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사신 – 55화


천화기루의 기녀들도 별채에는 걸음을 들여놓지 못했다. 별채에 저잣거리에서 난동 부린 자들이, 배문 향주를 때려죽인 자들이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마저도 입을 열어 말하지 못했다.

“눈을 감고, 입을 막고, 귀를 닫아라. 별채에 대해서는 입도 벙긋거리지 마. 별채에 대해서는 잠꼬대만 해도 목이 떨어질 게다.”

철저한 함구령이었다. 개봉 하오문은 개봉에 터를 잡은 이후 가장 은밀히, 가장 활발히 움직였다. 망주가 직접 나서서 살천문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그들이 어디서 청부를 받는지, 살수는 몇 명이나 되며, 평소에는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무공은 무엇이며, 사용하는 병기는 무엇인지. 살천문에 대한 정보가 수집되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즉각 천화기루의 벽리군에게 전달되었다.

종리추는 무척 조용했다. 삼도산을 내려온 이후 사람이 완전히 바뀐 듯했다. 밝은 얼굴보다는 무표정한 얼굴을 할 때가 많았고, 농담보다는 침묵으로 일관할 때가 많았다. 다정함도 보이지 않았다. 냉혹함이 풀풀 피어났다. 이제 갓 약관을 넘긴 나이인데도 천년 거암처럼 묵직했고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금을 즐겨 들었다. 어떤 날은 기녀가 힘이 들어 인상이 찌푸릴 때까지 금을 들은 적도 있다. 요즘에 들어서는 직접 금을 탄주하기 시작했다. 송나라 사람이었던 진양이 지은 진양악서를 탐독하고 난 다음이었다. 이백여 권에 이르는 악서를 며칠 만에 탐독한 것도 놀랍지만 이해력은 더욱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띵! 띠딩…!

‘오늘도..’

오늘도 망주에게서 전서 두 통이 도착했다. 종리추는 언제 움직이려는 것일까? 저렇게 하루 종일 금이나 타고 앉아 있으니. 문 앞에서 따스한 겨울 햇살을 즐기고 있던 유회가 벽리군을 알아보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종리추의 수하들은 하나같이 험상궂게 생겼지만 마음만은 누구보다도 따스하다. 며칠에 불과하지만 같이 있어본 결과가 그렇다. 이들이 그렇게 무자비한 살수를 펼쳤다니,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기 어려웠으리라. 벽리군이 들어섰는데도 종리추는 금을 탄주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띵! 띠딩…!

벽리군은 조용히 앉아 탄금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탄금이 끝난 다음 솔직히 평을 했다.

“끌어올리는 추성, 끌어내리는 퇴성이 완벽하군요. 배음까지 완벽해요.”

“그런가?”

“네. 중성을 잘 잡고 있어요. 청성도 깨끗하고 중청성, 배성, 하배성도 완벽해요.”

“후후!”

“정말이에요. 중성 십이율을 아주 잘 잡고 있어요.”

벽리군은 마음이 흔들렸다. 종리추가 한참 아랫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나이로 말하자면 거의 곱절은 되지 않는가. 자식을 낳았다면 종리추만한 자식이 있을 것이다. 자식뻘… 하지만 그런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 날이 갈수록 매력적인 사내의 모습으로 살아났다.

“그것 가지고는 안 되지.”

“예?”

“내가 이 금을 타게 된 것은… 벽 향주로부터 금에 대해 설명을 들은 다음부터지.”

“….?”

“길이가 석 자 여섯 치 닷 푼, 일 년 삼백육십오 일을 가리킨다고 했지? 바닥에 이것은 여덟 치, 바람이 불어오는 팔방을 나타내는 것이고.”

종리추는 금을 뒤집어 큰 구멍 두 개를 가리켰다. 용지라고 부르는 곳이다.

“그랬죠.”

“또 뭐라고 했지?”

“윗 판은 오동나무로 만드는데 하늘을 상징해서 불룩하며, 아래 판은 밤나무로 만들며 땅을 상징해서 평평하다고 했어요.”

