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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25화


둥둥둥둥…!

심상치 않은 북소리가 하늘에서 들려왔다. 홍리족의 터전이었으나 지금은 암연족의 터전이 된 수환봉에서 들려오는 북소리다. 홍리족 부락민은 바쁘게 움직였다. 사내들은 칼과 창을 점검했고 여인들은 마을 중앙에 있는 큰 집으로 모여들었다.

“모진아가 또 공격해 올 모양이야.”

족장 구맥이 다부진 음성으로 말했다. 홍리족의 족장 구맥은 여인이었다. 햇볕에 그을린 구릿빛 피부이지만 눈이 흑요석처럼 반짝였고 콧날이 오뚝했다. 나이는 마흔이 넘어 보였지만 아직도 아름다운 모습이 조금도 지워지지 않은 미녀였다.

“사내들은 준비하고 있지?”

“네, 준비들 하고 있어요.”

큰 집에 모여든 여인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큰 집에 모여든 여인들은 일가를 거느리는 가장이었다. 홍리족은 여인이 중심이다. 결혼을 하더라도 여인이 지참금으로 돼지 열 마리를 주고 사내를 데려온다. 사내는 결혼을 하면 여인 일가의 사람이 된다. 여인 집으로 짐을 옮겨와 죽을 때까지 같이 산다. 여인이 죽어도 집을 떠나지 못한다. 여인이 곁을 떠날 수 있을 때는 오직 죽었을 때뿐이다. 집안의 모든 결정도 여인이 내린다. 그렇다고 사내가 집안일까지 하는 것은 아니다.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여인의 몫은 여인이 한다. 사내가 할 일은 농사와 수렵 그리고 싸움이다.

“녹요평은 양보할 수 없어요!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해요!”

여인 중 한 명이 분개했다.

“화왕은 어쩌죠? 녹요평에는 화왕이 있잖아요.”

“…”

“…”

화왕 이야기가 나오자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화왕이 선보인 신위는 홍리족 여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새겨주었다. 그의 아들 화자는 어린아이에 불과한데도 홍리족 사내들을 무릎 꿇렸다.

“화왕이 모진아를 막아주면 좋은데…”

오십 줄에 들어선 여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화왕은 우리 편이 아니에요. 계속 시비를 걸어왔잖아요. 부락 묘도 차지하고 앉았고.”

“묘에서 떠나 옛날 거처로 돌아간 것 같던데?”

“그래요? 그러고 보니 화자가 얼씬거린 지도 오래됐네요.”

“화자는 하루 종일 녹요평을 뛰어다녀.”

“저도 봤어요. 그런데 왜 그렇게 매일 뛰기만 하죠? 벌써 일 년은 된 것 같은데.”

“모르지, 뭣 때문에 뛰어다니는지.”

여인들은 중구난방으로 결론도 나지 않을 말들을 떠들어댔다. 암연족이 두렵기 때문이다. 암연족 전사들은 하나같이 맹수 같아서 사납기 이를 데 없었다. 날쌔고, 빠르고, 잔인했다.

“모두 용사를 준비시켜. 녹요평을 양보할 수 없다면 싸워야지. 내가 화왕을 만나보지.”

“화왕을요?”

“화왕의 의중을 떠볼 수밖에 없잖아. 화왕이 암연족 편이라면 싸울 필요도 없어. 모두 죽을 생각이라면 모를까. 휴우! 모진아가 쳐들어오기 전에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아.”

구맥은 한쪽에서 계속 뼛조각을 던져 대는 팔십 줄 노파에게 시선을 돌렸다.

“점괘는 어때요?”

“히히히! 이런 점괘는 처음이야. 피바람이 부는 건 확실한데, 어느 쪽 피바람인지는 나오지 않아. 히히! 녹요평이 강이 되겠어. 핏물이 흐르는 강이야, 핏물이.”

