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42~43화
하남은 중원인의 자존심이다.
은의 도읍이 하남이었고 은의 뒤를 이은 주나라의 도읍도 하남이었다.
춘추전국시대 역시 하남을 중심으로 펼쳐졌다.
하남성은 서부의 산지, 동부의 평원으로 나누어진다.
즉, 서부는 북서부의 태행산맥, 서부 진령의 복우산맥, 남부의 동백,
대별산맥으로 이루어지고, 평원은 북부의 황화, 회하에 의한 화북평원과
남부의 한수에 의한 남양평원으로 대별된다.
삼도산은 서부인 하남성 하남부 숭현에 있는 산이다.
북으로는 고도천, 동남으로는 이수가 흘러 풍광이 좋으며 오밀조밀하고
아름답기로 회자되곤 한다.
하지만 삼도산을 찾는 사람은 많지 않다.
북으로 여인산이 있고 남으로는 복우산이 있기 때문이다.
적지인살은 삼도산에 여장을 풀었다.
구맥과 모진아는 여행을 하는 동안 상당히 가까워졌다.
일방적인 핍박을 가했고 당했던 사람들이지만 한 부족을 이끄는
족장이었다는 점이 그들을 가깝게 만들었다.
“모진아, 내가 상전이면 내 어머니도 당연히 상전이야. 앞으로는 말을
높이도록 해!”
어린이 앙칼지게 말했지만 모진아도 구맥에게만큼은 존대를 붙일 수
없는 모양이다.
“제가 모시는 주인님은 종리추 한 분뿐입니다. 마님 역시 엄밀히 따지면
아직 혼인을 하지 않았으니 제 주인은 아닙니다. 만약 돼지를 주지
않았다면 제게 경을 쳤을 겁니다. 홍리 족장에 대한 예우는 혼인이 완성된
다음부터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뭐야!”
“…”
“그렇단 말이지? 좋아. 토끼 고기가 먹고 싶어. 토끼 좀 잡아와.”
남만인은 참 묘했다.
‘노예’란 것이 어떻게 길들여졌는지 적지인살과 종리추가 좋게 타이르고
윽박지르기까지 해도 말버릇이나 행동은 좀처럼 고쳐지지 않았다. 어린은
다른 사람에게는 밝고 상냥하게 대하면서도 노예인 모진아와 유구,
유희에게는 신처럼 군림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당하는 모진아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으니 할
말이 없지 않은가.
“그렇게 하자. 예우는 혼인이 완성된 다음에 받아도 늦지 않아.”
결국 구맥이 나선 다음에야 서로 온대를 하는 선에서 적당히
타결되었다.
모진아에게도 노예가 생겼다.
대놓고 노예라는 말은 하지 않지만 하는 행동으로 봐서는 영락없는
노예였다.
비부… 그는 재수없게 걸렸다.
“나도 어린이랑 혼인할 거니까 어린의 노예면 내 노예야. 모진아,
알았어?”
“예.”
모진아는 순순히 대답했다.
“좋아.”
“저… 그런데…”
“뭐?”
“혈서까지 해야 하는지요?”
“혈서? 아! 혈서. 해야지. 해봐.”
“그럼 가시죠.”
“…?”
유구가 옆에서 거들었다.
“혈서는 사람이 안 보는 곳에서 해야 되는데… 모르십니까?”
“아, 알지.”
비부는 순진하게 모진아를 따라 숲으로 들어갔다.
그날 밤부터 비부는 모진아의 노예가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암연족에게는 혈서라는 것이 있는 줄 몰랐던 적지 인살
가족과 홍리족은 비부의 꼬리 내린 모습을 보았을 때에야 상황을
짐작했다.
모진아는 참으로 독하게 때린 듯 비부는 사흘 동안이나 일어나지
못했다. 겉으로는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는데 피똥을 줄줄 흘렸다. 식은
땀이 이불을 적시고 ‘잘못했어요. 노예가 될게요. 열심히 모실 게요.’라고
헛소리까지 했다.
비부의 상처는 모진아가 고쳤다.
“일어낫!”
비부는 벌떡 일어났다.
세상 날씨가 남만처럼 이글거리는 줄만 알았던 남만인들에게 산악의
겨울은 매서웠다.
구맥, 어린, 비부는 물론이고 무공을 익힌 역석, 유구, 유희도 꼼짝을
하지 못했다. 적지인살까지 상대할 수 없는 고수 모진아도 삼도산의
겨울에는 혀를 내둘렀다.
“종원 날씨는 남만하고 정반대네. 남만은 지겹게 더운데 여긴 지독히
추워.”
“그래도 눈이란 게 너무 예쁘지 않아요? 어쩜 하늘에서 이렇게 고운
가루가 쏟아질까. 남만에서는 비만 쏟아지는데… 에칫!”
