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152화
쒜엑! 쒜에엑…!
느닷없이 닥쳐오기 시작한 검풍은 여간해서 끝나지 않았다. 놈들은 악착같이 따라붙었다. 객잔으로 가면 객잔으로, 숲으로 가면 숲으로, 산으로 가면 산으로… 놈들은 두 여인의 몸에 천리향이라도 피워놓은 것처럼 냄새를 잘도 맡고 찾아왔다.
“오늘은 힘들겠어.”
소고가 중얼거렸다. 지금껏 용케도 피해 왔지만 더 이상은 힘들 것 같다. 이상한 것은 종리추다. 종리추는 마치 이런 상황을 예측한 듯 명령을 내렸다. 처음 공격은 어디서 시작될 것인지, 공격을 받으면 어디로 물러설 것인지… 이상하게도 그가 한 말은 들어맞았다.
귀신이 씌운 사람이라 앞일을 예측하는 것인지… 생각해보면 이상할 것도 없다. 그가 지시한 살인은 사람들을 한 방향으로 모으고 있다. 개방 문도나 야이간이 동원한 상인 집단은 모두 한 방향으로만 추적하면 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두 여인의 살인은 언추에서 시작해 조밀로 향하고 있다. 일로북진하고 있는 것이다. 지도를 펼쳐 놓고 줄을 그어보면 곧장 일직선이 그어진다. 그런데도 다음 살인 장소를 예측하지 못한다면 개방과 야이간은 멍청이나 다름없다. 종리추는 그것을 미리 읽은 것뿐이다. 아니, 유도해 낸 것이다.
“언니, 지금부터는 마음껏 싸워도 돼. 여기가 천음이야.”
“벌써 천음까지 왔나?”
“천음까지만 끌어들이면 된다고 했으니 이제 우리가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봐야지.”
“그게… 힘들 것 같아.”
소고는 어둠 속을 노려보았다. 소고가 머물고 있는 야산은 야트막하지만 사방을 훤히 내다볼 수 있다. 이런 지형을 쉽게 찾아내는 것도 장기다. 살문 살수에게 배운 비기 중 하나. 살문 살수들은 이런 지형을 찾는 데 아주 특이한 재능을 지니고 있다. 백전을 치르면서 꾸준히 지형을 분석한 탓이리라. 덕분에 나중에 합류한 묵월광 살수들은 힘들이지 않고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지형 찾는 법을 배웠다.
지금 지형은 아주 좋다. 적은 아래에서 올라온다. 올라오는 길은 한 군데. 이쪽은 도주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후방 다섯 곳 중 한 곳을 선택할 수 있다.
소고가 노려보는 곳… 그곳은 지형이 아니다.
“아!”
소여은이 검을 뽑아 들며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상대는 소여은으로 하여금 그런 행동을 하게 만들었다.
“어디에서 온 것들인지 말한다면… 목숨은 부지시켜 주지.”
마치 자신의 주머니 속에 든 목숨처럼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사내. 사내의 오른쪽 허리에는 검이 매달려 있다. 왼쪽 허리에는 도가, 등에는 기다란 창이 보인다. 과거, 이런 모습을 한 사람 중 유명한 사람이 있었다. 삼절기인. 현재, 이런 모습을 한 사람 중 유명해진 사람이 있다. 삼절수가 정군유. 천외천 천객 중 한 명이다.
소고와 소여은은 그를 본 적이 있다. 그는 야시장에서 사령 살수 십이도객 중 한 명을 간단하게 찔러 죽였다. 창으로. 정군유가 팔짱을 낀 채 걸어왔다.
‘피할 곳 없어. 사방이 비객이야.’
비객이 얼마나 동원되었는지 모르겠다. 비망신사의 말로는 구파에서 열 명씩 선발했다니 구십 명이고, 아홉 명이 일조이니 모두 십 조다. 그중 이곳에 온 비객은 몇 명이나 되는가.
“말했다. 어디서 왔는지 말한다면 목숨은 부지시켜 주겠다고.”
소고가 뒷걸음질해서 소여은에게 왔다.
“날 업고 뛸 수 있겠어?”
“언니를?”
“빨리 말해!”
“응”
“좋아, 그럼 일검이 교차하는 즉시 나를 낚아채. 아니면 난 죽어.”
“아, 알았어.”
“뒤도 돌아보면 안 돼. 무조건 뛰어. 내 몸에 칼이 들어와도 돌아보지 마. 무조건 업고 뛰어. 알았어?”
“응.”
소여은은 불길함을 느끼면서도 일말의 희망을 가졌다. 천객의 무공이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것은 이미 여러 번의 싸움을 통해 입증되었다. 하지만 소고의 무공도 만만치 않다. 사무령을 넘볼 만큼 강하다.
‘언니는 이길 수 있어!’
고오오오…!
