?”

“하하하! 엎드려서 절 받는 법도 가지가지군. 좋아, 제일비객이 박수를 치라고 하니 쳐야지. 하하하!”

비객들은 비망사 살수들의 죽음이 덮인 구릉에서 통쾌하게 웃었다.

“그럼 첫 명령을 내려볼까? 비망신사 백돈인을 살려둘 수 없지. 그놈 역시 살수니까. 사람을 많이 죽였으면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돼. 내 첫 명령은 비망신사의 추살이다. 하지만 그전에 우리 비객의 조직부터 정리해야겠어.”

쏴아아아…!

빗방울은 더욱 굵어졌다.

비가 내려서 다행이다. 피 냄새, 죽음의 냄새를 씻어가니까. 폭염이 내리쬐는 날씨였다면 잠시도 머물러 있지 못했을 게다.

“우린 아홉 문파에서 열 명씩 차출됐어. 문파 개념을 없애기 위해서 각 파에 한 명씩 열 개 조로 나눈다. 순서는 무작위야. 마음에 드는 사람끼리 모여도 좋고. 어쨌든 한 조에 같은 문파 사람이 섞여 있으면 안 돼. 우린 모두 생사를 같이할 거니까. 산을 내려가는 동안 조 편성을 끝내놓도록 해.”

말을 마친 제일비객이 가장 앞서 산을 내려갔다.

그 뒤로 공동파 육천객 중 살아남은 한 명이 뒤를 쫓았다. 또 그 뒤로 청성파에서 온 도인이 따랐다.

열 개 조는 자연스럽게 신속히 이루어졌다.

십 년 동안 생사를 같이할 사람들을 결정하는 조 편성이.

수많은 지류에서 흘러든 강물을 받아들이며 중원을 가로지르는 황하는 하남성 북단으로 흐른다.

황하는 바다와 같이 넓고 큰 강이다.

그런 강물이 일정한 지점에 이르러 호수같이 넓게 퍼지며, 그렇게 넓은 강에는 섬도 있기 마련이다.

하남성 국가점은 개봉부 개봉에서 북으로 오십여 리에 위치한 강변 마을이다.

굽이굽이 흘러 국가점까지 달려온 황하는 잠시 쉬어가겠다는 듯 넓게 흐트러진다.

강물이 쉬어가는 곳, 그 한가운데 모도와 자도라고 불리는 섬 두 개가 있다.

원래 섬 이름이 모도와 자도는 아니다. 주변 마을 사람들이 모자가 다정히 앉아 있는 것 같다고 해서 부르게 된 토속 이름이다.

모도와 자도에는 사람도 산다.

모도에는 열네 가구가 살고, 자도에는 아홉 가구가 산다.

황하는 많은 사람들의 생계를 유지시켜 주지만 특히 이들 스물세 가구 사람들은 평생 황하만 보며 살아왔다. 그들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적부터 황하는 늘 곁에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황하를 떠났다.

“하남성을 벗어나야 할 것이며 고향이 모자도라는 것은 영원히 함구해야 한다. 그러지 않을 경우 목숨을 책임질 수 없다. 알겠느냐!”

“예, 예…”

모자도 사람들은 황하를 떠나기 싫었다.

그들이 태어나 자라면서 배운 도둑질이라고는 황하에서 물고기를 잡는 것뿐이다.

척박한 모자도는 농사를 지을 땅이 없다. 기껏해야 염소 몇 마리 방목하는 정도다. 그러나 황하로 눈을 돌리면 달라진다. 그곳에는 그들이 편하게 살 만한 모든 것이 숨어 있다.

숨어 있는 것도 아니다. 모자도 주민들은 황하 속에 숨어 있는 보물을 간단히 끄집어낼 수 있다. 물길이 어디서 빨라지며, 고기가 어느 쪽으로 흐르는지 모두 안다.

크게 고생하며 살 필요가 없다.

뭍에 나가면 대궐 같은 장원에 비단옷을 쫙 빼입은 사람들이 보이지만 부러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렇게 살라고 정해진 거야.”

뭍사람은 뭍사람이고, 자신들은 자신들이다.

자신들과 뭍사람은 전혀 별개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그런데 병기를 휴대한 무인들이 들이닥쳐 삶의 터전에서 떠나라고 한다.

아무리 욕심이 없고 하루 먹을 것은 그날 잡아 해결하는 사람들이라지만 돈의 가치는 안다.

무인들이 쥐어준 돈은 뭍에 나가서도 편히 살 수 있을 만큼 큰 돈이다.

그래도 모자도를 떠나기 싫다.

무인들은 일침을 박았다.

“다시 돌아올 생각도 하지 마라. 모자도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목숨을 잃게 될 게다. 명심해라. 죽지 않으려면 모자도에 대해 함구할 것,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말 것.”

세상에 거지 없는 곳은 없다.

후미지고 궁벽한 산골 마을에도 거지는 있다.

위협을 가하는 무인이 거지이니…. 그들의 눈을 피해 헛소리를 하고 다닐 수 없다.

모자도 사람들은 거지들이 누구인지 안다.

개방.

“화산파 매화검수 유홍이 제일비객이 되었답니다.”

“유홍… 뛰어난 젊은이지. 우리 개방도였다면 후계 선정이 곤란했을 거야. 아주 뛰어나지. 잘됐어.”

“유홍은 비객을 열 개조로 편성했습니다. 일 개조에 아홉 명씩. 조는 비라 불리는데 제이비에서 제십비까지 모두 우리 천객이 맡았습니다.”

“모두 같은 처지이다 보니… 먼저 나서는 사람을 거절할 분위기가 아니었겠지. 잘됐어.”

흑봉광괴는 넘실거리는 황하를 바라봤다.

개방 총단과 지척이라고 할 수 있는 거리지만 개방도는 모자도에 대해 함구할 게다. 대부분은 정말 모르는 것이고, 일부는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다.

알면서 말하는 자는 개방도라 할지라도 싸늘한 시신이 되리라.

구파일방.

그들도 적이다.

사마만 적이 아니다.

사마를 척결하는데 방해가 되는 자도 적이다.

‘열이고 스물이고… 백 명이고 천 명이고… 악의 씨앗은 제거해야지. 죽이고 죽이다 보면 언젠가는 끝이 나는 거야. 그 방법밖에 없어, 이 세상을 정화시키는 방법은.’

흑봉광괴는 발길을 옮겼다.

모자도에 들어온 사람은 모두 서른일곱 명이다.

일부는 구파일방에서 왔고, 일부는 명문세가의 자제들이다. 또 일부는 경륜이 미천하여 아직 무명이 드높지 못하지만 실력만은 최정상에 있는 자들이다.

서른일곱 명은 현재로써도 최강의 무인들이다.

무공으로 견준다면 비객과 겨뤄도 하등 손색이 없으리라.

흑봉광괴는 그들의 체질을 꼼꼼히 점검했다. 진맥 정도가 아니라 벌거벗겨 놓고 각 혈도의 강약을 타진했다. 탕약을 복용시켜 인체의 반응도 조사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세심하게 점검했다.

그 과정에서 여섯 명이 탈락했다. 모자도에서 살아 나간 행운아들이다.

최종적으로 선발된 서른한 명.

“너희는…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돼. 죽느냐… 사느냐. 지금이라도… 물러서고 싶으면 물러서. 뭐라고 할 사람 아무도 없어. 자신 없는 사람은 지금 물러서는 게 우리에게도 득이야. 천외천 천객이 한 사람이라도 줄어들면 우리만 손해지.”

서른 한 명은 각기 다른 표정을 지었다.

여유 있는 웃음을 흘리는 사람도 있고 투지로 불타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젊음이 있으니까.

“좋아, 그럼 오늘은 푹 쉬도록 해. 너희가 수련할 무공은 구진법이야. 일종의 내공법으로… 완성하면 지금보다 배는 강해져. 철인이 되는 거지.”

먼저 탈락한 여섯 명은 이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서 돌아갈 수 있었다.

이제 이들은 ‘구진법’이라는 말을 들었으니 실패하면… 죽는다.

구진법은 수련이 금지된 살신무공이다.

흑봉광괴의 말이 빨라졌다.

“내일부터 바로 수련을 시작하도록 하지.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동안 너흴 지탱해 주는 것은 단 몇 글자의 심결 뿐이야. 엽신봉인단. 이 말을 꼭 기억해 둬. 엽신봉인단이야.”

엽신봉인단… 칼끝에 맡긴 몸.

무슨 심법이 그렇단 말인가. 무엇을 의미하는 말인가.

서른한 명의 천객들은 심상치 않은 예감을 느끼고 긴장했다.

의원들 중에는 간혹 봉침법을 사용하는 의원들이 있다.

꿀벌의 침으로 경혈을 자극한다. 침액이 인체에 스며들어 온열을 일으키며 봉독은 질병을 치료한다.

봉침은 육안으로 구별하기 어려울 만큼 아주 작다. 봉침에서 흘러나온 봉독도 아주 미량이다. 하지만 아주 빠른 속도로 침투하여 심장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이지가 안정되지 못하고 흥분 상태에 이르지만, 기와 혈의 흐름이 원활해지고 피가 깨끗해져 노화를 방지하며 호흡을 원활하게 하여 몸에 쌓인 독소를 배출해 준다.

봉침법은 정통 의술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지만 많은 의원들이 시도를 거듭하고 있다. 봉독이 몸에 맞는 사람에게는 아주 탁월한 효과를 나타냈으니까.

개방도는 전국 각지 가보지 않은 곳이 없다.

때로는 독사에 물리기도 하고, 때로는 말벌에 쏘이기도 한다.

봉침법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당연한 이치다.

“이, 이게!”

서른 한 명의 천객은 딱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웅웅웅…!

모자도에 벌이 이렇게 많았던가? 아니다. 벌이 있기는 해도 이토록 많지는 않다. 하늘을 가릴 정도로 새까맣게 몰려 있지는 않다.

이것은… 벌을 키우는 사람에게서 가져온 벌들이다.

“옷을 벗도록 해.”

흑봉광괴가 무심히 말했다.

알지 못할 불안감이 엄습했다.

천객을 제일 먼저 자청한 백천의가 옷을 벗었다. 상의를 벗고, 하의를 벗고… 백주대낮에 발가벗은 알몸이 되었다.

단단한 근육이 햇살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다른 천객들도 옷을 벗기 시작했다.

정운, 상태수, 하양진인 등 전부터 천외천에 가담했던 사람들, 새로이 천외천의 존재를 알게 되고 뜻을 같이한 사람들…

“엽신봉인단이야. 엽신봉인단만이 자네들을 지켜줄 거야. 오늘은 가벼운 거니까 긴장하지 말고 엽신봉인단의 뜻을 되새기도록 해.”

천기신군 호종악이 청년 고수들의 몸에 꿀을 발랐다.

곧 벌들이 새까맣게 달라붙었다.

“엽신봉인단이라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천기신군이 물었다.

“나도 모르지. 알면 가르쳐 주겠는가? 일부러 어렵게 하려고 하는 게 아냐. 나도 구진법을 겪어보지 않았으니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난 구진법 수련 방법만 알고 있을 뿐이야. 자칫하면 저들 모두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지.”

흑봉광괴의 얼굴은 어두웠다.

서른한 명의 기재들은 하루 종일 벌들에 휘감겼다.

꿀벌로 뒤덮인 사람들은 조금 징그럽기도 하고 근질거리기도 했지만 위험하진 않다는 것을 알았다. 벌들이 봉침을 따끔따끔 쏘아댔지만 오히려 진기의 흐름을 원활하게 해 줄 뿐이다.

위험하지 않다. 그런데 흑봉광괴는 엽신봉인단의 뜻을 깨우치라고 했다. 위험하다고도 했다.

‘엽신봉인단… 엽신봉인단…’

서른 한 명은 타고난 기재들답게 무사함에 만족하지 않고 엽신봉인단의 참의에 들어갔다.

다음 날도 똑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옷을 벗고, 몸에 꿀을 바르고, 수백만 마리는 될 것 같은 꿀벌들이 윙윙 날아다니고…

“엽신봉인단이야. 꼭 명심하도록.”

흑봉광괴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별것 아니던데 왜…?’

좌우지간 서른한 명의 기재는 어제보다는 훨씬 가벼운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윙! 위윙…! 패애앵…!

느닷없이 칼바람이 불어왔다.

어제와 똑같이 꿀벌에 휘감겨 있는데 어디선가 나타난 말벌이 꿀벌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어, 어디서…?’

서른 한 명의 기재는 천기신군이 움직이는 모습에서 한 가지 사실을 알았다.

천기신군이 꿀벌만 사들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하기야 그 정도였으면 천기신군이 직접 나서지도 않았으리라.

‘말벌의 공격이야. 그 것도 수천 마리! 칼끝에 맡긴 몸, 엽신봉인단. 제길! 이거야말로 칼끝에 맡긴 몸이군.’

왜애앵! 페액!

팔이 따끔거리면서 퉁퉁 부어올랐다.

말벌의 공격에 당한 것이다.

심장 박동이 현저하게 느려졌다. 겨우 한 마리에게 물린 것뿐인데.

웨에엥…!

꿀벌과 말벌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말벌 한 마리를 죽이려면 꿀벌 천여 마리가 희생되어야 한다.

말벌 한 마리가 벌통 하나에 든 꿀벌을 모두 죽이는 데 걸리는 시간은 반각밖에 소요되지 않는다. 엄청나게 강한 놈이지 않는가.

‘이 싸움은 끝나지 않아. 말벌이 너무 많아. 꿀벌이 모두 죽은 다음에야 끝날 거야.’

웨에엥…! 꽈악!

서른 한 명의 청년 고수들은 연신 말벌의 강한 턱에 물렸다.

“으윽…!”

천객 중 한 명이 신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는 싸움에서 졌다. 일진법이 말벌과의 싸움을 요구한 것이라면 싸워서 이겨야 한다.

그는 졌다. 동정의 여지는 없다.

“으윽! 크윽!”

비명을 지르는 횟수가 점점 급박해졌다.

“으으윽! 에잇!”

그는 기어이 가부좌를 떨치고 일어났다. 그리고 달려나갔다.

왱에에엥…!

새로운 공격 대상을 발견한 말벌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이상한 일이다.

엽신봉인단.

몸을 칼끝에 맡기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마음을 편안히 가라앉히니… 심근이 강화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말벌의 독성에 심장의 박동은 느려졌지만 심근의 수축력은 오히려 강화되었다.

‘엽신봉인단… 이런 뜻이군.’

엽신봉인단의 심결대로 몸과 마음을 내맡기고 진기를 휘돌렸다.

몸이 퉁퉁 부어올랐다.

말벌에 물린 곳은 손도 대지 못할 만큼 아팠다.

무인들은 이런 경험이 없었다. 미치지 않은 다음에야 말벌 사이로 걸어 들어갈 인간이 어디 있으랴.

효과는 분명히 컸다.

심근의 수축력과 진기와의 상관관계를 눈으로 보듯이 파악했다. 이를 무공에 응용하면 지치지 않는 육신을 가질 수 있다.

일진법을 수련한 천객은 땅에 널브러져 있는 천객을 보았다.

심장에는 비수 한 자루가 자루만 남긴 채 깊숙이 파묻혀 있다.

“이기지 못하면… 죽음뿐인 게야. 상처가 아물려면 이틀은 걸리겠지?” 이틀 동안 몸 상태를 최상으로 만들어놔. 이진법은 닷새 정도 걸릴 거야. 심결은 풍륭승운혜. 엽신봉인단 풍륭승운혜 단단히 각인시켜 놔.”

흑봉광괴는 냉정했다.

밤이 깊었어도 서른 명의 기재들은 수련을 멈추지 않았다.

누가 시켜서 하는 수련이 아니다. 본인들 스스로 낮 동안 깨달은 오의를 응용시키고 있는 게다.

전혀 색다른 방법으로 깨달은 진기 운용법.

본신 진기는 지금까지 배워온 가문의, 혹은 사문의 내공법이었으나 진기의 흐름은 종류를 달리했다.

그들만의 독창적인 내공심법이 탄생되고 있는 것이다.

엽신봉인단 풍륭승운혜의 심결을 푸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칼끝에 맡긴 몸, 우레의 신 풍륭을 불러.

전자는 몸으로 겪었다. 어떻게 진기를 휘돌려야만 심근의 수축력이 강화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거기서 우레의 신인 풍륭을 불러내야 한다.

어떻게 불러내는 것일까?

흑봉광괴의 말처럼 몸을 최상의 상태로 만드는 것이 급선무다. 자칫 일진법에서 죽은 자처럼 처참한 말로를 겪게 될지도 모른다.

이진법.

서른 명의 천객은 다시 입을 벌렸다.

그들 앞에 대기하고 있는 것은 수천 마리는 될 것 같은 검은 두꺼비였다.

“흑섬서! 이게 어떻게 여기…?”

커다랗게 파인 웅덩이에 갇혀 우글거리는 두꺼비들. 울퉁불퉁한 등껍질이 거북이처럼 단단하고, 길게 내뻗은 혀에는 심장을 정지시키는 강력한 독성분이 묻어 있다고 한다.

흑섬서는 혀로 공격하여 마비시킨 다음 잡아먹는다. 긴 혀로 곤충을 말아서 잡아먹는 다른 두꺼비들과는 완전히 다른 놈이다.

흑섬서는 두꺼비가 아니라 마물이다.

“옷을 벗어야지?”

흑봉광괴의 말에 서른 명의 천객들은 서로를 쳐다봤다.

천기신군이 밧줄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손발을 묶을 요량인 듯하다.

‘몸이 묶인 상태에서 저 속에 떨어지면… 죽는다.’

공포가 엄습했다. 죽음은 늘 곁에 두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죽음과 직면하니 공포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이번에도 백천의가 먼저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는 흑섬서를 보는 순간 심결 풍륭승운혜의 진의를 깨달았다.

