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사신 – 171화


비객은 다시 편성되었다. 적사를 뒤쫓으며 당한 사람들, 종리추에게 당한 사람들…… 모두 서른여섯 명이나 죽음을 맞이했다. 아흔 명으로 시작한 비객이 쉰네 명밖에 남지 않았다. 제일비주 유홍은 모두를 모아 여섯 개 조로 다시 편성했다. 전에도 아홉 명을 한 조로 묶었는데, 이번에도 인원수가 맞아떨어졌다.

‘열 개 조가 네 개나 줄었어.’

유홍은 침울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제일비주로서 책임을 통감했다. 자신이 사매의 정을 잊지 못해 팔부령에 머물고 있는 동안, 죽을 때까지 협의의 칼을 들겠다고 맹세한 비객들은 한 명, 두 명 죽어갔다. 비객들은 자신의 명이 아닌 천객의 명을 받았다.

‘이건 잘못된 거야. 천객은 천객대로, 비객은 비객대로 갈 길이 달라.’

이제는 정말 천객과의 인연을 끊어야 할 때다. 천객은 너무 패도적이다. 무림의 질서를 흐트러뜨리는 사람은 살문도 아니고 마두도 아닌 천객이다. 비객은 천객의 꼭두각시가 되어 놀아나고 있다.

‘살문은 징치한다. 하지만 천객의 뜻이 아니라 우리 비객의 뜻에 따라 움직인다.’

유홍은 비객 내에도 천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에게 자신의 뜻을 내비치면 비객을 떠나 천객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자신도 천외천 사람이다. 천외천이 탄생할 적에는 기꺼이 동참했다. 마두들을 죽이는 데 수단 방법을 가릴 것 없다는 논리에는 얼마든지 동조할 수 있다. 하지만 천객처럼 유아독존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정파에는 정파의 규칙이 있다. 그것마저 무너뜨린다면 정파나 사파나 다를 게 무엇인가.

유홍은 살아남은 쉰네 명의 비객을 한자리에 모았다. 어떤 사람은 나무 그늘에 앉고 어떤 사람은 서 있다. 복장도 가지가지고 병기도 제각각이다.

“먼저… 제일비주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누구든 제일비주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서라.”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들 제일비주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 죽은 사람들은 무공이 약해서 죽었다. 그것이 고민이고 충격이다. 각 문파에서 무공이 걸출하다는 사람만 모였는데, 자신들의 무공으로도 어쩔 수 없다면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천해유룡이 간단하게 죽었다. 천해유룡뿐만이 아니다. 공동파에서 실전된 절학을 복원했다는 육천군도 죽었다. 살문 살수들의 무공은 너무 강하다.

“그럼 제일비주로서 의견을 말하겠다. 앞으로 비객은 천객과 행동을 같이하지 않는다.”

모두의 눈가에 놀란 빛이 스쳐 간다. 천객도 살아남은 사람은 고작 세 명밖에 되지 않지만 그래도 살문을 상대할 사람은 천객이다.

“비주, 그건……”

“우린 비객이다. 무공이 약하다고 생각된다면 수련하면 된다. 천객이 추구하는 방향과 우리 장문인들의 생각은 다르다. 생각해 보면 우린 큰 잘못을 저질렀다. 장문인들의 생각까지 저버렸다는 말이다.”

유홍의 말에 반기를 든 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제일비주, 그런 생각이라면 제일비주를 내놓는 게 낫겠소. 난 천객과 뜻을 달리할 생각이 없소.”

유홍에게 반기를 든 자는 청성파의 청하 도인이다. 물론 지금은 도복을 입고 있지 않다. 도관을 쓰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는 죽은 천객 청원 진인의 사제이며 충실한 천외천 천인이다. 비객이 새로 개편되기 전에는 팔삼이었다. 지금은 오이(五二)가 되었다. 제오조에 부조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는 비객보다도 천외천이 더 소중할 게다.

“내 뜻에 동조하는 사람은 남고 오이(五二)의 뜻에 동조하는 사람은 천외천으로 간다. 이 말에도 이의가 있다면 말하라.”

오이(五二)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무 급작스러운 제안이오. 우리도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니, 이 회합은 내일로 미룹시다.”

유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비객에게 천객과 행동을 달리한다는 말은 또 다른 충격일 게다.

‘성급하게 서두를 일이 아냐.’

유홍은 여숙상의 거처로 발길을 옮기다가 다시 돌려버렸다. 구류검수를 잡아온 여숙상은 복수의 화신이 되었다. 그녀의 일과는 소검으로 자상을 입히는 것으로 시작해서 자상을 입히는 것으로 끝난다. 구류검수의 몰골은 말이 아니게 피폐해졌다. 온몸은 검에 찔린 상처투성이다. 얼굴에도 검상이 가득하다.

“그 눈이 싫어. 생각 같아서는 확 찔러버리고 싶지만 참을게. 너도 고통을 봐야 하니까.”

구류검수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학대를 묵묵히 참아 넘겼다.

