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146화
혜명 대사는 뜻밖의 손님을 맞았다. 언제 어느 때 찾아와도 반가운 손님이다. 백의천과 정운, 소림사룡이라고 불릴 만큼 뛰어난 자질을 지닌 속가 제자들이다. 백의천과 정운을 보는 혜명 대사의 눈빛이 가늘게 떨렸다. 두 사질은 기연을 얻은 듯하다. 전에는 느껴지지 않던 강철 같은 기운을 뿜어낸다. 몸 전체가 강철로 이루어진 인간… 무인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경지이지만 소림 무승들이 추구하는 경지는 아니다. 그런 면으로 볼 때 두 사질은 소림과는 인연이 먼 기연을 얻은 것 같다.
“고진명과 상태수는 어떻게 된 일인가?”
혜명 대사는 자리에 앉자마자 물었다. 두 사질의 죽음은 죽음을 초월한 선사들의 마음까지 묵직하게 만들었다. 그들 외에도 많은 젊은 기재들이 죽임을 당했다. 일부는 후기지수 중에서도 최고라는 명성을 들었지만 죽음은 피하지 못했다. 특히 상태수의 죽음은 납득할 수 없다. 사람이 죽으면 땅에 매장하는 것이 순리다. 그러나 죽은 사람이 무인이라면 조금 순서가 뒤바뀐다. 무인의 경우에는 누구에게 어떤 무공으로 죽임을 당했는지부터 말을 해야 한다. 죽어서도. 문파가 있으면 문파에서, 문파가 없는 가문이라면 혈족 중에서 누군가가 사인을 밝혀낼 때까지 묻히지 못한다.
상태수는 화장했다.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은 백의천과 정운이었다. 두 사질은 상태수가 죽는 것을 막지 못했다. 살수가 갑자기 튀어나와 상태수에게 급습을 가했다고 했는데, 상태수가 당할 때까지 두 사질이 멀뚱히 서 있었다는 것도 납득할 수 없다. 상태수는 검에 찔려 죽었다고 했는데 상태수를 암습으로 죽일 만한 살수는 흔치 않다. 역시 화장으로 처리한 고진명의 죽음도 의심스럽다.
팔부령 싸움은 무림인들의 일방적인 공격으로 시작되어 공격으로 끝난 이상한 싸움이다. 살문은 방어에 치중할 뿐 역습을 가할 처지가 아니었다. 무림군웅들은 비적마의가 출현한 곳을 꼼꼼히 점검했고 지도까지 작성했다. 소림 오선사가 뚫고 들어간 길 외에 또 뚫은 길이 있다면 하후가 무인들이 광목이라는 묘수로 풀어낸 절벽 밑 소로뿐이다. 뚫고 들어갈 수도, 저쪽에서 나오지도 못하는 기묘한 상황. 그런데 느닷없이 기습은 무엇이고 하필이면 고진명이 당했는가? 살수가 있었다면 무림군웅들을 이끄는 현정 도인이 더 좋은 먹이였을 텐데.
그때 백의천과 정운이 옆을 지켰다. 두 사질은 소림승들이 미처 당도하기 전에 고진명을 화장했다. 혜명 대사는 범상치 않은 일이지만 신경 쓰지 못했다. 소림 오선사의 죽음에 이어 소림의 봉문은 혜명 대사의 넋과 혼을 모두 빼앗아갔다. 이제 한숨 돌려 정신을 수습했는데 느닷없이 상태수가 죽었다는 비보라니.
“살문 살수였습니다. 살문 살수들에게 당했어요.”
백의천이 태연히 말했다.
“사숙이 원망스럽습니다. 살문을 좀 더 강하게 잡아주셨으면…”
정운이 혜명 대사를 원망했다.
“정운 그게 무슨 말인가?”
혜명 대사는 진정 아무것도 모르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백의천과 정운은 서로를 마주 봤다.
‘이게 뭐야? 정말 살문 살수들이 오가는 것을 모르는 것 아냐?’
‘둘 중에 하나겠지. 살문이 움직이지 않았거나 소림이 눈과 귀가 멀 정도로 무능하거나.’
‘소림은 무능하지 않아.’
‘그렇다고 살문이 가만있었던 것도 아냐. 놈들은 움직였어. 외장인가 뭔가 하는 것들이 정보를 수집하고 있잖아.’
짧은 순간에 수많은 말이 눈빛을 통해 오갔다.