살갗이 흑섬서의 혓바닥에 닿는 순간 전신이 마비될 것이다. 수천 마리의 흑섬서가 달려들 테니 마비되는 속도는 그야말로 눈 깜짝할 순간이리라.

바로 그 순간 진기를 끌어올려야 한다.

풍륭승운혜에 앞서 엽신봉인단이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강력한 심근의 수축력은 잠시 마비를 저지할 것이고, 이끌어 올린 진기로 힘을 보태 강력한 폭풍을 불러와야 한다.

우레의 신 풍륭이 등장하는 순간이다.

잘되면… 전신 세맥이 타통된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도 진기가 휘돌고 있다. 무인은 휘돌고 있는 진기를 더욱 강하게 휘돌려 육신의 강건함을 취한다. 그러려면 의념을 최대로 하여 진기를 느낌으로나마 볼 수 있어야 한다.

내공을 접하는 기본이다.

전신 세맥이 타통되면 지금까지 미처 느끼지 못한 세세한 부분까지 진기가 흘러들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자신이 느끼지 못했을 뿐.

진기가 전신을 휘도는 시간은 똑같다. 의념으로 느끼는 진기의 순환경로는 다섯 배에서 여섯 배로 길어진다. 보지 못한 부분은 그렇게 많다.

그곳에 있는 진기를 모두 모아 폭발을 일으킨다면… 엄청난 파괴력이 나올 것이다.

세맥 타통…

이진법만으로도 지금까지보다 배는 강해진다.

‘풍륭승운혜… 심근의 수축력을 이용하지 않으면 죽는다. 전신 경락을 최대한 폭발시켜야 한다. 세맥이 일시에 터지도록.’

생각은 간단하지만 실질적인 마비를 몰아내야 하는 어려운 일이다.

먹은 게 얹혀 배가 아픈데 생각만으로 아픈 배를 낫게 하는 것과 같다.

구진법은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일을 실제로 겪어보게 하는 수련이다.

이진법이 이럴진대 마지막 구진법은…

‘휴우!’

백천의는 남몰래 큰숨을 내쉬었다.

후계

후계가 집법당주였을 때의 별호는 선은잠룡으로 남양분타주 천애유룡과 함께 개방도 중 단 두 명만이 지닌 ‘용’의 별호를 가졌다. 후계는 맨발로 돌아다니기를 좋아했다. 개방도라서가 아니라 신발 신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

“땅의 감촉이 좋아서…”

그것이 그가 신발을 신지 않는 유일한 이유였다. 물론 오결 제자인 집법당주였을 때의 이야기다. 후계가 되면서 선은잠룡은 자신의 별호를 버렸다. 누구나 그럴 수밖에 없다. 팔결 매듭을 지닌 후계는 별호 대신 ‘후계’라고만 불린다. 방주가 별호 없이 용두방주로 불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일부 안면이 있는 사람들은 예전의 별호를 불러대기도 하지만 무척 예의에 어긋나는 언사다.

만약 개방도 중 그런 사람이 있다면 당장 집법당주에게 불려가 치도곤을 치르게 된다.

팔결, 구결 신분인 후계와 용두방주에게 그럴 사람도 없지만. 총타를 나온 후계는 다시 맨발이 되었다.

“신발을 신고 있자니 영 껄끄럽군요. 마치 족쇄를 차고 다니는 기분이에요. 이해하세요.”

“허허허!”

분운추월은 웃었다.

현임 방주도 나름대로 개성이 있지만 후계는 더욱 개성이 강하다.

분운추월은 가끔 후계가 개방이 아닌 다른 문파에 입문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개방의 방규에 따라 누더기 옷을 입고 있지만 후계의 행동거지는 학문이 박학한 선비와 같이 조용하다. 함부로 웃고 떠드는 일도 없으며, 가급적 말을 삼가고, 말을 할 때도 상스러운 소리는 입에 담지 않는다.

백의 개 시절에는 그런 언행 때문에 질시도 많이 받았고 따돌림도 당하곤 했다.

다른 문파에 입문했다면… 그래도 잘 어울릴 게다. 적어도 개방보다는 훨씬 좋은 그림이 그려진다.

팔 장로는 방주의 선은잠룡을 후계로 정하자는 의견을 듣고 선은잠룡의 과거를 샅샅이 조사했다.

개방에 입문하면서 대부분 조사된 것이지만 후계로 선정되는 마당에는 더욱 깊은 곳까지 알아야 한다.

악행을 저지른 일은 없는가? 부모 형제는 살아 있는가. 살아 있다면 책잡힐 일은 하지 않았는가.

본인뿐만 아니라 주변 모든 사람이 깨끗해야 한다.

누가 무슨 꼬투리를 잡아오더라도 정정당당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선은잠룡은 정식으로 학문을 배운 신동이었다. 열네 살에 개방에 입문했는데, 그전까지 그는 사서삼경은 물론 육도삼략까지 정통하게 익혀 신동이란 소리를 들었다.

집안도 부유한 편이라 어려움을 모르고 자랐다.

그런 사람이, 아무리 집안이 몰락했다고는 하지만 개방에 입문한 것이 의문이었다.

열 네 살이라면 세상을 볼 줄은 알겠지만 겉만 보는 것이지 속이야 볼 수 있겠는가.

더러운 땟국물이 자르르 흐르고, 쉰 밥이나 얻어먹고, 양지바른 곳에 둘러앉아 벼룩이나 이를 잡아대는 개방이 어린아이에게 좋아 보일 리 없다.

당연히 선은잠룡이 왜 개방을 선택했는지가 문젯거리로 떠올랐다.

“불가도 많고 도가도 많다. 승려나 도인이 되기 싫다면 속가도 많은데 왜 개방을 선택했는가?”

대답이 가관이었다.

“세상에 빈손으로 왔으니 빈손으로 살다 가는 것도 괜찮겠지요. 무소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알았다고 생각하는가?”

“아닙니다. 끝없이 욕심이 생깁니다.”

“무슨 욕심인가?”

“무공에 대한 욕심, 세상을 보는 욕심, 학문에 대한 욕심… 끝도 없습니다.”

마치 선문답을 하는 기분이었다.

개방도가 무소유라니!

그것도 열 네 살짜리가 무소유를 생각하고 개방에 입문했다니….

믿기도 어려운 말이었지만 선은잠룡이라면 그런 대답을 할 만하다. 그가 개방에서 보낸 십구 년이 무소유의 삶이었음을 대변해 준다.

그는 가진 것 없는 개방도 중에서도 특히 가진 것이 없다.

개방도라고 욕심이 없을 수 있겠는가.

금은보화를 보면 갖고 싶은 마음이 들고, 맛난 음식이 있으면 먹고 싶다. 그러나 개방도라면 누구나 탐내는 물건이 있으니 바로 좋은 타구봉이다.

재질이 좋은 것으로 모양 좋게 다듬어 만든 타구봉은 누구나 갖고 싶어 한다.

선은잠룡은 그것조차도 없었다.

아무렇게나 길바닥에 굴러다니던 몽둥이가 고작이었다.

그에게서는 아무 하자도 발견되지 않았다. 부유하던 집안이 도적 떼에게 몰살당한 것 외에는 마음의 상처도 없었다.

“마음에 둔 정인은 없는가?”

“사내이니 여인에게 관심이 없을 리 있겠습니까? 때가 되면 정인이 생기겠죠.”

한마디 물음에 두 마디로 답했다.

현재는 정인이 없다는 것, 마음에 드는 여인을 만나지 못했다는 것. 그러고 보면 거지 주제에 되게 눈이 높은 모양이다.

후계 선정에 동의하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이 장로께서는 중원제일의 신법을 지녔다는데 언제 한번 보고 싶군요. 얼마나 빠른지.”

“허허! 굼벵이보다 조금 빠른 편입니다.”

선은잠룡이 후계가 된 다음 팔 장로는 존대를 사용했다. 그것이 개방의 방규였다.

“이 장로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부끄럽군요. 제가 굼벵이가 된 기분입니다. 하하하!”

‘호승심이 치민다는 건가? 아직은 어리시군.’

분운추월은 후계의 기분을 깨고 싶지 않았다.

후계는 개방도 모두가 사랑하는 개방의 희망이다.

“원하시면 지금 보여 드리겠습니다.”

“하하, 아닙니다. 언젠가 보고 싶긴 하지만 지금은 이 장로님과 겨룰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후계님이 계시니…”

“아뇨, 아뇨. 저는 어림없습니다. 경공이래야 겨우 걸음마를 뗀 정도에 불과합니다.”

후계가 되면 집중적으로 무공 수련을 한다.

개방이 구할 수 있는 영약이란 영약은 모두 구해 주고, 필요하다면 장로가 직접 비무 상대도 되어 준다.

후계는 최강의 무인이 되어야 한다.

개방을 떠나 타 문파 무인과 겨룰 때는, 그것이 비록 비무일지라도 져서는 안 된다.

후계는 네 번의 폐관 수련을 마친 후이니 상당한 경지에 이르러 있으리라.

‘사양이었군. 어리다는 말은 취소해야겠어.’

후계가 대견했다.

한참 젊은 나이인데 호승심까지 억누를 수 있는 수양을 쌓았으니… 개방의 앞날은 한결 밝아졌다.

“저기가 팔부령이군요.”

“그렇습니다.”

“좋은 산세입니다. 산이 험하고 골이 깊어 인간이 접근하기 어려운 산이나 생명이 요동칩니다. 저 산은 살아 있는 산이군요.”

“…?”

“살문이 저곳에 둥지를 틀었다니… 삼현옹이란 기인, 말은 많이 들었지만 정말 뛰어난 분인가 봅니다.”

“…!”

분운추월은 놀랐다.

후계의 깊이는 어디까지란 말인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오랜만에 보는 느낌이 든다.

많은 무인들이 죽었다. 개방 제자들도 상당수가 죽었다. 오 장로 무불신개는 아직도 팔부령을 잊지 못하고 있다.

죽음이 많았던 산이다.

무불신개에 비하면 분운추월은 조용했다.

그가 본 것은 소림오선사의 죽음과 하루가 무인들의 죽음이 고작이다.

무불신개가 본 죽음에 비하면 상당히 적은 죽음이다.

분운추월은 소림사 승려들이 기거한다는 장사곡을 향해 뚜벅뚜벅 걸었다.

얼마 있지 않았지만 비적마의에게 막힌 길을 찾느라 돌아다닌 터라 팔부령 지형은 눈 감고도 다닐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이 장로님, 좀 쉬어 가면 어떻겠습니까?”

분운추월은 후계를 돌아봤다.

맨발로 산을 타기 때문에 발바닥이 아픈 것일까? 아니다. 후계의 발바닥은 곰 발바닥보다 단단하다. 산을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숨이 찰 리도 없고.

“너무 아름다운 곳이군요. 물소리가 들리십니까?”

소로 옆에 있는 계곡이 맑은 물소리를 흘렸다.

보기만 해도 맑고 시원한 물이다. 더운 여름이니 발을 담그고 싶은 충동이 절로 일어난다.

짹! 째짹! 째짹…!

산새도 장단을 맞춘다.

죽음이 있었던 팔부령이라고 믿기에는 너무 평화롭고 고요하다.

“그러시죠. 급한 길도 아니니…”

살문이 어떻게 팔부령을 벗어날 수 있을까? 백팔나한과 육십칠단승을 우습게 봐서는 안 된다. 소림오선사가 당하기는 했지만, 그들은 소림 최강의 무인들이다. 특히 백팔나한진은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불패진이다.

후계가 계곡으로 내려가 바위에 걸터앉았다.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고 털썩 드러눕기까지 했다.

분운추월도 후계를 따라 계곡으로 내려가 나무 그늘에 앉았다. 산을 탄 지 얼마 되지 않아 식힐 땀도 없었다.

후계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호통을 내질렀을 게다.

“하하하! 새가 참 아름답군요.”

후계가 바위에 누운 채 맑은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경치는 좋은 곳입니다.”

“그러게요. 참 좋은 곳이죠. 모든 게 아름답습니다. 없어야 할 게 있는 것만 빼고는.”

“…?”

후계가 몸을 일으켜 앉았다.

“이 장로께서는 지금도 살문이 팔부령을 벗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하십니까?”

“팔부령에는…”

후계가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어? 저…!”

분운추월은 벌떡 일어나 그늘에서 나왔다.

하늘을 훨훨 날아가는 새를, 한 마리 회색 비둘기를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서.

개방의 정보망은 중원 최강이다.

무림을 떠나 모든 집단을 통틀어 봐도 개방처럼 막강한 정보망을 가진 집단은 없다.

단지 거지 수가 많아서 그렇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정보는 수집도 잘해야 하지만 전달, 분석도 정확해야 한다.

수백 년에 걸친 개방만의 수집 능력, 전달 능력, 분석 능력이 개방을 최고의 자리에 앉혔다.

분운추월은 단번에 사태를 알아챘다.

‘팔부령에 구멍이 뚫렸어! 그럼 역시 살문… 종리추, 이놈! 얌전히 앉아 있기를 바랐건만 아직도… 꼭 죽어야 정신을 차린단 말이더냐! 똑똑한 놈이 왜 그렇게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단 말이냐!’

분운추월이 본 종리추는 살수다. 그러면서도 살수가 아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분명히 살수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살수가 아니다. 사람을 죽인다는 측면은 살수고, 인면수심의 인간과 자신을 공격하는 자만 죽인다는 면에서는 살수가 아니다.

그런 식으로 따진다면 무림인 모두가 살수다.

종리추가 살수로 낙인찍히고 무림인의 공적이 되어 쫓기는 것은 살문이라는 이름을 걸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종리추는 살수가 되었다.

또 혈영신마를 구해 간 것이 치명적인 잘못이다.

분운추월이 방주의 명을 받고 팔부령으로 서슴없이 올 수 있었던 것도, 그가 혈영신마를 구해 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종리추를 미워할 수 없는 정이 자리 잡고 있다.

그렇다. 그는 종리추가 밉지 않다.

대담하게 자신의 앞에서 ‘개방의 눈을 달라’고 말할 때부터 밉지 않았다. 경공 비무를 벌이자던 놈이 배를 타고 말을 타고 달려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온다.

살수 놈 주제에 대담하게 개파 선언을 했을 때부터 보통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 모든 것이 정이 되어 자랐다.

놈은 살수 짓을 하면서도 밉지 않게 했다. 놈에게 정보를 물어다 주면서 세심하게 관찰한 결과다.

무엇보다 그에게 정이 생긴 것은 뛰어난 무인이라는 점이다. 심성도 곧은 편이며, 무공이 터무니없이 강하다. 지략도 뛰어나다.

정이 안 갈 수 없는 사내다.

소림승에게 둘러싸여 대래봉에 갇힌 것이 한편으로는 다행스럽기도 했다.

‘이제는 움직이지 못할 테지. 그래, 대래봉에서 편히 사는 거야. 죽지는 않을 테니까. 그때… 천부에서 나오지 말았어야 했어. 한 번 멸문 당했으면 됐지, 몇 번이나 멸문당하고 싶은 게야.’

또 다른 마음도 있었다.

‘종리추가 검을 뽑았으니 가만있을 리 없지. 분명히 움직일 거야.’

사곡이 멸문당하고 살문이 배후로 떠올랐을 때, 분운추월은 살문이 움직였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믿고 싶지는 않았다.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고는…

이제 재고의 여지도 없게 되었다.

“가서… 만나봅시다.”

분운추월은 힘없이 말했다.

해명 대사는 분운추월을 반갑게 맞았다.

“곡차 한잔 얻어 마실까 해서 왔네.”

“그놈의 거지 근성은 어딜 가도 버리지 못하는군. 이런 산골짜기에 무슨 놈의 곡차가 있다고 얻어 마시러 와. 빈손으로 올 양이면 오지나 말 것이지.”

“무슨 놈의 인심이 이리 고약하고? 부처님의 자비는 다 어디로 가고 야차만 득실거리나.”

“멀쩡한 사람을 야차로 보다니… 그동안 견도장에서 살더니만 견공이 된 모양일세.”

해명 대사와 분운추월은 함께 웃었다.

두 사람은 문파는 달라도 막역한 지우다.

소림에서 가장 빠른 신법을 지닌 혜명 대사와 분운추월이 경공 시합을 벌일 때 혜명 대사가 공증을 설 정도로 신뢰와 우정이 두터웠다.

“이분은…”

분운추월이 후계를 소개하려 했을 때,

“혜명이라 하네.”

혜명 대사가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팔결 매듭을 하고 있으니 후계라는 것을 모를 리 없다.

분운추월은 젊은 후계에게 존칭을 사용했지만, 혜명 대사는 그럴 필요가 없다. 그것은 개방의 방규일 뿐이고, 혜명 대사에게는 여타 문파의 후지지수와 다를 바 없다.

“고명은 많이 들었습니다. 후계입니다.”

후계는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았다. 차분하면서도 조리 있었다.

혜명 대사의 안광이 반짝 빛났다.

“이야기 좀 하지.”

후계가 소림승을 따라 움막 안으로 들어갔을 때, 혜명 대사가 느닷없이 말해 왔다.

분운추월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앞서 가는 혜명 대사를 뒤쫓았다.

이야기를 하러 오지 않았는가? 그래서 혜명 대사의 거처까지 왔고 움막에만 들어가면 되지 않는가? 다른 사람을 모두 제쳐놓고 단둘이만 할 이야기가 있단 말인가?

혜명 대사는 장사곡이 환히 보이는 커다란 노송 아래에서 걸음을 멈췄다.

분운추월이 옆에 섰다.

녹음이 짙푸른 장사곡이 싱그러움을 토해냈다. 무림을 떠나 은거해도 좋을 만큼 아름다운 장소다.

