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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132화


비망사가 중원 살수들 중 가장 강하다고 평가된다면, 가장 찾기 힘들다고 알려진 살수는 남경의 귀혈총이다.

귀혈총은 팔부령 싸움에 서른두 명을 파견했고, 몰살당했다.

특정한 성을 차지하지 않고 남경 오직 한곳에서만 활동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귀혈총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귀혈총은 다른 살수문파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소수로 운용된다.

그렇기에 쉽게 숨어서 활동할 수밖에 없고, 숨는 방법은 더욱 발전했다. 오죽하면 같은 살수들조차 귀혈총 살수들을 만나지 못한다.

살수에게 살수를 죽여달라는 청부가 들어오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에는 상황에 따라 받아들이기도 하고 거절하기도 하지만 귀혈총 살수를 죽여달라는 청부는 일절 거절된다.

남경 어디에 터전을 두고 있는지, 인원은 얼마나 되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알려진 것은 고관대작과 선이 닿아 있다는 정도다.

실제로 벼슬을 하고 있는 사람들 중 의문의 죽음을 당한 사람들이 종종 나타나기도 하니 알려진 사실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귀혈총은 부귀와 명예가 있는 곳에 스며 있는 죽음의 손이다.

강신도는 효자로 소문났다.

남의 논을 빌어먹어 근근이 입에 풀칠만 하는 농사꾼이지만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지체가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하다못해 거지까지도 강신도를 보면 눈인사를 건넨다.

도와줄 게 있으면 하나라도 더 도와주고 싶다.

강신도는 남의 논에서 농사짓고 있지만 제 논이라도 되는 듯 열심히 일했다.

덕분에 추수철이 되면 그의 논에서 수확한 쌀이 다른 논보다 훨씬 기름졌고, 수확량도 많았다.

살림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집에 입이 너무 많다.

칠순에 이른 부모와 구순을 넘어선 조부모, 그리고 백수를 훌쩍 넘은 증조부모, 그가 봉양하고 받드는 어른만 여섯 분이다. 증조부모 같은 경우에는 십여 년 전부터 정신을 놓아 버려 대소변까지 모두 받아내는 처지다.

그는 오십이 넘도록 혼인을 하지 못했다.

어른이 무더기로 있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 선뜻 발을 들여놓을 아낙은 없다.

효심이 지극한 것은 지극한 것이고 삶은 현실이다.

강신도가 움직이는 범위는 아주 좁게 한정되어 있다. 일 년에 몇 번, 탈곡을 한다든지 하는 특정한 날을 빼놓고는 거의 고정되어 있다. 낮에는 논에 나가면 볼 수 있고, 밤에는 집으로 찾아가면 백이면 백 만날 수 있다. 논과 집을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오고 간다.

“저 사람 저거 또 나왔군 그래.”

“글쎄 말이야. 잡초 놈들도 그래. 좀 오래 살려면 자네 논에나 가서 자라지 왜 저 사람 밭에 뿌리를 내린 거야.”

“예끼! 이 사람! 그러는 자네는 어떻고?”

논을 얼마나 깔끔히 관리하는지 논 주인들도 강신도가 소작을 달라고 하면 흔쾌히 내준다. 어떤 사람은 소작비를 적게 받을 테니 논을 일궈달라고 청까지 넣어온다.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는 강신도를 보면서 개울로 내려갔다. 더운 여름이니 개라도 한 마리 잡아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사람아! 개 잡아 놓을 테니까 이따 두어 시진쯤 지나서 내려와!”

강신도가 손을 흔들었다.

뚜벅, 뚜벅, 뚜벅…!

풀을 뽑아내던 강신도의 손끝이 미미하게 떨렸다.

논둑길을 걸어오는 자는 분명 사람인데 단단한 바위가 굴러오는 것 같다. 천천히 발걸음을 내딛는데 우르릉 거친 소리를 터뜨리며 굴러떨어지는 바윗덩이 같다.

강한 자를 무수히 많이 만나 보았지만 이처럼 강해 보이는 자는 처음이다.

벼는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

사람도 영글면 고개를 숙인다. 마음이 온후해진다. 세상 이치를 꿰뚫어 보니 급할 게 없다. 누가 사소한 실수를 저질러도 웃어넘기는 여유도 세상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내는 그만큼 강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는 것, 아주 잘 익은 벼이지만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있다는 것이다.

사내가 작은 논둑길을 굽이굽이 돌아 강신도에게 왔다.

“강신도?”

“그렇소만…?”

“귀혈총 제삼살수?”