“그래도 여기가 목적지라니 얼마나 다행이니. 북으로 더 올라갔다가는
억어 죽을 뻔했어. 에구∼ 너무 추워서 안 되겠다. 안으로 들어가자.”
“가가가 아직 밖에 있는데…”
“우리하고는 체질이 다른 거지. 안으로 들어가자.”
구맥은 어린을 억지로 잡아끌고 안으로 들어왔다.
나무를 잘라 얼기설기 지은 집은 보기보다는 훈훈했다. 남만인들은 뭐
이런 집이 다 있나 싶었지만 지금에 와서 보니 아주 훌륭했다. 밖에는
살을 엘 듯한 강풍이 몰아쳤지만 안은 훈훈한 열기로 가득했다.
“이런 날씨에 웃통을 벗어 던지고 산을 뛰어다니다니… 어휴!”
비부가 자신도 모르게 말을 불쑥 내던지고는 얼른 모진아의 눈치를
살폈다.
무공을 익힌 사람이라면 한기쯤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 정작
견디려고 하면 삼도산의 추위가 아니라 북해의 추위라도 견뎌 낼 수 있다.
견뎌내기 싫은 것뿐이다. 따뜻한 날씨에 길들여진 사람들이기에 추운
날씨라는 자체가 싫은 것이다.
“주인님께서는 요즘 차 맛에 푹 빠지신 것 같아. 수련을 하고
돌아오시면 차부터 찾으시니… 달콤하지도 않고 떨떠름하기만 한 것을
뭐하러 드시는지…”
유구가 유희에게 들으라는 듯 말했다. 그러자 비부가 벌떡 일어나
찻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지시는 늘 이런 식이었다.
종리추 역시 추위가 싫었다.
그는 중원에서 나고 자랐지만 뼈마디가 자라고 굳어지는 거의 모든
시기를 남만에서 보냈다.
추위는 종리추도 익숙하지 않았다. 옛날에는 익숙했지만 지금은 전혀
낯선 기후가 되어 전신을 얼렸다.
‘아버님이 원하는 것은 실수… 살수는 어떤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어야
돼.’
종리추는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모물촌에서 돼지 똥을 뒤집어쓰고 누워 있던 기억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질퍽한 돼지 똥이 옷을 뚫고 살갗까지 적셔댔다. 살이
무르고 피부병이 생기는 듯 근질거려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더러운 느낌보다 더 미치게 하는 것은 냄새였다.
처음에는 더러운 돼지 똥 속에 누워 있다는 것이 미칠 것 같았지만,
나중에는 머리까지 욱신거리게 만드는 냄새 때문에 견딜 수 없었다.
적지인살은 나뭇잎을 콧속에 넣어주었다.
“나뭇잎을 세상에서 가장 좋은 향기라고 상상해라. 상상은 사람의
감정을 조종할 수 있어.”
적지인살은 나뭇잎도 필요없다는 듯 돼지 똥 속에 얼굴을 묻었다.
‘아버님은 실수였어. 무인은 높은 무공을 추구하지만 살수는 극기를
추구해. 서로 가는 길이 달라.’
종리추는 내공을 끌어올리지 않고 의지로만 한기를 이겨냈다.
한 길이 넘게 쌓인 눈 속을 내공조차 끌어올리지 않고 뛰어다닌다는
것은 여간 고역스럽지 않았다.
살이 벌겋게 상기되다가 파랗게 죽어갔다.
‘아버님이 돌아오시면 소고를 만나게 될 거야. 소고… 훗! 생전 보지도
못한 놈에게 평생 수족 노릇을 하라니… 아버님, 참 무거운 짐을 주십니다.’
종리추를 정말 견디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십 년 동안 편히 잠 한 번 못 자보고 무공을 수련했는데, 그게 오로지
생면부지의 차인에게 목숨을 내맡기기 위해서였던가.
“네가 바칠 수 있는 모든 것을 바쳤으면 한다. 모진아가 네게 하듯이,
아니, 그보다 더 말이다.”
“소고가 악인이면 어쩌죠?”
“네 팔자지.”
“아버지를 죽이라고 하면요?”
“망설이지 마라.”
“여자를 죽이라고 하면요?”
“죽여야지.”
“갓난아기를 죽이라고 하면요?”
“소고의 입에서 나온 말은 천명이다.”
“에구! 난 신을 안 믿는데…”
아버지 앞에서는 싱겁게 대꾸했지만 속마음은 결고 편하지 않았다.
종리추는 달리고 또 달렸다.
눈밭이 앞을 가로막으면 주먹으로 내려쳐 길을 뚫었다.
산정으로 올라갈수록 바람이 더욱 세차게 불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아니, 살갗의 감촉마저 없어져 버렸다.
