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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161화


‘오, 사.’

육방은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따르륵……! 탁!

옆 탁자에서 부지런히 주사위 통을 흔들던 자가 탁자 위에 통을 엎었다. 그가 주사위 통을 들어 올리자 소뼈를 깎아 만든 주사위 두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숫자는 육방이 마음속으로 되뇐 오와 사다.

“하하! 또 이겼군. 이거 오늘은 재수가 좋은데?”

사내는 연신 낄낄거리며 판돈을 끌어왔다. 육방은 고개를 돌렸다. 한참 주사위 놀음에 열을 올리고 있는 염충은 뛰어난 사기꾼이다. 그는 사기를 치지 않기 때문에 뛰어나다. 그와 이야기만 나눠도 동전 몇 푼쯤은 뜯기게 될 게다. 하물며 이렇게 탁자를 마주하고 앉아 주사위 놀음을 한다면 틀림없이 있는 돈 없는 돈 모두 뜯기게 된다.

사람들은 그가 무슨 수작을 부리지는 않는가 하고 눈알을 번뜩인다. 돈을 잃어도 단 한 번만 수작 부리는 것을 잡아내면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릴 수 있으니까. 그런다고 딸 돈을 못 딸 염충이 아니다. 그는 어쭙잖은 수작은 부리지 않는다. 주사위라면 눈 감고도 마음먹은 대로 굴려낼 수 있는 달인이다.

육방은 그 정도까지는 되지 못하지만 무엇이 나올지는 짐작할 수 있다. 주사위에는 옥으로 만든 것, 나무로 만든 것, 지금처럼 뼈로 만든 것 등 종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어느 재질로 만든 주사위든 소리만 들으면 짐작해 낼 수 있다.

사람들은 알아야 한다. 노름에는 결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금은 염충이 사람을 잘 만나 날고 뛰지만, 그보다 한 수 높은 노름꾼이 나타나면 세상에서 가장 쉬운 먹잇감이 될 게다.

“사!”

돈을 잃은 사내가 무덤덤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가 잃은 돈은 적지 않지만 이미 돈에 대한 감각이 죽어버렸다. 다른 사람 앞에 쌓인 돈도, 자신이 가진 돈도 모두 나무 조각과 다름없는 한낱 물체에 지나지 않는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돈이 아니다. 노름판은 원래 이렇다.

따륵! 따르륵……!

이번에는 염충이 먼저 주사위 통을 흔들었다. 주사위에서 최고 숫자는 육, 주사위가 둘이니 도합 십이가 최고 숫자다. 그중 돈 잃은 사내가 사를 빼자고 했으니 팔이 최고 숫자가 된다. 이번 주사위 놀음의 규칙은 최고의 숫자를 팔로 한다.

사에 사가 나오면 팔, 최고 숫자다. 육에 이가 나와도 되고 오에 삼이 나와도 최고 숫자를 가진다. 최고 숫자를 넘으면 탈락한다. 오에 사, 도합 구는 탈락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일에 일이 나와 이를 가지는 편이 낫다.

‘육, 일.’

육방은 속으로 웃었다. 상대에게도 기회는 균등하게 있으니 팔이 나오지 말란 보장이 없지만 실제로 나올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그래서 종종 이렇게 조금 양보하는 경우가 있다. 실력을 숨기기 위해서.

‘응?’

육방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딸그락, 딸그락……

염충이 주사위 통을 내려놓지 않고 계속해서 흔들어대고 있다. 당연히 숫자는 계속 변한다.

‘사에 삼, 칠. 육에 육, 십이? 삼에 이, 오……’

딸그락, 딸그락……

‘육에 일, 칠. 사에 삼, 칠. 육에 육, 십이. 삼에 이, 오…… 칠칠십이오!’

따르륵, 따르륵……!

염충은 계속 주사위 통을 흔들어대고 있다. 육방은 염충을 돌아보지 않았다.

‘칠칠이십오. 칠칠십이오……’

그는 부지런히 눈알을 굴렸다. 가급적 태연하려고 애를 썼지만 긴장으로 심장이 터져 버릴 듯 부풀어 올랐다.