“그랬지. 천지인 삼재야. 하늘과 땅. 그리고 나. 금을 켤 때 금과 나는 바로 우주가 되어야 해. 추성, 퇴성, 배음을 따지는 것도 좋지만 그냥 들을 수 있어야 해. 넓은 마음으로, 하늘을 대하듯이.”

벽리군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종리추가 하는 말은 새삼스럽지 않다. 기녀들도 알고 있고, 그동안 접해왔던 많은 이인묵객들이 같은 소리를 했다. 그러나 종리추처럼 직접 우주와 하나가 되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종리추는 한다. 그 차이는 크지 않으나 결과는 엄청나게 달라지리라.

“우주와… 하나가 될 날이 있겠죠.”

벽리군은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종리추가 손을 내밀어 망주가 전해온 전서를 집어 들었다. 그는 변함없다. 언제나와 같이 조용하다. 무서운 힘을 지녔으나 나타내지 않고 말하지도 않는다. 술을 마실 때는 밤이 새도록 마시면서도 취기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거기에 있다. 그는… 태산이다.

‘나에게는 너무 큰 사람… 어멋!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벽리군은 얼굴을 붉혔다. 세상 사내들을 발 아래 굽어보던 젊은 날, 종리추와 같은 사람을 본 적이 있다. 문주였다.

“미모란 몽중인과 같다. 오늘은 활짝 피었지만 내일은 시들게 마련이다. 꿈속에 사람을 만나듯이 젊은 날을 그리워하겠지. 아름다움을 키워라.”

-아름다움을 키워라.

문주의 한마디는 마음속에 각인되어 지워지지 않았다. 그날 이후 벽리군은 미모를 자랑하지 않았다. 대신 책을 읽고, 금을 타고 시서를 닦았다. 사내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미모를 자랑할 때보다 훨씬 나은 사람들이 주변에 항상 머물렀다. 문주… 그보다 나은 사내는 찾을 수 없었지만. 그런데 지금 또 한 사내가 마음을 울리고 있다. 종리추는 문주처럼 완성된 사람이 아니다.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다. 벽리군이 보지 못한 젊은 날의 문주도 이렇게 나아갔겠지. 문주는 가까이 다가가기에는 너무 틈이 없었다. 그는 늘 바빴다. 종리추는 곁에 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얼굴을 마주 대하고… 체취를 맡을 수 있다.

“유구, 유회, 역석.”

종리추가 입을 열었다. 금을 말할 때의 그가 아니라 허름한 주루에서 말없이 술잔을 건네주던 그다. 세 사내가 다가오자 종리추는 미리 생각이라도 해둔 듯 망설임 없이 말했다.

“유구, 수산 오리곡 살천사괴. 유회, 영음현 죽리 청살신필. 역석, 내구하 유수어옹.”

“…”

“죽여.”

종리추가 드디어 움직였다. 벽리군은 부르르 떨었다. 청살신필, 살천사괴, 유수어옹… 싸움과 관련이 없는 사람들은 모르지만 벽리군같이 개봉부 정세를 환히 꿰뚫고 있어야 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안다. 손에 피가 마를 날이 없다는 혈귀들이 그들이다.

“정면 승부로는 필패다. 암습해라.”

‘정면 승부로는 필패? 그런데도 죽이라는 명을…? 이 사람은 도대체가…’

종리추는 언제 명을 내렸냐 싶게 태연했다. 유구, 유회, 역석이 포권지례를 취할 때도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그들이 어리석기 이를 데 없는 명령을 받고 문밖으로 걸어나갈 때도 쳐다보지 않았다.

띵! 띠딩…!

금이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끊어질 듯하다 이어지고, 착 가라앉았다 높아지며… 마음의 격동이 전혀 담겨 있지 않은 평온한 상태에서나 탈 수 있는 소리가 울려 나왔다.

‘이 사람도… 너무 멀리 있어. 내가 다가갈 수 없는 곳에. 문주처럼… 어딘지는 모르지만 너무 먼 곳이야. 너무 먼 곳…’

벽리군은 몸살이 난 듯 몸이 떨렸다. 양성 제일의 자린고비 하면 그 누구라도 단번에 천 노인을 꼽는다. 천 노인은 돈이 아까워 결혼도 하지 않은 사람이다.

