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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147화


살문에는 직위가 없다. 문주는 있지만 나머지는 모두 스스로 알아서 한다. 높고 낮음은 나이 순서다. 무공이 높든 낮든 나이가 많으면 형으로 대접받는다. 다른 문파에 비해 살문이 다른 것 중 하나가 시간이 있을 적마다 자신이 지닌 비기를 가르쳐 준다는 것이다.

살수들은 비기를 가르쳐 주지 않는다. 같은 문도는 고사하고 자신의 처자식에게까지 비밀로 숨겨둔다. 언제 누가 적이 되어 만날지 모른다. 살수계에서는 어제까지만 해도 웃고 떠들다가 느닷없이 검을 들이대는 경우가 다반사다.

살문 살수들은 그런 관념이 없다. 내일 서로 검을 들이대는 경우는 생각하지 않는다.

“혀를 깨물고 죽어버리지”

혈살편복이 한 말은 그냥 지나치는 말이 아니다. 만약 종리추가 혈살편복에게 광부를 죽이라고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같은 살문 살수끼리는 죽음이 없다. 혈살편복은 자신이 한 말처럼 혀를 깨물고 죽을 것이다. 죽음으로 문주에 대한 보답을 하고, 광부에 대한 형제 간의 예도 다할 것이다.

그런 점이 살문을 강하게 만든다. 마음뿐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강해진다. 자신이 새롭게 터득한 비기가 있으면 모두가 깨닫도록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한다. 무공이 워낙 뒤처지는 살수가 있으면 모두가 일심으로 정성을 다해 수련을 도와준다. 무공이 뒤처진다고 해도 일정한 경지에는 올라 있으니 새삼스럽게 초식을 가르치거나 하지는 않는다.

비대 상대다. 살수 상대다. 살문 살수들은 스스로 나서서 자칫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상대를 자청한다. 비망신사가 좋은 예다. 비망신사가 비망사를 벗어나 살문에 올 적만 해도 그의 무공은 살문 살수들 중 가장 낮았다. 살문 살수들은 비망신사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형님이 죽는 것은 괜찮지만 살문의 명예에 흠이 가니 안 되겠소. 자, 오늘부터 우리 함께 죽어봅시다.”

혈살편복은 시마공과 폭혈공을 가르쳤다.

“요즘 천객인가 뭔가 하는 작자들이 나타나 설친다던데 정말 그렇게 빠른지 몰라. 풋! 그런 건 부딪쳐 봐야 아는 거지. 나도 빠른 가락이라면 하나 가지고 있는데… 구경해 보시겠소?”

음양철극은 병기의 끝과 적과의 가장 빠른 길을 안다. 몸의 굴절이 어떻게 되어 있든 어떤 상태에서든, 순간적으로 가장 빠른 길을 찾아내고 그 길로 병기를 찔러 넣는다. 음양철극이 자신의 무공을 비망신사에게 전수시킨 방법이다. 그들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오가면서 슬쩍슬쩍 살검을 터뜨렸고, 비망신사는 하루에도 몇 번씩 목숨이 붙었다 떨어졌다를 반복했다. 비망신사는 강해졌다. 그의 강해진 것은 살문이 강해진 것이다.

살문에 잠시 머무른 적이 있지만 그때는 몰랐다. 살문이 이렇다는 것을. 묵월광 살수들은 혼란스러웠다. 우선 당장 소고, 소여은, 적사를 어떻게 대할지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살문에는 한 가지 직위밖에 없다. 문주. 나머지는 모두 공평하다. 묵월광을 이끌던 소고와 적사, 소여은의 지휘를 받던 살수들이 평등해졌다. 묵월광 살수들은 자신들이 본분을 지키려고 했지만 살문 살수들이 내버려 두지 않았다.

“한 명의 수하가 생기면 백 명의 수하가 생기는 것은 금방이지. 그렇게 많으면 형제처럼 보살펴 주지 못할 것이고… 호칭이야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는데, 형제가 되지 않으려면 나가주는 것이 좋겠어.”