무당의 점괘는 여인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홍리족의 옛 터전인 수환봉에서 보면 끝이 보이지 않는 너른 호수가 보인다. 인근 사람들은 정확한 이름도 몰라 그냥 대호라고만 부르는 호수다. 하지만 대호에 전해지는 전설은 입을 통해 알고 있다. 옛날에 불의 신인 화왕과 물의 신인 수왕이 전쟁을 벌였다. 치열한 싸움 끝에 수왕이 패했고 세상은 화왕이 지배하게 되었다. 수왕이 숨어버리자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 들고 동식물이 말라 죽어 갔다. 이를 보다 못해 가난한 젊은이가 물을 찾아 나섰는데, 어느 날 바위에 앉아 쉬다가 바위틈에 숨어 있는 뱀장어를 보게 되었다.

‘수왕이구나!’

젊은이는 즉시 뱀장어를 풀어주고 몰래 뒤를 쫓았다. 가파르고 험한 산을 넘기를 얼마간, 갑자기 산 위에 끝이 보이지 않는 호수가 나타났다. 이것이 대호다. 수왕은 아직도 화왕이 무서워 호수 속에 숨어 있다고 한다. 불이 거침없이 활활 타오르고 물이 낮은 곳으로만 흐르려는 이유도 그 때문이라고 한다. 홍리족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악귀를 화왕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아무리 무서워도 지금은… 화왕을 만나러 갈 때다. 적지인살은 늦은 밤에 불쑥 찾아온 구맥과 마주 앉았다. 구맥은 검은 바탕에 하얀 선과 빨간 선이 어우러진 화사한 웃옷에 역시 검은색으로 된 치마를 입고 있었다. 홍리족의 전통 복식이다. 홍리족은 깔끔함과 화사함을 동시에 드러낼 줄 아는 부족이다.

‘아름답군.’

적지인살과 배금향은 구맥의 미모에 다시 한 번 감탄했다.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는 홍리족 부락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다. 당시에는 홍리족이 여인 중심 종족이란 것도 몰랐고 구맥이 족장이란 사실도 몰랐다. 그녀의 집에서 밥을 얻어먹고 술을 마시고… 구맥은 호의를 보였다. 종리추가 벌써 열세 살이니 이 년 전 이야기다. 종리추가 부락 묘에서 금종수를 익히지만 않았어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텐데.

“모진아가 공격해 올 거예요. 전고가 울렸어요.”

적지인살과 배금향은 종리추를 쳐다보았다. 한어와 홍리족의 말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사람은 종리추밖에 없었다. 적지인살과 배금향은 남만에 들어온 지는 이 년이나 지났지만 홍리족 부족민과 왕래를 한 것도 아니고 만난 사람도 없어 말을 배우지 못했다. 그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밀림에 들어가기만 하면 각종 과일에서부터 짐승들까지 먹을 게 수두룩했기 때문이다. 짐승과 과일이 많으니 먹을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고, 날씨가 일 년 열두 달 찌는 듯이 더우니 입을 것 잠잘 곳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던가. 적지인살과 배금향은 의식주 걱정 없이 오로지 종리추의 무공 수련과 적지인살의 대거혈 치료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남만인과 왕래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두 사람은 구맥이 뭐라고 말하는 것은 들었지만 무슨 말인지는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모진아가 공격해 올 거래요. 전고가 울렸다고 하네요.”

심상치 않은 북소리는 적지인살과 배금향도 들었다.

“음…! 암연족이 호전적인 줄은 알지만 산악족이 평원까지 공격할 줄은 몰랐군.”

“많이 참은 거죠.”

종리추가 불쑥 끼어들었다.

“…?”

“일 년 전에 천폭에서 암연족 전사들에게 들었어요. 몸이 근질거려서 죽겠다고.”

“그… 정도냐?”

적지인살과 배금향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야만인들이라지만 몸이 근질거려서 공격하는 법은 없다. 싸움을 벌일 때는 대체로 두 가지 목적이 있다. 생존이 걸린 문제이거나 영역을 넓힐 때.

“헤헤. 홍리족에게 미안한 점도 있고… 이번에는 홍리족을 도와야겠네요.”