“살문 때문에 왔는가?”

분운추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무림에 대해서… 눈과 귀를 닫고 있네.”

봉문했으니 당연하다.

“자네가 올 정도면 중대한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있었는가?”

분운추월은 사곡의 멸문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잔혹하게 죽인 수법까지.

“살문이 맞군.”

“…!”

분운추월은 혜명 대사를 쳐다봤다.

“허허, 모르고 있었다 생각하나?”

“알고도… 놔줬나?”

“전서구도 적당히 날려야 눈치채지 못하는 법일세. 이곳 화전민들이 뭘 알겠나? 무작정 전서구를 날리는 게지. 그런데도 눈치채지 못했다면 헛산 게지.”

“설명을 들어야 할 것 같군.”

“소림은 당분간 살문을 놔둘 생각이네.”

“…?”

“청간을 기억하나? 왜 종리추가 대외산에 살문을 개파하면서 무림에 돌린 청간 있지?”

분운추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잊겠는가. 살수 문파를 개파하면서 당당하게 청간을 돌린 사건인데.

“거기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네. 무모한 살생은 피하겠다. 죽여야 될 자, 죽이지 않아야 될 자를 구분하겠다.”

잊지 못한다. 그 말은 분운추월의 경우 종리추에게 직접 들었다. 경공 시합을 벌인 후, 개방의 눈을 빌려달라면서.

“소림은 종리추가 죽인 자에 대해서 세밀하게 조사했네. 그 결과… 잘못 죽인 사람은 없었네.”

“살문과 원한이 없는가?”

“허! 불가에 몸담은 사람에게 그 무슨 말인고? 휴우! 원한으로 따지자면 왜 없겠는가. 가까이는 소림오선사가 열반에 들었고, 멀리는 소림사룡 백천의의 동생이 죽었네. 원한으로 따지자면 많지.”

“…?”

금시초문이다. 칠십이단승 중 오선사가 나선 사실을 알지만 그들이 자원해서 앞장섰다는 것은 처음 듣는다.

“오선사는 이런 말을 했네. 살수 문파를 모두 없앤다면 몰라도 암묵적으로 묵인하면서 살문을 없애는 것은 잘못이다. 살수 문파가 있어야 한다면 살문 같은 문파가 좋겠다.”

“…”

“모두 지난 일이다. 방장께서 십망을 선포했으니 어쩔 수 없이 나서야 하고, 최선을 다해 멸문시켜야 한다. 그런 자를 죽여야 한다면 우리가 죽이겠다.”

그런 사연이 있는 줄은 몰랐다.

“오선사는 무공으로 싸워서 졌네.”

“오선사는 무공으로 싸워서 졌네. 암습이든 아니든 무림에 몸담은 사람이 가릴 게 무언가. 진 것은 진 것이지.”

“…”

할 말이 없다. 진 것은 진 것이니.

“우리에겐 두 가지 방법밖에 없지. 하나는 백팔나한진으로 맞서 싸우는 것. 그러자면 살문을 끌어내야 해. 팔부령에서는 안 되지. 또 하나는 육십칠단승이 싸우는 걸세. 일 대 일로, 무공으로 졌으니 무공으로 이겨야 하네. 소림사의 자존심이지.”

“허어!”

“문제는… 우리 중 누구도 오선사보다 월등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일세. 오선사가 당했을 때는 깜짝 놀랐지. 당연히 살문을 멸문시킬 줄 알았는데… 종리추는 무척 강한 자일세.”

무인들은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분운추월 자신도 살문의 멸문을 기정사실화했었다.

종리추는 더욱 강해져서 나타났다.

천부에서 기연이라도 만난 것일까? 그렇게밖에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옛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해져서 나타났다. 일일신우일신이라는 말이 종리추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그래서 이곳 장사곡으로 왔네. 장사곡은 무공 수련하기에 아주 적합한 곳이지. 여기서 최소한 오선사를 능가할 자신감 정도는 얻을 생각이라네.”

“허허허! 백팔나한과 육십칠단승이 살문을 놓쳤다는 질책은 어찌 피할 생각인가?”

“소림사는 봉문에 들어갔네. 봉문까지 감수했는데 그까짓 질책이 뭐 그리 대수로운가.”

하기야… 문파가 봉문한 것보다 더 불명예스러운 일은 없으리라.

그 원인 중에 오선사의 죽음도 한몫했다면 무공으로 이기고 싶은 마음도 이해할 수 있다.

혜명 대사가 말했다.

“후계도 같이 왔으니… 안에 들어가서는 적당한 선에서 매듭지었으면 하네. 그래 주게.”

살문이 빠져나간 사실은 두리뭉실하게 넘어가자는 말이다. 하지만 이미 후계가 알고 있는 것을.

일이 꼬였다.

오랜 지우의 부탁, 소림사의 자존심이 부탁하는 것이건만.

분운추월이 장사곡을 보며 말했다.

“혜명… 우린 벌써 전서구를 봤다네.”

혜명 대사가 거처하는 움막은 사람 사는 집이라고 할 수 없었다.

비바람이나 막을 수 있을지 염려될 만큼 허름했다. 숭숭 뚫린 구멍 사이로 바깥 풍경이 내다보였다.

산을 조금 다듬어 평평하게 만든 땅바닥에는 겨우 사람 하나 누울 만한 거적때기 한 장이 깔려 있고, 정성스럽게 만든 좌대에는 작은 목불상이 깎여 있었다.

움막 안에 있는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하늘을 지붕 삼아 땅을 방바닥 삼아 평생을 살아온 분운추월이 보기에도 움막은 너무 초라했다.

“그래서 이곳 장사곡으로 왔네. 장사곡은 무공 수련하기에 아주 적합한 곳이지.”

분운추월은 혜명 대사가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 한눈에 읽었다.

거적때기에 앉아 목불상을 쳐다보던 후계가 일어나 두 사람을 맞이했다.

혜명 대사와 분운추월이 자리에 앉자 후계는 목불상으로 다가갔다.

“대사님, 이 불상… 누가 조각했는지요?”

“허허! 그건 왜 묻는가?”

“불상치고는 굉장히 투박한 불상입니다. 다듬지도 않고 소도로 그냥 대충 깎았군요. 하지만 어느 한곳 부족함이 없어 보입니다. 나뭇결을 정확히 읽었고 단숨에 깎아내려갔어요. 아마도 이 불상을 조각하신 분은 숨 한번 몰아쉴 동안에 깎으셨을 겁니다. 일필휘지지요.”

“허허허! 역시 후계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닌 모양일세. 여보게, 분운추월. 자네들은 언제 은거할 건가? 내 보기에는 자네들은 이미 폐물일세그려. 하하하!”

놀리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혜명 대사의 말속에는 진심이 깃들어 있다. 후계의 탁월한 안목, 식견에 감탄하는 소리다.

“그러나…”

“…?”

“모자람은 없어 보이지만 부족함은 엿보이는군요. 부처님은 자비. 자비가 빠진 부처님은… 글쎄요. 이 목불상에는 자비가 없습니다.”

“어떤 부분이 그렇다는 건가?”

“끝을 쳐냈군요, 단숨에. 소도로 미련 없이 단숨에 깎아냈어요. 자비가 깃들어 있는 손길이라면 마무리 부분에서는 온정을 두었을 겁니다. 부드럽게.”

“…!”

혜명 대사가 분운추월을 바라보자 분운추월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대사님, 궁금하군요. 달마삼검인지 대원도법인지…”

“…”

혜명 대사의 눈이 부릅떠졌다.

후계가 말했다.

“두 분께서는 무림대사에 대해 논의하셔야 될 겁니다. 소생이 끼어있을 자리는 아닌 것 같군요. 밖에 나가 경치 좋은 장사곡을 둘러보겠습니다. 보고도 보지 못하는 눈이라 장사곡이 제대로 눈에 들어올지 모르겠습니다.”

후계가 포권지례를 취한 후 밖으로 걸어 나갔다.

‘살문에 관한 일을 알고 있어. 소림이 방치하고 있는 것도. 개입하지 않는 거야. 우리에게… 맡겨놓는 거야.’

분운추월이 방주에게 ‘살문은 움직이지 않고 있다’고 보고할 길을 열어주었다.

보았으되 보지 못하는 눈…

후계가 장사곡에 들어와 본 것은 소림 무승들의 차분한 행동, 고요한 눈빛뿐이다. 좀 더 보탠다면 허름하기 이를 데 없어 거지 소굴이나 다름없는 움막들이다.

후계는 그것만으로도 소림 무승들의 생각을 읽어냈다.

‘심지가 깊다.’

사실 각오는 하고 있지만 소림이 살문을 놓쳤다고 하면 백팔나한과 육십칠단승은 손가락질 받는다. 그 정도는 각오한다 해도 소림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는 것은…

그래서 분운추월을 불러 따로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천 리에 깃털을 보내니 예물은 작아도 정은 깊다고 했던가? 후계에게 빚을 졌군.’

문을 밀치고 나가려던 후계가 우뚝 멈춰 섰다.

혜명 대사가 다시 말했다.

“달마삼결 검결로 쳐냈지. 자네 말대로 불상을 깎으면서… 자비가 없었네. 아미타불!”

후계가 문을 밀치고 나갔다.

은서

백스물한 명 몰살. 혈잠화, 사곡에 이어 비망사까지 몰살했다.

무림은 술렁거렸다. 그들의 몰살은 무림군웅들에게는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 시원했다. 살수 문파인 살문과의 싸움에서 어이없이 물러서야만 했던 군웅들은 살수 문파가 몰살했다는 소식만으로도 함박웃음을 지었다.

“역시 구파일방이야. 마음만 먹으면 뭐든 한다니까.”

“구파일방은 움직인 것 같지 않던데? 혈잠화도 그렇고, 사곡도 그렇고, 비망사도 누가 죽였는지 모르잖아?”

“예끼, 이 사람아! 꼭 죽인 사람을 봐야만 믿는가? 구파일방이 아니면 누가 그들을 그렇게 도륙할 수 있어?”

“그것참, 모를 일이네.”

본 사람은 없다. 사흔도 파악되지 않는다. 혈잠화와 사곡 살수들은 죽은 즉시 화장되었다. 비망사 살수들의 죽은 모습을 발견했을 때는 부패 정도가 너무 심각해서 알아볼 수 없었다. 워낙 한적한 구릉에서 죽었고 계절은 여름으로 들어섰으니. 무림은 구파일방이 움직였다고 생각했다. 구파일방의 의도와는 다르다. 만약 비망사 살수들의 시신이 일찍 발견되었다면 잔인한 손속에 혀를 내둘렀을 게다.

구파일방이 움직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잔인한 손속까지 접해서는 안 된다. 장문인들은 급히 연서를 날렸다. 살수들은 죽이는 즉시 화장을 하든지 매장하라고. 절대 사흔이 드러나게 하지 말라고.

반면에 살수들은 언제 자신에게 칼날이 드리워질지 몰라 전전긍긍했다.

구파일방이 검을 뽑았다면 멸문은 시간문제다. 구파일방이 직접 검을 들이대지 않아도, 무림에 살수 문파의 위치만 슬쩍 흘려도 성난 군웅들이 우르르 달려들 게다.

살수 문파들은 개방에, 화산파에, 청성파에… 자신들과 연고가 있는 문파에 매달렸다. 살행은 중단되었다. 여기저기서 살수들이 무더기로 죽어 넘어지는데 대담하게 살행을 저지를 살수 문파는 없었다.

중원 전역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의문의 죽음이 흔적 없이 사라졌다.

“이거이거, 일이 참 더럽게 꼬입니다.”

“세상일이란 게 다 그런 거지. 그나저나 이제 어쩐다, 일이 이렇게 틀어졌으니.”

“어떤 놈들이 비망사를 그 지경까지 몰아넣었을까요? 구파일방이 움직인 것 같지는 않은데. 혹시 혈배를 들려는 자들이?”

“비망사는 살수 문파 중에서는 가장 무공이 강한 문파야. 차라리 다른 곳에서 혈배를 들지 여기서 혈배를 들 생각은 하지 못할 거야. 구파일방이지. 구파일방이 살수 문파를 향해서 검을 뽑은 거야.”

“형님도 참, 살수 문파 중 제일 무공이 강한 문파는 살문이지 어찌 비망사입니까?”

“그렇다는 거지.”

“이제 어쩌죠?”

“음…!”

혈영신마와 혈살편복은 고민에 빠졌다.

먼 길을 걸어 호광성까지 왔는데 비망사가 몰살당해 버렸으니…

“일단 날도 어두워졌으니 객잔을 잡아야지. 주공께서 연락을 주실 거야. 이 근처에 객잔이 어디 있지?”

“아까 오 리 정도만 더 가면 있다고 들었는데…”

“오 리면 조금만 더 가면 되겠군. 가자고.”

“비망사가 몰살당했으니 오늘은 술 한잔 어때요?”

“하하하! 자네 요즘 술을 너무 많이 하는 거 아냐?”

“이게 다 유희 형님 때문 아닙니까. 바보같이 그렇게 가버릴 게 뭡니까?”

“…”

혈영신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절강 무림을 휘저으며 참 많은 사람, 많은 문파와 싸웠다. 처음에는 거의 일대일의 싸움이었지만 나중에는 정당한 비무를 생각할 수 없었다.

절강 무림 전부를 상대로 싸우는 격이 되었다.

그런 와중에도 무인들의 면면을 살폈다. 혹시 혈영신공을 인정해 주는 사람이 없을까 해서.

살펴본 결과는 실망뿐이었다. 누구도 진정으로 강한 자가 없었다.

자신보다 강한 무공을 보면서 인정하는 자가 없었다. 그것은 자존심이 아니라 못난 거다.

살문 살수들은 진정으로 강하다.

이들은 혈영신공을 인정했고 강한 무공이라며 부러워했다. 혈영신공을 봤으면서도 자신의 무공과 비교해 보고 싶어 했다. 그만한 자신들이 있는 게다.

살수들 간의 우애도 남다르다.

같은 피를 물려받지 않았고 같은 사문에서 무공을 배운 사형제도 아니면서 서로를 진정으로 위해 준다.

다른 사람들이 ‘널 위해 죽을 수 있다’는 말을 하면 코웃음 치겠지만 이들이 그런 말을 한다면 무한한 영광으로 받아들이리라.

살문 살수들은 그런 말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모두 믿는다.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하듯이 자신이 위험에 빠졌을 경우에는 목숨을 걸고 구하러 올 것이라고.

혈영신마도 혈살편복을 그렇게 생각한다.

둘 중 한 명이 죽어야 한다면 자신이 죽으리라. 혈살편복은 세상을 살 이유가 충분한 사람이니까. 아마 혈살편복도 같은 상황이라면 자신과 같은 행동을 취하리라.

살수… 무림 전체로부터 공동의 적으로 낙인찍힌 살문 살수.

그러면 또 어떤가. 이런 사람들과 같이 생활하니 이보다 더 큰 행복이 또 어디 있는가?

이들도 처음부터 이렇지는 않았을 게다.

누구는 표국에서 왔고, 누구는 낭인이었고, 누구는 엽사였으며, 화산파에서 수련한 무인도 있다.

각기 다른 곳에서 생활할 적에는 이런 감정들을 지니지 않았을 게다.

“살문에서 지내다 보니 그렇게 되더군요. 처음에는 살문을 이용하려고 했거든요. 할 일이 있는데 살문을 이용하면 쉽게 이룰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데 그 백전을 수련하면서 마음이 바뀐 거예요. 뭐랄까, 서로를 아껴야 내가 산다는 느낌이랄까? 그런 느낌이 드는 거예요. 형님들과 아우들이 뒤를 막아주니 난 마음 놓고 앞에 있는 적만 상대하면 된다는 그런 느낌요.”

혈영신마는 종리추가 혹독하게 가르쳤다는 백전을 경험하지 않았다. 말은 들었다. 어느 강변에서, 산속에서, 평원에서 온갖 종류의 싸움 방식을 익혔다고.

살수 문파들이 무공을 수련시키는 데 반해 종리추는 싸움 방식을 가르쳤다.

실전은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 같은 방식, 같은 초식을 반복하다 보면 몸에 붙게 되고 다음 싸움에서는 좀 더 능숙하게 싸울 수 있다. 그래서 강해지는 것이다.

종리추는 무공 대신 싸움 방식을 택했고 여러 사람이 합동하여 싸우는 방법을 최우선으로 가르쳤다.

정도인들이 꺼려하는 연수합격을 창피하게 여기지 않게끔 만들었다. 당연한 것이고, 그러려면 서로를 알아야 하고 위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다.

피보다 진한 우애는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형님, 저기인 것 같은데요?”

“음, 그렇군.”

혈영신마는 상념을 접고 ‘소요객잔’ 이라고 쓰인 깃발을 보았다.

혈영신마와 혈살편복이 들어서기 무섭게 객잔 주인은 두 사람을 안채로 안내했다.

혈살편복이 객잔에 들어서면 하품하듯이 깍지 낀 손으로 크게 기지개 켜는 모습을 보고 난 후 나타낸 행동이다.

사전에 두 사람이 올 것을 통보받은 듯 다섯 채나 되는 안채가 텅 비어 있다.

안채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깨끗했다.

방 안에 있는 집기들도 오래 묵은 것들이지만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먼 길에 고생하셨습니다.”

객잔 주인이 차를 따르며 말했다.

“고맙소.”

혈영신마는 객잔 주인의 얼굴을 스쳐 봤다.

집에서 기르던 개도 주인을 무는 경우가 있는데 살수와 연계된 사람들은 종종 그런 짓을 한다. 항상 경계하고 잘 살펴야 한다.

“혹시 우리에게 온 편지 없소?”

“그렇잖아도 지금 막 전해 드리려던 참이었죠.”