그런 면에서 화령 살수들은 혜택을 받았다. 그녀들은 검을 놓고 벽리군과 어린의 치마폭에 숨었다.

“언니, 제발 도와줄게요.”

“언니, 필요한 것 있으면 말만 하세요.”

화령 살수들은 여인들 틈에 파묻혀 골치 아픈 서열 싸움에 끼어들지 않았다. 정말 골치 아팠다. 칠살수, 육도객도 그렇지만 소고, 소여은, 적사의 심기도 불편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네네’하던 관계에서 호형호제하게 되었으니.

종리추는 도와주지 않았다. 모든 것을 버리고 살문 방식에 따를 것을 은연중에 종용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문제는 의외로 쉽게 해결되었다. 문제를 푼 사람은 다름 아닌 비부다.

“사령 살수… 칠살수… 호형호제는 못 하겠다? 이상한 놈들이네. 나 같으면 좋아라 할 텐데. 그럼 너희는 나랑 같이 있으면서 잡심부름이나 하면 되겠네. 난 살문 사람이지만 살수가 아니거든. 청부가 들어와도 난 안 움직여.”

“우리는 살수지 잡심부름이나…”

“거, 되게 말귀 못 알아듣네. 살수가 아니라고 누가 싸우자고 덤비면 가만히 맞아죽어야 하나? 거, 보기보다 되게 우둔하네.”

칠살수와 사령 살수들은 서열 다툼에서 빠졌다. 그들은 비부와 같이 잡일이나 하는 처지가 되었다. 여기까지는 뭐라고 할 수가 없다. 본인들이 굳이 그렇게 신분을 낮추는 것도 진한 의리가 없으면 생기지 않는 것이기에.


적사는 시원한 계류에 몸을 담갔다.

“꼭 이렇게 해야 합니까?”

사령 살수가 말했다. 적사가 데려온 자는 육도객 중에서도 눈가에 검상이 있어 어디서나 한눈에 들어오는 자다. 이름은 방평이나, 방삼이라고 부른다. 십팔도객 모두가 있을 적에 그는 세 번째로 큰 형이었다. 적사가 대래봉을 나설 때 그를 따라 가장 먼저 몸을 일으킨 도객이 방삼이다.

“살문 살수들이 강한 이유를 알았어. 너도 알았을 텐데?”

“그렇기는 하지만…”

“알고도 하지 않는 것은 알지 못한 것보다 못해.”

방삼은 적사와 마찬가지로 옷을 벗고 계류에 몸을 담갔다. 땀을 씻어내야 한다. 이것도 살문 살수들에게 배운 마음가짐이다. 전에는 무공으로 제압하면 그만이었지 땀을 닦는다든가 옷소매를 묶는다든가 하는 자잘한 행동은 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살문 살수들은 작은 일을 빼먹지 않는다.

적사와 방삼은 땀을 깨끗이 씻어냈다. 땀은 냄새를 풍긴다. 모기나 파리도 끌어들이고… 아주 사소한 상황 하나가 일을 망가뜨릴 수도 있다. 물론 무공이 강하면 그만이다. 보이는 족족 죽여버릴 수 있는 무공이 있다면 두려울 게 없다. 살문 살수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무공이 있더라도 최선을 다해 몸을 숨겨야 한다. 싸운다는 것은 언제든지 가능하다. 가장 최종적으로 어쩔 수 없을 때 싸워도 된다. 그전까지는 최대한 몸을 숨겨 암습으로 죽여야 한다.

적사는 살문 살수들에게 많이 배웠다. 계류에 땀을 씻어내는 동안 먼지에 절은 옷도 빨아 널었다. 푸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다. 푹푹 내리쬐는 뜨거운 열기는 계류조차도 덥히려고 한다.

‘하나, 둘 셋, 넷…’

적사는 마음속으로 수를 헤아렸다.

“하나 둘, 셋… 이렇게 수를 헤아려. 뭐 해, 돌대가리들아! 어른이 시키면 해봐야지!”

“치잇! 그 정도는…”

“너, 너… 몇 대 맞은 다음에 정신 차릴래!”

