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145화
“오랜만입니다.”
“이게 누구시오? 어서 오시오”
살천문주는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을 맞이했다.
“요즘같이 어수선한 세상에 먼 길 오셨소.”
“하하하! 술이나 같이 한잔하려고요.”
찾아온 사람은 매우 소탈해 보였다. 의복은 깔끔했으나 비싸 보이지는 않았다. 몸에 지닌 모든 것이 비싸지 않으면서도 정갈한 것들이다.
“어이, 이리 오게나. 오늘은 화로에 불 끄고 술이나 진탕 마시세.”
살천문주가 수지호법을 불렀다. 세 사람은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았다. 처음 보는 얼굴이 있지만 소개할 필요는 없었다. 방문객은 살천문주의 대장간에 들어서기 전부터 수지호법이 있는 것을 알았다. 그가 개방 사람이며, 수천, 수동 등과 함께 사결 제자 중에서는 단연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이라는 것도. 또한 옛날 흑봉광괴와 함께 적지인살의 십망 사건에 뛰어들어 낭패를 당한 것까지 모두 알았다.
수지호법도 오늘 처음 보는 자가 방문할 것이라는 걸 알았다. 개방도가 전해온 전갈에 의하면 그의 신분은 하오문주다. 살천문주와는 문주 복위 사건 때 큰 도움을 받았고 그때부터 막역한 사이로 지내왔단다. 대장간에 방문하는 것이 크게 눈에 띄는 행동은 아니다.
살천문주가 술을 내왔다. 세 사람은 말없이 술 한 잔씩을 마셨다. 기묘한 울림이 지속되었다. 하오문, 광활한 정보의 대지다. 개방, 세상 모든 것을 굽어보는 정보의 하늘이다. 살문, 와해되기도 쉽고 일어서기도 쉬운 도깨비 같은 집단이다. 사람들 틈에 파고들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당금 무림에서 정보의 양과 질이 가장 뛰어난 세 문파가 만났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모두 진실이다. 그들만큼 많은 일을 알고 있는 사람도 드물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모두 거짓이다. 그들은 알고 있는 사실을 곧이곧대로 말할 수 없다.
세 사람은 침묵을 이어가며 또 술 한 잔을 들이켰다. 아는 것이 가장 많지만 입에 올릴 수 있는 말은 가장 적다.
“천외천… 비객… 하하하! 정말 기발한 발상입니다.”
하오문주가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입을 열자마자 정곡부터 찔렀다. 주위에는 여러 겹의 장벽이 쳐져 있다. 개방 문도로는 천지현황 중 수천이 있다. 동서남북 중 수동이 있다. 용호풍운 중 수풍이 있다. 그들 세 사람이 대장간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하오문도도 있다. 하오문도 중 제일 손이 빠른 자는 누구일까? 알려진 것은 없다. 배수도 손이 빨라야 하지만 소투도 빨라야 하고, 도곤도 빨라야 한다. 그들 중 누가 가장 빠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도곤은 도곤대로, 배수는 배수대로… 자신의 세계에서 빠르다고 인정받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나머지는 얼마나 오래 버티느냐에 달려 있다.
하오문도의 명성은 끊임없는 노력으로 나타난다. 길 가는 사람의 전낭을 가로챘다고 해서, 두세 번 연속적으로 성공했다고 해서 모두 인정받는 것은 아니다. 큰 건에서 성공해야 한다. 무림인, 대상인 등 감히 속이기 어려운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훔치고, 가로채야 명성을 얻을 수 있다. 또 다른 방법은 성공 횟수다. 수십 번, 수백 번 반복했는데도 들키지 않고 성공한다면 명성이 높아진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은 큰 모험도 하지 않는다. 안정된 수순을 밟아나가기 때문에 반드시 성공한다. 하오문에서는 도박적으로 큰 건을 성공하는 사람보다 훨씬 쓸모가 있다.
하오문주는 호법으로 다섯 명을 데리고 다닌다. 하오문에서는 그들을 오기, 즉 다섯 마리의 청개구리라고 부른다. 하오문주가 어떤 기준에서 그들을 선발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문주를 쫓아다니며 손과 발이 되어 움직이는 사람들이라는 게 중요하다. 오기는 문주에게 지목되어 선발되었다는 자체로 무한한 영광이다.