객잔 주인은 바깥 동정을 살핀 다음 품에서 서신을 꺼내 건네주고 돌아갔다.

살문에서 살수에게 보내온 편지는 살수만 알아야 한다. 외장 문도는 절대 같은 자리에 합석해 있어서도 안 된다.

등천조가 외장 문도들에게 각인시킨 불문율이다.

“주공이 보내온 겁니까?”

혈살편복이 물었다.

혈영신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편지를 개봉해 읽었다.

“형님, 궁금해 죽겠소. 뭐라고 쓰였는지…”

혈살편복은 중간에서 말을 뚝 끊었다. 혈영신마의 안색이 미미하게 변해 가는 것을 감지해 낸 것이다.

편지를 다 읽은 혈영신마는 촛불을 끌어다 불을 붙였다.

편지가 활활 타오르다가 한 줌 재가 되어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혈영신마는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주공께서 비망신사를 구하라고 하는군. 비망사를 몰살시킨 자들에게 쫓기고 있나 봐. 한발 늦어 비망신사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때는 누가 비망사를 쳤는지 알아보라는군. 저들은 살문 외장의 정보망에도 걸려들지 않았대. 비망신사를 구하지 못하고 저들이 누군지 알지 못하더라도 절대 저들과 맞서는 일은 피하라고 신신당부하셨어.”

“대단한 놈들이네요, 외장 정보에도 걸려들지 않았으면.”

“…”

열에서 백, 백에서 천, 천에서 만…

상상을 초월할 만큼 빠르게 확산되는 살문의 정보망은 세상의 온갖 잡다한 소식을 전부 물어온다.

그런데도 종적이 잡히지 않았다는 것은 저들이 의도적으로 종적을 숨기고 있다는 것과 같다. 세상 모든 사람을 피하고 있다. 잠자는 곳도 산과 같이 인적 없는 곳을 골라서 잘 테고, 음식도 자기들 스스로 알아서 구해 먹을 게다.

세상과 완전히 격리된 집단이다.

목적은 오직 하나, 죽이는 것이다.

“음…! 살문이 최대 강적을 만났지 않나 싶네. 저들이 우리 적이라면.”

“…”

혈살편복도 같은 생각을 했다.

혈영신마가 편지를 읽을 동안 안채 마당을 서성이던 객잔 주인이 들어왔다.

“다 읽으셨습니까? 들어가도…”

“들어오시오.”

“저녁을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따로 뭐 시키실 일이라도…”

“비망신사가 어디쯤 도주하고 있는지 소식을 접한 게 있으면 알려주시옹.”

“지금은 없지만… 그 부분을 집중해서 바로 알아보겠습니다.”

“형님 말대로 세상 참 묘하네요. 비망사를 멸문시키러 왔는데 오히려 비망신사를 구하게 되다니.”

혈영신마와 혈살편복은 비망사를 멸문시키기 위해 파견되었다.

비망사의 무공이 살수 문파 중에서 가장 강하다는 게 비망사를 선택하게 된 이유다.

우연이지만 사곡과 혈잠화의 멸문은 무림군웅들을 기쁘게 했다.

그들이 기뻐하라고 한 일은 아니지만 결과는 그렇게 됐다.

종리추는 문파 하나를 더 멸문시킬 필요성을 느꼈다. 살수 문파가 하나둘씩 멸문당하게 되면 중원 각 성을 휘어잡고 있는 살수 문파들은 불안을 느끼게 된다.

구파일방은 물론 무림 그 누구도 믿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들밖엔 남지 않았다는 절박감을 느낄 테고, 그때 한 번만 싸우지는 않더라도 무림의 영향력에서는 벗어나게 된다. 숨어서 청부를 받게 된다 해도.

대혼란이 예상되지만 살문에 쏠리는 이목을 분산시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살문이 무림에 나서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

돈이 없어 외장이 돌아가지 않은 불상사는 한 번으로 족하다. 차후 또 포위될 때가 있겠지만 그때는 외장이 원활하게 돌아갈 게다. 그런 준비를 해야 한다.

“쉽지 않을 거야.”

혈영신마가 말했다.

비망신사는 점점 좁혀오는 죽음의 손길을 감지했다.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아무리 떼어내려 해도 떼어지지 않는 작자들이다.

‘다 익혔어. 은신술은 물론 추적까지.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수련한 것은 은신술뿐인데.’

더욱 무서운 것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추적한다는 것이다.

보이는 적은 따돌릴 수 있다. 그런 적을 따돌릴 방법은 수십 가지도 더 알고 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적은 따돌리지 못한다. 무슨 수로, 어떻게 따돌릴 수 있단 말인가.

비망신사는 삶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저들은 말려 죽일 심산인지 한 번만 더 힘을 쓰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시점에서 슬그머니 놓아버린다.

모르는 사람 같으면 ‘천만다행이다’, ‘정말 운이 좋았다’ 라고 말하겠지만 불행히도 비망신사는 살수다.

세상에 저절로 굴러들어 오는 운이란 것은 없다.

쌓아 놓은 것이 없는데도 운이 따라주었다면 한 번쯤 과거를 되짚어 봐야 한다. 두 번, 세 번 운이 좋았다면… 틀림없이 목숨이 위태롭다고 느껴야 한다. 아니, 이미 올가미에 걸려들었다고 봐도 좋다.

저들은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야 살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내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바라는 것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을 때 퍼뜩 떠오르는 영감이 있었다.

하늘에 떠 있는 뭉게구름이 유유히 흘러간다.

‘구름이 흘러간다. 흘러간다… 도주! 도주야! 저놈들은 살수의 도주 수법까지 배우고 있는 거야. 도주를 포기했을 때 나는 죽는다. 지금이야! 난 지금 포기하려고 했어. 그럼 오늘 밤… 안 되지, 네놈들 마음대로 죽일 수는 없지.’

비망신사의 눈가에 다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비망신사는 태연하게 다루에 앉아 차를 마셨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행동이다.

지금까지는 은밀히 숨어 다니고, 음식도 훔쳐 먹고, 잠도 남의 집 헛간에 숨어 들어가 새우잠을 잤다.

강적을 피해 도주하는 길은 사람과 부딪히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사람 목숨을 주머니에 든 동전같이 여기며 살아왔다.

꺼내고 싶으면 꺼내고 집어넣고 싶으면 집어넣고.

이제는 자신이 동전 신세가 되었다.

주변에 있는 사람을 살펴봤다.

살행을 하고 물러설 때가 가장 위험하다. 살행을 하기 전에는 쫓는 사람이 없지만 살행을 한 후에는 쫓는 사람이 많아진다. 누가 쫓는지, 몇 명이나 쫓는 자… 아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 답답할 게다. 그럴 때면 주위를 살펴라. 눈에 보이는 모든 사람을 적으로 간주하고 행동거지를 살펴라.

자신이 살수들에게 들려준 말이다.

그 말을 들었던 살수들은 모두 죽었고, 말을 한 자신은 살아남아 행동으로 옮기고 있으니…

‘아낙, 힘없는 걸음, 근심 어린 표정. 처자, 심심한 표정, 탐기로 가득 찬 눈…’

한 명 한 명 주위를 살폈다.

‘아냐, 없어. 이들 중에는 분명히 없어. 그럼 누구인가 틀림없이 감시를 할 텐데… 누구인가?’

점소이가 주전자을 들고 왔다.

“한 잔 더 드릴까요?”

비망신사는 귀찮다는 듯 됐다는 손짓을 했다.

그의 눈은 연신 오가는 사람들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차를 마시는 행동은 자신의 관찰을 합리화시키는 행동일 뿐 차 맛을 음미할 정신도 없다.

“그럼 떡 좀 더 드릴까요?”

가지 않고 계속 친절을 베푸는 점소이의 행동이 비망신사의 신경을 건드렸다.

다루에서는 일반화된 행동이다.

그런데 무엇인가 비망신사의 주의를 끌어당기고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금방 알아냈다.

주전자를 들고 있는 손에 들린 작은 나뭇조각.

“차를 더 주게.”

점소이가 주전자를 기울여 차를 따랐다.

손에 들린 나무조각이 찻물과 함께 찻잔 속으로 들어갔다. 나뭇조각은 맑은 찻잔 속에 가라앉아 떠오르지 않았다.

‘중목.’

특이한 나무다. 일반적으로는 사용하지 않는다. 무림 문파 중에서는… 하오문도가 사용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비망신사는 천천히 찻잔을 들어 입에 가져갔다.

나뭇조각의 독특한 감촉이 혓바닥을 간질였다.

점소이는 다른 자리로 가 다른 손님에게 차와 떡을 권하고 있었다.

‘누구지? 누가 나에게…’

믿어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

비망신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가 알고 있는 방법을 총동원해도 구파일방의 기재들을 따돌릴 수가 없다.

역시 보이지 않는 적을 따돌리기에는 역부족이다.

저들은 개방의 정보를 이용하고 있을 게다. 그렇다면 개방의 정보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거지의 눈은 피할 수 있어도 거지와 연관이 있는 자들의 눈은 피할 수 없다.

결국 세상 사람 모두에게 피해야 한다.

그런데 그것조차도 소용없었지 않는가. 사람 눈을 피해 아무도 만나지 않았어도 종적을 잡히고 말았다.

개방은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방식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역을 포괄적으로 수색한다. 종적을 잡아냈으면 도주할 수 있는 모든 방향에 사람을 깔아놓는다. 이동할 수 있는 최대 거리를 계산해서 미리 대기하고 있는다.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는 것은 혼자만의 생각이다.

저들은 이미 계산했고, 대기했다.

암습을 가해왔고, 운 좋게 피한 것은 그 방법이 소용없으니 다른 방법을 사용하라는 무언의 압박이다. 또 자신은 충실히 따랐다. 암습을 받을 때마다 다른 방도로 추적을 따돌리려고 했으니까.

‘저들이라면… 죽이고 싶으면 죽이겠지.’

비망신사는 곁눈질로 주위를 살폈다.

그가 찾고자 하는 털북숭이 장한은 그늘에 마차를 세워놓고 꾸벅꾸벅 졸고 있다.

비망신사는 거리 구경을 나온 사람처럼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털북숭이 장한한테 걸어갔다.

“여보! 빈 마차요?”

털북숭이 장한은 급히 잠에서 깨어나 입가에 흘린 침을 닦았다.

“예예, 어디까지 가시려고요?”

“마전까지 갑시다. 얼마요?”

“일곱 냥만 주세요.”

비망신사는 일곱 냥을 꺼내 건네줬다.

두두두두…!

복잡한 곳을 빠져나온 마차는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끼럇! 끼럇…!”

마부는 연신 채찍을 휘둘렀고, 말은 더욱 박차를 가했다.

마차, 마전, 칠.

찻잔에 들어갈 정도로 작은 나뭇조각에 음각된 글씨는 단 다섯 자.

마차는 한 대뿐이었고, 마전이라고 말하자 일곱 냥을 말해 왔다.

그가 마차를 탄 곳에서 마전까지 가는 데 얼마를 받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일곱 냥보다 못되거나 더 많이 받는다는 정도는 안다.

밀마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 있어야 한다.

두두두두두두…!

인적이 드문 곳에 이르자 마차는 달릴 수 있는 최대의 속도를 내며 질주했다.

‘마전까지 가는 건가?’

비망신사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던져진 주사위인 것을. 그런데,

쉬이이익…!

마차가 산굽이를 돌아갈 때 마차는 회전력을 이기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그리고 그 순간 산굽이에서 인영 하나가 솟구쳐 마차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순간적이지만 비망신사는 도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누가 달려든다 싶을 때면 어김없이 도주했고, 목숨을 구했다. 사실은 그들의 놓아준 것이지만.

이번에 마차에 달라붙은 사람은 저들과 달랐다.

그는 달리는 마차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네모난 얼굴에 의지가 굳건해 보이는 입술이 인상적인 사내였다.

“혈영신마요.”

“혀, 혈영신마!”

비망신사는 깜짝 놀랐다.

팔부령에 있어야 할 살문 살수 혈영신마가 호광성에 나타나다니! 그럼 정말 소문대로 살문이 청부를 재개했나?

“문주께서 당신을 구해 오라고 명하셨소.”

“살문주가 나를…?”

“팔부령에서 있었던 구원은 생각지 마시오. 비망사가 원해서 공격한 것도 아니고, 우리는 죽이고 싶어 죽인 게 아니오. 그런 것 때문에 유인하는 것은 아니니 걱정 마시오.”

비망신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살수 문파를 이끈다지만 혈영신마 같은 사람은 자신을 안중에도 두고 있지 않을 게다. 죽이려면 무슨 유인이 필요하겠는가, 지금 이 자리에서 죽이면 그만인 것을.

마차는 산굽이를 몇 개 돌아 마전에 이르렀다.

마차를 탄 후 반각도 걸리지 않았으니 짧은 거리다. 걸어서도 충분히 오갈 수 있는 거리다.

역시 일곱 냥은 비쌌다.

마차가 마지막 산굽이를 돌았다. 그때 혈영신마가 비망신사의 옷자락을 움켜잡고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두두두두…!

마차는 두 사람이 뛰어내리는 중간에도, 뛰어내린 후에도 속도를 늦추지 않고 계속 질주했다.

혈영신마와 비망신사는 관도와 산자락 사이로 뒹굴었다.

비망신사는 아주 잠깐이지만 당황했다.

혈영신마의 종적을 놓쳤다. 관도와 접한 산자락으로 몸을 굴린 것은 확실한데 보이지 않는다. 자신과 같이 나뒹굴었는데 어디로 사라졌는지.

갑자기 누가 바지를 잡아챘다.

‘아래?’

순간적이지만 몸을 굴린 지형이 떠올랐다.

관도, 갓난아기조차 몸을 숨길 수 없는 밋밋하고 야트막한 풀숲, 그리고 산자락…

바지를 잡은 손은 풀숲에서 튀어나왔다.

‘이런! 은서술!’

비망신사도 종종 사용하는 수법이다.

땅에 구멍을 파고 지붕을 덮는다.

은서술은 지붕을 얼마나 정교하게 만드느냐에 따라 완벽함이 결정된다. 주변 지형과 똑같아야 하고, 무엇보다 지붕과 주변 지형이 맞닿는 이음새에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아야 한다.

혈영신마가 들어가 있는 구덩이는 관도와 산자락 사이에 파였다.

은서술은 펼치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곳이다. 자신에게 펼치라고 하면 차라리 다른 곳을 찾을 게다.

풀이 많은 것도 아니고 듬성듬성 있는 곳. 흙도 딱딱하고 말랐다. 지형도 관도를 오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볼 수 있는 곳이다.

혈영신마가 비망신사의 옷자락을 거머잡고 안으로 끌어들였다.

흙 냄새가 풀풀 풍기는 구덩이 안은 의외로 넓었다. 입구는 좁게, 안은 넓게 판 특이한 구조다.

낯선 사람도 한 명 더 있었다.

“혈살편복이오. 말은 많이 들었소.”

‘강자다! 혈영신마는 그렇다 쳐도 이자는… 도대체 살문에는 얼마나 많은 강자가 있는 것이지? 어떻게 이런 자를 휘하로…’

비망신사는 혈살편복의 얼굴에서 여유를 읽었다.

강한 자만이 뿜어낼 수 있는 여유다.

살문주는 미친놈이었다.

그는 너무 정직했고 무엇보다 구파일방의 비위를 거슬렸다.

살수 문파의 예측은 들어맞았다. 살문은 개파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살천문의 급습을 받고 몰락했다. 개방과 공동파마저 일조를 한 완벽한 멸살이다.

그 와중에 살천문이 와해된 것은 뜻밖이다.

들리는 말로는 공동파도 막대한 타격을 받았다고 한다.

살문이 그렇게 강했던가? 그렇게 강했다면 무림 문파를 세울 것이지 왜 살수 문파를 세운 것일까? 의문이 치밀었지만 모두 과거가 되었다. 살문은 몰락했다.

그러던 살문이 재등장했고, 이번에는 십망을 선포받은 혈영신마마저 구해 갔다.

“미친놈! 아예 죽으려고 발악을 하는구먼.”

살수치고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이번에도 생각대로 살문은 십망을 선포받았다.

죽음밖에 남은 것이 없었는데 살문은 아직도 팔부령에 건재해 있고, 살문 살수들은 이렇게 무림을 휘젓고 다닌다.

‘이런 자들이 있으니깐 강한 거야. 나 같아도 이런 자들이 있다면… 그랬을까? 이런 자들이 있다고 구파일방에게 정면으로 도전할 수 있었을까?’

대답은 아니다.

자신은 그런 행동을 하지 못한다. 너무도 죽음이 명확한 일을 저지를 바보가 아니다.

종리추는 천하에 다시없는 바보이거나 세상에 두 번 다시 태어나지 않을 천재다. 그는 또 행운아이기도 하다. 이런 고수들이 든든하게 받쳐 주고 있으니.

“비망사는 그렇게 쉽게 당할 문파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누구에게 당했습니까?”

혈영신마가 물었다.

“소림이 빠진 팔파일방.”

“역시 그놈들이군.”

혈살편복이 끼어들었다.

“우리는 전부 몰살한 것으로 알고 있죠. 전부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각에. 그런 일은…”

“정면 승부가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말이죠?”

“…”

“정면 승부… 정면 승부나 다름없지. 팔파일방은 살문을 상대하기 위해 각 파에서 열 명의 기재를 차출했소. 처음 보는 기재들이지. 정말 그토록 뛰어난 기재들은 처음 봤소.”

“그들과 어째서…?”

“우리가 그들에게 은신술을 수련시켰소.”

“뭐? 완전히 정신 나갔군.”

혈살편복이 다시 끼어들자 혈영신마가 눈짓을 했다.

