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149화
“절강성, 섬서성, 하남성, 호광성…”
흑봉광괴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건 뭐가 잘못됐어’
잘못돼도 크게 잘못됐어. 중원 전역에서 이렇게 한꺼번에 살인이 일어날 수는 없다. 아니, 살인은 하루에도 몇십 건, 몇백 건씩 일어난다. 많은 사람들이 제명대로 살지 못한다. 하지만 이건 그런 죽음과는 다른 죽음, 청부살인이다. 먼저 죽이는 자들은 신분을 떳떳이 밝힌다. 살수라고. 분명히 살수라고 신분을 밝힌다. 두 번째는 청부자를 죽이든 죽이지 않든 반드시 만인들의 규탄을 받게 만든다. 누구라고는 밝히지 않았지만 청부자의 억울한 사연을 적어놓았다. 죽은 사람을 동정하는 경우는 절대 없다. 그것이 흑봉광괴가 주목한 살인들의 특징이다.
이것은 비객이나 천객이 했던 일과 같은 성격이다. 세상에 악의 씨앗을 없애 버린다는 취지와 같다. 큰 차이점도 있다. 비객이나 천객이 무림인들로부터 너무 손속이 잔인하다며 경원당하는 데 비해 이번 살인의 흉수들은 세인들로부터 속 시원하다는 칭송을 받는다. 살인은 하루에 한 건으로 고정되어 있다. 한 성에서 하루에 한 건은 반드시 일어나며 두 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거 미친놈들 아닌가!’
천외천이, 비객들이 살수를 죽이고 있다. 돈을 받고 사람을 해하는 행위는 반드시 근절되어야 한다. 의도가 좋든 나쁘든 돈과 사람의 생명이 연결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 시점에서 벌어진 살인 행각이라니… 지금 각 성에서 살인을 저지르는 자들은 천외천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세상에, 이렇게 미친놈들이 많아서야…’
많은 사람이 걱정하지만 흑봉광괴는 천외천 천객의 등장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비객까지 그들에게 흡수된 지금에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가능하다면 한 번 더 구진법을 펼쳐 더욱 많은 천객을 양성해 내고 싶다. 세상을 둘러싼 악은 소멸되어야 한다. 세상은 무공 없이도 살 수 있어야 한다.
‘어쨌든 이번 일은 알려야겠군.’
흑봉광괴는 천객에게 전서를 띄웠다.
백천의는 깜짝 놀랐다. 그가 알기로 살문은 움직이지 않고 있다. 자신이 팔부령에 들어온 지 나흘이 지났지만 살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뭐라는 전서요?”
“살인이 일어났다는군.”
“누가 죽었기에 전서까지…”
“중원 각 성에서 청부살인이 일어나고 있다는군.”
검을 만지작거리던 정운의 손길이 뚝 멈췄다. 또 한 사람, 칠성검루 소문주 진조고도 석상이 된 듯 굳어졌다.
“지, 지금 뭐라고… 중원 각 성에서 청부살인이?”
“우리 천외천에 정면으로 승부를 걸어오는 놈들이지.”
제일비주와 제칠비주, 그들은 백천의의 말에 귀를 기울일 뿐 끼어들지 않았다.
“아주 약은 놈들이야. 중원 각 성에서 동시에 살인을 저지르고 있어. 놈들은 한두 놈으로도 살인을 할 수 있지만 우린 안 그래. 하나를 잡으려면 수십 명이 움직여야 돼.”
맞는 말이다. 한 문파나 집단이 살인을 저지른다면 달려들겠지만 개개인이 돌아다니면서 살인을 저지르는 것은 걸려들기만 바랄 수밖에 없다. 한 가지 방법이 더 있기는 하다. 현재 정보를 주고 있는 개방 문도를 더욱 혹독하게 가동시키는 것이다. 다른 정보원도 가동시킬 필요가 있다. 하오문도 괜찮고 무당파나 아미파 등 개방보다는 못하지만 그들 문파가 가지고 있는 정보도 활용해야 한다. 모든 것을 일시에 가동시켰을 경우 중원은 그물에 잡힌 고기를 건져내듯 한 명, 두 명 척살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살문부터 쳐야겠군. 그런 다음…”
백천의는 대래봉을 노려보았다.
“시주, 걸음을 멈추시오.”
