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168화
“하하하하!”
정운이 광소를 터뜨렸다. 하후가, 양가의 참패에 이어 비객이 스물한 명이나 종리추에게 당했다니 믿을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정군유에 이어 청운 진인과 양청, 진조고까지 죽었다는 말은 정녕 믿을 수 없다. 그들이 당했다면 자신도 당한다. 구진법을 익힌 후 천하무적이라 자부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정녕 믿을 수 없다. 종리추의 무공은 어떤 것이기에 천객을 죽일 수 있었을까. 천객이 어떤 식으로 당했는지 모르니 더욱 답답하다.
“후개를 죽여야겠어.”
하양 진인이 말했다.
“그래야겠지.”
정운도 같은 생각이다. 후개는 결정적인 실수를 했다. 계획대로라면 백천의도 싸움에 가세했어야 한다. 그러던 것이 흑봉광괴와 후개의 다툼 탓으로 모자도에 남아버렸다. 백천의만 갔어도 천객들이 죽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흑봉광괴는 후개를 죽일 수 없다. 후개를 죽일 경우 절반이 넘는 개방도가 개방을 떠나는 사태가 벌어진다. 후개는 방주에 취임하지만 않았지 실질적인 방주나 다름없다. 많은 수의 개방도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흑봉광괴가 개방의 정보망을 완벽히 장악하지 못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백천의가 모자도를 떠나려고 할 즈음 후개는 방주 취임 의사를 비춰왔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방주의 비전무공인 삼십육로 타구봉법을 전수 받지 못했다. 후개가 가지고 있는 것은 전대 용두방주의 신물인 청록색 타구봉뿐이다. 그렇다고 실질적으로 유임되었다고 보아야 할 타구봉법을 전수받지 못했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방주를 공석으로 놔두는 것도 명분이 서지 않고.
후개는 정말 골칫거리다. 그래서 흑봉광괴는 후개를 소리 없이 제거할 심산이다. 하지만 후개에게는 무불신개나 분운추월, 화두망 같은 장로들이 밀착 보호를 하고 있다. 그들을 모두 잠재울 수 있는 자, 백천의뿐이다. 그것도 방주로 취임하고 난 후에는 소용이 없어진다. 후개는 분명히 흑봉광괴를 제거할 것이고, 흑봉광괴에 동조한 천외천 개방도 역시 된서리를 맞을 게다. 후개 성향으로 보아서는 틀림없다고 단정해도 좋다.
백천의는 모자도에 남았다. 지금도 후개 주변을 살피며 그가 개방도로부터 떨어져 있을 때를 노리고 있을 게다.
정운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살문이 살생을 휘둘렀으면 대가도 치러야지.”
“……?”
“소림 돌중들이 얼마나 머리가 비었는지 깨닫게 해줄 때야.”
정운은 사숙뻘인 소림승들을 서슴없이 돌중이라고 불렀다.
“다행이지 않아, 여기가 살문의 본거지라는 게?”
하양 진인은 정운의 말뜻을 알아듣고 눈을 감았다. 그렇다고 반대하지도 않았다.
정운과 하양 진인은 숱한 사람들에게 고배를 안긴, 비적마의가 우글거리는 산로로 접어들었다.
스르릉!
정운이 먼저 검을 뽑았다.
“소림 돌중들이 살문을 보호하다니!”
그가 검을 휘둘렀다. 웅웅거리며 날아다니던 비적마의가 반 토막으로 잘려 떨어졌다. 정운은 계속 검을 휘둘렀다. 비적마의가 있는 곳에는 소림승들이 경계를 서지 않는다. 그 누구도 뚫을 수 없다고 단정한 듯하다. 살문 살수들은 내 집 드나들 듯 들락거리고 있는데.
쉬익! 쉬이익……!
정운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비적마의는 추풍낙엽처럼 떨어졌다. 하양 진인은 묵묵히 뒤를 쫓았다. 우르르 날아오른 비적마의가 몸에 달라붙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구진법을 통과한 사람에게 비적마의의 독쯤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구진법은 무공만 완성시켜 준 것이 아니다. 피 자체가 변했다. 독에 면역이 되도록.
“하양, 믿어지나? 이런 놈들 때문에 십망이 깨졌다는 게? 그때 여기 모였던 군웅이 얼마나 될까? 천 명? 이천 명? 그 많은 사람들이 이까짓 미물 때문에 발길을 돌렸어. 이런 미물 때문에!”
정운은 비적마의 숲을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계속 검을 휘둘렀다. 정운과 하양 진인은 절벽을 옆에 끼고 천천히 걸었다. 그들은 함정도 기관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살문 살수들의 기습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러니 침입이 발견된다는 따위는 애당초 고려 사항에 넣어두지도 않았다.
“비객이 단 한 놈도 죽이지 못하고 스물한 명이나 죽었어. 어떻게 생각해?”