현임 하오문주가 뽑은 오기가 대장간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각기 다른 특색을 지닌 자들이다. 덩치가 큰 자도 있고, 행동이 몹시 날래 보이는 자도 있다. 사내도 있고, 여인도 있다. 한 가지 공통점이라면 병기를 지닌 자가 없다는 점이다.
개방에서 파견된 호법과 하오문 오기가 한자리에 머물렀던 적은 없다. 지금은 한자리에 어울려 있다. 서로 말도 건네지 않고, 애써서 눈길을 피하지만 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그들은 모두 바깥으로 시선을 돌린다. 안에서 나누고 있는 대화는 귓전으로 흘려버려 곧바로 잊어버리는 대신 누가 안으로 접근하는 것은 철저히 차단했다.
“구대문파는 너무 강한 자들을 만들어냈어.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을 지닌 자들이지. 구파일방이 그들을 어떻게 제어하는가는 중요하지 않아. 그때는 우리가 모두 죽은 후일 테니까.”
살천문주가 침중하게 입을 열었다. 하오문주는 살천문주를 만나러 오는 길목에서야 하오문도들을 개 패듯 때려죽인 자들이 천외천 인물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하오문도가 파악한 정보는 아니다. 살문… 살천문주가 약간의 정보를 흘려주었고, 그래서 파악할 수 있었다.
“우리 하오문도 마찬가지에요. 현재는 마방을 제외하곤 모두 문을 닫은 상태입니다. 움직일 수가 없어요.”
“허허허! 좋은 일 아닌가? 세상에 악이 없어졌으니 말일세.”
“…”
“그래, 동생은 어쩐 바람이 불어서 왔는가?”
“살문과 연수하려고요.”
하오문주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듯이 말했다.
“살문과 연수?”
“팔부령으로 찾아가면 당장 꼬리가 드러날 것 같아서 이렇게 문주님을 뵈러 왔죠. 이것도 충분히 위험하지만.”
“그렇지, 이것도 위험하지. 그런데 왜 살문과 연수를 하려는 것인가? 살문도 풍전등화인 건 마찬가진데.”
“…”
하오문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당금 무림은 너무 답답하다. 살천문주 말대로 악이 없어졌으니 살판났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배운 것이 도둑질인데… 하오문도는 설 땅을 잃었다. 도둑질을 하면 처참하게 맞아 죽는다. 길 가는 길손의 전낭을 슬쩍했다는 이유로 목이 잘린다. 도방에서 속임수 좀 썼다고 척추가 부러져 죽는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죽기 전에는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 중 하나가 도둑질이다. 계집질이고, 노름이다. 하오문은 인간 세상의 어두운 부분에 기생한다. 그런 그들을 갑자기 밝은 세상으로 내몬다면 모두 밝은 태양 빛에 타 죽고 만다.
과거에는 하오문도였으나 현재는 아닌 사람들도 많다. 그들은 어둠을 벗어났고, 밝은 햇살 아래서 살고 있다. 도둑질을 끊고 농사짓는 사람, 기녀에서 벗어나 한 사내를 충실히 따르는 여인, 노름을 끊고 노를 저어주며 받는 푼돈에 만족하는 사공… 모두 밝은 세상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본인 스스로 밝은 세상으로 나가게 만들어야 한다. 갑자기 확 잡아끈다고 따라 나갈 사람들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뿐이다. 무조건 죽인다고 능사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감히 말을 건네지 못한다. 우리는 계속 도둑질을 할 테니 죽일 테면 죽여보라는 말도 하지 못한다. 저들은 정말 죽인다. 마지막 씨가 마를 때까지 죽여댄다. 하오문은 살수 문파만큼이나 답답한 처지가 되었고 활로를 모색하지 못하고 있다.
하오문주의 선택은 종리추다. 하오문 모두를 끌어들일 필요는 없다. 자신을 비롯해 몇몇 사람만 나서면 된다.
살천문주가 말했다.
“문주의 심정은 이해하네. 문주님께 여쭤보지. 하오문과의 연수라면 틀림없이 반길 걸세.”
살천문주의 생각은 이번에도 어긋났다. 며칠 후, 쇳조각들 사이에서 찾아낸 글씨는 불이었다.
