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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2화


“우리 비슷한 처지인 것 같은데 서로 통성명이나 하지? 난 야이간이라고 해.”

답답한 침묵이 지겨웠는지 철문 가까이에 앉아 있던 소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살가죽이 뼈에 달라붙어 볼품은 없지만 쉴 새 없이 눈동자를 움직이고 있어 약삭빠르고 거칠어 보였다.

“풋! 올빼미? 이름이 올빼미가 뭐야, 올빼미가…”

두 다리를 쭉 뻗은 편한 자세로 등을 벽에 기대고 앉아 있던 소녀가 소년의 말을 받았다. 소녀는 나른해 보였다. 눈꺼풀이 졸린 듯 내려 감겼고 눈동자에도 힘이 없었다.

“올빼미가 아니라 야이간이라니까 그래. 낮에는 흐리멍덩해도 밤만 되면 눈이 초롱초롱하다고 해서 야이간이라고 불리지. 아무렴 어때? 흐흐! 계집애… 너, 되게 이쁘네.”

소년의 말처럼 소녀는 예뻤다. 아직 어린 소녀에 불과하지만 어른들도 쉽게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맑았다.

누구라도 소녀를 보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 다음에 커서 사내께나 홀리겠군.’

소년이 계속 말을 걸었다.

“이름이 뭐야? 나이는 몇이고? 너도 서약하고 온 거야?”

“난 말이야…”

“…”

“어떤 늙은이에게 팔려갔어. 병들어서 오늘내일하는 늙은이인데… 뭐 날 껴안고 자면 낫는다나 어쩐다나.”

“흐흐흐! 동녀로 들어갔구나. 그거 죽을 날이 오늘내일하는 어지간히 급한 늙은이가 찾는 건데, 흐흐흐! 소로 알몸으로 부둥켜안고 잤으면 그 짓도 했냐?”

“하고 싶었겠지만 못했지.”

“왜? 급사했냐? 쩝! 되게 불쌍하네. 너 같은 계집을 두고 저 세상으로 가려니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손만 뻗으면… 꿀꺽할 수 있는데.”

소년은 마치 소녀의 알몸을 안고 있다는 듯 눈을 게슴츠레 뜨며 말했다.

“하려고 했지.”

소녀의 표정은 처음처럼 나른함만 풍겼다.

“근데 늙은이 입에서 냄새가 나잖아. 그래서 노리개를 입 속에 틀어박았지. 옆에 보니까 필통이 있더라고. 그래서 그것도 틀어박았어. 그랬으면 늙은이가 가만히 있어야지. 눈알을 부릅뜨긴 왜 부릅떠? 안 그래? 풋! 부릅뜬 누런 눈깔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거야. 감으라고 말하기도 귀찮아서 손가락을 쑤셔 넣었지. 이 손가락.”

소녀는 오른손 중지를 들어 보였다.

“…”

“나하고 그 짓 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해. 옷 벗는 것쯤은 얼마든지 해줄 수 있어.”

이제 겨우 열 살 안쪽의 소년 소녀들이 나눌 수 있는 대화는 분명 아니었다. 하지만 소녀는 그런 말을 하면서도 표정 변화가 일체 없었다.

“…”

“…”

“보통은… 뭘 찌를 때는 가운뎃손가락보다는 검지를 많이 사용하는데… 넌 특이하네.”

소녀가 사람을 잔인하게 상해했다는데도 소년은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이번에는 소녀가 소년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는 넌 왜 잡혀왔어? 느물거리는 거 보니까 늙은이 저리 가란데… 모양새를 보니까 눈칫밥께나 먹었겠고.”

“눈칫밥?”

“아냐?”

“사람을 어떻게 보고 그래! 눈칫밥이라나! 동냥이라면 모를까.”

“풋! 그럴 줄 알았지. 거지야?”

“거지라니! 쩝… 거지는 거지[지] 뭐. 사실 난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거든. 그런데 하필 그년이 눈에 띈 거야. 뽀얀 살결에 죽이는 냄새라니… 왜 있잖아? 발정난 여편네들이 풍기는 암내.”

“너, 몇 살이야?”

“나이는 왜 따져. 알 것 다 알면 됐지.”

“다 알아?”

“자꾸 그러면 말 안 한다!”

“알았어. 해봐.”