“크크크! 맞는 말이오. 정신 나갔지. 놈들은 우릴 마지막 수련 상대로 선택했소. 자신들이 얼마나 수련했는지 우릴 상대로 시험했소. 비망사는… 일 다경 만에 몰살했소.”

죽음과 같은 침묵이 흘렀다.

혈영신마는 혈영신마대로, 비망신사는 비망신사대로 생각에 잠겨들었다.

비망신사는 오랜만에 깊이 잠들었다.

비객에게 쫓기며 쌓은 피로를 하룻밤 사이에 모두 풀었다.

“운공조식을 해도 좋고 잠을 자도 좋소. 하지만 우리가 입을 열기 전까지는 단 한 마디도 하지 마시오. 도주는 우리가 하는 것이니 우리 방식을 따라주시오.”

그때부터 혈영신마와 혈살편복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죽은 듯했다.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않았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손으로 만져 보지는 않았지만 체온도 싸늘하게 식은 듯했다.

비망신사는 운공조식을 취했다.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가능한 빨리 최대한 기력을 회복시켜 놓아야 한다.

운공조식을 끝내고 눈을 떴다.

그때까지 혈영신마와 혈살편복은 앉은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공간도 어느 정도 있으니 웬만하면 몸이라도 한번 꿈지럭거릴 만한데 이들은 땅속에 뿌리박은 바위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대단한 인내심이군. 아니야, 이건 인내심이 아니라 무공이야. 살문의 은신술이군.’

쉽게 끝날 은신술이 아니다.

이들은 은서술을 펼친 곳에서 장기간 머물 생각인 듯하다.

비망신사도 준비했다.

진기를 끌어올려 전신을 한 바퀴 휘돌린 다음 다시 진기를 끌어올렸다. 처음과는 달리 천천히 느릿하게… 체온을 죽이고 맥박을 죽여야 한다.

협소한 공간에 머물 경우 대다수의 사람은 한 시진도 못 되어 뛰쳐나간다. 얼마든지 참을 수 있을 것 같겠지만 협소한 공간에서 느끼는 공포와 답답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무인들은 무공을 사용하여 어느 정도 오래 버틸 수 있다.

답답함도, 혼자 있다는 외로움도, 바깥으로 나가 시원한 공기를 마시고 싶다는 유혹도 이겨낼 수 있다. 살수는 거기에 조금 더 보태 며칠이고 머물 수 있는 수련을 한다.

한자리에 꼼짝하지 않고 몇 시간이고 버티는 수법은 살수 문파마다 한두 개씩 가지고 있다.

비망신사는 비망사의 은신술을 펼쳤다.

팔파일방 기재들에게 수련시킨 은신술이다. 비망사 살수들이 이 은신술을 펼쳐 기재에게 협격을 가했다. 기재들이 이 은신술을 펼쳐 살수들을 도륙했다.

맥박이 서서히 죽고, 체온도 내려갔다.

머릿속은 무아의 경지에 들어가 잡념을 몰아냈다.

관도를 질주하는 마차 소리가 들린다. 터벅터벅 걸어가는 나그네의 발걸음 소리도…

비망신사는 나를 잊고 세상을 보는 관조의 세계로 침잠했다.

“가지… 가지… 가지…!”

동굴에서 소리를 빽 질렀을 때처럼 웅웅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지고?’

비망신사는 은신술을 서서히 거뒀다.

너무 급작스럽게 거두면 기혈이 역행한다. 맥박을 죽이고, 체온을 죽였던 터라 급작스럽게 흘러드는 기혈이 경맥을 손상시킬 수도 있다.

비망사의 은신술은 위험천만하다.

“깨어나… 깨어나… 깨어나…!”

다시 웅웅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은신술을 펼치면 아무 생각도 없는 백치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육신은 있으나 느끼지 못하고, 정신은 육신에서 한 걸음 물러나 멀거니 지켜보는 현상이 된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으나 지금처럼 웅웅 울리는 소리로 변해서 들린다.

이럴 때 누군가 타격을 가해온다면 기혈이 막혀 죽게 된다. 진기를 실은 타격이 아니라 아주 가벼운 타격에도 치명상을 입게 된다.

비망사 살수들은 미리 깨어난다.

상대가 다가오는 속도와 거리를 계산해서 지척에 이른 시간이면 깨어날 수 있도록 수련받는다.

그런 수련은 팔파일방에서 차출된 기재들도 받았다.

비망신사가 깨어나 멍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쳐다봤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며칠이 지난 것은 아닐까? 쉽게 정신을 차릴 수 없고, 육신이 말을 듣지 않는 걸 보면 상당히 오랜 시간 침잠해 있었던 것 같다.

은신술을 펼친 시간이 길면 길수록 깨어나는 시간도 길어진다. 아니, 진기를 거두기만 하면 깨어날 수 있지만 정신이 또렷해지고 육신에 힘이 들어가기까지는 펼친 시간에 비례해 시간이 늘어난다.

“깨어났군. 혈살, 등에 업게.”

이들은 은신술에 대해 정통하다.

진기를 거두기 전에 건드리면 치명상을 당한다는 걸 알고 있다. 진기를 거둔 후에야 몸에 손을 댈 수 있다는 것을.

“형님, 정말 그럴 거요?”

“뭘?”

“주공께서 혈살이라고 하는 것도 못마땅한데 형님까지 혈살이라고 할 거요?”

“그럼 바꾸지. 편복, 등에 업어.”

“형님, 아무래도 한바탕 살풀이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언제가 좋겠소?”

“곧 몸을 풀 수 있을 테니까 서두르지 말게. 장난 그만 하고 어서 업기나 해.”

“쩝!”

“알았네, 알았어. 혈살편복, 등에 업어.”

“진작 그렇게 말씀하실 일이지.”

혈살편복이 축 늘어져 있는 비망신사를 업었다.

은서술의 결정체인 뚜껑이 열리자 시원한 바람이 밀려와 탁한 웅덩이의 공기를 쓸어냈다.

“이제부터 시작이군. 누가 이기나 해볼까?”

쉬익!

혈영신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혈살편복이 신형을 띄웠다.

혈살편복은 등에 사람을 업고 있다. 그는 질주하고 혈영신마가 보호한다.

여태까지 주고받은 말로 미루어 사전에 약조된 바는 없었다. 하지만 정확히 손발이 들어맞는다. 수많은 수련을 통해 몸에 붙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왕공안이 당한 것은 당연해. 이들을 상대로 싸웠으니…’

비망신사는 귓전을 스쳐 가는 바람 소리를 즐겼다.

인연

1

“그것참, 이상하네요. 전서구가 들어오지 않아요.”

살문과 외장을 연결하는 제일점은 비부다.

비부를 거쳐 외장에서 수집한 모든 정보가 살문에 들어온다. 비부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벽리군이 절벽 아래를 쳐다봤다.

다른 때 같았으면 벌써 서너 마리 정도는 날아들었을 전서구가 한 마리도 날아들지 않는다.

‘이상해. 이건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징조야.’

“뭐 보이는 것 없어?”

“없어요. 죽은 듯이 조용해요.”

비부가 안광을 빛내보았지만 거둬들인 것은 없었다.

팔부령에 살문이 버티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대래봉으로 들어서던 발길은 뚝 끊겼다.

팔부령을 넘나들던 장사꾼들은 먼 길로 돌아갔다. 유람객은 더더욱 들어서지 않았다. 일부 살문에 청부를 의뢰하려는 사람들이 팔부령으로 들어서긴 했지만 소림승에게 길목이 막혀 되돌아갔다.

팔부령 대래봉은 점차 인적이 끊긴 원시림으로 변해갔다.

“화전민들은?”

“그 사람들도 보이지 않아요.”

“언제부터 안 보였지?”

“글쎄요… 한 삼사 일 됐나?”

“그걸 왜 이제야 말하는 거야!”

벽라군이 고함을 지르자 비부는 머리만 긁적거렸다.

“장부는 어디 가셨지?”

“모르겠는데요.”

벽라군은 다급해졌다. 살문에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일이…

종리추는 대래봉을 벗어나 산책을 즐겼다.

어느 곳 하나 무인들의 체취가 묻지 않은 곳이 없지만 지금은 조용하기만 하다.

계곡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물길이 시원하게 흐른다.

돌을 들어보면 가재가 꼼지락거리며 황급히 도망간다.

어릴 적 가장 못 먹는 음식 중 하나가 바로 가재다. 홍리족에서 자란 여인답지 않게 그녀는 등딱지가 딱딱한 것은 먹질 못했다. 전갈도, 가재도…

문득 종리추의 눈에 발가벗고 목욕하는 사내가 들어왔다.

사내는 보기에도 시원하게 물속을 헤엄치며 한가로운 여유를 즐기고 있다.

종리추가 다가서자 사내가 방긋 미소를 보내왔다.

“형장도 목욕하러 왔소이까? 이곳 물은 아주 맑고 시원하구려.”

사내가 목욕하는 곳은 물길이 흘러 작은 폭포를 이루는 못이다. 산속에 있는 계곡치고는 제법 널찍하고 안쪽은 깊이가 한 길에 가깝다.

쏴아아아…!

폭포에서 터져 나온 포말이 시원하게 살갗을 간질였다.

종리추는 얕은 바위에 걸터앉아 사내를 쳐다봤다.

사내는 목욕을 즐긴 다음 먹을 심산인지 산새 서너 마리를 구워놓고 있었다.

얕은 불길에 노릇노릇 익어가는 산새에서 구수한 냄새가 풍겨났다.

“아, 글쎄, 이렇게 좋은 걸 살문 혼자 독차지하고 있다니 말이나 되오? 좋은 건 모든 사람이 다 같이 즐겨야지. 형장도 그러고 있지 말고 옷 벗고 들어오시오. 아주 시원하다니까.”

종리추는 옷을 벗었다. 그리고 물속으로 들어가 목까지 푹 담갔다.

사내가 폭포까지 헤엄쳐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한 번, 두 번…

사내는 종리추가 물속에 있는 게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유영을 즐겼다.

“아! 시원하다.”

사내가 못가로 와서 작은 돌을 베고 누웠다.

“하늘은 맑고, 바람은 솔솔 불고, 물은 시원하고… 이곳이 바로 무릉도원 아니오?”

사내가 말을 걸어왔다.

“…”

“원래 말이 없는 분이오? 입이 참 무겁구려. 참! 검을 소지했으니 무인인 것 같은데, 이런 것 아니오? 난 두 종류의 사람하고만 말을 한다. 벗과 적. 벗은 술 한잔 같이 하자고, 적은 죽이기 위해서.”

사내의 말에 뼈가 들어가기 시작했다. 여전히 하늘을 올려다보는 상태에서.

종리추도 사내처럼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사람은 몇 살쯤에 죽는 게 적당하다고 생각하나?”

“그런 게 어디 있소? 가급적이면 오래 살아야지. 죽지 않고 오래 사는 건 모두의 소망 아니오? 오죽하면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라고 사람을 보냈을까. 그리고 형장, 내가 형장보다 나이가 많은 것 같은데, 거 웬만하면 말 좀 올리쇼.”

“그렇지. 몇 살쯤 죽는 게 좋다고 정해져 있으면 불행하지. 그게 사람이야. 오래 살고 싶은 것. 불의의 변을 당하지 않고 오래 사는 것. 거기에 행복이나 보람 같은 것이 보태지면 금상첨화고. 그런데 그렇지 않아. 사람은 언제 죽을지 모르지. 지금 이렇게 목욕을 하다가 죽는 사람도 있을 테고. 그렇지 않나, 후계?”

“…”

이번에는 사내가 말이 없었다.

그는 후계였다.

후계는 잠시 움찔하는 것 같더니 곧 평정을 되찾았다.

“살문이 대단하다 해도 믿지 않았더니 정말 놀랍군.”

후계는 신분을 속이지 않았다.

“개방도 대단하겠어, 네가 여기서 죽지 않고 살아 돌아가 방주가 된다면.”

“살려주겠나?”

“생각해 보지.”

“…”

“…”

종리추와 후계는 물속에 몸을 담그고 편안함에 젖었다.

종리추나 후계나 긴장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오랜 벗과 목욕을 즐기는 듯 여유로웠다.

후계가 입을 열었다.

“새를 좀 잡아놨는데, 들겠나?”

“비둘기도 먹나?”

“하하하! 거지가 못 먹는 게 어디 있다고. 비둘기 고기는 생각 밖으로 맛있지. 야시장을 못 가봤군. 야시장에 가면 비둘기 고기만 따로 파는 곳이 있지.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어.”

“한번 먹어보지.”

두 사내가 일어섰다.

몸에 묻은 물기가 ‘촤르륵…!’ 소리를 내며 굴러떨어졌다.

“음, 맛있군.”

“그런 말 할 줄 알았지. 한 마리 더 들게. 넉넉하게 잡아놨으니까. 모자라면 더 잡을 수도 있고.”

두 사내는 발가벗은 채 비둘기 고기를 먹었다.

발 앞에 뼈가 수북이 쌓였다.

“모자라?”

이번에는 종리추가 물었다.

“왜? 직접 잡아주게?”

종리추는 대답 대신 입술을 오므렸다. 그의 입에서 음정이 전혀 다른 소리가 새어 나왔다.

“구구구구! 구구구! 구구구구!”

파다닥…! 파다다닥…!

사방에서 비둘기가 날아올랐다.

팔부령 곳곳에서 수십 마리는 족히 될 비둘기가 날아올랐다.

“구구! 구구구구!”

종리추는 곁에 다가온 비둘기를 잡아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먹을 텐가?”

“그것참, 희한한 재주군.”

“다른 재주도 있지.”

“호오! 보여줄 텐가?”

“너를 죽이는 재주.”

“그건 쉽지 않을 듯싶네. 보고 싶지만 관두지.”

“늦었어. 보여달라고 했을 때 이미 재주를 펼쳤거든.”

“…”

“숨 두 번만 크게 쉬어. 틀림없이 죽을 거야.”

후계는 긴장했다.

그는 살문주를 오늘 처음 봤다. 하지만 이자가 허튼소리를 하지 않을 자라는 것은 분명하다.

큰 숨 두 번이면 틀림없이 무엇인가 목숨을 끊으러 올 게다. 올 게다? 그렇다. 종리추는 움직이지 않고 있고 움직일 생각도 없다. 그를 죽이러 오는 것은 종리추가 아닌 다른 사람이다.

“살려달라고 하면 살려주지. 어때?”

“…”

갑자기 자신답지 않게 오기가 치밀었다.

이 사내 앞에서는 무엇이건 지고 싶지 않다.

‘두 번. 큰 숨 두 번… 지금인데…’

콰악!

후계는 발뒤꿈치가 따끔했다.

‘앗차!’

급히 발을 올리고 뒤꿈치를 문 것이 무엇인지 보았다.

‘이, 이건!’

독사다. 등면이 주홍빛이고 암갈색의 가로무늬가 있다. 정수리는 창끝을 세워놓은 듯 뾰족하다.

후계가 관심 있게 본 것은 눈에서 목으로 이어지는 선이다.

노란색의 선이 눈에서 시작되어 목으로 넘어간다. 마치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혈루사!”

후계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덮였다.

개방도는 뱀에 대해서도 잘 안다. 야지에서 생활할 경우가 많은 만큼 뱀을 접하는 기회가 많다. 잡아먹기도 하고 심심할 때는 가지고 놀기도 하고.

개방도에게 뱀은 친근하다.

하지만 이놈의 혈루사는 다르다. 결코 친근할 수 없다. 다른 독사는 독기가 피를 타고 흐르기에 내력으로 억누를 수도 있지만 혈루사는 독기가 피를 타고 퍼지는 것 외에 물린 부위를 썩혀 버리는 지독한 독기를 지녔다.

썩는 부분은 점점 범위를 넓힌다.

내공으로 독기를 막아내도 살이 썩는 것까지는 어떻게 할 수 없다.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독기가 퍼져 있는 곳까지 잘라 버리는 것이다. 미련 없이, 물린 즉시.

후계는 내력으로 독기를 눌렀다.

뒤꿈치에서는 벌써 누런 고름이 흐르고 있다.

‘종아리, 허벅지에서 잘라야 돼!’

후계는 종리추를 노려봤다.

살문 살수가 대단하다고 해서 어떤 자인지 알아보고 싶었다. 싸우게 되면 죽일 것이고… 그만한 무공은 지녔으니까.

종리추를 보기 전까지의 생각이다.

종리추를 보는 순간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에 비해 결코 약하지 않은 자다. 무공으로 겨뤄도 승패를 점칠 수 없다. 목욕을 하는 동안, 비둘기를 먹는 동안 누누이 허점을 노려보았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그가… 독사로 공격할 줄이야. 독사를 부릴 수 있을 줄이야!

“거봐. 그러게 진작 살려달라고 했어야지.”

“…”

“아래… 분운추월도 와 계시지?”

‘계시지? 이자가 경어를…’

“살려주지. 과거 분운추월에게 도움을 받았으니까.”

종리추가 발목을 잡아왔다.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지금은… 싸울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그가 죽이려고 한다면, 죽을 수밖에 없다. 그는 진기로 독기를 누르고 있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어느새 한쪽이 들린 소도가 뒤꿈치를 갈라냈다.

‘혈루사는 해약이 없어. 무슨 수로…’

종리추는 상처 난 곳에 입을 댔다. 그리고 빨아댔다.

‘미, 미쳤어!’

해약이 없는 혈루사의 독기… 살을 녹여 버리는 독기… 여타 독사의 치료법처럼 입으로 빨아댔다가는 혓바닥부터 녹여 버릴 게다.

후계는 독기가 빨려 나가는 것을 느꼈다.

종리추가 입을 떼고 누런 고름을 뱉어냈다. 그리고 다시 독기를 빨았다.

‘이자는… 독에 면역되어 있어. 내공이 아냐. 독에 면역된 거야. 어떤 독도 죽이지 못해. 세상에 이런 자가 있다니!’

