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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13화


“샅샅이 뒤져라! 개미굴까지 샅샅이 뒤져!”

음성은 웅혼한 기백으로 넘쳐흘렀다.

‘천애유룡이군. 이렇게 빨리…?’

적지인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성에 실린 내력으로 미루어 상대는 만만치 않은 고수였다. 그리고 현재 개방에는 저 정도의 내력을 지닌 사람으로 분타주인 천애유룡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적지인살은 밖을 내다보고 싶었지만 무덤 안에서는 밖을 볼 도리가 없었다.

우루루…!

발자국 소리가 부산하게 들려왔다.

‘적어도 서른 명은 넘겠군. 역시 천애유룡인가?’

다행스러운 점은 천음산 묘지는 황성산 묘지처럼 파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눈썰미가 예리한 사람이라도 대리석이 옮겨졌다는 흔적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날이 밝아야 되리라.

‘여기서 끝났군. 날이 밝으면…’

적지인살은 허탈했다. 천애유룡은 땀을 뻘뻘 흘리며 달려온 제자를 보는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웬만한 일이라면 광호가 전서를 인계받아 왔을 터였다. 전서를 연계해 주는 제자가 말을 달려왔다는 것은 사태가 그만큼 긴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서!”

천애유룡은 제자를 보자마자 손부터 내밀었다.

-적지인살, 천음산으로 향했을 공산 구 할. 천음산에서 절대 벗어나지 말 것. 흑봉광괴 직명.

“아!”

현기증이 핑 돌았다. 흑봉광괴의 판단은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천음산으로 움직였을 공산이 구 할에 이른다면 틀림없이 천음산으로 갔다. 천애유룡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는 제자들.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실수했어. 망양만 생각했어. 장로님 판단이 천음산이라면… 천음산인 거야. 이런!’

다행히 말이 숨 가빠 죽을 만큼 빨리 달려온 관계로 천음산과는 한 시진 반 정도의 거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천음산으로 돌아간다. 최대한 빨리!”

천애유룡은 차마 입을 뗄 수 없었지만 명을 내렸다. 천애유룡은 어떻게 천음산까지 달려왔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머릿속에는 오직 빨리 가야 한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제자들이 헉헉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하얗게 질린 안색도 보이지 않았다.

“빨리! 빨리!”

천애유룡은 자신이 펼칠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신법을 전개했다. 그런 그를 뒤쫓자니 제자들의 고역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수하들은 한 명 두 명 처지기 시작했다. 일결제자들이 제일 먼저 뒤처졌고 곧 이어 이결제자도 처지기 시작했다. 천애유룡도 숨이 턱에까지 차 올랐지만 마지막 한 올의 진기까지 모두 짜내 달리고 또 달렸다. 천음산 묘역 입구가 보이기 시작하자 긴장이 탁 풀렸다. 천음산 공동묘지는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을씨년스러운 귀기로 가득했다.

“광호!”

사위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마땅히 달려나와야 할 광호는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다시 불안감이 엄습했다.

“광호! 광호!”

천애유룡의 낯빛은 하얗게 질렸다. 광호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다는 직감이 들자 몸이 부르르 떨렸다.

“헉헉!”

이결제자 중 신법이 제일 빠른 자가 뒤늦게 도착해 숨을 헐떡거렸다. 이마에서는 구슬 같은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광호를 찾아! 빨리!”

천애유룡의 머릿속은 하얗게 탈색되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도 깨닫지 못했다. 제자들이 속속 도착했고 광호를 찾아 천음산을 뒤지기 시작했다. 목과 동체가 분리된 광호의 시신은 곧 발견되었다. 피란 피는 모두 도랑물에 흘려보낸 광호의 동체에서는 피 한 방울 새어 나오지 않았다.

“이놈!”

천애유룡은 이를 갈았다.

“샅샅이 뒤져라! 개미굴까지 샅샅이 뒤져!”

심장이 터질 듯 가쁘고, 두 발이 천근처럼 무거워 서 있기도 힘들었던 개방도는 부산하게 움직였다. 그들 중 누구도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들 중 분노의 화염을 토해내지 않는 자가 없었다. 천애유룡과 개방도가 천음산을 샅샅이 뒤지고 있을 때, 흑봉광괴와 다섯 호법이 도착했다. 까치집을 튼 하얀 백발이 위로 곤두서는 듯했다. 개방도들이 보기에는 그랬다. 흑봉광괴의 싸늘히 굳어버린 안색과 부릅뜬 눈에서 쏟아져 나오는 광망이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 여실히 대변해 주었다. 개방도들은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쩌렁하고 고함이 터져 나왔다. 천음산이 부르르 떨리는 듯했다.

“제가 실수했습니다.”