“데려다가 일 시켜먹는 것하고 먹고 입는 것을 계산하니까 셈이 안 나와. 아무래도 혼자 살아야겠어.”

“예끼, 이 사람아. 자식을 낳아주는 것은 생각지 않아?”

“세상에 자식이란 건들이 그래. 크면 모두 저 혼자 큰 줄 안단 말야. 그동안 먹여주고 입혀준 것은 입 싹 씻어버려. 그거 갚는 자식 봤어? 혹만 되는 놈들이 낳아준다고 뭐가 대수야?”

천 노인과는 이야기가 되지 않았다. 오십 년이 넘게 염왕채를 굴리면서 떼인 돈이 한 번도 없으니 말하면 무엇 하겠는가. 천 노인은 지독했다. 돈을 갚을 능력이 없으면 부인이나 딸을 잡아 팔아먹었다. 그나마도 없는 자는 남의 집 종살이를 하며 평생 갚아 나갔다.

“세상에서 가장 빌리기 쉬운 돈이 천 노인 돈이지만 반드시 갚아야 되는 돈도 천 노인 돈이야.”

천 노인은 결코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 이야기를 건네는 벗도 없었고, 천 노인도 그런 벗은 바라지 않았다. 그렇게 악착같이 벌어서 쌓아놓은 재산만도 누만금이 된다는 소문이었으나 그는 아직도 장 하나만 놓고 밥을 먹었다. 천 노인이 천화기루에 들어섰다. 그는 전에도 가끔 기루에 들르곤 했다. 그가 들를 때는 항상 궁핍이 다닥다닥 붙은 여인이 뒤따르곤 했다. 그리고 돌아갈 때는 언제나 천 노인 혼자였다. 지금은 혼자였다. 아무리 둘러봐도 주위에 여자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저 귀신도 데려가지 않을 영감탱이가 웬일이야?”

“저놈의 영감탱이… 확 수염을 뽑아버릴까 보다.”

기녀들이 천 노인을 보는 눈은 곱지 않았다. 그녀들 중에는 천 노인 손에 붙들려 억지로 기루에 팔린 여자들도 있었다.

천 노인은 뭇사람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줄 호법을 데리고 다녔다. 무공이 높아 매달 상당한 액수를 지불해야 되지만 돈을 떼이는 것보다는 한결 이득이다. 그런데 오늘은 무인도 보이지 않았다. 천 노인 혼자 달랑 기루를 들어선 것이다.

“루주를 만나뵈러 왔네.”

천 노인은 돈이라도 받으러 온 사람처럼 당당했다.

“언니도 돈을 빌려 썼나?”

“에이! 언니가 남의 돈 쓰는 분이야? 써도 그렇지. 저런 영감탱이 돈을 쓰겠어?”

“그럼 무슨 일이지? 저 영감탱이 기세가 등등하잖아.”

“빨리 언니에게 말해. 영감탱이 얼굴만 봐도 구역질이 나. 오늘은 하루종일 재수 없겠어.”

기녀들이 인상을 찡그렸지만 천 노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웃옷을 벗어 이를 잡았다. 그는 덕지덕지 기워 누더기나 다름없는 옷을 입고 있었다. 다른 고장에 가면 걸인이라고 오해받기 딱 좋은.

“종리추를 만나러 왔네. 안내하시게.”

벽리군은 바짝 긴장했다.

‘살천문이 벌써 움직였나? 그럼 천 노인이 살천문의 살수? 그런 보고는 없었는데…’

“아, 뭐 해! 종리추를 만나러 왔다니까!”

“용건을…”

“용건은 무슨 빌어먹을 용건! 빨리 가서 전하기나 해. 맨발로 뛰쳐나올 테니까. 소고가 보내서 왔다고만 전해.”

“그 말만 하면…”

“그것참! 얼굴은 반반해 가지고 머리 속에 똥만 들었나,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먹어? 아! 술 냄새, 계집 냄새 때문에 골이 아파. 이런 빌어먹을 곳이 뭐 그리 좋다고 여기서 발 뻗고 지내는 거야! 정신없는 놈 같으니라고, 뭐 해! 빨리 가서 전하지 않고!”