“하하! 사람 잘못 본 것 같소이다. 난 그저 땅이나 일구는…”

“이보시오!”

“논이 잘 가꿔져 있군. 물도 적당히 대어져 있고. 좋지, 피를 먹고 자란 벼는 맛도 좋을 거야.”

“…”

강신도는 더 이상 변명하지 않았다.

사내는 모든 걸 알고 왔으며, 죽이러 왔다.

정말 기막히다.

귀혈총에는 예순두 명의 살수가 있지만 기실 그들은 살행에 나서지 않는다. 무림에 보여주는 형식적인 살수들이다. 귀혈총의 총단이 발각되었을 경우 그들이 속일 수 있는 사람은 껍데기인 예순두 명의 살수다.

살행에 나서는 사람은 단 다섯 명뿐이다.

귀혈총은 다른 살수문파들처럼 많은 살행을 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살행에 나선다. 종류도 달라서 원한보다는 정적을 제거할 경우가 많다.

청부금도 엄청나다.

청부 한 번으로 여타의 살수문파들이 일 년 동안 벌어들인 은자와 맞먹는 돈을 벌어들인다.

귀혈총은 고급 살수가 필요하지 많은 살수가 필요하지는 않다.

팔부령에서 많은 살수가 죽어 큰 손실을 입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기실 귀혈총은 약간의 손실밖에 입지 않았다. 죽은 자들과 같은 자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으니까.

숨어 지내는 다섯 살수가 귀혈총의 전부다.

강신도는 귀혈총에서 살행에 나서는 다섯 살수 중 한 명이다.

그의 소재를 알고 있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 귀혈총 대살수뿐인데…

“어떻게 찾았소?”

강신도는 손에 닿은 풀을 뽑아냈다.

“대살수인가 하는 작자가 말해 주더군. 그자가 말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거야. 힘줄 몇 가닥 뽑아냈더니 술술 불더군.”

강신도의 검미가 꿈틀거렸다.

살아 있는 사람의 힘줄을 뜯어내는 짓거리는 살수들도 하지 않는다. 얼마나 잔혹한가? 하긴, 사람을 고문하는데 인성을 갖추라고 말할 수도 없는 바에야.

“대살수는 죽었겠군.”

“글쎄? 머리를 십자로 갈랐고, 상반신과 하반신을 따로따로 떼어 놓았는데… 그래도 산다면 할 수 없지 인간의 목숨처럼 모진 것도 없으니까 알 수 없지, 살았을까?”

강신도는 집에 계신 노부모가 떠올랐다. 조부모도 증조부모도.

자신이 없으면 하루도 견디지 못할 분들이다.

살수가 될 때 오늘 같은 일이 있을 줄 예상했다. 남의 목숨을 끊어 놓는 자가 자신의 목숨인들 온전하기를 바라겠는가.

‘결국 모두 천수를 누리지 못하시는군. 불효자식을 둔 덕에.’

강신도는 부자다. 보통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재산을 가진 부자다. 한 번 살행을 할 때마다 배당된 청부금도 엄청나고, 일 년 동안 살행을 한 적이 없어도 귀혈총은 은자를 보내왔다.

그런데… 사람을 죽여 번 돈은 쓸 수도 없는 무용지물이다.

사람들은 자신을 너무 잘 알고 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무슨 큰일이라고 모르는 사람이 없다. 촌구석에도, 거리를 나가도 모두 아는 척을 한다.

그들은 자신의 수입까지도 잘 알고 있다.

소작을 짓는다는 것도, 수확량까지도…

일가붙이 하나 없다는 것도 소문이 날 대로 나 있다.

몇 대째 한 자리에서만 살아왔으니 당연하다.

살행을 해서 번 돈은 이곳에서는 쓸 수 없는 돈이 되었다.

남경을 벗어나 다른 지방으로 가면 떵떵거리며 살 수 있지만 귀혈총에 몸담고 있으니 그럴 수도 없다.

무공을 올바르게 썼다면 벌써 자리를 잡았을 텐데… 그놈의 한순간의 젊은 객기가… 일확천금을 꿈꾼 대가가 평생을 소작농으로 보내게 만들었다.

돈을 벌지만 쇠붙이보다도 못한 돈.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모두 돈의 혜택을 보지 못했다.

사내가 말했다.

“세상에 남겨둔 게 많은 모양이지? 망설이는 걸 보면 내가 알기로는 아무것도 없는데 말야.”

문득 불안감이 치솟았다. 가슴이 마구 뛰었다.