천애유룡은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은 올바른 판단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결과는 그렇지 못했다. 개방이 형성하는 포위망은 사림이 없어야 한다. 생각이 없어야 한다. 일체의 생각을 버리고 하늘에서 터지는 폭죽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일결제자도 알고 있는 주위 사항이거늘… 잠시 망각했다.

“미련한 놈!”

흑봉광괴는 일장에 쳐 죽일 기세였다.

“잘린 부위의 살점이 불지 않았습니다. 물에 담가져 있었는데도 불지 않았다면…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놈은 여기 있습니다.”

눈이 큰 호법이 광호의 시신을 살펴본 다음 보고했다.

“네 일은 나중에 추궁하겠다. 우선 제자들을 이끌고 천음산을 포위해라. 개미 새끼 한 마리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정신 똑바로 차리고!”

천애유룡을 쳐다보는 눈길에 자애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옛! 가자!”

천애유룡이 제자들을 이끌고 산 밑으로 달려 내려갔다.

“전폭을 올려라. 노산, 동창, 구성, 호포, 망양에 있는 제자들은 풀포기까지 샅샅이 뒤지며 포위를 좁혀오라고 해.”

흑봉광괴에게서 온기가 사라졌다. 흑봉광괴는 일사천리로 명을 내렸다.

“수천! 자네는 묘역 관리인을 찾아서 최근에 매장한 묘를 알아와.”

“옛!”

뺨에 검상이 있는 호법이 산 밑으로 달려 내려갔다. 쩌렁쩌렁 노성을 질러대는 사람은 개방 장로가 틀림없었다. 적지인살은 한 사람을 떠올렸다.

‘흑봉광괴…’

공명을 탐하지 않으나 개방에 대한 애정은 누구보다도 두텁다. 악을 원수처럼 미워해 흑봉에 피가 마를 날이 없지만 긍휼한 사람에게는 부처와 같은 사람이다. 개방 최고수 다섯 사람 안에 꼽히는 절정고수다.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외통수에 걸렸으니 생각할 것도 움직일 것도 없었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아니다. 죽음이 두려웠으면 오채산을 벗어날 때 주목을 끌려고도 하지 않았고, 애초부터 살수가 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죽음은 늘 그의 곁에 머무는 친구와도 같았다. 적지인살은 월도를 만지작거렸다.

‘장로와 부딪치면 안 돼. 타구진이 펼쳐질 때까지 기다려서도 안 되고, 뚜껑이 열리고… 잠시 기다렸다가 뛰쳐나간다. 곧바로 뛰쳐나올 걸 생각하고 있을 테니, 한 박자 늦추는 거야. 최대한… 죽일 수 있는 대로 모두 죽이고 죽여야 해. 허! 이렇게 맥없이 당할 것을… 의형들은… 의형들도 성하지 못하겠지. 소림, 무당과 부딪친 형님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죽었을 거야. 공동과 부딪치면… 그것도 가망이 없군.’

아무리 생각을 고쳐 봐도 결과는 뻔했다. 그는 최후의 일식을 생각했다.

‘살수행을 작정하면서 영원히 써볼 날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 비웅회선. 필살초. 비웅회선을 써야겠군.’

결정이 끝났다. 살수란 무공만 높다고 되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가장 좋은 기회를 잡고, 무엇이 되었든 기회에 부응할 만한 살수를 전개할 수 있는 자가 더 뛰어난 살수가 된다. 죽이기 위해서는 무공뿐만 아니라 독도 써야 하고, 암기도 써야 한다. 어린아이, 노인, 아녀자 할 것 없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해야 한다.

무공이 높으면 도움은 되지만 능사는 아니다. 적지인살은 살수행보를 걸으면서 자신이 지닌 최절초, 비웅회선을 써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재빠르게 치고 빠져나왔다는 말도 되지만 이번에는 비웅회선을 쓸 생각이었다.

‘이것도 복이야.’

그렇게 생각했다. 살수행을 걷다가 불의의 일격을 받아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게 죽는 것과 자신이 지닌 최절초를 펼치다 죽는 것, 죽는 것이야 똑같지만 그래도 후자가 훨씬 마음 편할 것 같았다. 최후의 일격까지 생각하자 적지인살은 무료함을 느꼈다. 그는 눈을 들어 아직은 단단히 고정되어 있는 철판을 보았다. 그리고 사신도에 눈을 돌렸다가, 종리추를 보았다. 한순간,

‘저, 저…’

너무 어이가 없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종리추는 인피가 벗겨진 시신 앞에 앉아 있다. 두 손을 앞으로 쭉 내밀고, 소리가 새어 나오지 않도록 입을 오물거린다. 종금수를 익히고 있다. 절박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허! 이런 상황에 종금수를 연마하다니. 하기는… 어린아이니 곧 죽을 목숨이란 걸 알 리가 없지.’