“정운 답답하네. 빨리 말 좀 해보게.”
“험!”
정운은 헛기침부터 했다.
“살문이… 팔부령을 빠져나와 무림을 종횡하고 있습니다.”
확정적으로 단정했다.
“뭐, 뭐라고!”
“상태수는 틀림없이… 살문 살수에게 당했습니다.”
“으음…!”
“그래서 왔습니다. 살문을 치기 위해서.”
“…”
혜명 대사는 눈을 감고 염불을 외웠다. 고뇌가 깃든 얼굴이다.
“자네들은… 백팔나한과 여기 있는 사숙들이… 장님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백의천이 태연히 대답했다.
“뭐, 뭣이!”
혜명 대사의 얼굴에 노기가 스몄다.
“살문은 하루가 멀다 하고 산을 오르내립니다. 그것도 보지 못하는 눈이라면 달고 있으나마나 한 거죠. 장님과 다를 바 없습니다.”
“처, 천의, 네가 어찌 그런!”
“한마디만 해주십시오. 소림은 살수를 비호합니까?”
강철 같은 기세가 뭉클 피어났다. 거치적거리는 것은 모조리 짓뭉개 버리겠다는 기세다. 얼굴에서는 차디찬 냉기가 풀풀 날렸다.
“배, 백의천, 네, 네가 어찌 이리 불경한 말을…”
“불경한 말이기 때문에 나온 겁니다. 단순한 말뿐이니 피가 튀지 않는 겁니다.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살수를 빙 둘러싸고… 보호하는 겁니까? 대사님, 저희는 살문을 치려고 합니다. 막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눈을 감고 있는 혜명 대사의 미간이 파르르 떨렸다. 백의천과 정운의 행동은 파문에 해당한다. 방장의 명령을 무시한 것이며, 백팔나한과 육십칠단승의 명예를 짓밟았다. 파문… 이들에게는 소용없는 말이다. 백팔나한이 막아서면 백팔나한과 싸울 것이며, 육십칠단승이 막으면 피를 불러서라도 뚫고 올라갈 게다. 이들은 그러기 위해서 왔다. 이미 소림 문도가 아니다. 말은 소림사룡이나 소림과는 전혀 무관한 사람이 되었다. 상태수, 고진명… 그들의 죽음도 소림과 상관없다. 소림승이 관여할 죽음이 아니다. 그들 역시 소림을 떠난 사람들이니까.
‘아미타불…’
염불밖에 나오지 않았다. 천외천 천객에게 용두방장 사망. 백의천과 싸움 중 정운이 등을 암습. 분운추월의 전서는 혜명 대사의 노기를 불러일으켰다. 소림사룡에 대한 노기가 아니라 분운추월에 대한 노기다. 아무리 절친한 벗이라고 해도 그렇지 소림을 어떻게 보고 이따위 망발을 늘어놓는가. 그러나 잠시 시간이 지나자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소록소록 피어났다.
천천히 되짚어보았다. 소림사룡이 연관되어 있으니 소림사룡의 종적부터 훑어나갔다. 그 끝에는 혜선 대사가 있다. 혜명 대사에게는 사형으로 현재 계율원 원주를 맡고 있는 분이다. 방장과는 뜻이 맞는 듯하지만 기본적인 노선은 달리하고 있다. 소림이 정치하는 곳은 아니지만 비유를 해보면, 방장이 온건파라면 혜선 대사는 강경파의 정점이다.
‘혜선… 사형…’
이 일은 혜선 대사로부터 시작되었다. 천외천이라고 부르는 절대 강자들의 모임도 사형이 주도했다. 하지만 사형도 비객의 등장까지는 예측하지 못했으리라. 분운추월의 전서대로라면 천외천이 등장할 때쯤에는 십망이 여전히 존재했으니까. 소림이 봉문한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할 시점이었으니까. 혜선 대사와 연관이 있는 천외천에 소림사룡이 들어가 있는 것은 어색하지 않다.
혜명 대사는 천외천을 알게 되었다. 팔부령에 틀어박혀 무공 수련에만 전념하고 있지만 중원이 어떻게 돌아간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분운추월에게서 받은 전서를 믿고 싶은 생각이 없었지만 백의천이 확실하게 말해 주니 믿지 않을 도리가 없다.
백의천의 말처럼 살문을 비호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백의천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단지 죽이는 것이 목적이라는 식의 행동도 원치 않는다.