‘침착… 침착해야 돼. 절대 침착.’

육방은 전낭을 꺼내 돈을 헤아렸다. 그가 가진 돈은 백 냥 정도. 노름판에 끼어들기에는 어중간한 돈이다. 큰 판에 끼어들기에는 너무 적고 적은 판에 끼어들기에는 많다.

“제길! 오늘은 토끼장이 없네.”

육방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토끼장이란 노름꾼들의 은어로, 닭장보다는 고급스러운 판을 가리킨다. 염충이 끼어든 판처럼 주사위 한 번에 오십 냥 이상이 오가는 큰 판은 ‘구름판’이라고 한다. 보통 사람들은 결코 잡을 수 없는 구름, 하늘에 떠 있는 구름 위에서 노니는 사람들이란 뜻에서.

따르륵…… 탁!

드디어 염충이 주사위 통을 내려놨다. 그가 내려놓은 숫자는 일에 이, 삼이다. 가장 적은 숫자 중 하나다. 그렇다고 포기할 필요는 없다. 육에 삼부터 육까지, 상대가 팔 이상을 펼쳐 놓을 가능성은 많으니까.

따르륵, 따르륵……

맞은편 사내가 주사위 통을 받아 들어 흔들어댔다. 육방은 염충이 내려놓은 주사위에 잠깐 눈길을 멈췄다가 도박장 내를 훑었다. 그가 원하는 판은 방금 전에 혼잣말로 중얼거렸듯이 토끼장이다.

‘삼…… 삼……’

염충은 ‘삼’을 토해냈다. 칠칠이십오 다음에 재뱉은 삼은 ‘빨리’라는 재촉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이럴 때일수록 천천히 해야 한다.

“병아리라도 몇 마리 잡아먹지 그래? 놀면 뭐 해? 그러나저러나 낯이 선데…… 어디서 왔어?”

이름도 없이 단지 천수라고만 불리는 자가 말했다. 도곤은 절대 도곤끼리 맞붙지 않는다. 그럴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럴 때는 돈을 대주는 물주가 따로 있다. 자신의 돈으로 노름판에 끼어들 때는 가급적 도곤이 있는 곳은 사양한다.

육방과 천수는 처음 만났다. 천수가 말을 걸어온 것이 첫 대면이며 이전에 말을 건네거나 뒷조사를 한 적은 없다. 하지만 첫눈에 서로 상대가 뛰어난 도곤임을 알아보았다. 하오문이 운영하는 도방에 들락거릴 수 있는 도곤은 하오문 문도뿐이다. 하오문 문도가 아니면서 손놀림을 잘못했다가는 손목이 잘린다.

육방은 천수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도방에 들어설 적에 하오문의 밀마를 전해주었으니 그것으로 싸움이 일어날 소지는 방지했다. 그것보다는 천수에게 신경 쓸 겨를이 되지 못한다.

‘너무 급해, 너무……’

사방을 두리번거린다거나 문 쪽을 힐끔거리는 어수룩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혼자 깊게 생각하는 티도 내지 않았다. 그의 눈은 연신 노름판을 쫓았다.

타르륵…..탁!

염충 맞은편에 앉아 있던 사내가 주사위 통을 내려놓았다. 정말 오늘 염충은 억세게도 운이 좋은 날이다. 도합 삼을 까놓고도 백 냥이나 되는 거금을 움켜잡을 수 있으니. 상대방이 내놓은 주사위는 오와 사, 도합 구다. 숫자를 하나만 적게 말해 ‘삼’을 불렀더라면 최고 숫자를 건졌을 텐데.

“이런! 먹었다 싶었는데…… 역시 안 되겠군. 도곤을 상대로 노름을 하는 놈이 미친놈이지. 역시 노름만은 안 돼.”

