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사신 – 144화


일이 너무 잘 풀려나갈 경우에는 오히려 불안해진다. 야이간이 그런 경우다. 자신이 바란 것 이상으로 모든 일이 척척 풀려나가는데 영 불안하기만 하다.

“약재 현황입니다.”

실물이 아닌 장부 조사만으로도 꼬박 이틀이 넘었다. 자세히 볼 시간적인 여유도 없다. 대략적으로 현황만 보고 받고는 넘어간다. 시간이 흐를수록 천 노인의 모든 것은 너무 싱겁게 야이간의 손으로 굴러 들어왔다. 이토록 거대한 상인 집단이 있었다니. 살혼부 살수들은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다. 살혼부 살수들은 청부로 벌어들인 돈을 한 푼도 쓰지 않았다. 상재가 뛰어난 사람을 골라 위탁했고, 돈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들은 청부를 받지 않아도 평생 호의호식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살혼부 살수들은 편히 지내지 않았다. 야이간은 곤륜까지 쫓겨갔으면서도 소천나찰이 좋은 옷 한 벌 입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소천나찰은 중원을 떠날 적에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고 돌아왔다. 음식도 돈 주고 사 먹은 적이 없다. 산에서 풀을 뜯어 먹었고, 터전을 마련한 다음에는 직접 농사지어 먹었다. 한 발이 없는 절름발이 병신이 농사를 지었다. 이렇게 많은 돈이 있는데…

‘살수가 돈을 벌기를 잘 보는군…’

살혼부 살수들은 고급 청부를 맡았다. 한 건은 은자 몇백 냥에서 몇 천 냥에 이르는 고급 청부. 그들은 왜 이 돈을 쓰지 않은 것일까? 그렇게 궁핍하게 살면서… 이 돈을 약간만 꺼냈어도 편히 살 수 있었는데. 손발이 잘렸어도 시녀 네다섯 명을 동시에 부리며 편히 지낼 수 있는데.

묵월광? 빌어먹을 묵월광…

살수는 돈을 위해서 존재한다. 돈을 벌기 위해서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살수에게 의리니 협행이니 하는 따위는 개소리보다 못하다. 사무령? 웃기는 게 사무령이다. 사무령이 되어서 어쩌겠다고. 그저 돈이나 챙겨 한몫 잡고 튀면 그만인 것을.

‘난 성공했어.’

야이간은 하나하나씩 상권이 손에 잡힐 때마다 흥겨운 콧노래를 불렀다. 주의를 기울이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아주 약간이라도 이상한 기미가 보이면 바로 내뛸 생각이다. 물론 자신을 물 먹인 이 작자들… 상인들이라는 작자들은 평생 두 발을 뻗고 잠들지 못할 테지만.

내원에 머물고 있는 취국이 생각났다. 우연찮게 주운 계집이지만 취국의 몸뚱이는 정말 탐스럽다. 그녀는 요물이다. 사내의 정혈을 빨아먹기 위해 태어난 요괴다. 그녀에게 걸리면 맥을 추지 못한다. 취국이 손가락만 움직여도 거미줄에 걸린 파리처럼 처분만 바라는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아무리 급한 볼일이 있어도 그녀가 관계를 요구하면 들어줘야 한다.

‘요물이야…’

야이간은 욕정이 치밀었다. 취국은 생각만 해도 욕정이 치미는 여자다.

천 노인은 팔부령으로 들어섰다. 그는 거친 산을 타기가 힘든 듯 조금 올라가서는 쉬고, 또 몇 발짝 움직이고는 쉬었다.

“휴우! 이 늙은이보고 이런 산을 올라오라니, 참 취미치고는 악취미야.”

천 노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때,

“중얼거릴 힘은 남아 있군. 그럼 좀 더 올라갈 수 있겠어.”

숲 안쪽에서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천 노인은 다급하게 팔을 저었다.

“에고! 무슨 그리 끔찍한 소리를… 여기서 한 걸음만 더 옮기라고 하면 한숨 잤다가 내일쯤이나 올라가렵니다.”