소림오선사가 죽은 건 우연이 아니다.

무공만 강한 것이 아니라 배포도 크고 지략도 뛰어나다.

모든 걸 알 수 있다. 종리추란 사내에 대해서.

‘평생… 이자와 싸우게 될지도…’

후계는 종리추가 숙적으로 보였다.

흔히들 세상에는 천적이 있다고 하는데, 하늘이 자신의 천적으로 종리추를 내려 보낸 것 같았다.

독기를 다 빨아낸 종리추가 옷을 입으며 말했다.

“상처는 잘 간직해. 남의 전서구를 죽인 대가니까. 참! 전서는 어디 있지?”

후계는 옷이 있는 곳을 턱으로 가리켰다.

“남의 편지는 읽어보는 게 아냐. 다음부터는 예의를 지키라고. 분운추월에 대한 예의도 지켰으니, 다음에는 정말 죽을지도 몰라.”

“그 말은 나도 하지. 다음에는…”

전서를 집어 든 종리추가 손가락을 세워 흔들었다.

“아니, 다음이란 말은 나만 할 수 있어. 왜냐? 난 다음에도 널 틀림없이 죽일 수 있지만 넌 그렇지 못해. 후계, 우린 반드시 만나. 무림에 있으니까. 그때 제안을 하지. 들으면 살고 거스르면 죽어.”

종리추가 계곡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후계는 종리추가 앉았던 자리에서 등에 흰 줄이 있는 두꺼비를 발견했다.

‘백섬와…’

혈루사는 백섬와를 덮쳐 한입에 꿀꺽 삼켰다.

백섬와의 냄새를 맡고 온 것이다.

‘종리추…’

“하하! 하하하하…!”

후계는 하늘을 보며 웃어젖혔다.

난생처음 맛보는 패배감이다.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종리추 같은 사내가 있어 자신의 일생이 무의미하게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즐거움도 있다.

‘다음에라는 말은 너만 쓸 수 있다고? 자신감이 좋군. 좋아, 나도 그 말을 나만 쓸 수 있도록 노력하지. 졌어, 깨끗이.’

후계가 종리추를 처음 만날 날이었다.

비망신사는 나루터에 도착해 배를 탈 때쯤에서야 정신이 제자리를 찾았다. 육체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걸린 시간을 역산해 보면 은서술을 펼친 곳에서 적어도 하루는 꼬박 있었던 것 같다.

“형님, 배를 타도 괜찮겠어요? 차라리 산속으로 가는 게 안전하지 않겠어요?”

혈살편복이 말했다.

그건 비망신사도 같은 생각이다.

배를 탈 경우, 안전하다 생각하겠지만 개방 문도의 이목을 속일 수 없다.

정보는 곧바로 비객에게 전해질 것이고 날개가 달리지 않은 이상 빠져나갈 구멍이 없게 된다. 그래서 자신은 산으로만 도주했다.

“이건 주공이 날 구할 때 쓰던 방법이야. 아주 효과 있지. 내가 무사히 빠져나왔으니 이번에도 무사할 거야.”

‘주공’ 이라는 말에 혈살편복은 입을 다물었다.

비망신사는 다시 한 번 살문주가 부러웠다. 이런 절대적인 신뢰를 받는 문주는 중원천지에서도 몇 되지 않을 것이다.

배가 미끄러져 나가길 얼마간,

“모두 발을 굴러, 배를 전복시킬 테니까. 배를 뒤집을 거야. 우린 전복된 배 안에서 숨어 있어야 돼. 하루만 버티면 돼.”

“주공께서는 이런 생각을 어떻게 하셨대.”

“책에서 읽으셨다더군.”

“정말이오? 무슨 책이오?”

비망신사도 쫑긋 귀를 세웠다.

이만한 비책이 적힌 책이면 한번 읽어볼 만하지 않은가.

“그 말을 믿다니… 쯧! 농담도 못하겠군.”

“뭐요! 안 돼, 안 돼. 아무래도 형님과는 한번 살풀이를 해야겠어.”

“왜 그렇게 나와 싸우지 못해서 안달이냐?”

“말해 줄까, 말까?”

“마음대로.”

“그때 대야와 형님이 겨룰 때 있지 않소?”

“음.”

“그때 봤는데, 형님은 속공에는 취약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무승부로 끝났지. 그렇다면 거리를 두고 공격하는 내 귀영방편이라면… 가능성이 있지 않소?”

“해보면 알겠지.”

“흐흐흐! 형님, 그 말 잊지 마슈.”

비망신사는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중원 무림인들은 혈영신마라고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 특히 절강 무림인들은 공포에 떨었었다.

그런 사람이 살문에 와서는 무승부를 했단다. 이들이 큰 어른으로 모시는 누군가가 혈영신마와 비무를 했고 무승부로 끝났다.

혈살편복이라는 이자… 혈영신마와 비무를 해보지 못해 안달이다. 말을 들어보면 살문에는 그런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닌 모양이다.

혈영신마와 버금가는 무공을 지닌 사람이 있고, 또 싸우려는 사람들이 있고…

자신은 어떤가? 혈영신마가 겨뤄보자고 하면 겨룰 수 있는가?

‘살문은 괴물들의 집단이군. 인간들이 아냐.’

그가 간과한 점이 있다. 살문 살수들 역시 살문에 모여들 때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었다는 것을. 기껏해야 표국의 표사였고, 엽사였으며, 이름도 없이 떠돌던 낭인이었다는 것을.

쾅!

발을 굴러 배를 전복시켰다.

몸이 퉁퉁 불었다.

물속에 너무 오래 있어서인지 살이 물러지는 것 같았다. 근육에 힘이 빠져 물렁거리는 느낌이다.

발을 굴러 부순 배 밑창을 통해 별들이 보였다.

밤이 지나고, 낮이 되었다가 다시 밤이 되었다.

세 사람은 만 하루를 꼬박 물속에 있었다.

“가자.”

“지금? 괜찮아요? 개방 놈들은 강가에서 노숙을 많이 하는데.”

“주의해서 나가야지. 익숙한 장면은 보면서도 보지 못한다. 주공 말씀이야.”

비망신사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살문주가 했다는 말은 모든 살수가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말이다.

풍경을 익숙하게 해 놓으면 사람들은 무심히 지나친다. 무심히 지나치는 것… 거기에 틈이 있다.

세 사람은 물살을 조심스럽게 헤치며 강둑으로 올라섰다.

한쪽에서는 개방도들이 왁자지껄 떠들어댔다.

그들은 전복된 배를 보았고, 신경을 썼으나 지금은 무심히 지나치고 있다.

혈영신마는 여유롭게 천천히 걸었다.

밤새 길을 걸으면 외장 문도가 운영하는 객잔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고 편안하게 팔부령으로 들어설 수 있다.

먼동이 터 올 무렵, 세 사람은 객잔 깃발이 보이는 곳에 이르렀다.

이제 도주는 끝났다.

마지막으로 주의할 것 하나는 객잔으로 들어가는 동안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조심하는 것이다.

혈영신마는 객잔 주변을 살폈다.

“이상하군.”

중얼거림이 절로 새어 나왔다.

“이상한데요.”

혈살편복도 같은 소리를 했다.

객잔은 다른 객잔과 마찬가지로 평온하기 그지없으나 다른 게 한 가지 있다.

밖에서 안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창문이 활짝 열려 있다.

여름이니 당연하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데 창문을 닫아 놓는 객잔은 없다.

닫아 놓은 곳이 있기는 하다.

살문 외장 문도가 운영하는 객잔은 항상 맨 왼쪽 창문은 반쯤 열어 놓는다. 여름에는 그렇다.

“지나치자.”

“그러죠.”

세 사람은 객잔을 빙 돌아 원래의 목적지와는 전혀 다른 길을 택했다.

한적하고 조용한 객잔은 무거운 정적으로 가득했다.

정신없이 술을 퍼마시고 웃고 떠드는 사람들, 침상에 들어 깊은 잠에 떨어져 있는 사람들…

객잔에 투숙한 사람들은 곳곳에서 자신들을 지켜보는 아홉 쌍의 눈동자가 있다는 걸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다.

객잔 주인도 마찬가지다.

그는 자신의 객잔에 낯선 사람들이 돈도 내지 않고 들어와 있다는 걸 몰랐다.

그들은 천장에, 술독이 쌓인 곳에,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밑에… 쉽게 볼 수 없는 곳에 몸을 숨긴 채 감정 없는 눈길을 쏘아냈다.

밤이 깊었다.

멀리서 삼경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렸다.

흥청망청 떠들던 사람들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곯아떨어졌다.

객잔 주인도 방으로 들어갔고 나이 어린 점소이만 꾸벅꾸벅 졸면서 객잔을 지키고 있다.

아홉 쌍의 눈동자는 잠도 잊은 채 모두가 잠든 객잔을 지켰다.

아홉 쌍의 눈동자는 잠도 잊은 채 모두가 잠든 객잔을 지켰다.

시간이 말없이 지나갔다.

꼬끼오…!

드디어 새벽닭이 울었다.

날이 일찍 밝는 여름인지라 사방은 식별이 가능할 만큼 밝았다.

객잔 주인이 방에서 나오며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아홉 쌍의 눈동자가 하나둘… 사라졌다.

이윽고 아홉 쌍의 눈동자가 모두 사라졌다.

객잔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머물렀던 것도, 사라진 것도 알지 못했다.

“야, 이놈아! 사내자식이 그렇게 게을러 터져서 어디다 쓰냐! 빨리 마당부터 쓸어!”

객잔 주인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죽으면 썩어 문드러질 게 육신이야. 몸 아끼지 마!”

객잔 주인은 창문으로 다가가 왼쪽 마지막 창문을 반쯤 닫았다.

“아침부터 푹푹 내리쬐는데 그건 왜 닫아요? 활짝 열어놓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더니. 이놈아! 햇볕 내리쬐잖아!”

객잔이 아침과 동시에 생기를 되찾아갔다.

“오지 않았어.”

“우리도.”

“우리에게도 안 왔어.”

열 명의 얼굴에 곤혹스러움이 스쳐 갔다.

제일비주에서 제십비주까지, 열 개의 비를 맡고 있는 비주들이다.

“놓쳤다는 말이군.”

“…”

“이상하지 않아? 우린 비망사의 은신술을 포함한 모든 걸 알고 있어. 숨는 방법까지 다 알고 있어. 그런데… 며칠 전부터 우린 지혜를 짜내야 했어. 어디로 숨었을까? 어떤 방법으로 도주했을까? 이젠 모두 알았다는 생각에 그만 정리하려던 순간에 말야.”

“…”

“어디서부터였지?”

“송영.”

차디찬 음성이다.

독심미화 여숙상, 화산파의 매화검수, 지금은 비객 제칠비주.

여숙상을 쳐다보는 제일비주 유홍의 얼굴에 아픔이 스쳐 갔다.

그때 그 일만 없었다면 사매는 제칠비주가 아니라 자신의 반려자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도 제일비주가 아니라 화산파의 매화검수로 남아 있을 터이고.

여숙상은 그때 그 일로 마음이 얼어붙었다.

차디찬 빙심이 되어 녹을 줄을 모른다.

유홍이 걱정하는 것은 복수가 끝난 다음이다. 그를 죽인 후, 빙심은 어떻게 될 것인가. 부드럽게 녹는 것이 산산이 깨져 버리는 것은 아닐지.

여숙상만 보면 마음이 아려온다.

유홍이 마음을 다잡고 말했다.

“그래, 송영에서부터였어. 비망신사는 마전으로 가는 마차를 탔는데… 사라졌어. 그때부터 새로운 싸움이 시작된 거야.”

“…”

“모두 잊어. 비망신사는 놓쳤다.”

“제일비주, 그렇게 쉽게 포기해도 되나?”

“물론, 비망신사는 언제든 죽일 수 있는 놈이니까. 다시 한 번 모습을 드러내기만 하면. 그보다는… 새로운 수법을 분석해야 돼. 개방에 연락해서 지금까지 살수들이 취한 모든 수법을 파악해 달라고 해. 살인 수법이 아냐, 방법이야. 살인 방법, 도주 방법 모든 걸 전부 다 파악해야 해.”

“그러지.”

제십비주가 대답했다.

개방과 연락을 취해 정보를 얻어오는 것은 제십비주의 몫이다.

“이번에는 보내주자고. 이번에는….”

제일비주의 음성에 칼날이 스며 나왔다.

살문은 바쁘게 움직였다.

한 사람도 편히 앉아 쉬는 사람이 없었다.

광부는 섬서성에 들어가 살천문주의 손과 발이 되었다. 구류검수와 좌리살검이 번갈아 가며 살천문주가 벌어들인 돈을 등천조에게 날라다 준다.

외장에서 직접 움직일 수도 있지만 종리추는 철저하게 외장을 숨겼다.

“외장은 살문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돈을 받고 정보를 파는 사람들이야. 그들 중 단 한 명이라도 살문 때문에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면 외장은 끝나지. 돈이 아무리 좋다 해도 목숨보다 귀중할 수는 없으니까.”

외장은 숨겨야 한다.

단 한 명이라도 목숨을 잃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살문이 외장 사람들을 위해 지켜줄 도리다.

“거짓 정보는 단호히 척결하라. 특히 살문을 팔아먹는 행위가 감지되면 효수하라. 다른 사람들이 똑똑히 볼 수 있도록 높이 매달아라.”

등천조에게 내려진 특명이다.

지켜줄 것은 지켜주되 받을 것 역시 확실히 받는다는 철칙이다.

구류검수와 좌리살검은 그런 점을 알고 있기에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마부 역할을 한다.

모진아와 유구는 종리추의 밀명을 받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들은 꽤 오래전에 살문을 나섰다.

소림승들의 포위망에 구멍이 뚫린 것이 확인되자마자 팔부령을 떠났으니, 살문 살수들 중에는 벽라군 다음으로 빨리 움직였다.

그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지극히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그들은 봤다는 사람이 없으니까. 외장 문도가 수집한 어느 정보에도 모진아와 유구에 대한 글귀는 없으니까.

마치 세상에서 증발해 버린 것처럼 사라져 버린 두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은 살문을 지킨다.

그들이 하는 일은 비적마의가 번식하는 것을 관찰하여 구멍 뚫린 부분을 파악해 내는 것이다. 비적마의가 영역을 넓혔는지, 아니면 종족끼리 싸워 멸문했는지.

워낙 급하고 험한 대래봉인지라 세 사람이 한 바퀴 도는 것만으로도 하루 해가 지곤 한다.

용금화도 중원으로 나갔다.

지도를 만드는 일에 평생을 바친 용금화가 대래봉에서 할 일은 없었다.

그는 대외산 살문 시절, 살문이 몰락하기 직전에 그동안 만들었던 지도를 빼돌렸다. 원래 두 부씩 작성하여 파손이 생겨도 상관없지만 옮길 수 있는 만큼은 옮겼다.

종리추는 오채산 암동을 추천했다.

암동에는 오랜 세월 다듬은 석실이 많고, 오가는 길은 미로로 되어 있어 방어에 아주 적합한 곳이다.

용금화는 오채산으로 갔다.

그곳에서 살문과 전혀 관계없는 사람처럼 행세하며 지도 제작에 몰두할 게다.

가장 바쁜 사람은 삼현옹이다.

삼현옹은 대래봉을 요새로 만들 작정인지 하루 종일 나무 위에, 바위 밑에 기관을 설치하느라 분주했다.

“여긴 아무도 못 들어와. 안심하고들 싸워. 낄낄! 다음에 현운자와 만나는 날에는… 아마 무덤이 될 거야. 현운자의 무덤.”

종리추의 아버지, 어머니. 적지인살과 배금향은 무공 수련에 박차를 가했다.

살문은 강하지만 살수가 부족하다.

유회처럼 갑작스럽게 요절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고… 손 하나라도 더 필요할 때가 있을 게다.

가장 한가한 사람들은 어린과 구맥이다.

“계집이 습기 탁한 곳에만 있으면 몸에 안 좋아. 따라와.”

삼현옹은 그녀들을 데리고 분주히 돌아다녔다.

“세상일은 싸움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냐. 농부를 봐. 무공을 몰라도 잘 살잖아? 어차피 무림에 발을 들여놨으니 빠져나갈 수는 없어. 이놈의 무림이란 곳이 그래. 들어오기는 쉬워도 빠져나가기는 불가능해. 그러자면 뭔가 하나라도 배워야지.”

삼현옹은 그녀들에게 자신의 기관진학을 전수했다.

한 가닥 희망을 걸고서.

삼현옹의 희망은 뜻밖에도 어린에게서 시작되었다.

학문을 익힌 일 없고, 녹요평을 천방지축 뛰어다니던 소녀 어린은 정말 뜻밖에도 기관진학에 재능을 보였다.

기관진학 중에서도 어린이가 가장 재능을 보인 부분은 기관이다.

진학도 설명해 주었지만 어린이가 이해하기에는 너무 난해했다. 하지만 정교한 손기술만은 뛰어나서 기관을 설치하고 파훼하는 기술은 급속히 늘었다.

삼현옹은 홍리족에게 눈길을 돌렸다.

구맥에게 기관을 설명해 주니 그녀 역시 중원인보다는 빠르게 습득했다.

삼현옹은 희망을 잃지 않고 진학까지 전수해 주는 중이었다.

“계집아! 그걸 감방에 놓으면 어떡해!”

“계집이라고 그럴 거야! 난 문주 부인이란 말야!”

“오, 그러셔?”

“수염을 확 불태워 버릴까 보다. 여기 놓으면 되잖아! 됐어?”

“계집이 성깔만 더러워 가지고는….”

“뭐야! 이 늙은이가 곱게 봐주려고 했더니!”