말없는 싸움은 벌써부터 시작되었다. 정군유는 무방비 상태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소고는 검을 뽑아 들고 있는데 그는 병기조차 뽑지 않았다. 두 걸음 정도를 남겨놓았을 때에야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도를 뽑아 들었다. 일도에 죽이기로 작정한 것이다. 소고는 죽일 테면 죽여보라는 듯 검을 들고는 있지만 기수식을 취하지는 않았다.
쒜에엑…!
결국 정군유가 먼저 공격을 시작했다. 천객이 된 이후로 먼저 공격을 시작한 적은 이번이 처음일 게다.
‘날.. 정말… 죽일 거야?’
정군유의 도가 멈칫했다. 그 순간 소고의 검이 날았다. 소리도 없고, 경기도 발출되지 않은 음유한 검이다.
스으윽! 쒜이엑…!
정군유는 뒤늦게야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다. 다른 때 같으면 죽음으로 이어질 실책이다. 하지만 구진법을 겪은 사람에게는 다른 길이 열린다. 실책을 자각했다는 것은 활로를 찾은 것과 진배없다.
쒜에엑…!
소고의 검은 중간에서 막혔고, 정군유의 대도는 가슴을 후려쳐 핏물을 빨아들였다.
‘아아! 나 죽을 것 같아. 가만히 내버려 두어도 죽는데 왜 꼭 이렇게 잔인하게 죽이려는 거야?’
‘살려줘. 살고 싶어. 살려줘!’
‘오라버니, 정말 날 죽이실 거예요? 그런 거예요?’
소여은은 끝없는 환청에 시달렸다. 소고를 업고 뛴다는 것은 여간 고통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녀의 몸은 종이짝처럼 가볍다. 그녀가 무거워서 절대 아니다. 다만 그녀가 뿜어내는 요사한 기운이 다리에서 힘을 빼앗아간다.
‘무슨 놈의 혈뢰삼벽이 이래…’
소여은은 정신없이 뛰었다. 등이 축축했다. 소고가 흘린 피는 결코 적은 양이 아니다. 지혈을 할 사이도 없이 가슴에서 폭죽이 터지는 것을 본 즉시 낚아채 달렸으니 현재로도 중한 상태일 게다. 그래도 계속 달리고 또 달렸다. 비객으로부터, 정군유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경공밖에 없다.
소고와 소여은은 움직이는 데 상당한 불편을 느꼈다. 소여은이 자란 곳은 어산열도다. 소고가 자란 곳은 하남성이다. 두 사람 모두 호광성과는 거리가 멀다. 호광성 사람들은 말끝이 휘어지는 묘한 어투를 구사하는데 두 여인은 그것이 잘 되지 않는다. 애당초 여인이 아니었다면, 면사로 얼굴을 가려도 용모가 돋보일 만큼 뛰어난 미모를 지니지 않았다면 걱정할 필요도 없는 부분이지만 이제 세심한 부분까지 모두 신경 써야만 한다.
하기는 이제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앞에는 무심한 강이 흐르고 있다.
“어디로 갈까?”
소고가 힘없이 물었다.
“무조건 강을 건너야지 뭐.”
급박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 소여은은 더 신난다. 그녀의 뱃속에는 두 사람이 사는 것 같다. 소여은과 적각녀. 아무 일이 없을 때는 소여은이고, 지금처럼 상황이 급박해지면 적각녀가 되어 무서운 투지를 일으킨다.
소여은은 부지런히 강가를 헤집고 다녔다.
“언니, 괜찮아?”
“아직은…”
소고의 음성이 평온해졌다. 소여은은 문득 불안해졌다. 이러다가 혹시 잘못되는 것은 아닌지.
“잠시 좀 쉬어야겠다.”
소여은이 등에 업고 있던 소고를 내려놨다. 소고의 앞가슴은 붉은 피로 가득했다. 얼굴은 백지장보다 창백했고 입술은 검게 죽어간다.
“언니!”
“괜찮아, 심맥은 비켜갔어. 후후! 혈뢰삼벽이면 될 줄 알았는데… 안 되네.”
“거의 될 뻔했어. 잠시 멈칫거렸다고.”
“그랬지?”
소고의 눈가에 기쁨이 일렁거렸다.
‘위험해! 좋지 않아!’
소여은은 터지려는 울음을 간신히 억누르고 가슴부터 지혈시켰다. 대도는 왼쪽 가슴 위에서 시작해 오른쪽 가슴 아래로 흘렀다.
‘아아! 신이시여, 제발!’
소여은은 평소 찾지 않던 신까지 찾았다. 신이 존재하는가?
삐걱! 삐이걱…!
여인의 비단결처럼 칠흑같이 어둡기만 하던 강물이 움직였다. 근처에 사는 누군가가 강 건너에 다녀오는 듯 노 젓는 손놀림이 급하지 않다.
소여은은 강가에 숨어 노 젓는 소리를 쫓았다. 비객이 유인하는 것일 수도 있다. 또 비객과 자신과 똑같은 소리를 듣고 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비객이면 어느 정도 피하겠는데 정군유가 있다면… 틀렸다.