“엇!”
살천문주는 연속적인 거절에 할 말을 잃었다. 개방의 청부도 거절했고, 하오문의 연수도 거절했다. 그렇게 배부른 상황도 아닌데… 개방이나 하오문이나 그들이 힘을 보태준다면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진배없는데.
“나도 어떤 의도인지 짐작할 수 없구먼.”
“하하하! 살문주,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군요.”
수지호법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는 대장간에 머물고 나서야 자신이 찾아온 살문주가 십삼사 년 전 십망을 피해 도망치던 꼬마라는 사실을 알았다. 자신들은 적지인살만 쫓았다. 꼬마는 문제되지 않았다. 무공을 익힌 것도 아니고… 단지 적지인살에게 손목이 붙잡혀 끌려 다니고 있을 뿐이다. 그때의 꼬마가 성장해서 살문주로 돌아와 있다니… 살천문주가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면 지금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십망은 지나간 과거가 되었다. 소림사가 봉문에 들어감으로써 과거의 십망은 효력을 잃었다. 과거, 십망을 받고 세외로 쫓겨간 자가 다시 돌아와도 십망으로 다스리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징치하고자 하는 무인이 직접 찾아갈 수는 있다. 천외천 무인이. 그때의 그 꼬마가 살문주라는 사실도 놀라운데 개방에 이어 하오문의 연수 제의까지 거절한 배짱은 더욱 놀랍다.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음…! 살문주가 경거망동할 사람이 아닌 것은 알지만… 이해할 수 없군.”
아무도 이해할 수 없다. 살천문주까지도 종리추의 답변은 이해할 수 없다. 이제 다 모였다. 개방, 하오문, 살문. 이들이 서로 연수를 하면 천외천 무인들을 귀머거리에 장님으로 만들 수 있다. 잘하면 역습도 취할 수 있고, 중원에서 사라지게 할 수도 있다. 더욱 잘하면 그토록 염원하던 사무령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갈 수도 있다. 종리추가 이 모든 기회를 스스로 저버리다니.
“내가 직접 문주를 만나뵈야겠소.”
살문과 연수하는 것은 하오문에게도 중요하다. 당장은 모두 죽게 되리라 살문이 초토화될 것이고 하오문주를 비롯해 살문과 연수한 사람 대부분이 죽게 된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려줄 수 있다. 도둑이나 노름꾼마저 무자비하게 죽인다면 그들도 꿈틀한다는 것. 서슴없이 살문과 손잡을 만큼 발악한다는 것. 그것을 보여줄 수 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살수들과 같은 잔혹한 사람들은 죽이되 도둑과 같이 미천한 자들은 가볍게 징치하는 것. 또 하나는 의도를 철저히 짓밟고 지금처럼 무자비하게 죽여대는 것.
천외천이 어느 것을 선택할지는 모르지만 하오문주는 물어봐야 한다.
살천문주가 말했다.
“문주님께 여쭤봐야겠소.”
하오문주의 마지막 부탁도 거절되었다. 간단한 글자 한 자, 부.
“만나는 것조차 거부하다니… 너무하는군.”
하오문주는 허탈한 표정이다. 팔부령으로 직접 찾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필요 없다. 소림승들이 굳게 지키고 있으니 살문 살수들이 틈을 비집고 내려오지 않는 한 올라가서 만날 방도가 없다. 하오문주는 대장간에서 사흘을 더 보냈다. 혹시나 다른 답장이 날아들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런 기대는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종리추는 다른 답장을 보내오지 않았다.
수지호법은 개방 총타에 ‘하오문주의 의례적인 방문’이라고 보고했다. 실제로 몇 번 밀담이 오간 것 외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하오문주와 살천문주는 친형제처럼 술을 마셨고, 취했다. 하오문이 살문과 만난 것은 큰 사건이다. 둘이 손이라도 잡는 날에는 상당히 골치가 아파진다.