“알았어. 말해 보시지, 따라할 테니.”

“수를 헤아리는 것은 관조야. 마음을 보는 거지. 마음을 보는 방법에는 도를 텄으니 생략하고… 마음이 시키지 않으면 일어서지 마. 천지의 기운은 마음과 닿아 있어서, 마음이 꺼림칙한 것은 천지의 기운이 좋지 않은 거야.”

삼현옹은 마음이 시키지 않는 일은 하지 말라고 했다. 살문에서는 살수들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사부요 제자다.

‘백열둘, 백열셋…’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마음은 말한다. 일어서도 좋다고. 이제 일어나 몸을 말린 후 옷을 입고 천천히 나아가라고. 고개를 돌려 방삼을 보자 그만 픽 웃음이 새어 나왔다. 물에 들어오지 않겠다던 방삼은 시원한 계류에 흠뻑 젖었는지 코까지 골며 잘 들어 있었다.


적사와 방삼은 담을 넘었다. 하인만 수십 명에 이른다는 장원이다. 수십 명… 쓸모없는 숫자다. 더군다나 모두들 깊은 잠에 빠져 있으니 장원이 아무리 넓어도 적사와 방삼의 발길을 막을 것은 없다. 그들은 천천히 걸었다. 마당은 무척 넓다. 한겨울에는 눈을 쓸기에도 벅찰 게다. 살문도 멸문당하기 전에는 큰 장원을 가졌지만 이곳에 비교하니 오히려 소박한 편이다.

당당히 중문을 밀치고 들어섰다.

삐이걱…!

중문이 꽤나 큰 소리를 내며 열렸지만 나와보는 사람 한 명 없다. 무인이 살지 않는 장원은 그렇다. 경계를 서는 자도 없고, 밤이 되기 무섭게 방구석으로 처박힌다. 내원을 찾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장원은 지역에 따라 특색이 있지만 같은 지역에서는 대개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장주와 아녀자만 들 수 있다는 내원문을 밀쳤다.

삐이걱…!

이번에도 신경을 긁는 소리가 들렸다. 나와보는 사람은 역시 없다. 내원은 어둠을 묻혀 깨어날 줄 모른다. 장원의 구조를 파악하고 있으니 장주의 침소를 찾는 것도 어렵지 않다. 방삼이 문을 열었다. 월장하여 장주의 침소에 들기까지 걸린 시간은 일 다경을 넘지 않았다.

장주는 여간 뚱뚱하지 않다. 알몸으로 누워 자는데 불쑥 솟아 나온 배가 숨을 쉴 때마다 크게 요동친다. 장주의 옆에는 역시 알몸의 여인이 잘 들어 있다. 장주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여인이다. 뛰어난 미모를 지녔고 몸도 가녀리다. 장주와 같이 누워 있는 모습을 보니 거목에 매미가 붙어 있는 형상이다. 장주가 잠꼬대라도 하는 날에는 툭 튕겨 나갈 것 같다.

방삼이 의자를 끌어다 침상 앞에 놓았다. 적사는 태연히 의자에 앉았다.

“어이! 그만 일어나.”

“…”

“그만 일어나라니까!”

장주가 깜짝 놀란 듯 눈을 번쩍 뜨더니 방삼을 쳐다봤다.

“어! 누구냐!”

“으음… 왜 그래요, 소릴 지르고… 어멋!”

장주와 여인은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여인은 장주의 품 안에서 파고들어 바들바들 떨었다. 은밀하기 이를 데 없는 침소에 낯선 사내가 둘이나 들어와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기분 나쁘다. 그것보다 태연하게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아 있는 적사의 모습은 꼭 염라대왕처럼 보였다.

“왜, 웬 놈이냐!”

그래도 장주는 아랫사람을 부린 경험이 있어 위엄을 되찾았다.

“나? 살수.”

“뭐, 뭣! 사, 사, 살수!”