백천의는 걸음을 멈췄다. 팔부령에서 선장을 비켜 들고 있는 승려. 익히 아는 사숙이다. 혜온 사숙. 금강장의 달인으로 일장에 만 근 거력을 실어내는 초절정 고수다. 칠십이단승, 지금은 육십칠단승이 되어버린 소림 최강 고수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시주, 정중히 권고하겠소. 돌아가시오.”
“후후! 못 하겠다면?”
칠성검문의 진조고가 비웃음을 띄었다. 백천의와 정운의 얼굴에 못마땅한 기색이 떠올랐으나 곧 사라져 버렸다. 지금은 이런 강경수를 동원해서라도 뚫고 나가야 한다.
“아미타불! 시주, 소림을 너무 약하게 보지 마시오. 돌아가기를 정중히 권하겠소.”
“그런가? 그럼 한번 보지.”
스르릉…!
진조고가 검을 뽑아 들었다.
“잠깐!”
백천의가 앞을 가로막았다. 혜온 사숙이 소림 최강 고수라고는 하지만 진조고와 맞부딪쳤다가는 죽음을 면치 못한다. 그것이 백천의의 판단이고, 아마도 옳을 게다. 그는 소림과 등을 돌리기는 했지만 이런 식으로 상황이 나빠지는 것은 원치 않았다.
“사숙, 물러서 주시지요.”
백천의가 합장하며 정중히 말했다.
“시주, 아미타불! 소승, 방장님 명으로 지키고 있소이다. 소승을 베고 넘어갈 수는 있어도 비켜 드릴 수는 없소이다.”
혜온 대사는 백천의와의 관계를 명확히 했다. 전 같으면 ‘시주’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사질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제 소림사룡은 소림과 무관하다는 것을 확실히 못 박는 말이다. 또한 그 말은 조만간 소림으로부터 파문령이 내려올 것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정말 답답하군.”
백천의는 아주 잠깐 망설였다. 소림을 가볍게 보면 안 된다. 백팔나한, 육십칠단승… 그들을 이끌고 있는 혜명 대사까지 일대일의 승부라면 누구든 꺾을 자신이 있다. 소림에는 진법이 있다. 육십칠단승은 백팔나한은 아니더라도 백팔나한진을 전개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연수 합격한다면… 상황을 다르게 봐야 한다. 진법을 모르는 사람이 두 명, 세 명 모여 합격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그것도 자신 있다. 솔직히 지금은 누구와 맞선다 해도 베어 넘길 자신이 있다. 하지만 소림 백팔나한, 소림 육십칠단승을 베어 넘긴다면 천하무림이 공분을 산다. 봉문했지만 소림은 아직도 천하무림의 정신적 지주다. 이들을 죽인다면 흉산악살을 도륙한다 해도 마도 무리로 낙인찍힌다.
백천의는 공갈을 쳤지만 통하지 않았다. 그는 곧 행동을 결정했다.
“사숙, 혜명 사숙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사숙, 살문을 치겠습니다.”
“아미타불! 시주, 살심을 거두시오.”
이제는 혜명 대사까지 ‘시주’라는 말을 사용한다.
“소림이 막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미타불!”
“살문을 보호하는 이유나 들려주시겠습니까?”
“한 가지를 알고 싶소? 두 가지를 알고 싶소?”
“열 가지라도 알고 싶습니다.”
“한 가지만 알려 드리리다. 살문은 팔부령을 벗어나지 않았소. 그들이 팔부령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대래봉에서 내려오는 길뿐이오. 다른 길이 있다면… 시주께서 그 길로 공격하는 것까지는 상관하지 않겠소이다.”
결국 살문이 대래봉을 벗어나지 않았으니 소림이 공격할 수 없다는 뜻이다. 또한 대래봉으로 올라가는 무림인도 막겠다는 의사 표시다.
백천의는 한참 동안 혜명 대사를 쳐다본 후 일어섰다.
“왜 살문을 비호하는지 모르겠지만… 후회하실 겁니다. 좋습니다. 살문 살수들이 내려오는 길을 찾아내죠. 그때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 보겠습니다.”
“아미타불!”
백천의는 찬 바람 나게 몸을 돌렸다.
‘사질… 소림이 왜 살문을 비호하겠는가. 소림 오선사가 열반에 드셨는데… 사질이 소림 무공으로 상대하려 했다면 길을 터주었을 것이네. 살문은 반드시 소림 무공으로 꺾어야 하니까. 허허허! 소림 무공을 버린 소림 제자라니…’
백천의는 혜명 대사의 속삭임을 듣지 못했다.