“하하하하!”

숲에서 나온 사람은 종리추다.

“신수가 훤해졌군요.”

천 노인의 눈길이 부드러워졌다. 사실 두 사람의 인연은 썩 좋은 편이 아니다. 천 노인과 종리추가 처음 만난 날, 천 노인은 종리추에게 얻어맞았다. 채찍으로 등짝을. 그것도 거금 일만 냥을 빌리러 간 것도 아니고 주러 갔으면서. 그때부터 시작된 두 사람의 인연은 질기게 이어지고 있다.

천 노인은 자신의 개인 재산을 선뜻 종리추에게 내놓았다. 소고에게가 아니라 종리추에게. 구만 냥이라는 입도 벌어지지 않는 금액을 수전노 천 노인이 내놓았다. 천 노인은 사무령을 보고 싶어 한다. 노인은 사무령이 될 사람으로 소고와 종리추를 꼽았다. 살혼부 살수들조차 소고에게 신경을 쓰고 있을 때, 그는 종리추에게 거금을 내놓았다. 사무령이 되어달라면서. 무림에 자유인이 있는지 보고 싶다면서. 소고는 벌써 날개가 꺾였다.

종리추가 말했다.

“술 한잔이라도 하고 싶으면 이리 와. 그쪽으로는 죽어도 안 갈 테니까.”

다리가 아파서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다던 천 노인이 한걸음에 달려왔다.

“역시 야이간의 목적은 재물. 이 늙은이의 재물이 꽤나 탐났나 봅니다. 얼굴이 여간 두껍지 않아요. 웬만한 자 같으면 얼굴 보이기도 힘들었을 텐데…”

“넘겨준 것은…”

“전부 다요. 말씀대로 하나도 남기지 않고 전부 다 넘겨줬어요. 허허! 이제 이 늙은이는 거지나 다름없는데… 밥술이나 얻어먹어야겠소이다.”

“밥값을 못 하는 사람은 찬밥조차 안 주지.”

“허! 냉정하군요. 그 많은 재산을 툴툴 날리고 온 사람에게 찬밥 한 술 안 주다니.”

“…”

종리추는 말을 잃고 멍해졌다. 무엇인가 생각이 깊이 잠길 때 드러나는 버릇이다. 농담으로 시작한 말이지만 농담조차도 받을 수 없을 만큼 깊은 생각에 빠져든 게다.

천 노인은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다. 야이간이 자신에게 올 줄 어떻게 알았나? 그런 인간에게 전부 넘겨줘도 상관없는가 등등 물어보고 싶은 게 정말 많았다. 한마디도 물어보지 못했다.

종리추가 일어나 걸어가기 시작했다. 천 노인은 생각에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멀찍이 떨어져 뒤따랐다.

“천 노인!”

종리추가 느닷없이 부르자 슬금슬금 따라가던 천 노인이 한달음에 달려가 옆에 섰다.

“천 노인, 덕분에 한 달이란 시간을 벌었어.”

“좋은 겁니까?”

“좋지, 살 수 있게 되었으니까.”

“좋은 거군요.”

“천 노인, 바빠지겠어, 아주.”

“허허! 돈은 없는데 바빠지다니… 천상 몸뚱이를 써야 할 일인가 보군요. 그런 건 싫은데…”

천 노인은 말을 잇지 못했다. 종리추는 벌써 저만큼 달려가는 중이었다.

‘정말 빠른 신법이군. 이러다가는 놓치겠는걸.’

천 노인도 신법을 펼쳤다.

“외장을 최대한 가동하도록”

느닷없는 명령에 벽리군은 어안이 벙벙했다.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다. 좀 더 무림이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한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어쩌면 외장을 최대한 가동할 기회가 한 번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개방이 어느 정도 외장의 틈바구니를 파고들었다는 뜻이다. 자칫하면 등천조와 연결된 외장 문도 열 명의 종적까지 드러날 위험에 처했다. 마지막 절체절명의 순간을 위해서 지금은 최대한 가동할 단계가 아니다.