“포목점 하는 병신 새끼 마누라인데, 아랫도리를 질질 흘리고 다닌다고 소문난 화냥년이었거든. 그런데 그년을 야밤에 인적이 끊긴 곳에서 딱 마주친 거야. 기회가 얼마 좋아? 그래서 거시기 좀 동냥 달라고 했지.”

“미친놈 쳐다보듯 했겠네?”

“쳐다만 봤으면 괜찮게? 아, 그년이 싸대기를 갈기더라고. 그래서 ‘오냐! 너 한번 죽어봐라’ 하고 산으로 끌고 갔지.”

“너 혼자?”

“아니, 내 꼬맹이들이 십여 명 있었거든.”

“알 만하다. 더 말하지 마라. 귀 더렵혀진다.”

“…”

“…”

잠시 침묵이 흘렀지만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소년이 회한스러운 듯 입을 열었다.

“그년이 침만 안 뱉었어도… 죽일 생각까진 없었는데. 쩝!”

소녀도 마주 입을 열었다.

“그 짓… 몇 살 때 처음 했어?”

“열.”

“열 살? 열 살이면 몇 년 전이야?”

“몇 년 전은 몇 년 전이야, 삼 년 전이지.”

“그럼 열셋이라는 말인데… 풋! 네가 열셋이라고? 거짓말하고 있네. 보나마나 아직 여자 손목도 잡아보지 못했을걸!”

“흐흐흐! 해봤는지 안 해봤는지는 부딪쳐 보면 알지. 생각 같아서는 지금 당장 해보고 싶지만… 참는다. 넌 비린내나거든. 그러는 넌 몇 살이야?”

“어린애는 몰라도 된단다. 누님이라고나 불러.”

“흐흐흐! 누님이 동녀로 들어가냐? 보나마나 내 아래가 분명해. 흐흐흐! 언젠간 알게 되겠지.”

거슴츠레 눈을 내리깔고 소녀를 쳐다본 소년은 한쪽 구석에 웅크려 앉아 대화에 끼여들지 않는 다른 소년에게 말을 건넸다.

“야! 넌 왜 한마디도 않고 있냐? 더럽게 무게 잡네. 그런다고 누가 알아주냐?”

“…”

두 무릎을 가슴에 꼭 끌어안고 무릎 사이에 얼굴을 처박은 소년은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이 자식이! 어른이 말하면 눈깔이라도 치켜떠야지, 어디서 말을 씹어먹어!”

순간 소년의 고개가 들렸다. 눈동자가 굶주린 늑대의 눈처럼 이글이글 타올랐다.

“죽고 싶어?”

“…”

“죽고 싶어?”

“…”

소년은 살기를 느꼈다.

‘뭐야? 이 자식, 정말… 죽이려고 하잖아!’

“죽고 싶어?”

“아… 니.”

그리고 답답한 침묵이 이어졌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소년은 무릎 사이로 다시 얼굴을 파묻었고, 소녀는 벽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아버렸다. 처음 말을 건넨 소년도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철문에 머리를 기댔다.

덜그럭!

문밖에서 자물쇠 여는 소리가 들렸다. 야이간이라고 이름을 밝힌 소년이 철문에서 머리를 뗐다.

철컹!

평생 열릴 것 같지 않던 철문이 묵중한 음향을 토해내며 움직였다.

“들어가서 기다려.”

인정이라고는 한 올도 담기지 않은 냉혹한 음성이 문밖에서 들려왔다. 문밖도 소년 소녀들이 있는 곳만큼이나 어두웠다. 말하는 사람의 얼굴은커녕 신장이 얼마나 되는 지도 구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소년 소녀들은 장한의 얼굴을 안다. 키가 자신들보다 배는 더 크다는 것도 안다. 자신들을 철문까지 인솔해 왔고, 똑같은 말을 하며 들어가라고 했으니까.

“쳇! 또야?”

야이간이 지겹다는 듯 투덜거렸다. 그들은 밝은 빛을 보고 싶었지만 묵중한 철문은 새로운 사람이 들어올 적에만 열렸다.

야이간이 철문을 열고 뇌옥이나 다름없는 곳으로 들어섰을 적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시 철문이 열렸을 때는 귀신같은 놈이 들어왔고, 또 철문이 열리면서 귀신같은 놈보다는 한결 나은 계집이 들어왔다. 그들은 밖으로 나가기를 원했지만… 이번에도 또래의 아이가 들어오는 모양이다.