삐걱! 삐걱…!
배가 가까이 다가왔다.
휘익! 쉬이익…!
배에서 느닷없이 검풍이 일었다. 지금까지 느릿하게 다가온 것과는 사뭇 다르게 재빠른 경공들이다.
‘역시 비객!’
소여은은 소고를 부여잡고 깊이 몸을 숨겼다. 그런데… 무엇인가 그녀를 노려보고 있다. 소여은은 꺼림칙한 기분에 눈을 들어 앞을 봤다.
‘이런! 깜짝 놀랐잖아!’
소여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겨우 고양이 한 마리 때문에 놀라다니.
야옹! 야아옹…!
고양이도 놀랐는지 소여은을 보고 울어댔다.
‘이런! 안 돼!’
마음속 절규는 이미 늦었다. 배에서 신형을 날린 자는 벌써 그녀와 일 장 떨어진 곳까지 다가왔다.
“그만 나와. 가지.”
사내의 음성을 듣는 순간 소여은은 벌떡 일어섰다.
“네놈은 누구냐!”
정군유는 여유롭지 못했다.
“남들이 그러더군, 살문주라고.”
“후후! 네놈이군. 오늘 대어가 걸렸어. 아주 좋아. 그래, 남들이 살문주라고 한다면 네놈은 뭐라고 생각하는데?”
“사무령.”
“뭐?”
“젊은 나이에 벌써 가는귀가 먹다니…”
“하하하! 천방지축이 따로 없군. 사무령이라.. 내 듣기로 사무령은 살수들의 신이라던데 언제 사무령이 동네 강아지들이 물고 다니는 뼈다귀가 되었지?”
“빨리 하지.”
“뭐?”
“환자가 있어서 말야. 치료를 해줘야 하거든.”
정군유는 침착하게 걸어왔다. 안하무인 격으로 뚜벅뚜벅 걸은 것이 아니라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종리추가 말했다.
“구진법을 익혔다고 들었는데… 그거 별거 아냐. 그 정도가 구진법이라면.. 미안하지만 난 열 살 때 구진법을 통과했지.”
“뭐!”
놀라는 순간은 극히 짧았다. 하지만 종리추가 달려들어 검을 쳐내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불행히도… 정군유는 너무 가까이 다가왔으면서도 병기를 뽑지 않았다.
사각!
“크윽! 비, 비겁…하게…”
“용두방주를 죽일 때는 더욱 비겁했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천객은 비겁하다는 말을 할 수 없어.”
종리추는 신형을 돌렸다.
쒜에엑…!
정군유의 공격은 끝났지만 다른 사람의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 아홉 방위에서 일시에 몰아쳐 오는 기세는 피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만들었다.
“분광십팔검! 점창파의 무공이군!”
종리추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점창파 무인이 나가떨어졌다. 그의 이마에는 비수 한 자루가 자루까지 깊숙이 박혀 있었다.
“암기다!”
누군가 소리쳤다. 하지만 늦었다. 종리추는 이미 살심을 일으켰다. 무서운 분노가 전신에서 솟구쳐 나왔다.
파앗! 파파파파팟!
전신에서 화려한 불꽃이 터졌다. 수많은 물고기들이 햇살에 모습을 드러낸 것 같이 아름답게 반짝였다.
‘아름다워…!’
소여은은 감탄했다. 무공을 펼치는 데 아름답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결과는 결코 아름답지 못했다. 먼저 죽은 점창파 무인을 제외한 여덟 명이 강한 철퇴로 두들겨 맞은 듯 튕겨 나갔다. 곧 그들의 전신은 피가 솟구쳤다. 한두 군데서 솟구치는 피가 아니라 전신 곳곳에서, 적어도 십여 군데 이상 되는 곳에서 솟구쳤다.
‘너무 빨라, 너무…’
소여은은 종리추가… 솔직히 인간 같지 않았다.
소고의 나신은 아름답다. 칠흑같이 검은 강물 위에서 새초롬히 수줍은 듯 고개를 드러낸 달빛 사이로 드러난 나신이라 더욱 아름답다.
종리추는 혈도를 짚어 지혈부터 시킨 후 헝겊에 강물을 찍어 혈흔을 깨끗이 닦아냈다. 아름다운 가슴 사이로 기다란 선이 그어졌다. 금창약을 뿌리고 마른 헝겊으로 상처를 동여맸다. 손길 하나하나에 정성이 깃들었다.
“이리 올 줄 알고 있었어?”
“왜… 부딪친 거야?”
종리추는 엉뚱한 말부터 물었다.
“언니가 그랬어. 혈뢰삼벽이면 될 줄 알았는데 안 되더라고.”
“후후! 소고답군.”
“우린 이제 어디로 가는 거야?”
종리추는 대답하지 않았다. 모진아와 유구가 느긋하게 노 젓는 소리가 강물 위에 은은하게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