“그, 그게 무슨 소리냐!”

강신도는 고개를 빼 들고 집을 쳐다봤다.

워낙 연로하신 분들이라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래서 소작도 언제든지 달려갈 수 있도록 집 가까운 곳에 있는 논만 골랐다.

집은 언제나처럼 평온했다. 그러나 사내의 말을 들은 후여서인지 죽음과 같은 정적이 휘감겨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식을 잘못 낳은 죄는 천 번 죽어 마땅하지. 살수 자식 같은 놈은 낳지 말았어야 해.”

“뭐, 뭣이!”

“곱게 보내 드렸어. 아까 말한 대로. 모르겠네, 아직 살아 있을지.”

강신도는 참지 못했다.

이자를 제치고 빨리 가 봐야 한다.

“놈!”

강한 자인 것은 틀림없지만 자신도 만만치 않다. 고관대작들은 호위하는 무인들을 거느리고 있다. 거의 대부분 친척에까지 무인들을 배치시켜 놓는다.

그들을 뚫고 들어가 목적을 달성한 무공이다.

강신도의 신형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촤라라락…!

허리춤에서 솟구친 예광이 햇볕을 갈랐다.

강신도의 병기는 연검이다. 세상 아무도 모르던 강신도의 병기가 처음으로 맹위 아래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다. 그러나,

쐐액!

그보다 훨씬 빠른 검이 연검을 제치고 들어와 허리춤으로 파고들었다.

“크윽!”

강신도는 짧은 비명을 토해냈다.

불로 지지는 듯한 뜨거움이 옆구리를 파고들어 다른 쪽 옆구리로 빠져나갔다.

그는 자신의 허리가 베어졌다는 것을 자각했다.

그냥 베어진 정도가 아니라 뼈마디에 장기까지 깨끗하게 베어냈다. 허리가… 양단되었다.

너무 두려워서 고개를 내려 쳐다보지도 못했다.

아직 눈 높이가 맞으니 상체가 굴러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난 칠성검문 소문주 진조고야.”

“치, 칠성검문 따위가….”

“그래, 그런 말 할 자격이 있어. 너도 검문 출신이지? 대살수라는 작자 말로는 상곡 검문에서 무공을 닦았다고? 후후! 알아둬. 네놈 덕분에 상곡 검문도 피바다가 될 거야.”

믿지 못하겠다. 어찌 칠성검문 따위가 검공에 당할 수 있단 말인가. 칠성검문의 검공이 언제 이렇게 빨라졌는가. 칠성검문에 자질이 뛰어난 소문자가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지만…

“말은 끝났어. 날씨도 더우니 이만 가 봐야지. 잘 가.”

검이 한 바퀴 허공을 갈랐다.

강신도의 머리는 몸에서 분리되어 허공에 떠올랐다.

진조고의 검이 다시 바람을 일으켰고, 정확히 열십자로 갈라진 머리는 강신도가 그토록 애써 가꾸던 논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개울로 내려간 사람들이 강신도를 부르러 왔을 때는 이미 죽은 시신만이 반겼다. 너무도 끔찍하게 죽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그의 노부모에게 황급히 강신도의 죽음을 알리려 문을 밀치고 들어섰을 때, 강신도의 죽음과 똑같은 죽음이 널브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

“세상에!”

사람들은 할 말을 잊었다.

너무도 참혹한 죽음이었다.

“끝났지?”

“…”

“뿌리는?”

“완전히, 닭 한 마리까지 모두.”

“오물을 치우는 것도 재미라는 게 있군.”

“하하하!”

살기가 잔뜩 묻어나는 칠인은 여유 있게 웃었다.

세상에 그 무엇도 자신들을 막을 수 없다는 자신감이 물씬 풍겼다.

그들이 하룻밤에 죽인 숫자는 무려 오백여 명이 넘는다.

귀혈총 살수들은 몇 명 되지 않지만 그들과 연관 있는 사람들까지 모두 죽음을 면치 못했다.

“살수인 줄 알면서도 방조한 놈들은 살수들보다 더 나쁜 놈들이야. 악의 씨는 뿌리를 뽑아야 돼.”

그들의 손은 세상을 뒤덮었다. 죽음으로.

“다음은?”

“삼산. 오룡괴마라는 작자들이 있어.”

“모두 갈 필요 있냐?”

“강서로 넘어가는 길목이야. 강서에는 혈리파란 놈들이 있지. 중간에 냄새나는 놈들을 치우는 것도 괜찮아.”

남경을 벗어나며 주고받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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