산정은 기대처럼 시원한 느낌을 주지 않았다.
산에 올라서면 탁 트인 전망을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눈보라에 가려
사방 서너 장 정도의 널찍한 바위밖에 보이지 않았다.
눈보라는 왜 이리 세차게 날리는가.
종리추는 바람에 떠밀려 휘청거렸다.
내력을 일절 사용치 않고 있는 지금 그는 어느 평범한 사람과 다를바
없었다. 무공으로 다져진 신체를 제외하고는.
‘아아아아아…!”
목청껏 고함을 질렀다.
마음속으로만 질렀다. 세상이 떠나가라 고함을 지르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산 중턱에 있는 오두막까지 쩡쩡 들릴 터이고, 어머님이
걱정을 하시리라.
‘소고…’
종리추는 털썩 주저앉아 눈을 감았다.
“소고의 나이는 너보다 두 살이 많다. 금년 스물넷이야. 이번 겨울이
지나면 스물다섯이지. 무공도 너보다 훨씬 높을 게다.”
“그건 모르죠.”
“무공이란 사부의 능력도 무시할 수 없는 거다. 대형에 비하면 나는
피라미에 불과해. 그동안 소고는 대형에게 직접 하사받았고 넌 우둔한
나에게 전수받았어.”
“맞아요. 아버지는 엉터리였어요.”
“진지하게 들어라.”
“…”
“설혹… 그럴 리는 없지만 네 무공이 더 낫다 해도 충성을 바쳐라. 죽을
때까지. 이 아비에게 맹세해 다오.”
“…”
“맹세하지 않는다면… 길을 떠날 수 없다.”
“아버지, 소고가 아버지에겐 어떤 존재예요?”
종리추는 처음으로 진지하게 물었다.
“자식이다.”
“저는요?”
“너 역시 자식이다.”
“아뇨. 같은 자식이라면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고… 제게
이러실 수 없어요. 전 어떤 존재죠?”
“백 번 천 번을 되물어도 같은 대답… 자식이다.”
“풋! 좋아요. 맹세하죠.”
“…”
“…”
“금제가 가해질 게다.”
“…”
“금제는 걱정하지 않는다. 나는… 이 아비는… 네 자존심이 누구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너는 부드러운 듯 보이지만 실은 누구보다
강해. 네가 정 견딜 수 없을 때는… 검을 바꿔 들지 말고… 자진해 다오.”
“…”
“약속하겠니?”
“오늘은 약속이 많군요. 남은 게 몇 개나 되죠? 입 아프게 여러 번
하느니 모두 말하세요. 한꺼번에 약속드릴게요. 죽을 때까지 충성해라.
비위가 틀리면 자진해라. 모두 약속하죠.”
“…”
적지인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왜 종리추의 섭섭한 심정을 모르겠는가. 알아도 너무 잘 알고 있다.
소고는 대혐의 제자다. 또한 살혼부 고수들의 공동 제자다.
적지인살도 소고를 가르쳤다. 하지만 그 기간은 겨우 이 년 남짓에
불과하다.
종리추와는 장장 십 년 같이 보냈다. 울고 웃으면, 힘들고 괴로운 시간을
함께 보냈다.
정리로 보면 단연 종리추이다.
그런 자식에게 평생 복종을, 죽으라는 소리까지 하고 있다.
적지인살은 눈물을 흘렸다. 자신도 모르는 새에 주르륵 쏟아져 나온
눈물이었다.
“아버지…”
“…”
“됐어요. 아버지 말씀대로 평생 복종할게요. 변하지 않고, 여자를
죽이라면 여자를 죽이고, 갓난아기를 죽이라면 죽이죠. 아버지를 베라면
벨게요. 됐어요. 아버지의 마음을 알았으니… 됐어요.”
“추아야.”
“에이, 남자의 눈물은 천금이랬는데, 오늘 수첨 금은 벌었네. 안심하시고
다녀오세요. 오늘 번 돈으로 술이나 진하게 같이 마셔요.”
“네 이놈! 아비와 대작을 할 참이냐!”
“뭐 어때요? 전 돼지까지 받은 몸인데.”
“하하하!”
아버지는 웃으셨다. 그리고 먼 길을 떠나셨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편하게 보내드리고 싶었다.
‘이제 내 운명은 정해졌어. 그래, 괴로워 말자. 정해진 운명은 따라야지.
후후! 마두, 영웅, 살인마… 내가 무엇이 될 거냐는 모두 소고의 손에
달렸군.’
종리추는 비로소 진기를 끌어올렸다.
천폭에서 수련하던 것처럼 종금수의 내력을 먼저 끌어올렸다.
그는 가부좌를 틀고 앉은 채 눈 속에 파묻혀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