유홍은 구류검수보다도 여숙상이 염려되었다. 구류검수야 어차피 만나기만 하면 도륙을 할 생각이었으니 염려할 것이 못 되지만, 착하기만 했던 여숙상이 표독하게 변한 것은 큰 걱정거리다.

“휴우! 빨리 끝나야 하는데…… 차라리 단칼에 죽여 버리는 것이 더 나을지도……”

구류검수보다도 여숙상을 위해 그런 생각을 했다. 구류검수로 인해 여숙상의 정신이 피폐해지는 것은 차마 보지 못하겠다. 본인은 자신의 상태를 알고나 있는지. 지켜보는 사람들은 과연 독심미화라고 수군대는데.

유홍은 임시로 마련된 초옥으로 돌아왔다. 그에게는 여숙상보다도 시급히 풀어야 할 난제가 있다. 살문 살수들의 무공을 어떻게 꺾을 것인가. 유홍은 살문과의 싸움에 참가했던 비객들을 통해 당시 싸움 현장을 세밀히 그렸다. 천해유룡이 당한 곳이며, 당한 수법… 육천객이나 다른 비객들…. 하나하나 빠짐없이 실례를 기록했다. 그것으로 살문을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무공으로 진 것은 절대 아니다. 비객 무인 서른 명이면 웬만한 초절정 고수도 넘어간다.

유홍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림을 보다가 글씨를 보다가 살문 무공의 허점을 파악해 내는 데 몰두했다.

파라락……!

촛불이 일렁거렸다.

‘아, 암습!’

유홍은 바짝 긴장했다. 다른 때 같으면 무심코 넘겼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다르다. 기척도 없고 느낌도 전해지지 않고, 기세도 흘러나오지 않지만 분명히 누군가 들어왔다. 비망사의 살수비기를 전수받은 다음부터 이목이 전보다 서너 배는 영민해졌다. 신경 쓰지 않던 부분까지 세밀히 신경 쓰기 때문이다. 유홍은 슬그머니 왼손을 내려 검을 잡아갔다. 밖에 돌아다닐 때는 늘 어깨 뒤에 메고 다니던 검이지만 초옥 안에서는 옆에 풀어놓곤 했다. 상대는 그런 사정까지 아는 사람일 게다.

‘비객들이 가득 깔린 곳에서 암습을? 그렇군, 천인이군. 내일까지 회합을 연기해 달라더니만 오늘 밤 날 제거할 심산이었군.’

유홍은 양보해 주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천객, 천외천, 비객에 대해 깊이 생각해 봤지만 역시 비객이 갈 길은 장문인의 명을 충실히 따르는 것뿐이다.

유홍의 손이 거의 장검에 다다를 무렵,

쉬이익!

천장에서 날렵한 인영이 뛰어내렸다.

“누구!”

“쉿! 사형, 나예요.”

야심한 밤에 천장을 통해 침입하는 사람은 사매, 여숙상이었다.

“사매, 무슨 일로?”

유홍은 얼른 사매의 얼굴부터 살폈다. 구류검수와 무슨 일은 없었는지 무슨 언짢은 일이라도……

슈욱!

유홍은 입을 벌렸다. 말을 하고 싶은데 할 수가 없었다.

‘이, 이럴 수가!’

입에서 나오는 말은 모두 경악뿐이다.

여숙상은 유홍의 가슴에 단검을 깊이 찔러 넣었다.

“사형, 곧 끝날 거야. 고통은 오래가지 않아.”

“사, 사매!”

유홍은 비로소 현실이 자각되었다. 사매가 단검을 찔러 넣은 것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을.

“호호! 사형, 미안. 난 강한 자가 필요해.”

“……”

“사형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내가 살문 살수 놈들에게 핍박당할 때, 진백강 저놈을 왜 데리고 나왔는지 알아? 단칼에 죽이고 싶었지만 혹시 반항할까 봐서지. 반항하면 난 꼼짝 못 하니까.”

“사… 매……”

“저놈은 내 손에 죽어. 살문 살수 놈들도 내 손에 죽어. 하지만 난 지금 강하지 못해. 그래서 강한 사람이 필요한데… 사형은 방해만 하잖아.”

“이, 이건 잘못…….”

“사형, 말하지 마. 말하면 고통이 커. 조용히… 조용히 가.”

여숙상이 손목을 비틀었다.

‘크으윽……’

유홍은 신음을 참았다.

여숙상의 손목을 비틀어 더 이상 휘젓지 못하게 할 수도 있지만, 참았다. 한 사람만 당하면 된다. 사매는 분명 잘못된 길을 가고 있지만 자신도 잘못된 길을 선택하지 않았는가. 사부도 마찬가지다. 구파일방은 비객이란 생각 자체를 하지 말았어야 한다. 무인은 협에 살고 협에 죽어야 한다. 화산파는 도교를 숭앙하는 문파이니 검을 버리고 도에 정진해도 좋다. 그 길을 갔어야 한다. 무림사에 시시콜콜 파고들 필요가 없었다.