삼현옹과 어린의 푸닥거리는 소리는 하루도 그치지 않았다.

집안 살림, 빨래하고 밥 짓고, 요리하고… 궂은일은 정원지가 도맡았다.

그녀는 싫은 소리 한마디 없이 동굴 살림을 착실히 꾸려 나갔다.

간혹 여인들이 거들기라도 할라치면 ‘피곤할 텐데 쉬어요’ 라는 말과 함께 곱게 웃었다.

양갓집 규수가 언제 살림을 해본 적이 있으랴.

하지만 그녀는 살림도 정갈하게 했고, 음식 맛도 날로 좋아졌다.

이제 두 살이 된 조미를 돌보며 평범한 아낙이 즐길 수 있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듯 보였다.

살문 살수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은 비망신사다.

혈영신마를 따라 살문까지 오기는 했지만 그가 할 일이 없었다.

무공은 살문 살수들 중 제일 밑일 것 같고 살수로서의 능력도 살문 살수들에 비하면 형편없게 느껴진다.

살수 문파를 이끌었던 비망신사.

그는 상실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종리추는 그에게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는다.

있고 싶으면 있고, 가고 싶으면 가라는 식이다.

비망신사는 달을 쳐다봤다.

밝고 하얀 달… 징그럽게 따라다니는 궁색한 얼굴들…

‘나는 살수야, 살수. 사람을 죽이는 살수.’

살인도 중독이 된다.

사람을 죽이다 보면 사람 죽이는 쾌감에 전신이 바르르 떨려온다. 칼로 찔러 죽이는 것, 독살하는 것, 함정에 빠뜨려 죽이는 것… 어떤 죽음이든 쾌감이 뒤따른다.

살수로 명성을 날린 자치고 쉽게 살수 짓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비망신사는 다리를 오므려 무릎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할 수 없어. 살수가 되는 수밖에… 나 혼자라도 해야 돼.’

지겨운 운명이라는 생각에 치를 떨었다.

미지

인간의 생존력은 무서울 정도로 강하다.

아무리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어도 살아날 방도를 강구한다.

또한 너무나 약하게 무너질 때도 있다.

동물들도 이겨내는 환경을 이겨내지 못해 죽는 경우는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나약함의 표본이다.

인간의 육신도 적응할 수 있는 부분과 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맞으면 맞을수록 단단해지는 곳이 있고, 맞을수록 약해지는 부위가 있다.

구진법은 강해질 수 있는 부분을 최고로 강하게 만들어준다.

뼈와 근육을 강하게 만들고, 장기를 강하게 만든다. 심장을 튼튼하게 만들고, 간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정신적인 면도 유효하다.

의지력은 말할 것도 없고 죽음에 대한 공포마저도 잊게 만든다.

육신이 버틸 수 있는 최고의 충격을 가해서 최고의 경험을 하게 한다.

구진법은 사마의 무공이 아니다.

수련법이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최고의 충격을 버틸 만한 안전지대를 만들어 놓고 시작한다.

심결이다.

심결만 정확히 깨달으면 육신에 와 닿는 충격을 흡수하여 진일보한 육체를 지닐 수 있게 된다. 심결만 제 것으로 만들면 구진법은 상승무공을 익힌 것과 다름없는 육신을 준다.

독이라고 다 나쁜 것은 아니다.

인간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것이 독이다.

약간의 독을 투여하여 생명을 되살릴 수 있다면 복용하지 않을 환자가 없을 게다.

미량의 독이 되느냐, 다량의 독이 되느냐는 심결에 달려 있다.

심결을 깨달으면… 심결만 깨달으면…

일곱 명.

안색조차 죽어버린 일곱 명의 사내가 마지막 심결을 들었다.

“봉황상간천인혜. 마지막 심결이다.”

흑봉광괴는 간단히 심결만 말하고 등을 돌려 버렸다.

차마 일곱 명의 사내가 마지막 구관문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지 못하겠다는 듯.

서른한 명 중 스물네 명이 죽었다.

처절하게 몸부림치다가 죽었다.

그들은 죽는 순간까지 심결의 뜻을 파악하지 못했다.

흑봉광괴도, 심결의 의미를 깨달은 사람도… 심결이 의미하는 바를 말해 주기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육체에 가해지는 고문을 이겨내야 한다.

모든 상황은 찰나간에 끝나 버린다.

엄청난 극통이 몰려오는 순간 진기를 운용할 수 있으면 사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진다.

자신이 익힌 진기는 필요 없다.

새로운 통증 앞에 자신의 진기는 무력하기만 하다.

새로운 진기, 극통 속에서 깨달아 가는 진기를 깨우쳐야 한다. 깨우치는 즉시 운용해야 한다.

운용한 즉시 심결이 원하는 대로 휘돌려야 한다.

세 가지 중 어느 하나라도 찰나의 틈을 놓치게 되면 끝이다.

고통에 휘말리면 심결이고 뭐고 까마득히 잊어버린다.

지금까지 죽은 무인들이 그랬다.

삼진법에 들어서면서부터 흑봉광괴는 지켜보는 것 외에 달리 할 일이 없게 되었다.

일진법에서 한 명, 이진법에서 한 명.

두 명의 심장에 비수를 틀어박았다.

그들은 아주 강한 고수였지만 천외천이 바라는 천객에는 미흡했다. 그들은 모자도에 들어서지 말았어야 한다.

삼진법… 대여섯 명이 들어야 할 만큼 큰 대망에게 둘둘 휘어 감기는 순간부터 흑봉광괴는 할 일이 없어졌다.

‘으드득…!’

소리가 들린 후면 대망은 축 늘어진 시신을 먹어치웠다.

삼진법에서 무려 열한 명이나 죽었다.

어떤 자는 자신이 익힌 진기로 대항해 봤지만 도검으로도 상하지 않는 대망의 옥죄는 힘은 상상을 불허했다.

죽음의 수련이다.

그 와중에 살아난 자들은 철갑공과 흡사한 공부를 익힘으로써 어떤 내강기에도 손상되지 않은 오장육부를 지니게 되었다. 그들은 진기로 철벽을 둘렀다.

대망은 그들을 죽이지 못했고, 먹지도 못했다.

이제 마지막… 봉황상간천인혜.

봉황이 천 리를 훨훨 난다.

자유를 뜻하는 말이다. 세상을 오시하는 말이다.

이게 구진법의 끝이다.

하지만 팔진법을 통과해 살아남은 일곱 명에게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줄 유일한 말이다.

“준비들 하시게.”

천기신군이 음울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가 아홉 가지의 영물을 준비할 때까지만 해도 이토록 처절한 장면이 전개될 줄은 생각지 못했다.

서른한 명의 기재가 모두 웃으며 통과할 줄 알았다. 아니, 아홉 가지의 영물을 이용하는 수련인 줄 알았지, 마물 앞에 나신이 되어 던져질 줄은 정말 몰랐다.

개방은 어쩌자고 이런 수련을 생각해 냈단 말인가.

저주의 수련으로 낙인찍힐 만하다. 금단의 공부로 접근이 불허될 만하다.

소림사룡 가운데 백천의와 정운이 살아남았다. 소림사에서도 인정받은 상태수는 칠진법에서 죽었다.

이 얼마나 큰 손실인가.

상태수는 그대로 뒀어도 제 몫을 충분히 해낼 기재다.

소림 속가 제자 중에 가장 뛰어난 네 명 중 일인이 아닌가.

천기신군은 살아남은 일곱 명의 능력에 회의를 품었다. 과연 이 수련법이 스물네 명의 아까운 목숨을 버릴 만큼 가치 있는 것일까.

무당삼반 중 한 명인 하양 진인도 살아남았다. 청성파의 청운 진인도 살아남았고, 죽은 삼절기인의 아들인 삼절수사 정군유도 건재하다.

양가창법의 전승자인 양청도, 뛰어난 외모에 화려한 화술을 지닌 검곡의 소곡주인 우경삼도 버티고 있다.

뜻밖의 인물은 칠성검문의 소문주다. 칠성검문은 그렇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문파이고, 진조고도 뚜렷한 명성이 없는 평범한 사내다.

구진법에서 제일 먼저 탈락할 사람 중 한 명으로 생각되기도 했는데… 그가 끝까지 살아남았다.

이들 일곱 명은 흑봉광괴가 말한 봉황상간천인혜를 생각하기에 여념 없었다.

어떤 마물이 나타날 것인가.

주둥이가 철갑처럼 단단한 새에게도 쪼여 봤고, 닿기만 하면 가시를 쏘아내 몸을 마비시키는 마령초를 붙잡고 한 시진도 버텨 봤다.

이제 또 뭐가 나오기에 그토록 거창한 심결이 등장한 것일까.

천기신군은 작은 목갑 일곱 개를 일곱 명 앞에 놓았다.

여인이 자살할 때 사용하는 목갑이다.

사방이 막혔는데 손가락 하나 집어넣을 구멍이 뚫려 있다.

“알고나….”

“그만!”

천기신군이 안에 들은 것을 말하려고 했지만 흑봉광괴가 막았다.

“휴우!”

천기신군은 한숨을 불어내며 물러섰다.

일곱 명의 얼굴은 표정의 변화가 없다.

그들은 팔진법을 거치는 동안 인성이 마비된 듯하다. 오직 생존 본능만 살아 있어 무의식적으로 행동하는 것 같다.

백천의가 제일 먼저 목갑 구멍 사이로 검지를 밀어 넣었다. 서슴없이. 죽일 테면 죽여보라는 듯이.

다른 여섯 명도 거의 동시에 손가락을 넣었다.

그들에게 망설임은 전혀 없다.

팔진법부터 그랬다.

칠진법을 마치고 살아남은 일곱 명은 죽은 자에 대해 애달파하지도 않았다. 자신들이 살아남았다는 것에 대해 감사해하지도 않았다.

팔진법은 철구조다.

철구조는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서역과 교류하는 장사치를 통해 간신히 네 마리를 입수했다.

부리가 사람 머리통보다 더 큰 새다. 부리 하나가 몸통 전체와 비슷한 크기다.

철구조는 전신을 쪼아댔다.

살이 패이고 피가 솟구쳤다.

“저것이 무슨 수련인가?!”

천기신군은 말리고 싶었다. 이것은 고문이지 수련이 아니다. 혹독한 아픔을 견뎌내는 것에 불과하다.

그는 기관진학의 달인이지만 무공은 별로 높지 못하다. 하지만 진기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다.

세상에 이런 수련법은 없다.

일곱 명은 고통스러운 표정도 떠올리지 않았다. 무감각하게… 쪼아대는 철구조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들이 눈을 감았을 때… 그렇다, 그들은 눈을 감았다. 철구조가 쪼아대는 것을 무심히 지켜보다가 눈을 감았다.

그러면 철구조가 물러섰다.

쪼아대지 않고 천적을 만난 것처럼 화들짝 놀라 물러섰다.

희한하다는 생각을 가졌고, 구진법의 놀라운 효능을 목격했지만… 마지막 구진법… 이것만은 말리고 싶다.

일곱 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철구조의 혹독한 고통 속에서도 무심했던 일곱 명의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입술을 악문다.

너무 세게 문 탓인지 입술을 비집고 피가 흘러나왔다.

코에서도 피를 흘려낸다. 새까맣게 죽은 피다. 찢어질 듯 부릅뜬 눈은 벌겋게 물들었다.

‘아! 이제 끝이야….’

천기신군은 고개를 돌려 버렸다.

심장이 멈추는 듯한 고통은 일진법에서 맛보았다. 이진법에서는 전신이 마비되는 고통을 벗어나야 했고, 삼진법에서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고통을 겪었다.

누구에게 어떤 고문을 당해도 웃으며 견뎌낼 자신이 있다.

자신들보다 더한 고통을 당해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라고 자부한다.

하지만 이번 고통은 너무 크다.

심장이 멈추고, 오장육부가 뒤집히고, 기혈이 뒤집힌다. 머리는 터질 것 같고 피란 피는 모두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기분이다.

이런!

추태를 보이고 말았다.

평생 이런 일이 없었는데 오줌을 싸고 말았다. 오줌뿐만이 아니다. 항문을 조이는 힘도 풀어져 대변까지 실실 흘러나온다.

몸이 엉망이다.

무엇엔가 따끔하게 물리는 순간 전신이 불 속에 들어간 듯 활활 타오르면서 일시에 몰린 현상들이다.

‘차라리 죽고 싶어….’

백천의는 고통을 견뎌낼 힘이 없었다.

‘이제 그만… 죽여줘.’

진기도 무공도… 모든 게 상관없었다.

자신이 무엇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지, 동생이 누구에게 죽었는지, 동생의 정혼녀는 어떻게 죽었는지… 모두 망각했다. 기억 속에 머물지 않았다.

머릿속이 텅 비었다.

아니다. 머릿속이 가득 찼다. 죽고 싶다는 생각으로.

두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는 무너지고 있는 육신을 자각했다.

쿵!

소리를 내며 쓰러진 육신은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켰다.

그런데… 모진 것이 목숨인 모양이다. 단전에서 미미한 진기가 흘러나왔다. 처음은 미미하나 나중은 대해.

사진법의 심결이었다.

미미하게 흘러나온 진기가 전신을 휘돌았다. 천천히… 천천히….

일주천이 끝난 다음에는 속도가 빨라졌다. 샘물이 강이 되고 바다로 들어간다.

오진법의 심결이다.

일진법에서 터득한 심근의 수축력도 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육신이 살아나고 있어.’

자연치유력이다. 그는 죽고 싶었지만 육신이 죽음을 거부했다.

그의 육신은 정신을 비웃고 있다. 겨우 그 정도밖에 안 되냐고. 나는 이렇게 살아나는데 너는 죽을 생각이나 하고 있었냐고.

백천의는 자연히 흐르는 진기에 의념을 보탰다.

진기는 스스로 살아서 제 갈 길을 흐른다.

강은 낮은 곳으로 흐르고, 바람은 빈 곳으로 분다.

육진법의 심결.

백천의는 몸과 마음이 자유로움을 느꼈다.

굉장히 상쾌하다. 굉장히 자유롭다. 하늘을 훨훨 날아 구만 리 창천을 날아가는 기분이다.

‘봉황상간천인혜….’

인간에는 누구에게나 진기가 있다. 보통은 의식을 못하고 살지만 무인의 길로 들어서 내공을 수련하면 눈으로 보듯 보게 된다. 무인은 더욱 강한 진기를 이끌기 위해 부단히 수련한다.

봉황상간천인혜는 그런 인간을 비웃는다.

끊임없이, 쉼 없이 흐르고 흘러야 진정한 진기가 된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

본인이 의식하지 않아도, 운공을 취하지 않아도 운공을 하는 것처럼 육신을 흐르는 진기.

구진법은 초인을 만든다.

백천의는 몸을 일으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몸에 스며든 독기를 서서히 밀어냈다. 더 이상 고통받을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청살오공. 괜찮은 놈을 구했군요.”

백천의는 담담하게 말했다.

‘변했다! 예전의 백천의가 아니다. 무섭게 침착해.’

변한 사람은 백천의뿐만이 아니라 모두 변했다. 정운, 하양 진인, 청운 진인… 모두가 담담하고 무심하다. 세상을 오시하는 눈빛도 아니고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흑봉광괴는 대화를 나눌수록 위축되는 자신을 느꼈다.

‘괘… 괜찮은 놈 정도가 아니… 라네. 독 중지 왕이라는 청살오공 아… 닌가.’

천기신군도 말을 더듬었다.

그들은 괴물을 만들어냈다.

칠인이 뿜어내는 기도는 철벽 같다.

누구도 뚫을 수 없고 부딪치면 죽을 것 같은 느낌이 들게 만든다.

‘무공을 시험해 봐야 하는데….’

구진법을 주관한 흑봉광괴도 무공을 시험해 보자는 말을 못 했다. 목에 걸려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왠지 그런 말을 하면 칠인을 욕되게 하는 기분이 들었다.

백천의가 말했다.

‘일곱 명이군. 서른한 명에서 시작했는데.’

‘대… 단한 내력이다. 말 한마디에 심신이 진탕되다니….’

백천의의 말은 울림이 되어 흑봉광괴의 가슴속에 파고들었다.

“그래도 많이 남았어. 천주, 죽은 자들은 어떻게 할 겁니까?”

천외천주 흑봉광괴는 마치 자신이 수하가 된 듯했다.

“천외천 사람인 줄 아는 가문에는 사실대로 말하고 구파일방에는 통보하지 않을 생각이네. 실종이 되겠지.”

“조금 움직이셔야지요.”

“…?”

“죽은 자들의 영혼을 달래줘야 합니다. 사마에게 당한 것으로 처리하면 좋겠군요. 살문이 되었든, 혈영신마가 되었든… 누군가에게 당한 것으로 처리하면 죽은 사람들도 편히 잠들 겁니다.”

“알… 겠네.”

확실히 이들은 변했다.

육체만 강해진 것이 아니라 정신까지 자유로움을 찾았다.

“나갈까요?”

“…?”

백천의는 벌써 일어섰다.

“구진법을 통과한 사람의 무공이 어떤지 보고 싶으실 겁니다.”

검곡 소곡주 우경삼이 검을 뽑았다.

속도도 없고 발검술도 무심한 발검이다.

그는 그냥 검을 뽑았다.

검을 뽑은 후에도 발경의 기본이 되는 기수식을 취하지 않았다. 경락을 최대한으로 열어주기 위해 초식이란 것이 존재한다. 단순히 무공을 전개하는 수법이 아니라 몸속에 흐르는 진기를 최고의 강도까지 이끌어주는 역할을 한다.

우경삼은 초식도 전개하지 않았다.

그는 그냥 걸어갔고 아름드리 나무에 일검을 쳐냈다.

“엇! 저, 저…!”

흑봉광괴는 손을 들어 나무를 가리켰다.