“살문 살수들을 인정해야겠지.”
“인정?”
“뛰어난 무공을 지녔어. 한두 명이라면 몰라도 스물한 명이나 죽일 수 있었다는 것은…… 인정하는 편이 속 편해.”
“후후후! 잠시 후면 알게 되겠지.”
정운과 하양 진인이 나눈 대화는 곧 현실로 다가왔다.
쒜에엑! 쒜엑……!
살문 살수들의 합공이 느닷없이 터져 나왔다. 급습은 완벽했다. 세 방향에서 물러설 틈을 주지 않고, 전후좌우, 상하 모든 방향을 차단한 도법이 흘러들었다. 하지만,
“제법인데!”
살문 살수들의 공격은 정운에게 위협을 주지 못했다.
쒜엑! 쒜엑!
정운은 비적마의에게 검을 휘두를 때처럼 편안하게 검을 내뻗었다. 첫 검은 눈이 큰 자의 이마를 반으로 갈랐다. 두 번째 검은 좌측에서 공격해 오는 자의 두 다리를 잘랐고, 세 번째 검은 몸마저 반으로 갈랐다. 위에서 아래로, 수직으로 내리그은 검이다. 네 번째 검은 마지막 공격자의 심장에 틀어박혔다.
정운은 검을 박은 채로 살문 살수를 밀어붙였다. 살문 살수는 두 손으로 검날을 움켜잡은 채 주르륵 물러섰다.
“사람을 죽이며 잘살았지?”
“끄으윽……!”
“죽일 때가 있으면 죽을 때도 있는 법이야. 너무 억울해하지 마.”
“크윽!”
살문 살수는 입으로 피를 토해냈다. 피가 역류하고 있는 게다.
“네놈 무공은 보니 축혼팔도 같은데…… 몽고인?”
정운은 묻다 말고 흥미를 잃었다. 몽고인으로 짐작되는 자는 이미 절명해 버렸다.
“힘만 뺐군.”
정운이 중얼거렸다.
“천객!”
벽리군은 안색이 창백해졌다. 소림승들이 있으니 당분간은 안전하리라 싶었는데 이렇듯 급습을 가해올 줄이야. 천객은 과연 강하다. 육도객 중 팔부령에 남아 있던 삼도객이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죽었다. 비객을 충분히 상대하던 도객들이다. 그들 삼 인이 합공했는데도 숨 한 번 고르는 사이에 모두 당했다.
“언니.”
벽리군은 어린의 손을 마주 잡았다.
“겁나는 거야? 걱정하지 마.”
어린은 의외로 담담했다. 벽리군은 남만인들과 생활하며 한 가지 배운 것이 있다. 이들의 죽음에 대한 관념은 중원과 완전히 다르다. 죽음을 즐겁게 맞이하는 듯하다. 믿는 것이 있기에 가능하겠지만, 너무 절실해 미신에 불과하다고 치부할 수조차 없는.
“휴우! 그래요, 걱정하지 않아요. 참! 삼현옹께서 언니를 불렀는데 가급적 빨리 오라고 하더군요.”
“언제?”
“조금 전에요.”
“저놈들부터……”
“저놈들을 상대할 계획이 섰나 봐요. 언니가 가서 도와주세요.”
“그래? 알았어.”
어린은 쉽게 승낙했다. 현재 살문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삼현옹뿐이다. 적지인살이 있고 배금향이 있지만 천객 상대로는 어림도 없다. 사내로는 적지인살 말고도 비부가 있다. 비부는 나름대로 힘도 쓰고 무공도 수련하고 있지만 검을 드는 즉시 죽음을 맞이할 게다. 역시 천객을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삼현옹의 기관이다.
“조심해. 저놈들 앞에 나서지 말고 꼭꼭 숨어 있어.”
어린은 당부의 말을 거듭하고는 동굴 깊숙이 신형을 날렸다.
‘숨어야죠. 꼭꼭. 휴우!’
벽리군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꽈앙! 우르릉……!
거센 폭음과 함께 동굴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이놈들, 발악을 하는군.”
“삼현옹이 있으니까.”
“제길! 입구가 완전히 막혔는데?”
하양 진인은 화습자를 꺼내 불을 밝혔다.
“바람이 스미고 있군. 걱정할 것 없어. 이놈들은 같이 죽을 심산이 아냐. 우리만 죽이려고 하지. 삼현옹이 능력을 과신했군.”
“삼현옹은 뛰어난 자이지만 과신이 지나쳐. 그래서 언제나 맹점이 생기지.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 법이거늘 삼현옹은 살고자 해. 동굴을 보건대 반드시 활로가 있으니까 안심하고 진입해도 좋을 거야.”
정운과 하양 진인은 현운자의 말을 믿었다. 그들은 서둘지 않고 동굴 안으로 진입했다.