벽리군은 엉거주춤 일어나 물러났다. 소고… 난생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아무래도 하오문은 대대적인 조직 개편을 해야 할 것 같다. 처음 듣는 이름들이 이렇게 많아서야. 천 노인과 종리추는 서로 무관한 사람들처럼 보였다. 천 노인은 웃옷을 벗어 이를 잡았고, 종리추는 그리던 화조도를 계속 그렸다. 이윽고 웬만큼 이를 잡았는지 천 노인이 다시 옷을 입었다. 그때까지도 종리추는 그림에 몰두하여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이놈아! 이리 와서 앉아.”

천 노인이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순간.

쒜에엑…!

하늘에 연녹색 그림자가 물결쳤다. 물결은 곧장 천 노인에게 몰아쳐 갔다. 천 노인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몸놀림을 보였다. 물결을 피해 곧장 허공으로 솟구치는가 싶었는데, 방향을 꺾어 좌측으로 민첩하게 날아갔다.

쫘아악!

“큭!”

천 노인은 헛바람을 토해냈다. 등짝이 불에 지진 듯 화끈거렸다. 아니, 화끈거림도 잠시, 이내 뼛골을 자르르 울리는 통증이 엄습했다. 종리추의 채찍은 이상하게도 맞을 때보다 맞은 다음에 더 큰 충격이 다가왔다. 천 노인은 너무 놀라 눈을 부릅떴다. 종리추의 무공은 특출나지 않다고 들었는데 그토록 자신하던 신법을 펼쳤는데도 채찍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니. 마음의 충격은 몸에 받은 충격보다 훨씬 더 컸다.

“소고가 보낸 자라 목숨은 살려준다. 하지만 한 번 더 혀바닥을 마음대로 놀리면 소고에게 잘못을 추궁하겠다. 수하를 잘못 둔 죄는 무엇보다 크지.”

‘이, 이자는… 모두 잘못 알았어. 이자는 범이야. 우리에서 벗어난 범.’

천 노인은 종리추에게서 종사의 모습을 보았다. 채찍을 언제 집어넣었는지 다시 붓을 잡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종리추. 젊은 애들이 진중해 보이려고 하는 행동과는 전혀 다르다. 차분함과 냉철함과 잔인함이 내부에서부터 우러나오고 있다.

“말해라. 소고가 보내서 왔다고 했는데, 무슨 일이냐?”

종리추는 계속 붓을 놀리며 말했다.

‘음…!’

천 노인은 품속에서 서신 한 통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펴보시지요.”

드디어 천 노인의 입에서 존대가 튀어나왔다. 행동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정중했다. 종리추는 계속 그림을 그렸다. 천 노인은 시립해 왔고… 그렇게 반각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림을 완성한 종리추는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그는 잠시 자신이 그린 그림을 감상하다 문득 생각이 난 듯 탁자로 걸어와 서신을 펼쳤다. 안에서는 어음 한 장이 나왔다.

“은자 일만 냥?”

“살혼부에서 내드리는 자본입니다. 호화스러운 장원을 사고, 하인들을 넉넉히 두고도 평생을 호의호식하며 살 만한 거금이죠. 살천문이 잡은 터를 비집고 들어가려면 그만한 돈이 필요할 것이라고…”

“…”

“그것으로 시작하시라는… 소고님의 전갈입니다.”

‘양성 제일의 자린고비 천 노인이 은자 일만 냥을 내놓았다. 오늘 밤은 배가 아파서 잠을 못 자겠군.’

“적사, 야이간, 소여은에게도 일만 냥씩 지불했나?”

“그들은 제 소관이 아닙니다.”

“그래?”

살혼부의 저력은 상상 이상으로 넓고 컸다. 십망을 당하고 십 년이나 지난 오늘날에도 당시에 뿌려놓은 씨앗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종리추는 휴지 조각처럼 어음을 내던졌다.

“가지고 가.”

“…?”

“소고에게 가서 전해. 시작하려면 깨끗이 시작하라고. 살혼부에서 남긴 것은 그분들의 것, 손대지 말라고 해. 사무령을 생각하는 자가 남의 도움으로 시작하려 하다니.”