“상공, 외장을 최대한 가동하면…”

“가동하도록 해.”

“…”

벽리군은 잠시 종리추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서 가장 눈치 빠른 여인이며, 사내의 주머니 속에 든 물건을 제 것처럼 사용할 수 있는 재능이 있다. 화령 살수들도 있지만 사내를 녹이는 면에서는 한 수 지도를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결코 깨끗하다고 할 수 없는 여자. 사내와 잠자리를 하는 것도 예사롭게 생각하는, 생활이 문란하기 이를 데 없는 여자. 그런 여자가 다소곳해졌다. 종리추의 의견에 반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지만 믿을 때는 확실히 믿는다. 긴가민가가 아니라 확실히. 그런 느낌은 점점 묵월광 살수들에게도 전해졌다. 오곡동에서 생활하는 동안… 구파일방, 전 무림군웅들의 합공에서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이 우연만은 아니란 걸 알았다.

종리추는 끊임없이 무림을 살핀다. 연구하고 부족한 부분은 밤을 새워서라도 찾아낸다. 그런 면이 그에게 삶을 안겨주고 있다. 종리추는 사람을 믿게 만든다. 인간적인 매력에 현혹된 믿음은 오래가지 못한다. 종리추가 주는 믿음은 꾸준한 노력과 연구에서 나온다. 그렇기에 믿을 수 있다.

벽리군이 등천조에게 보내는 전서를 기재했다.

외장 총동원.

종리추가 말했다.

“중점을 둘 사항은…”

벽리군은 얌전히 받아썼고, 다른 사람들은 귀를 기울였다. 무리를 하면서까지 외장을 총동원하려는 이유가 무엇일까.

“중점을 둘 부분은 청부야.”

“네?”

벽리군이 얼핏 잘못 듣지 않았나 싶어 되물었다.

“청부”

“청부요?”

“그래 청부.”

“정말 청부… 에요?”

“써 청부라고.”

이럴 수가! 아무리 종리추라고 해도 이건 도박이다. 외장을 총동원하는 것도 그런데 중점을 두고 파악할 사항이 청부라니.

벽리군은 전서에 ‘청부’라고 글씨를 써 넣었다. 비둘기가 푸르디푸른 창공을 훨훨 날아갔다.

“야이간은 하남 상권을 움켜쥐었다. 하하! 질긴 목숨이야, 질긴 목숨. 정말 질긴 목숨이야.”

“지금 치면 반 시진도 걸리지 않습니다.”

“…”

백의천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천외천은 큰 변화를 겪고 있는 중이다. 원래 천외천의 초대 천주는 흑봉광괴다. 한데 구진법을 거치면서 천객이 모든 일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천객 중에서도 가장 맏이인 자신이. 비객은 살기가 한풀 꺾였다.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살기로 똘똘 뭉쳤으나 지금은 맥이 빠져 허탈해한다. 천객은 적어도 그들보다 배는 강하다. 배는 빠르고, 배는 잔인하다. 비객 전부가 덤벼도 천객을 이길 공산은 그리 크지 않다.

천객은 무적이다. 비객은 천객 무인들이 어떤 고통을 받았는지도 알지 못하면서 무작정 구진법만 부러워한다. 공공연히 나서서 비객도 구진법을 받자는 의견을 내놓는 자도 있다. 그만큼 천객이 보여준 무용은 충격이다. 그런 무공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용두방주의 등을 서슴없이 베는 강한 살기가 비객의 살기를 짓눌렀다. 비객은 천객 앞에선 고양이 앞에 선 쥐처럼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한다. 천객과 비객이 만난 순간은 비객이 천객의 하수인으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던 것을…

이런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다. 제일비주 유홍을 비롯한 천외천 혈도 열네 명이다. 그들은 천객을 안다. 구진법을 통해 연성한 무공이 어떻다는 것을. 너무 강해 부러질지언정 결코 굽혀지지는 않을 사람들이란 것을. 사람들과 공존하는 무인들이 아니라 지배하는 무인들이란 것을.