꽈앙! 꽈아아앙……!
연달아 폭음이 터졌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돌 무더기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정운과 하양 진인에게도 우습지도 않은 기관이다. 그들은 폭음이 들리는 순간 신형을 날렸고, 돌 무더기는 언제나 등 뒤만 강타했다.
그들이 동굴에 들어선 지 반각 정도 지났을 무렵, 처음으로 사람을 만났다.
“반갑군.”
상대는 의외로 담담하게 말을 건네왔다.
“반가워? 미친놈이군.”
“날 고해에서 빼내 고한마 곁으로 보내줄 사람인데 당연히 반갑지.”
정운은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하양 진인은 말뜻을 알아들었다.
“고한마…… 남만인이군. 내가 아는 게 정확하다면 고한마는 아마도 신녀일 텐데?”
“……?”
상대는 놀랍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역시 맞군. 남만에서도 고한마를 숭배하는 부족은 몇 되지 않지. 홍리족인가?”
“비, 비부.”
비부는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홍리족의 비부라는 뜻이다.
“하하! 그럼 죽는 게 그리 억울하지는 않겠군. 이보게, 정운. 죽여주게. 홍리족 사내들은 죽는 걸 기쁨으로 여기지.”
“그래?”
“하하하!”
정운이 반문했고 하양 진인이 웃었다. 정운은 하양 진인의 웃음소리가 신호라도 되는 양 검을 날렸다.
파앗!
피보라가 튀며 비부의 머리가 굴러 떨어졌다.
“좁은 동굴이라서 그런지 피 냄새가 지독하군.”
“그래?”
마주 대답하던 하양 진인은 곧 자신의 대답을 부정했다. 냄새 속에는 피 냄새 말고도 다른 냄새가 스며 있다. 그것은……?
“폭약!”
꽈아앙……!
하양 진인이 폭약 냄새를 맡았을 때는 이미 늦어서 폭약이 터진 후였다. 비부는 그냥 죽지 않았다. 자신의 몸에 폭약을 둘렀고, 등 뒤로 심지에 불을 붙여놓았다.
동굴을 무너뜨린 폭약과 비부의 몸에 감긴 폭약은 반응 속도에서 차이가 생긴다. 동굴은 무너지는 데 찰나의 시간적인 여유가 있지만, 비부의 몸은 바로 지척에 눕혀져 있어 피할 시간을 빼앗는다.
정운과 하양 진인은 피한다고 피했지만 약간의 화상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지… 독한 놈들!”
정운이 이를 갈았다. 비부를 끝으로 화약은 터지지 않았다. 동굴은 계속 이어졌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동굴 끝 부분까지 이르자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자연 동굴에 약간의 손질만 가한 어설픈 계단이다.
정운과 하양 진인은 계단을 밟아 올라갔다. 암습하기에는 더없이 적합한 지형이지만, 생각했던 암습은 없었다.
덜컹!
석판을 밀어 올리자 시원한 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어! 여긴!”
정운은 믿기지 않는 듯 중얼거렸다. 그들이 나온 곳은 대래봉 정상이다. 그럼 동굴에는 몽고인 세 명과 남만인 한 명밖에 없었다는 말인가? 분명히 동굴을 이 잡듯 뒤지고 나온 후이지 다른 길은 없었고.
“이놈들! 모두 빠져나갔어. 역시 돌중들이다. 모두 빠져나갔는데 아직도 무공이 어쩌니저쩌니 타령들이나 하고!”
살문은 텅 비었다. 모두 빠져나가고 없다. 겨우 몇 명만이 남아서 살문이 건재한 것처럼 위장막을 쳤다.
“난 사숙을 만나보지.”
정운이 한달음에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비부는 시신을 수습할 수도 없을 만큼 조각나 흩어졌다. 벽리군은 현기자를 두려워했다. 천객들이 현기자와 함께 왔다면 그들이 숨어 있는 곳까지 발각되고 말았을 게다. 그래서 어린만은 살리고자 삼현옹이 은신한 곳으로 보냈는데.
삼현옹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현기자를 데려오지 않은 것은 천객의 큰 실수다. 그들은 살문 본거지를 초토화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쳤다. 너무 무공을 믿은 결과다.
“바보. 이렇게 죽으면 고한마 곁으로 못 가.”
어린이 조각난 살점을 주워 모았다. 고한마 곁으로 가기 위해서는 사지가 있어야 한다. 잘리는 것은 좋지만 살점은 있어야 한다. 고한마는 잘린 사지를 엮어주리라. 먼저 잘려 땅에 묻은 것이 있으면 그것까지 파내서 붙여주리라.
하지만 비부처럼 전신을 폭파시키면 고한마 곁으로 가지 못한다.
“바보… 바보…… 그냥 죽지.”
어린은 끊임없이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