마지막 말은 질책에 가까웠다. 천 노인은 눈을 비비고 종리추를 다시 쳐다보았다. 분명 약관을 갓 넘겼다. 천 노인이 보기에는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그럼 산전수전 다 겪은 듯한 이 장중함은 어디서 흘러나오는 것이란 말인가.

‘음…!’

천 노인은 다시 한 번 신음했다.

“어음은 두고 가겠습니다. 그것은 살혼부가 주는 돈이 아니라 이 늙은이가 드리는 선물입니다.”

“둘러치나 메치나.”

“…?”

“가져가. 마음은 받지.”

천 노인은 격정이 치밀었다. 소고는 뛰어나다. 거침없이 밀어붙이는 성격이다. 사내라도 그만한 성격을 지니기 어렵다. 종리추는 치밀하면서도 냉철하고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런 자신감은 단순한 만용이 아니라 실력이 뒷받침되는 자신감이다. 천 노인은 이들 젊은이들에 의해 사무령이 탄생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영원히 이룰 수 없는 꿈… 사무령이. 천 노인, 그가 모셨던 자의칠화는 평생 혈뢰삼벽이라는 비급을 연구하다 그 많던 세월을 흘러 버렸다. 기대를 걸었던 청면살수 역시 십망이라는 그물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불구가 되었다. 이제는 맥이 끊겼다 생각했는데… 천 노인의 주름진 눈가에서는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종리추의 마음을 알고 있다. 종리추는 죽음을 생각하고 있다. 결국은 죽음으로 치달릴 수밖에 없는 사무령의 길이기에 단단히 마음을 여미고 있다. 종리추에게는 지존이 필요하다. 예의를 지키거나 곁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동정이나 정이란 것을 떠올릴 틈이 없다. 어떻게 하면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천 길 벼랑에서 외로운 줄타기를 하고 있는 심정이리라. 그림을 즐기고, 탄금을 하고, 될 수 있는 대로 마음을 가다듬고… 그에게는 처절한 사투이리라. 모두들 사무령을 말하지만 종리추처럼 죽음을 생각하고 대비한 사람은 없다. 천 노인의 주장이었던 자의칠화도,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청면살수도.

‘이룰 수 있을지도 몰라.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보지 못할지라도, 죽은 다음에라도…’

“살혼부에서 제게 맡긴 은자는 모두 구만 냥이올시다.”

굉장한 돈이다. 중원에 사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하고, 입에 올릴 엄두도 내지 못하는 거금이다.

“이 늙은이가 악착같이 모은 돈 또한 그 정도는 됩니다.”

아무도 모르던 비밀 하나가 밝혀졌다. 천 노인의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이제 밝혀졌다.

“살혼부에서 맡긴 돈은 소고에게 돌아갈 겁니다. 이 늙은이, 그 돈을 축낼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모은 돈은… 여기에 내놓겠습니다.”

“…?”

“이 늙은이… 평생을 외롭게 살아왔습니다. 처자식도 없고 친구, 친척도 멀리했습니다. 오직 하나, 정말 사무령이라는 존재가 있는가 알고 싶어서였죠.”

종리추가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등을 돌려 버렸다. 천 노인의 예리한 눈썰미는 종리추의 손이 떨리고 있음을 알아냈다. 붓을 잡는 손이 가늘게 떨렸다.

“이 늙은이에게… 사무령이 정말 존재한다는 확신만 갖게 해주시면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허허! 평생 그럭저럭 산 사람들보다 훨씬 행복할 겁니다. 그래도 한 가지는 추구하는 삶이었으니.”

“불쌍하군.”

“…”

“사무령은 없어. 사무령이 되려면 죽음의 강을 건너야 돼. 죽었다가 되살아날 능력만 있다면… 사무령이 될 수도 있겠지.”

‘이 늙은이가 모은 돈을… 죽었다 되살아나는 데 쓰기 바라네. 난 자네나 소고 중에 사무령이 탄생할 것이라고 확신한다네.’

천 노인은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맛보았다. 소고를 만났을 때도 행복했지만 오늘은 더 행복했다. 지금보다 더한 행복을 맛볼 수 있을까? 사무령이 탄생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거야. 보지 못해도 느낄 수 있을 거야.’


랜덤 이미지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