백천의는 비적마의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웨에엥…!
한여름이라서인지 개미들은 기승을 부렸다. 백천의는 비적마의 앞에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기다렸다.
위에엥…!
비적마의가 날아와 손 위에 살짝 내려앉았다. 순간 ‘타악!’ 하는 소리가 울려 나왔다. 정말 소리가 들린 것은 아니다. 비적마의의 모습이 꼭 그런 소리를 냈을 것 같았다. 손 위에 앉아 있던 비적마의는 튕겨 나갔다. 발로 차버린 것같이, 손가락으로 튕겨낸 것 같다.
백천의는 또 기다렸다. 한 마리, 두 마리… 비적마의의 숫자는 늘었다. 물리기만 하면 전신을 마비시키는 개미다. 그러나 구진법을 통과한 천외천 천객에게는 아무 효과도 주지 못했다. 비적마의는 끊임없이 날아들었지만 몸에 닿자마자 무형의 벽에 막힌 것처럼 튕겨 나갔다.
“사방이 뚫렸군. 얼마든지 공격할 수 있겠어.”
백천의가 중얼거렸다. 그는 오기가 치밀었다. 살문을 공격하는 것은 급하지 않다. 이미 목숨줄을 움켜잡고 있으니 서두를 필요도 없다. 혜명 대사에게 말한 것처럼 살문 살수들이 내려오는 길목을 찾아내서 도륙할 심산이다. 그런 연후 혜명 대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고 싶다.
“비적마의를 통과하는 방법이 벌써 세 가지가 나온 셈인가? 후후! 살문도 방법이 있겠지. 진조고, 팔부령 공기 좀 마시지 않겠나? 정운이 같이 있어줘. 진조고 혼자 놔두면 혈풍이 불 거야.”
“그러지”
정운이 대답했다.
“우리도 남지. 팔부령은 넓으니까. 흔적을 찾으려면 많은 사람이 필요할 거야.”
비객 제일비주가 말했다. 그가 남겠다고 한 것은 혼자만이 아니라 제일비 아홉 명과 제칠비 아홉 명 모두를 말한다. 백천의는 만류하지 않았다. 그는 오기가 치밀었다.
백천의는 팔부령에서 모자도로 황급히 달려왔다. 살문도 급하지만 중원 전역에서 벌어지는 살겁은 더욱 시급했다. 이번 살인은 다른 살인들과 전혀 다르다. 사람을 죽이면서도 사람들의 박수를 받고 있다. 돈을 받고 사람을 죽이는 데 모든 사람이 좋아한다. 이런 살수는 자칫 ‘의적’으로 생각되기 쉽다.
흑봉광괴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는 개방도를 최대한으로 풀었다. 병에 걸려 자리에 누워 있는 개방도를 제외하고는 모두 정보 수집에 동원시켰다. 초점은 단 하나. 누가 청부살인을 하는가. 청부는 어디서 접수하며, 살인자는 누구이며…
“어떻습니까?”
“아무 소득도 없네.”
“청부는 어디서 이뤄집니까?”
“글쎄… 그게 전혀 감도 잡히지 않는단 말이지.”
“빨리 찾아내야 합니다.”
“하오문도 동원하는 것이 어떤가? 보아하니 이번 살수는 약한 자의 편이라는 공통점이 있지. 약한 자… 하오문이지 않나?”
백천의는 퍼뜩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야이간은 취국을 버리지 못했다. 천 노인의 돈만 움켜쥐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리려고 했는데 그게 여의치 않았다. 취국의 목에는 손을 댈 수 있는데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보드라운 살결을 만지는 순간 비옥한 동혈이 떠오르며 정신없이 빨려 들어갔다.
‘천수를 누리려면 이 계집부터 죽여야 돼.’
생각뿐이다. 정사를 가진 후에도 늘 반복되는 생각이지만, 어느새 몸에 익을 대로 익어 살 내음까지 묻어났다. 취국을 죽이지 못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양물 때문이다. 양물에 이상이 생겼다. 취국에게는 제 기능을 십분 발휘하면서 다른 여인 앞에서는 오뉴월에 늘어진 버들가지처럼 축 늘어져 일어서지 않았다. 입으로도, 가슴으로도… 두 명, 세 명을 동원해 봐도 기운 잃은 성기는 일어서지 않았다.