당연한 생각이다. 홍리족은 옆에서 지켜봤으니 알지만 온순하고 착한 부족이다. 암연족같이 무지막지하게 싸움을 걸어오는 부족이 없다면 싸움조차도 모를 부족이다. 하물며 몸이 근질거려 사람을 죽인다는 암연족이 공격해 온다는데야… 하지만 홍리족을 도와주는 데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홍리족은 적지인살이 신인 줄 알지만 그는 신이 아니다. 대거혈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어 반 각 이상 진기를 이어가지 못한다. 배금향의 무공도 별것이 없다. 무인들이 무시하는 하오문에서도 겨우 향주 직위에 있지 않았는가.

암연족 전사가 덤빈다면 타격은 줄 수 있지만 적지인살이나 배금향도 무사하리라는 보장이 없다.

“모진아가 노리는 것은 녹요평이에요.”

“모진아가 녹요평을 노린다네요.”

구맥은 종리추가 전해주는 말에 망설이지 않고 말을 이었다.

“화왕께서 녹요평에 거처를 마련하셨으니 녹요평을 지켜주십사 하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녹요평을 지켜달래요.”

“…”

구맥은 대답을 기다렸다. 적지인살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배금향 역시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겼다. 한동안을 기다려도 대답이 없자 구맥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 여쭙겠어요. 홍리족을 도와주실 생각이신가요? 그것만은 대답해 주세요.”

“홍리족을 도와줄 건지 아닌지 대답해 달래요.”

적지인살은 대답 대신 배금향을 쳐다보며 말했다.

“떠날 때가 된 것 같소.”

배금향의 대답은 달랐다.

“아뇨, 도와줘야 해요.”

“무슨 소리요? 우린…”

“암연족을 돕는 것보다는 낫겠죠. 마침 건기라 풀이 바싹 말라 있어요. 녹요평에 불을 놓으면 큰 희생 없이 물리칠 수 있지 않나요?”

“물리칠 수는 있어도 암연족과 적이 되는 일이오.”

그래도 배금향은 단호했다.

“가가, 우리가 남만에 처음 들어왔을 때 공격받은 것 기억나세요?”

“기억하지.”

“가가께서는 그때 말씀하셨죠. 중원에서는 약해서 쫓기고 여기서는 강해서 쫓긴다구요. 우린 강해요.”

“…”

“우리가 왜 공격받았는지 아세요?”

“…!”

“중원은 한 무제 이후 대대로 남만을 침공해 왔어요. 한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거예요. 우린 어디를 가도 어울려 살기 힘들어요.”

“지금도 우린 잘 살고…”

“아뇨, 추아는 사람과 어울려서 사는 법을 배워야 해요. 우리하고만 지내면 성격이 편협하게 변해요. 가가도 아시잖아요. 추아는 친구 한 명 없어요. 사람들과 어울려 살지 못한 사람은 사람들 틈으로 돌아갈 수 없어요. 가가, 우리는 홍리족이 필요해요.”

“당신 말은 알겠는데… 너무 위험해.”

이때 종리추가 구맥에게 뭐라고 말했다. 그러자 구맥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뭐, 뭐라고 했니?”

적지인살이 당황해서 물었다.

“도와줄 테니 걱정 마라고요.”

“뭐라고! 넌 도대체가…”

“도와주는 게 인정이잖아요. 약자를 도와주지 않을 바에는 뭐 하러 무공을 배워요?”

적지인살은 큰 충격을 받았다. 종리추가 도와주겠다고 한 말보다 더 큰 충격이었다. 종리추의 자질이 너무 뛰어나 대형의 무공을 전수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일 때보다도 더욱 컸다. 갑자기 머리 속이 하얗게 탈색되는 느낌이었다.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건 아냐. 이건…’

-약자를 도와주지 않을 바에는…

그건 협의 길이다. 협의 길이 아니라고 우겨도 좋다. 아무리 그래도 살수의 길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종리추는 협을 생각하고 있단 말인가!

‘이거… 이거…’

적지인살의 이마에 주름살이 깊게 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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