상대가 마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사태가 정말 급박해졌다. 육방은 그럴수록 움직이지 못했다. 움직이면 안 된다고 계속 경종을 울리고 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천수라는 자는 육방과 반대로 행동했다. 워낙 눈치가 빠른 도곤인지라 한바탕 난리가 일어날 것을 직감해 냈다. 그는 슬그머니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육방은 보았다, 천수를 뒤쫓아 사내 두 명이 따라나서는 것을.

‘천수…… 이름은 들었다만… 안됐군. 솜씨가 뛰어나다고 들었는데.’

염충 맞은편에 앉은 사내가 말했다.

“그래도 잃은 게 있으니 한 판은 더해야지? 어떤가? 이번에는 모든 걸 다 거는 게.”

“모든 거라고 했소?”

“그렇지, 모든 것. 목숨까지 모든 것.”

“헤헤! 약 오르는 것은 이해하지만…… 싫어. 내가 목숨까지 걸고 할 이유가 있나.”

“따고 그러면 안 되지. 내가 지면 동전 한 냥을 주지. 네가 지면 목숨을 내놔야 해.”

말도 안 되는 내기다.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런 제안을 할 리가 없다. 이곳이 어디인가? 하오문이 운영하는 도방이다. 이런 곳에서 허튼소리를 했다가는 치도곤당하기 십상이다. 몸 성히 도방을 나간다면 장을 지진다고 큰소리를 쳐도 좋다.

염충은 얼어붙은 듯 꼼짝하지 못했다. 육방도, 도방에 있는 도곤들 모두 움직이지 못했다. 이곳저곳에서 일어서는 사내들을 보는 순간 말뚝이 된 듯 다리가 떨어지지 않았다.

맞은편 사내가 실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던져 봐, 염충.”

사내는 염충을 알고 있다. 염충은 노름판에 끼어들고 나서야 수상한 기미를 알아챘을 테고, 상대의 숨결조차도 놓치지 않는 도곤의 습성상 자세히 관찰했을 테니까. 그래서 칠칠이십오라는 밀마를 던져 왔는데.

“여, 염충이라니요?”

“뭐라고 불러도 좋아. 염충이 싫으면 오기라고 불러줘?”

틀렸다. 이래서는 살 기회가 없다. 떠나올 적에 문주가 한 말이 귓전에 맴돈다.

“오래 걸리지 않아. 너희들이 죽는 데 말이다. 아마도 올해를 넘기지 못할 것 같은데. 그래도 괜찮다면 백석강으로 가라.”

문주는 기간을 너무 오래 잡았다. 올해를 넘기는 것은 고사하고 한 달도 넘기기 어려울 것 같다.

‘천외천 비객…… 기회가 없어, 도주할 기회가.’

칠칠이십오, 빨리 도주하라. 가능한 빨리. 염충이 보내온 밀마는 재가 되어 사라졌다.

“빨리 굴려봐. 아! 수를 말하지 않았군. 좋아. 이번에는 일로 하지.”

염충이 떨리는 손으로 주사위 통을 집어 들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자들은 모든 걸 샅샅이 알고 왔다. 그나마 한가닥 반항이라도 하려면 주사위 통을 들어야 한다.

딸그락, 딸그락……!

주사위 통이 위아래로 흔들릴 때마다 조금은 탁한 주사위 소리가 울려나 도방을 뒤흔들었다. 주사위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도방에는 무려 백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모여 있지만 기침 소리조차 흘리지 못했다. 일어선 사내들이 내뿜는 살기는 한낱 도곤들이 상대할 수 없는 염라대왕의 살기와도 같았다.

딸그락, 딸그락, 딸각, 딸각……!

염충이 빠르게, 주사위 통이 부서지지 않을까 염려스러울 만큼 빠르고 거칠게 흔들어댔다. 그러던 한순간,

쉬익!

염충은 주사위 통을 뒤엎었다. 탁자가 아니라 맞은편 사내를 향해, 평생 가장 빠른 손놀림이었다고 자부할 만큼 빠른 속도로.

타악!

맞은편 사내는 유유히 막아냈다. 검을 뽑은 것도 아니고 검집째 살짝 들어 올려 염충이 전개한 암습을 가볍게 흘려 버렸다.