여자 없이 살 수 있을까? 살 수야 있겠지만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은 세월이 되리라. 무슨 낙으로 산단 말인가. 세상에 즐기는 단 하나가 여자인데. 야이간은 자신의 물건에 맞는 여자를 구하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세상에 여자는 많지만 그를 사내로 만들어주는 여자는 단 한 명뿐이다. 현재까지는. 또 한 여인, 생각나는 여인이 있기는 하다. 팔부령 칠성각에서 자극적인 쾌락을 선물해 준 앵앵. 시녀에 불과한 계집이지만 그녀를 떠올릴 때도 양물이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모험은 할 수 없다. 다른 계집을 품었을 때도 양물이 정상적으로 발기하는 것을 확인한 후에 취국을 죽여도 늦지 않다. 아니, 그때는 반드시 죽인다. 멀쩡하던 양물을 반병신으로 만들어놓은 계집이다.
야이간은 오밤중에 찾아온 손님을 보다 가래침이 솟구쳤다.
“퉤엣!”
결국 대청 바닥에 가래침을 뱉어냈다.
“후후후! 잘 사는군. 역시 야이간이야.”
찾아온 손님은 하후가주다.
‘이 작자… 언제까지 내 숨통을 옭아 쥐고 있을 참이야! 차라리 죽여 버려!’
자신의 진면목을 알고 있는 자들은 모두 죽었으면 좋겠다. 죽지 않으면 죽이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너무 많아서 탈이지만.
“오셨습니까?”
야이간은 최대한 공손하게 응접했다.
‘빌어먹을! 어쩐지 일이 척척 풀려 나간다 했지.’
“야심한 시각이라 차밖에 준비 못 했습니다. 술을 준비하기에는…”
“이거면 됐어. 술 얻어먹자고 온 게 아니니까.”
하후가주는 마치 몸종을 다루듯이 한다.
“용건만 말하지.”
“네”
“현재 중원에서 일어나고 있는 살인에 대해서 알아봐줘. 기한은 십 일이야.”
“저, 가주님, 그 일은 지극히 은밀히 진행되기 때문에…”
야이간도 알고 있다. 숨죽이던 살수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그들은 한결 정교해졌고, 은밀해졌다. 종적을 잡아내기 힘들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방식으로는 잡을 수 없다. 환히 꿰뚫어 보고 있을 테니까.
“십 일이야. 십 일 안에 알아놔야 될 거야.”
하후가주가 일어섰다. 야이간은 그제야 하후가주의 등 뒤에 서 있는 사내를 보았다. 사내가 돌아서며 씩 웃었다.
‘강자다! 엄청난 고수다!’
야이간은 긴장했다. 손발이 파르르 떨렸다. 하후가주의 무공에 상당히 놀랐지만 이렇지는 않았다. 그런데 떨린다. 마음보다 몸이 먼저 상대를 알아보고 있다.
하후가주의 뒤를 이어 사내가 말했다.
“십 일 후에는 내가 찾아오지. 넌 진작 죽었어야 해. 야이간, 묵월광의 살수. 그것만으로도 죽을 이유는 충분하지.”
“처… 천외천.”
천외천은 사람들 입을 통해 퍼지기 시작했다. 천외천이 알려지니 구대문파에서 극비리에 진행시켰던 비객의 존재도 알려졌다. 천외천과 비객의 존재는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누가 천외천 인물이며, 누가 비객인지는 아직도 비밀 속에 가려져 있지만 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은 기정사실화되었다.
천외천과 비객의 존재가 알려진 것은 백천의의 생각이 구대문파의 뜻과 다른 점도 큰 몫을 했다. 그들은 안으로 숨을 생각이 없었다. 구대문파야 체면을 생각해야 하니 은밀하게 비객 같은 존재를 만들었겠지만 천외천은 악을 징벌하면 그만이다. 문파로부터 버림받는다 해도, 자신의 명성에 먹칠이 된다 해도 상관없다. 천외천은 모든 것을 버린 사람들이다. 세상에 남은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이다. 숨을 이유가 없다.
“한마디를 더 해야겠군.”
“처… 천객.”
야이간은 사내의 정체를 쉽게 짐작해 냈다.
“그래, 내가 바로 천객이지, 너 같은 놈을 죽이는.”
야이간은 환상을 봤다. 자신의 허리가 잘리고 머리가 열십자로 쪼개졌다.