너무 놀라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온 행동이다.

우경삼은 가볍게 일검을 전개한 듯한데…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검공이 전개되었다. 발경을 하지 않을 것 같은데 발경이 들어간 것보다 훨씬 빨랐다.

나무를 베어낸 동작도 매끄럽기 이를 데 없다.

우르르릉…!

뒤늦게 나무가 쓰러졌다.

우경삼은 위에서 아래로 비스듬히 사각을 이루며 내려쳤다.

얼마나 매끄럽던지… 나무는 도끼로 찍혀 넘어가듯 넘어간 것이 아니라 미끄럼을 타듯 서 있는 모습 그대로 땅에 떨어졌다. 그리고 넘어갔다.

“빠, 빠르다…!”

천기신군이 뒤늦게야 감탄을 토해냈다.

나무를 대상으로 검공을 수련하는 경우는 많지만 이런 광경은 처음으로 본다.

정말 장관이다.

이런 검공을 누가 상대할 수 있을까.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을 겁니다. 이제는 비객을 만나야겠습니다. 자리를 주선해 주십시오.”

백천의가 감정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모진아와 유구는 반가운 땅, 남만으로 들어섰다.

풀도 나무도 작열하는 태양도 모두 반가웠다.

중원에 비하면 너무 뜨거운 태양이지만, 오랜만에 사람 사는 곳으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장터의 시끌벅적함도 없다.

간사하게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 모습도 볼 필요가 없고, 기름기에 가득 찬 음식 냄새를 맡을 필요도 없다.

중원은 그들과 어울리지 않는 세계였다.

“조심해라.”

모진아가 주의를 주었다.

그들은 암연족을 떠났다.

종리추의 노예가 되어 녹요평에 머무른 순간부터 암연족 입장에서는 부족을 버리고 떠난 사람이 된 것이다.

그래도 암연족은 침묵했다.

전 족장의 대우를 해줬다고나 할까?

모진아 일행은 녹요평마저 버리고 떠났다.

그 순간이 진짜 암연족을 등진 시점이다.

그들은 돌아오지 말았어야 한다. 암연족은 부족을 버린 사람을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척살하는 부족이다. 특히 싸우다 죽으면 아부타에게 불려간다는 정신적인 믿음까지 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부족이기에 어떤 부족과 싸워도 이길 수밖에 없다.

한때는 가장 믿을 만했던 믿음이 이제는 부담이 된다.

암연족과 마주치는 날에는 사생결단을 내야만 하고, 그때는 자신들이 부족을 자신들의 손으로 죽이는 결과가 야기될 것이다.

어쩌면 암연족 전부를 몰살시켜야 끝날 싸움이 되리라.

“최대한 조심하겠습니다.”

유구도 암연족의 성격을 알고 있기에 안색이 어두웠다.

녹요평은 언제 봐도 싱그럽고 탐스럽다.

우기가 닥쳐오려는지 하늘이 어두컴컴해서 녹요평의 참모습을 뚜렷하게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쉽지만… 하긴 이런 날씨에 보는 녹요평도 괜찮다.

“홍리족 쪽으로 가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음, 그게 낫겠지.”

두 사람은 허리를 낮게 구부리고 사방을 살폈다.

이동할 때는 비호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움직였다가는 멈춰서 살펴보고, 다시 움직이고….

급하게 서두르지는 않았다. 오가는 길이 멀어서 그렇지 녹요평에서 지내는 날은 하루 이틀 정도밖에 되지 않으리라.

종리추가 머물던 초막은 모두 부서져 잔재만 남았다.

잔재조차도 강풍에 휩쓸리고 폭우에 쓸려 나가 초막이 있었던 곳인지조차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그들이 머물렀던 흔적은 사라졌다.

“어! 저, 저건…!”

유구가 깜짝 놀라 손가락질을 했다.

모진아는 손가락 끝을 따라갔다.

“음…!”

모진아도 신음을 토해냈다.

홍리족 용사들이 용맹을 자랑하던 녹요평 너머, 홍리족 부락.

그곳에서 모진아와 유구는 낯익은 얼굴을 찾아냈다.

이름을 지으려고 할 때 잠자리가 날아들었다고 해서 청령이란 이름을 가진 암연족 전사다.

그는 모진아의 제자였으며 모진아의 뜻을 거부하고 암연족에 남은 사람이기도 하다.

사태는 불 보듯 뻔했다.

홍리족은 무너졌다.

종리추 일행이 중원으로 들어간 후 텅 빈 녹요평은 암연족 차지가 되었을 게다. 물론 홍리족 용사들과 한바탕 전쟁이 있었을 게고, 사내란 사내는 모두 죽였을 게다.

일처다부제였던 홍리족 여인들은 암연족의 풍습에 쉽게 젖어들지 못했다. 그녀들에게는 정반대의 풍습이 이해되지 않았다.

다른 부족민은 암연족과 잘만 동화되는데, 홍리족 여인들만은 유독 죽는 사람이 많다.

언제 홍리족이 무너졌는지는 몰라도 홍리족 여인들 중 절반 가까이는 죽었을 게다. 그것도 나이 많은 여자는 정복 초기에 죽였을 테니 전체로 따지면 채 삼 할도 남아 있지 못하리라.

“돌아가면….”

“알았어요, 그만한 눈치도 없을까 봐요.”

“…”

모진아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늙어서 난 바람이 더 무섭다고, 그는 구맥에게 쏠리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구맥만 보면 어쩔 줄 몰랐다.

구맥은 많은 사내를 거느려 봤으니 사내의 눈빛만 보고도 무엇을 원하는지 안다.

모진아와 구맥은 다른 사람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연분을 맺었다. 사위인 종리추가 있고, 딸인 어린이가 있고, 적지인살과 배금향이 있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좋으면 먼저 살을 섞어본 후 살 것인지 아닌지 결정한다.

둘 사이의 감정에 다른 사람들이 왜 가입하려 하는지 알 수 없다. 중원 풍습을 어느 정도 익혔지만 그 부분만은 아직까지도 납득이 되지 않는다.

모진아와 구맥은 정식 부부는 아니지만 서로가 필요할 때 부부 관계를 맺고 있다.

홍리족이 무너졌다는 소리를 들으면 구맥이 얼마나 속상해할까.

모진아는 그것부터 걱정되었다.

“음…! 빨리 찾아서 떠나자.”

“그러죠.”

두 사람은 남만에 들어오면서 일말의 기대를 가졌다.

오랜만에 정든 고향을 밟아본다는 설렘과 혹여 반가운 사람을 만나 밤새도록 술에 취해본다는 기대로 마음이 들떴다.

하지만 모든 것이 옛날과 다르다.

암연족은 창검을 들이댈 것이고, 홍리족은 무너졌다.

풍경은 옛날과 다름이 없으나 사람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모진아와 유구는 여기서도 반갑지 않은 이방인이다.

종리추가 말한 곳은 쉽지 않았다.

녹요평의 풀숲은 하루가 다르게 변한다.

우기에는 한 길이 넘게 자라고, 건기에는 바짝 말라 맨바닥을 드러낸다.

종리추가 신법을 수련하기 위해 달렸던 곳을 떠올려 봐도 쉽게 찾을 수 없다.

“이거 녹요평을 전부 뒤져야 하는 것 아냐?”

“그럴지도 모르겠는데요.”

모진아는 품에서 지도를 꺼내 살폈다.

종리추가 혹시 도움이 될까 해서 그려준 것이지만 종리추조차도 크게 도움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녹요평을 잘 아는 까닭이다.

“이놈들이 정말 있네.”

“허! 여기서 평생을 살았어도 몰랐는데 주공은 정말 대단해.”

“들개도 뜯어 먹는 뱀이라잖아. 꿀꺽 삼키는 뱀이 아니고 뜯어 먹는 뱀. 그만큼 강하니까 주공이 우릴 여기까지 보냈겠지. 그렇지 않으면 이런 심부름을 시킬 분인가?”

“그것참….”

유구는 등에 멘 봇짐을 풀어냈다.

연녹색 뱀과 친구처럼 어울렸던 종리추.

그는 남만의 연녹색 뱀이 필요하다. 이 뱀은 천하에 다시없는 살인 병기다.

유구는 끝이 갈라진 나뭇가지로 연녹색 뱀의 머리를 눌렀다. 그리고 살살 끄집어내 가죽 부대에 집어넣었다.

같은 행동이 반복되었다.

한 부대에 같이 집어넣지는 않았다.

“같이 넣었을 경우 중원에 들어올 때쯤이면 한 마리도 살아 있지 않을 거야. 그놈들은 서로를 잡아먹거든. 잡게 되면 각기 한 마리씩 다른 부대에 집어넣어.”

밤이 되면 천폭에 가서 잠을 자고, 낮이 되면 몸을 숨겨가며 녹요평을 뒤졌다.

개미핥기도 잡아먹는다는 육식 개미가 있는 곳을 발견한 것은 녹요평에 머문 지 나흘이 지나갈 무렵이었다.

그동안 두 사람은 정말 바빴다.

뱀은 잡은 것까지는 좋은데 먹이를 잡아줘야 하는 일이 큰 일거리다. 그것도 큰 놈을 하나 잡아 던져 주면 좋을 텐데, 가죽 부대를 하나씩 열어 일일이 줘야 했으니.

그것뿐인가. 계속 녹요평을 뒤져야 하지 않는가.

그러다가 육식 개미를 보았으니 징그럽다는 생각보다는 반가움이 앞섰다.

“이놈들이 정말 사람도 잡아먹냐?”

“그만 해라. 알았어? 그만 해, 좋게 말할 때.”

“궁금하니까 그렇죠.”

“그럼 네가 한가운데 들어가서 떡 버티고 서 있으면 되겠네.”

“귀여운 딸내미는 어떻게 하구요.”

“내가 키워줄게.”

“키워서 마누라 삼으려고!”

“흐흐흐….”

“으이구! 내가 참아야지.”

유구는 투덜거렸다.

암연족은 친구의 딸을 데려다 아내로 삼는 일이 흔하다. 중원에서도 그런 일은 빈번하게 벌어지는 것 같다.

유구는 종리추가 말한 대로 들개 고기 한 무더기를 개미가 다니는 길목에 던졌다.

개미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순식간에 증발시켜 버렸다.

유구와 모진아는 너무 놀라 농담을 주고받던 것조차 중지해 버린 채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이, 이놈들 정말 쓸모 있네.”

“빨리 해야겠는걸. 잘못하면 먹이만 주다 가겠어.”

모진아가 커다란 가죽 부대를 열었다.

안에서 향기로운 냄새가 풍겨 나왔다.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향기가 풍겨 나자 개미들이 맥을 추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빨리 해!”

“준비하잖아요!”

유구는 들개 몸통을 집어던졌다.

우르르 몰려든 개미 떼가 들개 몸속을 파고들었다. 아무리 못해도 수천 마리는 넘을 것 같은 개미 떼가.

유구는 손에 닿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막대기 두 개로 들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가죽 부대 속에 담았다.

또 하나 있다. 쥐다.

등에 흰 줄이 있다는 쥐는 천적인 뱀도 잡아먹는다고 한다.

모진아와 유구는 녹요평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평화롭게만 보아왔던 녹요평이 이토록 무서운 줄은 처음 알았다.

종리추가 말한 세 가지 기물을 모두 잡았을 때는 녹요평에 들어선 지 한 달이 지나가고 있었다.

우르릉…! 쾅…!

폭우가 쏟아졌다.

우기가 시작된 것이다.

남만의 우기는 온갖 생물에게 생명을 되돌려주지만 인간의 발목을 잡기도 한다.

우기 때는 함부로 돌아다닐 수 없다.

자칫하면 급류가 되어 흐르는 물살에 휩쓸려 죽을 수도 있다.

모진아와 유구는 녹요평을 등졌다.

두 사람은 정든 사람들을 만나볼 생각이 있었지만 한 명도 만나보지 못했다. 아내, 전사, 제자, 부족민들… 그들 모두 한가족이었으나 지금은 남남이 되었다.

두 사람은 이제야 그걸 확실히 알았다.

남만에 다시 와보고서야.

삼현옹은 놀라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놈은 알지. 백선서라는 놈인데 아주 흉포해.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공격하는 놈이야. 이놈을 팔부령에 풀 생각인가?”

“아닙니다. 이놈들을 기를 생각입니다. 번식은 시키되 퍼져 나가지 않게… 되겠습니까?”

대답을 한 사람은 삼현옹이 아니라 어린이었다.

“간단해. 석실에다 가두면 되지 뭐. 그러자면 석회가 있어야겠는데? 이놈들은 구멍을 잘 뚫잖아. 단단히 막아야지.”

“허! 허허허허!”

삼현옹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 역력히 드러났다.

“왜? 잘못 말했어?”

“계집이 쥐뿔만큼 배웠다고 아는 체는….”

“상공이 있는 자리야! 계집이란 말, 하지 말랬지!”

종리추가 고개를 내저었다.

두 사람은 누가 말려도 싸움을 멈추지 않는다.

그 내면에는 서로 아끼는 마음이 있으니 굳이 말릴 필요도 없다. 일가 피붙이 하나 없는 삼현옹은 어린을 친딸, 친손녀처럼 아끼고 중원에 나와 종리추만 보며 사는 어린도 정 붙일 곳을 찾았다.

“비망신사, 이걸 모래 구덩이에 갖다 풀어.”

“주공, 살문에 들어와서 첫 임무가 겨우 이겁니까?”

비망신사가 못마땅한 듯 투덜거렸다.

살수는 결국 살수 곁으로 돌아와야 한다.

살천문주가 그런 것처럼 비망신사도 살문에 들어오고 나서야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비망사 살수가 몰살당한 것은 가슴에 지울 수 없는 한이 되어 남았지만 종리추 곁에 있어야 복수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크게 작용했다.

비망신사의 나이는 서른일곱, 혈영신마와 동갑이다.

살문 살수들은 그의 무공이 가장 약하다는 것도 알고, 살수로서의 능력도 떨어진다는 것을 알지만 혈영신마에 이어 삼 형으로 대접했다.

그게 으레 정해진 살문의 법도다.

들어올 때는 약하나 살행에 나설 때는 강해지는 살문 살수.

자신들 역시 옛날에는 약하기 이를 데 없었다는 것을 알기에 기꺼이 삼 형 대우를 해주는 것이다.

비망신사는 요즘 종리추가 창안한 시마공과 폭혈공에 푹 빠져 침식조차 잊었다.

“하하하! 비객 놈들도 이건 모를 거야. 암, 이거면 완벽하게 숨을 수 있지. 하하하하!”

그는 큰 선물을 가져왔다.

중원 구대문파가 어떤 행동을 취하고 있는지 알게 된 것은 살문의 생사를 좌우할 수 있는 큰 성과였다.

종리추가 말했다.

“풀 때 조심해. 이놈은 날기도 하거든. 한 번 도약하면서 서 있는 사람 목젖도 물 수 있어.”

그 말을 듣고서는 비망신사도 께름칙하다는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무슨 놈의 뱀이 이런 게 다 있어.”

그가 투덜거리며 가죽 부대 수십 개를 들고 나갔다.

제팔로와 제구로 사이에 빈틈이 생겼다.

그곳은 지형적인 여건 때문인지 비적마의가 집을 지으려고 하지 않는다.

종리추는 넓은 구덩이를 파게 했다.

연녹색 뱀은 모래 구덩이에서 살지만 여건에 따라 땅에서도 살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개미 떼는 제십로와 십일로 사이에 풀어 놓았다.

사람도 잡아먹는 개미.

놈들은 일정한 구역을 가지고 활동할 게다.

지금처럼 억지로 잡아서 옮겨 놓지 않는 한 풀어 놓은 곳에서 십 장 안팎을 돌아다니며 먹이를 구할 게다.

세월이 조금 더 지나 충분한 번식이 이루어지면 또 분가를 시키고… 그렇게 일 년만 지나면 팔부령 대래봉은 누구도 뚫지 못하는 철옹성이 된다.

삼현옹과 어린, 구맥이 성심을 다해 만든 기관진식도 큰 몫을 하게 될 게다.

“이건 두 계집이 끼어들어 만들었으니 이요진이라고 하지.

장담하건대 천우진보다 강했으면 강했지 약하지는 않아. 하하! 현운자라 해도 이요진은 깨지 못할걸.”

삼현옹은 장담했다.

종리추는 대래봉 정상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산 아래를 바라봤다.

마음이 답답하거나 울적할 때마다 넓게 펼쳐진 산야를 바라보는 것이 습관처럼 되었다.

왠지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하다.

비적마의에 연녹색 뱀, 백선서, 그리고 사람도 잡아먹는 개미가 사방을 에워싸고 있다. 그 바깥쪽 안쪽에는 기관진식이 펼쳐져 있고, 가장 최종적으로는 살문 살수들이 버티고 있다.

그래도 답답하다.

무엇인가 빠진 것 같다.

“비객은 괜찮다. 그들은 오곡동에 들어서지 못해. 살수의 은신술을 배웠다고 뚫을 수 있는 곳이 아냐. 문제는 천외천이야.”

그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은 천외천의 존재다.

그것도 유희의 죽음이 없었다면, 모진아가 재빠르게 반응하지 않았다면 알아내지 못했을 집단이다.

무림에서 강한 자란 강한 자, 악을 원수처럼 미워하는 자는 모두 모였다고 해도 좋을 천외천. 구파일방에서조차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 천외천.

그들의 존재는 종리추마저도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런 일은 처음이다. 상대에게 불안감을 느끼는 것은… ‘태풍이 불어올 거야. 죽음의 태풍이….’

어두컴컴하던 하늘이 기어이 울음을 쏟아냈다. 우르릉…! 콰앙…!

뇌성벽력이 어두컴컴한 시위를 가르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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