철문이 열리고, 또래의 아이가 묵묵히 들어와 어둠 한구석에 엉덩이를 붙이고, 언제 열릴지 모를 철문이 닫히고… 임자 잃은 침묵이 다시 가슴을 짓누른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쳇! 이렇게 죽을 바에는 밖에서 죽을걸 그랬나…’

야이간은 묵묵히 들어서는 발자국 소리를 기대하며 머리를 눕혔다.

그런데,

“시, 싫어요. 제발 살려주세요. 전 이런 데 들어가기 싫어요. 무조건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아저씨,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뭐든지 다 할 테니 제발 살려주세요. 엉엉!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엉엉!”

이번에 들어오는 놈은 어느 놈과 달랐다. 야이간은 고개를 쳐들고 보이지 않는 곳을 쳐다봤다.

‘도대체 어떤 놈이야?’

소녀도 나른함을 거두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철문 밖을 응시했다. 소녀뿐만이 아니라 죽은 듯이 고개를 파묻고 있던 귀신같은 놈까지도 밖을 쳐다봤다.

“들어가지 않으면 지금 죽인다.”

스르릉!

칙칙한 살기가 스멀스멀 피어났다.

‘냉정한 놈이지. 동정이라고는 조금도 기대할 수 없을걸? 죽인다면 정말 죽일 놈이야.’

야이간은 독사처럼 섬뜩하던 장한을 떠올리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장한은 야이간이 본 사람들 중에서 가장 냉혹한 자였다. 직접 겪어본 적은 없지만 느낌만으로도 충분했다.

‘징징거리느니 빨리 들어오는 게 나을 거야. 흐흐, 어떤 놈인지 생짜로 잡혀온 놈 같은데 인생 한번 불쌍하게 됐군.’

야이간의 생각이 문밖 소년에게도 전달되었는지 소년은 울음을 뚝 그쳤다. 대신 공포에 짓눌린 음성이 어눌하게 새어 나왔다.

“드, 들어갈게요. 들어갈게요.”

소년은 철문이 닫힌 다음에도 계속 훌쩍거렸다.

“풋! 야! 그만 징징거리지 못해! 덩치는 산만해 가지고.”

보다 못해 소녀가 일갈을 내질렀다. 방금 들어온 소년은 확실히 종류가 달랐다. 자신보다 먼저 들어와 있던 두 소년은 같은 종류의 인간이란 걸 한눈에 알아봤다. 방금 들어온 소년도 한눈에 알아봤다. 종류가 확실히 다르다는 걸.

소년은 그녀가 늘 경멸하던, 양친 밑에서 아무런 근심 없이 올곧게 자란 대다수의 소년들과 같은 부류가 분명했다.

‘이런 놈이 여긴 왜 들어왔지? 풋! 심심하지는 않겠네.’

소녀는 미소를 지었다.

“뚝 그치지 못해!”

“엉엉! 전 잘못한 거 없단 말예요. 엉엉! 엄마! 엄마! 엉엉…!”

“너 정말 잘못한 거 없어?”

“없어요. 없단 말예요. 엉엉!”

“흐흐흐! 이놈의 자식, 되게 천연덕스럽네. 잘못도 없는 놈이 여긴 왜 들어와! 그렇게 징징거리면 통할 줄 알아? 멱 따 버리기 전에 뚝 그치지 못할래!”

야이간도 재미있어했다.

“…”

야이간의 일갈이 통했는지 소년은 울음을 뚝 그치고 겁먹은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놈 말귀 하나는 잘 통하네.”

“풋! 그러게.”

“아까부터 잘못한 게 없다고 징징거렸으니 물어봐도 말 안 할 게 뻔하고… 야! 너, 앞으로 내 동생 해라.”

“나보다 작은데…”

소년은 단순한 성격인지 야이간의 화술에 말려들기 시작했다.

“이 자식이, 눈깔에 철망을 씌웠나! 아가야, 맞으면 아프다. 응!”

“푸훗! 너무 그러지 마. 저런 애 동생 만들어서 뭐 하려고?”

“모르는 소리 마. 이런 데서는 뒷수발 들어줄 놈이 필요한 거야.”

“그래? 그럼 내 동생 삼아야겠다.”

“끼어들지 마. 내가 먼저 찍었어.”

“먼저 말을 건 사람은 나야.”

“야야, 거시기에 털이나 난 다음에 끼어들어.”

“풋!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주둥이만 살아 가지곤…”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던, 눈빛이 증오로 이글거리는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너희 둘! 죽고 싶어?”

“…”

“…”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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