‘빌어먹을!’
야이간은 허리를 굽혔다.
“말씀대로…”
“무릎 꿇어.”
야이간은 고개를 힐끔 들어 사내를 쳐다보다 무릎을 꿇었다.
“손을 앞으로 쭉 뻗고.”
오체투지를 하라는 말이다. 노예가 되라는 말이다. 야이간은 손을 쭉 뻗었다.
‘내 인생도 참 더럽군. 어디서 이런 놈이 나타나 가지고…’
“하하하! 팔부령의 영웅치고는 초라한 모습이군. 똑똑히 들어라. 야이간. 이게 네 모습이야. 절대 잊어버리지 말도록.”
사내가 찻잔을 들어 야이간의 머리에 쏟았다. 뜨거운 찻물이 머리를 적셨다.
‘으음…! 흐흐흐! 이 야이간에게… 야이간에게…’
사내의 냉혹한 음성이 뒷머리를 두들겼다.
“십 일이야. 십 일 안에 개방보다 더 많이, 더 깊게 살수들에 대해서 알아내. 그렇지 않으면 넌 죽어.”
사내와 하후가주가 돌아간 후 야이간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지금 심정 같아서는 누구든지 보는 즉시 죽여 버릴 것 같았다. 설혹 취국이라 할지라도.
‘늙은이… 늙은이 수작에 꼼짝없이 말려들었군.’
야이간은 천 노인이 왜 순순히 모든 상권을 내줬는지 이해했다. 그동안 풀리지 않아 마음 한구석을 찜찜하게 만들던 문제다. 천 노인은 드러났다. 묵월광의 자금원으로 천 노인이 지목되었고 벌써부터 심한 감시를 받아왔다. 단지 구대문파가 천 노인을 내버려 둔 것은 그의 자금이 어디서 시작해 어디서 끝나는 줄 몰랐기 때문이다.
천 노인은 자금을 움직이지 않았다. 일점으로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상권을 망하면 망하는 대로 흥하면 흥하는 대로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묵월광은 한술 더 떠서 천 노인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묵월광이 천 노인을 움직였으면, 천 노인도 자신의 상권을 움직이지 않을 도리가 없다. 잡아 가둔다고, 고문을 한다고 불 사람들이 아니다. 천 노인 같은 경우는 잡히면 순간 혀를 깨물고 죽을 위인이다.
그런 마당에 야이간이 뛰어들었으니 얼마나 좋았을까? 얼씨구나 좋다 하고 넘겨주었겠지. 야이간은 상권을 움직였다. 구대문파는 움직이는 상권을 그림자처럼 쫓았다. 아니, 지금도 쫓고 있을 게다. 완벽히 움직이는 데는 보름이 걸린다. 천 노인의 상권은 그만큼 넓고 크다. 오죽하면 중원 제일 갑부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올까. 정말 그렇지는 않더라도 상당히 재산이 많은 것만은 틀림없다.
천외천은 묵월광에게 천객 한 명을 잃었다. 그들은 지켜보고 있다. 상권이 움직이는 모습을, 자금이 묵월광에 흘러드는 모습을… 결국 상권은 야이간에게 고정될 터이니… 죽는다, 그때는.
천외천은 묵월광이 드러나거나, 아니면 묵월광과 완전히 분리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자신을 죽일 게다. 그날은 앞으로 며칠 남지 않았다.
‘십 일이라고? 내가 바본 줄 아나?’
앞으로 십여 일이면 천외천도 알게 된다. 야이간과 묵월광은 연관이 없다는 것을. 천 노인의 상권을 가로챈 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행동이었다는 것을. 천 노인과 소고도 괘씸했다. 그들이 자신의 행동을 읽었다. 자신이 천외천을 붙잡고 근 한 달 동안 씨름하는 동안 그들은 유유히 활로를 모색하리라. 아니다, 지금쯤은 벌써 활로를 모색했고 빠져나갈 대로 빠져나갔다.
‘내가 미끼였군. 바보같이…’
야이간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다. 소고가 어디로 갔을까? 모든 것을 다 잃은 상태에서 버틸 힘이나 남았을까? 천 노인의 재산을 미끼로 던지고 도주할 곳이라면…
‘살문이야!’
그곳밖에 떠오르는 곳이 없다.
‘모두가 살문 짓이야. 살문 종리추!’
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