여숙상의 손이 반쯤 비틀어지다가 다시 제자리로 휘돌렸다. 그럴수록 유홍의 가슴에는 점점 더 큰 구멍이 생겼다.

“됐지? 이제 편하게 가.”

유홍은 여숙상을 힐끔 쳐다본 다음 고개를 떨궜다. 그는 눈조차 감지 못했다.

청하 도인이 말했다.

“제일비주는 백천의 형이나 정운 형을 모시기로 하지. 누가 좋을까?”

여숙상이 말을 받았다.

“정운이 좋겠어. 백천의는 너무 바빠.”

“그게 괜찮겠네. 그럼 내가 말해 보지.”

정운은 말을 듣자마자 승낙했다. 일류 고수 오십삼 명을 수하로 둔다는 것은 굉장한 즐거움이다. 정운은 제일 먼저 비객들에게 제일비주의 죽음을 공표했다. 시신까지 공개하면서.

“살문 놈들이 극성을 부리는군. 이제는 여기까지 와서 제일비주를 암살하다니.”

살문은 온갖 오명을 뒤집어써도 괜찮은 문파다. 그런 면에서는 상당히 유용하지만…… 역시 제거하는 쪽이 좋다.

“당분간 내가 제일비주를 맡지. 불만 있는 사람은 말해도 좋아.”

비객은 정운의 거친 말투보다 제일비주가 암살당했다는 데 분노했다. 그것도 다른 장소도 아닌 자신들의 은신처에서. 정운은 각 조의 비주를 다시 선정했다. 여숙상이 제이비주를 맡았다. 오이(五二)였던 청하 도인이 제삼비주가 되었다. 정운은 여섯 명을 불렀고, 비객들은 무심히 흘려버렸지만 여섯 비주들은 즐거운 미소를 주고받았다.

유홍의 시신이 치워지고 유홍 대신 정운이 제일비주의 거처를 차지했다. 구파일방 장문인들의 뜻과는 전혀 다른 움직임이다.

그날 밤, 여숙상은 정운의 처소를 찾았다.

“이번에 큰일을 했네.”

“천객에게 반기를 들었으니까요.”

“여자가 대담해.”

여숙상은 고혹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

“구진법을 가르쳐 줘요.”

정운은 단도직입적인 요구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옅은 웃음을 흘렸다.

“가르쳐 줄 것 같아?”

“네.”

여숙상은 또렷하게 대답했다.

“네라… 왜?”

여숙상은 살며시 웃었다. 가지런히 난 이빨이 새하얗게 빛났다.

“난 여자니까요.”

정운은 한참 동안 여숙상을 바라보다 등 뒤로 다가섰다. 그의 손이 옷섶을 헤치고 들어가 육봉을 어루만졌다.

“이렇게까지 해서 구진법을 배우려는 의도가 뭐지?”

“화산파 장문인.”

이번에도 여숙상은 망설이지 않았다.

“뭐!”

“왜요? 놀라셨나요?”

“대담한 여자군.”

“호호호! 제가 정조를 잃었을 때 가장 원망스러웠던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

“모두들 진백강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아니에요. 화산파 모두가 미웠어요. 그들이 쳐다보는 눈길은 마치 더러운 년을 쳐다보는 듯했어요.”

정운은 살겁의 냄새를 맡았다.

‘이 여자… 독초다. 화산파 문인들은 모두 청순한 여자로 알고 있어. 나도 그랬고. 엄청난 복수심을 마음에 품고 있다. 무서운 여자……’

구진법은 구결을 가르쳐 준다 해도 수련에 필요한 독물들이 없으면 시도조차 하지 못한다. 독물이 준비되어도 수련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보지 않았는가, 뛰어나다고 자부했던 영재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그렇다고 가르쳐 주지 않겠다는 말을 하면 화살이 바뀐다. 유홍에게 그랬듯이 자신에게 독화살을 쏘아댈 여자다.

‘골칫거리군, 이 여자는.’

정운은 여자를 물리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지금 그에게는 비객이 필요하다. 살문은 곧 제거된다. 정운이 보는 것은 그다음이다. 흑봉광괴와 밀착해 있는 백천의, 그리고 무공이 엇비슷하면서도 무당파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하양 진인. 그들 모두가 먼 훗날에는 숙적이 된다. 정운은 ‘무림제일인’이라는 명예를 양보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는 여숙상을 돌려세웠다.

“옛말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가 가장 아름답다고 했나? 들어보고 싶군, 그 소리.”

여숙상이 싱긋 웃었다.

“이야기가 통한 건가요?”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명확하게 말해 줘요.”

“그래.”

“구진법 구결은요?”

“구전으로 일러주지. 하나씩… 천천히.”

여숙상은 정운의 눈에서 눈길을 떼지 않고 옷자락을 풀어 나갔다. 하얀 살결이 촛불에 일렁거렸다. 굴곡이 뚜렷한 고혹적인 자태가 그림자가 되어 하늘거렸다. 그 위로 묵중한 정운의 몸이 겹쳐 갔다.


랜덤 이미지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