적지인살은 싱겁게 눈을 돌려 철판을 다시 바라보았다. 순간, 그의 머릿속을 휘젓고 지나가는 광경이 있었다. 조금 전 끙끙거리며 대리석과 철판을 들어 올리던 종리추의 모습이었다.

‘괴력! 괴력이 어디서 나왔지? 대리석이야 어떻게 들었다 해도 철판은 족히 예순 근은 나갈 텐데?’

그건 분명 기적이었다. 적지인살은 벌떡 일어나 종리추에게 걸어갔다. 종리추가 얼른 손을 내리고 고개를 돌려 씩 웃었다.

‘도대체가 집중하는 법이 없군.’

적지인살은 손짓으로 등을 돌리고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눈치 빠른 종리추는 두 번 손짓하게 만들지 않았다.

‘차분히 살펴보자. 분명 무엇인가 있을 거야.’

적지인살은 명문혈에 손을 얹고 진기를 밀어 넣었다. 전에는 신체 골격을 만졌지만 이번에는 내부 기혈을 살펴볼 심산이었다. 진기는 혈행을 쫓아 전신 곳곳을 누볐다. 적지인살은 진기의 유무뿐만이 아니라 종리추의 몸 상태를 상세히 파악해 나갔다. 명문혈이 주관하는 신장의 건강 상태를 비롯하여 오장육부를 샅샅이 뒤졌다. 진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인간은 누구나 진기를 지니고 있다. 단지 그것을 알고 단련시켜 키우느냐, 아니면 알지 못하고 방치해 두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종리추의 진기는 단련된 진기였다. 끊김이 없고 부드러웠으며 줄기찼다. 적지인살은 좀 더 자세히 파악했다. 기의 바다라는 기해혈을 두들겨 보았으나 별다른 징후가 없었다. 내공을 수련하지 않은 아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단전에서 잠시 머물러 보았지만 단전도 평범했다. 혈행을 보면 내공을 익힌 것 같은데, 내공이 쌓여 있어야 할 곳은 평범했다. 기이한 현상이었다.

의문은 독맥을 지나면서 더욱 증폭되었다. 정수리 한가운데 있는 백회혈이 너무 부드러웠다.

‘독맥이 발달되었어. 확실히 내공 수련을 했어.’

적지인살은 생각을 굳혔다. 생각을 굳히는 순간에도 미심쩍은 점이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지만 백회혈의 상태로 보아서는 일종의 기공을 익혔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중원에는 수천 수만 가지의 무공이 존재하니, 어떻게 모두 알 수 있으랴.

독맥은 회음혈에서 시작해 척수를 타고 올라와 백회혈을 지나고 머리 앞쪽으로 흘러 윗입술 아래에서 멈춘다. 회음에서 항문을 지나 등, 뒷머리와 윗머리, 전면은 윗입술 위쪽. 독맥의 독은 ‘감독할 독’ 자다. 인간의 의지로 감독할 수 있는 맥이라는 뜻이다. 감독이란 수련, 보양을 말하며, 감독할 때마다 맥이 힘차게 뛰어논다. 내공을 수련할 때 제일 먼저 기감이 느껴지는 곳도 독맥에 있는 혈이다.

임맥은 윗입술 아래에서부터 회음혈까지를 말한다. 인간의 전면이다. 임맥의 임은 ‘맡길 임’ 자다. 인간이 의지로 조율할 수 없는 부분이다. 임맥은 육신의 상태에 따라 스스로 알아서 움직인다. 임맥은 뇌를 사용하지 않을 때, 활기를 띤다. 잠을 잘 때 가장 활기 차게 움직인다. 임맥은 천하제일의 고수라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임독양맥을 유통시키기 위해서는 임맥이 스스로 열릴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임맥의 흐름을 활기 차게 하려면 스스로 활기 차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꾸준히 독맥을 강화하고, 단전을 발달시키고, 후천진기를 착실히 다지다 보면 임맥이 열린다. 진기의 유통이 가능할 때는 그때부터다.

종리추의 임맥은 지극히 평범하다. 그러나 독맥은 발달되었고, 그중에서도 백회혈이 가장 발달되었다. 백회혈은 두정점이다. 양기상승의 극점이며, 백병에 효험이 있는 혈이다.

‘확실히 기공을 익혔어.’

적지인살은 명문혈에서 손을 뗐다. 어떤 기공을 익혔는지는 나중에 확인할 사항이었다. 살아날 수 있다면. 개방도는 작게 소곤거리는 소리도 잡아낼 터였다. 문득 적지인살은 계집아이처럼 부드럽고 윤기가 흐르는 작은 손을 보았다.

‘살아날 길이 있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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