백의천의 생각에서 깨어나 입을 열었다.

“천주님께서는 계속 정보를 수집해야 합니다. 야이간이 하남 상권을 이용해서 무얼 하는지 지켜봐요. 이제 막 상권을 움켜잡았으니… 파악하는 데 보름, 움직이는 데 보름… 한 달이면 야이간이란 놈이 무얼 하려는지 파악될 겁니다.”

“그러세.”

흑봉광괴조차도 백의천을 마음대로 대하지 못했다. 천외천은 가장 정도를 숭상하는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다. 싸움에 있어서는 정도를 벗어나 비굴한 방법도 서슴없이 사용하지만 서로에게 대하는 예의만은 가장 깍듯하다. 천객만은 예외다. 그들은 천외천 무인이나 비객 무인들을 눈 아래로 굽어보았고, 다른 무인들은 그런 눈길을 당연한 듯 받아들였다. 천객은 천외천의 지배자가 된 것이다. 그것은 또 전 중원의 지배자가 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남 상권이라… 야이간… 묵월광…”

백의천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천객들에게 묵월광은 살문보다도 더 큰 고통으로 기억된다. 무적의 천객이 죽음이란 것을 접한 것도 바로 묵월광 살수들 덕분이다. 아니, 살혼부 살수들 때문이다. 묵월광은 끝내 멸망을 거부했다. 그들은 야시장을 폭파시키는 만용도 서슴지 않았다. 모든 것은 변명에 불과하다. 그들은 도주했고, 천객은 묵월광을 몰살시키지 못했다. 죽인다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으니 실패한 움직임이다. 지금까지 중원을 떠돌면서 처음으로 실수했다. 그 누구도 놓치지 않았는데 묵월광만은 놓치고 말았다. 아픈 상처다. 동생을 죽이고, 동생의 정혼녀 공화 소저까지 죽인 살문만큼이나 미운 존재들이다.

살문은 팔부령에 있다. 그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언제까지고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벗어나려고 꿈지럭거리기만 해도 소림승들이 가만있지 않을 테니까. 반면에 묵월광은 어디 있는지 모른다. 이제 묵월광의 자금줄을 찾았다. 그 자금줄은 의외로 상당히 컸으며 현재 야이간이 접수 중이다. 잘하면 묵월광은 뿌리째 뽑아버릴 수 있으리라. 그들이 어디 숨어 있는지만 확인할 수 있다면.

“좋아, 한 달이면 충분해. 야이간을 지켜본다.”

“제일비주.”

“넷!”

비객 제일의 통솔자라고 할 수 있는 유홍이 수하처럼 대답했다.

“비객 솜씨 좀 보자. 야이간을 철저히 감시하도록.”

“제십비주! 야이간을 감시해!”

제일비주는 즉각 제십비주 천애유룡에게 명을 내렸다. 천애유룡은 구대문파에게 협조를 구할 수 있는 통로를 유지하고 있다. 제십비주가 감시한다는 것은 개방 전력이 감시하는 것과 같다. 전 무림인이 눈을 번뜩이는 것과 같다. 현재 야이간은 개방이 감시하고 있다. 거기에 제십비주가 추가로 투입된 것이다.

“알겠습니다.”

천애유룡이 대답과 동시에 신형을 뽑아 올렸다. 그를 따라 여덟 명의 무인들이 신형을 날렸다. 비주와 생사를 같이해야 하는 제십비 무인들이다. 솔직히 비객 무인들은 불만이 많다. 천객의 무공이 무섭기는 하지만 그래도 수하처럼 기어들어가다니. 파사현정이라는 말 한마디에. 하지만 어쩌겠는가. 천외천이 그렇고, 천객이 그렇고… 모두 정을 수호하자고 뭉쳤고, 뜻이 비객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사람들인데. 정을 수호하기 위해서라면 목숨도 기꺼이 내놓는 진정한 협의지사들인데.


랜덤 이미지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