‘이미 소림을 떠난 사람…’
혜명 대사는 일어섰다. 이제 소림사룡과 소림은 인연이 끊겼다. 앉아 있는 백의천의 눈가에 불길이 일었다. 그도 혜명 대사가 무슨 마음으로 몸을 일으키는지 까닭을 짐작했다. 소림이 미덥지 못하다. 혜명 대사가 미덥지 않다. 자신에게 백팔나한과 육십칠단승을 맡겼다면 단숨에 쓸어버렸으리라. 그날, 팔부령 싸움에서 패배를 선포한 날 패배 대신 죽음을 안겨주었으리라.
“가자”
백의천과 정운이 일어섰다. 그들은 혜명 대사와 소림 무승들에게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떠났다. 백팔나한과 육십칠단승은 동요하지 않았다. 팔부령 싸움 때처럼 무림인이 공격해 온다면 길을 비켜주자는 의견이 팽배했고, 그렇게 결정되었다. 단 소림승들은 공격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소림은 봉문했다. 지금은 살문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행동만 제어하면 된다. 싸움까지 벌일 이유가 없다.
싸움을 피하지는 않는다. 싸울 때는 반드시 싸운다. 이들처럼 막무가내로 몰아붙이는 것이 아니라 일대일로 정당하게 겨루리라.
천외천…
천외천에 대해서는 이해하면서도 동조하지 않는다. 그들도 반드시 싸워야 할 사람들인 것만은 틀림없다. 다른 문제는 다 제쳐 두고 용두방주를 죽인 것만은 용서할 수 없다. 용두방주 살인 사건, 미궁 요망.
분운추월은 무슨 생각일까? 거기도 나름대로 복잡한 상황이 있을 게다. 방주가 죽었으니 그 슬픔을 어디에 비할까? 그런데도 대사건 중에 대사건, 구대문파의 공분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용두방주의 살해 사건은 언급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해 왔다. 지금은 터뜨릴 때가 아니라는 판단이다. 방주가 죽은 것은 개방이지만 어느 문파나 똑같은 상황에 처해질 수 있다. 무당파도 안전하지 못하다. 화산파, 아미파, 해남파도 마찬가지다. 천외천에 가입되어 있는 사람들이 누군지 파악하지 못하는 한 장문인이 살해당할 위기에 상존한다.
‘아미타불…!’
혜명 대사는 염불만 외웠다. 옛날에 엽사가 살았다. 그는 뛰어난 사냥꾼이었지만 유독 호랑이만 만나면 맥을 추지 못하고 도망쳤다. 호랑이가 있어서는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위기를 느낀 사냥꾼은 극단적인 방법을 취했다. 다른 산에 사는 호랑이를 유인해 왔다. 한 산에 범 두 마리가 살 수는 없는 일. 두 범은 치열하게 싸웠고 터주대감 노릇을 하던 범이 죽었다. 이제 다른 산에서 온 범이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산은 평화를 되찾게 된다. 엽사는 목숨에 위협을 느끼지 않고 마음껏 사냥을 할 수 있다.
그런데 호랑이가 돌아가지 않는다. 아예 눌러붙어 살면서 엽사가 잡을 짐승들까지 잡아 먹어치운다. 엽사는 다른 산으로 가려고 했지만 그것마저도 용이하지 않다. 호랑이가 울타리 밖을 배회하며 한 걸음이라도 울타리 밖으로 나오면 잡아먹겠다는 투다. 호랑이는 원한다. 활을 내놔라. 칼을 내놔라. 창을 내놔라… 방구석에 죽치고 앉아 있어라. 꼼짝하지 말고.
진작 힘을 길러 범과 대적했더라면… 범을 데려오지 말고 창술이라도 한 번 더 수련했다면…
천외천은 혜선 대사가, 비객은 구파일방이 만들었으나 그들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 백의천뿐이다. 천외천에 가입하는 사람도 처음에는 주가 누구인지 알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비밀스러워지고 세력도 넓어질 게다. 중원 무림은 다른 산에 있는 호랑이를 불러왔다. 호랑이는 자생하여 산 전체를 호랑이로 만들고 있다. 토끼, 노루, 곰… 다른 동물은 살지 못한다. 오직 호랑이밖에는.
‘아미타불…’
무림은 사상 초유의 싸움… 사형과 사제와 혹은 혈육 간의 싸움을 벌이게 될지도 모른다. 답답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