“누가 말이야, 너를 죽이라고 하던데… 그런데 묘한 소리를 하더라구? 글쎄, 청부금을 너한테 받으라는 거야. 네게 맡긴 돈이 있다면서. 어이, 불 좀 켜지 그래? 이런 이야기는 서로 얼굴을 맞대고 해야 하지 않겠어?”

방삼의 음성에 살의가 들어 있지 않다고 판단했는지 사내와 여인은 평정을 되찾았다. 여인이 황급히 옷을 주워 입고 불을 켰다. 장주는 침상에 비스듬히 누운 채 적사만 노려봤다.

“아!”

불을 켜고 적사와 방삼의 모습을 본 여인은 깜짝 놀라 손으로 입을 가렸다. 두 사람이 익힌 무공은 축혼팔도다. 사람의 체형, 위치에 따라 순식간에 뻗어낼 수 있는 여덟 가지 도법으로 단 한 번의 손끝이 도법의 사활을 좌우한다. 최대한 이끌어낼 수 있는 모든 진기를 이끌어내 단 한 번으로 승부해야 한다. 그런 무공을 익혔기에 그들의 겉모습도 날카로울 수밖에 없다. 단 한 번, 말을 잘못하면… 아니, 비위라도 건드리면 단숨에 도가 뽑혀지고 목을 잘라 버릴 것 같은 살기가 느껴진다.

“그, 그래. 마, 마, 말해 봐! 어, 어느 놈이 어, 얼마에, 날 주, 죽이라고 처, 처, 청부했어!”

장주는 심하게 말을 더듬었다. 힘있는 자는 언제든 자신의 권위를 되찾을 수 있다. 위엄이란 기른다고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만한 환경이 뒷받침되어야 나오게 된다.

“너 말이야, 혓바닥부터 잘라줄까? 기분 나쁘면 확 죽여 버리는 수가 있어.”

“바, 바라시는 것이 무, 무엇인지…”

장주는 조금씩 여유를 찾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단숨에 죽일 것 같지는 않고, 그러니 타협만 잘하면 위기를 벗어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듯했다.

“바라는 것? 돈이지. 청부금.”

“어, 얼마나…”

“얼마나 받을까? 어이, 네 목숨 값이 얼마나 돼?”

“…”

“십만 냥 어때? 있어?”

“그, 그 많은 돈이…”

장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방삼이 벌떡 일어서더니 일도를 휘둘렀다.

쒜에엑…!

도가 허공을 가르고, 붉은 피가 튀었다.

“아아악…!”

장주는 돼지 멱 따는 비명을 질러댔다. 오른팔이 어깨 부근에서 잘려 나갔다.

방삼이 말했다.

“이제 이야기가 통하겠지?”

하인들이 잠에서 깨어나 내원을 에워쌌다. 힘센 장정 두 명이 문을 밀치고 들어섰지만 들어서기 무섭게 머리가 잘려 나뒹군 다음에는 감히 들어서려는 자가 없었다. 그들은 장주처럼 거만하지 못했다. 장주를 위해 목숨을 내놓을 생각도 없었다.

“이제 그만 돈을 받아야겠는데, 주지 그래?”

“저, 정말로 십만 냥은… 어, 없…”

장주는 어깨에서 솟구치는 피를 지혈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불로 어깨를 감싼 채 바들바들 떨기만 했다. 두 사내가 진짜 살수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하인 두 명의 목이 잘렸다. 서슴없이, 아주 간단하게. 큰 칼을 휘둘러 목을 잘라냈다.

‘이, 인간 백정…’

이보다 더 어떻게 무서울 수 있을까.

“이, 이건 집문서… 노, 논문서…”

장주는 부들부들 떨며 문갑을 열고 안에 있는 것을 쏟아냈다. 두루마리 문서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어이,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저기 보자기에 싸.”

여인이 화들짝 놀라 황급히 문서를 쌌다.

“수고했어.”

방삼이 대도를 휘둘렀다. 일도에 장주의 머리가 잘렸다. 장주의 머리를 자르고 이어지는 곡선은 여인의 머리에까지 닿았다. 덩실! 여인의 머리도 허공을 날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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