쉬이익!

염충은 기다리지 않고 신형을 띄워 올렸다. 무공은 상대가 되지 않지만 신법만은 부지런히 연마했으니.

그러나 역시 생각했던 대로 도주도 용이하지 않다. 움직이는 것도 보지 못했는데 어느새 사내 한 명이 염충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한 가닥 섬광이 흘렀다.

“큭!”

염충은 짧은 단말마를 내지르며 고꾸라졌다. 다리는 아직도 달려가고 있는데, 상반신은 몸에서 완전히 잘려 나가 뒤로 넘어지는 끔찍한 광경이었다.

“오기가 나선 것을 보니 문주의 명인가?”

육방은 잘게 웃었다. 염충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부터 죽음을 생각했다. 염충의 죽음뿐만이 아니라 오기 전부의 죽음을.

예상은 맞았다. 이들은 오기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알고 있다. 사전에 충분한 정보를 입수했다는 결론인데. 자신들이 문주의 곁을 떠난 것은 극비 사항이다. 모사들조차도 자신들이 떠난 사실은 모른다.

‘어느 놈이…… 문주 곁에 흑막이 있어. 반심을 지닌 자가 문주 곁에.’

그 점은 염려하지 않는다. 도방에는 많은 눈이 있다. 그들은 자신이 죽은 사실을 문주에게 전할 터이고, 문주도 자신의 생각과 똑같은 생각을 할 게다. 자신들을 천외천에 팔아먹은 자는 응분의 대가를 치르리라. 이들이 도방에 있는 모든 사람을 죽여도 결과는 같다.

문주는 오기 중 두 명이 현재 시간에, 바로 이 도방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도방 전체가 우연히 몰살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테니까. 요행은 없다. 자신들 두 명이 당한다면 다른 세 명도 당했다고 봐야 한다. 당하고 있을지도, 앞으로 당할지도.

이제 하오문과 살문과의 연계는 끊어진다. 죽음을 생각하던 육방은 불현듯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문주가 과연 반도를 생각하지 못했을까? 아니다, 생각했다. 하오문에는 언제 어느 때고 반드시 반도는 존재했다. 문주의 직위를 노리는 자. 그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역대 문주는 항시 반도를 경계해 왔다. 존재한다는 가정 하에.

‘색출이야! 이거야말로 일석이조. 반도는 천외천과 손을 잡았다. 우릴 미끼로 반도를 끌어낸 거야. 후후후!’

육방은 마음이 편해졌다. 미끼는 반드시 오기였어야 한다. 오기만이 하오문을 드러내지 않고 살문에 소식을 전해줄 수 있다. 오기는 하오문에서도 잘 드러나지 않는 존재였으니까. 호법이라고는 하지만 무공으로 문주를 보필한다는 개념보다는 문주의 지시를 말끔하게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니까.

종리추와 문주가 나눈 밀담 내용은 바로 이것이다. 하오문에서 천외천과 연계된 반도를 제거하는 것. 그것은 앞으로 하오문과 살문이 좀 더 적극적으로 연계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육방은 말을 던진 사내에게 몸을 날렸다.

쒜에엑……!

허리춤에 숨겨두었던 비수가 뽑혔고, 사내의 안면을 찍어갔다. 사내가 웃는 듯했다. 살짝 몸을 비트는 것도 보였다. 옆으로 살짝 비수를 틀어야 하는데…… 그게 되지 않는다. 사내가 워낙 빠르게 움직여서.

퍼억!

사내가 내지른 발길에 옆구리를 걷어채였다. 갈비뼈가 부러진 듯 극심한 통증이 치밀었다. 하지만 육방은 옆구리의 고통을 오래 느끼지 못했다. 일격이 실패했고, 사내가 검이 아니라 발로 공격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손에 들린 비수를 자신의 심장에 틀어박아 버렸다.

‘제길! 하오문에는 왜 무공이…… 문주님의 한성천류비결만 배웠어도……’

육방은 촌각도 못 되어 숨이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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