천외천은 관심을 기울였으나 곧 무시해 버렸다. 수지호법이 의례적인 방문으로 보고한 것처럼 살문과 하오문이 연계하는 움직임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모자도 중 모도에는 소담한 별실 한 채가 있다. 조망이 좋은 곳으로, 어부의 집이 있던 곳이나 허물어 버리고 새로 지은 집이다. 그곳에 천외천의 천객들과 비객 비주 중 야이간을 감시하기 위해 하남에 가 있는 천애유룡을 제외한 나머지 비주 아홉 명이 모여 앉았다. 소림사룡 중 일인이었던 정운이 지나가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운이 좋은 놈들이군. 하오문주, 살천문주… 목숨을 또 한 번 부지했어. 아주 운이 좋은 놈들이야.”
개방도가 전해온 전서에는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이 세세하게 적혀 있었다.
“그런 놈들을 죽이는 데 명분을 찾을 필요가 있나?”
칠성검문의 소문주 진조고가 말을 받았다.
“없지, 그냥 가서 죽이면 그만이지. 우스워. 실컷 사람을 죽여놓고도 회개했다면서 눈물을 뚝뚝 흘려대면 용서해야 하니 말이야. 살천문주가 그런 작자지. 사람을 실컷 죽여놓고 이제는 문주가 아니니 상관없다소 하는 꼴이잖아. 그런 자를 죽이는 데 무슨 명분.”
정운의 말투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살천문주 곁에는 개방 호법들이 있다. 수지, 수동, 수풍. 그들이 곁에 있으니 살천문주를 죽이기 위해서는 그가 죽을 만한 명분이 있어야 한다. 아니면 살수처럼 암살을 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개방 세 호법도 같이 도륙해야 한다.
“…”
모두들 정운의 말에 공감하듯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정운이 다시 입을 열었다.
“후계… 도대체 어떻게 된 놈이야! 살천문주 같은 작자에게 호법이나 붙이고. 살천문을 감시하자는 거야, 우리 앞을 가로막자는 거야?”
그제야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백의천이 입을 열었다.
“후계. 뛰어난 자지. 머리가 너무 뛰어나다 못해 모사꾼에 가까운 자. 지금은 천주 흑봉광괴께서 개방을 이끌고 있지만 조만간 후계가 이끌게 되겠지. 후후! 이상한 일이야. 그런 자가 아직 천외천에 합류하지 않고 있으니.”
천외천의 고민이 그것이다. 개방을 자극할 필요가 없다. 좀 더 엄밀히 말하면 후계를 건드릴 필요가 없다. 후계는 현재 폐관 수련 중이다. 그렇게 내버려 두면 된다. 그가 파견한 호법들은 건드려서 득이 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날개가 꺾인 살천문주, 두더지처럼 깊이깊이 땅속으로 기어들어가는 하오문주 따위를 죽이기 위해서라면 더더욱.
백의천이 말했다.
“난 혜공 선사의 직제자지. 선사님을 무척 존경했어. 덕이 높으신 분이고 항상 무림을 걱정하셨지. 하지만.. 소림문도가 당하는 데도 가만히 계시는 모습을 보고 느낀 점이 있었어. 그건 자비가 아니라 무능이었지.”
백의천의 말에 모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팔부령에 살문이란 흉물이 있지. 아주 간특한 놈들… 모두 한 번씩은 겪어봤으니 잘 알 거야. 소림이 놈들을 가둬놨다고 하지만 놈들이 들락날락하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
“…”
“친다.”
모두들 이와 같은 명령이 떨어질 줄 예상했는지라 별반 놀라지 않았다.
“나와 정운, 그리고… 진조고가 간다. 그 정도면 충분할 거야.”
“나도 갈게요.”
백의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 중 유일한 여인이 손을 들며 말했다. 백의천이 여인을 쳐다봤다. 비객 제일비주 유홍도 아픈 눈으로 여인을 쳐다봤다. 모두들 여인이 어떤 심정에서 가겠다고 나섰는지 알고 있다. 화산파의 강간 사건은 널리 퍼진 비밀이다.
“좋아 제칠비주. 같이 가도록…”
“천주, 나도 가겠소.”
제일비주 유홍이 말했다. 백의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으로 모두 끝내는 거야. 중원에서 살수 문파는 씨를 말리는 거야.”
살문밖에 남지 않았다. 중원에 있는 모든 살수 문파가 문을 닫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무공을 휘둘러대던 자들도 숨을 죽였다.
‘진작 이렇게 됐어야 해.’
천외천 무인들은 만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